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빈 밀러
"야구에 있어 베이브 루스에 이어 두번째로 큰 영향을 끼친 인물" - 퓰리처 수상 칼럼니스트 레드 스미스.
1. 소개
구단들의 착취와 전근대적인 선수 보류제도[1] , 지나치게 불균형한 수익분배구조 등으로 여러 직업을 뛰어야 할 정도로 착취받던 MLB 선수들을 이끌어 오늘날 미국 최강의 노동조합[2] 중 하나로 자리잡은 오늘날의 '''메이저리그 선수노조'''를 일궈낸 노조위원장이다.
2. 노조위원장이 되기까지
노동자 부부의 아들로 태어나 뉴욕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후 2차 세계대전 중 조직된 군수산업노조의 활동에 투신하여 노동 운동가로서의 인생을 시작했다. 그 후 여러 노조의 임원을 거치며 미국 최대 노조인 철강노조의 수석 고문 겸 협상 대표로까지 올라선 그는, MLBPA가 1966년 리처드 닉슨[3] 대신 노조위원장으로 추대하였다. 그리고 MLB는 밀러의 주도 하에 '''혁신'''에 접어들었다.
3. 업적
대중은 물론 선수들 스스로조차도 동의하지 않던 말인 '''선수=노동자'''라는 개념을 확립시켰다. 운동 선수들도 노동계약을 맺으며 노동법의 보호를 받는 하나의 전문직업임을 선언한 큰 변화. 이런 인식을 확립하기 시작하며 MLBPA는 점차 영향력을 확대해나가기 시작했다. 또한 구단주와 커미셔너의 압박에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선수들을 찾아가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며 선수들의 선수생활 여건, 복지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였고 선수들에게 스스로 역시 노동자로서 권리를 갖는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첫 성과로, 그는 1968년 시즌 한번의 파업을 통해 MLB 역사에 길이 남을 최초의 노사협정(Collective Bargaining Agreement)[4] 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이로서 모든 선수가 노동법의 테두리안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단년계약, 최저연봉 6천 달러가 원칙이었던 MLB 연봉협상에서 최저연봉을 10,000달러로 올리는 큰 성과를 거뒀다.
그리고, 1970년 '''커트 플러드 트레이드 거부 사건'''을 계기로 그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한 시대를 풍미하였지만 거주지인 세인트루이스를 떠나 인종차별적인 광적인 팬들[5] 이 득실대던 필라델피아 필리스로의 트레이드를 받아들이지 못한 플러드에게 최대한의 협조를 해주며 소송을 진행하는데 있어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30여년이 지난 1998년에 이르러서야 독과점 금지법의 적용 범위에 메이저리그가 포함되었다. 그리하여 이 법은 "커트 플러드 법"으로 명명되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1974년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의 명예의 전당 투수 캣피시 헌터가 찰스 핀리 구단주와 연봉분쟁을 벌일 때 연봉조정에 있어 헌터를 대변하며 사상 최초의 자유 계약선수 신분을 얻어내는 결과를 이끌어냈다. 이는 1975년 다시 앤디 메서스미스, 데이브 맥널리에 대한 시츠(Peter Seitz)의 판결로서 공식적으로 MLB에 '''FA 제도'''가 도입되는 결과를 낳았다.
모든 선수들이 계약 종료 즉시 어느팀과도 자유롭게 계약할 수 있다는 것은 마치 100년전 야구 초기때처럼 FA 시장에서 공급의 과잉을 이끌어내게 되므로 밀러는 다시 수정을 거쳐 보류조항을 유지하는 대신 서비스타임 6년을 채운 선수에게 제한적으로 적용하도록 제도를 손질했지만, 모든 선수들의 생사여탈권을 구단이 갖고 있던 보류선수제도에서 선수를 보호하는 길에 있어 마빈 밀러의 이 업적은 MLB를 통째로 뒤집어 놓는 결과가 되었다.
또한 이런 FA제도를 팀이 악용하지 않도록 FA가 되지 않은 선수에게도 연차가 쌓이면 최저연봉제한을 벗어나 제대로된 연봉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연봉조정'''제도를 제대로 정착시키는데 성공했고, 각종 부상자 명단, 조문 명단[6] 등 여러 제도를 설치하고 거액의 수입을 벌어들이는 방송국이나 구단들로부터 기금을 모아 선수들의 노후 연금을 보장하는 등 선수들이 야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또한 임기 말인 1981년 FA제도 개선을 위한 파업시즌을 이끌기도 했다. 마빈 밀러는 이 파업에 대해 "선수들은 무엇 때문에 파업하는지는 몰랐겠지만, 이 파업은 선배들이 훗날의 후배들을 위해 희생한 것이었다"고 평하면서 자신의 최고의 순간으로 꼽았다.
그 외에 선수들의 부상을 방지하기 위한 워닝트랙[7] , 쾌적한 라커룸 확보, 선수들의 피로도를 덜기 위한 게임 스케줄 조정, 선수명 등록 라이센스[8] 등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선수들의 수익증대와 복지에 있어서는 굉장히 중요한 제도들을 만들기도 했다.
4. 그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
마빈 밀러는 베테랑 위원회가 선정하는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매번 물을 먹고 있다. 심지어 2010년 말 진행된 2011년 투표에서는 단 한 표 차이로 헌액되지 못하는 불운을 겪기도 했고, 끝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지 못하고 2012년 11월 27일 세상을 떠났다. 마빈 밀러가 행한 이 모든 일은 구단주들의 입장에서는 순전히 자기 돈 낭비하는 꼴이었기 때문에 밀러가 좋게 보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활동은 어디까지나 '''선수'''들을 위한 활동이었다. 선수들을 위해 여러 곳으로 뛰었으며 선수들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평생을 헌신한 그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MLBPA는 선수들이 선정하는 상을 만들었다. 바로 그라운드 안팎에서 모범(리더십)을 보인 선수에게 수여하는 '''Marvin Miller Man of the Year'''. 또한 여러 명예의 전당급 베테랑들이 그에게 감사하는 의미로 93세 생신에 맞춰 '''ThanksMarvin.com'''이라는 웹사이트를 만들기도 했다.
이리저리 비리 문제라든지 대중의 인식 부족 등의 문제로 표류하고 있는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에 있어 가르침이 될 수 있는 인물로도 꼽힌다.
더 자세한 이야기를 알고 싶다면 야구의 혁명가 마빈 밀러(블로그 글), 위키피디아, 민훈기 기자의 칼럼 이현우 기자의 칼럼 참조 바람.
결국 2019년 12월 9일 헌액 확정이 됐다.
[1] 구단이 선수의 이적이나 기용 등에 대해 전적인 권리를 지니는 것. 나무위키식으로 설명할 경우 '''"들어올 땐 마음대로 들어왔겠지만 나갈 땐 아니란다."''' [2] 일단 '''MLBPA가 파업을 선언하면 백악관도 발칵 뒤집힌다고 보면 된다.''' 또한 MLB 사무국은 약물 검사에 있어서도 MLBPA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으며, 각종 스캔들이 있을 때마다 선수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은 물론, 선수들을 위해 노후 연금까지 조성하여 지급하고 있다. MLB에서 17년을 뛴 박찬호 또한 거액의 연금을 수령하게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그 정치인 맞다. 단, 친 구단적 보수파 인사로서 노조위원장으로 유력시되었던 닉슨은 밀러의 반대로 노조에 관여하지는 못했다.[4] 여러 차례의 파업(...)과 양측의 협정 갱신을 거쳐 2011년 시즌이 종료된 뒤에도 한번의 갱신이 있었다.[5] 흔히 PHILLIGAN이라고들 한다(...) 필라델피아 필리스 항목 참조. [6] 2011년에는 '''출산휴가''' 제도도 생겼다. 2013년도까지 콜비 루이스를 비롯한 몇몇 선수들이 이를 사용했다.[7] 흔히들 워밍업 하는 트랙으로 착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선수들의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 펜스와의 거리가 멀지 않음을 경고하기 위해 잔디를 깔지 않는 지역이다. 외야수들이 눈앞을 신경쓰지 못하고 빠른 타구를 쫓아가다가 펜스에 덜컹 부딪힐 수 있기 때문에 "잔디→흙"이라는 차이를 발로 느낄 수 있는, 일종의 경계선 노릇을 한다. 물론 그렇게 하더라도 외야에서 뛰어다니다보면 부상이야 예삿일이며, 이 때문에 외야펜스의 충돌 시 안전확보 등도 차후에 강화되기 시작했다.[8] 물론 배리 본즈는 이에 반발하여 본인이 독자적으로 라이센스를 판매했다. 대표적인 피해(?) 게임이 바로 MVP 베이스볼 시리즈. 비슷한 예로 농구의 그 분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