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 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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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y Ross Perot
1. 개요
2. 경력
2.1. 사업
2.2. 정치
2.2.1. 소속 정당
2.2.2. 정치 이력
2.3. 군사
3. 여담


1. 개요


1930. 06. 27 ~ 2019. 07. 09
미국의 사업가이자 정치가. 1992년과 1996년 대통령 선거에 나섰으나 각각 빌 클린턴에게 패배하였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제3후보로써 10% 이상의 득표를 확보한 마지막 인물이다. 2019년 7월 9일 항년 89세로 별세하였다.

2. 경력


텍사스 주 텍사카나(Texarkana) 태생이다.
1947~1949년 텍사르카나 단과대학(Texarkana Junior College)에서 수학 후 아나폴리스미 해군사관학교에 편입, 미합중국 해군에서 1957년까지 해군 장교로 복무했다. 최종 계급은 대위다.

2.1. 사업


주로 IT 산업에 종사했으며 IBM에서 일하다가 나와 Electronic Data Systems(EDS)를 차려서 크게 성장시켰다. EDS가 GM에 인수된 뒤에 퇴사하였으며, 그 뒤에 스티브 잡스가 세운 NeXT에 출자하기도 했다.

2.2. 정치


1992년 TV쇼 래리 킹 라이브에서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공약은 균형 재정, 총기규제 반대, 보호 무역 등이었다. 한때 높은 지지율을 받았지만 미국 50개 모든 주(州)에서 후보 등록이 어렵다고 생각해서 출마를 취소했다가, 지지자들이 자발적으로 등록하여 다시 출마하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지지자를 빌 클린턴에게 거의 빼앗겼다.
1992년 대선에는 18.87%의 득표율을 보였으며, 선거인단은 1명도 확보하지 못했다.[1]
1995년 ‘미국 개혁당’을 창설하고 1996년에 다시 대선에 도전하였지만, 이전보다 낮은 8.40%의 득표율로 다시 낙선했다.
의도한 바인지는 모르겠으나 빌 클린턴의 가장 큰 정치적 은인이라고도 볼 수 있다. 2000년, 2004년, 2008년, 2012년 최근 4차례 대선을 보면 공화당이 가장 발린 2008년 대선 오바마 vs 맥케인 때도 공화당 후보 맥케인은 45.7%를 득표했는데, 92년 공화당 부시는 37.5%, 96년 밥 돌은 40.7%를 얻는데 그쳤기 때문. 반면에 클린턴은 92년에 43.0% 96년에 49.2%를 얻으며 당선했다.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미국 개혁당에서 패트릭 뷰캐넌을 후보로 내놓았지만,[2] 이전보다 더욱 낮은(…) 득표율을 보였으며 미국 녹색당의 랄프 네이더에게 밀려 제4위로 추락했다. 로스 페로는 이 책임을 지고 개혁당을 떠났다.

2.2.1.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92 - 1995
정계 입문
'''개혁당''']]
1995 - 2000
창당

2000 - ?
2000년 대통령 선거 결과를 책임지고 탈당 후 입당
정계 은퇴

? - 2019
탈당

2.2.2. 정치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필요시 선거인단)'''
'''당선 여부'''
'''비고'''
1992
미국 대통령 선거

19,743,821 (18.87%, 0명)
낙선 (3위)

1996
미국 대통령 선거
'''개혁당''']]
8,085,294 (8.40%, 0명)
낙선 (3위)


2.3. 군사


위의 것들에 비하면 덜 알려진 것이지만, 그의 정치적 영향력이 주목받는 이유 중에는 군사분야와 관계된 일화들이 존재한다. 가령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으로 인해 자사 직원들이 고립되었을 때 구출한 것이라든지. 카터와 레이건에게서 백안시된 미 특수전 전력들을 위로한 인물이란 점이 위 선거 결과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3. 여담


2019년 4월 자료에 따르면 재산은 $ 4.1 Billion 으로 도널드 트럼프보다 1조가 더 많았다. 그 아들인 로스 페로 주니어도 2조를 가지고 있다.
대한민국 입양아 출신 미국공군사관학교 생도 출신이자, 골수이식 사연으로 잘 알려진 성덕 바우만이 공사 졸업 후 그의 회사에 취직해서 화제가 되었다.

[1] 그나마 선거인단 확보에 가장 근접했던 메인 2구에서도 약 33%의 득표율을 얻어 빌 클린턴에 5%차로 패했다.(참고로 메인 전체의 투표수를 합치면 당시 미 대선 2위였던 조지 H. W. 부시를 근소하게 앞서 메인 전체구에도 2위를 차지했다.)[2] 이때 같이 경선 후보로 나온 사람 중 한 명이 도널드 트럼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