로만 브리튼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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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제국이 분할한 395년 부터 웨식스 왕국이 설립된 6세기 초반까지 이어진 브리튼 섬의 대 혼란기를 말한다. 이민족들의 왕국들과 로마인들의 후예들이 세운 국가들이 서로 난립하며 전쟁을 벌였다.
2. 몰락
영국 본토는 섬이란 지형에 위치해있기 때문에 제국의 행정력이 약화됨에 따라 자연적으로 분리 독립하게 되었고 제국 중앙 정부도 이를 통치할 힘이 더 이상 없기 때문에 로만 브리튼 속주는 서로마의 붕괴에 따라 브리타니아는 분리 독립하였다.
4세기에 들어선 후 동,서 로마 빠짐없이 발생한 외부의 대대적인 침공은 국방을 갉아먹었고 부패는 제국의 행정을 크게 흔들었다.
395년 제국의 분할 이후 하드리아누스 성벽을 픽트족이 대대적으로 공격했고 히베르니아의 게일인들과 유틀란트 반도의 앵글로색슨족은 해안을 공격하고 무차별적으로 약탈했다. 그런 상황에서 최후의 로마인, 스틸리코장군은 군대를 이끌고 399년 브리타니아를 방어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401년 스틸리코는 알라리크의 침공에 대응하기 위해 변방 속주의 군대를 집결시켰는데 그중 브리타니아의 군단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주둔하던 군대가 완전히 철수하고 무방비로 노출된 브리튼 섬은 주변을 노리는 야만족들의 맛있는 먹잇감으로 전락했다.
게다가 그나마 남아있던 군대마저 407년 황제를 참칭하며 갈리아를 침공한 콘스탄티노스 3세에 의해 해협을 건너갔다가 전멸하는 바람에 침공은 오히려 가속화되었다.
브리타니아는 치안의 공백이 발생해 켈트족인지 확실하지는 않은[2] 픽트족 해적들이 하드리아누스 성벽을 우회해서 브리튼 북동 해안 지대를,[3] 색슨 해적들도 브리튼 동남 해안 지대를, 아일랜드 해적들[4] 은 브리튼 서부 해안 지대를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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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410년에 이르러서 호노리우스황제는 지원을 요청하는 브리타니아 총독의 편지를 무시하며 공식적으로 포기했다.
3. 철수 이후
브리튼인들은 바다 건너 쥬트족 용병 대장 헹기스트, 호르사 형제를 고용해 함께 해적들과 맞서 싸웠으나[5] 곧 쥬트인들이 비옥한 땅 브리튼 섬을 탐내게 되어 본토 북해 연안 일대에서 대군을 호출해 본격적인 정복 전쟁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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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트 지방에 상륙한 주트족이 455년 왕국을 건설한 것을 시작으로 이내 앵글로 색슨족의 대대적인 이주로 많은 곳에 다양한 야만 왕국들이 건국됐다. 주로 해안 지방에 국가들이 설립되었다. 내륙 거점이 없는 관계로 해안 지방이 교류와 보급에 용이했기 때문이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침공 초기 이민족의 대군은 해안선을 따라 침공을 개시했기 때문에 내륙의 브리튼인들은 반격의 초석을 세울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암브로시우스 아우렐리아누스는 전승에 내려오는 인물로 430년대 영국의 구올로프 지방에서 최초의 군사적 승리를 거뒀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전승은 거의 전무하다. 그러한 이야기가 전해지지 않을만큼 전쟁과 약탈이 격심했다는 것으로도 추측 가능하다.
결국 브리튼 인은 야만족의 침공에 시달리며 내륙으로 지속적으로 밀려났다.
4. 칠왕국
455년 헹기스트가 건국한 켄트 왕국을 시작으로 477년 서식스 왕국이 건국 되며 이민족들은 영국 본토에서 계속해서 세를 늘려갔다. 북쪽에서는 픽트족들과 게일인들이 여러 섬들과 스코틀랜드에 정착하면서 노섬브리아 왕국의 전신인 버니시아와 데어라 같은 왕국들을 세웠다.
반면에 브리튼인들은 이민족의 지속적인 침공에 해안지방을 모조리 상실하고 서쪽으로 계속해서 밀려나갔다. 산지가 험한 웨일스와 척박한 둠노니아 지방으로 이동했고 심지어 영국 본토를 탈출해 브르타뉴로 탈출하기도 했다.
전쟁이라기 보단 일방적인 침공에 가까운 100년간의 혼란기는 아서왕전설의 배경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사람들은 5세기 말과 6세기 초에 전승이 생겼다고 추측하고 있다. 영국 본토가 이민족에게 철처히 유린당하자 당시 시민들은 이 혼란을 끝맺을 영웅이 출현하기를 고대했을 수 있다.
브리튼도 그리 호락호락하게 당하지만 않고 있었는데 대중에게도 잘 알려져있는 바돈에서의 전투는 이민족의 침공을 거의 1세기 이상 약화시킨 대승으로 당시 브리튼인들도 치열하게 이민족들을 대상으로 전투를 벌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전승에는 이 당시 브리튼군을 아서왕이 이끌었다고 한다.
그러나 519년 웨식스왕국이 건국되며 동앵글리아가 설립되면서 난립하던 이민족의 세력들도 하나로 뭉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6세기 말에 이르자 본격적으로 왕국이 자리잡게 되면서 7세기에 이르러서 본격적으로 칠왕국 체제가 확립되었다.
[1] 로마제국 철수 이후.[2] 현존하는 모든 당대의 기록들이 브리튼 토착민이 아니라 북해에서 하이랜드 지역으로 상륙한 외부 침략자로 기록한다. 언어도 켈트어인 게일어, 브리튼어와 상이해서 통역 없이는 대화가 안 통했다고 한다. 단지 남아있는 유적 유물들이 워낙 켈트족과 비슷해서 켈트족이라고 보기도 한다.[3] 픽트족과 브리타니아 속주는 국경을 맞대고 있지 않아서 하드리아누스 성벽을 육로로 넘지는 않았다. 픽트족과 로마 사이의 스코틀랜드 로랜드 지역에는 하드리아 이남과 마찬가지로 브리튼족의 일파인 칼레도니족이 살았다.[4] 아일랜드인은 게르만인들의 침입 때 색슨족과 함께 브리튼인들을 공격해 브리튼 서부에 식민지를 세웠다.[5] 중세 영국의 수도자 길다스(Gildas), 넨니우스(Nennius)의 기록에 따르면 켈트 족의 왕 보티게른(Vortigern)이 픽트 족과 싸울 용병으로 색슨 족의 족장 헹기스트(Hengist)와 호르사(Horsa) 형제가 이끄는 색슨족을 브리타니아에 불러들이고 동맹을 공고히 하기 위해 헹기스트의 딸 로웨나(Rowena)와 결혼했으나 헹기스트 형제가 보티게른을 배신하고 켈트 족을 학살하며 색슨 족을 브리타니아에 정착시켰다. 보티게른의 아들들인 보티메르(Vortimer)와 카티게른(Catigern)이 맞서 싸워 호르사를 죽였으나 그들도 헹기스트와 로웨나에게 죽었고 켈트족은 밀려나 색슨족이 브리타니아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