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종옥
1. 개요
1916년 1월 10일 ~ 1999년 9월 23일
북한의 정치인. 국가 부주석, 정무원 총리,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2. 생애
1916년 1월 10일, 함경북도 성진군, 현재의 김책시에서 출생했다.[1]
김일성 시대의 잘 나가던 여러 엘리트들과 달리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만주국의 하얼빈 공대에 진학했다. 1940년 하얼빈 공대를 졸업한 후 공산주의 활동에 참여했으며 1944년 성진에서 적우사(赤友社)를 조직하여 지하활동을 전개했으나 뚜렷한 성과를 남기진 못했다. 해방 후 1946년 성진 배영중학교에서 교무주임로 일하다가 1948년 청진방직공장 지배인이 되었으나,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기사장 추천을 잘못한 것 때문에 친일파로 몰려서 곤란한 처지에 놓였으나 김정숙이 탄원을 받고 김일성과 리종옥의 만남을 주선하여 오해를 풀고, 일제시대의 항일 이력이 입증이 되면서 입당을 시켰다 카더라.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 1기 대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대의원에 당선되었다. 1949년 10월 내각 산업성 중공업 국장에 임명되면서 정계에 입문했고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산업성 부상으로 승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중공업부장을 맡게 되었으며 6.25 전쟁 발발 후 산업성 대표로 서울에 파견되 리승기를 비롯하여 남한의 과학계 엘리트들을 대거 북한으로 데려갔고, 조선왕조실록 적성산본을 기차 째로 노획해서 북으로 보낸 것도 그로 알려져 있다. 1951년 12월 경공업상에 임명되면서 북한 정계에서 주목받는 테크노크라트가 되었다.
1956년 1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공업부장, 국가계획위원장에 임명되었으며, 4월에 개최된 조선로동당 제3차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1957년 8월 최고인민회의 2기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중앙위원회 중공업 담당 위원장을 거쳐 1958년 9월에 국기 훈장 1급을 수여받고 1959년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에 이르렀다. 1960년 1월 내각 부수상에 임명되었으며, 4차 당대회 개최 후 4월, 중공업 위원장에 임명되었으며 1961년 9월에 정치위원에 선출되었다. 1962년 10월 3기 대의원에 선출되어 부수상에 유임되었고, 금속화학공업상에 임명되었다. 김일성과 함께 중국을 방문했다가 대약진 운동에 대한 중국의 허세를 듣고 이를 북한에도 도입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으나 의심많은 김일성이 중국의 허풍을 믿지 않아 1개 농장에서만 시범적으로 심경밀식을 해보라고 지시한 결과 심경밀식의 결과가 참혹한 것으로 드러나 끝내 무산되었다. 1965년 9월 과학원 원장에 임명, 1967년 4기 대의원에 선출되어 부수상에 유임되었다.
하지만 제1차 7개년 계획의 부진한 성과 때문에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에게 준비한게 고작 이게 다냐고 직접 문책을 받고 숙청당해 함경북도의 광산 지배인으로 하방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으며 김정일의 후계 체제가 확립된 1970년 5차 당대회에서 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다가 1972년 6월, 광업상으로 정계에 복귀하여, 12월에 5기 대의원, 중앙인민위원, 정무원 중공업위원장에 선출되면서 재기하였다. 1973년 3월,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출되었으며 이때 6개년 계획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아 1976년 12월 정무원 부총리에 임명되었다. 1977년 12월, 박성철(1913)의 뒤를 이어 정무원 총리로 발탁되어 6기 대의원, 중앙인민위원, 정치국 위원에 선출, 2차 7개년 계획을 수행하였다. 리종옥은 김일성의 과학기술 경시와 중공업, 군수공업 집착, 주먹구구의 계획으로 엉망진창이 된 북한 경제를 살려보기 위해 다양한 조치를 취했으나 큰 성과를 보진 못했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김정일의 승계를 보조하기 위해 설치된 기구인 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되었으며 82년 7기 대의원, 중앙인민위원에 선출되었고 2차 7개년 계획이 순조롭다고 과시하기 위한 김일성의 의도에 따라 4월에 김일성훈장을 수훈받았다. 1980년 2월부터 8월까지, 남한의 신현확 국무총리와 남북총리회담을 실시하기 위한 실무대표 접촉을 가졌으나 성사되진 못했다. 이런저런 악재가 겹치면서 김일성에게 또 질책을 받았으며 1984년 1월, 최고인민회의 7기 3차 회의에서 정무원 총리에서 해임되어 강성산에게 자리를 물려주었으며, 정치국 상무위원에서 탈락하였다. 1980년 당대회에서 선출된 정치국 상무위원 중 사망이 아니라 해임된 것은 리종옥이 유일하다. 대신 국가부주석에 선출, 경제 부주석을 맡아 동유럽 순방길에 나서 북한과 3세계의 경제적 협력을 추진하였다. 이후 86년 11월, 90년 4월에 8기 대의원, 9기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부주석에 유임되는 등 북한의 핵심 엘리트임을 과시하였다.
1988년 10월 국가학위학직수여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었으며 1992년 4월 2번째로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94년 김일성이 죽은 후 장의위원을 맡았으며 김정일, 오진우, 강성산에 이어 주석단 서열이 4위에 이르렀다. 1995년 오진우가 죽은 후에도 장의위원을 맡았다. 1998년 9월, 최고인민회의가 8년 만에 소집되어 김정일을 조선로동당 총비서 겸 국방위원장으로 선출한 후 김영주, 박성철, 전문섭 등과 함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에 임명됨으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혁명원로로 대접받았으며 김정일, 김영남에 이어 주석단 서열 3위의 영예를 누렸으나 1년 후인 1999년 9월 23일 사망했다.
그가 죽은 후 6년 후인 2005년, 로동신문은 그의 일대기를 집중 조명한 특집 기사를 내보내, 그가 "한평생 과학기술 영역, 국가 경제분야에서 땀흘려 왔다"면서 수령 이외의 엘리트 칭송에 인색한 북한 치고는 이례적으로 그의 생애를 기렸다.
3. 참고문헌
- 간대욱, 「김정일 시대 북한 권력엘리트의 특성」 『사회과학연구』 17(1) (2001.12)
- 박형중 외, 『김정일 시대 북한의 정치체제: 통치이데올로기, 권력엘리트, 권력구조의 지속성과 변화』(서울: 통일연구원, 2004)
- 조용하, 「북한인물론10: 원로급 전문관료 떡보영감 이종옥 부주석」『北韓』226(1990.10)
- 통일부 통일정책국 정치사회분석과, 『2009 북한의 주요인물』(서울: 통일부, 2008)
[1] 1912년, 1918년 출생설 등이 경합했으나 현재는 1916년 설이 정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