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샤를 세자르 르 텔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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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군인. 데스트레 백작.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에서 활약했다.
2. 일생
2.1. 초기 경력
데스트레 백작은 미첼 프랑수아 르 텔리어와 마리 안느 데스트레의 아들이며 루이 14세 시기 전쟁 장관이었던 루보아의 손자였다. 당시 그의 작위는 루부아 후작이었다. 1697년 5월 4일, 그는 2살의 나이로 몰타 훈장을 수여받고 기사 작위를 받았다. 1716년 데스트레 백작은 앙주 기병대 생도병으로 입대했고 1717년 3월 8일 앙주 기병대 지휘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그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 참전하여 퐁타라비, 생 세바스티안 포위전에 참가했다.
이 무렵 폴란드 왕위를 잃은 스타니스와프 1세는 프랑스의 보호를 받으며 바이센부르크에 자리를 잡았다. 이때 데스트레 백작은 휘하 연대를 이끌고 스타니스와프 1세를 호위했다. 1722년 4월 19일, 그는 스타니슬라프 1세의 근위대 대령이 되었으며 쿠르탱보 후작의 작위를 수여받았다. 1733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자, 데스트레 백작은 10월 28일 켈 공방전에 참가해 켈 공략에 기여했고 1734년 5월 4일 엘링겐 전투에 참가했으며, 그해 7월 18일에는 필립스부르크를 함락시키는 데 기여했고 7월 23일에는 보름스를 함락시켰다.
1735년 4월 1일, 데스트레 백작은 프랑스군 소장에 임명되었다. 그후 1739년 5월 마지막 데스트레 백작이 사망하자, 그는 쿠르탱보 후작을 버리고 어머니의 혈통을 따라 데스트레 백작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740년 4월 22일에는 기병대 감찰관에 임명되어 프랑스 기병대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힘을 기울였다.
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한 후, 데스트레 백작은 1741년 보헤미아와 바이에른의 프랑스군에서 복무했고 모리스 드 삭스 원수와 함께 에거 요새 봉쇄를 맡았다. 이후 그는 필르젠을 중심으로 4개의 부대로 구성된 군단을 지휘하다가 1742년 프랑스군이 보헤미아에서 대거 철수하면서 위험에 처했다. 그는 적의 추격을 어렵사리 뿌리치고 프라하까지 후퇴한 뒤 에거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입수받고 적지를 가로질러 에거를 점령하였다. 이후 마일부아 백작 이브 마리 데마레의 군단과 합세하라는 지시를 받은 데스트레 백작은 에거를 떠나 바이에른으로 진군하여 1743년 1월 마일부아 백작과 합세한 뒤 프랑스로 귀환했다.
1743년 5월, 데스트레 백작은 라인강 전선의 프랑스군에 가담하여 오스트리아군과 맞서 싸웠고 1744년 5월 2일 중장으로 진급해 플랑드르 전선의 프랑스군을 지휘했다. 이후 모리스 드 삭스 원수가 쿠르트레에 진을 치고 있는 동안, 데스트레 백작은 릴 근방에 진영을 갖춘 8만에 달하는 영국-하노버-오스트리아 연합군에 맞서 대치했다. 그는 모뷰즈, 발랑시엔, 드웨에서 적과 접전을 치뤄서 적이 더이상 진군하지 못하게 했다.
1745년 5월 11일, 데스트레 백작은 퐁테노이 전투에서 탁월한 활약을 선보였다. 그는 기병대의 선두에 서서 영국군을 교란했고 패주하는 연합군을 추격해 4천 명을 사로잡았다. 그는 그 과정에서 자신의 말이 죽어 낙마하기도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용맹을 떨쳐 세간의 찬사를 받았다. 이후 데스트레 백작은 프랑스군이 아트를 포위해 10월 8일 함락시키는 동안 정찰대를 이끌고 연합군의 동태를 감시했다.
1746년 1월 1일, 데스트레 백작은 오르트르 뒤 생에스프리트의 기사가 되었다. 그 후 그는 플랑다르 전선에서 24개 보병 대대와 25개 기병 대대를 이끌었다. 그해 5월, 그는 휘하 군단을 이끌고 연합군을 브레다에서 물러나게 했으며 6월 7일부터 11일까지 몽스 포위전에 가담해 몽스 요새를 공략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그는 12개 보병 대대와 4개 기병대를 이끌고 샤를루아 공방전을 지휘해 8월 2일 함락시켰고 10월 11일 로쿠스 전투에서 모리스 드 삭스 원수의 지휘하에 다시 한 번 용맹을 떨쳐 연합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747년 7월 2일, 데스트레 백작은 라우펠드 전투에서 연합군의 측면을 성공적으로 공략해 모리스 드 삭스 원수의 승리에 기여했다. 이후 그는 야르 강과 메우스 강 사이의 지역에 주둔한 프랑스 예비군을 지휘했고 전쟁이 종식된 후 오니스와 라로셀의 주지사로 발탁되었다. 1748년 플랑다르로 돌아온 데스트레 백작은 5월 7일 마스트레히트 요새 공방전에 참가해 프랑스군이 요새를 공략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 후 전쟁은 종식되었고, 데스트레 백작은 노르망디 해안과 르 하브르의 주지사를 맡았다.
2.3. 7년 전쟁
7년 전쟁이 발발한 지 몇달 후인 1757년 2월 24일, 데스트레 백작은 프랑스군 원수로 승진했다. 이후 그는 하노버 침공 작전에 투입된 프랑스군의 최고 사령관으로 부임해 베저강을 건너 5월 25일에 뮌스터에 사령부를 설치했다. 7월 26일, 데스트레 백작은 컴벌랜드 공작 윌리엄 오거스터스가 지휘하는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을 상대로 하스텐벡 전투에서 격돌했다. 이 전투에서 그는 승리를 거뒀으나 자신이 패배한 것으로 오판해 적을 추격하지 않는 우를 범했다. 그래도 그는 승리를 거두었고 8월 3일 민덴을 함락시키고 대부분의 하노버 영토를 점거했다.
그러나 데스트레 백작은 퐁파두르 부인과 사이가 좋지 않았기에 퐁파두르 부인과 그녀의 측근들의 모함에 시달렸고 결국 8월 3일 지휘권을 박탈당하고 리슐리외 공작 루이 프랑수아 아르망 드 비뉴르 뒤 플레시스와 교체되었다. 그 후 리슐리외 공작은 하노버에서 대대적인 약탈을 자행해 하노버 인들의 반감을 샀고, 결국 로스바흐 전투에서 대패한 프랑스군이 본국으로 퇴각하기 시작했을 때 그 역시 연합군의 공세에 별다른 저항도 못해보고 패주하면서 직책을 박탈당하고 클레르몽 백작 루이 드 부르봉-콩데로 교체되었다.
1758년 7월 2일 데스트레 백작은 국무장관이 되었고 1759년 8월 1일 민덴 전투에서 연합군에게 패한 콩타드 후작을 돕기 위해 독일 전선에 복귀했다. 1762년, 데스트레 백작은 수비즈 공작 샤를 드 로앙과 함께 프랑스군 사령관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두 프랑스 사령관은 그해 6월 24일 빌헴스타흘 전투에서 연합군 총사령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페르디난트에게 패배했다.
2.4. 말년
데스트레 백작은 전쟁이 끝난 후 비밀 평의회의 일원으로서 활동했다. 그러다가 1771년 2월 2일 숨을 거두니 향년 76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