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철(1913)
朴成哲
1913년 9월 2일 ~ 2008년 10월 28일
1. 개요
일본, 중국, 한국, 소련의 공산주의자. 북한의 정치인.
2. 생애
1913년 경상북도 경주군에서 태어났다. 한때 1912년 함경북도 길주 출신설이 있었으나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길주에서 보통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하고 부모를 따라 만주로 건너가 간도 용정의 대성중학을 다녔으며 이때 김일(북한) 등과 공산주의 학생조직에 가입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는 바람에 이곳도 중퇴하였고, 도일하여 일본 조치대학을 다니다가 1934년 3월 일본 공산당에 입당했다. 1934년 4월에 만주 항일 빨치산에 합류했고, 1936년에는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중국 공산당이 지휘하는 동북항일연군 제5군교도 제1대 청년대원으로 복무했다. 귀국 후 조선공산당에 가입하고, 1936년부터 만저우리에서 활동하던 김일성을 지원하여 자신이 일하던 팔도구 광산의 다이너마이트를 제공하였고 그와 함께 빨치산에 합류하였다가 이 인연으로 그는 김일성 빨치산 부대에 합류하였으며 김일성의 삼촌인 김형록의 사위가 되어 김일성의 종매부가 됨으로 김일성 일가의 일원이 된다. 1940년 10월 소련 영내로 들어가서 1942년 7월 항일연군 교도려(敎導旅, 소련극동방면군 제88보병여단)에서 하급 지휘관으로 활동했다.
광복 이후 김일성과 함께 귀국하여 보안대 간부 양성을 위한 평양학원과 보안간부 훈련소 부원장, 3.8경비대장 등을 역임했고 대좌계급을 받고 1948년 조선인민군 3사단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1950년 3월, 중장으로 승진, 15사단장에 임명되어 6.25 전쟁에 참전하였다. 1950년 8월, 영천 전투에 참여하였으나 대구가 아닌 고향 경주로 진격하다가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에 참패하여 패주했다. 이후 1953년 7군단장에 임명, 정전 후 민족보위성 정찰국장직을 마지막으로 예편하여 1954년 8월 불가리아 공사에 임명됨으로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1955년 5월, 불가리아 대사로 승진했으며 1956년 8월에 귀국하여 중앙위원회 국제부장, 10월에 외무성 부상에 임명되었다.
1957년 최고인민회의 2기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959년 외무상 남일의 뒤를 이어 후임 외무상이 되었다. 1961년 9월, 조선로동당 제4차당대회에서 조평통 중앙위원회 위원,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서열 24위 위원에 임명되었으며 1962년 10월 최고인민회의 3기 대의원에 선출, 외무상에 유임되었다. 외무상으로 재직하면서 아프리카, 남미를 대상으로 한 비동맹 외교에 주력하며 1975년 북한의 비동맹 기구 가입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하였다. 그의 외무상 경력은 무려 11년에 달한다.
1964년 6월 현재의 정치국에 해당하는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고, 66년 10월 정치위원회 위원, 내각 부수상에 임명되었다. 67년 4기 최고인민회의에서도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내각 부수상 겸 외무상에 유임되었다. 1969년 4월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에 임명되었으며 7월, 외무상에 해임되어 내각 제2부수상에 임명되었다. 1970년 11월 조선로동당 제5차당대회에서 정치위원에 재선출, 중앙위원회 서열이 4위에 이르렀으며 1972년 5월, 건강이 좋지 않았던 조직지도부장 김영주(북한)을 대신하여 남북조절위원회 북측위원장 대리 자격으로 서울을 방문하여 박정희 대통령과 회담하여 7.4 남북 공동 성명을 이끌어냈다. 서울의 경험에서 상당한 충격을 받은 그는 평양으로 돌아간 후 김일성에게 자본주의 국가의 투자를 유치할 것을 제안했지만 김일성은 막대한 돈을 빌려와 모조리 떼먹었다.(...) 1973년 6월의 3차 남북조절위원회 본회의에서도 김일성의 지령에 따라 주한미군 철수, 국군 10만명 감축, 남북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를 어거지로 요구하면서 남북대화도 신통치 않았다.
1972년 12월, 사회주의 헌법이 채택되면서 최고인민회의 5기 대의원, 중앙인민위원회 위원, 정무원 부총리 겸 인민봉사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이렇게 정치적으론 잘 나갔지만 여자 관계가 문란하여 이혼을 거듭하였고 1977년, 자신보다 무려 23살이나 어린 황씨 여자와 4번째로 결혼하였다. 1976년 4월 정무원 총리에 임명, 1977년 12월 외교담당 국가 부주석에 올랐다. 다만 총리직은 신통치 않아 얼마 안가서 리종옥에게 자리를 내주게 된다. 1980년 6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위원에 다시 선출되었으며, 1982년 7기 대의원에 선출, 1982년 국가 부주석,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에 유임되고 김일성 훈장을 수훈받았다. 이후 1986년 최고인민회의 8기, 1990년 최고인민회의 9기에서 모두 국가부주석,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으로 재선출되었으며 1991년 8월 조국전선 중앙위원회 공동의장을 맡았다. 1992년 4월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1993년 9월 2번째로 김일성 훈장을 수훈받았다.
1994년 김일성 사망 후 김일성 국가장의위원회 위원을 맡았으며 1995년 오진우가 죽은 후에도 장의위원을 맡았다. 1998년, 최고인민회의가 다시 선출되면서 10기 대의원 및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이 되었으며 2003년 11기 최고인민회의에서 재선출되었다. 북한의 외교 마스코트로 엄청나게 활발한 해외 순방 및 국내 행보를 밟아왔으나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스레 활동이 뜸해졌고 강등설, 숙청설까지 돌았으나 사실무근이었다. 그러다가 2008년 10월, 9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3. 참고문헌
- 와다 하루끼,『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파주: 창비, 2014)
- 통일부 정세분석국 정치군사분석과, 『2020 북한 인물 주요정보』(서울: 통일부, 2020)
- 한헌준, 「북한인물론3: 북한 외교계의 노장,박성철」 『北韓』219 (19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