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노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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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플라비우스 호노리우스
(Flavius Honorius)
'''생몰년도'''
384년 9월 9일 ~ 423년 8월 15일
'''재위기간'''
395년 1월 17일 ~ 423년 8월 15일
1. 개요
2. 생애
2.1. 공동 즉위
2.2. 혼란한 재위기간
2.3. 통치
3. 이교(Paganism) 금지 정책
4. 취미
5. 변명
6. 대중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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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52대 황제.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된 후에 서로마 제국의 첫 번째 황제다.

2. 생애



2.1. 공동 즉위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와 함께 공동황제가 되었다가 395년 아버지가 죽자 단독 황제가 되었고, 그의 형 아르카디우스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2.2. 혼란한 재위기간


그의 통치를 살펴보면 너무 안습이라서 할 말이 없다. 그의 치세 자체가 게르만족에게 당하는 관광의 연속이었다. 즉위 직후부터 시작된 반달, 알라니, 고트 및 수에비족의 연속된 침략으로 로마 제국의 국방은 완전히 와해되어 버렸고, 409년에는 멀리 브리타니아에서 SOS 요청을 보냈는데도 군대가 없어서 도저히 보낼 수가 없으니 니들끼리 알아서 하라고 통보까지 해야 할 지경이 되었다. 이후 브리타니아 주둔군은 반란을 일으켜 콘스탄티누스 3세를 멋대로 황제를 추대한 다음 갈리아 지역으로 '철수'해 버렸다. 그러나 콘스탄티우스 3세에 의해 콘스탄티누스 3세의 세력은 격파되었고[1] 이와 같은 수훈으로 콘스탄티우스 3세는 나중에 호노리우스의 여동생과 결혼하였으며, 1년도 안 돼서 병사했지만 어쨌든 공동황제까지 올라갔다. 이 사건으로 실질적으로 서로마 제국은 브리타니아 속주를 상실하였다.[2][3]

2.3. 통치


이런 막장상황에서 그가 한 일은 '''없다'''. 너무 어린 나이에 즉위해서 환관들에게 휘둘렸다고는 하지만 커서도 개념없긴 마찬가지라 즉위 초기부터 자길 지켜주었던 장인이자 매형으로 근친혼[4]스틸리코 장군을 408년에 쳐죽이고, 408년부터 410년까지 서고트의 대왕 알라리크로마를 포위하고 항복을 권유했는데도 자존심 때문에 뻗대다가 결국 410년 로마가 관광당하는 꼴을 맞이해야 했다. 물론 자기는 그동안 황궁이 있던 라벤나에 숨어있었는데, 여차하면 아드리아 해를 통해 동로마로 도망치려고 했다고 한다. 역시 그 형에 그 동생.
이후 알라리크가 병으로 어이없이 죽고 나서 로마 시 재건에 다소나마 힘을 쓰기도 했지만 여전히 통치에 관심없는 건 마찬가지였고, 그나마 활약했던 휘하 장수였던 콘스탄티우스 3세에게 누이 갈라 플라키디아[5]를 시집보내는 한편 공동 황제 자리까지 줘서 그에게 통치와 전쟁을 떠넘긴다. 이후 콘스탄티우스가 급사하자[6] 갈라 플라키디아와 그 자식들을 해치려 들었고 이에 경악한 갈라 플라키디아는 삼촌을 쏙 빼닯은 아들 발렌티니아누스와 딸 호노리아를 데리고 동로마로 도망친다. 흠좀무. 그 뒤 2년도 지나지 않아 이 집안의 유전병 비슷[7]한 감이 있는 부종으로 사망. 향년 만 38세의 나이였다.

3. 이교(Paganism) 금지 정책


일을 뭔가 했다면, 아버지의 기독교 국교화를 계승하는 것이었다. 415년에는 '이교' 사원을 용도변경하는 것 및 이교의 희생제사에 바쳐진 적이 있던 모든 물건은 공적 공간에 발 붙이지 못하게 하는 법을 제정했다. 한 해 뒤 416년에는, 동방의 조카 테오도시우스 2세와 공동으로 제국 전체에서 '이교도'들의 공무담임권을 박탈했다. 423년에는 기존의 '이교' 억제 법들을 재강조했고, 또한 '이교'의식을 거행한 죄로 체포됐던 사람들의 모든 재산을 압수하는 조치를 취했다.

4. 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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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 치는 호노리우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취미가 을 기르는 것이었다고 한다(제정말기를 배경으로 한 역사 소설 《눈 속의 독수리》에도 나온다). 그중 가장 사랑하는 닭에게 로마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알라리크가 로마 성문을 뚫고 들어오자 전령이 로마가 작살났다고 전했다. 이에 호노리우스는 슬피 울며 '우리 닭 로마가 죽다니'라고 했다. 전령이 그게 아니라 도시 로마가 함락당했다고 설명하자, 호노리우스는 안색이 바뀌며 '뭐야 난 또 닭 이야기인 줄 알았네'라며 안도했다는 참으로 찌질스러운 일화가 전해진다. 여담으로 호노리우스는 이때 서로마 제국의 실질적 수도인 라벤나에 있었다.
'참으로 '''닭'''스러운 황제였다'라고 래리 고닉이 쓴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세계사라는 책에서 서술했다. 그리고 이는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에서도 잠깐 언급되었다. 여기서는 형 아르카디우스한테 대들다가 입닥치라는 형의 일갈에 충격을 먹어 진짜 닭을 치는 장면으로 나온다.[8]

5. 변명


하지만 호노리우스도 어느 정도는 억울한 소지가 있는 것이, 좋은 알맹이는 형 아르카디우스가 쏙 빼가고 자신에게는 폐허나 다름없는 서로마를 남겨주었으니 이는 호노리우스가 아니라 호노리우스 아버지라도 별 수 없었다. 물론 테오도시우스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원래는 내전으로 박살난 서로마 지역을 자기가 통치하면서 재건하려고 했는데 병으로 급사한 것이 탈이었다. 통치 초기 그나마 쓸만했던 스틸리코를 거듭 신임했던 것이나, 로마 재건에 힘쓴 면, 그리고 콘스탄티우스 장군을 발탁하는 것 등으로 보아 나름대로 노력하긴 했다는 평가도 있다.
게다가 즉위 초부터 동로마와 서로마가 서로 으르렁대느라 국력을 모을 틈도 없었다. 게르만 출신의 무장들 간의 대립으로만 이야기되지만, 실제는 로마와 밀라노를 중심으로 한 서방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동방 교회간의 주도권 다툼, 로마 원로원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 간의 권위 다툼 등, 그야말로 서로마와 동로마를 양분하던 지배 세력간의 총체적 다툼이 서로마 지역의 제위 참칭을 2차례나 제압했으며 기독교의 권위를 크게 세웠던 등 많은 일을 했고 권위가 높았던 테오도시우스 1세의 죽음과 함께 일시에 터져나온 것. 로마인 이야기 14권에서 무슨 악의 축처럼 묘사되었던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는 테오도시우스 1세가 죽자마자 테오도시우스 1세가 스틸리코에게 호노리우스 뿐만 아니라 아르카디우스까지 맡겼다는 주장을 펼쳤으며[9] 로마 원로원의 실세로 역시 로마인 이야기 14권에서 암브로시우스의 라이벌마냥 묘사되었던 심마쿠스도 스틸리코를 신나게 애널서킹하며 그를 지원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총체적 분열 현상이었던 것. 황제들의 권력이 바닥까지 떨어진 상황에서 호노리우스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상 없었다고 봐야 한다.
너무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오른 데다 이미 몇차례에 걸친 내전으로 서로마 일대의 경제는 막장이고 군대는 와해되고 게르만족은 계속 내려와서 신나게 관광을 태우는 판이었으며 제대로 된 관료층도, 군대도 없었기 때문에, 개인적인 능력이 있었다 해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을 것이다. 동로마 제국과의 결정적인 차이가 이것이다. 동로마 제국은 가장 상황이 안 좋을 시기에도 대규모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유능한 관료 집단이 존재했다. 그렇기 때문에 똑같이 무능한 아르카디우스가 통치했던 동로마 제국은 야만족의 대이동을 버텨낸 것은 물론, 더 나아가 그 이후로도 이슬람, 슬라브족, 불가르족, 페체네그족 등의 침입도 버티고 마케도니아 왕조의 중흥을 이루어내게 되며 중세가 끝날때까지 버티게 된다.
아르카디우스도 무능한 건 매한가지라, 훈족이 쳐들어오고 동고트족이 난리를 치는 와중에도 그저 하는 일은 질질 짜면서 마누라 치마에 매달리는 것 밖에 없었다고 대차게 까였다. 그가 호노리우스처럼 욕먹지 않는 건 빨리 죽은 점(...), 그리고 동로마는 서로마와 같은 굴욕을 당하지 않을 만큼 국력이 강했던 점, 그래서 천 년을 넘게 갔고 그런 천년 제국의 시조격이라서 본인 자체의 치세야 어찌 됐건 일정 정도의 위상을 인정받았던 점[10] 덕택일 뿐이다. 만일 황제 자리를 서로 바꿔놓았다면 라벤나에서 닭을 키우면서 찌질대는 건 아르카디우스였을 것이다. 사실 남자들의 찌질성(호머 심슨 가문의 그것과 흡사한)은 테오도시우스 황제 가문의 종특인데, 테오도시우스 1세의 아버지 테오도시우스 장군과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를 제외한 가문의 거의 모든 남자들이 찌질의 극을 달린다. 반대로 이 가문의 여성들, 대표적으로 호노리우스의 누이 갈라 플라키디아나 아르카디우스의 딸 풀케리아[11]는 각기 아들 발렌티니아누스와 남동생 테오도시우스 2세를 좌지우지하는 흑막이었고, 갈라 플라키디아의 딸인 호노리아는 좀 안 좋은 쪽으로 피가 뜨거웠는지 아틸라에게 '나랑 결혼하면 로마 반쪽이 오빠 것'라는 식으로 작업을 걸었다가 아틸라가 "옳다쿠나" 하고 신나게 쳐들어와서 서로마를 불바다로 만들어버리기도 했다.
최근에는 'Honorius: The Fight for the Roman West AD 395-423'라는 책이 해외 유명 출판사인 Routledge에서 나왔는데, 이 책의 저자는 책 서문(Acknowledgements)에서부터 'It had struck me that Honorius was truly the great survivor of his day. How was this possible if he was, as so many have claimed, such a terrible ruler?'(호노리우스가 자신의 시대에 진정 대단한 생존자였다는 점이 나에게 충격을 주었다. 많은 이들이 주장하듯이 그가 그렇게 끔찍한 통치자였다면 이게 어떻게 가능했겠는가?)라고 하며 호노리우스의 재평가를 주장했다.

6. 대중 매체에서


토탈 워: 아틸라에서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등장한다. 토탈 워 시리즈 특성상 국왕의 트레잇은 중요한데, 주어진 트레잇이라는 게 가히 '''핵폐기물'''에 가깝다. 트레잇은 "무자비함"과 "우유부단한 공격자"인데, 턴 당 영향력 -1, 공격 시 군대의 사기 -3이란 효과를 가진다. 게다가 나이도 17살이라 자연사하려면 수십년을 기다려야 한다. 때문에 유저들은 바로 호노리우스를 암살하든, 자살시키든 해서 황제를 유능한 플라비우스 스틸리코로 바꿔준다. 굳이 호노리우스를 굴리고 싶다면 그나마 영향력 추가 획득 수행원을 붙여주고 총독으로 부임시켜서 써먹는 게 방법인데, 이 경우엔 총독직을 오래 하면 "친절함"이란 트레잇이 붙는다. 전 지역 공공질서를 +1 해주는 좋은 트레잇 같지...만 이게 더 총독을 오래할수록 업그레이드되면서 "나약함"이라는 트레잇이 되고 이때 전 속주 부패도 10%가 늘어나서 수입이 줄어든다. 게다가 경제를 발전시키고 안정화돼서 턴골이 2만 원쯤 되어가면 이 즈음에 "인색함" 트레잇이 붙는데, 초기에는 페널티 없이 모든 건물에서 얻는 부를 %로 늘려주지만, 이것도 나중에 "수전노" 트레잇으로 바뀌고 이러면 부패도 전 지역 +10% 트레잇이 붙는다. 그래서 부패도가 무려 20%나 증가한다.
문명 5의 시나리오 '로마의 몰락'에서 서로마의 지도자로 나온다. 다행히 토탈 워: 아틸라와는 달리 종특에 페널티는 없다. 적 유닛을 처치하면 체력이 50%인 상태로 편입되는데, 적자로 유닛이 해체되고, 불행 페널티가 있으니, 병력 보충에는 도움이 된다. 야만인 고유유닛은 사기적인 고유 승급도 달고 나오니 나쁘지 않다. '''그래도 난이도는 최상이지만.'''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포가튼의 알라리크 캠페인에서 등장한다. 직접적으로 알라리크와 고트족을 상대한 스틸리코는 그다지 부각되지 않고 호노리우스가 악역으로 자리잡았다. 정착지를 원하는 알라리크에게 계속 통수를 때리지만 역사대로 마지막 시나리오에서는 로마가 고트족에게 관광당한다.

사실 호노리우스가 한 일들을 보면 좋게 묘사될 수 없는 게 맞다. 당장 스틸리코를 죽인 것부터가...
대체역사물 로마 디펜스에선 주인공의 등장으로 인한 나비효과로 나름 버프를 받았다. 그 버프란게 주인공이 친위대장으로 부임한 뒤 알라리크가 그리스에서 깽판을 벌이자 주인공에게 들은 표트르 1세의 이야기에 빠진지라 친정을 선포하며 친위대를 이끌고 스틸리코를 지원온다. 그 뒤 스틸리코와 주인공에게 패배한 야만족 부대들을 붙잡는데 성공한데다[12] 그 뒤 일어난 가이누스의 반란에서도 뭘 몰라서(...) 벌벌 떨고만 있던 형 아르카디우스와 달리 평정심을 유지 했고 반란 진압뒤에는 포로로 잡힌 군단병들에게 꿀밤 한 대씩 먹이며 잘못은 루키우스가 했고 너희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며 너그럽게 용서해 주었기에 동방에서 평가가 떡상한다. 물론 반란 때문에 충격에 빠진 형이 칩거해 버린 탓에 업무 지옥에 시달렸지만...[13] 이후로도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을 지원하는 등 원역사와 비교도 안되는 나름 개념찬 행보를 보이고 있어 이 세계관에서는 원역사보단 평가가 좋아질 듯 하다. 동방에서 돌아와서는 이전에 마리우스가 지나가듯이 한 말에 넘어가 연금술에 심취해있다. 녹 제거제인 옥실산을 발견하는 등 나름 성과를 거두지만 말도 안되는 일에 빠져있다고 스틸리코는 탐탁치 않아하고 있다.
[1] 마그누스 막시무스의 사례와 유사하다.[2] 참고로 서로마 제국은 멸망할 때까지 브리타니아 지역을 '공식적으로' 포기한 적은 없다.[3] 그러나 현지에 잔류한 로마군켈트 출신 로마인들이 끈질기게 저항, 앵글로색슨의 정복에는 상당한 시일이 걸렸으며 웨일스와 콘월, 스코틀랜드, 브르타뉴로 이들 중 상당수가 빠져나갔다. 흔히 알려진 아서왕 전설의 배경이 바로 이 시기이다.[4] 테오도시우스 1세의 형인 대(大) 호노리우스는 두 딸만 남겨놓고 일찍 죽었는데, 테오도시우스 1세는 그중 동생이던 세레나를 양녀로 맞이해서 당시 게르만 출신 무장들 중에서는 비교적 신뢰할 만했다는 스틸리코에게 시집보냈다. 이후 스틸리코는 세레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 딸을 차례로 테오도시우스 1세의 아들 호노리우스에게 시집보낸다.[5] 알라리크의 처남 아타울프와 결혼해 자식을 두기도 했지만 둘다 죽었다.[6] 동로마와의 전쟁을 준비하던 중 급사했기 때문에 독살설도 있다.[7] 테오도시우스 1세도 부종으로 사망했다.[8] 다만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에선 드립은 쳤지만 "물론 실제로 저러지는 않았을테고, 과장이 있었을 것이다. 애초에 다 망해가는데 호노리우스보고 어쩌라고"라고 실드쳐준다.[9] 역사가 조시무스의 기록에 따르면 테오도시우스 1세는 게르만의 침공에 맞서 계속 전쟁을 수행해야 했던 서로마 일대를 다스려야 했던 호노리우스만을 무장인 스틸리코에게 맡겼을 뿐, 비교적 안정된 상태였던 동로마의 아르카디우스는 신뢰하던 재상 루피누스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실제로 아르카디우스는 이때 17세로 거의 성년에 근접한 나이였기 때문에 스틸리코가 섭정을 수행할 이유는 희박했다. 다만 조시무스는 엄청난 스틸리코 안티이기 때문에 가감해서 들을 필요는 있다.[10] 아르카디우스의 이름을 딴 아르카디오폴리스가 콘스탄티노플 인근에 있었고 트라키아의 중심지(대한민국으로 따지자면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경기도의 도청소재지 수원 정도의 포지션)였다. 아르카디우스에 대한 평가가 심하게 나빴다면 이런 요지에 이름을 붙여줄 리가 없다.[11] 이 여인은 이후 40년 동안 사실상 동로마의 여황제로 군림하며 상당히 뛰어난 통치력을 보여준다. "'''테오도시우스 대제의 재능은 아들이 아닌 딸에게 전부 갔다'''"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12] 이때 상황이 야만족 패잔병과 추격하던 마리우스의 로마군이 엇갈린데다 호노리우스 주위에는 숫적으로 열세인 친위대 뿐인지라 자칫 호노리우스가 포로로 잡힐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랬던 상황이 호노리우스의 단순함에서 비롯된 패기+사기가 박살나있던데다 라틴어 구사자도 없던 야만족이라는 기막힌 콜라보가 이루어져 수만의 야만족이 호노리우스 앞에 일제히 무릎꿇는 대사건으로 끝난것이다.[13] 물론 본인 직급이 황제인만큼 밑의 관료진에게 짬처리하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