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봉기

 



'''부활절 봉기'''
Easter Rising
Éirí Amach na Cásca

'''기간'''
1916년 4월 24일~29일
'''장소'''
아일랜드, 더블린
'''결과'''
반란군의 무조건 항복[1], 반란 주동자 처형
'''피해 규모'''
사망자 수: 485명(민간인: 260명)[2]
'''교전국'''
[image]'''반란군'''
[image]'''영국'''
<^|1>아일랜드 의용군[3]
아일랜드 시민군
피어너 에런
아일랜드 여성평의회
하이버니안 라이플즈
<^|1>영국군
1. 개요
2. 배경
3. 봉기
3.2. 그러나
4. 여담
5. 참고 문서

[image]
봉기 지도자 패트릭 피어스가 봉기 세력의 핵심 거점이었던 더블린 중앙우체국에서 낭독한 독립선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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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16년 부활절 기간에 아일랜드인들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일으킨 무력항쟁. 4월 24일부터 4월 30일까지 대략 일주일 정도 진행됐으며, 압도적으로 우세한 영국의 화력에 의하여 결국 분쇄된다. 하지만 이 사건을 통해 아일랜드의 무장 독립 투쟁이 활발해지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마이클 콜린스가 이끄는 IRA의 끈질긴 항쟁 끝에 1923년 독립[4]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부활절 봉기는 아일랜드 독립의 도화선이었다고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2. 배경


12세기 무렵부터 끊임없이 영국의 침략을 받았던 아일랜드는 1800년 영국의 일부로 합방된다. 이후 아일랜드 대기근과 같은 사태를 거치면서 아일랜드 내의 반영 감정은 시간이 갈수록 커져 갔고 독립을 위한 움직임도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독립(자치권)운동의 방향은 폭력을 수반하느냐 안하느냐는 점에 따라 크게 두 노선으로 분할된다. 하나는 '청년 아일랜드 운동'이라는 명칭이 붙은 노선으로 대체적으로는 비폭력을 택하고[5] 의회로 진출하여 정치세력을 확보한 이후 독립(자치)를 획득하자는 것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무장 투쟁 노선으로 이 세력을 주도한 것은 '아일랜드 공화주의 형제단', 혹은 신페인 등의 단체였다.
이 중에서 청년 아일랜드 운동 세력은 19세기 중후반부터 영국 자유당과의 연합을 통하여 영국 의회로 진출하는데 성공하기 시작했고, 19세기 후반이 되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성장하게 된다.[6] 그리고 당시 수상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 역시 아일랜드에게 우호적이었던 입장이었기에 1886년 자치법을 상정하지만 하원에서 부결을 먹었다.[7]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1893년 한번 더 자치법을 상정하고 이번에는 통과되나 싶었는데 이번에는 상원이 거부해버렸다. 하지만 의지의 아일랜드인들은 포기하지 않고 1912년에 마침내 자치법을 통과시킨다.[8]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얼스터 지역에 거주하던 성공회 신자들은 또 자기들 나름대로 '우리는 대영제국의 충실한 신하인데 자치 싫음'을 시전하며 자치를 저지하기 위해 멋대로 군사 세력을 조직한다. 또 아일랜드 공화주의 형제단을 비롯한 무장 투쟁 세력은 자기들 나름대로, '자치 따위론 만족 못한다. 독립할 때까지!'라는 마음을 가지고 완전히 영국의 영향에서 벗어난 독립 에이레 공화국을 세우려는 계획을 세운다.

3. 봉기


이런 상황에서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자치권의 시행은 전쟁 종료 후로 연기됐고, 무장투쟁 세력들에게 이러한 상황은 말그대로 절호의 찬스.[9] 마침내 1916년 4월 24일 1,000여명 내외의 독립군들이 GPO(중앙우체국)을 비롯한 더블린 시내의 주요 거점(더블린 캐슬 및 군병원 = 현재는 IMMA로 현대 미술관으로 다시 개장함.)을 습격하면서 부활절 봉기가 시작된다. 당일에 더블린 내부의 주요 거점들을 거의 다 장악하고, 지도자 패트릭 피어스가 시민들 앞에서 아일랜드 공화국을 선언하면서 뭔가 되는가 싶..었...는..데

3.1. 망했어요


In order to prevent the further slaughter of Dublin citizens, and in the hope of saving the lives of our followers now surrounded and hopelessly outnumbered, the members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present at headquarters have agreed to an unconditional surrender, and the commandants of the various districts in the City and County will order their commands to lay down arms.

이후에 벌어질 더블린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학살을 막기위해 그리고 압도적으로 열세이고 포위된 추종자들을 구출할 희망아래 현 본부의 임시정부원들은 무조건 항복에 동의하며 도시와 카운티에 있는 여러 지역의 사령관들이 무장을 해제하라는 명령을 내릴 것입니다.

패트릭 피어스의 항복문서, 1916년 4월 29일 토요일

하지만 사전에 약속됐던 독일의 무기 제공이 무산[10]됐던데다가, 봉기에 참여한 각종 정파들의 이해관계가 엇갈린 탓에 명령이 뒤죽박죽이어서 안그래도 부족한 병력이 더 엉망으로 운용된다[11]. 덕분에 봉기세력은 더블린을 장악하기에 급급. 이와는 반대로 영국군은 이미 1차대전이 2년 진행되던 상황인만큼 병력 운용이 거의 만렙의 경지였다.[13] 결정적으로 더블린의 시민들 역시 전반적으로 봉기 세력들에게 냉담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봉기세력에게 온갖 욕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 결국 영국군이 본격적으로 진압을 시작한 이후 봉기 세력은 무너지기 시작해 4월 30일 더블린 중앙 우체국이 영국군 포병대에게 신나게 맹폭당하는 것으로 봉기는 실패로 끝나고 만다.

3.2. 그러나


[image]
1918년 영국 총선(아일랜드) 결과[14]
진압 이후 영국군은 아일랜드의 무장투쟁 세력을 아예 뿌리채 뽑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패트릭 피어스를 비롯한 독립군의 주요 우두머리들은 그대로 총살됐고[15], 수천명의 단순 가담자들도 투옥된 것은 당연지사.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 중 제임스 코널리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봉기 도중 다리에 부상을 입어 제대로 설 수 없었다. 그러자 영국군은 코널리를 의자에 묶어서 총살시켰다. 이정도로 무자비한 대응은 주동자들에 대한 동정심을 불러 일으켰는데, 프랜시스 쉬이 스케핑턴[16]을 비롯한 일부 지식인들이 봉기 기간 중에 영국군에게 학살된 뒤 암매장되었다는 사실까지 밝혀지자, 아일랜드인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이후 부활절 봉기를 주도한 세력은 아일랜드의 영웅으로 추앙받게 된다.
1918년 영국 총선에서 아일랜드 의석의 대부분을 신페인이 가져갔고 독립선언 후 아일랜드 독립전쟁으로 이어진다.

4. 여담


  • 신페인이 아일랜드 독립 운동의 전면에 나서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이다. 사실 신페인은 이 봉기 당시 그냥 단순 참가 세력에 불과했는데, 이들을 봉기의 주도세력이라고 오해한 영국측에 의해 아일랜드 민중 사이에서 이름이 크게 퍼져나갔고, 마침내 독립 운동을 이끄는 핵심세력으로 자리잡게 된 것.[17]
  • 이몬 데 발레라마이클 콜린스도 이 봉기에 참여했다가 체포된다. 하지만 데 발레라는 미국 시민권자여서 무턱대고 죽여버리면 외교 문제로 번질 가능성이 높았고 콜린스는 이 때 당시에는 그냥 단순가담자였던지라 영국이 그냥 투옥하는 정도로 끝내버렸고, 출옥 이후 이들은 아일랜드의 독립 운동을 이끄는 두 거목으로 성장하게 된다.
  • 당시 처형당한 독립운동가 중에 로저 캐즈먼트라는 인물이 있는데, 이 사람은 레오폴드 2세콩고에서 저지른 만행을 전세계에 알리는데 매우 큰 기여를 한 사람으로 당시 인권조사에 대한 공로로 영국정부로부터 기사작위와 세인트마이클앤드세인트조지 훈장을 받았으나, 아일랜드 독립운동으로 인해 취소된다.
  • WWE NXT의 아일랜드인 레슬러 핀 밸러의 피니쉬 1916[18]은 부활절 봉기가 일어난 년도에서 따왔다고 한다.

5. 참고 문서


[1] 참고[2] 참고 자료[3] 아일랜드 공화국 형제단은 비밀결사단체였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이름을 걸지 않고 아일랜드 의용군과 같은 무장단체를 조직해서 은밀하게 지원하는 형태로 주도했다. 아일랜드 의용군은 아일랜드 공화국 형제단 뿐만 아니라 신페인 당원 등도 껴있었다.[4] 명목상으로는 자치국으로 여전히 영국의 군주에게 충성을 맹세해야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독립을 허용했다고 보아야 한다. 아일랜드가 명목상으로도 독립을 선언한 것은 1930년대의 이야기.[5] 대체적이라고 했듯이 청년 아일랜드 운동 내부의 몇몇 분파들은 폭력을 사용할 것을 주장했고 실제로 행사하기도 했다. [6] 여담이지만 이들이 주로 사용했던 전략이 필리버스터. [7] 야당이었던 보수당이야 당연히 반대했고 심지어 여당 자유당 내에서조차 반란표가 속출했다.[8] 사실 이번에도 상원에서는 부결됐지만 20세기에 접어든 이후로 '하원이 결정하면 상원은 무조건 따른다'라는 법안이 통과됐기 때문에 간신히 실행에 옮겨질 수 있었다.[9] 물론 영국 입장에서 보자면야 전쟁 중에 뒷통수를 때린 배신행위겠지만, 애초에 아일랜드 입장에서는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도저히 1대1로 승부가 안되다보니....[10] 봉기 이틀전에 밀반입해오다가 영국측에게 딱 걸리고 만다.[11] 반란군 측은 자신들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을 만 명 정도로 추산했는데, 사학자들의 연구결과 부활절 봉기 내내 동원된 아일랜드 측 군사력이 3,000명이 채 안됐다고 한다(...).[12] 영국 드라마 아워월드워 2화에서 내용을 알 수 있고 그외 이곳을 참조할 것[13] 1916년이 되자 그전까지 영국은 자원병으로 충당했던 병력보충[12]대신 본격적인 징집제를 실시하여 수백만명의 군대를 굴리고 있었다. 또한 이 군대를 유지시키는데 필요한 행정력과 병참력을 감안하면..[14] 선거 이후 독립선언으로 등장한 1919년도 의회가 바로 아일랜드 제1대 하원 의회이다.[15] 약 100여명 정도가 사형판결을 받았다. 이 중 실제로 집행된 사람은 15명 정도이고 나머지는 종신형으로 감형.[16] 비폭력주의자였으며 봉기 기간 동안 봉기자들과 영국을 모두 비판했었다.[17] 맥스웰 장군은 위험한 신페인을 체포해야 한다는 명령을 내린 적이 있다.[18] 신일본 프로레슬링에서는 블러디 선데이라는 이름으로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