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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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제2대 독재자로 김일성의 장남이자 김정은의 아버지.
냉전 종식과 소련 해체 및 공산권의 붕괴로 인해 고립되고, 고난의 행군으로 경제 위기에 처한 북한을 선군정치로 내부 단속에 공을 들인 세계 역사상 손꼽힐 만한 독재자였다.
생전 공식 직함은 '조선로동당 총비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이었다. 유년기 이름은 소련식 이름인 '유리 이르세노비치 킴(Юрий Ирсенович Ким)' 또는 애칭인 '유라(Юра)'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하진 않다.
집권 기간 '은둔의 지도자'로 유명했다. 암살에 대한 공포, 고소공포증 등 탓으로 항공기 탑승을 꺼렸고 오로지 전용열차 태양호에만 의지하여 외교활동을 벌였다. 그나마 재임 중 방문한 나라는 중국과 러시아뿐이며, 심지어 남북정상회담도 평양에서만 딱 두 번 가졌을 뿐이다. 또한 대내적으로 정치범수용소 운용과 잦은 숙청 등의 폭정은 두말할 것도 없고, 대외적으로는 민간인 납치, 대남 도발, 특히 핵무기 개발로도 악명을 떨쳤다.
세계적으로도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인물인데, 그도 그럴 것이 워낙 악명높은 독재자니까... 갖가지 패러디의 대상이기도 하다.[11] 조선중앙텔레비죤의 리춘히 아나운서가 복식호흡을 하며 힘차게 '조선로동당 총비서이시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이시며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이신 우리 당과 우리 인민의 위대한 령도자'라는 긴 수식어를 붙이며 그의 이름을 호명하는 걸로 잘 알려져 있다. 짧게 호명할 때에는 '우리당과 인민의 위대한 령도자'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2018년 기준으로는 '김정일 대원수님'으로 짧게 호칭한다.
2. 생애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1941년 2월 16일 소련[12] 에서 아버지 김일성과 김정숙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김정일은 어린 시절부터 김일성의 주둔지에서 함께 생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방 이후 아버지의 후광 덕에 평양의 수상관저에서 지내며 남산학교와 만경대혁명자유자녀학원, 남산고급중학교, 김일성종합대학(정치경제학 전공) 등에 다니면서 특별히 가정교사까지 붙을 정도로 초엘리트 교육을 받았다. 공부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고는 하나 영화예술 분야만큼에서는 관심이 있어서 갖가지 사업을 벌였다고 한다.
196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으며, 삼촌 김영주와 계모 김성애, 그녀의 아들(이복동생) 김평일 사이에서 치열한 권력투쟁 끝에 1974년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김일성의 공식적인 후계자로 등극했다.[13] 1991년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이 되었고 1992년 원수 계급을 달면서 군 통수권까지 장악하며 안정적으로 권력을 승계하던 와중, 1994년 김일성이 급작스럽게 사망함과 동시에 자연재해와 정책 실패 등이 겹쳐 대기근이 발생하여 체제 붕괴 위기로 내몰렸다.
3년 간의 유훈통치기를 보낸 김정일은 1998년 헌법을 개정하면서 '영원한 주석'이라며 국가주석직을 김일성에게 갖다바쳤고 자신의 직책인 국방위원회 위원장을 사실상 최고권력으로 만들었다. '당-군-정'이 핵심인 비정상적인 선군정치로써 체제를 단단히 조이던 중인 2000년에 제1차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개혁·개방을 추진하려고 했으나 신의주특별행정구 무산과 박왕자 씨 피살사건으로 인한 남북관계 파탄 등 갖가지 난관으로 인해 실패하고 이후에는 시장경제의 확산을 방지하는데 주력하는 쪽으로 노선을 변경한다. 한편 2007년에도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가졌다.
2010년대 전후로는 급격하게 노쇠해졌다. 건강 이상으로 수술을 받았다는 뉴스가 수시로 전해지던 중 2011년 12월 17일 자신의 전용열차 태양호를 타고 가다가 아버지처럼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조만간 북한은 망할 것"이라는 근거없는 희망이 가득하던 순간 그의 삼남 김정은이 권력을 승계하며 북한 정권의 생명연장의 꿈은 결국 실현되고 만다. 사망 직후 그는 '영원한 국방위원장'이 되었고, 2016년에는 아버지 김일성과 더불어 '탁월한 수령'으로 칭해졌다.
3. 성격
자신의 카리스마를 대중 앞에 드러내기를 즐긴 김일성과는 달리, 김정일의 통치 스타일은 철저히 비밀주의에 기초하고 있으며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기 싫어했다. 어릴 적 러시아에서 지낼 때부터 심약하고 내성적인 소년이었다는 증언이 있기도 한 걸 보면 천성적인 성격 문제일 수도 있는데, 홍사중 조선일보 논설고문도 후술할 1994년 8월 30일자 칼럼에서 로마 네로 황제와 비슷한 증세라고도 밝혔으며, 심약한 사람일수록 절대 권력을 지니면 흉포해질 수 있다고도 전했다.
김일성의 과보호를 받으면서 자란 탓에 내성적인 성격이면서도 신경질적이고 잔인하다는 증언도 있다. 김일성종합대학 교수 중 한 명의 증언에 따르면 '잔인한 천재'. 후지모토 겐지라는 요리사의 요리를 좋아해 고용했는데, 막판에는 반 감금까지 했다는 걸 보면 아주 설득력이 없는 이야기는 아닌 듯 싶다. <김정일의 요리사>라는 책에 그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그의 탈북한 지인들은 우월감이 강하고 즉흥적인 면이 강하다고 여러차례 말했고 이는 남북정상회담 중에서도 드러나기도 했다. 또 미국 CIA 출신 정치심리학자 제럴드 포스트 박사는 2006년 영국 <텔레그래프>에서 그의 심리상태 분석 결과 자아도취, 과대망상, 편집증 기질이 있다고 밝혔다.
김정일 주변 사람들이 증언하는 김정일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매우 급하고 변덕이 심하다고 한다. 김정일의 처형이자 아들 정남의 큰이모였던 성혜랑은 '''“김정일은 기분이 좋을 때는 아주 잘해주지만, 화가 나면 창문이 들썩거릴 정도로 광란을 한다”'''고 말했으며, 김정일의 전속 요리사였던 후지모토 겐지는 “평소에는 다정다감하게 간부를 대하다가도 화가 나면 간부들을 세워 놓고 소리를 지른다”고 했다.
김정일의 경호원이었던 탈북민 이영국은 “젊은 시절에 그는 성격이 급한 데다가 가정적 고심 때문에 술을 많이 마셨다. 그래서 모든 일을 즉흥적이고 과격하게 처리하는 버릇이 있다”고 증언했다. 황장엽은 “김일성은 자기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 독재를 한다는 인상을 주지만 김정일은 독재 자체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고 증언했다. 김정일은 어느 누구도 믿지 않는 성격을 가졌다고 하며 자신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나 권력이 쎈 사람일수록 더욱 철저하게 감시하는 성격이라고 한다.
황장엽은 1979년에 다시 북한 당중앙 비서로 복귀할 때 이전에 가지고 있던 북한 최고 수뇌부에서 일한다는 기쁨과 보람은 없고 '독재의 고압선' 바로 옆에서 다칠세라 걱정하면서 잠시도 긴장성을 풀지 못하고 있는 불안한 생활이었다고 증언했다.
한편 리영국의 증언에 의하면 김정일은 자신이 기분이 나쁠 때면 마음대로 사람을 죽였다며, 오랫동안 자신에게 충성해 온 간부들을 자신이 쓰는 엘리베이터나 재떨이를 썼다는 등의 이유로 로동수용소로 보내는 일도 자주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김정일이 차를 타고 오고 있다는 소리가 들리면 60-70대의 간부들이 도망가서 풀숲에 숨고는 했다. 그들은 옷에 흙이 묻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그저 김정일 눈에 띄지 않기를 바랐다"고 말하며, "왜냐하면 간부들은 모두 김정일이 기분이 좋을 때라도 자신들을 함부로 대하거나 사형을 내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고 증언했다.
이 경호원은 김정일의 경호원으로 10년을 일했는데 그는 경호원이 되기 전 혹독한 신체 훈련은 물론 철저한 사상 교육을 받아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김정일을 신이라고 믿어야 했다고 한다. 그는 김정일에 대해 한 마디로 "두 얼굴을 지닌 사람"이라고 회상했는데, 김정일은 기분이 좋으면 금덩이라 해도 내어주지만, 기분이 나쁘면 아무 이유 없이 사형 선고를 내리는 사람이라고 한다.[14] # 심지어 1980년에는 유명 여배우 우인희를 처형하기도 했다.
또한 김정일은 사람들이 화목하게 지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주민들에게 상호간에 감시를 하고 비판을 하게 만들었으며, 상호 비판에서는 김정일의 사상과 지시에 충실하였는가, 충실하지 못하였는가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상호비판이 강화되고 당원들이 격렬하게 싸울수록 김정일의 권위는 높아졌다고 하는데, 그는 당원들의 생활을 잔잔한 상태에 두는 것을 반대하고 늘 풍파를 일으키고 들볶는 것을 좋아한다고 여러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북한 방송국들은 김정일의 목소리를 공개하지 않으며 이에 따라 김일성이 생전에 줄곧 했던 육성 신년사도 1995년 새해부터 '신년공동사설'로 대체하여 김정일 사후인 2012년 새해까지 진행되었고, 남북정상회담 때도 남한의 국민들은 김정일과 남한 대통령들 사이의 대화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지만 정작 북한 주민들은 단 한 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 북한 언론이 인민에게 공개한 김정일의 육성은 1992년 4월 25일 북한군 창건 60주년 기념식에서 외친 "영웅적 조선 인민군 장병들에게 영광이 있으라!" 라는 한 마디와 70년대 말 당대회에서 연설하는 육성 단 두 개 밖에 없고, 외국 여행도 2000년 방중 이전까지 1983년 비공식 방중이 유일했다. 그런데 의외로 곳곳에 현지지도는 잘 다니는 듯하다.
그 외 최은희 신상옥 납치사건때 최은희가 목숨걸고 카세트 테이프에 몰래 녹음한 육성이 있다. 조갑제 기자가 최초로 정리해서 언론에 공개한것인데 이걸 들어봐도 말이 굉장히 빠르고 정신없다는 걸 알 수 있다.#
굉장히 말이 많은데 흥분해서 정신없이 말을 쏟아내는성격으로 보인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하 김대중)과 회담했을 때 첫날의 백화원 초대소에서 김대중이 한마디를 하면 자기는 열 마디, 스무 마디를 떠들어댔다. 예컨대 김정일이 "신문을 보니 아침을 적게 드시고 왔다고 하셨던데 어째서 적게 드셨나요?"라고 묻자 김대중 대통령은 '''"평양에 가면 잘 얻어먹을 줄 알고 조금 먹고 왔다."'''고 대답했다. 이에 김정일의 대답이 참으로 길기도 하다.
그러니까 "평양에 오면 식사 잘 할 줄 알고 그랬습니다."란 대답 한 마디에 저렇게 길게 대답한건데, 그나마 내용도 좀 엉뚱하고 횡설수설한다.자랑을 앞세우지 않고 섭섭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외국 수반도 환영하는데요.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도덕을 갖고 있습니다. 김 대통령의 방북 길을 환영 안 할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예절을 지킵니다. 동방예의지국을 자랑하고파서 인민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김 대통령의 용감한 방북에 인민들이 용감하게 뛰쳐나왔습니다. 신문과 라디오에는 경호 때문에 선전하지 못했습니다. 남쪽에선 광고를 하면 잘 되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실리만 추구하면 됩니다. 왜 이북에선 TV와 방송에 많이 안 나오고 잠잠하느냐고 하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와서 보면 알게 됩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방북을 지지하고 환영하는지 똑똑히 보여 드리겠습니다. 장관들도 김 대통령과 동참해 힘든, 두려운, 무서운 길을 오셨습니다. 하지만 공산주의자도 도덕이 있고 우리는 같은 조선민족입니다.
초대소의 회담에서 발언의 90% 수준을 김정일이 독점하는가 하면, 두 나라의 정상이 만나서 하는 대화 치곤 상당히 무례한 어감으로 하는 표현도 많다. 게다가 애초에 두 사람 나이차가 15살을 훌쩍 넘긴다는걸 감안하면… 사실 이건 진작부터 점쳐지던 일인데 1994년 김일성 사망 특집 뉴스데스크는 김정일이 남의 대답은 신경쓰지 않고 혼자서 두시간이고 세시간이고 떠드는 버릇이 있다고 보도한 바가 있다.
그 이후의 회담 내용은 공식적으로 알려진 게 제한적인데, 민족 21지에서 밝힌 비화에 따르면 김정일이 김대중에게도 발언기회를 어느 정도 더 주긴 하지만 '''심기에 거슬리는 발언이 나오면 짜증내며 일방적으로 회담을 중지시키기도 했다고.''' 대표적으로 남북통일 문제에 대해서는 김정일이 계속 연방제 운운하자 김대중은 국가 연합 방식을 고수한다고 했고, 이에 김정일은 에라 때려쳐라!는 식으로 뒤엎었다가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을 들고 나오면서 약간 후퇴한 채로 재개했으며, 김대중이 이산가족 문제를 꺼내자 '''"이럴 거면 돌아가시라."'''라고 위협적인 망언까지 나왔다고.
비록 김대중 시대에 남북관계가 좋았다는 인식이 있지만, 세간의 인식처럼 그리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일례로 미국, 일본과 공조하라는 김대중의 권유에는 '''"미국, 일본과 연합해 우리(북한)를 압살하려 하는 거 아니냐?"'''라고 노골적으로 의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결국 회담 말미에는 김대중이 서울로 답방할 것을 권유하자 주저 없이 '''"국가원수인 김영남 상임위원장이 가는 거지, 저는 못갑니다."'''라고 딱 잘라 거절해버렸다.
이에 김대중이 '''"칠순인 내가 노구를 이끌고 평양까지 왔는데 못 온다니, 그건 웃어른에 대한 도리가 아니죠."'''라고 말했는데 결국 말문이 막힌 김정일은 자신의 답방이 명시된 공동선언문에 서명하면서 '''"대통령께서는 전라도 사람이라 고집이 세신 모양입니다."'''라고 지역드립을 쳤고, 이에 김대중은 '''"그렇게 따지면 위원장님이야말로 전주 김씨니까 전라도 사람 아닙니까?"'''라고 맞받아쳤다고 한다. 뭐 결국엔 끝내 오지 않았으며 2001년 스웨덴 페르손 총리와 회담 직후, 당시 외무성 제1부상 강석주에게 "김대중은 아직도 내가 서울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아닌가? 참 어리석다."며 뒷담을 깠다.
그외에 같이 방북한 대한민국의 장관들더런 "장관 나리"라는 표현을 쓰며 상당히 명령조로 "오늘 저녁까지 이 그림의 해가 뜨는 해인지 지는 해인지 맞춰봐라."라고 하기도 했고[15] 마약범죄 얘기를 하다가 "만일 (남한에서) 조선인 마약 사용자가 적발되면 내가 '''허락할테니''' 총살하세요!"라고 하는 등 자신이 윗사람인 양 굴었다. 그러다 실수를 깨달은 듯이 "내가 경거망동한 것이냐?"라고 되물으며 겸연쩍어 했다고.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서는 자신보다 5살 아래인 노무현 대통령과 대면했는데, 이때도 별의별 돌출 발언을 하면서 분위기를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말을 길게 하지 않으며 주로 우회적인 화법을 쓰는 김대중과는 달리, 노무현은 매우 직설적이면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대로 밀어붙이는 스타일이었던지라, 오히려 김정일이 회담을 장악하지는 못했다. 심지어 방북 이틀째였던 10월 3일에는 뜬금없이 '''하루만 더 머물러 달라'''는 요청까지 했을 정도. 다만 이는 노무현이 거부했고 김정일 본인도 나중에 연장 안해도 되겠다고 해서 없던 일이 되긴 했다. 그 외에도 NLL 대화록을 보면,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나 노무현의 발언 중에는 김정일의 심기를 상당히 불편하게 할 만한 내용도 여럿 담겨 있었고…
그러나 북한 주민과 접촉을 꺼리면서도 교묘한 정치 술책으로 자신에게 도전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인물과 세력을 철저히 분쇄하고 절대적인 권력으로 북한을 지배하고 있다. 사실상 공갈, 협박, 폭력을 통치-외교 기술로 승화(...)한 거의 유일한 정치가가 아닐까?
참고로 혈액형은 A형#s-3. '''혈액형과 성격은 무관하다는 당연한 사실'''을 몸소 증명하고 있다. 2002년 방북해 평양 공연을 마친 대한민국의 가수 김연자가 김정일의 초대로 백화원초대소 만찬 자리에 갔는데, 이 자리에서 김정일에게 "혈액형이 뭔가요?" 라고 묻자 주변의 간부들이 매우 당황해하면서 그건 기밀 사항이라고 넘기려고 했으나, 의외로 김정일은 '''"그런 질문은 처음이다."'''면서 흔쾌히 A형이라고 알려줬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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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자신을 살해하려 한다''''는 망상을 갖고 있다고 전해진다. 그 때문에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길 꺼린다는 소문도 있다. 중국, 러시아 등을 방문할 때는 전용 기차인 1호 열차 달리는금수산의사당을 주로 이용하는데 이것도 스탈린이나 김일성이 그러했던 것처럼 암살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얘기가 있었다. 혹은 미국 시사주간지 <포린폴리시>의 보도에 따르면 젊은 시절 헬리콥터 추락 사고를 겪어서 스탈린처럼 고소공포증 때문에 기차를 이용한다고. 룡천역 열차 폭발사고 당시 자신을 암살하기 위한 음모로 규정하여 기폭장치로 의심된 핸드폰 사용을 몇 년간 막은 걸로도 유명하다.
강명도의 증언에 의하면 김정일이 아돌프 히틀러를 존경하여 <나의 투쟁>을 베고 잔다고 말했는데, 진짜 베고 잤는지는 모르지만 히틀러에 대해 우호적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 김정일은 겉으로는 싫어한 척 했지만, '''내심으론 정말 히틀러를 존경했을지도 모른다.''' 브라이언 마이어스의 <왜 북한은 극우의 나라인가>에 따르면 북한은 극좌 스탈린주의 국가라기보다는 순혈주의·인종주의적 국가이고 소련보다는 나치 독일에 가까운 나라다. 한 장성급 예비 소회담에선 북한 장군이 인종주의적 견해를 피력한 바 있고 그 이외의 사례도 굉장히 많다.
4. 사생활
- 참고 링크: 北 김정일 김정은의 잔인성과 복잡 음탕한 여자관계
4.1. 취미
영화광으로 이미 학창시절에 국립 영화제작소에서 김정일 전용 상영관을 마련해줄 정도였으며 남한에서 신상옥과 최은희를 납치하여 영화를 만들게 할 정도였다. 윤정희도 남편인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함께 납치하려다가 실패했다. 특히 특촬물 중에서도 괴수물을 좋아한다는 소문이 있는데 신상옥 감독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안겨줘서[16] 불가사리를 찍게 한 것을 보면 신빙성이 높은 듯. 하지만 신 감독의 탈북으로 현재 불가사리에서는 신 감독의 이름이 지워진 상태다.
김정일은 수집된 세계 각국의 영화를 보존하는 영화총국 산하의 '중앙영화필름관리소'를 평양에 만들었다. 북한 영화계에서 종사했던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 '중앙영화필름관리소'는 평양 시내에 영화필름을 보관하는 '영화문헌고'를 두고 있는데 이곳에는 15,000편이 넘는 세계각국의 영화가 보관돼 있다. 이곳의 구성인원은 성우, 번역사, 자막사, 영사기사, 녹음기사 등 약 250여명이며 규모는 길이가 약 100m인 3층 건물이고 유사시를 대비해서 지하보관소를 따로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곳에서 보관 중인 15,000편의 영화 가운데 한국 영화는 약 300편 정도인데, 재밌는 점은 한국에서도 보기 힘든 50~60년대의 영화 빨간 마후라, 꿈, 내시 등의 네거티브 필름도 포함돼 있다는 것이다. 이 한국 영화들은 대부분 과거 홍콩과 인도네시아 등에 수출된 것을 다시 구입해 들여 간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세계 각국의 영화필름을 1974년에 가입한 국제필름아카이브연맹(FIAF)을 통해 상호교환 형식으로 수집하는 방법과 함께 몰래 복사해서 불법으로 들여가는 방법으로 수집하고 있다.
2000 남북정상회담 당시에 남측의 방문단이 4편의 영화를 선물하자 즉각 반색하며 이것저것 물어본 다음에 "1주일 내로 소감을 보내주겠다."라고 하기도 했다. 이에 시네21에서 김정일의 소감을 실어주겠다고 제안했으나 남측의 반발이 심해서 무산되었다고 한다. 김정일은 남한 연예인들의 속사정과 출연영화를 줄줄이 다 꿰고 있어서 납치된 최은희와 신상옥 감독이 놀랄 정도였다. 그는 멀리서는 50년대부터 가까이는 이영애[17] 로 이르기까지 다양한 세대의 남한 배우들을 좋아했다.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를 보고 침이 마르게 극찬한 일화도 있다. [18]
영화 이론도 공부했는지, 고위 탈북자에 의하면 "김정일의 저작의 절대 다수는 대필이지만, 영화와 관련된 것들만큼은 김정일이 직접 저작한 것"이라고 증언한 바 있다. 연극 영화는 단순히 취미인게 아니라 실제로 현대 선전선동에 핵심 중 하나이기도 하다. 영화를 잘 이용한 대표적인 데마고그로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있다. 권력 유지에 중요한 요소인 것. 지금도 선전선동부는 조선로동당의 알짜배기 부서다.
호주에는 안나, 평양에서 영화를 배우다는 영화까지 있다. 안나의 동네가 대기업의 가스 채굴 개발지가 된다. 안나는 이를 막기 위해 자본주의 대기업에 맞써 싸우는 영화제작을 위해 평양으로 가서 김정일 반자본주의·반제국주의 영화이론을 배워 영화를 만든단 내용이다. 적어도 선전 영상물 제작에 있어서는 제법 인정받는 전문가다. 그러나 홍사중 조선일보 논설고문은 1994년 8월 30일자 <홍사중의 문화마당>에서 여느 독재자와 달리 영화광 기질은 '현실 도피' 측면이 더 강하다고 분석했다.
평소에 남한 TV방송을 즐겨봤다고 전해진다. 2000 남북정상회담 당시에도 김대중 대통령에게 남한 TV 뉴스를 보면서 남한 반응을 살펴봤다는 언급을 하기도 했다.
비디오게임 등 서양 문화도 즐겼다.[19] 스포츠 중에서는 농구를 좋아했는데, 2000년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이던 매들린 올브라이트가 마이클 조던의 사인볼을 선물하자 만족했다고 했다. 미국 샌디에고 유니언 트리뷴은 2001년 북한이 삼성의 후원으로 조던을 초청하려 했으나 조던이 거절했다고 보도했다.
피겨 스케이팅을 좋아한다는 소문도 있는데, 백두산배 국제피겨스케이팅 대회를 생일에 맞춰 매년 2월[20] 에 열고 있으며 자국 선수들 외에 러시아, 프랑스, 체코, 헝가리, 영국, 스위스,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오스트레일리아 등지의 선수들도 대회에 참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2010년 대회에 참가한 알렉세이 야구딘에 의하면 러시아보다 더 좋은 시설을 갖춘 빙상장이 있다고 한다.
그외에도 후지모토 겐지의 증언에 따르면 승마를 매우 좋아했다고 하는데 북한 선전물에서 김정일이 백마를 탄 영상이 자주 등장하는 걸로 봐서 승마 자체는 그럭저럭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후지모토의 증언에 따르면 1992년에 말을 타다가 낙마를 한적이 있었는데, 이때 김정일은 진통제로 모르핀을 맞아야했는데 김정일이 (아무 문제없는)자기 주변인들에게도 모르핀을 맞게했다. 후지모토는 김정일이 자기만 마약중독에 걸리기 싫어서 그랬다고 쓰고 있지만(출처: 후지모토 겐지, 김정일의 요리사, 3장) 그것보다는 암살에 대한 강박관념 때문으로 추정된다.
4.2. 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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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樽美酒千人血(금준미주천인혈: 금동이 속의 아름다운 술은 천 사람의 피요)
>玉搬佳酵萬成膏(옥반가효만성고: 옥쟁반 위의 아름다운 안주는 만 사람의 기름이라)
>燭淚落時民淚落(촉루낙시민루낙: 촛농이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도 떨어지니)
>歌聲高處怨聲高(가성고처원성고: 노래소리가 높은 곳에 원망하는 소리도 높도다)
>
> -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변학도의 폭정을 비판하며 지은 시.
>玉搬佳酵萬成膏(옥반가효만성고: 옥쟁반 위의 아름다운 안주는 만 사람의 기름이라)
>燭淚落時民淚落(촉루낙시민루낙: 촛농이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도 떨어지니)
>歌聲高處怨聲高(가성고처원성고: 노래소리가 높은 곳에 원망하는 소리도 높도다)
>
> -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변학도의 폭정을 비판하며 지은 시.
북한군 짬밥을 리뷰한 탈북자 이철호 중위가 신랄하게 김정일의 주먹밥 에피소드를 신랄하게 까댄다. 현대판 변학도라고 하는데 변학도가 억울하다고 할 지경이다.
김정일은 1970년대부터 측근들을 모아놓고 연회를 즐겼는데 이게 본인이 완전히 취해서 곯아떨어질 때까지 이어졌다. 길게는 4일 이상 지속되기도 했다. 이 연회가 어찌나 난잡하고 사치스러웠는지, 보다 못한 1979년 리명재 로동당 부부장(리용호 외무상의 아버지)의 부인은 김일성과 김경희에게 이러한 난잡한 파티를 막아달라고 왼손으로 탄원서를 써서 바쳤다. 문제는 김일성에게 가는 모든 문서는 이미 실권을 틀어쥔 김정일을 거치고 있었다는 것. 내부고발을 접한 김정일은 격노하여 범인을 잡아들이라고 명령했고, 보위부는 파티 참석자들과 그 가족들을 혹독하게 추궁하여 결국 2달 만에 리명재 부부장 부부는 체포되었다. 리명재 부부장은 "저런 건 마누라가 아니라 원쑤다! 내가 직접 처단하겠다!"라고 권총을 빼들어서 '''아내를 쏘아죽였고''' 김정일에게 권총을 바치면서 "죽여주십시오!"라고 외쳤다. 그러자 김정일은 "너는 한번만 용서한다."라고 그를 살려주고 총애했으며 김정일이 하사한 젊은 간호사와 재혼했다고 한다.
김정일이 가장 좋아하는 술은 1980년 프랑스 보르도산 샤토 라투르(Chateau Latour)라는 와인이었다. 병당 560만원 정도 한다. 김정일은 이 술을 오스트리아의 유리 명품인 리델(Riedel)의 와인잔에 따라 마셨다. 애완견 수입·관리에만 매년 수십만 달러를 쓰기도 했다. 정통한 대북 소식통은 “김정일은 프랑스 수의사를 수시로 불러 애완견의 건강검진까지했다”고 했다. 2009년에는 이탈리아에 호화요트 2척(240억원가량)을 주문하기도 했다. 이 요트는 이탈리아 경찰에게 압수됐다. ‘극에 달한 호화사치 생활자’ 부분에는 이와 비슷한 사례들이 잘 정리돼 있었다.
1980년 중앙당 김정일 공관 확정 보수 시 서독 기술자를 초빙하여 최고급 외제 장식품으로 치장하는 등 영국화 200만 파운드(당시 기준 한화 30억원 상당) 허비하였다. 평양에 미화 1억 불 상당의 공관 4개소, 각 지방에 초호화 별장 9개소, 최신형 고급 외제 승용차 30대 등 소유[21] 전용 창고에는 자신이 농락한 여자들에게 선물할 각종 고급 물품[22] 이 산적해 있었고, 전시에 대비하여, 서방은행에 금괴 7톤 및 거액의 외화 예치하였다고 한다.
4.2.1. 미식가
이 영상에서 보면 고난의 행군 당시에도 고생을 한다고 거짓선전을 하면서도 실제론 상상도 못할 산해진미를 맛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김정일의 미식 관련 문서는 이 다큐멘터리와 후지모토 겐지의 증언을 많이 참고해서 작성했다.
'''대단한 미식가'''로, 선천적인 미각도 굉장히 예민한데다 어린 시절부터 좋은 것만 먹어와서 그런지 입맛이 엄청 고급이었다고. 20년 넘게 그의 전속 요리사로 일한 후지모토 겐지의 증언에 의하면, 연회에서 만든 초밥에 실수로 설탕을 평소보다 10g 정도 적게 사용했는데 김정일만이 이것을 알아차렸다고 한다.
후지모토는 김정일이 최상품의 과일, 생선, 육류 등의 식재료 구입을 위해 전속 요리사들을 세계 각지에 보냈다고 주장하고 있다. 덴마크에서는 돼지고기, 체코에서는 맥주, 중국의 우루무치에서는 멜론과 포도, 동남아시아 각국에서는 각종 열대과일, 이란, 러시아,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캐비아, 일본에서는 생선, 간장 등 조미료, 그리고 고급 떡을 구입했다고 한다. 한번은 1,200kg나 되는 인도산 다랑어를 구입한 뒤 신선도 유지를 위해 항공사에 막대한 비용을 들여가며 평양으로 급송해 김정일이 보는 데서 해체하기도 했다고 한다.
후지모토에게 메기 요리를 먹고 싶다면서 일본에 단 하나 있다는 메기요리 전문점에 찾아가 요리법을 알아오라고 시킨다거나, 한 번은 일본 백화점으로 가서 개당 1,500엔짜리[23] 쑥으로 만든 찹쌀떡을 100개나 사오도록 해서 먹어보고는 맛있다고 감탄하면서 "왜 우리나라 요리사들은 이런 걸 못 만들까?"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사실 김정일은 전국의 일제 승용차를 없애는 쇼까지 했으면서도 정작 본인은 일본인 요리사를 고용해서 일본 요리를 즐겼다. 게다가 구 일본군 군가/전시가요였던 라바울 속요까지 즐겨 불렀다니 겉은 일본과 대결하는 척을 했어도 속으로는 일본의 많은 것을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후지모토 겐지도 갖가지 진미들을 김정일에게 권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성게알이다. 김정일은 처음에 성게알을 먹을 때는 영 내키지 않은 표정으로 먹더니 이윽고 엄지를 치켜올리며 "후지모토, 맛있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김정일은 또 초밥을 매우 즐겨서 중풍으로 앓아누워도 초밥을 못 먹는다면서 불안해했다고.
아래는 김정일의 '''평범한''' 일주일 식단으로, 출처는 「후지모토 겐지, <김정일의 요리사>」. 심지어 이건 주 요리만 나열한 것이고 부채(副菜)까지 합하면 20~30가지는 된다고 한다(...).
사진으로 확인해보고 싶은 위키러는 이곳으로.
물론 위 요리들 상당수는 요리법만 알고 재료만 구할 수 있다면 일반인들도 얼마든지 해 먹을 수는 있겠지만, 김정일이 먹는 밥상에 올라가는 식재료는 상식을 초월한 제조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특급품이므로 일반인이 김정일이 먹는 수준의 음식을 먹어봤을 확률은 0에 가깝다. 일반인들이 이런 종류 혹은 비슷한 음식을 먹어보겠답시고 전통시장이나 대형 마트 등을 다니면서 발품 팔아서 어찌어찌해서 재료를 구하여 요리를 시도했다 쳐도 결국 오리지널을 재현하는 건 무리다. 예를 들면 김정일이 먹은 과일은 당도를 높이겠다고 '''설탕이나 개고기를 비료로 줘서''' 수확한 것이라고 한다. 심지어 마시는 물도 북한에서 가장 이름난 생수인 신덕샘물만, 그 중에서도 전용 식수구에서 따로 받아낸 것만 마셨다.
이렇게 한국, 일본, 중국,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 스위스 등 세계 각국의 고급 요리를 즐겼지만 주로 깊고 진한 맛을 좋아해서 중국 요리를 가장 많이 먹었다고 하는데 특히 샥스핀을 좋아해서 사흘 내내 샥스핀 요리만 먹은 적도 있다고 한다.
굉장한 애주가[27] 로 위스키는 조니워커 스윙을, 코냑은 헤네시 XO를, 맥주는 발티카 No.5 졸로토예(Золотое)를 좋아한다고 한다. 특히 코냑을 광적으로 좋아해 한때 헤네시 사의 단일 고객 중 최대 구매자라는 이야기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자신의 관저에 대규모의 개인 술 창고를 마련해놓고 전 세계 각국의 명주 수만 병을 모아놓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돌고 있다. 한번은 자신의 술 창고에 후지모토 겐지를 데려가 "이중에 없는 일본 술이 있나 살펴보라"고 시켰는데, '산토리 임페리얼'이 없다고 하자 다음 일본 출장 때 꼭 사오라고 시키기도 했는데, 웃기는 건 산토리 임페리얼은 OEM 방식으로 일본에서 생산되는 스카치 위스키라 흔한 양주였는데 왜 이게 없었는지는 의아한 점이 있다. 오히려 너무 평범한 술이라 들여놓지 않았는지도.
그리고 여기에도 김정일의 잔인한 성격은 어딜 가지 않아서, 자기가 먹을 식재료를 운반하다 실수라도 하면 가차 없이 응징했다. 김정일의 혀가 무지하게 까다로웠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식재료를 공급하는 사람들은 레알 헬게이트였을 것이다. 실제로 김정일이 먹는 생선초밥을 만들 생선은 전속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가 직접 외국에 가서 고르고 급속 냉동 처리해서 북한으로 보내는 과정을 거쳤는데, 하루는 후지모토가 북한에서 난 생선으로 초밥을 만들었다고 한다. 물론 김정일은 '''단번에 맛없다고 화내며''' 이딴 건 두 번 다시 가져오지 말라고 했다고(…).
아래는 북한 만수무강연구소[28] 에서 근무하다 탈북한 연구원이 김정일이 먹어치운 식품들에 대해 증언한 내용들. 읽다 보면 실소만 나온다[29] .
- 소고기와 달걀
- 기능성 완두콩
- 깨까치 고기
- 특수식료품을 생산하는 공장
- 가스 맥주
- 분말 숭늉
- 마요네즈
- 분말스프
- 순대
- 전용 담배
- 불로초 술
- 개구리 기름
- 올리고당
- 나한과(羅漢果) 차
- 요구르트
- 식용색소
- 클로렐라
- 송화가루
- 호로조 고기
- 흑미(黑米)
- 강장제(...)
- 개고기
- 생수
- 한약과 약술
- 푸아그라
- 상어 간 기름
- 숙주나물
- 당나귀 고기
- 조미료
- 숙취해소제
- 오골계 고기
4.2.2. 결과
그나마 인민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사치를 하면 사우디 등 중동 왕족 정도의 악평을 들고 끝나겠지만, 김정일은 '''국가 경제의 기반을 붕괴시키면서까지''' 사치를 했다.[30]
1970년대 당 권력을 장악한 이후부터, 김정일은 혁명 자금이 필요하다는 명분 하에 금광이라든가 북한의 특산품인 송이버섯과 같이 가장 수익성이 좋은 사업체나 기업소를 엄선해 내각 경제에서 완전히 분리했다. 여기에 각종 밀수, 마약 생산, 위조지폐 유통 같은 범죄 행위로 외화를 조달한 건 덤. 이런 수입원들은 내각 기관의 통제를 전혀 받지 않는 독자적인 경제 체제가 되었고, 이는 당 경제라는 미명 하에 본인의 개인적인 사치에 이용되었다. 이후 선군정치라는 명목으로 군 경제도 인민 생활 경제에서 완전히 분리시켜 버렸다.
그리고 이렇게 모은 돈을 북조선 '왕조' 관련된 일과 군비 증강에는 말 그대로 퍼다 썼다.[31] 매년 헤네시 코냑 구매에 50만 달러를 쓰는가 하면 연회 중에 즉석으로 '''1만 달러 다발 4~5개'''를 쌓아놓고 술 마시기 대회를 열어 '''상금'''으로 주기도 했으며, 승마를 위해 말 30여필을 수입하고, '''수백억원 상당의 이탈리아제 호화 요트 2척'''을 구입하려다가 발각됐다던가, 김정은 집을 '''1,734억 원'''을 들어 호화 주택으로 개조했다던가 평양 불꽃놀이에서 60억원 탕진, 김정일의 별장과 여가시설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리고 해외 비자금이 40억 달러로, 이는 태국산 쌀 1,000만톤어치, 즉 매년 100만톤의 추가 식량이 더 필요하다고 볼 때,10년, 강냉이로는 2~30년 정도를 버틸 정도.[32] 금수산기념궁전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러한 작태는 현 김정은 정권 하에서도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열거했듯 자신은 온갖 산해진미를 즐기면서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고 중국과 베트남처럼 개혁, 개방 정책이나 국방비 축소를 전혀 안 하고[33] 인민들은 굶게 만든 것을 본다면 한국 최악의 폭군으로 꼽히는 연산군이나 충혜왕이랑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아니 이들보다 더 악독한 게, 연산군이나 충혜왕은 그나마 능력이라도 없어서 빨리 무너진 반면, 김정일은 권력 유지만큼은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기막히게 유능하기 때문[34] .
무엇보다 충격적인 사실은, 이렇게 세간에 알려진 김정일의 사치가 딱히 과장이 없는 진실일 확률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사실 북한이 워낙에 폐쇄적인 사회라, 그곳에서 나오는 소식이나 정보도 워낙 카더라 통신이 범람하기에 걸러 들을 필요가 있는 데 비해, 김정일의 사치에 대한 증언은 출처가 '''김정일 처조카 리한영[35] , 김정일 전속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 김정일 전속 요리사 에르만노 푸를라니스, 김정일을 직접 수행한 러시아 외교관 콘스탄틴 풀리코프스키, 최은희, 신상옥''' 등이다. 이 사람들은 모두 김정일을 직접 마주하며 그의 사치를 보고 들은 사람들이며, 김정일에 대해 굳이 과장되어 말할 필요가 없는 위치에 있는 인물들이니 당연히 신뢰도는 어느 탈북자의 카더라 통신에 비해 넘사벽급으로 높다.
만약 김정일이 자신의 사치를 중단하고 그에 쓰일 돈을 식량 구입에 사용하였다면 고난의 행군 시 사망자를 최소화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 전문가들과 탈북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4.3. 잔인성
1984년 안기부가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서 작성한 김정일 대외비밀 문건이 있다. 이 문건에 나오는 사례만 보더라도 김정일의 잔인성이 쉽게 드러난다. 김정일은 ‘김일성 부자 세습체제’를 반대하는 인사를 극비리에 숙청하기 위해 국가정치보위부 내에 비밀단체인 암살대를 조직, 직접 지휘했다.
암살대는 의사, 저격수, 운전수 등 15~20명으로 이뤄져 있으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령사항을 즉각 수행한다. 1976년 3월 교통사고로 발표한 당시 정무원 부총리 남일의 사망도 실은 ‘암살대’에 의한 암살이다. 김정일은 남일이 소련의 비호하에 주석이 되려고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죽이기로 마음먹었고, 김정일은 암살대에 평양남포간 고속도로에 대형화물트럭을 세워놓았다가 달려오는 남일의 승용차로 돌진, 충돌하여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다. 암살 후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으로 위장 보도를 지시하였다.
사례-1. 조선로동당 국제부 부부장 최준덕이 사소한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로 재떨이를 머리에 던져 심한 상처를 입혔음.[36]
1977년 첩 관계 등 사생활을 누설한 공관관리책임자 이수헌을 처형.
1977년 자신의 난잡한 여자관계 등 사생활을 누설한 연락군관 추태식을 처형.
1978년 난잡한 여자관계를 만류한다고 로동당 선전선동부부장 박성수를 처형.
1980년 김일성에게 김정일의 사생활이 너무 방탕하고 퇴폐하다고 진정하는 익명의 투서사건이 발생하자 2개월의 수사 끝에 선전선동부부부장 이명재의 처를 범인으로 색출, 남편이 직접 총살토록 조치. 이 사건에 대해 김정일의 처조카 이한영씨는 생전 “김정일 비밀파티에 이명재 당시 당 부부장이 참석했는데 이명재 부인이 비밀파티 사실을 알고 김일성에게 바로잡아 주라고 편지를 썼다. 그런데 그 편지가 중간에 김정일에게 들통이 나서 이명재가 '저런 년은 내가 처단하겠다.'라고 말하고, 이명재가 그 자리에서 자신의 부인을 쏴 죽였다”라고 했다. 우습게도, 이명재가 부인을 총살하는 것을 본 김정일은 이명재를 사면하고 우대하며 총애했다.
1981년 자신과 정을 통한 간호원 이영미가 부모에게 “나는 김정일을 모시고 있다”는 편지를 보낸 사실을 알고 임신 중임에도(!!) 처형.
1981년 자신의 허가 없이 첩에게 모스크바행 비행기표를 사준 공관관리과장 노종일을 첩이 보는 앞에서 마구 구타.
1981년 김정일이 여동생 김경희와 같이 지방여행 시 동행한 예술단원 한 사람이 술에 취해 추태를 부리자 김정일이 이를 보고 권총을 꺼내 총살하려는 것을 김경희가 만류하여 중지.
김정일이 탑승한 차량이 주행 시, 마주치는 모든 차량은 사전 정지토록 의무화하고, 이를 위반하여 머뭇거리거나 늦게 정차하는 차량이 있으면 동승한 비서로 하여금 탑승자를 확인해 반드시 처벌.
4.4. 음란성
대략 1975년경에 김정일은 아버지 김일성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기 위해서 기쁨조를 만들어서 바쳤다.기쁨조 증언
기쁨조 안에 행복조, 만족조, 가무조가 있는데, 만족조는 성적으로 만족을 주는 조이다. 이것도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는다고 한다. 기쁨조를 하다가 퇴직한 사람은 고급 아파트에 들어가게 해준다. 그러나 기쁨조를 나올 때 내부에서 있었던 일을 발설하지 못하게 각서를 쓰게 한다고 한다.
처음에는 인민국 협조단에서 18명 정도를 뽑았는데, 실력보다는 예쁘기만 했으면 됐다고 한다. 북한에는 음팔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 사람이 김일성 앞에서 스트립쇼를 하면 김일성이 좋아했다고 한다. 김정일이 자기 아버지에게만 안겨주기에는 부러웠는지 예술단에서 예쁜 사람들만 뽑아 김정일 주위를 빙빙 돌게 만들었다고 한다. '''즉, 김일성도 살아있을 때 기쁨조를 즐겼다는 이야기이다.'''
김정일은 삼처(영숙, 성·나이 미상) 외에 첩 2명과 생활하면서도 주변의 근무여성을 특별양성하여 성적유희로 농락했다.
김정일은 1977년부터 매년 시·도 예술전문학교 졸업반 여학생 가운데 미모의 30여 명을 선발, 평양적십자병원 의대에 1년 과정의 특설 반에서 기본간호교육을 시키고 홍콩·마카오 등지에 파견하여 안마술 등 단기간의 연수를 시켜 자신이 최종심사한 여자를 집무실·공관·별장 등에 배치하여 즐겼다. 또 영화배우 유진희 (〈당의 참된 딸〉 주인공)·홍영희(〈꽃 파는 처녀〉의 주인공)·최삼숙·이정순·채수련·오화자·고지미 등 10여 명과 ‘만수대예술단’ 무용수 10여 명·전용타자수·담당간호사 등 숱한 여자들과 성적유희를 자행했다. 김정일은 이들에게 공훈 배우 칭호를 수여하고 고급물품을 선물했다. 김정일은 변태적인 기질이 다분한데, 주말마다 각종 연회를 열고 무용수들에게는 나체로 춤을 추게 하며 참석자(중앙당 부부장급 이상)로 하여금 이들을 애무토록 한 뒤 즐기는 등 변태적 음란 기질자임을 잘 보여준다.
실제로 여자관계가 복잡했던 김정일은 최소한 10명의 사생아가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러시아 일간지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Komsomolskaya Pravda)》지는 1997년 9월 23일 이런 사실을 폭로했다.
이 신문은 ‘수령과의 잠자리’라는 제호 아래, 기쁨조를 비롯한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여성 편력을 거의 전면에 걸쳐 소개한 뒤, “우리(러시아) 여성들도 김정일의 관심을 비켜가지 않았다”며 “러시아 여성 연예인들이 엄청난 공연료를 받고, 김정일 개인손님으로 북한을 방문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같은 러시아 여성 연예인들의 평양 방문은 북한 특수기관에 의해 비밀리 이뤄지고 있는데, 이들은 많은 출연료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 단 한 차례도 공개공연을 가진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1991년 김정일 손님으로 평양을 방문한 모스크바 여성 합창・무용단원들을 평양 주재 러시아 대사관이 목격함으로써 처음 드러나게 됐으며, 러시아 최고 인기 여가수 알라 푸가초바(Alla Pugatcheva)도 1991~1992년 평양을 방문한 적이 있다고 이 신문은 보도했다. 또 이 신문은 “김정일에게 수많은 사생아가 있으며, 확인된 아이만 하더라도 10명 정도”라고 덧붙였다.
4.5.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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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의 김정일, 김일성, 김경희.
- 친남동생
- 친여동생
- 이복여동생
- 김경진
- 김백연 - 1987년생.
- 이복남동생
4.5.1. 여자관계와 자녀들
홍일천, 성혜림, 김영숙, 고용희, 김옥 이렇게 3~5명과 결혼했다고 추정된다.
사실 김정일의 정식적인 아내가 누구인지는 정보가 없다. 아래의 사람들도 대부분이 동거관계였던 여자들로 탈북자의 증언이나 북한 공식석상에서 인정받는, 정확히는 자녀들이 김정일의 자녀로 인정받는 어머니들만 서술하고 있고 실제로 김정일이 누구와 정식결혼을 올렸는지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없다.
때문에 김정일은 여자관계가 상당히 복잡하고 난잡한 인간이라 김정일이 누구를 만났는지, 그들 사이에서 누가 태어났는지 알 방법이 없다. 당장 국가 공식기관으로 김정일과 고위간부를 위한 기쁨조에 수십명의 여자들이 배치(?)[37] 되어 있어서 몇명이 김정일과 관계를 맺어서 자녀를 보았는지 파악이 불가능하다.
'김정일 로열패밀리' 를 쓴 리한영의 증언으로는, 이외에도 정도나 깊이만 다를 뿐 여기저기에서 여러 여자들과 무슨 댁 무슨 댁 하면서 살림을 차렸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돌았다고 한다. 결국 비공식적 관계와 자녀들이 상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4.5.1.1. 홍일천
김정일 주변인의 증언 외에도 주로 중국의 소식통을 통해서 김영숙 이전에 홍일천이라는 여성이 김일성이 직접 간택한 첫번째 정실 부인이었다는 설도 나오고 있다. 이 설에 따르면 홍일천은 1966년에 김정일과 결혼해 딸 김혜경을 낳고 3년 뒤 이혼했다고 하지만 뒤에 서술된 여성들과 달리 명확한 수기나 증언, 물증이 없어서 진위 여부가 불확실한 상황이다.[38]
그리고 전직 정무원 총리였던 강성산의 사위였던 탈북자 강명도는 김정일이 김영숙과 결혼하기 이전에 김일성이 직접 간택해 준 어떤 여성과 약혼했지만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은 채 헤어졌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서는 이 여성이 바로 홍일천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홍일천은 혁명 유자녀 출신으로 제7~8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낸 바 있으며 이후 정무원 보통교육부 부부장 등을 거쳐 현재 김형직사범대학 학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김정일과 관계한 많은 여성들이 주로 김정일의 사적인 영역에서 머물렀던 것과 달리 공적인 활동이 활발하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4.5.1.2. 성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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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은 남산고급중학교를 다니던 시절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면서 김일성과 돈독한 사이였고 또 자신의 학창 시절 친구의 아버지이기도 한 원로 작가 리기영의 집을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김정일은 이때 친구의 형인 리평과 결혼한 형수였고 자신보다 5살 연상이었던 배우 성혜림을 처음 만났다.
김정일은 이후 당 선전선동부에서 영화계 현지 지도를 하면서 성혜림과 다시 만났고, 점차 관계가 깊어지면서 성혜림은 아이까지 있는 상태로 전 남편과 이혼했다. 리기영은 북한 정권에 대한 충성심이 높았고 작가동맹위원장까지 지냈지만 며느리를 돈독한 사이였던 수령님의 아들에게 빼앗긴 충격 때문에 이후 작품 활동을 일체 하지 않았다고 한다. 성혜림은 리평과 이혼한 뒤 김정일이 28세 되던 해인 1969년에 배우 활동을 그만 두고 김정일이 세운 200평 규모의 15호 관저에서 비밀 동거를 하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성혜림은 김정일의 첫째 아들인 김정남을 낳게 된다. 김정일은 생에 처음 본 자식이자 첫아들에 대한 애정이 대단했다고 하는데 1990년대에 탈북한 성혜림의 언니 성혜랑[39] 이 찍은 개인 비디오에는, 김정일이 직접 김정남의 젖병을 든 채로 오줌을 받거나 김정남을 업은 채 자장가를 불러주는 모습도 담겨 있다고 한다. 리한영의 증언으로는 김정남의 생일 선물을 사주기 위해 선물 구매단을 외국에 파견하기도 했는데, 선물의 액수가 100만 달러에 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의 삼촌이자 정적인 김영주와 후계자 경쟁을 하고 있는 상태에서 절대로 흠 잡힐 일을 만들지 말아야할 김정일에게, 유명 원로 작가 집안 출신의 유부녀와 바람을 피우고 사생아까지 낳은 상황은 절대로 알려지지 말아야 할 비밀이었다. 이 때문에 동거녀 성혜림과 김정남의 존재는 여동생과 최측근 부하들 이외에는 철저히 비밀로 부쳐졌다. 그리고 비밀 유지를 위해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입막음을 구실로 전부 죄 없이 강제 수용소로 보내지기도 했다. 이런 황당한 일들은 단지 성혜림의 친구로 김정일과의 동거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전 가족이 요덕 수용소로 끌려간 뒤 탈북한 김영순이 쓴 <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라는 책에 나와 있다.
공식적인 결혼 후에도 김정일은 두번째 동거녀인 성혜림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했지만 성혜림은 김정일의 결혼으로 빚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한 불면증, 신경쇠약, 불안 발작을 일으켰다. 결국 성혜림의 어머니의 권유로 치료를 위해 모스크바로 떠난 뒤 계속 그 곳에 머물다가 2002년에 사망했다. 다만 그 전에 탈북한 이한영[40] 이 대한민국으로 망명시키려 시도했지만 이한영 본인이 피살되면서 무산됐다.
- 자녀
4.5.1.3. 김영숙
김일성이 직접 며느리감으로 선택했다고 알려진 여자다. 김영숙의 아버지는 청진공산대학 부학장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성혜림과 동거 중이였던 김정일은 아버지의 명령으로 김영숙과 억지로 결혼했으나, 관계가 별로 좋지 않았는지 성혜랑의 수기에 따르면 여동생 김경희가 결혼식에 데려가려고 사택에 찾아왔을 때도 자는 척하며 가지 않으려고 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김영숙이 김정일의 유일한 정실 부인인 셈인데, 김영숙에 관한 정보라고는 고향과 아버지 직업 정도밖에 알려진게 없다. 고향은 함경북도 청진시. 김정일과의 사이에서 두 딸 김설송, 김춘송을 낳았다고 알려져 있는데[41] 이 두 자매도 밝혀진 정보가 딱히 없다.
4.5.1.4. 고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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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에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서 1962년에 재일교포 북송 사업으로 북한에 귀화하여 1970년대 초반부터 만수대예술단에서 무용수로 활동하였다. 1970년대 중반부터 김정일과 사귀기 시작 1976년에 고용희와 동거하기 시작했고 80년대에 김정일의 두 아들인 김정철과 김정은, 딸 김여정을 낳게 된다. 13년동안 김정일 일가의 밥상을 책임지고 고용인들도 그녀를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등, 정실 부인과 같은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후 유방암으로 2004년에 프랑스 파리에서 사망. 오랫동안 '고영희'로 알려져 있었으나 '고용희'가 맞는 것으로 밝혀졌다.
4.5.1.5. 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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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아래 사진을 제외한 나머지 사진은 김옥이 아니라 김선옥이라는 전혀 다른 여성이라는 의견이 있다. (링크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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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년 <우리의 지도자>라는 화보집에 뒷편에 보이는 김옥이 어쩐 이유에서인지 몇년 뒤 사진에서는 지워져 있다.
고용희 이후 5번째로 김정일의 부인이 된 여성은 김옥이었다. 김옥은 1964년생으로 평양음악무용대학(현 평양음악대학)을 졸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왕재산경음악단에서 활동하다 김정일의 눈에 들어 1980년대 초반부터 서기실(비서실) 과장으로 근무하며 가까운 거리에서 그를 보좌해왔다.
고용희와 마찬가지로 김정일의 비밀 파티 등에도 참석했고 수행 비서에서 간호사 역할까지 맡아 최측근으로 보좌하다가 1990년대 말부터는 고용희가 낳은 아이들을 대신 맡아주는 역할을 해왔다고 한다.고용희의 두 아들 김정은과 김정철은 김옥을 존칭없이 옥이라고 불렀지만, 김정일의 총애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고위간부들은 그를 동지로 존칭했다.
평소에도 김옥과 친자매처럼 사이가 좋았던 고용희는 이 시기 중병으로 몸이 온전하지 않았던 상태였고 자신이 직접 김옥에게 '내 뒤를 이어 김정일과 자식들을 보필해달라' 고 부탁할 정도였다고 한다.
김정일의 전속요리사 후지모토 겐지의 증언에 의하면 그녀는 김정일이 먼저 질문하면 대답할 뿐 언제나 유령처럼 조용히 김정일 곁에서 있었다고 하며, 야심이나 권력욕 같은 것은 전혀 없는 소박하고 헌신적인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충분히 껄끄러울 수 있는 고용희와도 친자매 같은 좋은 사이를 유지하며 가족처럼 지낼 수 있었다고 한다.
다만 김옥이 김정일 사이에 자식을 만들었다는 설도 있고, 김정은이 집권 직후 김옥을 숙청했다는 설도 나도는 등, 엇갈리는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 하지만 숙청설의 경우 일단 표면상으로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 김정일 사후 제정된 김정일 훈장의 수상자 중에 김옥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는 적어도 막후의 영향력은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김정은 집권 3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도 없는 것을 봐서 그다지 대접받는 처지는 아닌듯하다.
5. 대외적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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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유행했던 짤방. 일명 로켓몬스터 핵지우와 피카동[42] (…)
북한 내에서부터 정치범수용소 같은 각종 개막장 정책들로 인하여 북한 주민 2500만명의 삶을 완전히 개판으로 몰고 간 것 때문에 원래도 아는 사람들에겐 유명했다. 그러나 21세기에도 심심하면 질낮은 국제적 깽판을 쳐댄 통에, 점차 해외 대중들에게도 그 존재감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몇 가지만 추려서 나열해봐도 납북, 선동, 조작, 먹튀, 억류, 협박, 고문, 사치, 공개 처형, 마약 밀매, 무기 밀매, 위폐 발행, 무력 시위 등등 일일이 나열하기엔 공간이 부족할 지경. 특히 2009년부터 핵폭탄과 장거리 미사일을 개발하여 세계 평화도 위협하고 있다. 북한의 핵무기 능력은 아직 미약하다는 평가가 있고 그냥 기득권 지키려고 그런 뻘짓을 하는 것이라는 평가도 있어서 이걸로 진짜 사고 칠지는 미지수지만, 이 쯤 되면 그야말로 '''영화에 나오는 전형적인 악당 최종보스들이 흔히 밟는 왕도'''를 제대로 밟아가면서 독재자 계의 클리셰로 등극했다. 특히나 외모 관리(?)는 어느 정도 했던 다른 독재자들과는 달리, 땅딸막한 키에 뽀글거리는 파마, X색의 볼품없는 인민복에 통통''' '''한 몸매가 묘한 시너지를 일으켜서 강렬한 개성을 자랑하는고로 나름대로 특이한 캐릭터성도 제대로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다.
아무튼 이로서 그는 지구촌 뉴스에도 자주 등장하였으며 덕분에 국제적인 유명인사(?)가 되는 위업을 달성했다. 그나마 오사마 빈 라덴, 무아마르 알 카다피, 사담 후세인 정도가 이에 비견될 만한 악당이었으나, 빈 라덴과 후세인은 미국에게 '사냥감'으로 낙인 찍혀서 죽었고, 카다피도 결국 자국민에게 비참한 꼴로 사살당하고 시체까지 부관참시를 당하는 등 망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일단 김정일은 제대로 천수를 누리다 갔기에…
그 때문인지 '''일본 애니메이션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한국인'''이며 일례로 비밀결사 매의발톱단 THE MOVIE- 총통은 두번 죽는다에도 등장했다. 북미권에서도 김정일을 풍자한 짤이 무수히 쏟아져 나올 정도. 심지어 예전엔 김정일 코스프레까지 하는 일본인이 있었을 정도였다. 특히 미국 영화 트레이 파커와 맷 스톤[43] 의 팀 아메리카: 월드 폴리스에서는 대놓고 악당으로 출연하여 엄청나게 까이다가 마지막에 그가 바퀴벌레였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6. 풍문
6.1. 친동생 살해설
1950년대 말 북한의 로동당부위원장 보좌관을 지냈던 리기봉이 지은 책 ‘김정일은 어떤 인물인가’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김정일을 둘러싼 7가지 미스터리
“김정일은 어린 시절부터 악동이었고 벌레를 발견하면 밟아죽였다. 1945년 해방 후 김일성의 집은 평양시 중구역 만수동에 있었다. 1948년 초여름, 그 연못에서 동생 슈라(한국명: 김만일, 당시 4세)가 익사했으며 6살이었던 김정일은 현장에 함께 있었다. 후에 알게 되었지만 형제는 연못 가장자리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먼저 연못에서 나온 김정일이 뒤따라 연못에서 기어올라오는 동생을 몇 번이나 물속에 다시 집어넣었다고 한다.”
북한에서 탈출한 전직 외교관 고영환도 자신의 책 ‘망명 고관이 본 김정일’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적고 있다.
"1945년 해방 후 김일성의 집은 평양시 상수구리[44] 에 있었다. 1946~1948년 초여름 김일성의 아들인 유라(김정일)와 슈라(김만일)가 여기에 있는 연못에서 함께 놀았다. 장난꾸러기였던 유라는 슈라에게 물을 억지로 먹이거나 다리를 끌어당겨 물 속에 빠뜨리곤 했다. 그러는 동안 둘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연못 가장자리로부터 점점 멀어졌다. 유라는 깊은 곳으로 점점 빠지는 것이 두려워서 4m 깊이의 연못에서 나오려는 동생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으며, 동생이 얕은 곳으로 가려고 하면 거꾸로 깊은 곳으로 밀어 넣었다. ‘어푸, 어푸’ 하면서 동생은 물을 마시고 있었으나 유라는 그것이 재미있었다. 그러나 ‘재미있는 곳에 함정이 있다’는 말처럼 동생은 익사해버렸다. 그 소식을 듣고 달려온 김일성은 ‘연못의 물을 전부 빼버리고 흙을 채우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오늘날 그 곳에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잔디만 자라고 있다."
이기봉과 고영환 두 사람의 기술은 시기는 다르지만, 흡사 사고를 목격한 것처럼 상세하다.
6.2. 친아버지 간접 살해 혹은 사망 방치설
[image] 출처는 이제 만나러 갑니다.
제1차 남북 정상 회담을 며칠 앞두고 사망한 김일성. 북한에서 공식적으로 밝힌 그의 사인은 심근경색에 의한 쇼크사였다. 하지만 김정일이 당시 악천후 속에서 굳이 헬기로 김일성을 호송하려 했던 일이나 특각에서 의료진을 모두 철수 시킨 일, 가까운 병원이 아닌 먼 거리에 있는 평양까지 옮겨 치료를 하려고 했던 일, 등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들을 했다고 한다. 그리그 그 후 김일성이 사망한 장소인 특각을 철거한 사실이 밝혀 지기도 했다.#
6.3. 참모 살해설
북한의 고위급 군관 중 한 명인 남일이 1976년에 남흥청년화학연합기업소 건설 현장 지도를 다녀왔는데 이 과정에서 정체불명의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했다. 하지만 도저히 교통사고가 날 각도가 아닌 곳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했다는 의문점이 남는다. 게다가 남일은 북한에서 김일성에 버금갈 정도로 인망이 두터운 데다가 미남이기까지 했다. 거기에 더해 군공은 되려 남일이 김일성보다 더 위였다. 커맨드 센터에서 지시만 내리다가 인천상륙작전으로 계획이 틀어지자 강계까지 도망쳤다가 송시륜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한 김일성과는 대조되게 남일은 진짜로 조선인민군 지휘관으로서 용감히 싸웠다. 이러니 설령 돌려가면서 집권한다 하더라도 김정일 보다 남일이 훨씬 우세했다.
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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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와 같은 해에 죽어서 나온 짤. 스티브 잡스의 명언 사진에서 인물만 바꾼건데, 잡스의 의미는 "헝그리 정신을 가지고 우직하게 밀어붙여라" 정도의 의미였지만, 김정일에게 붙여놓으면 그냥 "평생 힘없고 멍청한채로 복종하고 있으라"는 의미처럼 느껴진다.
고소공포증이 있었다고 한다.[45]
그의 영문이름 표기는 Kim Jong-il. i가 대문자 'I' 로 쓰일 때는 뒤의 소문자 'ㅣ'과 합쳐저 로마 숫자 II와 똑같아지므로 '김정 2세 / Kim Jong II(2)' 로 보인다. 실제로 일부 해외 사이트에서 이 사람을 "김정" 이라 부르는 이유가 이 때문이라 보면 된다. 비슷한 논리로 마지막 글자 '일'이 il, 즉 '아프다'는 뜻의 ill과 l 한글자 차이만 나는 관계로 김정일 투병 소식이 퍼지면 '이름이 김정일(ill)만 아니었어도…' 하는 조롱이 넷상에 올라오곤 한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대를 띄워주려는 북한 정권의 무 -한한 상상력은 끝이 없겠지만 2006년 충청남도 공주시에서 났던 산불이 김정일이 '''축시법'''[46] 이라는 기술로 낚은 군용기가 냈다고 주장한 적도 있었다.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노무현 전 대통령보다는 김대중 전 대통령 쪽이 취향인 듯하다. 두 대통령의 방북 당시 자료의 표정을 비교해보면… 사실 위의 성격 문단을 참조해보면 알 수 있듯, 또한 일생토록 자신의 뜻대로 모든 것을 해온 독재자임에서 충분히 추정할 수 있듯, 거칠고 직설적인 노 전 대통령보다는 온화하고 우회적 표현을 즐겨 사용했던 김 전 대통령이 보다 대하기 편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김대중 대통령에게 대놓고 호남 사람이라 집요하다고 혹평하기도 했다.
김정일에 대한 일생을 자세히 다룬 다큐는 국내에서도 여럿 제작되었지만 가장 최근에(2011년 12월 김정일 사후) 제작된 다큐로는 '''<KBS 대기획 김정일 3부작>'''이 있다. 상세한 일생을 알고싶다면 참고하자.
패션관련기사에서 언제나 세계 제일의 워스트 드레서로 선정된다. 하지만 놀랍게도 베스트 드레서로 선정도 되었는데, "옷에 자신의 사상을 잘 투영했다"는 게 그 이유.
북한의 문자규격에는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의 이름에 사용되는 글자가 따로 특수문자로 입력되어 있다. 김일성과 마찬가지로 북한 '콤퓨터'에서 사용되는 북한 전용 폰트에서 그의 이름을 입력하면 반드시 '''김정일'''로 자동 강조되고, 특수문자화 된다.[47] 붉은별 같은 컴퓨터 운영체제는 물론 삼지연이나 아리랑 같은 조선식 운영체제 탑재 기기에서도 같은 기능이 있다. 그 외에 각종 서적이나 신문 등지에서도 반드시 그와 김일성의 이름은 강조체로 나온다. 추가로, 이 사람의 이름을 입력하면 그 이름이 반드시 줄의 맨 앞으로 오도록 자동정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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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을 매우 닮은 사람이 있는데, 김영식이라는 한국사람이다. 원래 도장 가게를 하던 분인데 김정일을 닮아서인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 나오게 되었고, 이 인연으로 서브컬처에서 김정일 역으로 많이 나왔다고. VJ 특공대 2012년 9월 7일 방영판에 나온 바 있다.
김정은을 후계자로 지목했을 때 이에 불만을 품은 김정남이 김정은을 죽이고 김정일을 유폐하고, 김정일은 남한으로 망명해 제2의 견훤이 되는 것 아니냐는 반 농담식의 예측도 있었다. 김일성의 충신으로 주체사상 정립에 크게 기여한 황장엽이 훈장을 받고 국립묘지에까지 묻히자 김정일도 귀순하면 크게 우대해주는 거 아니냐는 얘기에 기반한, 실현가능성이 없진 않으나 극히 적은 농담에 가까웠다. 물론 실제로 일어난 일은 역으로 김정은이 집권 후에 김정남을 암살해버린 당태종식 엔딩이었지만.
북한식 햄버거인 고기겹빵을 발명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나라살림이 어려워도 새 세대는 튼튼하게 키우고 싶다"면서 “돈이 얼마든지 들어도 좋다”며 고기겹빵 공장을 건설시켰다는 주옥같은 명언은 덤. 이 일화는 트로피코 5에서도 소개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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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식물학자가 베고니아의 일종인 '''김정일화'''라는 꽃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 사진을 찍은 사람은 영국인인데 어이없어했다고.
남조선에 대한 열폭이 심했다고 한다. 류경호텔도 63빌딩을 보고 빡친 김정일이 남조선이 63층을 쌓으면 자기네들은 딱 2배인 126층짜리를 쌓을 수 있다면서 시작한 것이고(훗날 기술적인 사유로 105층으로 변경), 1985년 방남한 북한 사절단이 남한제 자동차를 타고 회담지에 향했다는 말에 빡쳐서 부랴부랴 북한제 자동차를 만들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서독제 벤츠를 분해-복제하여 3년여 만에 유사품 10대 가량을 생산했는데, 멀리서 보면 그럴듯했으나 가까이서 보면 차체 표면이 울퉁불퉁하였고 그나마도 주행 중 계속 문제가 생겨서 견인차들이 늘 따라다니는 등 하다가 결국 유야무야됐다고 한다.
최진실 지옥의 소리로 알려진 모 교회의 고인드립 시리즈에서도 고인드립 대상이 되기도 했다. 뭐 당해도 싼 작자이긴 하지만. 참고로 그 애비도 이 교회에 의해 함께 고인드립당했다.
김정일에게도 최순실같은 존재가 있었다고 한다. 김정일의 생모가 죽은 뒤 '유영옥'이라는 보모가 그를 돌봐주었는데, 김일성에게 김정일에 관련된 보고를 올릴 때도 유리한 것만 모아 보고하는 등 알게 모르게 꾸준히 도움을 주었고, 이후 김정일은 유영옥을 '어머니와도 같은 분'으로 부르며 국정과 관련해 이런저런 조언을 받았다고 했다. 물론 이것은 북한 전체에서도 극소수만이 아는 비밀. 북한연구소에서 발간하는 잡지 '월간 북한' 2016년 12월 호에 어느 고위직에 있었던 탈북자의 증언을 통해 등장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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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가 매우 작다. 그래서인지 사진을 찍을 땐 항상 사다리 위에서 찍었다고 한다.
심지어 생전에는 세상에서 가장 키 작은 국가원수에도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김정일보다 더 작은 국가원수들은 있었으니...
8. 호칭 및 별명
개요 문단에서 설명했듯이 북한 내부에서는 공식적으로 '조선로동당 총비서이시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이시며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이신 우리 당과 우리 인민의 위대한 령도자'라든지 '우리당과 인민의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대원수님' 등 따위로 불린다. 또한 김일성이 '수령님'이어서 '장군님'이라는 별명이 있다. 그의 아들은 '대장님'.
한편 대한민국에서는 곱슬머리 때문에 '뽀글이'나 '뽀그리우스' 등으로, 심지어 북한 내부에서도 은밀하게 '추세머리'라든지 '고도' 등으로 까인다.
자세한 내용은 김정일/호칭 및 별명 문서 참조 바람.
9.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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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에모에 북조선 독본.
9.1. 드라마
- 1980년 KBS-TV 반공드라마 《붉은 왕조》에선 배우 민욱이 연기했다.
- 1982년 KBS1 반공드라마 《지금 평양에선》에서 중견배우 김병기가 맡아 유명세를 날렸으며, 1984년 6.25 연속기획 《함정》에서도 동일 배역을 맡았다.
- 1984년 MBC 6.25 특집드라마 《북위 38도선》에서 배우 김웅철이 맡았다.
- 1995년 MBC 드라마 《제4공화국》에서 배우 김윤형이 연기했다.
- 1998년 KBS2 드라마 《진달래꽃 필때까지》에선 배우 정동환이 연기했다.
9.2. 영화
- 1995년의 전설적인 망작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서는 김정일과 닮은 꼴로 유명했던 민간인인 김영식 씨가 분했다. 원작에는 김일성이 나오지만 영화 개봉 시점인 1995년에는 죽은 후였기 때문에 김정일로 교체된 듯.
- 《팀 아메리카: 세계 경찰》: 관심 받고 싶어서 미국의 유명 연예인들을 초대해서 세뇌하려는 사상 초유의 찌질한 계획을 세운다. 덤으로 김일성은 외계인.
- 《세균열도》에서 '장군'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배우는 다름아닌 타케나카 나오토.
- 2006년 강우석 감독의 《한반도》에서는 백일섭이 분해서 영화 시작에 잠깐 나온다.
- 안젤리나 졸리 주연의 《솔트》에서 잠깐 언급되는데 미국과의 협상 끝에 안젤리나 졸리를 석방하기로 결정한 모양.
- 2018년작 《공작》에서 기주봉이 연기한 역할로 그 퀄리티가 실제와 거의 복붙수준이라(...) 많은 관객들을 놀래켰다. 이렇게 실제와 흡사한 퀄리티가 나올 수 있었던 건 CG가 아닌 특수분장덕이었다고...[단독] '공작' 기주봉 "김정일과 똑같다는 칭찬, 감사하다"(인터뷰②)(...)
- 2006년작 《일본이외 전부침몰》에서는 마지막에 웨이터로 변장해서 일본 총리에게 접근했다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게 원인이 되어 그나마 유일하게 남아있던 일본 역시 침몰한다.
9.3. 소설
- 스탈린의 편지: 동북아전쟁 중에 김일성이 김정일과 다른 자식들을 내버려두고 도망갔다. 여기서 김정일은 아버지에게 두드려맞은 트라우마 때문에 자기 발바닥을 물어뜯는 괴상한 버릇이 생겨버렸다. 김일성이 처형당한 후 김정일은 동생들과 함께 미국 알래스카 주에 사는 한 네이티브 아메리칸 물개 사냥꾼인 왈라스 헤지호그에게로 입양 가게 된다.
- 스웨덴 작가 요나스 요한손의 소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에서는 1953년 당시 12살이었던 김정일이 등장하는데, 이때 김정일은 메레츠코프를 사칭하는 주인공 알란 엠마누엘 칼손을 진짜 메레츠코프로 여기고 따랐다가[48] 김일성에 의해 가짜임이 들통나고, 때마침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평양직할시를 거쳐 기어이 선양까지 쫓아온 진짜 메레츠코프가 들이닥치자 칼손을 향해 "죽여버리겠다!"며 길길이 날뛴다. 그러다가 때마침 김일성과 회견차 선양에 와 있던 마오쩌둥이 그가 전에 자신의 처 장칭을 국부군에게서 구해준 사실을 알게 되고, 메레츠코프 역시 그가 자신의 원쑤이기도 한 베리야 원수에 의해 블라디보스토크 굴라그로 유배된 사실을 알게 되면서 분위기가 뒤바뀌는데, 이때에도 분위기 파악 못하고 "저놈 당장 죽여버려라"며 날뛰다가 김일성에게 싸대기를 맞는다. 영화 버전에서는 아버지인 김일성과 함께 시원하게 잘렸다.
- 3차대전(소설)에서는 북한 내부의 대혼란으로 인해 생사조차 불명인 상태가 되었다고 언급된다.
- 3차대전의 작가인 김경진의 다른 소설인 남북과 데프콘에서도 등장하지만 모두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 경애하는 수령동지: 주인공인 김일성의 숨겨진 사생아 김정환의 첫번째 중간보스로 등장한다. 주인공의 연기에 속아넘어가 김정환이 자신의 권위에 도전할 생각이 없다고 방심하여 김정환이 막대한 비자금을 모으고 프룬제 일파와 장성택 등을 포섭하도록 놔두는 사태를 만든다. 주인공이 류경호텔을 붕괴시켜 김정일을 압사시키려 하지만 운 좋게 살아남는다. 그러나 붕괴사고로 김일성의 신임을 잃자 더 신임을 잃기 전에 자기 아버지를 비소로 독살하려 하고, 이 사실을 김일성이 알게 되어 김정환 편으로 돌아서면서 결국 김정환에게 정권을 빼앗긴다. 대외적으로는 김정일을 암살한 반역자들을 진압한 김정환이 그 뒤를 이은 것으로 보도되었으나 사실은 김정환에 의해 비밀리에 총살된 뒤 화장되었다.
9.4. 만화
- 도시정벌: 정치적인 문제라 그런지 이름을 약간 바꿨다. 상당한 개념인. 스스로의 권력을 내려놓고 대한민국에 흡수 통일시키려고 한다. 그때문에 반대파에게 습격당해 혼수 상태에 빠지기도.
-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 쫓겨났다가 자신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 통일을 언급하며 피터팬을 끌어들인다. 그러나 일이 끝나고 배신했다가 끔살.
- 헌터×헌터: 동고르트 공화국의 지도자를 보면 딱 김정일을 모티브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라 돌아가는 꼴만 봐도…
- 웹툰 스틸레인에서 시작과 함께 사망한다.
- IDW 트랜스포머 G1 코믹스에는 김정일을 모티브로 한 김종두(트랜스포머)가 등장한다.
9.5. 애니메이션
- 심슨 가족: 일반적으로 서양에서 생각하는 전형적인 김정일의 이미지. Italian Bob 편에서 미사일을 쏘는 장면이 유명하다. 또한 김정일을 찬양하는 노래인 척 하고 실상은 북한 사회와 김정일을 까는 노래를 부르는 에피소드가 있다. 그 중 "I는 그가 금지한 인터넷"이 압권.[49]
- 중년탐정 김정일: 해당 항목 참조.
9.6. 게임
9.7. 광고
스프라이트(음료)의 패러디 광고.
네덜란드의 보험회사 델타 로이드의 광고에 나오는 김정일. 2001년 광고다. 하지만 김일성, 장성택을 더 닮았다. 참고로 주인공은 얼핏 보면 김정남과 닮았다. 한글이랍시고 나오는 문자는 히라가나 닮은 기하학적 문양(…)이며,[50] 등장인물들의 대사는 차라리 중국어와 비슷하게 들린다. 다만 퍼레이드에서 울려퍼지는 남녀 목소리는 북한말의 백마스킹. 녹음과 백마스킹이 가능한 위키러는 확인해 보자.
9.8. 기타
- Epic Rap Battles of History: Episode 5에서 헐크 호건을 바주카포로 공격한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마초맨이 태그로 난입한다.
- 필라델피아는 언제나 맑음: 시즌3 6화에서 경쟁하는 맥주집은 한국인이 경영하는데 여주인의 옷과 모습이 영락없는 김정일이다.
10. 관련 문서
- 김정일장군의 노래 - 애비의 찬양곡보다 더 웅장하다.
- 고난의 행군
- 6군단 반란사건
- 심화조 사건
- 송림제철소 학살 사건
- 기쁨조
- 정치범수용소/북한
- 북한/대남 도발 - 대다수의 도발이 김정일의 직간접적인 지령으로 인해 일어났다.
[1] 1980년 10월의 당대회 직후 金正一에서 金正日로 개명함. [2] 북한식의 변형된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을 쓰기에 이렇다. 기존 매큔 - 라이샤워 표기법으로는 Kim Chŏngil이 된다. 북한/로마자 표기법 참고. 해당 표기법에서는 변별 기호를 생략할 수 있다고 해 두었기에 Kim Jong Il이라는 표기도 널리 쓰인다. 한편 대한민국에서도 매큔 - 라이샤워 기반의 다소 변형된 표기법을 1984년부터 2000년까지 쓴 바 있으나, 이후 개정된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을 쓰고 있다.[3] 북한에서는 42년생이라고 공식적으로 주장한다. 김일성 생년과 딱 30년 차이가 나게 맞추려는 의도로 추정된다. 같은 이유로 김정은 역시 1984년 생이나 김일성, 김정일과 맞추기 위해 북한 내에서는 공식적으로 1982년생으로 홍보하고 있다.[4] 북한에서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북한 양강도 삼지연시 백두산 밀영(密營, 주둔지)(당시 기준으로는 함경남도 혜산군 보천면 일대)에서 태어났다고 한다.[5] 공교롭게도 김일성의 탄생 100주년을 4개월 정도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6] 자신이 자주 타고다니던 태양호에서 과로로 사망했다고 한다.[7] 160~166cm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8] 처조카 이한영씨의 증언. 이씨는 김정일과 아들 김정남 두사람이 계단오르기를 하며 다이어트를 하는것을 자기도 똑같이하며 도와줬다고 밝혔다.[9] 최은희씨의 증언 증거[10] #[11] 미국의 유명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에도 등장한다.[12] 북한 정권은 김정일이 1942년 2월 16일 양강도 삼지연군 백두산 밀영(密營, 주둔지)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연히 이는 우상화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진다. 김일성의 후계자로 낙점된 1974년에는 그의 출생연도를 '1941년'으로 밝혔다가, 1982년부터는 '1942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김일성과 김정일의 나이차를 꺾어진 숫자(10-20-30-...)로 맞추려고 고의로 출생연도를 늦춘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 기사[13] 삼촌 김영주는 김일성의 집권 초기부터 함께한 동지와 같은 입지여서 김정일에게는 가장 큰 정적이었으나, 김정일이 후계자로 낙점된 이후로는 적절한 선에서 타협하고 2선으로 물러났다. 한편 계모 김성애와 이복동생 김평일는 호시탐탐 김정일을 제치고 권력을 차지하려고 했으나 김정일의 정치공작에 휘말려 그나마 갖고 있던 권력마저 잃고 내쫓겨났다. 김평일은 2020년 기준으로 대사관저에서 본국으로 송환당해 가택연금상태에 있다.[14] 이 경호원은 1994년에 북한을 탈출하려 했지만 발각되어 수용소에서 끔찍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김정일의 사면을 받고 간신히 풀려난 후 어찌저찌 재차 탈북에 성공하여 남한에 살고 있다. 여담으로 이 사람은 남한에 온 다음에야 김 부자가 독재자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15] 저녁이 되어 대답을 재촉하자 정동영 문화부장관이 "민족의 뜨는 기상을 표현한 뜨는 해 아니냐??" 라고 묻자 "아침에 보면 뜨는 해, 저녁에 보면 지는 해"라고 했다고.[16] 일본의 스탭까지 초청했다.[17] 대장금에서의 그녀의 연기에 극찬을 아끼지 않으며 "왜 우리는 저런 아름답고 우아한 여배우가 없냐"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방북했을 당시 이영애가 출연한 작품 DVD 다수를 김정일에게 선물하자 무척 좋아했다고.[18] 취소선이 그어진 항목이지만, 실제로 최은희가 김정일의 목소리를 녹음했던 1980년대 당시, 한국의 영화 수준은 대학생 정도인데, 북한의 영화 수준은 유아 수준이라고 혹평했다.[19] 마리오 카트를 좋아했다고 한다...[20] 북한이 자체적으로 개최하는 피겨 스케이팅 대회인 것으로 추정되며, 2011년 기준 20회째다.[21] 김정일은 꼭 독일산 벤츠 자동차를 탔다. 김정일은 차 값을 금괴로 결제, 벤츠사 최고 고객 중 한 명이었다. 별장 내에서만 사용하는 번호판 없는 벤츠도 많았다.[22] 보석류, 향수, 시계, 전자제품, 여자 의류, 여자 신발류, 핸드백 등[23] 순수한 떡 가격은 100엔 정도, 나머지는 여비, 운송비 등 부대비용이었다고 한다. 1980년대 물가임을 감안하면 지금의 3만원~5만원이다.[24] 후지모토 겐지의 <김정일의 요리사>, 리한영의 <대동강 로열패밀리> 등의 증언을 취합하면, 이건 보통 쌀밥이 아니고 평남 문덕군의 전용 농장에서 재배한 쌀 중에서도 '''사람 손으로 일일이 깨진 것과 모양이 고르지 않은 것을 골라낸 것'''을 가마솥에 백두산 땔나무를 때서 지은 쌀밥이었다.[25] 일본어이며, 우리말로 나도팽나무버섯이라고 한다.[26] 중국 절강성 항주에서 생산되는 고급 녹차.[27] 알콜 도수 50%짜리 술 두 병을 마시고도 끄떡없었다는 증언이 있다(...). 흠좀무.[28]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의 건강과 장수를 관리하는 연구소[29] 개구리 기름 등 단순 별미가 아니라 특정 신체기능에 좋다고 먹었다는 음식들은 실제로 효과가 있을지 불분명함을 명시한다.[30] 사실 박정희 시절에 한국이 잘살게 되면서 이를 본 김정일 말에 의하면 '''"인민은 배가 고파야 한다. 인민이 배부르면 우리에게 더 큰 요구를 할 것 이다. 죽지 않을 만큼만 먹여야 한다. 배가 고파야 우리를 더 잘 따라 올 것 이다. 인민이 배부르면 딴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인민이 배부르면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사치품을 찾기 때문에 인민은 늘 배가 고파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노예를 부리는 고도의 술책인데 김정일이 이를 알았던 것이다. 실제로 김정일은 김일성 앞에 " 인민들은 배부르면 기어 오른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31] 하태경의 <만화 김정은> 발췌.[32] 열린북한방송의 <만화 김정은>에서 발췌.[33] 웃긴 건 국방비에 최대로 투자했다는 결과가 이거다. 즉, '''본인 즐길 거 다 즐기고 남는 예산을 국방비로 쓴다'''는 소리.[34] 물론 국민들 다 굶어죽어 가는데도 정권 유지하는 게 잘했다는 것은 아니다. 연합군의 폭격을 맞고 소련의 기갑 웨이브가 몰려오는 상황에서도 악착같이 절멸 수용소를 돌려 유대인들을 학살한 나치 독일의 관료제와 체계적인 일처리 솜씨를 뛰어나다고 칭찬해야 할까?[35] 1997년 남파간첩에게 암살당했다.[36] 최준덕은 김정일의 첫사랑이자 두 번째 부인인 성혜림의 묘지기였다. 김정일의 최측근이며 김정일 서기실(비서실)의 2인자였던 그는 김정일과 함께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를 다니다가 모스크바로 유학, 러시아통이 됐으며 러시아어에도 능통하다. 그는 본처 자리를 빼앗기고 신경쇠약과 우울증에 시달린 성혜림이 치료를 위해 1974년 모스크바에 머물자 성씨를 돌보는 역할을 했다.[37] 웃기는 소리지만 기쁨조는 사실 여군들로, 중위나 대위 계급을 받고 있다.[38] 엄밀히 따지면 둘째 부인이라는 김영숙이나 슬하의 김설송 김춘송도 알려진게 별로 없어서 불확실한 인물들이다.[39] <김정일 로열패밀리>라는 책의 저자인 리한영(본명: 리일남)의 어머니이기도 하다.[40] 성혜림의 언니 성혜랑의 아들[41] 이 두 자매들은 고모 김경희처럼 백두혈통 적통공주들이라고 할 수 있다.[42] "비까동(직역하면 '번쩍-쾅')"은 사실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 당시 피폭자들이 원폭을 불렀던 별명이다.[43] 이 2명은 사우스파크의 제작자이기도 하다.[44] 한 차례 평양특별시 중구 영문동으로 바뀐 다음, 지금의 평양직할시 중구역 만수동으로 바뀜.[45] 그래서 전용기보단 기차인 태양호를 더 애용했다고...[46] 오탈자가 아니라 정말 저렇게 썼다. '''시간을 주름잡는 기술(?!)'''이라나.[47] 이 때문에 북한 프로그램으로 작성한 텍스트를 다른 나라의 프로그램에서 실행시키면 김 부자의 이름이 깨져서 나온다.[48] 사실 보자마자 곧바로 따른 건 아니었고, 진짜로 스탈린이 보낸 사람이 맞는지 스탈린에게 직접 물어보려고 했다. 심지어 알란이 도청의 가능성을 제기하자 스탈린과 자신만이 알고 있는 별칭으로 핵심 질문만 간단히 하자는 생각을 꺼내 나름대로 알란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하지만 스탈린이 전화 몇분전에 사망하면서 실패. [49] 실제로 북한에서는 광명망이라는 인트라넷을 쓴다. 진짜 인터넷은 외국인이나 고위층들만 쓸 수 있으며, 이마저도 감시하에 써야 한다.[50] 사실 한글을 모르는 입장에서 한글을 보면 직선, 원, 사각형밖에 안 보인다고 하지만 적어도 한국어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 자문을 구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