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아말리아
1. 개요
프란츠 1세와 마리아 테레지아 사이에서 태어난 6녀. 이탈리아 파르마의 공작부인으로 현 부르봉-파르마 가문의 조상이기도 하다. 어렸을 적엔 지나친 편애의 희생양으로 비뚤어져 반항적인 성격이었으나 어느정도 나이를 먹고 난 이후에는 화목한 가정을 꾸렸다.
2. 생애
2.1. 차별받은 어린 시절
예쁘고 재능도 있고 그림도 잘 그렸지만 마리아 테레지아의 기준에는 못 미쳤는지 큰언니 마리아 안나와 함께 찬밥 취급받았던 공주. 아래 여동생들인 마리아 카롤리나와 마리아 안토니아와 친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에 비해 애교가 없고 무뚝뚝한 성격이기도 했지만 마리아 테레지아가 딸들중 항상 아말리아를 크리스티나와 비교했기에 피해의식을 갖고 있었고, 이것이 점점 심해지면서 크리스티나를 매우 증오하게 되었다.
다른 자매들 역시 크리스티나에 비해 차별을 받긴했지만, 자매들중 큰언니인 마리아 안나는 병약하다는 이유로 어머니의 냉대를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비교대상이 되지 못했다. 셋째 언니 마리아 엘리자베트는 아름다운 미모덕에 둘째 언니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다음으로 어머니의 편애를 받았고, 거기다 안나의 건강이 나빠진 게 엘리자베트의 탓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크리스티나와 짜고 큰언니 안나를 따돌렸으며, 어머니와 안나 사이를 이간질했다. 덕분에 엘리자베트는 안나와 사이가 좋았던 아말리아와도 사이가 나빴으며 결혼과 수도원행으로 헤어진 뒤에도 계속되었다.
2.2. 원하지 않은 정략결혼
그녀는 원래 팔츠 비텔스바흐 가문의 분가인 팔츠-츠바이브뤼켄의 카를 아우구스트 공작과 사랑하는 사이였으나,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연애결혼을 위해 대신 정략결혼을 하게 된다. 이로 인해 연인과 모후에 의해서 강제로 헤어지게 되고, 자매들처럼 에스파냐계 부르봉에서 갈라져나온 부르봉파르마 공작가의 페르디난도와 결혼하게 된다. 심지어 정략결혼 상대도 자신처럼 황족이 아닌 파르마 공작[1] 이었기에 더더욱 분노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신분이 낮다며 이별당한 팔츠-츠바이브뤼켄의 카를 아우구스트는 바이에른과 팔츠 친척들의 연이은 남계 후손 단절로 인해 훗날 팔츠 선제후직에 오르게 되고, 자식이 없는 카를 아우구스트의 뒤를 이은 동생 막시밀리안 1세가 바이에른과 팔츠를 통합하여 바이에른 왕국의 초대 국왕이 된다. 훗날의 일을 알 수는 없는 것이지만 마리아 아말리아가 연애결혼을 했으면 바이에른의 왕비가 되었을 것이라는 말.
2.3. 실질적인 파르마의 통치자
파르마에 도착한 마리아 아말리아가 처음 한 일은 모후 마리아 테레지아와의 연을 끊는 것이었다. 그녀는 평생 어머니에게 편지를 하지 않았고, 어머니의 편지에 답장을 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마리아 아말리아는 유일하게 어머니와 절연한 자식이 되었다. 때문에 그녀는 딸에게 어머니의 이름을 붙인 다른 자매들과는[2] 달리 자신의 자녀에게 어머니의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어머니의 명령에 반기를 들고 꾸준히 외도를 저질렀으며 더 나아가 친정인 오스트리아에 이익이 되는 길과는 반대로 갔다. 파르마에서 사치스런 생활을 일삼고 정부와 놀아나는 등 모후의 맘에 들지 않는 행동만 골라 하며 어머니의 심기를 거스른 것 때문에 결국 오스트리아로의 귀국을 영구히 금지당한다.
또한 여동생 마리아 카롤리나처럼 무능한 남편을 대신해 실질적으로 파르마를 통치했다. 야심이 컸던 마리아 아말리아는 단순한 군주의 아내로서 비선실세격으로 통치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고, 남편에게 압력을 넣어 스스로를 파르마의 공동 통치자로 임명하게 했다. 반항기와 사생활과는 별개로 형제들 중 가장 뛰어난 통치자로 평가되었고 백성들에게 사랑받는 공작부인이었다. 마리아 아말리아는 타국, 특히 오스트리아의 이익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소국인 파르마의 독립과 번영, 그리고 국민들의 복지를 중시하는 정책을 펼쳤다. 나중에는 남편의 정계 복귀를 격려하여 부부가 함께 통치하게 된다.
프랑스 혁명으로 파르마 공국이 프랑스 제1공화국에 점령당하자, 파르마의 합병을 막기 위해 남편과 함께 고군분투하나 강대한 프랑스를 막을 수는 없었다. 1802년에 페르디난도가 의심스럽게 병사(프랑스에 의한 독살로 추정된다)한 이후 섭정으로 임명되었으나 나폴레옹에 의해 폐위당하고 오스트리아와 동군연합을 이루고 있었던 보헤미아 왕국의 수도인 프라하로 피신했다. 그 곳에서 조카 프란츠 2세의 배려로 작은 영지를 수여받고 1804년 58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사후 그녀의 유해는 프라하의 황실 묘지에 안장되었고, 심장은 빈의 합스부르크 가문 가족묘에 안장되었다.
2.4. 결혼생활과 자녀
처음에는 정략결혼 상대였던 페르디난도와 매우 사이가 나빠 서로 정부를 거느리면서 악마, 창부로 부를 정도로 사이가 나빴다. 그러나 결혼 9년차인 1778년에 5세의 장남 루도비코가 테이블 모서리에 머리를 찧는 사고로 사경에 이르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 사고 이후로 남편 페르디난도와 극적으로 화해하게 된다. 그리고 이 이후로는 금슬 좋은 부부이자 모범적인 부모가 되었다.
그녀는 페르디난도 1세와의 사이에서 3남 6녀로 총 9명의 자녀를 낳았으나, 이 중에서 4명만이 성년까지 성장한다. 그리고 그중 첫째인 장녀 카롤리나 공녀와 둘째인 장남 루도비코 1세만이 결혼했다. 한편 그녀는 딸들에게 사이가 좋았던 여동생인 마리아 카롤리나와 마리아 안토니아의 이름을 붙였다. 그녀의 자손들은 매우 번성하여 현재 부르봉-파르마 가문의 모든 구성원은 마리아 아말리아의 후손들이다.
그녀 자신부터가 부모의 편애에 의해 소외당했고 이로 인해 연인과 헤어졌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자녀들의 정략결혼에 적극적이지 않았으며 최대한 자녀들의 의사를 고려한 혼처를 마련했다. 앞서 언급되었던 장남 루도비코는 비록 어느정도는 정략결혼에 가까웠지만 그 중에서도 자신이 마음에 두고 있던 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사와 결혼했으며 장녀인 카롤리나 마리아도 작센 선제후의 막내아들과 연애결혼을 했다.
차녀와 삼녀인 마리아 안토니아와 카를로타 마리아는 혼기가 찼을 때 프랑스 혁명전쟁의 혼란 와중이었던 것도 있고, 사랑하는 가족과 서로 떨어지고 싶지 않았던 것도 있어서[3]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남았다. 나중에 마리아 안토니아는 우르술라 수녀회, 카를로타 마리아는 도미니코 수도회의 수녀가 되었다.
[1] 물론 파르마 공작도 부르봉 가문으로서 스페인과 프랑스 양쪽에서 왕족이긴 했으나, 각각 나폴리와 프랑스의 왕비가 된 마리아 카롤리나와 마리 앙투아네트와 비교해보면 자매들 중 가장 서열이 낮은 남성과 결혼했다. 하지만 이게 도리어 마리아 아말리아에게는 큰 복이었다. 마리아 카롤리나는 사실상 왕이 된 거나 다름없는 권력을 잠깐 동안 휘두르고 나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두들겨맞고 망명생활을 하다가 결국 친정에 돌아와서 생을 마감했고 자기가 다스렸던 나폴리는 유럽판 항우가 다스리게 되었다. 게다가 마리 앙투아네트는 숫제 시집간 지 23년 만에 시민혁명이 발발해서 채 불혹이 되기 전에 참수형을 당했다. 그 바람에 언니들이 다들 50~60대까지 산 것에 비해 혼자만 30대에 사망했다. 이렇게 왕비라는 지위에 오른 두 여동생들이 하나는 작위를 잃고 친정으로 도망치듯 망명했으며 다른 하나는 아예 왕정을 부정하는 백성들의 손에 처형당했다. 반면에 마리아 아말리아 역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얻어터지긴 했으나 조카가 프라하에 있는 영지를 헌납해준 덕분에 셋 중 유일하게 영지를 보유한 신분으로 생을 마감했다. 결과적으로 셋 중 아말리아가 가장 복되고 안정적인 인생을 산 것이다.[2] 마리아 테레지아가 딸들에게 첫딸을 낳으면 자신의 이름을 붙이라고 했다.[3] 당시 마리아 아말리아와 딸들은 프라하에 머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