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크리스티나
1. 개요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1세의 4녀[1]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와 생일이 똑같다는 이유만으로 모후의 남다른 편애를 받았고, 그걸 믿고 교만하게 굴어 말년에는 남매들의 푸대접을 받게되었다.
2. 인생
2.1. 남다른 편애
애칭은 미미로, 그녀는 아름답고 총명하고 그림 실력도 뛰어났지만 무엇보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생일이 똑같아서 같은 날에 축하를 받았다. 그 때문에 마리아 테레지아의 편애가 유별났고, 어머니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걸 믿고 감시자 노릇을 자처하느라 어머니에게 형제자매들의 잘못을 고자질하고 잔소리를 해대서 그들과 당연히 사이가 나빴다.
형제자매간의 나쁜 사이는 훗날 마리아 테레지아 사후 마리아 크리스티나 부부가 유럽 각국의 군주나, 군주의 배우자가 된 그녀 자신의 남매들을 찾아갔을 때 오스트리아 여대공이 아닌 일개 귀족의 대우를 받으며 푸대접을 받게 되는 원인이 된다.
2.2. 연애 결혼
크리스티나는 황녀임에도 당시로서는 드물게 연애결혼을 했다. 합스부르크 왕조가 정략결혼으로 영토를 넓힌 걸 감안하면 매우 특별한 일이었다.
다른 형제들의 배우자와 달리 그녀의 남편 알베르트는 작센 공작의 사남이었기 때문에 작센 선제후국을 물려받을 공자도 아니었으며, 다른 작위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여러모로 황녀의 남편이 되기에는 처지는 조건이었기에 마리아 테레지아는 크리스티나 역시 다른 딸들처럼 부르봉 왕가와 결혼시키려 했다. 하지만 당시가 그녀의 아버지이자 마리아 테레지아가 사랑한 남편인 프란츠 1세가 사망한지 얼마 안 된, 1765~1766년이었다. 이 시기를 놓치지 않고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슬픔에 잠긴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연애결혼을 허락하면 평생 어머니 곁에 있을 수 있다"고 속삭였다.
결국 그녀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자녀들 중 유일하게 연애결혼을 허락받았다. 그것만으로도 큰 행운이었지만 결혼하면서 막대한 지참금을 가져갔고 남편이 테셴의 공작으로 임명되는 특권을 받았으며 락센부르크의 대저택[2] 까지 하사받았다. 평소 어머니의 편애를 받은 것만으로도 모자라 아버지를 여의었을 때 어머니의 상실감까지 이용해 이기적으로 연애결혼했으니 정략결혼을 하게될 처지에 놓인 자매들은 더더욱 그녀를 미워했다.
건강 문제로 결혼하지 않고 수녀가 된 마리아 안나, 마리아 엘리자베트를 제외하고 정략결혼한 마리아 카롤리나, 마리아 안토니아도 마리아 크리스티나를 싫어했지만, 그 중에서도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연애결혼을 하는 바람에 그녀를 대신하여 파르마 공작과 정략결혼을 해야만 했던 여동생 마리아 아말리아가 그녀를 제일 미워했다. 아말리아 역시 마리아 크리스티나처럼 연인이 있었지만 정략결혼을 하느라 원치 않는 이별을 해야 했는데 심지어 정략결혼 상대도 자신과 같은 황족이 아닌 파르마 공작이었기에 더더욱 분노했다고 한다. 아말리아는 언니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용서하지 못할 정도로 증오했고, 그 때문에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가르침을 무시하고[3] 결혼 후 수없이 외도를 거듭하여 물의를 빚는 식으로 복수했다. 이 때문에 테레지아는 아말리아가 오스트리아로 입국하는 걸 막을 정도였다.
이후 알베르토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총독 자리까지 받았다.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신분이 알베르트의 신분보다 훨씬 높았기 때문에, 알베르토는 마리아 크리스티나 측으로부터 여러 작위를 하사받았다. 또한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결혼 이후에도 합스부르크로트링겐의 성(姓)을 유지하였다.
2.3. 쓸쓸한 말년
프레스부르크에 있으면서 평생 어머니의 곁을 지켰으나 마리아 테레지아 사후에는 당연히 사이가 틀어져 있던 형제자매들의 냉대와 경멸을 감수해야 했다. 단적인 예로 어린 나이에 오스트리아의 오랜 적국인 프랑스에 시집가 어려움을 겪었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크리스티나를 가리켜 "어머니의 얼굴을 제일 많이 봤다"며 불평한 바 있다. 이후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 왕비가 된 후에 크리스티나가 프랑스에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당연히 앙투아네트는 언니를 푸대접했으며 프티 트리아농을 보여 달라는 요구도 무시했다. 이에 앙금이 생겼는지 프랑스 대혁명으로 마리 앙투아네트가 죽을 위기에 처하자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프랑스 왕과) 결혼하지 않았으면 좋았을텐데.'라는 냉담한 말 한 마디만을 태연히 남겼다고 한다.[4]
또한 마리아 테레지아의 사랑을 받으며 오스트리아에 편히 있을 수 있었다지만 자식복은 없었다. 남편 알베르트와의 사이에서 크리스티나란 딸을 하나 낳았지만, 난산으로 산모와 아기 모두 죽을 뻔 했다. 이후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회복됐으나 갓 태어난 딸은 다음날 사망하였다. 이 난산으로 후천적 불임이 됐는지 그녀는 다시 임신하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의 동생이었던 레오폴트와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루도비카 사이에서 태어난 조카 카를 대공을 양자로 들여 재산을 상속해 주었다.
2.4. 레즈비언?
한편 오빠인 요제프 2세의 부인이자 파르마 공작의 딸 이사벨라[5] 와 요제프 2세는 정략결혼한 사이였지만 요제프는 그녀를 무척 사랑했고 부부 사이가 나쁜 편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사벨라는 사실 '''레즈비언'''으로, 그녀가 진정 사랑한 인물은 남편이 아니라 시누이 마리아 크리스티나였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 둘째딸의 이름을 마리아 크리스티나라고 지은 것이었다. 이사벨라가 22세에 출산 직후에 걸린 천연두로 딸과 함께 요절한 뒤, 그녀가 크리스티나에게 보낸 러브레터들을 발견한 요제프는 이후 더욱 냉소적이고 인간불신적인 성격으로 변했다.
[1] 위의 언니인 1녀와 3녀가 일찍 죽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차녀였다.[2] 외국으로 시집간 다른 딸들이 평생 그리워하던 가족 나들이용 별궁.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를 본딴 소 트리아농을 베르사유 안에 건설하기까지 했다.[3] 사실 마리아 테레지아 본인부터가 합스부르크 가문에 사실상 데릴사위로 들어온 남편 프란츠 1세에게 복종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 그런 어머니를 닮은 마리아 카롤리나 역시 남편을 제치고 권력과 정치를 자기 마음대로 휘둘렀다. 다만 마리아 아말리아와 달리 마리아 카롤리나는 친정과 지속적인 교류를 맺었다[4] 사실 마리아 크리스티나뿐만이 아니라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정인 합스부르크 왕가는 프랑스 대혁명 당시 적극적으로 마리 앙투아네트를 구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마리 앙투아네트와 가장 친했던 바로 위 언니이자 나폴리 왕비인 마리아 카롤리나만이 마리 앙투아네트가 국민들에 의해 끌어 내려져 '죽음의 집'이라 불리던 감옥 콩시에르주리에 수감될 때까지 꾸준히 연락했을 뿐이었다. 이에 마리 앙투아네트의 자식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는 훗날 마리아 카롤리나를 만나자 그녀에게 '어머니는 이모를 제일 사랑하셨다.'고 말하기도 했다.[5] 원래는 스페인의 인판타였으나 7년 전쟁에 오스트리아가 패배한 후 스페인 왕녀 지위를 잃고 파르마 공녀로 격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