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제프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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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요제프 베네딕트 안톤 미하엘 아담
(Joseph Benedikt Anton Michael Adam)
'''출생'''
1741년 3월 13일
오스트리아 쇤브룬 궁전
'''사망'''
1790년 2월 20일 (48세)
오스트리아
'''재위'''
로마왕
1764년 3월 27일 ~ 1790년 2월 20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대공
1765년 8월 18일 ~ 1790년 2월 20일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보헤미아 왕국의 왕
1780년 11월 29일 ~ 1790년 2월 20일
'''배우자'''
파르마의 이사벨라 (1760년 결혼 / 1763년 사망)
바이에른의 마리아 요제파 (1765년 결혼 / 1767년 사망)
'''자녀'''
마리아 테레사, 마리아 크리스티네
'''아버지'''
프란츠 1세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
'''형제'''
마리아 엘리자베트, 마리아 안나, 마리아 카롤리나, 마리아 크리스티나, 마리아 엘리자베트, 카를 요제프, 마리아 아말리아, 레오폴트 2세, 마리아 카롤리나, 요한나 가브리엘라, 마리아 요제파, 마리아 카롤리나, 페르디난트, 마리아 안토니아, 막시밀리안 프란츠
1. 개요
2. 치세
2.1. 공동통치기
2.2. 단독통치기
3. 가족
4. 여담


1. 개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본명은 요제프 베네딕트 아우구스트 요한 안톤 미하엘 아담. 프란츠 1세마리아 테레지아의 장남.
냉정하고 시니컬한 성격이었다. 황태자 시절 황태자비였던 파르마의 이사벨라와의 일[1]로 인해 어느 정도 인간불신도 있었다. 장남인 관계로 일찍부터 후계자 교육을 받아 여러 분야에서 학식이 뛰어났고 총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1765년 아버지 프란츠 1세가 급사한 뒤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계승하여 요제프 2세가 되었으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가 살아 있는 동안은 완전한 통치권을 행사하지 못했고, 1780년 어머니가 사망한 후 본인의 의도대로 통치할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부국강병을 위해 여러 개혁을 실시하여 대표적인 계몽군주로 꼽히고 있지만, 현실과 괴리된 급진적인 개혁의 추진에 대한 반발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말 그대로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현실에 맞추지 못한 이상주의 황제이다.

2. 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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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초상화

2.1. 공동통치기


아버지처럼 완전한 허수아비 신세는 아니었지만 선임 통치자인 어머니의 '''공동 통치자'''로서 2인자, 즉, 콩라인이었다. 일단은 신성 로마 제국의 단독 황제였으나 당시 황제 직위 자체의 영향력은 극도로 제한되었고 실질적인 통치력은 '''자신의 영지'''에서만 발휘할 수 있었다. 당시 합스부르크 세습령의 통치권을 행사하기 위해 필요한 작위는 오스트리아 대공, 보헤미아 국왕, 헝가리 국왕의 세 자리였다. 이 작위를 모두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가 차지하고 있었기에 가장 중요한 결정권도 어머니가 행사했고, 그의 위치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겸 오스트리아의 공동 통치자,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왕자[2]라는 애매한 자리였다.[3]. 그의 재위 기간 25년 중 15년이 마리아 테레지아의 생애와 겹치고, 그 기간 동안 그는 어머니의 그늘에 가려 통치자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 했다. 그래도 나름 반항하여 어머니와 자주 충돌했고 폐위시키겠다는 협박도 쳐봤으나 오히려 어머니에게 "폐위당할래?"라는 협박을 받기도…
모자간의 대립은 정치관과 사상의 차이에서 왔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영토 확장보다는 제국의 안정을 중시했고 아들의 젊은 혈기와 성급한 성격에 대해 항상 우려했다. 반면에 요제프 2세는 여느 다른 유럽 젊은이들처럼 프리드리히 대왕의 빠로, 프로이센을 본받아 전제적 계몽주의를 수용해 왕권을 강화하고 적극적인 팽창 정책을 펴고자 하였다. 종교관과 사상에 있어서도 어머니는 경건하며 합스부르크 가문의 역사적인 카톨릭 신앙의 정치적 수호자로서 역할에 열의를 보였던 전형적인 17세기형의 합스부르크 카톨릭 군주였으며, 폴란드 분할에서 보여주듯 이런 교파주의적 도덕관과 대외관에 민감한 모습을 보였던 반면 아들은 계몽주의의 세속주의적 이성주의를 추구하며 이에 따라 국익이나 팽창을 위해서는 종교적, 역사적 우방이고 나발이고 없는 근대주의적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모자간에 불화가 있었다고는 해도 이 동안 요제프 2세는 주로 제국 의회에서 마리아 테레지아가 발표할 연설문을 작성하곤 했다. 이 연설문에도 자기 자신의 정치사상이 그대로 들어가있다.

2.2. 단독통치기


1780년 11월, 마리아 테레지아가 사망하자 마침내 그는 어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 전제적 계몽주의에 입각한 개혁정치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7년 전쟁에서 보여준 오스트리아의 국가적 한계를 체험한 그는 개혁을 단행했다.
그의 개혁은 상당히 진보적이었는데, 1781년, 농노를 해방하고 상공업을 장려하여 해방된 농노에서 얻은 세수 기반의 경제 정책을 시행하였다. 1784년에는 라틴어가 제국민들의 언어로 적합하지 않다고 하여 헝가리 왕국 의회에서 독일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도록 했으며[4], 이에 따라 자연스레 합스부르크 제국신성 로마 제국 전체의 공용어가 독일어로 변경된다.[5] 그리고 예술과 학문을 부흥시키고 중앙집권제도의 강화 및 행정제도의 개편 등에 있어 다방면에 걸친 개혁을 단행했다. 1787년에는 사형 제도를 폐지하고 신체의 일부를 절단하는 등의 잔인한 형벌을 금지했으며, 이는 그의 사망 후인 1795년까지 유지된다.
한편, 요제프 2세는 가톨릭의 기득권을 어느 정도 제어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1781년 종교 관용령(Toleranzpatent)을 시행함으로써 예배의 자유를 보장하여, 오스트리아 내에서도 유대교, 정교회, 루터파, 칼뱅파 등 국교인 가톨릭 이외의 종교를 믿는 것이 가능해졌다.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와는 다르게 유대인에게도 다소 유화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해서, 위의 유대인들에게 독일어를 가르치기 위한 학교를 설립할 것을 허가하는 등 법제적으로는 유대인들이 더 이상 눈치를 보며 살 필요가 없어졌다. 때문에 그의 공적을 기려서 프라하의 유대인 거주지역은 그의 이름을 따 '요제포브' 혹은 '요제보브'라고 불린다. 그는 프리메이슨을 지원하기도 했으나, 자기가 프리메이슨에 가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요제프 2세의 개혁정치는 제대로 된 기반 없이 성급히 행해졌던 것이었기에 상당수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고 반대로 국내의 혼란만 가중되는 결과를 빚기도 했다.[6] 중앙집권책과 독일어 공용화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지방간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자치가 행해졌던 합스부르크 제국 내에서 귀족들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세속주의 정책도 가톨릭 사제들에게 큰 반발을 사 국내의 지지를 잃어버렸고 후술하듯 각 지방의 반란이 잇달았다. 한마디로 의도는 좋았으나 '''현실감각 없는 이상주의자 군주'''의 전형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대외적으로는 그의 재위 기간 중에 러시아, 프로이센과 함께 폴란드를 분할했다. 이는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가 생존해 있던 공동통치기간의 일인데, 마리아 테레지아는 폴란드 분할에 다소 소극적이었고 주로 요제프 2세의 주도로 추진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사후 그는 독자적으로 대서양으로의 해양 진출을 꾀하며 네덜란드 지방[7]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고, 1788년에는 러시아예카테리나 2세와 함께 오스만 제국에 대한 전쟁[8]에 나섰으며, 바이에른의 병합까지 시도했다.
그러나 요제프 2세의 대외정책도 실패로 얼룩졌다. 오스만과의 전쟁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오히려 오스만한테 패하고 만다. 카란세베스 전투 같은 삽질의 결과 벨기에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헝가리에서는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바이에른 병합은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한 독일 제후국가들의 반발로 결국 포기해야 했다. 네덜란드에 대한 통제력 강화는 현지인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프랑스 혁명 발발 이후의 네덜란드 지역은 혁명의 영향을 거세게 받으며 독립을 선언하면서 그의 네덜란드 정책도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은 요제프 2세에 대한 마리아 테레지아의 우려가 옳았던 셈이다. 그가 섣불리 추진했던 개혁들은 대부분 실패하고 역으로 오스트리아를 약화시켰다.
계속된 실패로 인해 요제프 2세는 심신이 피폐해지기 시작했고 말년에는 프랑스에서 터진 혁명의 영향력을 차단하는 데 주력했다. 결국 1790년 1월, 개혁을 중단한다고 선언했고 나중에는 건강까지 악화된터라 2월 들어 49세의 나이로 빈에서 사망했다. 유언은 '''"온 유럽에 항구적인 평화가 깃들기를 기원하노라."'''였지만 그럴 '기미'라도 보이게 된 것은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후이고[9], 확고히 된 것은 두 차례의 대전이 지난 약 200년 뒤였다.

3. 가족


파르마 공작의 딸 이사벨라[10]와 정략결혼한 사이였지만 요제프는 그녀를 무척 사랑했고 부부 사이가 나쁜 편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사벨라는 사실 '''레즈비언'''으로, 그녀가 진정 사랑한 인물은 남편이 아니라 시누이 마리아 크리스티나였다.
이사벨라가 22세에 출산 직후에 걸린 천연두로 요절한 뒤, 그녀가 크리스티나에게 보낸 러브레터들을 발견한 요제프는 이후 더욱 냉소적이고 인간불신적인 성격으로 변했다.
카를 7세의 딸 마리아 요제파와 재혼했지만 부부 사이는 좋지 않았고 그녀 역시 천연두로 일찍 사망하고, 하나 남아있던 딸마저 8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요제프는 더욱 냉정한 성격으로 변해 다시 결혼하지 않았다. 그의 사후 토스카나 대공인 동생 레오폴트 2세가 제위를 이었다.
차갑고 냉정하며, 거의 인간불신에 가까운 성격이었다지만 그래도 가족들과는 대체로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특히 거의 조카뻘이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나이차가 많았던(14살) 막내 여동생 마리 앙투아네트와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루이 16세불임이 아닌가 하는 소문이 돌았을 때 여동생을 위해 루이 16세를 만나려고 팔켄슈타인 백작이라는 가명[11]으로 직접 프랑스로 갔다. 루이 16세와 만나 대화한 그는 "'''프랑스 왕은 처음 딱 봤을 때는 바보 같았는데 차분하게 길게 이야기를 나눠 보니 이 사람 생각보다 지성인임을 알겠더라'''"라는 평가[12]를 남겼다고. 루이 16세는 성기능 자체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성관계를 극도로 기피하는 성향이어서 요제프 2세의 설득에 의해 마리 앙투아네트와의 사이에 자식이 생기게 되었다.
이때 부르봉 왕조와 여동생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해 무척 걱정하며 수십 조항에 달하는 권고문을 남겼다.[13] 그와 대화를 나누었던 프랑스 지식인들은 그가 계몽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놀라움을 표했다고 한다.

4. 여담


  • 요제프 2세는 뛰어난 지식인이었으며 특히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다고 한다. 악기 연주와 작곡을 취미 삼아 하기도 했고, 목관악기 위주로 구성되는 소규모 취주악단 하르모니무지크의 창단을 처음 지시한 인물이기도 했다. 모차르트에게 독일어로 된 오페라를 발주하기도 했고,[14] 뉴비 시절의 베토벤은 그가 사망했을 때 장송 칸타타를 작곡해 바쳤다. 음악황제라는 별명도 있었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어느 정도 비중이 있는 조연으로 나온다(배우는 미국 배우 제프리 존스, KBS판 더빙 성우는 박상일). 음악을 즐기는 소탈한 계몽군주라는 면이 부각되어 인간불신이 심했던 냉철한 면모는 전혀 보이지 않는 점잖고 친절하고 사람 좋은 높으신 분이라는 이미지로 나온다. 다만 모차르트의 '현대적인' 음악을 다소 이해를 못 하기도.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공연하네마네로 옥신각신할때 "지금 굳이 백성들과 귀족들을 자극할 필요는 없다."와 "내 여동생 안토니아(마리 앙투아네트)도 자기 백성이 두려워진다고 편지했다."라는 말을 함으로써 머지않아 닥칠 프랑스 대혁명을 암시했다.

[1] 자신의 시누이이자 요제프 1세 바로 밑의 여동생 마리아 크리스티나를 사랑했다. 즉, 레즈비언.[2] 보헤미아와 헝가리 국왕직은 형식상 선출직이라 왕세자도 아니었다.[3] 첨언하자면 당시에는 아직 신성 로마 제국 황제라는 칭호는 있었지만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여러 제후국들이 독립적인 행보를 취해온 지가 이미 백년이 넘었기에 황제 자리는 명목상의 자리일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합스부르크 황가가 사실상 통치하고 있는 영지는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 헝가리 등이었는데 이 영지들의 통치자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던 인물은 요제프가 아니라 마리아 테레지아. 조악하게나마 한국사에 비유하자면 마리아 테레지아가 상왕이고 요제프는 상왕이 죽어야 그 자리를 이어받을 수 있는 왕에 불과했던 것이다.[4]헝가리어가 아닌가 하면, 당시 헝가리 왕국 영지가 상당히 컸기에 배보다 배꼽이 커져서 헝가리어 사용 인구 수보다 독일어 사용 인구 수가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5] 당시는 헝가리 왕국이 신성 로마 황제의 일개 영지에서 독립된 왕국으로 분리되어 동군연합 체제로 변경되는 대타협이 일어나기 전이었기에, 헝가리 왕국 하나에만 독일어 사용을 의무화한 것이 아닌 헝가리 왕국을 시발점으로 하여 전 제국에 독일어 사용을 의무화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6] 다만 이것은 선황인 마리아 테레지아큰 전쟁을 두 차례 치루고, 건축 사업을 벌인 여파로 막대한 재정이 소모되었고, 이로 인해 개혁에 필요한 재정이 부족했다는 점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7] 이라지만 지금은 벨기에인 지역. 이 지역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후 스페인에서 오스트리아로 종주권이 이동했다.[8]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와 슈바르첸베르크 공작이 이 전쟁에 참가한다. 당시에는 영관급 장교.[9] 크림전쟁, 보오전쟁, 보불전쟁을 제외한 이 시기의 100년 평화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 이어진다.[10] 원래는 스페인의 인판타였으나 7년 전쟁에 오스트리아가 패배한 후 스페인 왕녀 지위를 잃고 파르마 공녀로 격하되었다.[11] 일단 가명이었지만 무지렁이 백성이 아니라면 팔켄슈타인 백작이 요제프 2세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왜냐하면 '''팔켄슈타인 백작이라는 작위 자체가 아버지 프란츠 1세가 가지고 있었던 작위여서 당연히 그의 사후에 자식인 요제프 2세가 자연스럽게 세습하고 있던 작위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의 모든 프랑스 백성 누구나 그가 요제프 2세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그의 방문은 전 프랑스 신민의 관심을 집중시킬 중대사였다. 신민들의 관심을 받는 법을 잘 알았던 요제프 2세는 베르사유 궁에 국빈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파리'''에 숙소를 마련했고,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사람을 대해서 대단한 이슈가 되었다.[12] 루이 16세 항목 참조.[13] 이 중 한 구절에서 '''혁명'''이 언급된다. 프랑스의 불안한 정세를 경고하며 왕과 왕비가 잘 처신하지 않으면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14] 생활언어가 독일어임에도 당시 오페라는 주로 이태리어로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