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저 캐즈먼트

 


로저 케이스먼트(Roger Casement)
1864년 9월 1일 ~ 1916년 8월 3일
1. 개요
2. 근대 최초의 인권조사관
3. 아일랜드 독립 운동
4. 사후
5. 일기 논란
6. 어록
7. 기타


1. 개요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드 2세페루의 식민지 회사, 페루 아마존 컴퍼니의 콩고인과 페루 원주민에 대한 학살과 인륜범죄를 폭로한 20세기 인권조사의 아버지이자 아일랜드 독립운동가.

2. 근대 최초의 인권조사관


로저 케이스먼트는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외교관으로, 브라질과 아프리카 여러 식민지국가에서 근무하였다. 1900년대 초 콩고의 참혹한 상황이 방문 사업가와 현지 선교가들에 의해 조금씩 폭로되며 파장을 일으키자 영국 정부는 정부 차원의 조사 필요성을 느꼈고, 이에 케이스먼트를 파견하여 조사를 명한다.
1905년 케이스먼트는 콩고 현지를 돌아다니며 사진과 증거, 탄원서를 모아 영국으로 귀국하여 외무부에 보고서를 올린다. 이 ‘케이스먼트 보고서’는 영국 외무부의 전언과 함께 각 유럽국가들에 송달되어 콩고의 인륜범죄와 학살을 자행한 레오폴트2세에 큰 압력으로 작용하게 되며 벨기에 정부가 콩고를 국왕소유지에서 정부 식민지로 전환하게 만든다.
이후에도 그는 페루로 파견되어 현지 식민지 회사인 페루 아마존 컴퍼니의 원주민 강제노역과 인륜범죄를 조사해 보고서를 만들었고, 법원의 회사 폐쇄 판결이 나오는데 기여했다.
로저 케이스먼트는 인권조사에 대한 공로로 1911년 기사작위를 받았으며, 세인트마이클앤드세인트조지 훈장도 받는다.
여기까지는 영국의 영웅으로 기록되었을 터이나...

3. 아일랜드 독립 운동


로저 케이스먼트는 1912년 돌연 외교관직에서 사퇴를 한다. 콩고 및 페루에서의 경험과 아일랜드 젊은이들이 강제 징용되었던 보어 전쟁을 겪고 열강의 제국주의를 혐오하게 된 것. 이미 1906년부터 그는 아일랜드 독립운동가들과 접촉을 해오고 있었다.
그는 1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자 비밀리에 영국의 적국인 독일을 지지하고 나선다. 미국 뉴욕에서 독일 외교관들을 만나 전선 분산에 대해서 토의하기도 했었는데, 영국의 패전이 아일랜드 독립에 도움이 될 것이라 믿었기 때문. 실제로 그는 독일 베를린을 방문해[1] 독일은 아일랜드를 침략하지 않으며 독립을 지지한다는 협정서까지 받아낸다. 그는 아일랜드 뿐만 아니라 인도의 독립도 지지하였으며, 인도의 독립운동가들과 독일에서 만남을 주선하기도 하였다.
케이스먼트는 독일에 체류하면서 전쟁 초기에 생포된 영국군들 중 아일랜드 출신 전쟁 포로 2천여명을 규합해 아일랜드로 데려가 독립군을 창설하려고 하였으나, 포로 다수가 영국이 승리하면 반역군으로 지목되어 사형될 것이라며 협력을 거부하였다.[2]이에 그는 독일로부터 무기를 지원받아 아일랜드로 밀수하기로 결정한다. 특히 부활절 봉기에 대한 계획이 세워지면서 봉기를 워한 무기 조달 방법을 더욱 강구하게 된다. 하지만 노르웨이의 영국 공사관이 계획을 알아채 영국 정부에 이를 알렸고, 독일 잠수함으로 독일제 무기를 밀수하려던 케이스먼트는 1916년 4월에 영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아일랜드 독립파 레지스탕스는 케이스먼트의 체포 직후 그를 구출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으나 봉기 이전에 눈에 띌 행동을 금하라는 지도부 명령에 따라 계획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체포된지 3일 뒤 아일랜드에서 부활절 봉기가 일어났고, 영국 정부는 독립파에 대한 본보기적 처형의 필요성을 느껴, 케이스먼트를 반역죄로 기소, 사형판결을 내린다.
코난 도일을 포함한 영국의 외교계, 정치계 유명 인사들은 로저 케이스먼트 감형운동을 진행하였다. 특히 그의 인도주의적 치적이 여론의 반발감을 불러일으킨 것. 이에 영국 정부는 당대 반동성애적 사회 분위기를 이용한 여론전의 일환으로 케이스먼트가 동성애자임을 증명하는 사적 일기를 공개하기에 이른다. 이 일기의 진위여부는 이후 100여년간 논란거리가 된다.
결국 여론이 성공적으로 분열되자 당국은 6월 29일 케이스먼트의 작위와 훈장을 무효화하고 로저 케이스먼트는 1916년 8월 3일 51세의 나이로 런던의 감옥(Pentonvile Prison)에서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4. 사후


케이스먼트는 더블린 출신의 동시대 아일랜드의 지배 계층으로 군림하던 개신교 영국계 아이리시(Anglo-Irish) 태생이었으나, 한 세대 이전 찰스 스튜어트 파넬, 더 거슬러 올라가면 통일 아일랜드당처럼 계급적 특권을 부정하고 아일랜드 민족주의 독립 운동에 투신했다.
특권층으로 태어나 성공 가도를 달릴 만한 능력과 배경이 충분히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류애적 정의감 하나만으로 모든 걸 버리고 인도주의자이자 혁명가의 길을 걸었던 이 의인은, 훗날 아일랜드가 독립하면서 그 사회 분위기를 보수적이고 근엄한 가톨릭 교회가 주도함에 따라 동성애자였다는 이유로 제대로 대접 받지 못하다가 1965년이 되어서야 시신이 아일랜드로 돌아 올 수 있었다. 영국 정부는 그의 기사작위를 복권하여 로저 케이스먼트 경(Sir Roger Casement)이라 표기하긴 하는데, 아일랜드 정부 입장에서는 아일랜드 공화주의 독립운동가에게 영국 왕실이 부여한 작위를 붙일 이유가 있냐는 입장.
1965년 시신을 받은 아일랜드 정부는 제대로된 국장을 치렀으며, 약 50만명의 더블린 시민이 모여 그의 장례행렬을 지켜보았다. 그는 아일랜드의 현충원에 해당하는 공화주의자 묘지에 뭍혔으며, 장례식에는 부활절 봉기의 살아남은 지도자들과 아일랜드 대통령 등 3만여명이 참석하였다.
21세기들어 헌법개정 주민투표를 통한 압도적 찬성으로 동성결혼도 허용되는 등 아일랜드는 성소수자 인권에 대해 전향적인 사회가 되었기 때문에, 그가 동성애자였다는 사실은 더 이상 논란거리가 되고 있지 않다. 과거라면 잘 거론되지도 않았을 그의 성적지향이, 이제는 그의 인도주의적 업적, 독립운동 활동과 더불어 자부심으로 더 강조되고 있다.

5. 일기 논란


로저 케이스먼트는 콩고와 페루에 체류하며 조사하던 일과 그 때의 삶을 기록한 일기를 남겼다. 케이스먼트의 콩고 및 페루 보고서가 훌륭한 평가를 받으며, 자신의 일기를 저널형태로 대중에 공개한적이 있으나, 그가 반역죄로 체포되면서 여론전의 일환으로 영국 당국이 또 다른 일기를 공개하면서, 논란이된다. 전자는 화이트 다이어리, 후자는 블랙 다이어리라 불리게 된다. 블랙 다이어리는 화이트 다이어리 버전과 같은 날 같은 사건들을 다루면서도 타인에 대한 솔직한 평가가 담겨있다거나 자신의 개인적인 삶이 담겨있다.
특히 그가 동성애자임이 드러나는 불랙 다이어리는 로저 케이스먼트가 반역죄 재판을 받던 시기에 영국 당국에 의해 공개됨에 따라 이를 진품을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특히 당시 반동성애적 교리가 강했던 아일랜드에서 로저 케이스먼트가 독립운동의 순교자로 인식되는 걸 막기 위해 영국이 조작한 가짜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그러나 21세기들어 필체감식과 잉크 및 종이 성분을 분석해 따라 진품임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6. 어록


"I had accepted Imperialism, British rule was to be extended all over the world at all costs because it was best for everyone under the sun and those who opposed this extension ought to be rightly ‘smashed’…Well the Boer War gave me qualms at the end – the concentrations camps bigger ones at the end, and finally when up in the Congo forests where I found Leopold I [King of Belgium] I also found myself, the incorrigible Irishman!

나는 제국주의를 받아들였었다, 영국의 지배가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전 세계로 확산되어야 했던 이유는 그것이 태양 아래의 사람들, 그리고 그 확산에 반대하여 “박살난” 사람들, 모두에게 최선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보어 전쟁이 내게 보여준 거리낌 – 그 끝에 위치해 있던 거대한 강제 수용소들, 마지막에 콩고 숲에서 발견한 레오폴드 2세 (벨기에의 왕), 그리고 찾은 나 자신, 구제할 수 없는 아일랜드인!

출처
보어 전쟁이 끝난 후

7. 기타


  • 황당하기 짝이 없게도 종종 인터넷에서 그가 신체가 절단된 콩고인과 함께 찍은 사진에 해당 콩고인의 손과 팔등을 절단한 악랄한 백인이라는 설명으로 표기되곤 한다. 그는 콩고의 인권조사를 하면서 증거로서의 사진을 찍기 위해 피해자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것 뿐이다. 그래야 다른 사람이 찍은 걸 도용했다던지, 콩고가 아닌 곳에서 찍은 거라던지, 조작한거라던지 등의 주장을 못할테니.
  • 상당한 장신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진들을 보면 주변 다른 백인들과 비교해도 머리하나는 더 크다.

'''There are times, young fellah, when every one of us must make a stand for human right and justice, or you never feel clean again.''' “그럴 때가 있네, 젊은이, 우리 모두가 반드시 인권과 정의를 위해 일어서야 할 때 말이네, 그렇지 않으면 다시는 자신이 결백하다고 느끼지 못 할 테니” .

Lord John Roxton in The Lost World by Sir Arthur Conan Doyle


[1] 1차대전이 개전하면서 영국과 독일은 당연히 단교했고, 캐즈먼트는 신분을 위장해서 중립국이었던 노르웨이를 경유해서 독일로 입국했다. 그런데 노르웨이에서 캐즈먼트의 움직임은 현지의 영국공사관에 포착되었고 관련 첩보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2] 포로 중 60명만이 찬성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