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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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3대 국무총리
신현확
申鉉碻 | Shin Hyun-hwak
'''
<colbgcolor=#003478> '''출생'''
1920년 10월 29일
황해도 안악군[1]
(現 황해남도 안악군)[2]
'''사망'''
2007년 4월 26일 (86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유공자묘역
'''본관'''
평산 신씨[3]
'''호'''
우호(于湖)
'''재임기간'''
제3대 부흥부 차관[4]
1957년 6월 20일 ~ 1959년 3월 30일
제4대 부흥부 장관
1959년 3월 20일 ~ 1960년 4월 28일
제16대 보건사회부 장관
1975년 12월 9일 ~ 1978년 12월 22일
제13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1978년 12월 22일 ~ 1979년 12월 13일
제13대 국무총리
1979년 12월 13일 ~ 1980년 5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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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478> '''형제자매'''
동생 신현천
'''자녀'''
아들 신철식
'''학력'''
경북고등학교 (졸업)
경성제국대학 (법학과 / 학사)
'''의원 선수'''
'''2'''
'''의원 대수'''
'''9''', '''10'''
'''경력'''
제4대 부흥부 장관
동해전력 사장
쌍용양회 회장
주식회사 쌍용산업 사장
제9,10대 국회의원[11]
제16대 보건사회부 장관
제13대 경제기획원 장관
제13대 국무총리
삼성물산 회장

1. 개요
2. 생애
3. 매체에서
3.1. 드라마
3.2.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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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고위행정관료, 정치가, 경제인, 기업인.
안악군 출신이고[5]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호는 우호(于湖)이다. 최규하 정부의 총리, 삼성물산 회장을 역임했다.
일제 강점기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후 일본 제국 상무성 근무를 시작으로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고위공직자로 출세가도를 달렸으며, 이후 정치인과 기업인으로도 왕성한 활동을 했다. 대한민국 정재계를 아우르는 'TK인맥의 대부'라는 평가가 있다.
동생 신현천(申鉉千)은 전두환 대통령 임기 때 경상대학교 초대 총장을 지냈고, 장남 신철식도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기획재정부국무총리실에서 경제관료로 활동했다.

2. 생애


1920년 10월 29일 당시 아버지의 근무지였던 황해도 안악군에서 태어났다. 이후 칠곡군으로 내려와서 대구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등학교)를 거쳐 1943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한 뒤, 지금의 행정고시 격인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하여 조선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일본 도쿄의 상공성에서 근무하였다. 1945년 7월 일본 군수성의 군수 관리감리국 파견명령을 거부하고 조선으로 돌아갔다. 후에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서도 군수감리국 근무를 이유로 등재 언급이 나왔다가, 유족들의 이의신청에 따라 조사한 결과 실제로는 취임하지 않고 조선으로 돌아갔다는 일본측 자료가 발견되면서 이름이 오르지 않았다.
이때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일본 상공성에서 근무한 일이 그의 출세 가도에 두고 두고 영향을 끼친다. 이만한 경력을 가진 사람은 조선에서 그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일제시대고등문관시험 합격자 대부분은 반도의 농어촌 군수를 하거나 조선총독부에서 근무하는 일은 있었으나 신현확처럼 일본 내지에서 근무한 사례는 없었다.
광복 후 대구대학교 교수로 부임했고 1951년 관직에 복귀하였다. 39세 때인 1959년 부흥부 장관으로 발탁되었다.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난 뒤 3.15 부정선거에 연루되어 2년여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1968년부터 쌍용그룹에 몸 담고 있다가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의 공천을 받아 군위군-성주군-칠곡군-선산군 지역구에 출마하여 제9대 국회의원신민당 김창환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공화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친야 무소속 김현규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한편, 1975년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장관에 임영되었다. 보사부 장관 시절 또다른 그의 업적은 현재 의료보험을 설계하여 초석을 다진 것이다.
1978년 남덕우의 뒤를 이어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현 기획재정부)장관이 되었다. 이때 비대한 중공업 중복투자를 정리하는 '경제 안정화'를 기획했다. 그러나 중화학공업의 육성, 발전을 지지했던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경제 안정화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실행은 탐탁치 않아 했다. 박정희 시해 이후 이 '경제 안정화' 정책은 김재익에 의해 계승된다.
1979년 10.26 사태가 일어날 때는 국방부 회의실에서 각료들이 모여 있던 가운데 박정희 유고를 비밀에 부치고 계엄령을 선포해야 한다고 주장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박정희의 상황을 포함한 정확한 보고를 하라고 다그치기도 했다.[6] 12.12 군사반란 때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수사해야 한다며 결재를 받으려는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에게 우선 노재현 국방부장관의 결재부터 받으라고 호통을 쳤다. 12.12 군사반란 직후 이루어진 개각에서 신현확은 정식으로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다. 그러면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였다.
TK(대구-경북) 출신이었고 유신체제를 합리화하며 보수층의 환심을 사는 등 일련의 독자적 정치기반을 닦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그래서 신군부와 결탁하여 창당을 추진한다는 등의 정치풍문이 나돌기도 하였으며, 당시 민주화 세력은 신현확과 전두환을 한통속으로 보고 있었다.[7] 하지만 실제로는 1980년 4월 당시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이 중앙정보부장직을 겸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였다. 이에 경북고 후배인 노태우는 도와달라고 싹싹 빌다가 신현확에게 단단히 야단만 맞고 돌아가기도 했다. 실상 그는 권력의 진공상태에서 군부의 발호를 막고 문민통치가 이루어지기 위한 과도기적인 체제로 최규하 대통령 체제를 강력히 밀고 있었다. 그 신념에 따라 김종필의 대선 출마를 막고, 양김과 대립하기도 하고, 신군부와도 날을 세웠으나 안타깝게도 역부족이었다.
1980년 2월, 북한의 리종옥 정무원 총리와 남북총리회담을 개최하기 위해 실무진 접촉을 8월까지 실시하였으나 성과를 보지 못하였으며, 5월 17일(5.17 내란)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상황에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기로 결의한 국무회의를 중앙청에서 주재하였다. 그 다음날 신군부의 발호를 막지 못한 것에 책임을 지고 국무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헌법개정심의위원장을 맡아 제5공화국 헌법을 주도하였으며, 1981년 국정자문위원, 1983년 한일협력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8]
삼성그룹 경영권이 이건희 회장으로 넘어갈 때인 1986년부터 1992년까지 삼성물산 회장 겸 삼성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을 지냈다. 이후 국민학원 이사장을 지내고 2007년 4월에 작고하였다.

3. 매체에서



3.1. 드라마


[image]
(신충식이 연기한 신현확, 뒤에는 나성균이 연기한 김계원 비서실장)

3.2. 영화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서희승[9]이 분했다. 비록 짧은 시간 출연하긴 했지만, 김재규가 "소련에서는 브레즈네프가 죽고도 1주일로 비밀에 붙였어요.[10] 이틀 딱 사십팔 시간이면 돼요. 그런데 우린 단 이틀도 보안이 안된단 말이에요?"라고 하면서 박정희의 유고를 덮자고 우기자 '''"거기서 소련 얘기가 왜 나옵니까? 그것도 빨갱이 잡는 정보부장이"'''라고 태클을 걸면서 신스틸러 역할을 톡톡히 했다.

[1] 하급 공무원이던 아버지의 근무지였으며 태어난 이후 칠곡군에서 성장하였다.[2] 본적은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면 왜관동 (現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왜관리)[3] 33세손 '''현(鉉)''' 언(彦) 윤(允) 종(鍾) 항렬.[4] 재임기간 동안 외자청장 서리 수행 (1958년 2월 22일 ~ 1958년 12월 10일)[5] 당시 아버지의 근무지였으며 태어난 이후 계속해서 칠곡에서 자랐다.[6] 이 시점까지만 해도 신현확을 포함 주요 각료들은 범인이 김재규임을 모르고 있었다.[7] 당시 반정부 시위 모습을 담은 기록 영상들을 보면, 시위 구호에 전두환과 신현확을 함께 규탄하는 내용도 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 기록영상 내의 플래카드 중 전두환, 신현확 물러가라는 내용이 보이는 것이 있다.[8] 제5공화국 드라마에서는 국무총리에서 물러난 후 정계에서 사라진 것처럼 나오지만, 사실은 5공 안에서도 계속 활동하던 사람이다.[9] 배우 서재경의 아버지. 2010년 암으로 별세.[10] 명백한 오류다. 브레즈네프는 10.26이 벌어진 지 3년 후인 1982년에 죽었다. 즉, 극중 시점에는 멀쩡히 살아있었다. 소련이 브레즈네프의 '''행적'''을 보안 유지했던 일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