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폴트 2세
1. 개요
1747년 5월 5일 ~ 1792년 3월 1일
재위: 1790년 ~ 1792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레오폴트 2세), 헝가리 왕국의 국왕(리포트 2세), 그리고 토스카나 대공국의 대공.
본명은 페터 레오폴트 요제프. 첫 번째 세례명은 대부인 러시아 황제가 지어주었으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집안에서는 선호되지 않는 이름이어서 항상 '레오폴트'라 불렸다.
2. 생애
프란츠 1세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3남으로 태어났지만 차남이 일찍 죽은 덕에 사실상의 차남으로 대우받았다.
스페인의 카를로스 3세의 딸 마리아 루도비카와 결혼했고 1765년 아버지 프란츠 1세가 죽고 형 요제프 2세가 제위를 계승하자 아버지가 겸하고 있던 작위인 토스카나 대공을 잇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가 대리인만 보내고 한동안 방치된 토스카나 대공국을 발전시켰다. 하수도 정비 등의 공공사업을 수행했고 세제를 개선했으며 군대 양성 및 산업 부흥, 개인의 자유를 어느 정도 보장하였다. 레오폴트는 메디치 가가 남긴 구습을 철저하게 타파해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외적인 발전과는 별개로 주민들로부터는 외지인이라며 인기가 없었고 교회 개혁 과정에서 교황 세력과 충돌하기도 했다. 교회의 재산을 세속으로 가져오는 데 실패했으며 성직자들에 대한 법령 통제 역시 실패. 가톨릭 세력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1786년 11월 사형제도를 폐지하기도 했다. 레오폴트 2세는 토스카나를 통치하기 위해서 비밀경찰을 창설해 활용했다.
형 요제프 2세가 아들을 낳지 못 했기에 그는 사실상 유력한 후계자가 되었다. 이 때문인지 요제프 2세가 레오폴트에게 섭정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한 적이 있는데, 그는 거절했다. 1790년, 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빈으로 가 신성 로마 제국의 레오폴트 2세로 즉위했다.
그는 우선적으로 요제프 2세의 실정들을 만회했다. 형이 벌여놓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1790년 9월에 8개월 기간의 정전협정을 체결하고 1791년에 시스토바 조약을 체결, 종식시켰고 프랑스 혁명을 이유로 프랑스와의 동맹을 파기했으며 플랑드르인들의 특권을 인정하여 네덜란드 지역을 진정시키고 각 지역의 의회 세력 또한 파트너로서 인정했다. 대내적으로는 온건책을 쓰며 혁명의 기운을 억제하는 데 주력했고, 동맹의 역전 이래 적대관계였던 영국과 다시 동맹관계를 맺고 프랑스의 상황 변화에 주목했다.
중간에 러시아 황제 예카테리나 2세가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어 프랑스를 침공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레오폴트 2세는 거부했다. 남은 폴란드 영토를 합병하고 오스만 제국과 싸우려는 예카테리나 2세의 생각을 꿰뚫었기 때문이다. 그는 소박하고 성실한 성품을 가졌고 대체로 형인 요제프 2세보다 나은 인재였다고 평가된다.
재위 2년만에 갑자기 타계하였다. 독살설이나 암살설이 돌았지만 입증된건 없다. 재위는 장남 프란츠 2세가 이었다.
3. 자녀
딸 2명을 둔(그마저도 둘 다 요절) 형 요제프 2세와 달리 자녀를 16명이나 두었다.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와 자녀 수가 같다. 그 덕분에 어머니 때부터 끊긴 합스부르크 가문을 유지할 수 있었다. 자녀가 12남 4녀인데, 요절한 5남, 6남을 제외해도 총 10명의 아들이 성인으로 자랐다.
- 마리아 테레사[3] : 1767년 ~ 1827년
- 프란츠 2세 : 1768년 2월 12일 ~ 1835년 3월 22일
- 페르디난트 : 1769년 ~ 1824년
- 마리아 안나 : 1770년 ~ 1809년
- 카를 루트비히 : 1771년 ~ 1847년
- 알렉산더 레오폴드 : 1772년 ~ 1795년
- 알브레히트 요한 요제프 : 1773년 ~ 1774년
- 막시밀리안 요한 요제프 : 1774년 ~ 1778년
- 요제프 안톤 : 1776년 ~ 1847년
- 마리아 클레멘티나 : 1777년 ~ 1801년
- 안톤 : 1779년 ~ 1835년
- 마리아 아말리아 : 1780년 ~ 1798년
- 요한 : 1782년 ~ 1859년
- 라이나르 : 1783년 ~ 1853년
- 루트비히 : 1784년 ~ 1864년
- 루돌프[4] : 1788년 ~ 1831년
4. 여담
레오폴트는 막내 여동생 마리 앙투아네트와 만난 적도 많지 않았고 앙투아네트를 멍청하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마리 앙투아네트가 도움을 청했으나 레오폴트는 국왕 부처가 파리를 빠져나오면 군대를 파견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당시 그는 영국과 프로이센 등의 대 프랑스 동맹국들과 함께 프랑스 혁명 정부에 대한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바렌느 도주 사건으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체포되고 여동생과 매제가 처형될 움직임이 보이자 사태의 심각함을 깨닫고[5] 여동생이라도 구하기 위해 프랑스와 협상을 벌인다. 하지만 중도에 급사하는 바람에 협상 타결과 전쟁은 장남 프란츠 2세의 몫이 되었다.
콩고에 강림한 어느 악마 대마왕과 이름이 같아서 오해가 빚어져 세트로 묶이며 괜히 까이는 경향도 없지 않으나 지역도 시대도 다르므로 주의.
[1]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3세의 차녀로, 셋째 남동생 페르디난도는 남편의 여동생인 마리아 카롤리나와 결혼하였으니 겹사돈이다.[2] 일명 루돌프 대공.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후원자이자 제자로 유명하다. 베토벤의 피아노 트리오 7번은 이 자에게 헌정었는데 때문에 대공(Archduke)라는 가명으로 더욱 유명하다. 1788년 ~ 1831년.[3] 친조모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자녀들에게 손주들 중 장녀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을 따서 지으라는 명에 따라 친조모의 이름을 물려받았다. 테레지아는 독일식 이름이고, 테레사는 이탈리아식. 친사촌이나 고종사촌들도 장녀인 경우 마리아 테레지아의 이름을 딴 경우가 많았는데, 대표적으로 고종사촌인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레오폴트의 여동생 마리 앙투아네트의 장녀로 독일식으로는 마리아 테레지아 카롤리나), 마리아 테레사(요제프 2세의 장녀) 등이 있다.[4]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후원자이자 제자로 유명하다. 베토벤의 피아노 트리오 7번은 이 자에게 헌정었는데 때문에 대공(Archduke)라는 가명으로 더욱 유명하다.[5] 참고로 저 바렌 사건 준비 당시엔 매제였던 루이 16세가 탈출자금을 빌려달라고 해도 거절할 정도로 시큰둥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일국의 왕이 자기 식솔들을 데리고 외국으로 튈 결심을 할 정도로 프랑스 내의 전제군주정의 상태가 위태롭다는 것을 잘 실감하지 못했던 모양. 당시 프랑스는 루이 13세부터 루이 14세 시기를 거치면서 강력한 왕권이 정립된지 거의 100년이 되었고, 전 유럽에서 가장 강한 왕권을 휘둘렀기에 진심으로 매부의 왕권이 저렇게 약해졌는지 몰랐을수도 있다. 그러나 실상은 선왕인 루이 15세의 삽질 덕에 프랑스의 왕권은 조금씩 추락하고 있었고, 루이 16세는 외모와 성격부터가 권위라곤 찾아볼 수 없는 국왕이었기 때문에(...)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일가의 상황은 레오폴트 2세의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