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안나

 

[image]
'''이름'''
마리아 안나 요제파 안토니아
(Maria Anna Josepha Antonia)
'''출생'''
1738년 10월 6일
신성 로마 제국 오스트리아 호프부르크 궁전
'''사망'''
1789년 11월 19일 (51세)
오스트리아 클라겐푸르트
'''아버지'''
프란츠 1세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
'''형제'''
마리아 엘리자베트, 마리아 카롤리나, 요제프 2세, 마리아 크리스티나, 마리아 엘리자베트, 카를 요제프, 마리아 아말리아, 레오폴트 2세, 마리아 카롤리나, 요한나 가브리엘라, 마리아 요제파, 마리아 카롤리나, 페르디난트, 마리아 안토니아, 막시밀리안 프란츠
1. 소개
2. 생애
2.1. 장녀의 대우를 받다
2.2. 병약함과 지성
2.3. 사이좋은 남매
2.4. 수녀가 되다
2.5. 자유로운 지적 탐구 생활을 하다


1. 소개


프란츠 1세마리아 테레지아의 2녀(1738~1789). 풀네임은 마리아 안나 요제파 안토니아(Maria Anna Josepha Antonia)이다. 애칭은 마리안나(Marianna)였다. 막내동생 마리 앙투아네트가 친지들에게는 앙투안느라는 애칭으로 불린 것처럼 '마리아 안나'라는 긴 이름 대신 애칭으로 불리웠다. 건강에 큰 문제가 있었던 탓에 평생 결혼하지 않고 수녀가 되었다.

2. 생애



2.1. 장녀의 대우를 받다


차녀였으나 마리아 테레지아가 즉위하기 전에 언니 마리아 엘리자베트가 사망했기 때문에 사실상 장녀나 마찬가지였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즉위하고 나서 동생 요제프가 태어나기 전인 1741년까지는 추정상속인이 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2.2. 병약함과 지성


[image]
마리아 테레지아의 자식들 중 맏이임에도 불구하고 모후의의 사랑을 거의 받지 못했다. 태어난지 바로 다음 해에 후계자인 요제프가 태어났고, 다른 동생들인 마리아 엘리자베트와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모후의 사랑을 독차지했기 때문이다. 마리아 엘리자베트는 그 미모로 인해 어머니의 사랑을 받았고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유별난 편애의 대상이었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한 이유에는 건강 문제가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병약하여 건강이 좋지 못했고, 19세가 되는 해에는 심각한 폐렴을 앓아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그러나 폐렴의 후유증으로 등뼈가 굽고 영구적인 호흡기 장애를 앓아 임신과 출산이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병약하긴 해도 그전까지는 오가던 혼담이 있었으나, 귀족 여성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인 후계 생산 능력을 잃자 마땅한 결혼상대를 찾지 못했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능력 면에서는 매우 총명하고 성실하며 비상한 지능을 가졌다. 마리아 안나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자식들 중에 가장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가졌고, 모든 학문에 대해 놀라울 정도의 이해력을 보여주었다. 어렸을 때 교양으로 익힌 음악이나 기초적 인문학을 넘어서서 철학, 물리학, 화학, 고고학 등 학문 전반에 대해 능력을 보였다. 그러나 딸이라는 이유로 지적 능력들은 빛을 보지 못했으며 아버지인 프란츠 슈테판만이 이를 알아주고 사랑해주었다. 어머니가 가장 총애하는 자식이 마리아 크리스티나였다면 아버지가 가장 총애하는 자식은 마리아 안나였다.[1] 마리아 안나는 아버지와 학문에 대한 관심을 공유했으며, 프란츠 슈테판이 사망한 이후에는 아버지의 개인 유품들을 상속받기도 했다. 마리아 안나가 상속받은 유품 중에는 프란츠 슈테판의 동전 컬렉션도 있었는데, 그녀는 이를 완성하여 박물관에 기증하였다. 마리아 안나는 어머니의 정치에 대한 책을 쓰기도 했으며, 그녀의 그림은 단순한 취미 수준이 아니라 전문 화가 급이었고 평론가들에게도 호평을 받았다. 그녀는 빈 예술학교의 명예회원이었고 피렌체 예술학교의 정회원이었다.

2.3. 사이좋은 남매


이처럼 뛰어난 교양과 재능에도 불구하고 장애가 있었기 때문에 가족들 간에서 따돌림을 당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동생 요제프와 그 아내 이사벨라, 그리고 모든 형제들의 공적인 마리아 크리스티나를 제외하고는 가족들과 사이가 좋았다. 특히 아래 동생인 마리아 엘리자베트와는 절친한 사이로 죽을 때까지 함께 살았다. [2]
또한 (사실상의) 장녀였고 독신이었기 때문에 궁정에서 각종 행사를 주관하는 역할은 마리아 안나의 몫이었다. 예컨대 막내여동생 마리아 안토니아의 세례식은 처음부터 끝까지 마리아 안나가 주관한 행사였다.
남동생 요제프와는 원래 좋은 관계였으나, 그가 파르마의 이사벨라와 결혼한 이후에는 이사벨라와 사이가 나빠지면서 덩달아 요제프와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이는 나중에 두 남매가 화해하기 전까지 앙금으로 남아 마리아 안나의 자선사업을 요제프가 방해하거나 재산 문제로 다투게 되는 등 갈등이 있었다.

2.4. 수녀가 되다


1765년 둘째 남동생 레오폴트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온 가족이 인스브루크로 떠나던 중 클라겐푸르트에 잠시 체류하게 되었는데, 마리아 안나는 성 엘리자베스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작은 수녀원에 방문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녀는 큰 감명을 받았는데, 그곳의 수녀들은 마리아 안나의 외모에 전혀 개의치 않았으며 평생 처음으로 외모로 인한 컴플렉스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같은 해 인스브루크에서 아버지 프란츠 슈테판이 뇌졸중으로 사망한 후,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리아 안나는 수녀가 되었다. 이후 아래 여동생인 마리아 엘리자베트 또한 마리아 안나의 영향으로 수녀가 되었는데, 유별나게 사이가 좋았던 두 자매는 이후 죽을 때까지 함께 살았다. [3]
1766년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녀를 프라하의 황실수녀원의 수녀원장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마리아 안나는 자신이 깊게 감명받았던 클라겐푸르트의 작은 수녀원을 마음에 두고 있었기에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771년 황실수녀원을 떠나 클라겐푸르트의 수녀원 근처에 작은 궁을 지었다. 1780년 마리아 테레지아가 사망한 이후에는 남동생 요제프 2세가 궁정에 남아있던 자매들을(마리아 안나, 마리아 엘리자베트, 마리아 크리스티나) 추방하듯 내쫓았기 때문에 이후부터는 클라겐푸르트의 수녀원에서 거주했다. 나중에 요제프와 화해하기는 했지만 마리아 안나는 빈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2.5. 자유로운 지적 탐구 생활을 하다


분명 쫓겨난 것이나 마찬가지였긴 하지만, 그녀의 지적 능력이 제한될 수 밖에 없는 궁정 생활에서 벗어나게 되자 마리아 안나는 자신의 관심사에 푹 빠져들었다. 그녀는 클라겐푸르트에서 자유롭게 학문과 신앙생활에 열중했고 학자들과 예술가들의 관대한 기부자가 되었다. 학문과 예술에 투자하는 것 자체는 귀족들이라면 누구나 하는 일이었지만, 마리아 안나는 그곳에서 멈추지 않고 스스로 과학을 연구했다. 그녀의 관심사는 자연과학 전반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물리학, 화학, 고고학이었다. 나중에 그녀는 고고학자가 되었고 자신이 직접 고고학 발굴현장을 지휘하기도 했다. 현대에 태어났다면 촉망받는 여성 과학자가 될 수 있었겠지만, 전근대 사회의 귀족 여성으로서는 용인받기 어려운 유별난 관심사를 가진 탓에 상류 사회에서는 마리아 안나를 비웃었고 그녀의 업적은 저평가되었다.
그러나 궁정을 떠나서 누리던 자유로운 지적 탐구와 경건한 수도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원래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던 마리아 안나는 수녀원 생활을 시작하면서 점점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고, 1788년부터는 혼자서는 움직일 수도 없는 정도가 되었다. 1789년 11월 19일 마리아 안나는 요제프 2세와 마리아 엘리자베트, 마리아 크리스티나를 비롯한 가족들[4]과 친지들이 함께 한 자리에서 임종을 맞았다. 그녀의 유언은 "이 곳은 정말 좋은 나라입니다. 나는 언제나 내 나라를 사랑해 왔습니다. 나는 나와 함께해왔던 좋은 사람들을 마지못해 떠납니다." 였다.

[1] 아버지 프란츠 1세 성격상 찬밥신세인 딸이 안쓰러웠던것도 있을것이다[2] 처음부터 사이가 좋은건 아니었다. 엘리자베트는 아름다운 미모 덕분에 크리스티나 다음으로 마리아 테레지아의 총애를 받았고 그 때문에 크리스티나와 짜고 큰언니 안나와 어머니 사이를 이간질했었다. 그러나 1767년 궁정에 천연두가 퍼졌고 엘리자베트 역시 천연두에 감염됐다. 회복은 됐으나 아름다운 얼굴을 잃어버려 다른 왕실과의 혼담이 영영 깨지고 말았다. 결국 수녀가 됐으며 나중에 인스브루크 수녀원의 수녀원장이 되었다. 먼저 수녀가 된 큰언니 마리아 안나와는 화해해서 죽을때까지 같이 살았다[3] 마리아 엘리자베트는 천연두로 인해 아름다웠던 미모를 잃어버려 혼담도 깨져버렸다. 어찌보면 큰언니 마리아 안나와 비슷한 처지여서인지 두 자매는 각별한 사이였다.[4] 외국으로 떠나있던 다른 형제자매들은 그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