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조던

 


'''주요 수상 및 헌액 경력'''
[ 펼치기 · 접기 ]











'''시카고 불스 영구결번'''[174]
'''마이애미 히트 영구결번'''
No. 23
No. 23

[image]
'''1991'''
'''1992'''
'''1993'''
'''1996'''
'''1997'''
'''1998'''

'''1985년 NBA 올해의 신인상'''
랄프 샘슨

'''마이클 조던'''

패트릭 유잉
'''1988년 NBA 정규시즌 MVP'''
매직 존슨

'''마이클 조던'''

매직 존슨
'''1991년 ~ 1992년 NBA 정규시즌 MVP'''
매직 존슨

'''마이클 조던'''

찰스 바클리
'''1996년 NBA 정규시즌 MVP'''
데이비드 로빈슨

'''마이클 조던'''

칼 말론
'''1998년 NBA 정규시즌 MVP'''
칼 말론

'''마이클 조던'''

칼 말론
'''통산 5회 NBA 정규시즌 MVP 수상.'''
'''1991년 ~ 1993년 NBA 파이널 MVP'''
아이재아 토마스

'''마이클 조던'''

하킴 올라주원
'''1996년 ~ 1998년 NBA 파이널 MVP'''
하킴 올라주원

'''마이클 조던'''

팀 던컨
'''통산 6회 NBA 파이널 MVP 수상.'''
'''1987년 ~ 1993년 NBA 올해의 득점왕'''
도미니크 윌킨스

'''마이클 조던'''

데이비드 로빈슨
'''1996년 ~ 1998년 NBA 올해의 득점왕'''
샤킬 오닐

'''마이클 조던'''

앨런 아이버슨
'''통산 10회 득점왕 수상''', '''역대 득점왕 횟수 1위'''
(1987년~1993년 '''7년 연속 득점왕''', 1996년~1998년 '''3년 연속 득점왕 기록.'''[175])
'''1988년 NBA 올해의 수비수상'''
마이클 쿠퍼

'''마이클 조던'''

마크 이튼
'''1988년 NBA 올해의 스틸왕'''
앨빈 로버트슨

'''마이클 조던'''

존 스탁턴
'''1990년 NBA 올해의 스틸왕'''
존 스탁턴

'''마이클 조던'''

앨빈 로버트슨
'''1993년 NBA 올해의 스틸왕'''
존 스탁턴

'''마이클 조던'''

네이트 맥밀런
'''통산 3회 NBA 올해의 스틸왕 수상.'''
'''1988년 NBA 올스타 MVP'''
톰 챔버스

'''마이클 조던'''

칼 말론
'''1996년 NBA 올스타 MVP'''
미치 리치몬드

'''마이클 조던'''

글렌 라이스
'''1998년 NBA 올스타 MVP'''
글렌 라이스

'''마이클 조던'''

샤킬 오닐
팀 던컨[176]
'''통산 3회 NBA 올스타 MVP 수상.'''
'''1987년 ~ 1988년 NBA 슬램덩크 컨테스트 우승자'''
스퍼드 웹

'''마이클 조던'''

케니 워커
'''통산 2회 NBA 슬램덩크 컨테스트 우승자.'''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마이클 조던'''
'''헌액 연도'''
2009년


'''1991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선정 올해의 스포츠맨'''
조 몬타나

'''마이클 조던'''

아서 애시

''' 시카고 불스 No.23 '''
''' 마이애미 히트 No.23 '''
'''샬럿 호네츠 & 그린즈브로 스웜 구단주'''
'''마이클 제프리 조던
(Michael Jeffrey Jordan)
'''
'''출생'''
1963년 2월 17일 (61세)
뉴욕주 브루클린
'''국적'''
[image] 미국
'''대학 팀'''
노스 캐롤라이나 타 힐스 (1981~1984)
'''신체'''
198 cm[1] / 101 kg[2] 315mm
'''포지션'''
'''슈팅 가드'''[3]
'''후원사'''
'''에어 조던'''[4]
'''드래프트'''
'''1984년 NBA 드래프트 1라운드 3순위
시카고 불스 지명'''
'''역대 소속팀'''
[image]'''시카고 불스 (1984-1993)'''
[image]버밍햄 배런스[5] (1994)
[image]'''시카고 불스 (1995-1998)'''
[image]워싱턴 위저즈 (2001-2003)
'''등 번호'''
'''23번''',[6] 45번,[7] 9번,[8] 12번[9]
'''수상 내역'''
[ 펼치기 · 접기 ]
'''[image] NBA 챔피언 6회 (1991-1992-1993, 1996-1997-1998)'''
'''[image] NBA 파이널 MVP 6회 (1991-1992-1993, 1996-1997-1998)'''
[image] ''' NBA 정규시즌 MVP 5회 (1988, 1991-1992, 1996, 1998)'''
[image] '''올-NBA 퍼스트 팀 10회 (1987-1993, 1996-1998)'''
[image] '''NBA 득점왕 10회 (1987-1993, 1996-1998)'''
[image] '''NBA 올해의 수비수상 (1988)'''[177]
[image] NBA 올스타 14회 (1985-1993, 1996-1998, 2002-2003)[178]
[image] NBA 올스타전 MVP 3회 (1988, 1996, 1998)
'''[image] NBA 올-디펜시브 퍼스트 팀 9회 (1988-1993, 1996-1998)'''
[image] 올-NBA 세컨드 팀 (1985)
[image] NBA 올해의 신인상 (1985)
[image] NBA 올-루키 퍼스트 팀 (1985)
[image] NBA 올해의 스틸왕 3회 (1988, 1990, 1993)
[image] NBA 슬램덩크 콘테스트 챔피언 2회 (1987-1988)
[image] NCAA 챔피언 (1982)
[image] 네이스미스협회 선정 올해의 대학선수상 (1984)
[image]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선정 올해의 스포츠맨 (1991)
[image]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 (2016)
[image]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2009)'''
[image]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D4AF37 금메달}}}'''
[image]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D4AF37 금메달}}}'''

'''재산'''
16억 달러 (한화 약 1조 7669억 원)[10][11]
'''가족'''
슬하 2남 3녀[12][13]
'''서명'''
[image]
1. 개요
2. 상세
4. NBA에 미친 영향
5. 기록
6. NBA Career Statistics
7. 플레이 스타일
7.1. 역사상 가장 강력한 공격 무기
7.1.1. 조던의 3점슛 능력
7.2. 가장 압도적인 수비수
7.3. 슈팅가드 포지션의 혁신을 가져오다
8. 관련 일화
9. 여담
9.1. 조던의 리더십
9.2. 독한 놈 마이클 조던
9.3. 조던의 피해자
9.4. 넘사벽 인기
9.5. 샘 스미스와 "조던 룰즈" 논란
9.6. 코비와의 각별한 관계

[clearfix]

1. 개요


미국의 前 농구 선수, 야구 선수, 현 사업가. 선수 시절 포지션은 슈팅 가드. 現 NBA 팀 샬럿 호네츠NBA G 리그 그린즈브로 스웜의 구단주 겸 사업가이다.
NBA를 비롯하여 그 누구도 이견이 없는 독보적인 농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14]이자, 미국 역사상 최고의 스포츠 스타 1위에 선정[15]된 선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운동선수 중 한 명이다. 조던은 농구를 넘어 1990년대 전세계 대중문화의 아이콘 중 한 명이었다. 또한 대중음악계의 마이클 잭슨과 더불어 미국의 인종차별완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 중 하나로 자주 거론된다.[16]
별명은 Air, His Airness[17], MJ[18], Black Cat[19], Black Jesus[20], GOAT 등으로 불리고, 한국에선 농구 황제, '그 분', 마 사장, 쪼잔왕, 미카엘 요르단, 역사상 최고의 소인배, 조틀딱, 신발 장수 아저씨[21] 등으로 불린다.

2. 상세


선수 시절 등번호는 '''23'''번.[22] 워낙 그가 유명해서 농구의 23번 하면 100% 조던. 농구가 아니더라도 조던 세대들은 숫자 23을 조던 넘버라고 부르기도 한다.[23] 농구인들끼리는 암묵적으로 23번이 축구에서 10번[24]이 가지는 상징 그 이상으로 여겨지거나 아예 부담으로 느껴지는 경우도 있는 만큼 조던이 아무 의미 없던 특정 백넘버[25]에 이 정도 의미를 부여했을 정도로 얼마나 대단한 업적을 남겼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다. 그의 시그니처 농구화로는 에어 조던이 있다.
지금도 NBA를 비롯하여 역대 최고의 농구 선수이자 가장 영향력 있는 슈퍼 스타로[26][27] 농구 그 자체를 대표하는 선수. NBA를 지금의 위치로 올려놓은 두 인물 중 하나로, 나머지 한 명이 커미셔너를 역임한 데이비드 스턴임을 감안할 때, 선수인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라 봐도 좋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농구 선수 역대 탑1이다. [28]
참고로 커미셔너 (총재)는 절대 권력자가 절대 아니라 실질적인 힘은 자금줄을 거머쥔 구단주들에게 있으며 총재는 이들의 동의 하에 임명된 월급쟁이 사장 정도 위치이다. 구단주는 총재의 해임을 위한 구단주 투표를 건의할 수 있는 반면, 총재는 구단주를 퇴출시킬 수 없고 구단주를 퇴출하려면 구단주 투표가 필요하다. 즉, 구단주들은 총재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반면 총재는 구단주들의 눈치를 봐야 하기 때문에 실제 파워에서는 돈줄을 쥔 구단주들이 더 막강하다. 다만 구단주와 달리 총재는 NBA 자체의 룰을 바꿀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리그를 변화시키는 면에 있어선 당연히 영향력이 막강하다.
게다가 스턴은 84년부터 2014년까지 무려 30년간 장기집권하면서 드래프트 2라운드제(그 이전까지는 10몇개 라운드까지 있었으며 매년 바뀌었다), 드래프트 생중계(초창기엔 방송국에 돈까지 쥐어주면서 했다. 물론 지금은 광고료 받는다), NBA 선수들의 올림픽 출전, 공격농구와 공격수 보호를 위한 일련의 룰 개정 등 수많은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에 일반적인 총재보다 훨씬 막대한 영향력을 준 인물. 실제로 80년대에 드래프트 중계권도 못 팔고 결승도 녹화 중계되던 시절부터, 선수 연봉만 팀당 10억 달러 언저리를 (스턴 은퇴 당시 기준) 지출하는 거대 리그가 되기까지 스턴, 그리고 스포츠 사상 가장 마케팅 가치가 높은 존재 중 하나인 조던의 영향력은 그야말로 절대적이었다. 물론 그 와중에 두 사람 모두 너무 상업적이라며 비난을 받았다.
미국에서는 NFL에 대적할 수 있는 스포츠가 없다고 할 수 있지만, 농구도 조던이 선수로서 뛰던 시절엔 그 관심도에서 밀리지 않았고, 그는 실질적으로 NBA라는 리그를 세계적인 리그로 만든 인물이다. 통산 게임당 득점이 30.1점으로 올 타임 1위에 자리잡고 있는 역대 최고의 스코어러였으며[29], 올해의 수비수 상을 수상받은 경력이 있을 정도로 수비력 역시 역대에서도 손에 꼽히는 수준이다. 거기에 계약서에 "상기에 명시된 경기 이외에 몇 경기를 그저 '''농구가 좋아서(for the love of the game)''' 돈을 받지 않고 뛰어줄 수도 있다"고 할 정도로 그야말로 '농구에 미친 사람'이었다. 그리고 미디어에 자신을 포장할 줄도 알았으며, 이미지 메이킹에도 천부적인 소질을 발휘, 결과적으로 '''농구황제'''로 불린다.
조던은 매직 존슨, 래리 버드의 라이벌리 시대가 끝나가는 시기인 1990년 초에 최정상 자리를 차지하면서 자연스럽게 NBA 대표스타로 떠오를 수 있었고, 그 당시부터 위성 방송으로 라이브 경기를 세계에서 비교적 싼 값에 송출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기 때문에 운이 좋았다고 할 수도 있다. 더군다나 지금과 같이 인터넷이나 스마트 기기들로 활발히 정보 교환이 되는 시기도 아니라 이미지 메이킹에 더욱 편리한 시대였기도 했다. 매직 존슨이나 줄리어스 어빙 같은 그 이전 세대의 NBA 간판 선수들과 비교해보면 시기적으로 굉장히 잘 타고났다고 할 수도 있다. 물론 이런 기회를 잡은 건 온전히 그의 실력. 실제로 그 이전에 시대를 지배한 러셀과 체임벌린의 경우 서로 대등한 라이벌이었고, 70년대 최고 선수인 카림은 이때 우승이 한번에 불과하며, 매직과 버드도 실적은 매직이 좋지만 둘 역시 대등한 라이벌이었고, 2000년대에 두각을 나타낸 샤킬 오닐, 팀 던컨, 코비 브라이언트 역시 누가 압도적으로 최강이라고 할 정도는 아닌데 조던은 90년대 독보적인 원톱으로 나머지 슈퍼 스타들을 전부 콩라인으로 만들 정도였다. 팀성적 + 개인 성적의 조합으로 이처럼 압도적인 선수는 그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인기 면에선 시대를 잘 타고난 부분도 있지만, 실력 면에선 이미 역대 최고라 인정받는 마당에 딱히 태클을 걸 건덕지가 없는 것.
사실 "시대를 잘 타고났다"고 말하기가 좀 애매한 게, 조던 수준의 실력과 인기를 지닌 선수는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기 때문에 비교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매직, 버드나 어빙, 후대의 코비, 르브론 등이 최소한 리그 내에서 입지가 조던과 비슷한데 노출도의 차이로 조던이 압도적인 상품 가치를 갖게 되었다면 시대 차이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겠지만, 이들은 조던만큼의 입지를 가진 적이 없다. 특히 조던의 경우 현재 스타들에 비해 노출도에서 훨씬 떨어진다. 이득이 되는 건 오직 이미지 메이킹 하나 때문인데, 사실 조던은 본인의 소심하고 지독하기까지 한 승부 근성이 다 까발려진 이후인 201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농구 선수들 중 압도적인 인기를 자랑했다(밑의 기타 문단의 Harris Poll 참고). 또한 지금도 그가 역대 최고의 선수라는 걸 부인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종합해 보면 노출도 면에서 선배들보다 유리했을지는 모르나, 까놓고 말해 후배들보다 이득을 본 부분은 없다. 조던이 압도적인 농구 황제로 추앙받는건 르브론 등 다른 선수들보다 뛰어난 실력과 성과를 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은퇴 선수들은 현역 선수들에 비해 선수 평가에서 불리한 경우가 많은데 조던의 역대 1위 자리는 요지부동이다.
압도적인 실력과 시대적 배경을 떠나도 그의 생애 자체가 마치 짠 것처럼 너무나도 드라마틱한 것 역시 그의 인기에 한 몫하고 있다. 잘하는 선수야 많았지만, 이렇게 각본을 쓴 것처럼 농구 인생이 드라마틱하고 극적인 요소가 많은 농구 선수는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 탈락 후 실력을 갈고닦아 전미 최고 수준의 유망주가 됐고, 1학년때 당시 기준으로 농구 역사상 가장 많은 유료 관중들 앞에서 역전 위닝슛을 터뜨린 것까지는 그렇다고 쳐도, 부상당하고 복귀한지 얼마 안되어 역대 최고의 팀을 상대로 터뜨린 63점 플레이오프 신기록, NBA 역사상 최초로 시리즈 최종전에서 지고 있는 팀이 버저 비터로 역전승한 The Shot, 리그 최하위권 팀에 데뷔해 한단계 한단계씩 성장하며 리그 최강이던 피스톤즈를 상대로 레벨업을 하듯 매해 1패씩 줄여나가다가 승리, 디펜딩 챔피언은 아니지만 80년대를 지배한 매직의 마지막 파이널과 맞물린 그의 첫 파이널, 대관식을 하듯 매직과 비슷한 방식으로, 매직보다 더 뛰어난 활약을 하며 승리해 첫 우승, 같은 포지션의 라이벌이었던 클라이드 드렉슬러와 맞붙어 모든 면에서, 심지어 약점이라 여겨졌던 3점슛에서조차 그를 능가하며 두번째 우승, 동년배들 중 처음으로 MVP 투표에서 조던을 제낀 절친 찰스 바클리를 능가하며 한 세번째 우승, 모든 걸 이룬 바로 그 해 찾아온 아버지의 피살이라는 비극, 이로 인해 정상의 자리에서 미련없이 은퇴, 아버지와의 추억이 서린 야구라는 스포츠로 도피, 야구계 파업과 함께 복귀, 복귀해서 겪은 좌절, 좌절을 딛고 이뤄낸 NBA 사상 한 시즌 역대 최다승 기록, 복귀 후 네 번째 우승을 하필 '''아버지의 날'''에 이뤄냄, 다시 오른 파이널 무대에서 팽팽히 맞선 승부처, 제대로 걷기조차 힘들 정도로 안 좋은 몸 상태를 딛고 이뤄낸 승리, 마지막 파이널 무대에서 믿었던 2인자의 부상 재발, 동료들의 단체 부진을 딛고 원맨쇼로 꾸역꾸역 따라가다가 마지막 순간에 스틸+역전 위닝샷, 리그 최고의 선수로 우승까지 거머쥔 상태에서 다시 한번 정상에서 미련없이 은퇴, 웬만한 선수들은 커리어에 몇번 있는 정도인 극적인 사건이 '''거의 매해''' 있을 정도로 엄청난 드라마의 주인공이기도 했다.[30]
이 점 때문에 그의 워싱턴 복귀를 안 좋게 보는 팬들도 많다. 물론 워싱턴 시절에도 커리어 로우 득점을 한 이후 비판의 시선을 잠재우는 51점, 역대 유일하게 40점을 넘긴 40대 선수, 버저 비터 게임 위닝샷 이후 해설자의 "Michael Jordan, the greatest player of all time!"이란 외침 등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많았지만, 시카고 시절만큼 극적인 순간은 없었다. 사실 51점이나 40대 40점은 모두 경기력 면에서 보면 굉장히 극적이지만, 이런 식으로 극적인 사건은 꽤나 흔하다. 조던이 더 특별했던 것은 조던 본인의 개인사나 스포츠 외적으로 봐도 극적인 면모가 더해졌던 것이다. 정상에서 은퇴하는 선수들은 종종 있지만 '''아버지의 살해로 인해''' 은퇴하는 이들이 얼마나 있는가? 또한 그 비극을 딛고 복귀했는데 하필 '''아버지의 날에''' 정상에 복귀하는 건 또 얼마나 극적인가? (단판제가 아닌 7전 4승제라 언제 시리즈가 끝날지 모르기 때문에 일부러 그렇게 짠 것도 아니다. 물론 사무국에서 시리즈가 끝날 확률이 높은 6차전이 그렇게 되도록 짰을 순 있겠지만) 조던과 다른 "역대급으로 잘하는" 선수들을 구분짓는 그런 드라마가 워싱턴 시절엔 없었던 것. 또한 조던은 큰 무대에서 강한 선수라 플레이오프와 결승에서 잊지 못할 순간들을 남겼는데 플레이오프에 한번도 진출을 못했다. 무엇보다 조던은 '''완벽'''이란 이미지가 강했는데, 커리어 내내 플레이오프 진출, 91년 이후 풀시즌을 소화했을 땐 한번도 시즌 최종전에서 패배한 적이 없음, 누구도 부인 못하는 리그 최고의 선수였을 때 은퇴, 등 완벽한 선수였다. 그러나 워싱턴 시절로 그의 "인간적인"(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에 비하면 비인간적인) 모습을 통해 그 이미지가 많이 옅어졌다.

3. 생애




4. NBA에 미친 영향


[image]
1988년 슬램덩크 컨테스트에서 선보인 자유투 라인 덩크[31]
[image]
마이클 조던의 위대함은 그가 경력을 통해 쌓은 실적과 기록, 그리고 아직까지도 채 식지 않은 인기로 증명되고 있지만, 더욱 대단한 것은 다음과 같은 영향을 아직까지도 NBA에 남기고 있다는 점이다.
  • NBA의 패러다임을 변화시켰다는 점이다. 역대 NBA를 지배했던 것은 조지 마이칸 - 빌 러셀윌트 체임벌린 - 카림 압둘 자바로 대표되는 빅맨들이었고, 실제로 저 3인은 NBA에서 가장 위대한 선수를 꼽을 때 조던 다음의 3인방으로 흔히 꼽히고는 한다. 그 이후로도 리그를 대표하는 각 팀의 중심 선수들을 꼽으라면 하킴 올라주원, 패트릭 유잉, 데이비드 로빈슨, 그리고 샤킬 오닐 등의 센터 포지션이 꼽힌다. 그런데 조던이 가드로서 팀의 중심이 되어 저 센터들과의 대결에서 모조리 승리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고 시대를 지배하였다. 조던 이전은 고사하고 이후에도 리그를 지배한 것이 샤킬 오닐-코비 브라이언트 조합과 팀 던컨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는 센터 포지션 중심의 NBA 패러다임을 변화시킨 최초의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32] 정확히 말하면 매직 존슨에서부터 시작된 변화의 정점을 찍은 게 바로 조던이다. 예전에는 큰 선수들은 당연히 골밑 플레이를 익혔으나 빅맨의 체격으로 퍼리미터에서 뛰는 매직의 등장은 70년대생 선수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기존의 센터급 선수들이 다재다능한 포워드가 되는 데 영향을 주었다.(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대표적인 선수들이 크리스 웨버케빈 가넷이다. 특히 가넷은 첫 올스타전에서 매직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이 손 안 씻을 거에요!"라고 카메라를 향해 농담할 정도로 매직을 존경한다) 그러나 70년대 후반 이후 태어나 매직보다는 조던을 보며 자란 코비 브라이언트, 트레이시 맥그레디 등 스윙맨들이 난립하게 된다. 한편 이러한 변화가 지속되며 빅맨이건 윙플레이어들이건 너나할 것 없이 골밑 기본기와 풋워크보다는 화려한 외곽 플레이를 연습하는 트렌드가 자리를 잡았다.(80년대만 해도 외곽 선수들도 골밑 플레이 능력을 갖고 있었다. 당시 스몰 포워드인 제임스 워디나 도미닉 윌킨스, 슈팅 가드인 마이클 조던이나 클라이드 드렉슬러 등의 경기를 보면 주 활동 반경이 중거리였음에도 골밑에서 훅슛과 골밑슛 등이 능했다) 또한 조던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부분은 아니지만, 조던 시대에 NBA가 크게 성장하며 어린 선수들이 당장 리그에 뛰어들어 큰 돈을 만질 수 있게되자 고졸 및 대학 1년만 다니고 데뷔하는 선수들이 폭발적으로 많아지게 된다. 문제점은 기본기는 대학 시절에 대부분 배우는데 고졸 선수의 난립으로 기본기가 부족한 선수들이 크게 늘어났다는 것.(기본기 부족, 빅맨인데도 골밑 기술 부족을 동시에 보여준 선수가 한때 케빈 가넷에 비견되던 초대형 유망주였지만 아무것도 못하고 사라진 조나단 벤더이다) 현재 NBA가 고졸을 금지시키며 기본기 부족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됐지만, 외곽 중시 트렌드로 인해 센터 유망주들이 씨가 말라 버리며 NBA 팀들 역시 탁월한 센터 없이 농구를 하는 방향으로 전술을 짜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현재와 같이 센터에 의존하지 않고 외곽에서의 볼과 선수들의 움직임이 중요한 시스템 농구, 퍼리미터 위주 농구가 대세가 되었다. 또한 가드나 포워드들 사이에서 훅슛 등 골밑에서 득점기술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지만(돌파에 이은 레이업과 다른 개념이다) 대신 3점슛이 기본 소양으로 자리잡아, 현재 3점을 아예 못 쏘는 1~3번은 매우 드물고, 반대로 3점을 수준급으로 쏘는 빅맨들이 많아졌다. 즉, 무게 중심이 골밑에서 외곽으로 바뀌었다. 정리하자면, 조던 혼자서 패러다임을 바꾼 것은 아니지만 현재처럼 트렌드가 바뀌는 데 크게 영향을 준 인물인 것은 맞다.
이후 대표적인 조던 키드인 코비 브라이언트 및 이후 세대에서 조던을 보고 자란 스윙맨들이 난립하는 경기 양상의 변화를 이끌어냈다. 일각에서는 빅맨들의 플레이가 차츰 포스트업이 아닌 페이스업 위주로 변화한 것조차 조던의 영향을 받은 세대들의 등장 때문이라고 주장할 정도. 물론 예전처럼 포스트를 장악할 수 있는 자원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지적 또한 있다. 실제로 현재의 NBA는 공수 전환 속도가 매우 빠르고 모션 오펜스가 널리 쓰임에 따라 센터들이 골밑에 자리를 잡고 있을 수 없고 스크린과 픽앤롤 등으로 계속 움직여야 하며, 그렇기에 예전처럼 센터-파워 포워드 구분이 더 이상 무의미해져 "빅맨"으로 묶어서 부르는 사람들까지 생길 정도다. 그 변화의 시발점이 조던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 핸드체킹룰의 변화 또한 그의 간접적 영향. 빅맨 중심의 농구라면 지향할 수 없었던 룰의 변화는 조던의 은퇴 후 조던과 같은 스타를 양성하기 위해 상대적인 이득을 스윙맨에게 부여함으로써 경기의 재미를 극대화하고자 했던 NBA의 노림수였다. 그러나 정작 이 룰은 조던의 1차 은퇴 후에 도입되었다. 물론 2차 복귀 후에는 예전보다 하락한 운동 능력에도 nba를 지배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33]
  • 마이클 조던 이전까지는 리그가 양웅 대립의 구조로 대개 진행되었다. 대표적인 라이벌리가 빌 러셀윌트 체임벌린, 매직 존슨래리 버드. 자연스럽게 NBA의 마케팅도 이런 구조로 이뤄져 왔다. 그런데 마이클 조던 이후 1인 독재의 파괴력을 체감한 NBA는 포스트 조던 만들기에 골몰하게 되었다. 결국 2000년대에 조던을 잠시 복귀시켜야 할 정도로 혼선을 겪기도 했으나, 코비 브라이언트, 르브론 제임스 등의 지배적인 플레이어가 발생하며 각 팀의 중심 선수가 되었다.
  • 강팀이 아닌 약팀의 선수로 데뷔하여, 자신의 힘으로 그 팀의 수준을 끌어올리면서 온갖 장애물을 극복하고 6번의 우승을 이끌고, 왕조를 건설한 후 프랜차이즈 스타로 정점에서 은퇴하는 업적을 이룩하여, 이후 NBA 스타가 이뤄내는 업적에 대한 평가의 기준을 끝없이 상향시켰다. 단적으로 그의 업적을 따라갈 수 있을 것처럼 보이던 르브론 제임스마이애미 히트로 이적하자 마자 나온 얘기가 "조던 되기는 글렀다"였다.
  • 스타 한 명이 소속팀과 리그를 넘어선 독보적 인지도를 확보했다. 아래 넘사벽 인기 문단의 토니 파커 이야기가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NBA의 세계화에 절대적인 공헌을 했다. 사실 드림팀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처음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NBA 선수들이 참가하는 것을 처음에는 데이빗 스턴이 막으려 했다. 처음에는 마이클 조던도 비시즌 + 84년에 한 번 나갔는데 또? 라는 이유로 미온적이었지만 스폰서인 나이키의 설득과 매직 존슨, 래리 버드 두 선배가 자진해 드림팀에 합류한 뒤 마이클 조던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면서 결국 드림팀이 완성되었고, 마침 그 시기에 절묘하게 미디어 시장이 폭발적으로 확대되어 이미 올림픽에 합류하기 전부터 조던을 포함한 드림팀은 명사가 되어 있었다. 실제로 바르셀로나 시내에 건물 전체를 덮는 조던의 나이키 광고 사진이 걸려 있었을 정도. 게다가 드림팀이 보여준 충격과 공포의 퍼포먼스 덕에 사람들이 엄청나게 관심을 갖게 된다.[34] 이것에 자극을 받은 NBA는 마이클 조던을 앞세워 세계에 NBA를 홍보했고 마이클 조던의 나이키, 경쟁자인 리복, 아디다스 등 세계적 스포츠용품 메이커가 여기에 편승해 어마어마한 투자를 했고, 그 덕에 농구가 지금의 국제적인 겨울스포츠이자 하계올림픽의 대표적인 시청률 제조기라는 위상을 확보하게 되었다.
  • 그가 끼친 영향력이 농구를 넘어서 세계 곳곳에 끼친 영향력은 정말로 지대해서 ESPN에서 조사한 20세기 가장 위대한 스포츠인에서 그 유명한 베이브 루스나 무하마드 알리 등을 제치고 1위를 했다. [35]
  • 2000년대 초반부터 2010년대까지 리그가 조던의 후계자를 찾고 있는 동안 수많은 슈팅가드/스윙맨 스타들이 나타났고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가 스몰 라인업으로 리그의 판도를 흔들 때까지 NBA는 조던의 영향 속에 있었고 지금도 조던의 그림자는 크다.

5. 기록


※ 모든 기록은 10위 이내 입상 기록만 기재함.
  • 단일시즌 필드 골 역대 6위(1986-87시즌, 1,098골)
  • 한경기 필드 골 역대 2위(1993년 1월 16일 vs 올랜도 매직. 27골)
  • 통산 필드 골 역대 4위(12,192골)
  • 단일 NBA 플레이오프 필드 골 역대 2위(1991-92시즌, 290골), 등
  • 통산 NBA 플레이오프 필드 골 역대 3위(2,188골)
  • 단일 NBA 파이널 필드 골 역대 1위(1993년 파이널, 101골)
  • 통산 NBA 파이널 필드 골 역대 6위(438골)
  • 통산 NBA 파이널 MVP 역대 1위(6회, 1991년,1992년,1993년,1996년,1997년,1998년)[36]

  • 단일시즌 자유투 득점 역대 3위(1986-87시즌, 833점)
  • 통산 자유투 득점 역대 5위(7,327점)
  • 단일시즌 NBA 플레이오프 자유투 득점 역대 4위(1989년 플레이오프, 183점), 역대 5위(1998년 플레이오프, 181점) 등
  • 통산 NBA 플레이오프 자유투 득점 역대 2위(1,463점)
  • 통산 NBA 파이널 자유투 득점 역대 6위 (258점)

  • 통산 NBA 플레이오프 어시스트 역대 10위(1,022개)
  • 통산 NBA 파이널 어시스트 역대 7위(209개)

  • 단일시즌 스틸 역대 8위(1987-88시즌, 259개)
  • 통산 스틸 역대 3위(2,514개)
  • 통산 NBA 플레이오프 스틸 역대 3위(376개)
  • 통산 NBA 파이널 스틸 역대 6위(62개)
  • 단일시즌 경기당 스틸 역대 9위(1987-88시즌, 경기당 3.16개)
  • 통산 경기당 스틸 역대 5위(2.35개)
  • NBA 역사상 첫 200스틸, 100블럭 성공(1987-88시즌)

  • 단일시즌 경기 당 득점(PPG) 역대 5위(1986-87시즌, 37.09점), 9위(1987-88시즌, 34.98점) 등등
  • 단일시즌 플레이오프 경기 당 득점 역대 1위(1986년 플레이오프, 43.67점), 역대 9위(1990년 플레이오프, 36.69점) 등
  • 통산 경기 당 득점 역대 1위(30.12점)
  • 통산 NBA 플레이오프 경기 당 득점 역대 1위(33.45점)
  • 통산 NBA 파이널 경기 당 득점 역대 2위(33.60점)

  • 단일시즌 선수 효율성 지수 역대 3위(1987-88시즌, 31.71), 역대 5위(1990-91시즌, 31.63), 역대 9위(1989-90, 31,18), 역대 10위(1988-89시즌, 31.14) 등등.[37]
  • 통산 선수 효율성 지수 역대 1위(28.35)
  • 단일시즌 NBA 플레이오프 PER 역대 6위(1991년 플레이오프, 32.17)
  • 통산 NBA 플레이오프 PER 역대 1위(28.76)

  • 단일시즌 WS 역대 9위(1987-88시즌, 21.23) 등
  • 단일시즌 NBA 플레이오프 WS 역대 7위 (1998년 플레이오프, 4.81), 역대 9위(1991년 플레이오프, 4.77) 등
  • 통산 WS 역대 5위(214.02)
  • 통산 NBA 플레이오프 WS 역대 2위(39.76)

  • 단일시즌 WS/48 역대 6위(1990-91시즌, .3211), 역대 9위(1995-96시즌, .3174, 역대 10위(1987-88시즌, .3077) 등
  • 단일시즌 NBA 플레이오프 WS/48 역대 4위(1991년 플레이오프, .3325) 등
  • 통산 WS/48 역대 1위(.2505)
  • 통산 NBA 플레이오프 WS/48 역대 1위(.2553)

  • 단일시즌 VORP[38] 역대 2위(1988-89시즌, 11.98), 역대 3위(1987-88시즌, 11.81), 역대 9위(1989-90시즌, 10.12) 등
  • 단일시즌 NBA 플레이오프 VORP 역대 8위(1990년 플레이오프, 2.79), 역대 10위(1991년 플레이오프 2.75) 등
  • 통산 VORP 역대 2위(104.44)
  • 통산 NBA 플레이오프 VORP 역대 2위(22.85)


6. NBA Career Statistics


[ 정규시즌/펼치기 · 접기 ]
시즌
경기수
시간
필드골
3점슛
자유투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스틸
블락
턴오버
트루슈팅
PER
84-85
82
38.3
.515
.173
.845
28.2
6.5
5.9
2.4
0.8
3.5
.592
25.8
85-86
18
25.1
.457
.167
.840
22.7
3.2
2.9
2.1
1.2
2.5
.533
27.5
86-87
82
40.0
.482
.182
.857
37.1
5.2
4.6
2.9
1.5
3.3
.562
29.8
87-88
82
40.4
.535
.132
.841
35.0
5.5
5.9
3.2
1.6
3.1
.603
31.7
88-89
81
40.2
.538
.276
.850
32.5
8.0
8.0
2.9
0.8
3.6
.614
31.1
89-90
82
39.0
.526
.376
.848
33.6
6.9
6.3
2.8
0.7
3.0
.606
31.2
90-91
82
37.0
.539
.312
.851
31.5
6.0
5.5
2.7
1.0
2.5
.605
31.6
91-92
80
38.8
.519
.270
.832
30.1
6.4
6.1
2.3
0.9
2.5
.579
27.7
92-93
78
39.3
.495
.352
.837
32.6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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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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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4
29.7
94-95
17
39.3
.411
.500
.801
26.9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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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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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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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5
.427
.834
30.4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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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2.4
.5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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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97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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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6
.374
.833
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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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7
27.8
9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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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5
.238
.784
28.7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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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0.5
2.3
.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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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2
60
34.9
.416
.189
.790
22.9
5.7
5.2
1.4
0.4
2.7
.468
20.7
02-03
82
37.0
.445
.291
.821
20.0
6.1
3.8
1.5
0.5
2.1
.491
19.3

[ 플레이오프/펼치기 · 접기 ]
시즌
경기수
시간
필드골
3점슛
자유투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스틸
블락
턴오버
트루슈팅
PER
84-85
4
42.8
.436
.125
.828
29.3
5.8
8.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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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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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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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2
43.7
6.3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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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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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8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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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7
.400
.897
35.7
7.0
6.0
2.0
2.3
2.7
.529
28.1
87-88
10
42.7
.531
.333
.869
36.3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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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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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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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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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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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4
.320
.836
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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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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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5
.524
.385
.845
31.1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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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1.4
2.5
.600
32.0
9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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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8
.499
.386
.857
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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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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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9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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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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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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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545
28.1


7. 플레이 스타일


동부 컨퍼런스에서 감독으로 일하다 보면 누구나 능력이 향상된다. '''마이클 조던'''을 상대하기 위해 엄청난 고민과 연구를 하기 때문이다.

예전 뉴욕 닉스 감독 제프 밴 건디

"당신은 하늘을 날 수 있나요?"

'''"조금은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열렸을 때 기자와 조던의 대화 내용[39]

시간 바쁜 위키러들을 위해 먼저 요약하자면 '''단점이 없는 선수다.''' 정말 눈 크게 떠서 찾아봐도 단점이 존재하질 않는다.[40]
본격적으로 플레이 스타일과 운동능력에 관해 다루기 전에, 먼저 얘기해야 할 점은 조던의 신체이다. 일단 그는 슈팅가드로써 상당히 훌륭한 신체조건인 맨발키 196cm와 윙스팬 210cm를 갖고 있다. 다만, 이 정도의 신체는 슈팅가드로써 매우 훌륭하다고 해도 역대급의 수치는 아니다.[41] 그의 신체조건의 최대 장점이자 역대 최고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바로 '''엄청난 손 크기'''이다. 현재 NBA에서 손크기로 유명한 카와이 레너드는 2011 드래프트의 모든 선수들 중 손크기가 2위에 해당했다.[42] 스몰 포워드임에도 불구하고 전체 포지션 2위의 손크기는 말이 안될 정도로 큰 것이다. 그런데 조던은 포워드가 아닌 '''슈팅 가드'''임에도 불구하고 카와이보다 더 큰 손크기를 갖고 있다. 손목에서 중지 끝까지의 길이는 9.75inch(24.8cm)로 카와이와 똑같지만, 소지부터 엄지까지의 너비는 11.375inch(28.9cm)로 0.3cm 더 크다. 이런 경이적인 손크기 덕에 그는 그만이 할 수 있는 특유의 플레이들을 펼칠 수 있었으며, 감독 필 잭슨도 조던의 압도적인 손크기가 그가 역대 최고의 선수가 되는데에 한 몫했다는 뉘앙스로 말을 한적 있다.
플레이 스타일은 시기에 따라 세 가지로 나뉘는데 우선 블랙캣이라 불리던 초창기 시절에는 NBA 역사상 슈팅 가드 초일류로 분류되는 타고난 운동 능력을 위주로 한 페인트존 닥돌과 그에 이은 득점 및 파울겟 능력, 풀업 점퍼를 기반으로 점수를 따내는 식이었다. 전성기에 비해 점퍼가 안정적이지는 않았지만, 원체 사기 유닛인지라 인사이드를 미친듯이 돌파해 들어갔다. 당시 동영상을 보면 사기에 가까운 운동능력으로 붙잡아도 비집고 들어가고 돌파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당시 조던, 즉 블랙캣 시절의 조던의 운동능력은 역대 가드뿐 아니라 모든 선수들을 통틀어도 최고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윌트 체임벌린이나 르브론같은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선수들도 존재하지만, 그들과 비교해봤을 때 종합적으로 조던이 낮다고 확실히 말하기도 어려우며, 특정 항목들은 오히려 조던이 우위이다. 일단 점프력 같은 경우에는 노스캐롤라이나 시절 조던의 맥스 버티컬은 무려 116CM이며[43] , 데뷔 시즌 조던은 머리가 림을 넘길 정도의 덩크도 인게임에서 보여줬다. 또한 흔히 체공 시간이라고 불리는 점프 후에 공중에 떠 있는 시간은 아예 '''세계 최고'''이며[44] 프리드로우 라인 덩크를 청바지에 티셔츠 넣어 입고도 너무나도 손쉽게 하는 선수였다.[45] 점프력 외에 스피드, 특히 그 중에서도 QUICKNESS라고 불리는 민첩성은 말 그대로 역대 비할 바가 없는 수준이다. 베이스라인에서 퍼스트스텝 밟고 덩크 꽂아넣기까지 질주하는 동안은 정말 눈 깜빡할 새이며 미친듯한 속도를 자랑한다. 달리는 중에 점프로 이어지는 순간의 속도는 역대 모든 선수들 중 최고라고 봐도 된다. 이외에도 바디밸런스는 말하기도 입아픈 수준이며, 파워와 스트렝스, 체력까지 최고 수준이다.[46] 체력과 파워, 바디밸런스는 조던 커리어 내내 유지 또는 증가했다고 봐도 되지만, 점프와 스피드는 블랙캣 조던이 그야말로 압도적인 경지였다.
운동능력 외에 슛을 평가하자면, 당시 조던의 점프슛이 안 좋았던 것은 아니다. 조던은 데뷔 이후부터 항상 점퍼와 자유투가 좋은 선수였다. 다만 그가 슛 메커니즘을 완성시킨 89년 이후부턴 막을 수 없게 된 것일 뿐이다. 점프슛은 슛(농구)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점프해서 올라오는 모멘텀을 자연스럽게 손목까지 전달해서 쏘는 슛이다. 그런데 대학시절부터 프로 초창기까지 조던은 손목 감각에 크게 의존해서 슛을 쐈다(자유투는 초창기부터 완성되어 있었지만 이건 정자세에서 쏘는 거니까). 엄청난 점프력과 균형감각의 소유자였던 조던은 일단 뛴 상태에서 수비를 제치고 더블클러치 점프슛을 던지는 등 플레이가 잦았는데 문제점은 이렇게 쏘는 슛은 포물선이 극히 낮아 거리가 멀면 성공률이 극히 떨어진다는 것. 이 때문에 조던은 중장거리 점프슛을 계속 연습해서 무기로 장착했다. 그러나 확률 높은 공격을 선호하는 본인 성향도 있고, 장거리 점프슛은 다른 슈터의 수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3점슛은 한번도 주요 옵션으로 사용한 적이 없다.
그러나 무서운 건 그럼에도 3점슛으로 클러치슛을 터뜨린 적이 꽤 된다는 것. 97파이널 5차전[47]은 아예 3점으로 위닝샷을 넣었고, 98시즌에 팀 던컨과 첫 만남에서 초반에 슈팅 난조에 시달리다가 후반 들어 점점 끌어올리더니 4쿼터 종료와 동시에 버저 비터 3점을 꽂아넣어 경기를 연장으로 끌고가 결국 승리했다. 98 동부 결승전 4차전에는 불안정한 상태에서 공을 잡자마자 버저 비터 더블클러치 3점슛을 던졌는데 정말 아깝게 림을 한번 흝고 돌아나왔다. 이때 해설자의 "It rimmed out!! It rimmed out! It rimmed out! It rimmed out!!! UN-BE-LIEEEEEE-VABLE!!!!"란 격앙된 해설이 일품. 조던 하일라이트 영상에 자주 등장하는 장면이지만 심지어 성공륭이 2할대 초반이던 80년대 후반(89시즌 전. 당시 입던 매은 반바지로 유추 가능하다) 경기에서 종료 직전 반대쪽 코트에서 질주해와 버저 비터 위닝샷을 넣는 장면이 있다. 3점을 그리 잘 쏘는 선수도 아닌데 왜 3점 클러치슛을 감독이 맡기고, 또 그걸 잘 넣는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지만 조던이란 선수가 원래 그렇다.
블랙캣 시절의 조던은 돌파에 있어 티맥, 그랜트 힐 등등과 함께 역대 최고의 퍼스트 스텝을 지닌 스윙맨이었으며(베이스라인 포스트업으로 시작되는 스핀무브 퍼스트 스텝은 가히 대적할 자가 없다), 그의 최대의 장점이라고도 볼 수 있는 말 체력과 바디 밸런스는 간결한 무브와 미세한 페이크만으로도 쉽게 수비를 제치고 공중에서 빅맨들과 맞부딪히면서도 안정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것도 경기당 40분씩 82경기 꼬박꼬박 뛰던 양반이.[48] 젊었을 때 조던은 정말 말도 안되게 빨라서 어깨를 움찔하는 것만으로 수비수의 타이밍을 뺏고 순식간에 돌파해버리곤 했다. 젊은 시절 조던의 사기적인 민첩성에 대해선 이 영상을 참고하자.
그런데 이때문에 일부 팬들은 드리블 실력이 다른 특급 스윙맨에 비해 떨어진다고 오해하기도 하는데, '''페이크 하나만 하고 돌파할 수 있는데 쓸데없이 잔드리블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안 하는 것이다.''' 애초에 조던은 드리블을 하면서 최고 속력으로 달릴 수 있는 선수이다. 이게 쉬운 일이 아니다. 자유투 덩크의 경우 아주 빠른 속도로 달려야 하기 때문에 웬만큼 드리블을 잘 하는 선수들도 볼을 잡은 상태에서 달리는 경우가 많다. 포워드인 줄리어스 어빙은 그렇다고 쳐도, PG까지 소화가 가능한 슈팅가드 브렌트 베리 역시 볼을 잡고 달렸으며, 스몰포워드치곤 볼 핸들링이 나쁘지 않은 조쉬 스미스는 드리블하면서 속도를 올리다 얼마 못 가고 볼을 흘린 다음 그냥 볼을 쥐고 뛰었다. 농구코트는 의외로 좁기 때문에 수비하다가 반대편 코트로 가게 되면 가드 포워드는 전력질주할 공간이 몇발짝 밖에 되지 않으며, 빅맨의 경우 코스트 투 코스트를 한다고 쳐도 처음부터 전력으로 달리지 않으며 막판에 속도를 갑자기 올린다. 즉, 농구경기에서 코트 한쪽에서 반대쪽까지 공을 몰고 전력으로 달릴 기회는 거의 없다.(수비의 존재 때문이다. 볼을 가지는 순간 수비가 집중되는데 한쪽에서 반대쪽까지 갈 때까지 전력으로 달리게 내버려두면 그건 수비가 심각하다는 것이다.)[49] 그렇기 때문에 아예 볼 핸들링의 달인인 포인트가드가 아닌 이상, 드리블을 하며 안정적으로 최고속도까지 올리는 선수는 의외로 드물다. 조던의 볼 핸들링은 풀타임 PG 수준이었기에 가능한 것. 실제로 그는 88-89시즌 막판에 풀타임 PG를 봤고(샘 빈센트와 존 팩슨으로 실험하던 덕 칼린스 감독이 둘의 수준에 질려 둘 다 벤치로 보내고 아예 조던을 PG로 돌렸다) 이 때 리그에서 가장 위력적인 포인트가드 중 하나였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렇다고 이 시절 조던이 점퍼가 평균 이하였던 건 절대 아니다! 애초에 농구가 돌파로 모든 득점을 해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50] 그랬다면 루키 시즌에 28점씩 때려박을 수 있을리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는데 그의 고감도 점퍼의 타점은 당시부터 매우 높은 편이었다. 다만 슈팅 메커니즘이나 폼에 있어서 약간 어설펐던 것이 사실이고, 이에 대해서는 대학 시절 은사인 딘 스미스 또한 루키 시즌 이후 조던에게 점퍼를 보완하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뭐 그 이후에는 다들 아시는 대로... 완전체가 되었다. 90년대 초반 첫 번째 쓰리핏 시절을 보면 운동능력과 기술이 완벽하게 조합된 농구의 신을 볼 수 있다.
굳이 약점을 들자면 3점슛의 성공률이 슈팅 가드로서는 낮은 편이다. 실제로 루키 시즌과 3번째 시즌까지는 3점슛 야투 성공율이 15%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전매 특허인 돌파에 이은 앤드원 플레이(득점 인정 반칙)가 있기 때문에 큰 상관은 없었다. 애초에 '''게임당 평균 30점'''을 넣어주는 선수인데 3점 좀 못 넣은들 뭐가 대수겠냐만. 그리고 3점도 평소엔 그저 보통의 가드 수준이다가, 누가 3점이 안 좋다고 입이라도 벙긋하면 불타오른 승부 근성으로 전반에만 3점 6개를 넣기도 했다. 그것도 파이널에서. 사실 3점슛 성공률이 낮은 이유는 마이클 조던이 농구를 배우던 학창 시절에는 3점슛에 대한 규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동년배에도 이후 3점슛을 장착한 슈터들이 몇 있긴 했지만 조던 입장에선 굳이 플레이 스타일을 바꿔가면서까지 3점슛을 익힐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르브론 제임스 문서에도 나와 있지만 조던의 첫 세번의 파이널과 르브론의 12~14 파이널을 비교하면(르브론이 폭망한 07,11파이널이 빠져서 오히려 르브론에 유리한 비교이다.) 조던은 세번의 파이널에서 삼점슛 57개를 던져 24개를 성공(성공률 42.1%)시켰고 르브론은 77개를 쏴서 29개를 넣었다(37.7%). 물론 두 경우 모두 단축 라인이 아닌 정상적인 3점 라인. 즉 중요한 순간에는 3점이라도 쏠쏠하게 넣어줬다. 때문에 이는 크게 약점이었다고 보긴 힘들다.
넘사벽의 운동 능력, 기술 때문에 많이 부각되지 않는 내용이지만 그의 가장 무시무시한 점 중 하나는 그의 끝을 모르는 체력이었다. 그는 만 35세였던 97-98시즌까지 평균 38.8분, 만 40세를 넘긴 마지막 시즌엔 '''전경기 출장에 평균 37분'''을 기록했는데, 이 정도 출장 시간은 젊은 선수들 사이에서도 드물다.
단순히 오래 뛰는 것 외에도 그는 체력 소모 자체가 엄청나게 많은 선수들 중 하나였는데, 공격에서 그는 골밑 돌파를 적극적으로 시도해 자유투를 많이 얻어내는 선수였으며 볼이 없을 때 스크린을 타고 돌아나오는 움직임도 많았다. 또한 수비에서는 자기 마크맨을 집요하게 괴롭힐 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도움수비를 통해 상대팀을 견제했는데, 당연히 이런 식의 수비는 체력 소모가 장난이 아니다. 실제로 공격 부담이 큰 선수가 이렇게 수비까지 큰 부담을 안는 경우는 거의 없는 이유가 체력 소모 때문이다. 이 때문에 공수 겸비인 코비 브라이언트도 나이가 들며 수비력이 크게 줄었고, 르브론 제임스의 경우에도 만 30세이던 2014년 이후 수비팀 선정 이력이 없다. 그럼에도 조던은 만 35세이던 98시즌까지 리그 최고의 수비수 중 하나였다.[51]
그가 유독 플레이오프와 큰 경기에 강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이와 관련이 있는데, 플레이오프 후반쯤 되면 왠만한 말체력이라도 지치기 마련이다. 그러나 조던은 이런 체력이 있으니 파이널 최후반까지 좋은 활약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체력적 한계에 부딫혔던 98년 파이널 같은 경우에도 슈팅 부진에 시달리면서도 결국 결정적인 스틸에 이은 결승점을 넣었으니 체력뿐 아니라 정신력과 집중력도 역대 최고였다고 볼 수 있다.
체력과 동일선상에 있는 얘기로 나이를 들면서 기량을 보존하는 것도 다른 슈퍼 스타들보다 월등했다. 80년대 데뷔한 선수들 중에는 로버트 패리쉬, 카림 압둘자바, 존 스탁턴 & 칼 말론 등 괴물들도 있지만 보통 현대처럼 관리를 받지 않고 부상을 안고 뛰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래리 버드와 케빈 멕헤일 모두 부상을 안고 뛰다가 선수 생명이 짧아졌다) 현대처럼 커리어가 길지 않았다. 조던보다 두 살 많은 아이재아 토마스나 버드는 13년, 멕헤일은 14년 뛰었고, 그 외에도 15년 이하로 뛰는 선수들이 흔했다. 그러나 조던은 35세까지 리그 최고의 선수로 군림했으며, 40에 가까운 나이에 복귀했을 때도 놀라운 모습을 보였다.[52], 코비 브라이언트 역시 만 34세 기준으로 퍼스트팀 선정이 끊기고 큰 부상을 당해 완연한 하락세였다는 걸 생각하면 35세에 MVP/득점왕/수비퍼스트팀/파이널 MVP를 싹쓸이한 조던의 위엄은 놀라운 수준이다.
부상을 잘 안 당한 것도 있지만, 부상을 당하고 참는 능력도 대단했다. 워싱턴 위저즈 시절 복귀 후 첫 시즌에 그는 시즌 후반, 새크라멘토 킹스 전에서 동료와 부딪혀 반월상연골 파열이란 부상을 당했음에도 해당 경기에서 41분을 뛰고, 부상이 더 심해져 수술을 해야할 때까지 무릎 통증을 참고 7경기 동안 35.9분이나 뛰었다. 심지어 수술 이후에도 시즌 아웃되기 전까지 벤치에서 7경기를 더 뛰었다.[53] 즉, 조던은 다른 80년대의 레전드들, 버드나 아이재아 토마스 등과 마찬가지로 '''뛸 수 없을 때까지''' 뛰는 선수로, 그의 놀라운 출장 경기 수는 여기서 오는 것이다. 뒤집어 보면 몸을 사리지 않는(심지어 은퇴할 때까지 수비도 공격만큼이나 빡세게 했다) 플레이 스타일임에도 저 늦은 나이까지 기량을 유지했다는 것이 더 놀라운 것.
조던이 은퇴한지 어느덧 20년을 향해가는 중이지만 조던의 플레이들은 영상과 움짤로 꾸준하게 현시대의 NBA팬들에게도 감탄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 조던을 깎아내리면서 자신이 응원하는 선수를 찬양하려는 일부 팬덤들[54]조차도 입을 다물게 할 정도. 본격적으로 NBA와 미디어가 상호작용을 보이기 시작한 90년대를 지배했던 선수이니만큼 영상자료가 많이 남아있어 과대평가 논란조차도 없는 선수다.[55]
종합적으로, 역동적이면서도 정형적인 완벽한 스킬과 최고의 운동 능력, 그것을 가능케 하는 강철같은 신체와 체력, 거기에 불타는 승부욕과 강심장,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멘탈을 모두 갖춘 최고의 선수라고 할 수 있다.

7.1. 역사상 가장 강력한 공격 무기


조던의 공격 스타일을 종합하자면 다음과 같다: 골밑 ~ 20피트까지[56]범위에선 역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지닌 득점원.
일단 '''농구 역사상 최고의 미드레인지 슈터'''라고 할 수 있다. 현재 NBA에서 최고의 미드레인지 슈터로 평가받는 레너드, 듀란트는 각각 플레이오프 미드레인지 최다 성공 갯수 시즌 기준으로 카와이 59/118(49.2%), 듀란트 88/162(54.3%)를 기록했다. 1992 조던의 플옵 미드레인지 기록은 무려 '''142/292(48.6%)'''이며 경기당으로 따져도 카와이 경기당 2.4개, 듀란트 경기당 4.2개, 조던 '''경기당 6.5개'''이다. 즉, 현재 nba 플레이오프에서 가장 중요한 공격 옵션으로 평가받는 미드레인지 게임에서 현역 최고인 듀란트, 카와이의 플레이오프 커리어하이 시즌을 한참 뛰어넘은 채로 몇년을 보낸게 바로 조던이다.[57]
그는 페이스업/포스트업 모두 능했으며 그 상태에서 언제든지 점퍼를 쏘거나 바로 돌파로 전환하는 능력도 대단했다. 실제로 그는 슛거리가 현대 슈팅가드들에 비하면 비교적 짧지만 중거리슛에 있어선 역대 최고 수준의 정확도를 자랑하며, 페이더웨이나 고속이동 중 풀업 점퍼의 정확도 역시 비할데 없이 안정적이고 정확하다.
단순히 중거리만 뛰어났던게 아니라 '''돌파도 최강이었다.'''. 조던의 전성기 당시에는 핸드체킹룰 개정 전이라 더 피지컬하고 수비범위가 좁은 시절이라 돌파의 난이도가 현재보다 훨씬 어려운 시절이라 돌파 빈도수는 현재 선수들보다 적지만 역대 최고수준의 돌파력을 지닌 선수였다. 그는 스피드, 파워, 높이를 겸비한 선수로, 역대 최고라 불리는 빠른 퍼스트스텝을 바탕으로 돌파해들어갔으며 엄청나게 강력한 발목 덕분에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곧바로 정지, 스핀 후 페이더웨이를 던지거나 바로 풀업을 던지는 등 고난도 플레이에도 능했다.[58] 일단 골밑에 도달하면 마무리 능력은 가드로서 마찬가지로 역대 최고 수준으로 양손 레이업 모두 정확할 뿐 아니라 덩크로 강한 마무리를 하거나 훅슛까지 능했다.[59]
발목 얘기를 좀 더 하면, 조던이 자주 하는 플레이 중 돌파해 들어가다가 축발을 중심으로 강하게 스탭을 밟으며 경쾌하게 반대쪽으로 스핀, 이후 거리에 따라 레이업/덩크를 하거나 페이더웨이를 쏘는 플레이가 있다. 사실 돌파에 이은 스핀무브는 기본기로, 이 플레이 자체를 못하는 NBA선수는 거의 없다. 그러나 조던의 차이점은 저 스탭을 정말 큼직하게 밟아서 한번 밟는 것만으로 수비수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60] 그러면 다른 선수들은 왜 이렇게 못하느냐면, 저렇게 크게 스탭을 밟는 것 자체가 발목에 부담이 크며, 조던처럼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즉시 멈추며 반대방향으로 스탭을 밟는 것은 그 부하가 그냥 스핀할 때와 비교불가로 크다. 이런 플레이가 가능하면서 조던처럼 많이 뛰는 것은 발목이 정말 엄청나게 튼튼하다는 것이다.[61] 조던이 농구화를 매경기 갈아신으니 망정이지[62] 만약 다른 선수들처럼 여러 경기 신었다면 마누 지노빌리처럼 농구화가 경기 중 아작이 났을지도 모른다.
물론 골밑을 따지면 샤킬 오닐이나 찰스 바클리가 비교 불가로 앞서며, 가드 중에서도 포스트업과 훅슛이 더 위력적인 매직도 골밑 공격 한해선 앞선다. 물론 외곽에선 레지 밀러가 앞선다. 조던의 무서운 점은 극강의 중거리 슛 능력을 지녔으면서도 스텝 두 번만 밟으면 바로 골밑까지 가는 사기급 능력을 지녔으며, 골밑에서 볼을 잡으면 바로 피니쉬할 수 있는 골밑 공격력까지 지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종합적인 공격력 때문에 그가 역대 최강 득점원으로 군림하는 것.
물론 종합적으로 따져야만 최강인 것은 아니다. 돌파 같은 경우 르브론 제임스 같은 선수들과 더불어 역대 최강 레벨이며, 드리블 중에 갑자기 속도를 높여 돌파해 들어가는 경우 르브론과도 비교를 불허한다. 중거리슛의 성공률은 당대 최강이며, 풀업 점퍼의 완성도와 안정도는 단연 최강, 특히 점프해 공중에서 수비를 따돌리고 쏘는 더블클러치 점퍼의 경우 비슷하게라도 따라하는 선수가 코비 브라이언트 정도밖에 없다.(완성도가 비슷하다는 건 당연히 아니다) 애초에 조던이 잘 쓰던 더블클러치 점프슛은 2k 같은 게임에서 해보면 거의 100% 빗나갈 정도로 '''농구의 상식을 벗어난 플레이다'''. 골밑에서 더블클러치는 자주 있지만 이걸 15~20피트나 그 이상 거리에서 하는 건 제임스 하든처럼 자유투 얻어내려고 연기하는거나 급박한 상황에서 쏘는 게 대부분이지, 조던처럼 진짜 노리고 주무기로 쏘는 사람은 없다.
위에서 예를 든 바클리의 경우 빅맨치고 뛰어난 슈팅력을 지녔지만 20피트 거리에서 페이크를 하면 수비가 잘 반응하지 않는다. 바클리는 골밑에선 야수이기 때문에 차라리 중거리슛을 허용할 수 있으면 훨씬 득되는 장사기 때문. 그러나 조던의 경우 그 거리에서 중거리슛을 확률 높게 넣을 수 있기 때문에 돌파가 더 무섭다는 걸 알면서도 무의식 중에라도 반응하게 된다. 밀러의 경우 반대로 돌파가 그리 무섭지 않기 때문에 외곽을 주로 견제하면 된다. 조던의 페이크가 무서운 게 이 때문. 조던은 3점 라인 안 쪽에서는 돌파도 슛도 무섭기 때문에 양자택일해서 막을 수가 없다. 심지어 시애틀과의 파이널에서 보듯이 3점 라인 밖에서도 안 막을 수가 없다. 그 거리에서도 순식간에 스텝 한번 밟고 20피트 거리로 들어와 풀업 점퍼를 날리거나, 거리를 두면 아예 가속을 붙어 골밑까지 찢고 들어오기 때문.[63] 조던의 페이크가 그렇게 잘 먹히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조던은 골밑에서 3점 라인 부근 어디에서건 공을 잡으면 왼쪽/오른쪽 돌파, 패스, 슛, 포스트업 페이더웨이 (왼쪽/오른쪽)까지 옵션이 무궁무진하다. 물론 이는 스타급 스윙맨들이라면 기본으로 그렇지만 조던의 차이점은 '''저 옵션 전부가 성공률이 높다'''는 것이다. 결국 수비는 조던을 봉쇄하는 게 아니라 덜 털리는 방향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 조던이 유독 클러치 상황에서 강했던 것도 스윙맨이 공 잡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높은 성공률로''' 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경기 막판 클러치 상황에서는 볼 소유를 허무하게 넘겨주는 실책을 방지하기 위해 예나 지금이나 팀 내 에이스 스윙맨에게 볼을 넘겨주고[64] 그 선수가 알아서 처리하는 아이솔레이션을 주로 하는데[65] 조던은 일단 볼 잡고 있는 상태에서는 볼 핸들링이 좋아서 잘 뺏기지도 않고, 점퍼든 돌파든 다 확률높게 성공시키는데다가 심지어 더블팀 붙어도 오픈 찬스 난 동료에게 볼을 빼주는 시야까지 갖추고 있다.
시기에 따라 비중의 차이는 있지만 미친듯한 돌파와 비교적 거리가 짧은 중거리 점퍼를 주무기로 했던 80년대에는 조던의 야투 성공률이 대단히 높았는데, 평균 32점을 53.9%의 확률로 넣고, 그 전 시즌에는 평균 35점을 53.5%의 확률로 넣은 적도 있다. 물론 르브론 제임스의 경우 55.1%의 야투율을 기록한 적도 있지만, 보통 야투율은 슛을 많이 던질수록, 그리고 팀원들이 약할수록(수비가 자신에게 집중되기 때문에) 떨어진다는 걸 생각하면 원맨팀에서 저 스탯을 찍은 조던이 얼마나 사기적인지 알 수 있다.[66] 르브론의 경우 저 미친 야투율을 찍을 때 평균득점이 27점이었으며 클리블랜드 원맨팀 시절에 생애 유일한 득점왕(평균 30점)을 찍었을 때 야투율은 48.1%였다. 심지어 조던은 악질 수비로 유명한 "배드보이즈" 피스톤즈를 상대로 야투율 77%로 59점을 넣은 적도 있다![67]
2년차 시즌에 큰 부상을 당한 이후 복귀하고 블랙캣 시절 리그 최강의 슬래셔로서 NBA를 씹어먹은 후, 필 잭슨의 트라이앵글 오펜스에서 플레이할 때에는 신체 능력에 상당히 의존하는 플레이의 약점을 보완하고 체력을 관리하기 위해 포스트업을 기반으로 해 페이드어웨이를 주 무기로 활용하였다. 트라이앵글 오펜스의 원래 이름이 트리플 포스트 플레이일 정도로 포스트 플레이가 핵심인 작전이었다. 때문에 포스트 업으로 공간을 잡아먹어줄 수 있는 수준급 빅맨이 반드시 필요했는데,[68] 불스는 수준급 빅맨이 없는 대신, 조던의 포스트업이 탑 레벨의 센터급으로 뛰어난 덕에 효과적인 전술 수행을 해낼 수 있었다. 조던은 슈팅 가드로서도 장신인 198cm의 키에 웨이트로 다져진 엄청난 근육 덕분에 웬만한 포워드 수준의 피지컬을 지녔고, 그 덕에 어마어마한 근력으로 포스트 플레이를 펼치며 트라이앵글 오펜스를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상대방 가드와 포워드, 심지어 센터까지도 농락하는 플레이를 펼칠 수 있었다.[69]
거기다 2차 3연패 시절의 완성도는 이전보다 더욱 상승해 더블팀을 붙이지 않으면 그냥 점수를 자동 헌납하는 수준까지 이르었다. 특히 뒤로 돌아 포스트업을 하면서 상대 수비를 밀어내며 갑자기 턴어라운드 페이드어웨이를 구사하는데, 본디 페이드어웨이 자체가 적중률이 떨어지고 거기다 수비가 붙으면 한없이 낮아진다. 게다가 림 위치조차 제대로 파악이 안된 턴어라운드 슛이라면 가장 적중률이 낮을 수밖에 없는데, 조던은 이런 슛 적중률이 뛰어났다! 우리나라 농구 팬들은 이 말도 안되는 슛을 '''사기더웨이''' 라 부른다. 이 사기더웨이는 카림 압둘자바가 구사하는 스카이 훅과 더불어 막을 수 없는 두가지 슛이라 불리우고, 조던 키드들은 휴식시간이나 체육시간에 이 사기더웨이를 열심히 흉내냈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거라면 사기더웨이가 아니다. 조던은 왠만한 선수들이면 터프샷일 정도로 뒤로 뛰면서 압도적인 안정감까지 갖췄다. 일단 페이더웨이를 구사하는 선수들은 상당히 많지만 대부분 포스트업 상태에서 돌아서 페이더웨이를 던질 때 선호하는 방향이 있다. 케빈 가넷의 경우 왼쪽으로 돌았을 때도 성공률이 높지만, 습관인지 거의 오른쪽으로 도는 경우가 대부분이다(사실 오른손잡이의 경우 슛할 때 자연스럽게 오른발이 앞으로 가기 때문에 오른쪽으로 도는 게 자연스럽다. 왼쪽으로 돌면 공중에서 자세를 한번 더 잡거나 몸이 약간 비틀린 상태에서 쏴야 한다). 그런데 조던은 어느 쪽으로 돌든지 폼도 거의 똑같고 성공률도 동일했다. 이것이 왜 큰 장점이 되냐면 골대를 등진 기준으로 볼 때 왼쪽 베이스라인 쪽에서 포스트업을 했을 때 무조건 오른쪽으로만 돌 경우 코트 중앙 쪽에 밀집된 상대 수비에 부딫힐 확률이 높다. 그런데 왼쪽으로 돌아서 안정적으로 쏠 수 있다면 더블팀하러 들어오는 상대 수비수를 바보로 만들고 여유있게 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말이 쉽지 페이더웨이 자체가 터프샷에 해당하는지라 주무기로 쓸만한게 아니다. 그런데 조던은 이걸 주무기로 쓰면서도 성공률이 높으니 말도 안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상대가 외곽만을 경계하는 순간엔 자비없이 인사이드로 파고들어 여지없이 더블 클러치나 덩크를 꽂아대서 나이를 의심케 만들었다.
페이스가 떨어진 90년대에서 하프코트에서 위력도 무서웠지만 80년대 조던의 장점 중 하나는 오픈코트에서 무시무시한 위력이었다.[70] 당시 시카고에서 자주 하던 플레이 중 하나가 빅맨들이 리바운드를 하고 바로 장거리 아웃렛 패스를 던져주는 것인데, 이걸 바로 조던이 받아 마무리하는 것. 포인트가드급 스피드에 스몰포워드급 키와 파워를 지닌 조던이 달리기 시작하면 제대로 따라붙을 수 있는 선수들이 거의 없었는데, 그는 발빠른 가드들이 막기는 너무 크고 강했으며 그와 비슷하거나 더 큰 키의 선수들은 그냥 달려서 간단히 제쳐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영상을 보면 그가 오픈코트에서 얼마나 무서운 선수였는지 알 수 있다. 여담으로 위에 언급된 "리바운드 후 장거리 아웃렛 패스"를 가장 잘해주는 선수가 바로 찰스 오클리였는데, 조던 본인과의 친분도 있지만 코트 위에서 누구보다도 호흡이 잘 맞는 동료였기에 그가 트래이드되고 그토록 열받아한 것. 그의 대가로 받아온 빌 카트라이트는 당시 계속된 부상으로 이미 전성기 기량을 많이 잃어버리고 패트릭 유잉의 백업으로 전락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물론 카트라이트는 수비에서 앵커 역할을 훌륭히 해 3연패의 주역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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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는 해야 올타임 No. 1[71]
말년의 워싱턴 시절에 이르러서는 몸을 한층 더 불려 3번 포지션에서도 뛰었다. 스피드와 탄력과 효율은 사라졌지만, 특유의 강골에서 나오는 강력한 파워와 슛터치를 이용한 포스트업-페이더웨이로 마지막 시즌까지 평균 20득점을 기록했다.
본래 신체가 NBA 선수 중에서도 특출난 강골이다. 부상을 입어도 참아내는 인내력 또한 있었지만 아무리 인내한다 해도 매 시즌 82경기를 풀로 소화하는 건 그냥 타고나야 한다. 그의 입지에 도전하는 이들이 기술적인 측면보다 더 좌절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이런 괴물같은 체력.[72] 물론 2년차때 부상을 당한 이후로 지독한 웨이트를 통해 근육을 단련한 덕도 있다. 신인시절에는 호리호리한 느낌의 선수가 점차 전신의 근육이 압도적인 수준이 된다. 하지만 웨이트 빡세게 하기만 해서 될 것만 같으면 아무나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을 것. 게다가 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근육량을 급격히 늘릴 경우 프로선수들은 부상 위험이 증가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런데도 40살까지 거의 풀 시즌을 매번 소화했으니 진정 괴물.
거기에 점프력이 압도적이고 순발력도 타의 추종을 불허해서 실제로 경기를 보고 있으면 '농구 참 쉽게 하는구나' 싶다. 실제로 그가 슛을 쏘는데 다른 선수들이 점프조차 못 하고 바라보거나[73] 포스트업에 퉁퉁 밀려나가는 꼴을 보면 담합인가 싶지만 진실은 그저 사기유닛.
당시 조던은 단순히 리그 최고의 득점원이 아니라 리그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압도적인 득점원이었다. 1980년대 당시 페이스가 빨라 평균득점이 높았기에 90년대, 00년대에 비해 득점하기 쉬웠다고 착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당시엔 페이스도 빨랐지만 어마어마하게 거칠고 공격수를 보호하는 규칙이 없어서 (플래그런트 파울이 일반파울과 페널티가 별 차이가 없었던 시절이다) 공격을 시도하는 것만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구타와 체력소모에 시달려야 했다. 이 때문에 개인득점을 보면 전체적으론 (페이스가 매우 느렸던 90년대를 제외하면) 00년대와 별 차이가 없으며 2010년대 중후반 이후와 비하면 오히려 개인스탯들은 그때가 더 적다.[74] 그런데 조던은 이 와중에 군계일학 수준으로 높은 스탯을 기록했다.
조던이 첫 득점왕을 차지한 86-87시즌 당시 그는 37.1점을 기록했는데, 2위 도미니크 윌킨스가 29점, 3위 알렉스 잉글리쉬가 28.6점이었다. 실제로 윌킨스는 전 시즌에 평균 30점으로 득점왕을 차지했다. 즉, 28~30점 정도면 득점왕이 가능한 시절이었던 것이다. '''조던만 아니었다면.''' 조던과 2위 그룹과 차이는 8점이 넘었다.
그 다음 시즌 조던은 35점, 윌킨스는 30.7점으로 4.3점 차이가, 88-89시즌엔 또 조던이 리그 내에서 유일한 30+득점자가 되며 32.5점, 2위 29.1점을 넣은 칼 말론과는 3.4점 차이가 났다. 89-90시즌에 말론은 스텝업해서 31점을 기록하지만, 조던도 스텝업해서(...) 33.6점, 1991시즌엔 동료들에게 더 많은 득점기회를 주느라 31.5점에 그치지만(...) 말론은 29점이라 또 리그 내 유일한 30+득점자, 1991-92시즌엔 팀이 67승이나 올리고 스카티 피펜이 올NBA세컨팀에 오르는 등 성장하면서 30.1점까지 떨어지지만 2위 말론은 28점이었다. 92-93시즌은 만 33세였던 윌킨스가 분전하며 88시즌 이후 최고 성적인 29.9점을 올리지만 그를 가로막고 있는건 32.6점의 조던이었다.
전체적으로 득점왕 7연패 기간동안 그는 득점 2위와 최소 2.1점차, 최고 8.1점차, 평균 3.65점차에 달하는 압도적인 격차로 매번 여유있게 득점왕 자리에 올랐다. 그가 평균 30점을 우습게 넘겨서 "80년대엔 페이스가 빨라 고득점을 올리기가 쉬웠다"고 착각, 내지는 폄훼하는 이들도 많지만, 조던이란 존재가 없었다면 이 7년동안 2번만 빼고 5번이나 20점대 득점왕이 나왔을 것이다. 그만큼 94년 핸드체킹 1차 개정 이전까지 고득점을 올리는 건 고된 일이었다. 이를 감안하면 당시 조던의 득점에 대해 페이스 조정한답시고 20점대 후반이라고 주장하는 건 말도 안되는 것. 80년대 선수들은 현재처럼 소프트한 수비에서 뛴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풀시즌 기준으로 최근 10시즌, 2008-09시즌부터 2017-18시즌까지 득점왕들이 2위와 얼마만큼 격차가 있었는지 살펴보자. 09시즌엔 드웨인 웨이드가 30.2점으로 1.8점차, 10시즌은 케빈 듀란트가 30.1점으로 0.4점차, 11시즌 듀란트 27.7점으로 1점차, 12시즌은 듀란트가 28점으로 '''0.1점차''', 13시즌은 카멜로 앤서니 28.7점으로 0.6점차, 14시즌 듀란트는 32점으로 '''4.6점차''', 15시즌 러셀 웨스트브룩은 28.1점으로 0.7점차, 16시즌 커리는 30.1점으로 1.1점차, 17시즌 웨스트브룩 31.6점으로 2.5점차, 18시즌 하든이 30.4점으로 2.3점차이다.
평균적으로 2위와의 점수차는 1.5점차이며, 저 열명 중 조던이 7연패 기간동안 가장 '''덜''' 압도적이었던 2.1점차를 능가하는 점수차를 낸 선수는 듀란트 (14시즌. 4.6점), 웨스트브룩 (17시즌, 2.5점), 하든(18시즌, 2.3점) 뿐이다. 저 중 조던만큼 압도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 선수는 듀란트 뿐이고, 그나마 듀란트는 나머지 시즌 점수차가 0.1점, 0.4점, 1점에 그친다.
즉, 현재 뛰고 있는 득점기계 중 누구도 최전성기 조던만큼 압도적인 득점력을, 그것도 꾸준히 보여준 선수는 없다. 심지어 조던은 전성기가 완연히 지난 2차3연패 시기 때도 2위와 점수차가 3.5점, 2.2점, 0.4점이었는데, 1997-98시즌의 기록은 농구선수로서 할아버지인 만 35세에 기록한 것.
다만 2018-19시즌에 오랜만에 조던만큼 압도적인 득점원이 나왔는데 바로 제임스 하든, 크리스 폴의 부상과 부진으로 공격을 도맡아하면서 결국 36.1점으로 2위인 폴 조지를 무려 8.1점차로 앞서는 득점왕이 되었다. 이 점수차는 위에 언급한 87시즌의 조던과 윌킨스와 같은데, 뒤집어 말하면 하루가 멀다하고 괴랄한 기록을 내던 하든처럼 압도적인 득점원이 바로 당시의 조던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제 득점왕 2회를 차지한 하든과 달리 조던은 득점왕 10회를 차지할 정도로 오랫동안 뛰어난 득점력을 유지했다. 게다가 하든은 플레이오프에서 출장시간이 늘어났음에도 정규시즌 기록보다 현저히 못 미치는 31.6점 (야투율 41.4%)을 기록했다. 조던은 매번 정규시즌보다 수비가 빡세지는 플레이오프에서 오히려 기록이 올라갔다는 걸 생각하면 그 괴물같은 득점력을 보여주던 하든도 아직 갈길이 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당시 조던보다 더 압도적인 득점레이스를 보여준 유일한 선수는 윌트 체임벌린이 있다. 윌트는 데뷔하자마자 37.6점으로 2위와 차이가 5.4점, 그 다음 시즌부터 3.6점, '''18.8점''', 10.8점, 5.5점, 3.7점, 2.2점을 기록했다. 실제로 득점퍼포먼스만 따지고보면 이 시절 윌트의 그것은 조던조차 아득히 능가한다.
그렇다고 그가 공을 독점하는 '볼호그'도 아니었다.[75] 기본적으로 오프 더 볼 무브로 상대 수비를 제치는 능력 또한 최강이라 선수들이 그의 기민한 움직임에 속아 애초에 매치업 자체를 이루지 못한 상태로 수비를 강요당하는 상황을 왕창 발생시켜서 상대팀 수비를 초토화시키곤 했다. 시카고 시절 경기를 보면 분명 공도 안 가진 조던의 컷인에 상대팀이 우왕좌왕 거리다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조던은 유유히 점프슛을 던지는 상황이 끝도 없이 연출되었다. 결국 팀 전원이 조던 한명 때문에 혼돈의 카오스를 연출해야 했다. 이 때문에 실제로 초기 조던과 혈전을 벌였던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는 아예 조던을 막기 위한 수비인 조던 룰을 고안해냈는데, 지역수비는 비교도 안되게 악랄한 수비전략이었다.
사실 단순한 지역수비보다 훨씬 악랄하고 빡센 전략이었다. 현재 NBA는 지역수비를 허용하지만 94년, 2005년 2차에 거친 핸드체킹룰 개정으로 공격수를 극도로 보호하는 성향을 갖고 있다. 개정 이전에는 수비수가 손으로 밀고당기며 공격수를 견제하는 "핸드체킹"이 가능했다. 그러나 핸드체킹룰 개정을 통해 공격수의 진행방향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주면 바로 파울을 불도록 되었다. 물론 골밑에서는 이렇게 일일히 불면 진행이 불가능하나 문제는 외곽이었다. 이 때문에 2차 개정이 있었던 직후인 05-06시즌엔 스윙맨들의 개인평균득점 인플레가 일어나 코비 브라이언트가 35점, 전성기가 지난(31세) 아이버슨이 갑자기 커리어하이인 33점을 찍고, 이때 3년차에 불과했던 르브론 제임스도 31점을 찍고선 (이후에 득점왕에 오를때도 이 정도 득점은 불가능했다) 그 다음 시즌에 어떤 부상이나 외부 요소도 없이 평득이 급감했다. 어쨌건 현재 수비는 지역수비+공격자 보호 성향이 강한데, 80년대 당시엔 수비가 정말 거칠게 공격수를 몰아세우는게 가능했고 이 때문에 전반적인 스틸 수치가 더 높았다. 그런데 피스톤즈는 룰의 허점을 최대한 이용해 돌파를 견제하는 수비를 하면서도 그를 육체적으로 거의 구타하다시피했기 때문에 조던이 받는 압박은 역사상 그 어떤 스윙맨에 비할바가 아니었다. 후술되듯이 이런 수비 때문에 90시즌 플레이오프에서 조던은 1,2라운드에 평균 40점 야투성공률 54.4%를 기록하다가 피스톤즈를 상대하자 평균 32점 46.7%로 기록이 급감한다. 여담이지만 이 때문에 맨투맨 수비 시기였음에도 당시 조던을 그나마 잘 막는 팀은 개인수비가 아닌, 팀수비로 막는 팀이었다. 실제로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도 리그 최고의 슈팅 가드 수비수인 조 듀마스가 있었지만, 강력한 팀 수비 때문에 그나마 막을 수 있었던 것. 그 외에 뉴욕닉스, 96년에 파이널에 붙었던 시애틀 슈퍼소닉스가 잘 막은 편이었다. 물론 여기서 잘 막았다는 기준은 평균 30점대 초반이다(...) 또한 시애틀이 막았을때 조던은 33세로 전성기가 지났었고 약간의 등부상을 안고 있었다. 그리고 피스톤즈는 팀이 불스보다 더 강해서 이긴 거지 위의 기록을 보듯이 조던 개인을 막는데 성공한 건 아니었다. 까놓고 말해 전성기의 조던을 봉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물론 슛감이 안 좋은 날은 어떤 선수라도 부진할 수 밖에 없다. 여기선 '''수비로 조던을 봉쇄하는 것'''을 지칭하는 것) 그나마 조던이 막히기 시작한건 2차 3연패 때 나이를 들고 스타일이 점프슛 위주로 변하고 기량이 하락하기 시작한 이후였다.

7.1.1. 조던의 3점슛 능력


조던의 통산 3점슛 성공률은 통산 32.7%, 3점 라인이 단축되었던 시즌을 제외하면 워싱턴 시절까지 1,189개를 던져 343개 성공, 28.8%에 그쳤다. 이 때문에 수치상으로 보면 "3점슛 능력이 부족한 편이었다"고 정리하기 쉽다. 그러나 이렇게 단순히 치우기는 좀 곤란하다. 왜냐면 첫째, 조던은 커리어동안 슈팅력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던 선수이기 때문이고, 둘째, 조던은 3점슛을 통계적으로 의미를 가질 정도로 쏜 적 자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필 잭슨 감독을 포함해 대다수의 조던 주변인들은 조던이 NBA 데뷔 후 훈련을 통해 슈팅력을 키워갔다고 증언한다. 이 부분은 사실 수치만 보면 언뜻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다. 조던은 루키 시즌보다 필드골 성공률이 51.5%에 달했으며, 80년대 후반에는 53%를 상회하는 엄청난 야투율을 기록하다가 오히려 2차 3연패 시기에 야투율이 세 시즌 통합 48.2%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수치가 아닌 경기를 직접 봐야 알 수 있는 부분으로, 초창기의 조던은 돌파의 비중이 높았다. 물론 80년대에는 수비범위가 좁아 골밑~중거리까지 수비가 대부분 집중되어 있어 림까지 돌파하는 것보다도 돌파하다 멈춰서 단거리~중거리 슛을 쏘는 공격루트가 더 많았다. 조던이 2년차 때 NBA 플레이오프 신기록인 63점을 기록한 경기의 영상을 보면 (https://www.youtube.com/watch?v=QcU5Q_f4mYU) 골밑까지 돌파해 덩크나 레이업으로 마무리하는 것보다 풀업점퍼나 러닝점프슛이 훨씬 많다. 실제로 이 경기에서 넣은 22개 필드골 중에서 덩크는 단 한개에 불과했다.
당시 조던은 슛거리가 그리 긴 선수가 아니었다. 조던의 점퍼는 풀점프를 한 뒤 공중에서 손목힘으로 쏘는 슛과 정석대로 하체의 힘까지 이용한 점프슛으로 나뉘는데, 전자의 경우 더블클러치 점프슛이 가능할 정도로 체공시간이 길어 수비를 떼어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손목힘에 의존하기 때문에 포물선이 낮아 '''슛거리가 짧다는''' 단점이 있고, 후자는 전자처럼 자유자재로 쏘면서 수비까지 떼어낼 수는 없지만 안정적이고 '''슛거리가 길다'''는 장점이 있다.[76] 조던의 커리어 초창기에는 엄청난 움직임으로 수비를 떼어내면서 일단 뜨고보는 슛의 비중이 높았고, 그 누구보다 빠른 움직임을 이용해 비교적 짧은 거리에서 점프슛을 쐈기 때문에 그 집중수비를 받으면서도 성공률이 저렇게 높았던 것이다.
반면 정석적인 점프슛도 분명히 쏘긴 했으나, 그 빈도수가 비교적 적었고 그렇게 안정적인 것도 아니었다. 비유하자면 훗날 그의 동료가 된 론 하퍼와 비슷했고, 많은 80년대 윙플레이어들이 이런 식으로 득점했다.
그러나 조던은 꾸준히 점프슛 능력을 키우기 시작하고, 8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안정적인 중장거리 점퍼능력을 갖추게 된다. 그가 젊은 시절에 비해 운동능력이 떨어졌음에도 리그 최강의 선수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점퍼 능력 덕분이다. 이 덕분에 운동능력이 더욱 떨어진 워싱턴 위저즈 시절에 39세의 나이에도 (무릎부상을 당하기 전까지) 46경기동안 '''평균 25점'''을 기록하는 정상급 스코어러였던 것이다.[77]
어쨌거나 포인트는 조던은 데뷔 초창기와 중반 이후 중장거리 슈팅력이 차원이 다르게 성장한 선수였다.
그러나 이런 슈팅력이 수치상으로 크게 부각되지는 않는다. 조던은 공격의 시발점 역할을 하는 선수였고, 3점 라인 밖에서 볼을 받아 슛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또한 트라이앵글 오펜스 특성상 삼각형의 꼭지점 역할을 하는 조던은 3점 라인에서 쏠 기회 또한 거의 없었다. 즉, 당시 불스는 '''조던에게 3점을 쏘게 하는 전술이 거의 없었다'''. 조던이 3점 슛을 쏘는 경우는 공격시간이 거의 다 떨어질 때 쏘거나, 혹은 골밑의 다른 동료에게 수비가 몰려서 그 공을 킥아웃해줬을 때 그 공을 받아 3점을 쏘곤 했다. 여기서 문제점이 나오는데 당시 불스의 팀구성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조던의 동료 중 '''수비가 몰릴 만한 선수가 없다'''. 위저즈 시절에도 마찬가지인데, 당시 젊고 미숙한 선수들이 대부분이라 조던을 살려줄 만한 공격력이나 패스력을 지닌 선수가 없었다. 그나마 수비를 끌어올 수 있던 제리 스택하우스는 볼호그였다.
또한 조던 본인의 선호도도 있었다. 조던은 확률 높은 공격을 선호했고, 굳이 수비가 붙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3점슛을 쏘는 것보다는, 돌파 후 풀업을 선호했다. 다른 선수들이라면 돌파 후 풀업이나 페이더웨이슛도 3점만큼이나 확률이 낮기에 그냥 3점을 던질 법도 했지만, 조던은 저런 터프슛들을 안정적으로 쏘는 선수였다.
이 때문에 조던의 커리어를 통틀어 3점슛을 꾸준히 하나의 옵션으로 활용한 시즌은 말 그대로 손에 꼽을 정도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꾸준히 3점을 옵션 중 하나로 활용한," 즉, 3점슛 확률이 "통계적으로 의미가 있다"라고 볼 만한 기준이 어느 정도인지 따져보자.
래리 버드의 경우 79년에 데뷔한 선수이지만 뛰어난 외곽슛 능력을 지녔다. 그러나 그는 통산 3점슛 성공률이 42.7%에서 '''21.2%'''를 오갈 정도로 들쭉날쭉했다. 특히 루키시즌부터 6년차 시즌까지는 위에 언급된 커리어 하이와 커리어 로우를 모두 기록했다. 루키 시즌에 40.6%를 기록한 직후 2년차 때 27%, 3년차 때 21.2%로 떨어질 정도로 들쭉날쭉했다. 그렇다면 버드의 경기력이 그만큼 기복이 심했던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버드는 루키시즌에 MVP 투표 4위, 2년차때부터 3년 연속 2위를 하고 81년에는 간발의 차이로 MVP를 놓쳤다. 이 기간동안 전부 퍼스트팀에 선정된 건 덤. 특히 2,3년차 때는 저 처참한 3점슛 성공률을 기록하면서 자유투는 86.3%란 높은 성공률을 기록했다. 즉, 당시에 버드는 슛을 잘 쏘는 선수였으나, 어찌된 일인지 저런 말도 안되는 성공률을 기록한 것이다.
조던과 달리 버드는 24세에 데뷔했고, 데뷔할 때부터 완성된 슛폼과 슈팅력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루키 시즌 버드의 경기를 보면 슈팅메커니즘 자체는 큰 변화가 없다.
그 이유는 3점슛 시도 갯수에서 찾아볼 수 있다. 2년차때부터 5년차이던 83-84시즌까지 버드는 경기당 평균 0.9개의 3점슛을 '''시도''', 0.2개를 성공시키며 25.7%를 기록했다. 당시 셀틱스는 불스의 조던과 마찬가지로, 버드가 3점슛을 쏘게 하는 전술이 거의 없었다. 물론 이건 셀틱스가 바보라서가 아니라 당시는 리그 전체가 갓 도입된 3점슛을 활용하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저 정도로 적은 시도수로는 정확하게 선수의 슈팅력을 반영할 수 없다, 즉 통계적으로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시도/성공갯수가 통계적으로 의미를 갖는 것일까? 버드의 나머지 시즌을 보면 루키시즌 0.7개 성공/40.6%, 그 외엔 0.7개 성공/42.7%, 1개 성공/42.3%, 1.2개 성공/40%, 1.3개 성공/41.4%, 0.9개 성공/33.3%, 1.3개 성공/38.9%, 1.2개 성공 40.6%이다. 버드가 당대 최고의 슈터 중 하나였고, 동시대에 뛰어난 슈팅력을 지닌 '''주득점원''' 레지 밀러가 30%후반대와 40%초반대를 오갔다는 걸 감안하면, 버드가 3점슛을 주요 옵션으로 활용했을 때 기대할 수 있는 수치 역시 30%후반대~40%초반대라고 볼 수 있다. 일단 당시 버드의 슈팅력에 대한 전문가들과 선수들의 평가, 그가 자유투 성공률이 통산 88.6%에 달할 정도로 뛰어난 슈터였단 걸 생각하면 그가 3점슛 성공률 2할대를 기록할 만한 슈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버드의 시즌별 3점 기록을 보면 그는 일괄적으로 3점슛 시도갯수가 1.7개 미만일 때 터무니없는 수치를 기록했고, 2개 이상일 때 현실적인 수치를 기록했다. 성공갯수 기준으로 보면 0.7개 미만일 때 터무니없는 수치를 기록했다. "버드가 역대 최고의 슈터 중 하나였다"는 전문가들의 평이 뻥이 아니라고 본다면, 통계적으로 의미를 갖기 위해선 성공 갯수가 최소 1개 언저리, 시도 갯수가 최소 2개 이상이어야 한다고 볼 수 있다.
이 기준대로 조던이 시즌별 시도/성공 갯수를 보자. 루키시즌부터 88-89시즌까지는 사실 볼 것도 없다. 가장 적었을 때가 0.6개 시도해 0.1개 넣고 13.2%를 기록한 87-88시즌이었고, 가장 많을 때는 1.2개 던져 0.3개 넣어 27.6%를 기록한 88-89시즌, 5시즌 통합하면 경기당 0.8개 던져 0.2개를 넣었 20.2%를 기록했다.
그러나 조던이 3점슛을 어느 정도 의미가 있을 정도로 시도한 시즌만 놓고 본다면 89-90시즌에는 경기당 3개를 던져 1.1개를 넣고 37.6%를 기록했고, 92-93시즌에는 2.9개를 던져 1개 성공, 35.2%를 기록했다. 94-95시즌에 1.9개 중 절반을 넣어 5할을 기록한 건 표본수가 적으니 뺀다면, 95-96시즌에 1.4개 성공/3.2개 시도/42.7%, 96-97시즌에 1.4개 성공/3.6개 시도/37.4%까지 조던이 통계적으로 의미가 있을 정도로 3점을 던진 총 네 시즌동안 각각 37.6%, 35.2%, 42.7%, 37.4%를 기록했다.
저 중 95-96시즌과 96-97시즌은 3점이 롱2에 가까웠을 정도의 단축라인이 있던 시즌이니 뺀다고 치자. 그렇다면 정상 3점 라인에서 조던은 통계적으로 의미가 있을 정도로 3점을 던졌을 때 총 475개의 3점슛을 던져 173개를 성공해 36.4%의 성공률을 기록했다. 마이클 조던이 90년대 초반에 슈팅력이 얼추 완성된 이후의 3점슛 능력은 이 수치에 가장 가깝다고 추정해볼 수는 없다.
물론 감안해야 할 것은 기준을 충족하는 게 두 시즌 뿐이라 표본이 적다는 것, 그리고 조던이 3점을 신중하게 쏘는 선수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코비 브라이언트는 3점슛이 특출난 편은 아니지만 상당히 능숙한 편이었는데, 전성기인 05-06시즌에 수비를 달고 쏘는 막장 슛셀렉션으로 34.7%에 그쳤다. 이걸 두고 "조던이 코비보다 슛을 잘 쐈다"고 보기는 힘들다. 적은 표본의 경우 95-96시즌에 조던의 성공률은 41%를 기록한 '''레지 밀러'''보다 높았지만, 이 때 조던이 3.2개 쏜 것에 비해 밀러는 5.4개나 쐈다. 즉,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표본이 두 시즌 뿐인 조던의 성공률을, 비슷한 수치를 커리어 내내 기록한 다른 선수들과 비교하기는 무리가 있다.
그렇지만 최소한 실제 조던의 슈팅력이 어땠는지 짐작하는데는 충분히 참고가 될 것이다. 즉, 조던이 커리어동안 쏜 3점슛의 상당수는 노리고 쏜 슛이라기보단 공격시간이 끝나갈 때 대충 쏜 슛이라 실제 조던의 슈팅력을 파악하는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식의 표본오염을 막기 위해선 제한된 기간 내에 의미가 있을 정도로 표본이 쌓여야(=실제로 3점을 공격 옵션 중 하나로 활용했구나 싶을 정도의 시도갯수가 있어야) 하는데, 그 기준을 충족시켰을 때 조던은 일괄적으로 35% 이상의 성공률을 기록했다.
즉, 현실적으로 봤을때 조던의 3점슛 능력은 3할대 중반에 가깝다고 추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 정도라면 90년대 기준으로도 딱히 뛰어나다고 보긴 힘든 수준이지만, 최소한 옵션 중 하나로 활용할 수는 있고 상대 입장에서는 새깅 수비를 할 수 없는 수준이다.
그리고 실제 당시 경기 중에도 그랬다. 불스를 상대한 팀들 중 조던을 노골적으로 버리는 수비를 하는 팀은 없었고, 공간을 주는 새깅을 했을 때 조던은 3점을 성공시키곤 했다. 불스의 전략 자체도 그랬다. 필 잭슨은 종종 조던에게 마지막 클러치 3점을 주문하곤 했는데, 아무리 조던이 클러치 대마왕이라도 3점 능력 자체가 2할대일 정도로 형편없는 선수에게 마지막 3점을 맡기진 않는다. 즉, 당시 조던의 소속팀과 상대팀들은 이미 조던의 3점을 "뛰어나진 않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7.2. 가장 압도적인 수비수


수비력도 최강이었다. 87~88 시즌에 DPOY(수비왕)을 수상한 것은 물론[78]이고 이때부터 1차은퇴 시즌과 복귀시즌을 제외한 9시즌 연속(87~93 6연속, 95~98 3연속) 올 디펜시브 퍼스트팀 가드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런 격언도 있었다. '''"조던을 막는 것만을 걱정하지 마라. 조던이 너를 막는 것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드가 갖춰야 하는 모든 수비 방법 모두 전부 다 잘했다. 낮고 안정적인 수비 자세는 기본이요 사이드 스텝도 소위 미쳤었다. 단순 스텝만을 밟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과의 거리, 속도를 고려해 크게 스텝을 한 번 밟음으로써 돌파를 완전히 틀어막을 정도로 스텝을 잘 밟았다. 또한 수비시에도 압도적인 퍼스트스텝과 말체력은 똑같아서 퍼리미터 디펜스 능력 또한 역대급이었다.
스틸 능력 또한 일품. 볼을 운반하는 가드들을 특유의 아우라와 운동능력으로 압박하고 약간의 틈이라도 보이면 바로 스틸해냈다. 피펜/조던의 수비 콤비에게 가드가 공을 빼앗긴다면 이어지는 것은 두 마리 야생마들의 속공 후 가벼운 2점 헌납... 두 선수 모두 수비력은 막상막하지만, 피펜의 경우 조던보다 약간 더 커 파워 포워드와 같은 큰 선수들을 막는 능력이 더 좋고 팀 수비 능력이 더 뛰어나다.[79] 하지만 대인수비와 가드들을 막는 능력의 경우 조던이 더 뛰어나다. 조던이 장신인데다가 가장 미디어 노출이 많았던 시절이 30대였고, 결정적으로 알렌 아이버슨의 크로스오버에 당하는 장면이 너무 유명해 작고 빠른 선수들을 막기 힘들었다는 이미지가 있는데 조던은 전성기 당시 아이재아 토마스와 매치업되던 선수였다. 출처
아이재아 토마스가 어떤 선수냐면 조던보다 13cm 작은 185cm에 전광석화와 같은 스피드, 엄청난 드리블링과 돌파력을 자랑하던 선수였다. 그런 선수가 조던과 매치업되면 돌파를 거의 못하고 외곽에서만 거의 득점했다. 참고로 조던은 저 시리즈에서 피스톤즈가 조던만 노골적으로 집중수비하면서 두들겨 팼음에도 평균 29점을 기록했다.[80] 즉, 공격을 하드 캐리하면서 상대팀의 에이스를 전담마크한 것이다. 사실 농구에서 키가 크면 공격에서 유리하지만 반응속도가 느려져서 작고 재빠른 선수들을 따라가기는 한계가 있다.
이 때문에 카와이 레너드나 피펜같은 최강의 수비수들도 포인트가드들을 막기는 힘들어한다. 그런데 조던은 자기보다 훨씬 작은 선수를 무리없이 막을 수 있었다. 사실 아이버슨에게 당하던 장면도 자세히 보면 크로스오버에 낚였음에도 바로 쫓아가 블락할 뻔했다. 실제로 아이버슨도 은퇴 후 그 장면을 회상하면서 "내 최고의 무브를 먹였는데 거의 블락당할 뻔했다"며 감탄했다. 게다가 그 장면에서 조던은 '''만 34세'''였고 당연히 전성기 때보다 훨씬 느려졌다. 전성기였으면 바로 블락당했을 확률이 있다. 이러한 도박적인 수비가 먹힐 수 있던 것은 스틸 실패시 보이는 빈틈도 앞서 말한 스텝을 활용함으로써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커버했기 때문이다.[81]
또한 승부욕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상대방을 막는 것에 대해 절대 포기를 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가드 주제에 평균 블락샷이 1개 넘는 수치가 그것을 증명한다. 1차 은퇴 전에는 경기 당 1개씩 기본 성공. 가드에게 평균 블락 1개는 어마어마한 수치다. 드웨인 웨이드의 별명이 왜 동부 센터였는지 생각해 보자. 공격을 주도적으로 하는 선수라 수비할 때의 체력을 관리했어도 괜찮았을 텐데 조던은 그런 거 없었고, 항상 최선을 다해 수비를 했다. 그런데도 40분 이상 꼬박꼬박 82 풀경기 소화... 혹자는 이렇게 공격과 수비 양쪽에서 모든 힘을 쏟아 넣고도 경기력에 지장이 없을 정도의 끝없는 체력이 그의 실력의 원천이라고들 한다. 동시대에 찰스 바클리도미니크 윌킨스같은 라이벌들의 경우 마음만 먹으면 좋은 수비를 보여주지만, 시즌 내내 그런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다는 점을 보면 진정한 괴물. 손이 빠른 덕분에 스틸 또한 경기 당 2개 이상씩 꼬박꼬박 성공시켜 통산 스틸 3위, 플옵 통산 스틸 2위일 정도.
2차 쓰리핏 당시 조던은 체력적 안배를 위해 상대방 에이스에 대한 수비를 전담하지 않고 론 하퍼, 피펜 등의 선수들과 함께 번갈아가며 하는 경우가 많았다.[82] 그 여파로 이때의 수비력이 과소평가받을 때도 있는데, 이때도 조던의 수비력은 리그 최고 수준이었다.
이 영상은 98년 동부 컨퍼런스 결승전 7차전에서 조던이 레지 밀러를 막을때의 모습인데, 밀러는 이 게임에서 22점을 넣었지만 조던이 막고 있을 때는 필드골을 단 한개 성공시키는데 그쳤다. 게다가 밀러는 경기 내내 론 하퍼와 조던이 돌아가며 막다가 4쿼터에 들어가면서 조던이 전적으로 막기 시작했는데, '''큰 경기에 강하기로 유명한 밀러가 4쿼터에 단 한 점도 넣지 못했다'''.
그가 밀러를 막을 수 있었던 건 그의 1대1 수비력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그가 힘과 민첩함, 센스를 동시에 갖춘 수비수라 상대 빅맨의 스크린을 깨는데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 당시 페이서스의 데일 데이비스, 안토니오 데이비스는 큰 덩치와 강한 힘, 탁월한 수비력으로 "Davis brothers(물론 실제 형제는 아니다)"라고 불리며 인디애나 가드들의 보디가드 역할을 했고, 223cm에 달하는 릭 스미츠도 거대한 덩치로 스크린을 해줬는데, 이들의 스크린 플레이는 1대1 기술이 탁월하지 못한 레지 밀러가 수비수를 요리조리 떼어놓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조던은 앞서 언급한 대로 누가 스크린을 해주더라도 매치업 상대를 악착같이 따라가는 능력이 탁월했기 때문에 조던이 막을때는 밀러가 거의 무력화되었다. 심지어 후술되는대로 나이가 들고 발이 느려져서 운동능력으로 커버하기 힘들자 아예 상대 공격의 흐름과 매치업 공격수의 움직임을 예측해 '''스크린을 피해 돌아가는''' 등 뛰어난 센스를 보였다.
게다가 2차 쓰리핏 기간이라도 "예전에 비해 수비를 나눠한다" 수준이지 수비에 쏟는 에너지나 수비공헌도 자체도 리그에서 한손에 꼽히는 수준이었다. 즉, 수비력이 한참 떨어진 이 때 조던만 보더라도 역대급 가드수비수였다.
특히 맨투맨 수비는 35세까지 리그 최고였던 게 조던이고, 특히 작고 재빠른 선수에 대한 수비는 피펜이나 하퍼보다 월등했다. 이 때문에 96년 플레이오프 동부 결승에서 피펜이 막던 앤퍼니 하더웨이가 미쳐 날뛰자 조던이 동원됐고, 피펜이 평상시에 막는 그랜트 힐을 막판 클러치 상황에 조던이 1대1로 붙기도 했다. 결과는 조던의 수비 성공. 97년 1라운드 워싱턴 시리즈에서는 당시 전성기를 달리던 '''포인트 가드''' 로드 스트릭랜드과 매치업을 해 고전시키기도 했다. 백미가 2차전인데 https://m.youtube.com/watch?v=n3JqY3CECW8 돌파력이 좋지만 외곽이 약한 스트릭랜드의 돌파를 철저히 봉쇄해 어려운 슛만 하게 만들어 야투율이 5/18, '''27.8%'''에 그치게 했다. 어시스트는 8개. 만34세, 플레이오프에서 보여준 수비력이란게 포인트. 게다가 스트릭랜드는 묘하게 저평가된 선수인데 바로 다음 시즌인 98시즌에 어시스트왕과 함께 올 NBA세컨팀까지 오른 선수였다. 참고로 수비로 상대를 발라놓고 조던 본인은 저 경기에서 '''55점 야투 62.9%'''를 찍는 극도의 이기주의를 보였다.
조던 정도 덩치의 선수에게 몸을 많이 낮춰야하고 활동량이 많은 포인트 가드 수비는 힘들기 때문에 잘 안 시킨다는 걸 생각하면(그래서 보통 론 하퍼가 막는다. 어차피 하퍼는 공격은 잘 안하니까) 이 중임을 믿고맡길 정도로 조던의 수비력이 시카고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다는 걸 알 수 있다. 물론 그와 대등한 비중을 차지하는 다른 선수는 피펜.
경기에 대한 집중력을 최고조로 이끈 상황에서는 이런 수준의 플레이[83]를 하기도 했다. 해당 영상은 뉴욕 닉스와의 '92~'93 시즌 동부 컨퍼런스 준결승 7차전인데, 경기를 시종일관 불스가 압도하였으며 특히 링크된 영상은 그의 경기에 대한 집중력이 어떤 수준인지, 그가 어떻게 경기를 지배하는지 증명하는 매우 유명한 장면이기도 하다.
맨투맨 수비력 외에 팀수비 측면에서도 역대급 선수였다. 불스는 88년에 빌 카트라이트를 영입하기 전까지 골밑 존재감이 전혀 없는 팀이었는데(찰스 오클리는 좋은 선수였지만 키가 작았다) 불스의 센터 수비전술 중 하나가 빅맨들이 일단 버텨주면 조던이 기습적으로 헬프를 들어와 블럭해버리는 것이었다. 이는 조던이 높이와 스피드, 센스를 모두 갖춘 가드라 가능했다. 드웨인 웨이드가 탁월한 블럭실력으로 "동부 센터"란 별명을 얻었지만 오리지널, 그리고 한 수위의 선수가 바로 조던이었다. 이 능력을 바탕으로 그는 4대센터를 전부 블럭해봤는데 (오닐은 매직에서 루키 시즌을 보내던 시절), 심지어 하킴 올라주원과 랄프 샘슨의 트윈 타워를 한 경기에 두 번 다 블럭한 적이 있었다. 심지어 나중에 동료가 되는 데니스 로드맨이 그를 한번 블럭하자, 잔뜩 약이 올라 같은 경기에서 그를 세번이나 블럭해버리는 복수를 하기도 했다. 로드맨이 공격 시도 자체를 거의 안 하는 선수란 점, 공격시 그의 주 매치업도 아니란 걸 생각하면 노골적으로 노린 것.
조던은 실제로 자신의 수비에 대해 "상대 팀의 모든 선수들이 나를 경계하고, 뒤돌아보며 내가 어디있는지 찾기를 바란다"라고 했는데, 실제로 불스를 상대하는 팀들은 조던의 헬프디펜스를 항상 의식해야 했다. 98년 파이널 6차전 마지막 순간에 나온 역전슛이 가장 유명하지만, 그 직전에 나온 것이 그의 기습적인 더블팀으로 인한 스틸. 대단한 건 당시 불스에 팀수비로 따지면 그를 능가하던 피펜까지 있었다는 것, 그리고 스피드, 힘, 높이와 마무리능력을 지닌 둘의 속공 전개 능력이 워낙 뛰어나 잠깐만 방심하면 스틸 후 이들의 속공이 이어졌다는 것이다.
추가로 볼에 대한 집념이 엄청난지라 허플플레이도 뛰어났다. 불스에서 허슬플레이하면 로드맨이 워낙 유명하지만 조던 역시 주저하지 않고 루스볼 하나를 잡기 위해 코트에 온몸을 던지던 선수였다.
이 영상에서는 앨런 아이버슨이 루키 시즌 당시 경기 도중 조던과 잠깐 매치업이 되었던 것을 회상하는데 [84]이때 아이버슨이 조던을 크로스오버로 제치고 득점을 한 장면이 있었다. 당시 "황제가 애송이에 농락당했다"고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크게 화제가 되었지만, 정작 아이버슨은 20여년이 지나고 이를 회상하면서 "내 최고의 기술을 제대로 먹였는데 조던이 슛을 거의 블럭할 뻔했다"며 이를 두고 crazy하다고 감탄했다. 이렇게 커버할 수 있는 비결은 1차적으로 그의 민첩함이지만, 사실 그의 완벽에 가까운 기본기도 크다. 보통 운동능력이 뛰어난 선수들은 공격수가 한쪽으로 빠르게 움직이면 따라갈 수 있는 스피드가 있지만, 그쪽으로 몸을 던지기 때문에 영상의 아이버슨처럼 한쪽으로 가는 척하고 크로스오버를 먹이면 손쉽게 제껴진다. 이런 걸 자주하면 수비에서 도박을 한다고 평가받으며, 아무리 스틸이나 블럭이 잦아도 수비수로 높이 평가받기 힘들다. 농구는 공격권이 엄청 잦기 때문에 공 몇번 뺏어도 쉽게 득점을 여러 번 내주면 말짱 꽝이기 때문(대표적인 예가 운동능력 쩔던 시절 찰스 바클리). 그런데 조던은 농구명문 노스캐롤라이나에서 기본기를 철저히 다지고 온 선수라 풋워크가 대단히 뛰어났다. 저 영상에서도 보이듯이 아이버슨의 왼쪽 돌파를 견제하면서도 두 발이 균형을 잃지 않아 바로 반대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겨 견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던의 수비력의 진가를 보려면 그의 풋워크를 자세히 볼 것을 추천한다. 물론 그 외에 더블팀 들어갔다 빠지는 타이밍 등 팀 수비에 대한 감각, 스크린 깨기, 스틸/블럭, 수비 리바운드를 위한 박스아웃 [85]등 모든 면에서 뛰어났다.
마이클 조던의 수비 레슨 비디오를 보면 그의 수비방식에 대해 나오는데, 이걸 보면 그가 왜 역대 최고의 맨투맨 수비수인지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 농구에서 공격수는 (개인 측면에서 보면) 세 가지 옵션이 있다. 슛/패스/돌파이며 이게 전부 다 되는 선수를 Triple Threat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조던의 수비 스탠스를 보면 이 세 가지를 동시에 전부 견제하는 방식이다.
돌파의 경우, 조던은 상대 공격수의 돌파성향에 따라 선호하지 않는 방향으로 돌파하게 유도한다(당연히 상대 선수 성향을 미리 연구한다는 것이 전제된다). 보통 돌파를 견제할때 수비수는 사이드스텝이 용이하도록 (정면에서 봤을때) 양쪽으로 넒게 자세를 잡는데 조던은 오히려 한쪽발이 앞으로 가도록 해 (정면에서 봤을때)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 자세를 잡는다. 이렇게 되면 장점은 공격수가 조던이 치우친 방향으로 돌파할 경우 더 빨리 따라갈 수 있지만, 단점은 반대쪽으로 돌파할 경우 스탠스를 바꿔야하므로 늦을 수가 있다. 그런데 위의 아이버슨 막는 비디오에서 볼 수 있듯이 조던은 이 스탠스를 '''정말 빨리 바꾼다.''' 자세한 상황은 후술. 이때문에 한쪽으로만 견제하다가 반대쪽을 공략당함으로 생기는 페널티를 최소화한다. 당연하지만 조던 수준으로 재빠르고 스텝이 정확한 선수가 아니면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돌파를 견제하면서 동시에 양손으로 패스를 견제하는데 이때 쓰이는 게 상대 공격수 앞에 놓인 오른손이다. 이 오른손은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공격수의 시야와 위로 가는 패스를 방해한다. 반대로 왼손은 아래에 놓여서 아래로 가는 패스를 견제하면서 동시에 스틸을 시도한다. 조던이 지적했다시피 심판들은 위에서 아래로 쳐내는 스틸은 파울을 부는 경향이 높지만 아래에서 위로 쳐내는 스틸에 대해선 관대하기 때문에 주로 아래에서 위쪽으로 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슛의 경우는 부가적인 것에 가까운데 많은 수비수들은 돌파를 견제할 때 양손이 아래로 가 있지만 조던의 경우 한 손이 기본적으로 거의 항상 얼굴께에 있으므로 블럭을 뜨는데 유리한 위치에 있다.
위의 아이버슨을 막는 비디오를 보면 무엇보다 돋보이는게 위에 언급된 그의 풋워크이다. 처음 아이버슨을 막을 때 보면 레슨비디오에서 나온 것처럼 왼발을 앞으로 놓고 아이버슨이 왼쪽으로 돌파를 하도록 유도한다.[86] 그런데 아이버슨이 크로스오버를 써서 왼쪽으로 돌파하는 듯 보이자 바로 양쪽으로 견제가 가능하도록 스탠스를 중립적으로 바꾸고 [87]크로스오버에 완전히 낚인 이후에도 무게중심을 잃지 않아 바로 스텝을 밟고 블럭을 뜬 것이다. 즉, 처음부터 왼쪽 돌파를 견제하고 있었음에도 오른쪽으로 돌파한다고 생각하자 즉각적으로 견제방향을 바꾼 것.
이 때문에 아이버슨은 본인 말마따나 '''자신의 최고 기술이 제대로 먹혔음에도''' 견제상태에서 터프샷을 쏴야 했다.
워싱턴 시절에는 운동능력이 엄청나게 떨어진 지라 더 이상 일류수비수는 아니었지만, 이때조차 특유의 높은 농구 이해도와 센스를 이용해 기가 막힌 수비를 펼친 적이 있다. 이 글과 영상은 조던의 복귀 첫 시즌 당시 당대 최고의 슈퍼스타이던 빈스 카터와 첫 대결을 다루고 있다. 이 영상을 보면 전반에 조던은 카터를 상대로 좋은 수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카터의 사기적인 운동능력에 밀려 23점을 헌납하는 등 탈탈 털린다.[88] 그리고 후반에 조던은 작정한 듯 카터를 마크하는데, 공을 아예 못잡게 하는 디나이 수비를 이용해 카터가 공을 못 잡거나 어렵게 잡도록 한다. 또한 발은 느려졌지만 스크린을 뚫고 지나가는 대신 상대 공격의 흐름과 카터의 움직임을 예측해 스크린을 피해 돌아가는 등 센스로 운동능력 저하를 커버한다. 이에 카터는 짜증섞인 반응을 보이면서 경기를 망치고 결국 후반 무득점에 그치고 만다.

7.3. 슈팅가드 포지션의 혁신을 가져오다


일단 조던 전까지 NBA 슈팅가드 변천을 보면 초기부터 상당히 오랫동안 조력자 위치의 포지션이었다. 당시 농구는 무조건 빅맨이 우선시되었으며 조지 마이칸, 밥 페팃, 돌프 셰이즈 등에서부터 다들 알고 있는 윌트 체임벌린/빌 러셀로 이어지는 빅맨진이 중요시되었고, 그 다음 중요한 포지션은 밥 쿠지를 위시한 포인트가드였다.[89]
농구가 현재와 매우 달랐던 극초기를 제외한다면 이름을 알아둬야할 최초의 슈팅가드 중 하나가 바로 51년 데뷔했고, 보스턴 왕조 극초기의 멤버였던 (61년 은퇴) Bill Sharman이다. 밥 쿠지의 백코트 파트너였던 샤먼은 역사상 야투율 4할을 넘는 최초의 가드 중 하나였으며 현재도 남아있는 "플레이오프 연속 자유투 성공"(56개)의 보유자일 정도로 매우 정확한 슈터였다. 두번째로 언급할만한 위대한 슈팅가드는 바로 러셀과 커리어 거의 전체를 함께 했던 Sam Jones. 또한 윌트의 첫 우승을 함께한 전설 "할 그리어" 역시 손꼽히는 슈팅가드였다
그리고는 60년대, 70년대, 80년대 넘어가면서 길거리 농구의 전설이자 화려한 농구의 끝판왕인 Earl "The Pearl" Monroe, 화려한 농구의 끝이었던 "The Pistol" Pete Maravich," 조던의 우상이자 어마어마한 운동능력으로 폭발적인 득점력을 자랑했던 "The Skywalker" David Thompson[90], 수비왕 2회에 빛나는 수비의 달인 Sidney Moncrief등이 있었다.
애매한 케이스는 제리 웨스트이다. 현재 그는 슈팅가드로 분류되지만 현역 시절 그는 '''리딩을 주로 했다.''' 실제로 그는 슈팅가드 게일 굿리치와 출전했는데 (즉 PG로 출전했다) 굿리치 역시 PG와 SG 사이에 있는 선수였지만 주 볼핸들러와 패서는 웨스트였다. 즉, 현대로 치면 웨스트는 득점형 PG에 가까운 듀얼가드였으며, 이는 디트로이트의 데이브 빙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번째로 애매한 케이스는 조지 거빈으로 거빈은 최전성기였던 스퍼스 시절 가드 두명과 같이 뛰는, 즉 스몰포워드 위치에서 출전해 사실상 스몰포워드에 가깝게 뛰었다. 당시 그의 사이즈(201cm)나 그의 주 득점영역은 스몰포워드의 것이었으며, 1대1 플레이 및 스스로 득점기회를 만들어내는데 능하다거나 높은 야투 역시 마찬가지로 SF에 가까웠다. 어찌보면 슈팅가드와 스몰포워드를 오가는 선수란 의미의 "스윙맨"과 가장 잘 맞는 이가 바로 거빈이었다.[91]
종합하면 당시 가장 뛰어난 선수들이 바로 이 선수들이었다. 크게 보면 득점과 리딩을 하는 웨스트/빙/굿리치/할 그리어 형, 슈팅가드 본연의 업무(외곽에서 득점지원)에 충실한 샤먼/존스/그리고 이들 수준엔 못 미치지만 대니 에인지/데일 엘리스/짐 팩슨형, 화려한 개인기로 스스로 만들어내는 내외곽 득점에 능한 얼 먼로/피트 매러비치/톰슨 형, 마지막으로 스몰포워드에 가까운 슈팅가드인 거빈형까지 있었다. 이걸 보면 슈팅가드가 왜 당시까지 슈팅가드 포지션에 대한 기대치가 낮았는지 알 수 있는데, 슈팅가드 포지션은 단 한명의 MVP도 배출하지 못했으며 저들 중 단연 뛰어난 선수들인 제리 웨스트나 거빈은 각각 포인트가드,스몰포워드에 가까운 선수이다. 얼 먼로는 뛰어난 PG, 센터인 월트 프레이저와 윌리스 리드와 함께 한 선수이며, 피트 매러비치는 비효율로 악명이 높았다. 왕조의 롤플레이어였던 샤먼, 존스, 에인지 등도 마찬가지. 톰슨은 뛰어났지만 위에 말한대로 전성기가 짧았고 우승으로 이끌진 못했다. 거빈 역시 한계가 있었다.
여기서 나온 말이 "득점왕은 우승을 못한다 (Scoring champions do not win championships)"였다. 사실 마이칸과 카림 압둘자바란 득점왕 챔피언이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이 말의 진짜 뜻은 '''외곽에서 뛰는 선수가 득점왕을 하는 팀은 우승을 못한다.'''란 말에 가까울 것이다. 외곽에서 뛰면 득점확률이 낮을 수밖에 없는데 이 선수에게 공격권을 몰아주면 팀의 득점효율이 떨어지기 때문.
이 상태에서 데뷔한 것이 조던이었다.
조던의 플레이스타일은 사실 위에 언급된 조지 거빈형에 가까웠다. 그러나 조던과 거빈, 그 전에 온 어떤 슈팅가드와도 차이점이 있었다면 조던은 '''다 잘했다.''' 그것도 득점과 수비는 역대최고를 다투는 수준. 캐치앤슛, 리딩플레이도 능했으며, 수비는 질식수비 수준에 1대1 득점은 역대 최강 수준이었다. 심지어 리바운드도 잘했다. 만능형이 아니라도 원체 포지션 자체가 가치가 높은 센터 외에 다른 포지션에선 이런 만능형 선수가 이전에도 있었으나 (매직 존슨, 래리 버드) 슈팅가드에서 이 정도로 다재다능하고 탁월한 선수는 사실상 조던이 처음이었다. 조던으로 인해 "빅맨이 아닌 득점왕은 비효율적"이란 편견이 깨졌으며, 이는 그 이후 "제2의 조던 찾기" 광풍과 조던형 선수들의 시대로 이어졌다. 코비 브라이언트, 트레이시 맥그레디, 빈스 카터, 레이 알렌 등 만능형 스윙맨들은 2000년대를 화려하게 수놓았다. 다만 이들 중 코비를 제외하면 스스로 팀에서 독보적인 공격비중을 차지하며 우승한 선수는 없고, 코비 역시 파우 가솔이란 확실한 2옵션을 얻고야 우승할 수 있었다. 이후 슈팅가드의 트렌드는 다시 바뀐다.
아이러니하게 조던 이전의 슈팅가드들이 그랬던 것처럼 슈퍼스타급인 "조던형 스윙맨" 들 중에서도 조던같은 스타일로 조던만큼 효율적인 농구와 파괴력을 보이는 선수는 없었던 것이다.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 조던은 역대 최고의 선수라고 인정받는 선수였고, 그와 같은 선수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기 때문. 조던이 "외곽에서 뛰는 득점왕은 우승을 못한다"는 편견을 깼지만 그런 케이스는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듯이, 너무나 독보적인 재능의 소유자였기에 그만 그 벽을 넘을 수 있었을 뿐 그가 가져온 혁신이 이어지지는 못했던 것이다. [92]
어찌됐건 그 이전까지 중심에서 벗어나있던 슈팅가드란 포지션의 가장 화려한 전성기를 이끈 선수.

8. 관련 일화


  • 마이클 조던/어록 참조.
  • 마이클 조던/영상 참조. 유투브에 가면 플레이오프, 파이널 전 경기를 찾을 수 있고 정규시즌 경기들도 많이 있다. 비슷한 시기 데뷔한 선수들, 90년대 선수들 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영상이 존재한다. 참고로 현역선수들은 NBA 리그패스 저작권으로 풀 경기는 볼 수 없다.
    • 마이클 조던 관련 일화: ##
    • 마이클 조던 관련 일화와 전설들: ##
마이클 조던의 커리어 첫 번째 경기는 1984년 10월 26일 시카고 불스 vs 워싱턴 불리츠전으로 시카고 스타디움 홈경기.
마이클 조던의 커리어 마지막 경기는 2003년 4월 16일 워싱턴 위자즈 vs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전으로 웰스 파고센터 원정경기.[93]

9. 여담


  • 현역 시절 93~98kg의 호리호리한 몸에도 상당히 강한 힘을 지녔는데 이 기사에 따르면 숄더프레스로 101kg(225파운드)을 여섯번 들어올릴 수 있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숄더보다 더 무거운 무게를 들 수 있는 벤치의 경우 리포터 아마드 라샤드가 그가 265파운드를 들었다고 했다거나 225파운드를 33화나 했다거나[94] 하는 말이 있다. 또한 종아리의 근육 탄성을 유지하기 위해 숙소에서도 뒷꿈치를 들고 생활했다고 한다.
  • 그의 경력 중엔 영화출연도 있다. 벅스 바니를 비롯한 애니메이션 캐릭터들과 함께 나와 농구를 하는 영화였다. 워너브라더스의 스페이스 잼. 이 이후로 농구 선수들이 영화에 많이 출연했다. 다만 평가는 필두였던 조던부터 이미 최악.
  • 유타 재즈 팬들에게는 스티브 커와 함께 철천지원수같은 존재. 이게 유타에서 어느 정도냐면, 1998년 NBA 파이널 20주년을 맞은 2018년에 나온 유타 지역신문 기사를 보자.[95]
  • 나홀로 집에 1편에서 케빈이 도둑들을 속일 때 조던의 입간판이 잠시 등장한다. 나홀로 집에는 일리노이주를 배경으로한 영화이며 영화 촬영 당시 조던은 '득점왕은 우승을 못 한다'라는 말을 듣던 1989-90시즌을 치른 뒤였다. 영화 개봉 이후에 맥컬리 컬킨과 조던이 실제로 만나기도 했다. 그리고 영화 개봉후 1년도 안된 1991년 마이클 조던은 처음으로 우승을 달성했다.
  • 생일이 2월 17일이라 그 즈음에 NBA 올스타전이 열리기 때문에 겸사겸사 생일 축하를 받곤 한다.
  • 마이클 잭슨이 1991년 발매한 앨범 Dangerous의 수록곡 Jam 뮤직 비디오를 찍을 당시 첫 우승을 하고 주가가 한창 올라가던 조던이 비중있게 출연했다. MJ & MJ 체육관에서 혼자 춤추고 있는 잭슨에게 조던이 찾아와 농구와 춤으로 한판 붙는 내용. 조던이 잭슨을 농구로 농락하고 잭슨이 조던 등에 업혀 슛을 쏘는 등 두 슈퍼스타들이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모습이 담겨있다. 이때 뮤직 비디오가 끝나고 짧은 메이킹 비디오가 붙어있는데 잭슨이 조던에게 춤을 가르쳐주는 장면이다. 근데 정말 못 춘다. 문워크를 가르쳐줬더니 "아 이제 요령 알겠는데요."하더니 뒷걸음을 슬슬 치는 수준이다. 사실 접지력이 뛰어난 농구화를 신고 문워크를 추는건 불가능하다. 참고로 뮤비에서 보여준 마이클 잭슨의 농구실력도 완전 꽝이었다.[96]
  • EA의 유명한 농구게임 NBA 라이브 시리즈에는 시카고 불스 23번의 이름이 Roster Player였었다.[97] 이는 EA가 마이클 조던 개인의 초상권료가 원체 고가라 지불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96년도에 조던이 나온 최신 농구게임을 하려면 NBA 라이브가 아닌 스페이스 잼 게임[98]을 사야 했다. 결국 학생들은 스카티 피펜과 패스를 주고받고 패트릭 유잉 위로 슬램덩크하는 조던 대신 벅스 바니와 패스하고 외계인 위로 팔이 미친듯이 늘어나 덩크하는 조던의 안습한 모습을 봐야만 했다...[99] 그래도 은퇴 후 NBA 라이브 2000부터 조던에게 초상권료를 지불, 2004년까지 게임에 나오게 했다. 허나 그 이후 계약이 결렬되었고 그간은 아예 올스타 팀에서 빠지거나 하다가, NBA 2K 시리즈로 유명한 테이크투에서 조던의 초상권을 획득, 드디어 최신 시리즈인 NBA 2K11에서 실명 마이클 조던과 그의 얼굴을 가진 캐릭터를 다시 플레이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때문인지 NBA 2K11와 2K12의 표지모델은 마이클 조던.
  • 다만 위에 언급된 스페이스 잼이 조던의 실명이 등장하는 첫 번째 게임은 아니다. 아직까지도 PC용 고전 게임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EA의 "Lakers versus Celtics and the NBA playoffs"(PC용 1989년 출시, 메가드라이브용 1991년 출시)에도 조던의 실명이 등장하며, 이 게임이 바로 NBA 인증을 받은 첫 번째 게임이다. 이외에도 아예 조던의 이름을 타이틀로 내세운 건 물론이고 조던을 직접 게임 제작에까지 참여시킨 PC 게임인 "Michael Jordan in Flight"(1993)도 있었고[100], 북미 NES용으로 나온 "Jordan vs. Bird: One on One"(1991)이라든지... 스페이스 잼이나 NBA 라이브 시리즈 이전에도 조던을 정식으로 등장시킨 게임은 꽤 여럿 존재했다. 게임 속에서 등장한 조던의 변천사는 이 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80년대 게임들에서 조던의 그래픽과 모션이 참 안습하다.
  • 2013년에 2K 게임즈에서 제작한 NBA 농구게임인 NBA2K14의 프로모션 행사에 참석하여 한 발언이 이슈를 몰고 왔다. 자신이 최전성기의 기량이라는 전제하에 현재 NBA 리그의 최전성기를 찍고 있는 에이스들과의 대결을 한다고 가정했을 때, "르브론 제임스, 드웨인 웨이드, 카멜로 앤서니 등의 선수들에게 전부 이길 수 있을 것 같다." 라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근데 "코비 브라이언트한테는 장담까진 못하겠다" 라는 파격적인 사족을 붙여 화제가 된 것 이다.
유독 코비만을 제외한 이유는 "그는 나의 모든 것을 보고 훔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이 발언에 현재 리그에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에이스들이 보낸 답변도 가지가지인데, 르브론 제임스는 "매치업을 생각해 본 적은 있지만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 누구도 확신은 할 수 없다. 게임 홍보에 도움은 되겠다" 라며 직접적인 언급을 피한 반면, 코비는 "내가 그의 플레이를 훔쳤지만, 지금 세대들은 내 플레이를 훔치고 있다" 라고 했다고. 그러니까 쉽게 말해 나도 지금 너님 명성만큼 올라왔음.
이 기사에 네티즌들의 반응도 가지가지인데, 베플만 몇 가지 꼽아보자면 '코비가 1:1은 잘 하지. 근데 팀 우승은 못 시키지' 라든가 'MJ가 이긴다에 내 손모가지와 전 재산 건다', '확실히 코비가 조던의 페이더웨이를 따라할 수 있으니 조던의 말이 맞긴 하네', '조던은 너무 코비를 예뻐해~'라는 반응 등등. 40세에 복귀한 걸 빼고 최전성기에서 은퇴한지 17년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의 발언 하나하나가 이런 이슈를 몰고 온다는 것은 그만큼 맨 윗 문서에도 설명되어 있듯이 그가 아직도 농구를 대표하는 최고의 슈퍼스타임을 증명하는 일임을 부정할 수가 없다.
  • "코비만큼은 장담할 수 없다."라는 위의 발언이 화제가 되는 이유는, 조던은 그냥 본인이 다 쳐바른다고 말해도 아무 문제가 없는 No.1의 위치이며 애초에 그쪽이 조던의 성격 및 이미지와도 훨씬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자신만을 오롯이 치켜세워도 아무도 뭐라 할 수 없는 위치인 조던이 굳이 코비라는 단 하나의 예외를 스스로 언급했기에 코비에 대한 조던의 리스펙트가 더 확실하게 전달되는 것. 그 외에도 르브론vs코비를 논하는 주제에서 "게임을 지배하는 능력은 르브론의 우위, 우승하는 능력은 코비의 우위"라고 평가하며[101] '코비는 자신과 같은 저주받은[102] 사람'이라고 말한 바도 있다. 이렇듯 조던은 후배 레전드 중 유독 코비를 의식하고 인정하는 모습을 수차례 보여주었는데, 샤크나 던컨, 르브론 등 코비와 동급 이상의 커리어를 쌓은 선수들에게도 이렇게까지 유별난 관심과 애정을 두지는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코비에게 굉장히 우호적인 셈이다. 리그를 지배하던 시절의 자신에게 다른 루키들과 달리 거리낌없이 다가와 조언을 구하던 코비의 당돌함 덕분에 처음부터 그를 유심히 지켜보았으며, 자신의 아성에 근접하지는 못했을지언정 자신을 닮은 플레이스타일과 승부욕을 기반으로 단순 포스트 조던을 넘어 또다른 레전드가 되어 리그를 호령한 점이 조던의 시각에서 보기에도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 본인은 위대한 선수였지만 선수보는 눈은 놀림거리가 되는 일이 많다. 전설의 망한 1픽 콰미 브라운이라든가 당뇨병 환자 애덤 모리슨[103]이라든가. 어쩌면 본인이 정신력과 노력, 기술 등 비신체적인 부분에서 만렙이었기에, "피지컬이 되는데 정신력과 의지가 약하고 노력이 부족해 실패하는 것" 자체를 이해 못할 수도 있다. 실제로 콰미는 약간 작은 손을 제외하면 좋은 신장, 긴 팔, 좋은 운동능력 등 원석으로서는 매우 뛰어났고 농구에 대한 감각도 뛰어났다. 여기에 본인의 노력만 기울인다면 레전드 선수로 성장하기 충분했다. 실제로 이렇게 신체적으론 원석에 가까웠으나 본인이 갈궈서 성장시킨 선수들이 바로 스카티 피펜과 호러스 그랜트이다. 둘다 드래프트 당시엔 평범한 유망주에 가까웠으나 피펜은 레전드, 그랜트 역시 올스타급으로 성장했다. 사실 미래를 아는 입장에서야 두 선수가 대단해 보이는거지, 드래프트 기준으로 보면 콰미보다 훨씬 가치가 떨어지는 유망주였다. 그랜트는 피지컬은 좋고 올아메리칸 세컨팀으로 뽑히긴 했지만 당시 대학리그를 뒤흔들던 데이비드 로빈슨이나 대니 매닝은 물론이고 케니 스미스같은 선수들보다도 평가가 낮았다. 게다가 그랜트는 NCAA의 클렘슨 대학에서라도 뛰었지, 피펜은 2부리그나 다름없는 NAIA의 조그만 대학 출신이었다(어느 정도 듣보잡이냐면 피펜의 출신대학인 센트랄 아칸소 대학 출신 NBA선수는 역사상 피펜 본인이 유일하다 하버드조차도 NBA선수 네 명을 배출한 마당에...). 하필 시애틀이 눈독을 들이는 바람에 트래이드로 5픽을 확보해야 했던 것이지, 당시 그는 괴물같은 운동능력 말고는 돋보이는게 없는 비쩍 마른 포워드였다. 반면 콰미는 7피트에 가까운 신장, 좋은 운동능력, (고졸치곤) 괜찮은 기본기, 어린 나이까지 고졸 유망주로선 더 바랄 것이 없을 정도로 좋은 원석이었다. 문제는 누구나 다 압박한다고 성장하는 건 아니란 점. 사실 조던은 본인의 성격 자체가 너무나도 불같고 참을성이 없는데다가 기준이 높아서 지도자로서 좋은 인물은 아니다. 본인도 이걸 알고 있어 감독직은 고려도 하지 않고 있지만.
  • 마이클 조던은 코트 밖에서 매너에 대해서도 좋냐, 좋지않냐 여러 설이 있다. 일례로 흑인 래퍼인 Chamillionaire가 동영상으로 자신이 왜 마이클 조던을 싫어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한 동영상이 있는데 한마디로 팬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형편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1992년 드림팀에 코치로 있었던 마이크 슈셉스키 듀크 감독은 이와 반대로 마이클 조던이 매너가 아주 좋았다고 한다. 슈셉스키는 조던이 매우 유명한 프로선수이기 때문에 자신을 무시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드림팀이 첫 훈련을 마친 직후, 조던이 아주 정중하게 자신에게 다가와 "함께 훈련하는 것을 도와주시지 않겠습니까?"라고 요청했다는 것. "그는 '코치님', '부탁드립니다'는 식으로 정중하게 말했습니다. 제 생각엔 그는 나름 저를 편하게 (making me comfortable)해주려고 노력한 듯 했습니다."라고 슈셉스키는 말했다. 참고로 이 인터뷰가 나온 것은 2010년이고 조던의 병적인 승부욕 등에 대해 이미 다 까발려진 상태였고, 슈셉스키는 조던과 개인적 친분도 없는지라 쉴드쳐줄 이유도 없다. 그러나 위에 나온 래퍼와 정반대로 슈셉스키는 조던과 대표팀 생활을 몇주간 하면서 조던의 성격에 대해 상세히 경험을 했다는 것을 생각하자.
다만 사람의 성격이란 딱 잘라서 말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으며 조던같은 스타의 경우 사람마다 일화가 다른 경우가 많다는 점을 생각해봐야 할 듯 하다. 일단 조던의 성격에 대해서는 논란이 어느 정도 있는 편이다. 한 사람에게 잘해줬다고 다른 모든 사람에게 잘해준다는 얘기도 아닐 것이고, 반대로 한 사람에게 못했다고 다른 모든 사람에게 싸가지 없게 군다는 것도 아닐 것이기에 카밀리온에어와 슈셉스키의 경험담을 두고 마이클 조던의 성격을 알기는 힘든 것. 그리고 슈셉스키는 감독으로서 조던을 만난 것이고 카밀리온에어는 별로 관련이 없는 타인으로서 만났다는 점도 고려해야한다. 또한 앞서 언급한 대로 Chamillionaire랑은 딱 한번 만난 것, 슈셉스키와는 대회 내내 보면서 이런저런 면모를 전부 봤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그것도 이 사람 입장에서 한 증언만 있기 때문에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 조던 성격이 정말 별로인지, 그날따라 컨디션이 안 좋았던지, Chamillionaire이 무례하게 대한 것이던지 알 수 없다는 얘기다. 어쨌거나 다른 사람의 성격을 한 두 번의 일화만으로 판단하기는 어려운 노릇이고 조던이 워낙 유명한 사람이니 이런저런 말이 많을 수밖에 없다.
인터뷰 전문은 다음 링크에서 확인하자.##
  • 애연가다. 은퇴하고 골프와 사업등을 병행할 때 언론에서 농구공을 든 조던은 이제, 사교계의 유명인사가 되어 골프채와 시가를 들었다고 하는데, 사실 현역시절부터 시가 잘만 펴댔다. 구글링 조금만하면 라커룸에서 샴페인과 시가를 맛나게 빨고 있는 조던의 사진이 바로 나올 정도...다만 라커룸에서 샴페인과 시가 빠는 사진은 우승 축하할때 전통이다. 대중들의 시선을 인식하는 NBA에서는 선수들이 라커룸에서 음주, 흡연하는 사진을 잘 공개하지 않는데 (시카고 선수들이 끝나고 맥주 한두캔씩 했다거나 알콜 중독이 좀 있는 제이슨 키드가 맥주가 가득찬 간이냉장고를 비웠다거나 하는 얘기가 있지만 썰이지 사진이나 영상은 없다) 예외가 바로 우승 축하할때 시가와 샴페인. 샴페인 터뜨리는거야 서양에서 유례가 깊은 축하 풍습이니 넘어가고, 시가의 경우 보스턴 셀틱스의 전설적인 명감독 레드 아워백이 시작한 전통인데, 과거 무려 8연패를 이끈 레드는 승리를 확정지었다 싶으면 거만하게 시가를 피워물곤 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워낙 간지폭풍이고 레드가 위대한 인물인지라 NBA에서 유행이 되어 우승후 시가를 피우는 전통이 생겨난 것. 또한 이제는 농구 뿐 아니라 다른 스포츠에서도 우승한 다음에 시가를 피운다. 아예 light a victory cigar란 속어가 생길 정도. 실제로 최근에 우승한 르브론 제임스나 스테픈 커리도 우승기념 모자와 셔츠를 입고 시가를 라커룸이나 코트에서 피우는 사진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996년 당시 시카고 우승에 대한 다큐멘터리 비디오 Unstoppabulls를 보면 우승하고 라커룸에서 선수들이 각 1병씩 샴페인을 따 토나 쿠코치가 미친듯이 뿌리고 제임스 에드워즈가 론 하퍼 머리에 끼얹어주고 병나발을 부는가 하면 조던이 시가를 피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물론 에이스 조던의 모습이 찍혔을 뿐 다 (강제는 아니지만) 기념으로 피운다. 즉, 라커룸에서 샴페인과 시가를 할 정도로 심한 골초가 아니고, 그건 그냥 우승 축하 세러모니인 것. 물론 이와 별개로 시가를 즐기는 애연가인 것은 맞다. 이러면 '어? 그렇게 연습벌레에 웨이트하고 몸 신경쓰는 사람이 담배라고?' 하며 안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데 시가 문서에 들어가 보면 알 수 있듯이 시가는 궐련 담배 피우듯이 폐로 연기를 들이마시는 담배가 아니라 입으로만 피우며 연기를 맛보는 담배다. 물론 구강암 등의 위험 때문에 건강에 좋다고 절대로 말할 수 없지만 조던의 운동 능력을 크게 해치지는 않았을 것이기도 한데... 오프시즌 당시 시가를 자르다가 손가락 인대를 베인 사건도 일어난 걸 보면, 좀 많이 악영향을 받은 건 맞다.NBA 스페셜 기억에 남을 NBA 최악의 부상들
  • 어렸을 때 수영하다가 죽을 뻔한 경험이 있어서 물이라면 질색을 한다고 한다. 친한 친구랑 수영하다가 파도에 휩쓸렸는데 그 친구가 물 속 깊숙히 빠질 때 자신을 꽉 붙잡는 바람에 같이 익사할 뻔했다고 한다. 자신은 겨우 뿌리쳐내고 목숨을 건졌으나 그 친구는 안타깝게도 파도에 휩쓸려 결국 사망했다고 한다.[104]
  • 50세에 본인이 연 농구캠프에서 여전히 덩크슛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농구팬들을 경악케 했고, 초등학생 정도의 어린아이들과의 매치업에서 포스트업을 무차별로 시전하여 득점을 하시는 여전한 승부욕을 보여주셨다고.
  • 여기까지 찬찬히 쭉 읽어보면, 위에서 그를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소인배'라고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패배는 절대 잊지않고 엄청난 노력을 통해 결국 최후의 승리자로 올라선 그의 향상심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듯. 혹자는 만약 누군가 그의 평득 같은 기록을 깬다면, 축하멘트를 날린 조던이 다음 날 은퇴번복을 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현재로는 사실상 없다. 현재 현역 중 커리어 평균 득점이 가장 높은 선수는 27.16점인 르브론, 27.02인 듀란트인데, 24.35점인 하든인데, 제임스의 경우 지금까지 단 한번도 조던의 커리어 전체평균보다 높은 득점을 한 시즌도 없다. 듀란트 역시 30점을 넘긴 시즌이 두번 (30.1점, 32점) 밖에 없으며 하든도 마찬가지로 두번 30점을 넘겼지만 그 중 한번은 36.1점이란 미친 페이스였다. 세 선수가 커리어 통틀어 22시즌을 뛰고 지금부터 은퇴할때까지 매 시즌 80경기씩 뛴다고 사실상 불가능한 가정을 해보자. 그렇게 한다고 쳐도 조던의 평균득점과 타이를 이루려면 르브론은 은퇴할때까지 37.49점을, 듀란트는 33.41점을, 그리고 하든은 34.7점을 매경기 넣어야 한다. 애초에 이 가정은 르브론와 듀란트의 경우 만40세까지, 하든의 경우 만 42세까지 동일한 기량과 내구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말도 안되는 가정인데도, 조던한테까지 평득을 끌어올리려면 저런 미친 점수를 저렇게 오랫동안 계속 올려야 한다는 얘기다. 세 선수가 현재 르브론은 만 34세, 하든과 듀란트는 30세란 걸 생각하면 오히려 현재보다 커리어 평균득점이 떨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르브론은 현재 뚜렷하게 하락세에 접어들었고, 듀란트도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이전 기량을 유지하지 못할 가능성도 크고, 전성기인 하든은 한동안 고득점을 올릴테지만, 세 선수 모두 말년에 크게 깎아먹을 걸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마이클 조던은 만 34세이던 96-97시즌 종료 시점으로 커리어 평균 31.7점/필드골 성공률 50.9%였으며, 30세이던 92-93시즌 종료 시점으로는 커리어 평균 32.3점/필드골 성공률 51.6%였다. 현재 수치는 30대후반~40대초반 워싱턴 시절을 겪으면서 상당히 많이 깎아먹은 수치다. 그는 만 35세에 두번째 은퇴하던 시점까지도 커리어통산 31점/5할을 상회했다.
  • 미국의 유명 스포츠 잡지인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최다 표지 모델을 장식하기도 한 인물이다. 해당 표지는 그의 50세 생일인 2013년 2월 17일 표지로, 이것으로 그는 표지모델로 50번째 등장하게 된다. 벌써 은퇴한지 10년이나 지났음에도 여전히 그의 영향력을 엿볼 수 있다.[105]
  • 조던 시대에 없었던 2차 스탯이 생기면서 재평가가 되고 있는데 평가가 더 올라가고 있다. 대표적인 2차 스탯인 Player Efficiency Rating의 경우, 스탯괴물로 유명한 윌트조차 제치고 역대 1위다!! 이는 이 스탯이 효율성을 따진 스탯이라 매번 풀타임 가까이 뛴 윌트가 손해봤기 때문이기도 한데,아무리 그래도 커리어 30-20 기록한 양반을 제친다는 건... 게다가 다음의 I love nba 란 커뮤니티에서 역대 우승 팀 중 PER 1-2위의 격차가 가장 크게 나는 팀 10걸에 대한 자료가 올라왔는데, 이중 조던의 불스가 네 차례나 올랐으며 1992-93 불스의 경우 역대 2위로 조던과 팀내 2위였던 호레스 그랜트와 차이가 13.1에 달한다. 물론 이 자료는 수비공헌도를 거의 나타내지 못하는 만큼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무리지만[106], 조던의 팀공헌도가 다른 팀 동료에 비해 넘사벽으로 높았다는 건 확실히 보여준다. 조던의 수비 공헌도도 피펜 못지 않기 때문에...[107]
  • 슬램덩크서태웅, 디어보이스아이카와 카즈히코가 마이클 조던을 롤모델로 한 캐릭터이다. 특히 서태웅은 눈감고 자유투나 3점슛 성공 후 어깨를 으쓱하는 조던 특유의 시그니처 무브까지 따라할 정도로 마이클 조던을 상정하고 만들어진 캐릭터였다는게 정설이지만, 아이카와 카즈히코(화언)같은 경우엔 특유의 미친 운동능력을 제외하곤 조던과 비슷한 점이 별로 없는 특이한 케이스이긴 하다. 특히 경쟁심과 투쟁심이 거의 병적이었던 조던과 달리 화언은 우승과 경쟁을 강요하는 아버지에게 반발해 집을 나왔을 정도니..
  • 90년대 중후반에 우후죽순으로 나왔던 국산 농구만화들에서 NBA 관련 인물 1순위로 출연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조명훈의 '덩크 탱크', '킹 오브 더 덩크'가 대표적인데, 이들 작품에서의 조던은 당시 대외적으로 알려진 이미지 메이킹 그대로, 상당히 대인배(?)스러우면서 한편으론 주인공이 반드시 넘어야 할 큰 산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 의외로 지나치는게 쉬운 기록인데 한해에 올해의 수비수와 득점왕을 동시에 한 유일한 선수이다.[108] 같은 시즌으로 한정하지 않더라도 두 개를 모두 달성한 선수는 그 외엔 데이비드 로빈슨밖에 없다. 참고로 로빈슨은 1994년에 생애 유일한 득점왕을, 1992년에 올해의 수비수가 되었다. 올해의 수비수가 될 때 득점순위는 전체 8위(23.2점)
  • 목차에 나온거 처럼 형인 래리 조던도 농구를 했지만 키가 5.8ft(약 175cm)밖에 안되어서 농구를 포기했다. 하지만 저 키에 덩크슛을 하는등 꽤 운동신경이 뛰어나다.[109]
  • 래리외에 또다른 형인 제임스 R.조던 주니어는 미군이었으며 한국에서도 근무했었다.
  • 한국팬들 사이에서 "애매하면 조던" 이라는 얘기가 있다. 스포츠 관련 커뮤니티에 "어느팀이 이길까?"류의 vs 글이 나오면 조던이 포함된 팀을 고르면 된다는 의미이다.
  • 2016년 11월 22일 오바마 대통령에 의하여 '대통령 자유 훈장(Presidential Medal of Freedom)'[110]을 수여 받았다.
  • 현재 르브론 제임스의 세러모니로 알려져 있는 "경기 시작 전 파우더 뿌리기"의 원조이기도 하다.[111] 여기에 쓰이는 파우더는 선수들이 경기 전에 공이 손에서 미끄러지지 않게 뿌리는 talcum powder인데[112] 르브론이 파우더를 양손으로 하늘을 향해 환호하듯 뿌렸다면 조던은 파우더를 해설자, 그 중 시카고의 레전드 해설자이자 전직 NBA선수 겸 잠깐 불스의 감독이기도 했던 조니 "레드" 커에게 장난삼아 뿌렸다. 발단은 조던이 프로로 데뷔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 경기 시작 전에 파우더를 그와 친하던 커에게 장난삼아 뿌리면서였다. 너그러운 성격이었던 커는 이 젊은 슈퍼스타의 짓궂은 장난을 웃으며 받아들였고이 영상에서 보듯이 조던의 테러?를 우산으로 막거나, 마스크로 막거나, 아예 방독면을 쓰고 나온 적도 있다. 이는 곧 홈경기 때마다 매번 하는 전통이 되었다. 조던은 커가 라디오 중계를 할 때도 굳이 그를 찾아가 파우더를 뿌리곤 했으며, 심지어 커의 동상이 유나이티드 센터 앞에 세워질 때도 제막식에서 이 세러모니를 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외국 팬들 사이에서는 친한 선수와 해설자들이 장난스럽게 투닥투닥하던 세러모니를 제임스가 허세스럽게 포즈를 잡는 걸로 바꿔놓았다고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다. 의미 자체가 다르다. 조니 레드 커는 단순한 해설자가 아니라 해설자로서 (선수나 감독으로서가 아니다) 영구결번될 정도로 시카고 불스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던 인물이다. 다소 짖궂은 성격의 조던의 악의없는 장난, 이를 유머스럽게 받아주는 푸근한 인상 영감님 커는 항상 불스 팬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광경이었다. 커는 조던의 데뷔 시즌부터 시카고에서 은퇴할때까지 단 한경기도 빼놓지 않고 해설을 한 인물로, 그와 조던의 오랜 우정과 상호간의 깊은 존중을 상징하는 장면이 바로 이 파우더 뿌리기였던 것이다. 실제로 이 때문에 커가 타계한 이후 시카고 트리뷴에서도 이 세러모니를 그에 대한 헌정 기사에서 언급했다.출처 케빈 가넷은 조던에 대한 존경심에서 이를 따라하곤 했고 (실제로 가장 유명한 가넷 경기 중 하나인 2004년 서부 컨퍼런스 준결승 7차전에서 해설을 맡은 케빈 할런이 "가넷이 조던에 대한 경의(tribute)를 표하고 있군요"라고 언급한다) 어린 나이에도 당돌했던 그 역시 훨씬 나이 많은 해설자들에게 친근하게 파우더를 뿌리곤 했다. 실제로 그에게 "Big Ticket"이란 별명을 지어준 유명 해설자 케빈 할란 역시 팀버울브스 전속 해설자 시절 파우더 테러를 맞곤 했으며, 둘은 지금도 만나면 친근하게 투닥투닥 장난 치는 사이다. 이런 훈훈하고 소소한 세러모니인데, 르브론이 하는 것은 해설자고 뭐고 그냥 하늘에다 냅다 뿌리면서 포즈를 잡는 것 뿐이다. 거기에는 조던과 커, 가넷과 할란 사이의 일화나 우정도 없다. 사실 조던의 세러모니를 더 충실히 따라한 사람은 케빈 가넷이다. 가넷은 조던과 마찬가지로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시절 친한 해설자들에게 파우더 테러를 하곤 했는데, 조던이나 르브론만큼 엄청나게 인기 많은 선수는 아니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그리 많이 알려지진 않았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는 상대적이다. 가넷의 세레모니도 유명했고 동시에 은퇴한 코비, 던컨과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레전드 선수이다.
  • 조던과 인연이 있는 팀들
- NBA 시카고 불스 - 영구결번
- NBA 워싱턴 위저즈
- NBA 마이애미 히트 - 영구결번
- MLB 시카고 화이트삭스 / 버밍햄 베론즈
- NBA 샬럿 호네츠 - 구단주
  • 그의 자녀는 모두 5명. 2006년 이혼한 첫번째 부인 사이에서 2남 1녀를 낳았고, 후에 16살 연하의 모델 출신과 2014년 결혼하여 쌍둥이 딸을 두고 있다. 장남 제프리와 차남 마커스 모두 대학때까지는 농구를 했지만, 둘 모두 평범한 기록만 남기고 NBA진출엔 실패했다.[113]

  • 그가 시카고에 살 당시 살던 거대한 저택은 그 자체로 시카고의 명소가 됐는데, 방 9개, 화장실 15개, 시가 룸, 골프장, 야외 농구장, 실내 체육관, 헬스장, 카드를 칠 수 있는 방 등과 23번이 새겨진 현관문, 거대한 마당으로 말 그대로 궁궐 규모의 집이다.[114] 그는 1990년대부터 살던 이 집을 2012년에 14,855,000달러에 팔려고 내놓았는데, 원래 2천9백만 달러 가치의 집을 거의 반값에 내놓았음에도 5년 동안 안 팔리고 있다고 한다.[115] 이 집이 위치한 동네가 시카고 고급주택가긴 해도 베벌리 힐스처럼 유명인사들이 찾는 위치는 아니란 점, 워낙 유명해 구경꾼들이 끊이지 않는다는 집, 집 자체가 오직 조던만을 위해 지어진 집이다 보니 그의 흔적이 너무 크다는 등 여러 이유가 있다. 사실 이런 집은 골치아픈게 한화 150억 원 이상을 집에 쓸 수 있는 사람이면 이미 상당한 부호다. 높은 확률로 이미 사회적으로 성공한 유명인사일 것이다. 근데 그런 사람이 허구헌날 구경꾼들이 찾아와 귀찮게 하고, 집 구석구석에 남의 흔적이 있는 집을 굳이 거액을 주고 살 필요가 있을까? 설령 조던 광팬이라고 해도 천오백만불은 "덕질"에 쓰기는 부담스러운 액수다. 차라리 1~2백만불 정도 적당한 액수였다면 기념품 사는 셈치고 살 수도 있겠지만. 또한 집 자체에 예술적 가치가 있다면 저런 돈을 주고 살 수도 있지만, 이건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조던이 자기 취향대로 기념품과 조형물로 떡칠해놓은 집이다. 사실상 조던덕질 외에는 굳이 살 가치가 없다. 게다가 조던의 흔적이 싫다고 이런걸 싸그리 치우고 리모델링을 하려면 애초에 굳이 이런 집을 살 이유가 없다. 즉, 어떻게 봐도 구매자가 나오기 힘든 구조다.
  • 마이클 조던하면 떠오르는 트레이드 마크가 바로 스킨헤드다. 사실 마이클 조던이라고 처음부터 스킨헤드를 했던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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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바로 마이클 조던의 20대 때 모습이다. 이때부터 이미 머리가 벗겨져 있었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머리를 빡빡 밀어버린 이유가 머리가 훤히 벗겨지는 모습을 팬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116]
  • 마이클 조던의 커리어 플옵진출 시즌: 시카고 불스 재적 전시즌 플레이오프 진출[117] (13시즌, 1984-1993, 1995-1998)
마이클 조던이 플옵에서 이긴 팀과 횟수: 뉴욕 닉스 5회,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4회, 마이애미 히트 3회, 유타/샬럿/필라델피아/애틀랜타 2회, 밀워키/시애틀/레이커스/피닉스/뉴저지/디트로이트/워싱턴/포틀랜드/올랜도/인디애나 1회
마이클 조던이 플옵에서 패한 팀과 횟수: 디트로이트 3회[118], 보스턴 2회, 올랜도/밀워키 1회[119] 여담이지만 조던은 단 한번도 자신의 팀보다 시드가 뒤떨어지는 팀에 패배한 적이 없다. 즉, 전력이 떨어지는 팀에게 당하는 "업셋"을 당한 적이 없다. 그가 패배했을때는 매번 객관적인 전력에서 상대팀이 월등히 앞섰을 때 뿐이었으며, 패했을 때조차 시리즈 최고 활약을 펼친 선수는 조던이었다. 모두가 기억하는 86 1라운드에서 그는 래리 버드조차 묻어버리는 역대급활약을 펼쳤으며, 87년도에도 1라운드 광탈했지만 35.7점 7리바운드 6어시스트 2스틸 2.3블럭이란 활약을 했다(상대팀 에이스인 버드는 26점 10리바운드 9어시스트 1.3스틸 0.3블럭). 스탯을 종합해서 공헌도를 계산한 Game Score 기준으로 보면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인데 그는 데뷔했을 때부터 은퇴할 때까지 참가한 모든 플레이오프 시리즈에서 단 한번만 빼고 매번 양팀 통털어 시리즈 최고점수를 기록했다. 상대가 래리 버드매직 존슨이건 칼 말론존 스탁턴 듀오건 상관없이 그는 압도적인 활약을 했었다. 그가 게임스코어에서 밀렸던 단 한번은 극도로 부진했던 1996년 파이널로 그는 18.5를 기록했지만 숀 켐프는 18.9를 기록했다. 물론 불스 내에선 압도적인 1위였고 불스가 우승을 했지만.
  • 같은 동시대의 NBA 선수들 중에서는 찰스 오클리, 패트릭 유잉, 찰스 바클리 등과 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클리와는 오프라 윈프리 쇼도 한 번 나왔다. 유튜브에서 찾아보면 한글자막이 달린 영상들도 몇 개 있다.
  • 드라마틱한 커리어를 보내면서 조던 vs 다른 선수들만큼이나 조던 vs 조던 대결도 치열하다. 여담으로 84-85시즌부터 88-89시즌까지 5시즌동안 MVP1회, 올NBA퍼스트팀 3회, 세컨팀 1회, 수비 퍼스트팀 2회, 올스타 5회, 득점왕 3회, 올해의 수비수 1회, 스틸왕 1회, 출장경기수 345경기에 평균득점 32.6점 (필드골 성공률 51.3% 자유투 84.8% 3점슛 20.2%) 6.2리바운드 5.9어시스트 2.8스틸 1.2블럭의 커리어가 나온다. 우승은 없지만 한 시대를 풍미한 수준. 우승을 못하고 명에의 전당에 아주 무난하게 들어간 도미니크 윌킨스가 올NBA 퍼스트팀 1회, 세컨팀 5회, 서드팀 2회, 득점왕 1회, 올스타 9회인데, 올NBA팀 선정횟수는 윌킨스가 7회vs4회로, 올스타선정도 9회vs5회로 앞서지만 퍼스트팀은 3회 vs1회, 득점왕도 3회 vs1회로 조던이 앞서는데다가 무엇보다 조던은 MVP와 수비퍼스트팀 2회가 있다. 수상실적이 이걸로 그친다고 해도 명예의 전당을 충분히 노릴 수 있는 실적이다. 90년대 조던만 떼낼 경우 89-90시즌부터 97-98시즌까지 8시즌동안 MVP4회, 우승 6회, 파이널 MVP6회 올NBA퍼스트팀 7회, 수비퍼스트팀 7회, 올스타 7회, 득점왕 7회, 스틸왕 2회, 출장경기수 585경기에 평균 30.8점 (야투율 50.1% 자유투 83% 3점슛 35.9%) 6.3리바운드 5.1어시스트 2.3스틸 0.7블럭으로 진짜 딱 저렇게 8년만 뛰고 은퇴한다고 쳐도 명예의 전당이 가능한 정도가 아니라 역대랭킹을 논할 정도로 레전드 커리어다. 실제로 조던은 9년만 뛰고 우승 3회, MVP3회로 그친 93년 랭킹부터 역대 최고 떡밥이 돌았던 선수다. 즉, 수상실적을 반으로 나눈다고 해도 명예의 전당이 아주 무난할 정도의 무지막지한 수상실적. 보통 1984~1990의 '블랙캣 조던', 1991~1993 1차 '쓰리핏 조던', 1996~1998 '2차 쓰리핏 조던', 2001~2003 '워싱턴 조던'으로 나뉜다. 이 중에서 최고로 꼽히는 조던은 역시 1993 조던. 쓰리핏에 대한 동기부여와 절정에 이르른 피지컬과 숙련도를 보여주었다. 워싱턴 조던은 40살 먹고서도 엘리트 스윙맨급 플레이를 보이면서 선수생활 말년에 들어선 후세대의 선수들과 비교대상으로 언급되고 그 외에도 번외편으로 '야구선수 조던'과 '구단주 조던'도 있다. 이것과 비슷한 컨셉으로 만들어진 게토레이 광고도 유명하다. 23살 조던 vs 39살 조던
  • 언론계에서 비유적으로 "농구의 신(basketball god)"이라고 불렸는데 주변인들도 장난삼아 이런 식으로 부르곤 했다.[120] 마이클 조던 - 더 라스트 댄스에서도 재미있는 장면이 나왔는데 후보 가드 랜디 브라운이 지인을 위해 주는 경기 티켓을 못 구해 조던에게 부탁하러 갔는데[121] 조던이 "(좌석) 자리 중요해? 아님 경기장 안이라면 아무데나 상관없어?"라고 묻자 브라운이 "그냥 라커룸에 신(조던) 옆자리에 앉혀도 돼"라고 한다. 그러자 조던이 티켓 두장을 주고 "방금 신이 주셨네"라고 농담을 던지곤 카메라를 의식하면서 "장난이야"라고 하자 브라운이 놀리면서 "방금 그거 편집하지 마요!"라고 폭소한다. 계속 깐독대는 브라운에게 조던은 웃으며 "티켓까지 줬잖아. 얼른 꺼져"라고 한다. 사실 조던을 신이라고 부르는 건 농담반진담반의 인사이드 조크로, 그의 대단함에 대한 경외/그가 받는 특별대우에 대한 비꼼이 섞인 것. 실제로 조던의 경호팀은 조던 가족들에 대해 서로 부르는 코드네임이 있었는데, 조던의 경우 야훼였다.
  • 일생상활에서도 끊임없이 승부욕을 불태운 것으로 유명하다. 90년대부터 친구였던 윌 스미스는 본인도 승부욕이 꽤 있는 편이지만 조던과 타이거 우즈은 자신이 평생 만나본 사람 중 가장 승부욕이 강하다면서, 물을 마실 때조차 "누가 더 빨리 마시나 내기하자"라고 하고 걸을 때도 본능적으로 더 빨리 걷는 수준이라고 한다.https://www.youtube.com/watch?v=INHVfx05Sy8[122] 라스트 댄스에서도 이런 일화가 소개되었는데, 백업 센터 윌 퍼듀의 회고에 다르면 원래 그와 스카티 피펜, 론 하퍼 등은 이동 중 비행기 뒷자리에서 엄청난 액수의 판돈이 걸린 포커게임을 하곤 했다고 한다. 반면 퍼듀와 존 팩슨 등 돈이 아까운 선수들은 비행기 앞쪽에서 한 판에 1달러, 2달러 정도 걸린 포커를 말 그대로 재미삼아 했다고.[123] 그런데 하루는 조던이 앞쪽으로 와 끼겠다고 한다. 의아한 팩슨이 "네가 왜 여기 껴? 이건 1,2달러 밖에 안 하는 판인데?"라고 묻자 "너랑 너, 너희 돈이 내 주머니에 있다고 하고 싶으니까"라고 답했다고...즉, 돈과 상관없이 승리 자체에 굶주린 것. 또한 경호원 중 한 명과 동전 던지기 내기를 했는데 조건을 불리하게 걸었음에도 첫 판을 조던이 이겼다(경호원들은 원하는대로 무제한 시도를 하고, 그걸 조던이 세번 시도만에 넘어야 하는 것). 그러자 신이 난 조던이 "나 한번 시도하고 니들 네번 시도해서 이겨봐!"라고 했는데 조던이 졌다! 이긴 경호원이 조던의 어께 으쓱 세러모니를 흉내내며 깐족거리자 똥씹은 표정으로 태클을 걸더니 "다들 나가. 망할 유나이티드 센터나 경호하라고!"라고 하고 농담반진담반으로 "경호원! 이 경호원 끌어내!"라고 한다. 이 때 걸린 판돈은 단돈 20달러(2만원 정도). 이때 조던의 재산은 5억달러(한화 6천억원 정도)였는데, 고작 2만원 잃었다고 삐친 것이다. 그만큼 병적인 승부욕의 소유자.
  • 저 위에 묘사된 그의 부를 보면 짐작하겠지만, 전용기를 갖고 있다. 기종은 걸프스트림에서 나온 쌍발 터보팬 비지니스 제트기 걸프스트림 IV, 일반적인 기종의 영상은 여기서 볼 수 있다. 조던의 비행기는 엔진에 본인을 상징하는 23번과 6번(우승 횟수) 그리고 본인 이름 약자인 MJ가 적혀 있으며, 꼬리쪽에는 유명한 점프맨 로고가 그려져있다. 색깔은 모교인 노스캐롤라이나를 상징하는 흰색과 하늘색이지만, 최근에 얼룩덜룩한 무늬로 바뀐 모습이 찍힌바 있다. 그가 전용기를 언제부터 탔는지는 불명이지만 선수 시절부터 이미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물론 팀 일정을 위한 이동은 팀 전용기로 했다). 조던의 야구 커리어를 다룬 이 기사에 따르면 최소한 93년도부터는 보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던이 은퇴를 선언한 직후인 93년 11월에 불스와 화이트삭스의 구단주 제리 라인스도프는 화이트삭스의 외야수 마이크 허프를 불러와 조던의 훈련을 돕지 않겠냐고 제안했다고 한다. 하루는 조던이 훈련을 하러 들어오면서 시카고 베어스의 레전드인 리처드 덴트와 함께 와서 오후에 피닉스로 가서 찰스 바클리와 골프칠거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그러자 허프는 조던이 비행기 시간을 놓칠까봐 불안해서 계속 시계를 보며 늦지 않겠냐고 계속 물어봤는데, 이에 조던은 "마이크. 나 전용기 있어요. 내가 타야지 비행기가 떠요"라고 대답했다고.
  • 위에서 언급된 영화 스페이스 잼 관련 일화가 있는데, 이 영화는 96년에 개봉했지만 촬영은 95년 여름, 즉 올랜도 매직에게 당한 굴욕적인 패배 직후에 이뤄졌다. 패배에 대한 분노도 있지만 1년 반동안 야구에 적합한 몸을 만들던 조던은 몸부터 만들어야 했고 제작사(워너 브라더스)에게 "운동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고, 제작사는 조던을 위해 운동시설이 구비된 정규규격 코트가 있는 간이 체육관을 지어줬다. 여기서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일정을 소화하게 되는데 촬영 스케쥴은 월~토요일까지 주 6회, 오전 7시에 시작해 오후 7시 정도에 종료하는 일정이었다. 그런데 조던은 촬영을 하면서 중간에 두 시간 정도 갖는 휴식 시간동안 개인 트레이너 팀 그로버와 함께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고, 촬영이 끝나면 세 시간동안 초청해온 동료 NBA선수들과 픽업게임을 했다고 한다.[124] 여기엔 당시 촬영에 참여했던 패트릭 유잉, 숀 브래들리 등은 물론이고 아직 팀에 합류하기 전인 데니스 로드맨, 전 동료 호레이스 그랜트, 그 외에 크리스 멀린이나 레지 밀러같은 스타들, 떠오르는 젊은 스타들인 주완 하워드, 에디 존스도 있었다. 심판도 없이 말 그대로 픽업 게임이었다고. 참여하는 선수들의 수준이 수준이니만큼 밀러는 "내가 참여했던 최고의 경기들 중 하나였다"고 회고했다. 게다가 10시에 시합이 끝나면 또 웨이트트레이닝을 했고, 그 다음에는 이른 아침부터 촬영. 픽업 게임 멤버였던 밀러는 "도대체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지 모르겠다. 진짜 무슨 흡혈귀같았다"면서 조던의 무한체력에 대해 감탄했다. 당연하지만 다른 선수들은 그냥 자기 할거 하다가 와서 며칠 뛰고 마는 것인데, 조던은 하루종일 촬영+몸의 체형을 바꾸는 개인 트레이닝+매일 이 픽업게임을 한 것이다.
  • 선수 시절 정신병에 가깝던 승부욕을 가지고 이기기 위해서 자신을 벼랑 끝까지 밀어붙이던 선수가 구단주가 되어 NBA 최악의 팀 중 하나인 샬롯이 매번 새파란 후배들에게 무너지는 것을 우울하게 바라보면서 앉아있으니[125] 올드팬들 중에서는 이를 안타깝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는 듯 하다. 차라리 그냥 은퇴 생활을 즐기지 그러나?라는 얘기도 간간히 나오는 듯.
  • 조던은 운동능력 뿐 아니라 여러 신체조건도 여러모로 농구에 딱 맞았던 걸로 알려져 있다. 그는 단신급으로 민첩하게 움직이기엔 거의 마지노선인 198cm의 신장이었으며[126], 손은 길이/너비가 9.75/11.375인치 (cm로 환산시 24.765/28.8925)에 달해 공을 잡고 고난도 플레이가 가능했다. 반대로 발은 미국식으로 사이즈 13이라 키에 비해선 작은 편이었는데[127], 이 덕분에 기민한 움직임이 가능했다고 한다. 재밌는 것은 조던은 왼쪽(13.5)에 비해 오른쪽 (13)이 약간 작은 짝짝이였다고 한다. 또한 윙스팬조차 키에 비해 긴 210cm 정도였으니 그야말로 농구를 위해 태어난 몸.
  • 은퇴 후, 구단주로 왕성한 활동을 하시던 중에 영역 확장에 들어갔다. 바로 NASCAR에 참여한 것. 2021년 시즌부터 데니 해믈린과 공동으로 '23XI(투웬티 스리 일레븐)' 레이싱팀의 소유주가 된것이다. 드라이버는 흑인인 버바 월러스(Bubba Wallace)이며 차메이커는 도요타이다.*

9.1. 조던의 리더십


"마이클이 (첫 번째로) 컴백한 뒤 멤버들은 다들 알아서 열심히 뛰었다. 연습도 전쟁이었다. 때문에 나로서는 좀 편한 점도 있었다. 불스가 대학생이라면 (샤킬 오닐코비 브라이언트가 이끈) 레이커스는 초등학생들이었다. 이들의 집중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내가 선수들 개개인에 좀 더 시간을 할애할 필요성을 느꼈다."

필 잭슨 - 1989~1998년 시카고 불스 감독

"어떤 팀이든 간에 우열 순서의 확립은 필수적이야. 우리 팀의 경우엔 별 문제가 없었어. 우리에겐 마이클이 있었으니까. 다른 사람들은 그저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거지. 물론 그건 리더가 없을 때에는 상당히 어려울 거야. 하지만, 우리에게는[NBA에서 가장 위대한 아니, 모든 스포츠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리더가 있었어. 모두가 그를 절대자로서 인정했고, 데니스도 마이클에게 대들지 않았어. 아니, 그럴 생각조차 없었지."

스티브 커 - 1993~1998년 시카고 불스 포인트 가드

조던 시대의 시카고 불스와 샌안토니오 스퍼스에서 수차례 우승을 경험했고, 2014년부턴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서 감독을 맡고 있는 스티브 커는 "연습 때 마이클이 하도 지독하게 갈궈대서 경기 때는 긴장하는 선수가 거의 없었다. 경기보다 연습이 더 힘들었으니까.[128] 사람들은 데니스 로드먼이 마이클한테 대들다가 쫄아서 얌전히 지낸 줄 아는데 그건 모르는 소리다. 애초에 로드먼은 마이클에게 대들 생각 자체를 한 적이 없었다."라고 말한 바 있다.[129] 어떤 경기에서는 스카티 피펜이 4쿼터에 조던과 필 잭슨의 지시를 무시하고 결정적인 포지션에서 슛을 던졌는데, 조던이 그 즉시 타임아웃을 부르고 면전에서 피펜을 호되게 질책했던 일도 있었다.
실제로 조던은 본인의 무시무시한 승부욕과 연습량 때문에 나태한 선수들을 용납하지 않았다. 또한 나태하진 않더라도 움직임이 둔하거나 해서 팀 연습을 따라오지 못하는 선수들은 무섭게 몰아세웠는데 이 희생양이 된 선수가 바로 빌 카트라이트였다. 조던이 카트라이트를 싫어한 이유 중 하나가 그의 절친인 찰스 오클리를 보내고 받은 선수란 것이었으나, 더 중요한 것은 당시 노장이었고 건강이 안 좋던 카트라이트는 둔한 움직임 때문에 공격에서 조던의 패스를 놓치기 십상이었고 부족한 공격 기술 때문에 공격 기회를 날려먹곤 했다. 샘 스미스의 《Jordan Rules》라는 책에 따르면 조던은 팀 동료들에게 카트라이트에게 패스하지 말라고 강요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책에 나오는 내용이지만 1년간 갈등을 겪고 난 뒤 조던은 카트라이트가 수비에서 해주는 공헌, 그리고 부드러운 리더로서 팀 동료들을 이끄는 것을 인정하고 갈등을 봉합했다고 한다.(물론 친하진 않았다. 이후에 3연패 기간 동안 둘은 공동주장으로 활약한다.) 문제는 이 책이 92-93시즌에 나왔는데 당시 기자들이 조던과 카트라이트가 1년 뒤 화해하고 우승할 때는 큰 갈등이 없었다는 건 쏙 빼놓고, 앞의 자극적인 부분(패스 금지, 공개적 갈구기)만 크게 보도해서 마치 불스의 팀 케미스트리가 아직도 개판인 것처럼 몰아간 것이다. 때문에 당시 선수단은 크게 분노했으며, 93시즌 내내 이어진 조던의 도박 스캔들 관련 조사와 더불어 팀 분위기가 어수선해지는 데 한 몫 했다.
오죽하면 "당시 필 잭슨은 감독이 아니었다. 마이클이 감독이었다."라고 말하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다. 물론 그만큼 조던이 절대적인 카리스마로 선수단을 휘어잡았다는 소리지, 조던이 감독을 무시하거나 항명을 했다는 얘기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조던은 필 잭슨을 굉장히 존중했으며, 잭슨을 잡지 않으면 바로 은퇴하겠다고 공언할 정도였다. 실제로 후술되는 스티브 커와의 마찰 이후에도 조던이 뉘우치는 데 잭슨의 조언이 컸으며, 로드맨, 피펜은 앙숙에 가까웠는데 둘이 화해하고 잘 지내는 데도 잭슨의 리더쉽이 컸다. 샤킬 오닐도 잭슨에게 무한한 존중을 표한 걸 보면 그만큼 필 잭슨이 감독으로서 리더쉽이 뛰어난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드물게도 스티브 커가 보기와는 다르게 조던에게 상당히 개긴 케이스. ESPN Sports century의 조던 편에서 두 선수가 밝힌 바에 따르면 일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연습 경기 중 커와 조던이 매치업되었는데 (조던 주장에 따르면) 심판들이 커에게만 유리하게 불렀다고. 그러자 조던이 슬슬 열이 뻗치면서 상당히 거칠게 플레이하기 시작했고 트래쉬 토크까지 시도하자 커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고. 결국, 분위기가 과열되면서 조던이 주먹으로 커를 가격했고, 이후 연습이 중단되었다고 한다. 두 선수의 체격, 운동능력, 힘 차이를 생각하면 커가 대단한 것. 조던은 이후 커에게 전화해서 사과를 했으며 이후 커의 승부 근성을 높게 평가해서 존중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커와 조던은 서로 잘 지냈다. 은퇴 전까지 쭉 한 팀에서 지내면서 96-97 파이널 샷을 패스해주기도 했다. 위에 언급된 싸움에 대해 커는 인터뷰에서 "이 사건 이후 마이클이 나를 정말 존중하게 되었다"면서 조던이 자신에게 쥐여사는 동료보다 자신에게 덤빌 수 있는 동료를 더 존중한다고 한 바 있다. 이는 친분보다는 동료로서의 상호존중의 문제다.
영혼의 파트너는 피펜이었지만 사실 조던과 피펜은 사적으로 그리 친하지 않았다. 조던의 베프는 유잉, 바클리 등이었으며, 2차3연패 기간 동안 조던 피펜 로드맨 트리오는 코트에서 찰떡궁합과 별개로 사적으론 전혀 어울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조던은 론 하퍼가 캐브스 소속일 때부터 매우 친했다. 커와도 마찬가지. 조던은 개인적 친분과 동료애를 연계시키는 선수가 아니었으며, 본인이 인간적으로 좋아하냐마냐를 떠나 본인과 마찬가지로 농구에 모든 걸 쏟아부을 수 있는 동료를 아꼈던 것. 커의 경우에도 싸움 사건을 통해 커가 자신에게도 쫄지 않고 덤벼들 수 있는 깡다구와 승부 근성의 소유자란 걸 알게되자 동료로서 존중하고 아끼게 된 것. 스티브 커 외에 스카티 피펜 역시 조던을 상대로 쫄지 않고 도전을 하는 선수였는데, 비록 조던과 피펜이 사적으로 친한 것은 아니지만 조던은 피펜을 존중했다고 한다. 반대로 성격이 유순한 호레이스 그랜트는 조던이 제법 힘들게 굴었다고.[130] 1차 쓰리핏의 주전 센터였던 빌 카트라이트도 라커룸에서 그간 조던한테 워낙 갈굼을 당하며 쌓인 것이 폭발해 조던의 면전에서 다리를 부러뜨리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131]
국내에 많이 퍼진 이야기로 절친 찰스 오클리와 트레이드되어 불스에 온 빌 카트라이트를 조던이 못살게 굴었다가 있는데 이건 악의적인 해석이 꽤 들어간 이야기다. 조던이 오클리 트레이드에 분노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분노는 카트라이트보다는 구단주와 프런트를 향한 것이었고 합류 초반에 상냥한 성격의 카트라이트가 코트 위에서 전투적이지 못할거라고 생각하다가도 오해를 풀고 팀원으로 받아들였다. 조던은 승리에 모든 것을 거는 타입의 선수였기 때문에 전쟁 같던 연습시간, 제왕 같은 성격 때문에 동료들을 빡세게 다루더라도 그것이 불화와 팀 와해로 이어지지 않도록 참을 수 있는 면모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조던 룰스 책에도 나온 내용으로 조던이 카트라이트에게 까칠하게 굴거나 일부러 잡기 힘든 빠른 패스를 얼굴로 던져서 놓치게 만드는 등 망신을 주는 행위를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카트라이트를 꼬집어 괴롭히기보다는 끝없는 승부욕을 가진 조던이 동료들을 자극하기 위해 '''다른 동료들에게도''' 행한 방식이다. -피펜과 그랜트를 포함한 다른 주축 선수들도 이에 똑같이 당했으며, 기대가 클수록 이런 조던의 도전은 더욱 심했다.[132]
이런 조던의 도전에 대응하는 방식은 다양한데, 피펜은 이를 정면으로 받아쳤고, 그랜트는 이를 받아들였지만 조용히 상처를 받았고(이 때문에 그랜트는 누구보다도 조던을 존중하지만 개인적으로 친하진 않았다) 롱리는 이를 호인답게 웃으며 받아들였다. 위에 언급된 커도 특이한 케이스로 실력은 조던이나 피펜에 비할 바가 못됐지만 조던을 숭배할 뿐인 다른 플레이어들과 달리 정면으로 받아친 것이다. 싸움 이후 조던이 커를 존중하고, 클러치 슛을 맡길 정도로 신뢰했던 것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팩슨의 경우 일화가 알려져있지 않지만 그 까다로운 조던이 꽤나 신뢰한 걸 생각하면 뭔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조던과의 관계가 최악까지 치달았던 것이 바로 콰미 브라운으로,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콰미의 맨탈이 그리 훌륭하지 않은 것도 있고(다른 팀에서도 말썽을 일으켰다) 고졸인 그가 어려서 상처 입기 쉬운 섬세한 성격이었던 것, 그리고 80년대 거칠었던 문화에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것이 밀레니엄 세대인 콰미에겐 충격적으로 다가온(즉, 세대 차이) 것도 있다. 조던의 성격 자체가 극단적으로 승부욕이 강하고 까다롭고 예민한 등 어렵다는 것도 크다. 물론 조던의 갈굼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선수들도 있는데 듣보잡 벤치 선수들에겐 애초에 기대치가 없으므로 심하게 갈구지 않았으며, 론 하퍼나 존 샐리, 데니스 로드맨처럼 자신과 경력도 비슷하고, 직접 맞붙으며 실력을 인정한 선수들은 자유롭게 내버려뒀다. 하퍼 같은 선수들하곤 워낙 친하기도 했고, 캐브스 시절 치열하게 맞붙으며 인정한 상대니 갈굴 이유도 없었다.
카트라이트의 경우 계속된 부상으로 기동력과 득점력이 크게 하락했고, 조던 본인 페이스에 맞춰 따라올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에 계속 실험한 것이다. 게다가 그의 대가로 포기한 찰스 오클리는 리그 수위권 리바운더일 뿐 아니라, 리바운드를 잡고 바로 속공하는 조던에게 롱패스를 찔러주는 센스가 있을 정도로 판단력이 빠른 선수였다. 단순히 조던의 절친이 아니라 불스에서 매우 중요한, 젊은 선수였다. 근데 나이도 더 많고 부상도 잦은데다 이미 벤치로 물러난 선수를 데려오니 의구심이 안 들수가 없다. 그러나 카트라이트가 수비의 앵커 역할 할 것이라 믿었던 불스 프런트의 안목은 정확했고, 조던 역시 카트라이트의 가치를 알게되자 그를 신뢰했다. 상술한 갈등은 어디까지나 영입 초반의 일이다.
카트라이트는 그 이후 조던의 리더십의 뒷면에서 팀원들을 보듬어주는 역할을 맡았고[133] 1차 쓰리핏의 멤버로 활약했다. 조던의 안 좋은 면을 폭로하기로 유명했던 그랜트와는 달리 카트라이트는 은퇴 이후 조던에 대해 불만 의사를 내비친 적은 없다. 이렇듯 이미 90년대 초반에 팀원들 사이에 정리가 끝난 조던과 카트라이트의 갈등 스토리지만 지금도 지속적으로 확대해석되어 조던을 끝없이 깎아내리는 사람들에게 악용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식으로 깎아내리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게, 조던을 마치 실력만 좋을 뿐 상종못할 개xx로 왜곡하는 것인데, 조던의 성격이 굉장히 까다로운 것은 사실이나 정도를 넘어서는 사람은 아니었다. 피펜과 그랜트를 갈궜다고는 하나, 피펜은 조던이 먼저 떠나기 전까지 그와 함께했고 그랜트는 은퇴 이후 조던이 독보적인 최고였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스티브 커에게 연습 도중 주먹을 날린 일화가 유명하지만 조던은 사건 이후 그에게 먼저 전화를 해 사과를 했고, 이후 그에게 위닝샷을 맡길 정도로 존중했다.[134] 론 하퍼 같은 선수는 팀 합류 전부터, 이후에도 절친한 사이였다.
종합하면 조던은 분명 까다로운 팀 동료이자 기대치가 높은 리더였지만, 나쁜 동료는 결코 아니었으며 오히려 역대 최고의 리더 중 하나였다. 조던이 동료과 겪은 갈등 중 유일하게 끝까지 봉합하지 못한게 바로 콰미 브라운과의 관계였는데, 콰미와는 여러모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일단 콰미와는 거의 부자지간 정도 나이 차이가 있었고, 80년대에 거친 스타일과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데다 정신적으로 유약한 콰미와는 상극이었다. 실제로 이미 역대 최고 선수로 인정받는데다가 팀 스태프들조차 두려워하던 조던은 어린 콰미에게 너무나 큰 벽이었다. 피펜조차 무섭게 갈구던 조던이었지만 차이라면 피펜은 불과 세 살 차이에 데뷔년도도 3년 차이로, 무서운 선배지만 그래도 악으로 깡으로 버틸 수 있다면 콰미는 그야말로 농구계 최고의 전설로부터 갈굼당하는 위치였다는 것. 게다가 피펜보다 콰미의 멘탈이 훨씬 약한 것도 있었다. 성격이 최악으로 안 맞는 관계였던 것. 카트라이트 같은 베테랑이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불행히도 당시 워싱턴에는 퇴물이거나 존재감이 없는 베테랑이나 어린 선수들뿐이었다. 02-03시즌에 찰스 오클리가 합류하긴 했으나 이 양반은 티맥한테도 한 소리 할 정도로 조던 못지 않는 성깔을 지녔다. 결국 둘에게 최악의 환경이었던 것.

9.2. 독한 놈 마이클 조던


어떤 일을 하기에 앞서 스스로 그 일에 대한 기대를 가져야 한다.

You have to expect things of yourself before you do them.

나는 농구를 시작한 이래 9,000번 이상의 슛을 놓쳤다. 나는 거의 300번의 경기에서 졌다. 나는 26번의 경기를 결정짓는 위닝샷을 놓쳤다. 나는 실패하고, 실패하고, 또 실패했다. 그것이 내가 성공한 이유다.

마이클 조던, 나이키 광고에서.

마이클 조던을 이기기 위해서는 그의 심장을 도려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그것이 그의 최고의 재능이기 때문이다. (그의 강함의 비결은) 그의 배짱에, 그의 마음 속에 있다.

You're gonna have to cut Michael Jordan's heart out to beat him. Because, people don't understand that's his greatest talent. It is in his inner gut, it is in his inner heart,

조지 칼 1992~1998 시애틀 슈퍼소닉스 감독

물론, 천부적인 재능과 하늘이 내린 육체가 있었으나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엄청난 노력을 더했다. 이 모두가 조화를 이루면서 더 높은 위치까지 올라간 인물이다. 특히, 이런 노력의 바탕에는 그 스스로가 지닌 엄청난 승부 근성과 경쟁심이 있었다. 타인의 비난이나 태클에 지독할 정도로 집착해서 그걸 앙갚음을 해주는지라...[135]
숱한 사례가 있었지만, 몇 가지만 이야기하면
  • 유타와의 경기 중 존 스탁턴을 넘어 덩크를 꽂아 넣자, 관객이[136] "네 덩치에 맞는 놈이랑 싸워라, 비겁한 XX야!" 하자 바로 그 다음 공격에서 유타의 센터 데멜빈 터핀(211cm) 위로 덩크를 꽂아 넣고 관객 앞으로 가서 "이 정도 덩치면 되나? (Is that big enough?)" 한 적이 있다.
  • 93 플레이오프에서 만난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가드 제럴드 윌킨스가 경기 전에 "누구도 조던을 막을 수는 없지만, 내가 그나마 좀 잘 막았다." 라고 인터뷰한 것에 대해 43득점을 퍼부으며 친히 화답한 적이 있다. He can't guard me![137]

  • 1995시즌, 밴쿠버 그리즐리스와의 경기에서 그리즐리스가 4쿼터 시작 후 11:2로 앞서나가자, 그리즐리스 선수 데릭 마틴(Derrick Martin)이 마이클 조던에게 “우리가 오늘 널 박살낼 거라고 했지?(I told you that we’re gonna beat you tonight.)”라며 조롱했다. 이 말을 듣고 빡친 조던은 4쿼터 6분동안 19득점을 꽂아 넣으며 팀의 승리를 이끌었는데, 위의 영상 3분 50초쯤 보면 경기 중 덩크를 성공시키고 밴쿠버 벤치로 가서 "입 닥쳐, 이 X만한 개자식아(Shut up, you little bitch)."라고 말하는 게 나온다.
  • 1988년 플레이오프 1라운드 도중 훗날 불스에서 재회했으며, 절친한 사이였던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가드 론 하퍼가 "그(조던)는 나를 상대론 50점을 넣은 적이 없다"며 가벼운 신경전을 벌이자 다음 경기인 2차전에서 하퍼를 상대로 무려 55점을 퍼붓기도 했다.[138]
  • 그 유명한 눈 감고 자유투 시전도 있다. 해당 경기는 덴버 너기츠와의 경기였는데, 당시 신인이었던 덴버 너기츠의 센터 디켐베 무톰보가 조던을 향해, "아무리 당신이라도 눈 감고 던지지는 못할 걸?" 이라고 도발하자 "엉, 그래?"라고 해맑게 웃으면서 되갚아준 것이다. 그 후 조던이 툭 던진 것이 그 유명한 "Welcome to the NBA".[139][140] 그런데 훗날 방한한 무톰보와의 인터뷰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사실 먼저 도발한 것은 조던 쪽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141]
  • 그 외에도 무톰보와의 일화로는 어느 날 라커룸에서 무톰보가 조던 면전에서 "마이클은 내 앞에서 덩크를 성공시킨 적이 없다."고 도발한 일이 있었다. 조던이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일축하자 무톰보는 "그럼 스카티한테 물어보든가"라며 조던의 속을 긁어 놨고, 조던은 이를 기억해두고 있다가 96/97 시즌에 무톰보에게 인 유어 페이스 덩크를 성공시켰다. 이에 그치지 않고 평소 무톰보가 즐겨하던 까딱까닥 세레머니를 역으로 먹이는 등 쪼잔함을 여실히 보여주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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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경기의 슛차트
누가봐도 자유투 레인으로의 돌파를 자제하고 대놓고 점프슛만 노리고 있다. 위의 인터뷰를 포함해 여러 정황을 종합해 보면, 조던은 조지 칼의 발언을 들은 후, 의식적으로 돌파를 자제했고, 기자를 포함한 당시 관련자들도 전부 그렇게 생각을 했으며 실제로 점퍼로만 39점을 박아버렸다. 따라서 다소 과장된 측면은 있으나, 스토리의 뼈대는 사실이다. 당장 이 일화의 위아래로 줄줄이 적혀 있는 것만 봐도 알겠지만 조던은 역대 그 어떤 선수들보다도 이런 에피소드가 많다! [143]
  • 96/97시즌 뉴욕 닉스의 감독 제프 밴 건디는 불스와의 경기 전 한 인터뷰에서 '조던이 의도적으로 다른 선수들과 친분을 쌓고 경기에서는 그 점을 역이용하여 손쉽게 플레이를 하고 있다. 더 안타까운 점은, 많은 선수들이 조던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NBA 선수라면 그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조던이 경쟁심을 가지고 경기에 임하는 만큼 다른 선수들도 조던을 상대할 때 그에 못지 않는 경쟁심을 가져야 한다.' 라고 말했다. 당시 상황을 설명하자면 뉴욕 닉스는 NBA 전체 팀 수비 1위팀의 면목을 자랑하고 있었고 불스의 데니스 로드맨과 론 하퍼는 징계와 부상으로 결장했다. 게다가 스타팅 라인업의 랜디 브라운, 제이슨 캐피는 거의 지극히 평범한 실력의 벤치멤버들[144] 결과는 88-87 불스의 승리. 조던은 친히 닉스에게 51득점, 4어시스트, 2스틸을 퍼부어 주셨다. 게다가 덤으로 매치업 상대 앨런 휴스턴에게는 필드골 5-18, 성공률 27%라는 아름다운 기록(...)을 남기게 수비해 주셨다. Michael Jordan. Jeff van Gundy Game. 영상에서 51점째를 기록하는 페이드 점퍼를 성공하고서 제프 밴 건디에게 포효하는 부분은 화룡점정. 경기 후 인터뷰에서 조던은 '나는 오늘 밤 어떤 친구도 만들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사실 밴 건디의 해당 코멘트는 억지인 것이, 조던의 친구들은 한번도 그를 슬슬 대한 적이 없다. 조던을 가장 괴롭힌 것은 피스톤즈지만, 1차 3연패 기간에 그를 가장 육체적으로 몰아붙힌 시리즈, 그가 가장 심하게 부진했던 시리즈가 바로 닉스를 상대한 92년 동부 준결승, 그리고 93년 동부 결승이다. 조던의 절친들인 패트릭 유잉과 찰스 오클리가 엄청나게 하드 파울을 해대는 바람에 그는 골밑 돌파를 거의 할 수가 없었던 것. 오클리는 조던을 내동댕이치거나 유잉은 돌파하는 조던의 얼굴을 팔꿈치로 가격하기도 했다. 한번은 조던이 덩크를 하는데 유잉이 뒤에서 밀자(다행히 착지를 잘했지만 잘못하면 다칠 수도 있었다) 조던이 화가 끝까지 나 소리를 지르고 주먹을 휘두르며 유잉에게 다가간 적이 있었다. 스스로의 회고로 "한번은 시리즈 도중 싸울 뻔했죠(At one point in that series, I was ready to go to blows with him)"라고 한 시점. 조던은 NBA에서 친한 선수들이 많았지만 당시는 이런 친분과 상관없이 빡세게 농구했다. 또 다른 예가 붙을 때마다 승부욕을 불태우며 트래쉬 토킹하며 치열하게 맞붙은 찰스 바클리와 조던(바클리는 심판 판정에 항의하며 "저건 파울 맞아요! 저 놈이 마이클 조던이건 아니건요!"라고 빈정거렸다가 테크니컬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조지타운 선후배인 유잉과 알론조 모닝이 있다. 이들은 유잉이 모닝에게 신장 하나를 떼어주겠다고 검사를 받을 정도로 절친했는데, 유잉의 표현의 따르면 자신들은 형제나 다름없지만 코트에선 서로 죽이려고 했다고 한다. 이때로 끝난 게 아니라 은퇴하고 나서도 잊지 않고 있다가 자신의 명예의 전당 입회연설때 제프 밴 건디의 실명을 거론하며 자신은 그저 친구들과 밥한끼 먹으려 했을 뿐인데 그것도 못했고 어쨌든 동기부여가 되었다며 콕 집어 언급했다.
  • 하루는 워싱턴과 홈에서 만났는데,[145] 당시 3핏을 향하던 조던의 시카고가 리그 최약체 꼴등 워싱턴과 경기한 날이다. 이 날은 시카고의 손쉬운 승리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측했지만, 당시 워싱턴의 슈팅가드였던 라브래드포드 스미스한테 조던이 역으로 당하면서 겨우겨우 시카고가 승리를 따냈다.[146] 조던은 정말 모르던 듣보잡에게 털려버린게 너무나도 화가났고 설상가상으로 스미스는 조던에게 "Good game." 이라고 조롱했다고 한다. 열이 정말로 머리 끝까지 뻗친 조던은 이 일을 동료들에게 말하고, 마침 다음 경기가 워싱턴과의 연전이였기 때문에 전날 아무것도 먹지 않으며 워싱턴 전을 준비했다고 한다. 이후 열린 워싱턴과의 경기에선 전반전에만 36득점을 넣으며 31분 47득점 대활약으로 팀의 승리를 이끌어냈다.[147][148] 경기 후 조던은 스미스에게 가서 역으로 "I told you, I'll do it."[번역] 라고 멘트까지 꽂으며 복수에 성공했다...라면 조던의 흔하디 흔한 복수혈전 1 정도겠지만, 후에 데이비드 알드리지가 스미스에게 왜 조던을 도발했냐고 묻자 스미스는 충격적이게도 "난 그런 도발 같은 것을 전혀 하지 않았다." 라고 말했다고. 이 말인 즉슨 조던은 팀동료를 속이고, 자신에게 혹독하게 굶으면서까지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서 자신에게 배로 투쟁심을 자극시켜 복수를 했다는 것 이다.
  • 94/95시즌 야구에서 복귀한 그 시즌 플옵에서 멀어져 가던 시카고 불스를 캐리하여 동부 6번 시드로 플옵으로 이끈다. 이 시기 조던은 기존의 23번이 아닌 45번 유니폼을 입고서 플레이 하였고 동부 컨퍼런스 준결승에서 올랜도 매직을 만난다. 해당 시즌의 올랜도 매직은 샤킬 오닐, 앤퍼니 하더웨이에 불스에서 이적한 호레이스 그랜트를 앞세운 신흥 강호로서 57승 25패의 성적으로 동부지구 1번 시드를 차지한 강팀으로 도약한 팀이었다. 그렇게 만난 올랜도 매직을 상대로 종료 20초 전까지 91-90 으로 앞서 있었으나 이 후 조던이 드리블하며 시간을 보내던 찰나에 닉 앤더슨에게 결정적인 스틸을 당하여 1차전 패배에 결정적인 미스를 범한다. 이 후 닉 앤더슨은 "45번 선수는 23번의 폭발적인 득점력이 없다." 라는 발언으로 조던의 심기를 건드렸고 이 후 조던은 벌금을 감수하고 23번 유니폼을 입고 나머지 시리즈를 치뤘으나 2승 4패로 플레이 오프에서 탈락한다. [149] 이후 절치 부심한 조던이 맞이한 95/96시즌. 불스의 그 72승 시즌이었다. 조던은 올랜도 매직을 이겨야 하는 팀으로 설정하고 시즌 내내 무자비하게 털어버린다. 정규 시즌 1차전은 패배하나 이후 만난 2,3,4차전을 모두 승리하고 그렇게 만난 동부 컨퍼런스 결승에서 올랜도 매직을 스윕하며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렸다. 해당 시즌 올랜도 매직의 전력에 누수가 발생했나 라고 의심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보충하면 해당 시즌 올랜도 매직은 지난 시즌보다 3승을 더 올린 60승 22패의 성적으로 동부 컨퍼런스 애틀랜틱 디비전 수위를 차지한 여전한 강팀이었다. 단지 불스와 조던이 그것보다 더 강력했을 뿐. 매치업 상대인 닉 앤더슨 역시 무자비하게 털어주셨는데 닉 앤더슨의 1차전부터 3차전까지의 FG-FGA를 보면 1차전 0-7 2점, 2차전 3-11 9점, 3차전 6-11 14점이었다. 그리고 4차전은 부상으로 아웃. 조던의 그것은 1차전 9-17 21점, 2차전 9-21 35점, 3차전 5-14 17점, 4차전 16-23 45점이었다. 해당 시리즈의 영상을 보면 1-3차전 동안 눈에 불을 켜고 닉 앤더슨을 막아주시는 마사장님의 위엄을 확인할 수 있고 특히 3차전에서는 지난 시즌의 스틸을 잊지 않고 똑같이 닉 앤더슨의 공을 스틸로 갚아주시는 쪼잔한 모습도 볼 수 있다. 그렇게 아웃된 닉 앤더슨이 빠진 4차전은 최종 목적인 올랜도 매직을 이기기 위해 득점을 퍼붓는 조던의 모습을 감상하실 수 있다. 1차전, 2차전, 3차전, 4차전
마음만 먹으면 꼭 언젠가 그 플레이를 실현한다는 게 조던 최대 강점이다. 실제 조던이 포인트가드를 보던 시즌에는(32.5득점, 8리바운드, 8어시스트, 2스틸, 1블락) 모든 부분 '''초과'''를 찍었을 정도였다. 만약 당시 어떤 기자, 타구단 관계자가 '시즌 트리플 더블은 조던 이라도 무리' 라고 말했다면 분명 어렵지 않게 시즌 트리플 더블을 만들었을 것 이다. 하지만 르브론, 웨스트브룩 유형의 선수들과 달리 조던은 득점력 자체가 팀을 승리로 이끌었고 본인도 잘 알기에 무리해서 다른 부분 스탯을 올리려 하지 않았다.
르브론의 경우 A패스 욕심과 폭탄 돌리기 패스로 보인다는 점에서 커리어 내내 비판을 받았고 웨스트브룩의 리바운드는 거품이 낀 기록으로서 상대방 마지막 자유투시 OKC 빅맨 2명 스크린을 걸고 웨스트브룩이 수비 리바운드를 잡거나 양보로 인해 리바운드를 잡는 등 많은 희생으로 시즌 트리플 더블을 완성한 것으로 의심된다는 점에서 비판을 많이 받았다. 물론 시즌 트리플 더블은 그 의미가 크기에 시즌 MVP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던의 89시즌 당시 트리플 더블이 무서웠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조던은 '''원래 트리플 더블에 목메는 선수가 아니었다'''. 조던은 89시즌 이전까지 통산 트리플 더블이 네 시즌 동안 5번, 이후론 10시즌 동안 8번에 불과했다. 이 시즌에 65경기를 소화한 시점까지 그는 32.6득점 7.6어시스트 7.6리바운드를 기록하고 있었다. 트리플 더블은 5개. 그러나 언론에서 득점만 뛰어날 뿐, 어시스트와 리바운드가 약하다는 기사를 트리플 더블을 바탕으로 냈다. 조던은 이 기사를 접하자마자 이에 시위하듯이 나머지 '''16게임 동안 10개의 트리플 더블을 찍었다.''' 정확히는 7게임 연속 트리플 더블 후 한경기 쉰 후에 3연속 트리플 더블을 달성했다. 말 그대로 원하면 원하는 대로 스탯을 찍은 것이며, 더욱 무서운 건 그 기간 동안 득점은 그대로였다는 점이다. 심지어 11경기 중 10개를 하던 (그 중 7개 연속) 기간에는 33.6점 11.4어시스트 10.8리바운드, 득점/리바운드/어시스트가 모두 올랐다. 이로 인해 해당 시즌 조던은 32.5득점, 8어시스트, 8리바운드를 달성했다. 물론 여기까지는 공격과 리바운드 관련 스탯만 본 것이다. 조던이 88시즌 수비왕 및 스틸왕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당시 그가 리그 최고의 수비수였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공격은 관중을 부르고 수비는 승리를 부른다." 수비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인용되는 이 격언을, 문자 그대로 모두 달성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승부근성과 경쟁심이 너무 지나쳐서 병적일 정도였다는 평까지 듣는다. 심지어 플레이오프 중간중간 쉬는 날에 도박이나 골프, 여타 스포츠를 통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승부 근성을 불태웠다고 한다. 뭐 이렇게 보면 도박 중독(…)에 가까워 보이고, 이런저런 루머[150]도 무수히 많았지만 스포츠 도박은 전혀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덕분에 자기 자신의 본업이나 생활에는 별 영향을 미치지는 않은 걸로 보인다.
조던은 98년 은퇴 당시 5억 달러였던 재산을 2014년 기준으로 10억 달러까지 불렸다. 조던이 도박빚에 시달릴 정도로 재산관리를 못하는 사람이었다면 벌써 파산했어야 정상인데, 실제로 연봉으로만 2억 달러를 번 아이버슨을 포함해 상당수 NBA 선수들이 은퇴 후 재산관리를 못해서 파산했다. 즉, 실제로 조던이 도박중독이었다면 아무리 재산이 많아봤자 지금쯤 다 날렸을 것이다. 조던이 도박을 즐긴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도박과 아버지 살해건, 야구 도전을 연결시키는 건 어디까지나 가십성 음모론에 불과하다.
실제로 이런 식의 기사는 주류 언론에서는 다루지도 않으며 가십성 인터넷 언론에서나 나오는 얘기다. 이런 매체들의 신뢰도는 그야말로 찌라시 수준. 엘비스 프레슬리가 살아있다는 음모론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심지어 NBA 사무국이 조던의 아버지를 청부살해했다는 이야기까지 떠돌기도 하는데 NBA 사무국이 이 정도 사건을 저지르고 묻어버릴 정도로 파워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NBA가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전혀 이해를 못하는 꼴. 참고로 NBA 사무국의 최정점에 있는 총재의 연봉이 800만 달러로, NBA 선수 중에서는 평균(5~600만)보다 약간 많고, 스타팅 멤버급의 선수의 연봉도 되지 못한다. NBA는 구단주들의 돈으로 돌아가는 리그다. 그리고 돈줄을 쥐고 있는 이들이 가장 큰 권력을 쥐고 있는 것은 현대 사회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진리이다. NBA 총재는 리그가 잘 돌아가게 하기 위해 구단주들이 뽑은 월급쟁이 사장이지, 결코 절대 권력자가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승부 근성을 바탕으로 NBA 역사상 가장 뛰어난 클러치 플레이어로 손꼽힌다. 상대팀은 몇 초가 남건 2점차건 3점차건 경기 종료 직전 그가 볼을 잡았다 하면 에워싸기 일쑤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차례 팀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그 스스로가 클러치 타임의 플레이를 설명할 때조차 "그 순간은 나 스스로가 가장 유리하다고 느낀다" 라고 할 정도.
그의 클러치 능력이 가장 빛났던 곳은 플레이오프와 파이널 무대였다. 실제로 매직 존슨, 래리 버드 등의 레전드들부터 코비 브라이언트, 르브론 제임스 등 현대의 위대한 선수들까지 역대급 선수들도 거의 전부 플레이오프에서 자신의 팀보다 낮은 전력의 팀에게 패배하는 "업셋(upset)" 경험이 한두번씩은 있다. 그러나 조던은 13번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동안 단 한번도 업셋당한 적이 없다.[151]
또한, 대부분의 선수들이 수비가 치열해지는 플레이오프에서는 득점이 정규시즌과 대비해 그대로거나 떨어지는 반면, 조던은 정규시즌->플레이오프->파이널로 가면 갈수록 평균 득점이 쭉쭉 상승하는 매우 희귀한 케이스였다. 98시즌엔 정규시즌 득점이 풀시즌 기준으로 신인 시절 이후 최악인 28점대로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오프에선 32.4점, 파이널에선 무려 33.5점을 기록했다.[152]
사실 정규시즌 득점 기록은 윌트 체임벌린이 대부분 앞서지만, 플레이오프에선 윌트조차 비교가 안된다. 플레이오프 득점 기록을 보면 말 그대로 조던의 독무대다. 역대 플레이오프 한경기 최다 득점 기록을 보면 1위, 공동 3위를 포함해 상위 10위까지의 기록 중 딱 절반인 5개가 조던의 기록이다.[153] 플레이오프 때 60점을 넘긴 유일한 선수가 조던과 엘진 베이러뿐이며[154] 현대 50점을 넘긴 횟수만 봐도 조던 8회, 윌트 체임벌린 4회, 앨런 아이버슨 3회, 제리 웨스트 2회이다. [155] 누적 기록의 경우 조던이 179경기밖에 뛰지 않아 그렇게까지 압도적이진 않다. 2017 플레이오프에 르브론 제임스가 조던을 제치고 역대 1위에 올랐을 정도. 하지만 평균에선 33.4점으로 압도적인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역대 유일하게 플레이오프 평균이 30점이 넘는 선수'''로 다른 정상급 득점원들(제임스 28.4점, 제리 웨스트 29.1점, 케빈 듀란트 28.8점 등)과는 말 그대로 '''단위가 다르다.
게다가 듀란트, 제임스 등은 현재 커리어 중반이라 은퇴할 때쯤 되면 평균이 더 떨어질 게 확실시되므로... 사실 현 상위 5인 중 210경기 미만으로 뛴 유일한 선수가 조던일 정도로 적게 뛴 선수였음에도, 20년 가까이 통산 기록 1위를 기록했다는 것만 봐도 그의 평균이 얼마나 무지막지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의외로 NBA 파이널 1경기 역대 1위는 조던이 아닌 엘진 베일러가 갖고 있는 61점 기록이다. 조던은 55점으로 릭 베리와 함께 공동 2위. 그러나 다른 기록들은 여전히 압도적이다. 그가 93파이널에서 기록한 평균 41점은 당연히 역대 1위이고, 연속 20점 이상 경기 (35경기)와 연속 40점 이상 경기(4경기) 기록을 모두 보유하고 있다. (연속 30점 이상은 엘진 베일러가 보유)위에 언급됐듯 조던은 4경기 연속으로 40점을 넘겼는데, 그 외에 한번이라도 연속 40점을 기록한 선수는 웨스트와 샤킬 오닐 뿐이다.
조던의 플레이오프 통산 평균은 33.4점, 파이널 평균은 33.6점으로 다른 선수들이 근접조차 못하는 압도적인 1위이다.
이러한 경쟁심과 승부 근성을 바탕으로 쌓아올린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도 엄청나서 상대 선수와 팬들의 기를 압도적인 플레이와 트래시 토크로 죽여버리곤 했다. 일례로 애틀랜타 호크스, 마이애미 히트 등에서 뛰었고, 1994 캐나다 농구월드컵 드림팀 2기의 일원이었던 스티브 스미스와 매치업 했을 때, 조던이 경기중 갑자기 '38'(Thirty eight)을 흥얼거렸다. 스티브는 영문을 몰라 "너 뭐하냐?" 했는데 곧 '36'... '34'... 그렇다, 그날 조던의 목표 득점(…)이었다고 한다. 물론 달성했다.[156]
그 외에 "나 오늘 50점 정도 넣을 것 같은데, 자네 아들이 보고 있다면 미안하게 됐어 낄낄"(...) 실제로 조던은 당대 최고 트래쉬 토커였던 게리 페이튼과 버금가는 트래쉬 토커였다.[157] 이렇게 보면 정말 어그로 투성이인 인물이지만, 실력이 너무도 아득해서 상대팀 팬들조차도 욕을 퍼붓다가 그가 플레이를 펼치면 넋을 잃고 바라봐야만 했다.
스포츠 일러스트지와의 악연도 유명한데 자기 야구 선수 시절 악평을 했다고 93년부터 지금까지 인터뷰를 거부하고 있다. 50세 생일날 표지는 허락했지만 인터뷰는 거부했다고(...).
2013년 2월 17일 50세 생일을 맞아서 이런저런 칼럼이 전 세계에서 폭주했는데 아래의 칼럼을 읽어보면 조던의 경쟁심이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그것들로 인해 그가 겪고 있는 나름의 애환을 살펴볼 수 있다. 인간미가 느껴지는 조던의 모습을 보고 싶은 팬이라면 추천.1편2편3편

9.3. 조던의 피해자


압도적인 시대의 지배자였던 만큼, 조던만 없었다면 우승이나 개인 수상에서 더 큰 업적을 세웠을 레전드들이 많다. 물론 해당 목록의 선수들이 조던을 증오한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고 오히려 리스펙하거나 절친한 사이인 경우가 많다.

  • 도미니크 윌킨스: 소속팀 애틀랜타 호크스도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에 조던과 전성기가 겹치며 번번히 좌절을 맛봤고, 개인적으로도 조던에 밀려 득점 2위만 3번을 기록했다.[158] 거기에 덩크 콘테스트에서마저도 조던에 밀려 2위를 기록하고 만다. 심지어 이 경우는 윌킨스가 홈 어드밴티지에 밀려 조던에게 챔피언을 내줬다는 얘기도 있어서 억울함은 2배... 이때 도미니크 윌킨스는 본인 커리어에서 역대 최고라고 할 수도 있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86년에 팀동료 스퍼드 웹보다 객관적으로 더 뛰어난 덩크를 보였음에도 단신 임팩트 때문에 패하고, 87년에 부상으로 결장했던 윌킨스는 우승 트로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지금 봐도 입이 떡 벌어지는 덩크들을 연달어 선보였는데, 마지막에 본인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투핸드 파워 윈드밀을 선보였다. 전에 시도한 조던의 투핸드 rock-the-cradle 덩크가 예상외로 48점을 받았기에 이 덩크가 만점이라면 윌킨스의 우승이 확정되는 상황이었고, 당연히 저건 만점감이었기에 다들 윌킨스의 우승을 예상했다. 그러나 이 덩크가 말도 안되게 45점을 받아서 윌킨스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고, 심지어 시카고의 관중들조차 야유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뒤이어 조던이 그림같은 자유투라인 덩크를 성공시키며 우승. 사실 당시는 같은 덩크를 계속 해도 페널티가 별로 없는 시대이기도 했고 (이 때문에 1990년에 윌킨스와 붙어 아깝게 우승을 놓친 케니 스미스는 "도미니크가 나랑 붙었을때 똑같은 덩크를 세번했는데 똑같은 점수를 받았다"고 야유했다) 도미니크가 윈드밀 일변도인 성향이 없잖아 있지만, 이날 도미니크는 똑같은 덩크를 거의 하지 않았고, 백보드에 볼을 튕겨 원맨 앨리웁을 하는 등 지금까지 기억되는 수많은 덩크를 선보였다. 특히 원맨앨리웁에선 방송국에서 그의 높이를 자체측정했는데 (물론 첨단 기술은 아니고 그냥 녹화화면 보고 한거라 정확하진 않다) 무려 10피트 2인치 (약 310cm)가 나왔다. 심지어 조던은 자유투라인 덩크를 준결승과 결승에서 두번했다. 그만큼 윌킨스는 역대급 퍼포먼스를 보이고도 우승을 강탈당한 거나 마찬가지라 그는 이때 준우승과 86년 준우승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그가 자주 하는 말이 "나 4번 우승했는데 두번만 인정해주더라고." 다만 이게 논란이 적게 된 이유는 어쨌든 조던도 역대 최고의 덩커 중 하나인데다가 가장 중요한 마지막 자유투라인 덩크가 아름답기까지 할 정도로 완벽하고 멋진 덩크라 (조던은 덩크 콘테스트에 나올때마다 최소 1번 이상 자유투라인 덩크를 했는데 이 정도로 완성도가 높은 적은 없었다) 그의 우승이 충분히 납득이 갔기 때문. 이유가 어찌됐든 윌킨스가 당시 기준으로 만점이 당연한 덩크를 하고도 45점이란 말도 안되게 낮은 점수를 받고, 이 때문에 우승 기회가 사라진 건 맞다. 여담이지만 85년에 루키 조던과 덩크 콘테스트 결승에서 붙었을때는 윌킨스가 우승했다.
  • 아이재아 토마스: 토마스를 위시한 배드 보이스는 조던의 팀을 세 번 연속으로 탈락시키는 등, 조던의 성장 과정에서 있던 가장 큰 걸림돌이자 조던의 아치 에너미라 해도 좋을 정도였지만, 결국 조던의 성장으로 인해 스윕당하며 쓰리핏에 실패하는 결과를 맞는다. 토마스 본인은 조던의 인생 첫 올스타전의 Freeze-out 사건부터 시작해서 계속 악연으로 얽히게 되었고, 결국 조던을 중심으로 구성된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1기 드림팀에 합류하지 못하는 결과를 맞았다.
  • 찰스 바클리: 1993 NBA 파이널에서 역사상 최고의 파이널 퍼포먼스에 당하며 첫 번째 쓰리핏의 제물이 된 걸로 유명하지만, 그 전에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에 있을 때부터도 심심하면 털렸다. 다만 사적으로 바클리는 조던의 절친이었다.
  • 칼 말론 & 존 스탁턴: 조던의 두 번째 쓰리핏의 제물들. 팀과 본인들의 전성기가 하필 조던의 전성기와 겹치는 바람에 2연속 준우승이라는 쓴맛을 맛보게 되고, 특히 말론은 1998 파이널 6차전에 조던에게 결정적인 스틸을 당하며 패배의 원흉이 된 바 있다. 말론은 이후 말년에 레이커스로 헐값에 이적하면서까지 우승을 노렸으나, 피스톤스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여기에 더해 개인 기록의 측면에서는 말론은 조던에게 밀리는 바람에 득점 2위만 4차례 달성한 바 있다.
  • 코비 브라이언트: 조던과 가장 유사한 스타일의 선수인데, 하필 조던 바로 이후의 시대에 활약했던 선수라 모든 면이 조던과의 비교 대상이 된 측면이 있다. 물론 상술했듯 둘의 관계는 매우 좋았다.
  •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감독 레니 윌킨스, 리더 마크 프라이스를 필두로 한 젊고 떠오르는 강팀이었지만, 조던과 전성기가 겹친 것이 불행이었다. 88년부터 93년까지 4번 붙어 전패하였고, 특히 89년에는 The Shot으로 대표되는 전설적인 업셋의 희생양이 되었다. 캐브스 입장에서 조던은 사실상 르브론 제임스 등장 이전 팀 최대 전성기를 낭비하게 한 원흉이라 부를 만하다.[159]
사실 이들에게 제일 억울한 점은, 해당 문단의 다른 선수들과는 달리 조던의 라이벌 내지는 희생양으로 언급조차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안습.
  • 패트릭 유잉: 해당 분야 끝판왕. 조던의 불스와 플레이오프에서 5번 붙어서 전패하였다. 심지어 조던이 (1, 2차 모두) 은퇴하자마자 파이널에 올라간 것을 보면[160], 조던만 없었다면 스포츠에 만약은 없다지만 우승 한번은 해보고 선수 평가도 더 올라갔을지 모른다. 유잉에게 우승의 적기는 바로 93시즌이었다. 이때 유잉은 퍼스트팀 하킴 올라주원과 별 차이가 없는 리그 최고의 센터 중 하나였으며, 팀도 특급 롤플레이어 찰스 오클리, 전 시즌에 가능성을 보이다 이제 완전히 믿음직한 조력자가 된 존 스탁스 등을 위시한 좋은 조력자들과 팻 라일리의 지도로 전력이 절정 (60승)에 오른 시점이었다. 사실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못지않게 조던을 괴롭힌게 바로 이 닉스팀으로 93년 시리즈에 조던은 평균 32점을 넣었지만 야투율 40%에 그쳤고 연패한 1,2차전에선 거의 골밑으로 못 들어가는 등 최악의 부진에 시달렸다. 끈적끈적하고 거친 닉스를 당해낼 동부팀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유일하게 이들의 대항마가 될 수 있는 건 유잉을 맞상대할 수 있는 서부의 거물 센터들 뿐이었지만 (데이빗 로빈슨과 하킴. 오닐은 이때 동부였고 플옵 실패), 이때 서부 결승에 오른 두 팀 (피닉스, 시애틀)은 모두 센터가 매우 약하고 골밑수비가 없다시피한 팀이었다. (시애틀의 수비는 매우 좋지만 골밑수비는 약했다) 두 팀 중 누가 파이널에 올라왔어도 유잉이 날뛰었을 것이다. 게다가 두 팀은 빠른 페이스의 공격팀이라, 이들의 공격을 삐걱거리게 할 만한 강한 수비팀이나 특급 수비력을 지닌 센터에게 약하다. 이 때문에 94년 플옵에선 소닉스가 60승 넘게 거두고도 포스트시즌에 턱걸이 한 덴버 너깃츠에게 업셋 당한 적이 있다 (디켐베 무톰보의 존재가 컸다) 게다가 닉스가 최종전을 세번이나 치러야했던 94플옵과 달리 이때 이들은 1,2라운드에서 각각 1패만을 안고 동부 결승에 안착했다. 또한 유잉은 부상 때문에 30대에 접어든 이후 동년배 라이벌들 (하킴, 조던, 말론, 스탁턴)에 비해 빨리 기량이 줄었기 때문에 아직 최전성기 범위에 있을때 우승을 해야했다. 어떻게 봐도 우승하기 딱 적기인데 조던과 시카고의 존재 때문에 좌절을 겪은 것. 더구나 간과하기 쉬운 사실이지만, 조지타운 대학교 1학년 재학시 NCAA 전국 결승에서 조던에게 결승 샷을 맞고 준우승에 그친 바 있다. 가히 선수생활 시작부터 끝까지를 관통하는 악연.
  • 팻 라일리: 80년대 쇼타임 레이커스를 이끌면서 이미 많은 우승을 맛봤고, 2000년대 이후 마이애미 히트의 수장으로도 우승을 만들며 이미 엄청난 업적을 세웠지만, 90년대에 조던과 플레이오프에서 4번 만나 역시 전패하였다. 문서에도 있지만 닉스에서 2번, 히트에서 2번 만났다. 오죽하면 마이클 조던/어록에도 있지만 "왜 다시 복귀해서 나를 괴롭히는지 모르겠다." 라고 할 지경.

9.4. 넘사벽 인기


  • NBA에서 뛰는 다른 선수들과도 차원이 다른 인기를 자랑했다. 보통 스타급 운동선수라고 해도 비슷한 레벨의 연예인들보다 인지도가 떨어지는데[161] 조던만은 예외였다. 유명한 일화로 불스 선수들이 "누가 더 유명인사를 많이 알고 있나" 내기를 할때 자넷 잭슨에게 전화 걸어 "자넷한테 MJ[162]라고 전해주세요."라고 딱 한마디 해 그녀의 전화를 순식간에 받아내기도. 여담이지만 이 일화를 전한 백업센터 존 샐리(과거 배드보이즈 시절 피스톤즈의 주요 롤플레이어로 활약)는 "우리와 마이클이 차원이 다르다는 걸 실감한 순간이었다."고 전했다.
  • 현역시절엔 무려 9번이나 올스타 투표 전체 1위에 올랐다. 2위는 르브론 제임스로 7회, 3위는 빈스 카터와 줄리어스 어빙으로 각각 4회다.
  • 미국의 여론 조사 기관인 Harris Poll의 자료에 따르면 "가장 좋아하는 운동선수" 문서에서 조던은 1993년부터 2005년까지 단 한번도 빼놓지 않고 1위를 차지했다. 더욱 놀라운 건 이 설문이 시작된 게 1993년이다! 즉, 이 기록이 더 길 수도 있었단 말. 매직이 조던보다 더 인기가 많았다고 볼 근거는 없다. 조던은 1987년도부터 1차 은퇴하기 전인 1993년도까지 연속으로 NBA올스타 투표 1위를 차지했다. 심지어 이때 기간을 보면 조던은 줄리어스 어빙, 아이재아 토마스가 경쟁상대였지만, 이 때 매직이 경쟁한 가드 상대는 인기가 훨씬 떨어지는 케빈 존슨, 알빈 로버트슨, 팻 레버 등이었다. (클라이드 드렉슬러는 매직이 뛰는 동안 한번도 올스타에 팬투표로 선발못됐을 정도로 인기가 훨씬 떨어졌다) 물론 올스타 투표가 인기의 절대적인 척도는 아니지만, 참고자료 정도는 되는데 (중국인들의 몰표를 받은 야오밍같은 케이스가 있지만 당시엔 온라인 투표가 없던 시대니...) 여기서 조던이 훨씬 앞선 것이다. 매직이 조던보다 투표에서 앞섰던 건 조던의 루키시즌은 1985시즌, 부상으로 거의 못 뛴 1986시즌 뿐이었다. 게다가 매직은 1993년 설문에서 순위권에도 못 들었다. 반면 조던의 경우 1993~2003 사이에 두번 은퇴했는데도 한번도 전종목 1위를 놓치지 않았고 2003년에 최종 은퇴한 후에 2004,05년에도 1위였다. 농구선수들 사이에서는 2009년까지 1위였다. 냉정히 말해 매직의 인기도 대단하지만 조던과는 비교대상이 아니다. 사실 매직은 조던의 등장 전까지 가장 인기많은 선수긴 했지만 래리 버드나 어빙처럼 비슷한 수준으로 인기많은 선수들이 있긴 했다. 그러나 조던의 경우 인기 측면에서는 경쟁자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그랜트 힐이 1996년에 딱 한번 근소한 차이로 올스타 1위를 뺏긴 했지만 바로 그 다음시즌부터 다시 1위를 달렸다. 한 마디로 조던의 인기는 같은 운동선수들과 비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매직은 물론이고 조던보다도 더 미디어 노출이 잦은 후대의 선수들조차 전성기 조던의 인기, 그리고 광고수입에는 근접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이 기간중 상당부분 은퇴한 상태였는데 (1993년 1차 은퇴, 1995년 복귀, 1998년 2차 은퇴, 2001년 복귀, 2003년 최종 은퇴) 그럼에도 불구하고 1위를 놓치지 않았단 말. 그러나 2006년부터는 타이거 우즈에게 1위를 뺏기는데 우즈는 2010년까지 1위를 하다가 스캔들로 몰락하고 조던은 2013년에 기어이 1위로 복귀한다.(...) 2014년엔 2위로 내려앉았는데 은퇴한지 11년이나 지난 양반이 아직도 최고의 인기선수 자리를 놓고 다툰다는게... 참고로 조던 외에 1위를 한번이라도 차지해본적이 있는 농구선수는 코비 브라이언트(2010년에 우즈와 공동 1위), 르브론 제임스(2014년에 처음으로 1위)뿐이다.[163]
  • 넘사벽의 인기 덕분에 광고 수익 역시 천문학적인 수준이다. 선수들이 자기 이름을 딴 신발을 출시하는 트렌드를 본격적으로 만든게 조던과 에어 조던 브랜드인데, 당연한 말이지만 에어 조던만큼 성공, 아니 근접하기라도 한 시그니쳐 슈즈(선수 본인의 이름을 단 신발)는 지금까지도 없다. 에어조던이 워낙 인기가 많자 나이키는 조던 관련해 신발, 의류 등을 종합적으로 판매하는 조던 브랜드를 만들기도 했다. 조던은 커리어 통틀어 연봉을 1억달러도 못 받았는데 1998년 은퇴 당시 그의 재산은 5억달러에 달했다. 1998년에는 그동안 박봉에 보상하는 의미로 시카고가 연봉을 3천3백만달러나 쥐어줬지만 그가 번 광고수익은 4천만달러도 넘었다. 은퇴 후에 그 수익은 더욱 늘어나는데 (...) 포브스에 따르면 조던이 2014년에 번 돈은 무려 1억달러에 달한다(!!!) 출처 은퇴 후 1년동안 광고 계약으로 번 돈이 그가 커리어 15년동안 받은 연봉보다 많다는 소리.
  • 참고로 2014년에 조던의 이름을 건 신발은 르브론의 시그니쳐 슈즈보다 8배 많이 팔렸다! 르브론이 현역 중 어떤 선수보다도 많은 신발을 팔아치웠음을 생각하면 충공깽...또한 조던 브랜드는 2014년 미국 농구화 시장의 58%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2013년의 53%보다 더 늘어난 것이다. 나이키 전체로는 미국 농구화 시장의 95.5%를 차지하고 있는데, 넘사벽이란 말도 모자란다. 조던이 처음 나이키와 계약할 때 나이키가 아디다스나 컨버스에 비해 훨씬 작은 기업이었단 걸 생각하면 조던의 영향력이 시장 전체를 움직일 수준이란 말이 된다. 비교를 한번 해보자면, 나이키는 에어조던 11의 새로운 레트로 버젼을 나이키 홈페이지에서 3시간만에 매진 시켰으며 발매 첫 주만에 8천만달러 어치를 팔아치웠다. 반면 아디다스, 언더아머, 리복, 그리고 그외 모든 브랜드들은 2014년 내내 1억9천만달러 농구화를 팔았다. 즉, 에어조던 농구화 하나를 1주일 동안 판 실적이, 미국내 나이키/조던 브랜드를 제외한 모든 브랜드가 농구화를 팔면서 낸 1년 수익의 40%가 넘는다는 소리다. 다시 강조하지만 수많은 에어조던 시리즈 중 단 한종, 이걸 1년 52 주 중 단 1주일동안 판 것만으로 미국내 다른 브랜드들이 1년동안 수십, 수백 종류의 농구화를 팔면서 번 돈의 절반에 가깝게 번 것이다.
  • 나이키에서는 거의 매달 마다 조던 레트로가 나오는데 특히 시카고 불스 시절 신은 1~8,10,11~13 그리고 1998 NBA 파이널 몇 몇 경기에서 착용한 검/빨의 오리지날 색상들은 사실상 농구화의 범주를 넘어선 모델로 일상화로서 폭넓게 사랑받고 있다. 하지만 실제 플레이용으로는 추천하지는 않는다.
  • 위의 얘기의 연장선으로 조던은 2015년에 포브스 세계 억만장자 (billionaire) 리스트에 운동선수 출신으론 최초로 이름을 올렸다. 2018년 기준 그의 재산은 16.5억달러, 세계에서 1477번째 부자다. 2017년 한해에만 3.5억 달러의 재산이 불어났다고 한다. 조던이 2010년에 1억7천5백만 달러를 들여 구단주(대주주)가 된 샬럿 호네츠는 그야말로 대박인데, 성적이 지지부진하긴 하지만 현재 NBA 모든 팀의 가치가 10억달러를 넘기는 트렌드에 발맞춰 현재 가치가 10.5억달러에 달한다(이 중 1억 5천만달러는 부채). 그리고 조던은 현재 팀의 90%를 소유하고 있다. 조던의 무서운 점은 이런 수입이 줄어들 기미가 안 보인다는 것인데 은퇴선수임에도 불구하고 2017년에 NBA에서 가장 비싼 신발 계약을 한 인물로 기록되었다. 그가 조던 시리즈를 포함한 조던 브랜드를 통해 올린 수입은 1년에 무려 1억1천만달러로, 2위 르브론 제임스의 3천2백만 달러를 압도하는 수치다. 물론 받는 돈보다 훨씬 많이 벌어주는데 조던 브랜드의 1년 매출은 28억달러에 달한다. 사실 르브론과 비교가 문제가 아니라 2위 르브론부터 7위 스테판 커리(1천1백만 달러)까지 신발 계약액수를 전부 합쳐야 조던과 같아진다. 코비 브라이언트는 은퇴했음에도 자신의 이름을 단 시그니쳐 슈즈가 발매되어 1천6백만 달러를 벌었는데, 사실 은퇴선수들은 자신의 네임밸류가 떨어지면 신발의 가치도 떨어지고 결국 여기서 오는 수입이 줄게 된다. 2018년 현재 찰스 바클리의 이름을 단 신발이 얼마나 팔리겠는가? 그러나 조던은 네임밸류 자체도 넘사벽이라 계속 새로 출시되는 에어조던 신상들만 해도 가장 비싸고 잘 나가는 농구화 중 하나인데다가 레트로 시리즈가 꾸준히 팔려나가고 있고, 조던 브랜드 자체가 패션/스포츠 브랜드로서 상당한 위상을 차지하기 때문에 말 그대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이다. 게다가 NBA가 망하지 않는 한 샬럿 호네츠 구단의 가치도 지속될테니 조던은 상당히 안정적인 재정적 기반을 갖고 있는 셈이다.
  • 유튜브에 불스시절 조던의 경기들은 대부분 있다. 플레이오프, 파이널은 전부 있으며, 정규시즌 주요경기도 상당히 많은데 여기서도 조던의 위엄을 느낄수 있다. 리그패스의 도입 전의 1980, 90년대 선수들의 영상은 비교적 한정되어있고 파이널 혹은 주요 플레이오프 경기만 올라와있는데 반해 조던은 너무나도 쉽게 원하는 경기들을 찾을 수 있다. 또한 덩크모음, 페이더어웨이, 풋워크, 리벤지 플레이, 블락, 플레이오프 및 파이널에서의 모든 득점, 심지어 조던이 블락을 당하는 플레이까지 편집된 하이라이트 등 다양한 주제로 편집된 영상들이 수시로 업데이트 되고 있다.
  • NBA 카드에서도 특별하다. 한국에서도 1997년 외환위기 시점까지 NBA카드 수집이 매우 인기있었다. 현재는 '파니니' 라는 카드 제작사가 NBA와 독점 라이선스로 공급 중 인데 과거 레전드 중 조던만 나오지 않고 나올수 도 없다. 현역 선수들은 당연히 전체계약으로 카드가 나오지만 은퇴한 선수들의 경우는 카드사가 선수별로 계약을 맺어 나오는데 매직, 버드, 오닐, 드렉슬러, 말론, 키드, 피펜, 페니, 맥그레디 등 대부분의 과거 레전드 선수들도 만날 수 있으나 조던은 현역시절 다른 카드제작사인 '어퍼덱'과 계약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물론 1980-90년대에도 플리어/스카이박스, 탑스 등 다른 제조사에서 공급한 일반 카드에도 조던은 등장했지만 특수한 카드들(유니폼 조각이 들어간 카드, 직접 싸인한 카드)에서는 조던을 발매할 수 없었다. 따라서 과거 어퍼덱에서만 제작한 유니폼 패치카드, 싸인 카드들은 현재 이베이에서 엄청난 고가로 매매가 되고 있고 약 20년 전의 카드이지만 디자인과 퀄리티는 지금의 것도 비교해도 손색이 없으며 무엇보다 실제 경기에서 착용한 유니폼을 잘라 카드안에 집어 넣고 소량생산이기에 조던 뿐만 아니라 다른 선수들도 그 희소성을 인정받고 있다.
  • 동명이인으로 배우 Michael Bakari Jordan이 있다. 이 배우도 2015년 판타스틱 포의 휴먼 토치로 나오는 등 나름 유명한 젊은 (1987년생) 배우지만 농구선수 조던이 워낙 넘사벽으로 유명한지라 마이클 조던이라고 하지 않고 꼭 미들네임까지 넣어[164] 마이클 B. 조던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구글에선 연관검색어로 "마이클 B. 조던과 마이클 조던과의 관계"가 아직도 뜰 정도(...). 재밌게도 마이클 B. 조던도 농구실력이 상당해서 매년 NBA에서 올스타 주간에 개최하는 연예인 농구대회에 단골로 참가한다. 참고로 인기를 몰아 NBA 2K17에 마이커리어에 출연하게 됐고, 오렌지쥬스 듀오로 출연하여 게임 내에서 서로 플레이 할 수 있다. 2017년에는 블랙 팬서에 메인 악역인 킬 몽거로 분하여 국내에서의 인지도도 크게 올랐다.
  • 1997/98 시즌 시작 전 프리시즌으로 유럽에서 유럽클럽팀과 경기한 적 이있다. 상대팀은 PSG Racing(프랑스 축구클럽 PSG의 산하에 있는 농구팀인듯.) 으로 조던이 공만 잡아도 엄청난 환호가 나왔다.
  • 여담으로 보안업체 SplashData에서 발표한 최악의 패스워드 리스트에서 27위에 랭크되어, 인간 이름 고유대명사 중에서 가장 높은 순위를 차지했다. 즉, 마이클 조던 23은 사람들이 비밀번호로 너무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사람 이름을 사용한 비밀번호 중에서 가장 보안성이 나쁘다는 의미다. 그의 명성의 위상이 어떤 지를 짐작해 볼 수 있는 사례다. 참고로 등번호 23번을 뗀 그냥 '조던'은 33위 였다. 혹여나 로그인 비밀번호로 jordan23 이나 jordan을 사용하고 있다면 비밀번호로 고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출처 기사
  • 마이애미 히트의 마이클 조던 영구결번식은 조던의 최종은퇴시즌인 2002-03시즌에 이뤄졌는데 공식적으로 영구결번의 이유는 "마이클 조던의 위대한 업적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였지만 실제론 조던의 인기로 좀 득보려는 게 아니었나 하는 시각도 많다. 실제로 당시 히트는 25승으로 최악의 시즌을 보내고 있었으며, 결국 팻 라일리는 감독 자리에서 내려왔다.
  • 새로운 스타가 나타날 때마다 수없이 비교기사와 논쟁이 벌어지고 있으며 현 시대의 선수들이 기록 하나씩 세울 때마다 3~5위권 이내에 하다못해 10위권 이내에 반드시 이름이 들어가있어 NBA팬들을 늘 경악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하는 선수이기도하다. 이렇게 기록지에서 갑자기 불쑥 튀어나오는 사람들로는 조던과 압둘 자바, 체임벌린이 가장 유명하다.
  • 도저히 넘을 수가 없는 영웅적인 스토리와 우승 6회(쓰리핏 2회) 파이널 MVP 6회라는 무지막지한 기록을 세워놓는바람에 [165] 그만큼 다른 선수들의 팬에게서 미움을 많이 사는 선수이기도 하다. 이 부류의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것이 필 잭슨, 스카티 피펜, 데니스 로드먼의 과대평가. 필 잭슨은 조던과 함께 있을 시절에는 젠마스터는커녕 막 감독을 시작해 조던 심기를 거슬리면 모가지가 날라갈 초짜감독이었고[166] 피펜은 조던이 직접 신인시절에 자유시간에도 끌고 다니면서 연습으로 키워낸 선수인 것을 생각해보면[167] 조던의 기록이 그 당시의 주변 인물들로 인해서 폄하될 이유는 없다.
  • 그의 인기 때문에 마지막 시즌일 거란 예상이 지배적이었던 97-98시즌 당시 애틀란타 원정경기에서 호크스는 평상시 경기장이 아닌 풋볼 경기장인 조지아 돔에서 경기를 치렀는데, 통상적인 NBA경기 관중수 (2만명 언저리)의 세배가 넘는 6만2천46명이 입장했다. 이는 당시 NBA 기록이었으며 12년 가까이 남아있다가 2010년 올스타전 (10만명 이상)으로 깨졌다. 무서운 건 저 6만명 이상도 관람환경 때문에 입장을 제한해서 나온 수치로 [168] 당시 관계자 인터뷰로는 티켓을 더 풀었으면 훨씬 더 많이 왔을 거라고...

9.5. 샘 스미스와 "조던 룰즈" 논란


많이들 알려있다시피 92년 당시 시카고 트리뷴의 샘 스미스 기자가 펴낸 "Jordan Rules"에서는 조던의 가혹한 면, 빌 카트라이트와 갈등을 포함해 불스 팀 내에서 여러 인원들간의 갈등에 대해 상세히 적혀있다. 사실 책을 전부 읽어보면 알겠지만 스미스가 조던을 쓰레기로 묘사한 것은 결코 아니며 그의 위대함과 더불어 그의 인간적인 면에 대해 조명한 것에 가깝다. 카트라이트와 갈등을 하다 결국 화해하고 그를 인정했으며, 제리 크라우스와의 갈등도 크라우스의 잘못한 면들도 소개하며, 미디어에서 다뤄지지 않은 조던의 인간적인 한계를 다룰 뿐이지 결코 조던을 악인으로 그리고 있진 않다.
사실 지금에 와서는 "쪼잔왕" 이미지가 강한 조던이지만 90년대 초반, 그리고 조던 룰즈가 발매된 이후에도 그가 불스에서 은퇴하기 전까지 조던의 이미지는 완벽에 가까웠다. 나이키와 게토레이, 맥도날드 등 그의 메인 스폰서들은 잘생긴 외모와 화사한 미소를 가진 조던을 친근하고 상냥한 사람으로 이미지 메이킹 했으며, 실제로 그는 팬들을 대할 때 대부분의 경우 이런 이미지에 맞춰 친절하게 대했다. 그가 항상 입고 다닌 깔끔한 정장도 여기서 나온 것. 조던의 승부사로서 면모는 농구계에선 다들 알고 있었지만 대중들에게 널리 퍼진 것은 00년대 이후였고 워싱턴 시절부터는 다들 아는 사실이 되었다.[169]
그런 만큼 그의 인간적인 모습을 그린 책의 충격은 컸다. 발매 직후 제리 크라우스필 잭슨을 사무실로 불러 책에서 인용한 부분들을 읽어주며 "누가 준 정보같냐"고 물었으며, 팀 내에서 서로에 대한 의심이 퍼졌다고 한다. 실제로 이 책이 풀린 직후인 92-93시즌 당시 팀이 67승에서 57승으로 추락한데에는 팀케미스트리 붕괴가 컸으며, 여기에 조던 룰즈 이후 어수선한 분위기도 한 몫한 것으로 보인다.[170][171]
샘 스미스는 시카고 트리뷴에서 불스를 맡기 전 의혹들을 파헤치는 탐사보도 기자였으며, 이 때문에 스포츠 측면에서 접근한 다른 기자들과 달리 불스의 어두운 면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트리뷴에 79년 입사했을 당시 정치/사회부 기자였으며 트리뷴에 오기 전에도 하원 출입기자였다. 83년도에 스포츠를 담당하기 시작했고 87년부터 불스만 담당한 것.
당시 스미스는 조던을 포함한 불스 멤버들과 편하게 얘기하는 사이였지만, 가장 친했던 선수가 호레이스 그랜트였기 때문에 그가 정보를 제공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았고, 현재도 받고 있다.
여기에 대해 그랜트는 마이클 조던 - 더 라스트 댄스에서 "아닙니다. 나와 내 전 동료들과의 관계에 대해 샘 스미스에게 제보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가 샘과 매우 친하기 때문에 저를 희생양(scapegoat)로 삼는데, 뭐 그러든지요(so be it)."이라고 딱 잘라 부인했다.
BJ 암스트롱은 같은 다큐멘터리에서 "호러스 뿐일리는 없어요. 다양한 출처가 있었겠죠. 코치진, 구단주, 경영진일 수도 있고요."라고 했으며, 윌 퍼듀는 "우리(불스)가 우승을 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다들 마이클 얘기를 하고, (그랜트를 뺀) 다른 사람들 얘기를 하기 시작했죠. 호러스가 이것 때문에 정말 열 받았던 것 같습니다. 사기당한 느낌이었겠죠"라고 추측했다. 조던은 그 정보를 제공한 것은 내가 아니라며 "호러스였을 겁니다"라고 추측했다.
스미스는 책 발매 이후 욕을 엄청나게 먹은 것은 물론 협박까지 받고, 신문사에선 안전을 위해 1주일간 출근하지 말라고 제안을 했다고 한다. 조던은 이후 몇 주 동안 스미스와 눈도 안 마주치다가, 말을 다시 섞는 관계로 돌아가긴 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던 외에 잭슨 감독이나 다른 사람들과는 별 마찰이 없었다고 한다. 스미스는 이후에도 불스를 담당하다가 시카고 트리뷴에서 2008년까지 일했다.
2020년 기준으로 샘 스미스에게 누가 제보했는지에 대해 정확히 팩트로 드러난 것은 없다. 다만 책에서 직접적인 팀 관계자가 아니면 절대 알 수 없는 부분 (선수들이나 경영진과의 대화 내용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많은 부분이 사실로 드러났고, 그랜트가 스미스와 가장 친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판단은 각자의 몫.

9.6. 코비와의 각별한 관계


최근에서야 부각되었지만 코비와의 관계가 각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172] 둘은 코비가 고등학교 졸업반(4학년) 시절에 처음 만났는데, 코비는 줄리어스 어빙과 조던에게 자신이 6월에 (고등학교 졸업하고) 프로 데뷔를 할 것이라고 했으며, 이 만남에 대해 코비는 "난 작은 사이코패스였습니다. 그들만큼이나 집요했죠"라며 세 사람 사이의 비슷한 점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코비 브라이언트가 벤치출장해 불스를 상대로 무려 33점을 넣은 것으로 유명해진 1997년 12월 17일 경기(불스가 104대83으로 승리) 이후 조던은 브라이언트에게 다가가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얘기하거라"라고 했고, 이에 코비는 "릴리스 포인트는 어떻게 정하나요? 슛 쏠 공간 마련하려면 수비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야(misdirection) 하는게 필수인가요?" 등 페이더웨이에 대한 질문을 퍼부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코비는 "마이클은 본인의 모습을 제 안에서 본 것 같아요"라며 "그는 우리 둘 다 무서운 타입이란 걸 알았죠"라고 말했다.
직장폐쇄로 리그가 중단되었던 99년에 코비는 조던에게 다시 한번 연락을 해 자신보다 더 힘이 센 윙플레이어들을 포스트에서 상대하는 법에 대해 질문했고, 이에 대해 조던은 선수들을 떼어놓는 법, 그들이 비교적 잘 못 하는 곳으로 몰아넣는 법, 자신보다 큰 선수들을 수비할 때 상대가 수비가 어딨는지 감을 잃도록 뒤로 물러서는 법[173]에 대해 가르쳤다고 한다. 이에 대해 코비는 "기본기였죠. 그가 위대한 딘 스미스 감독 밑에서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에 다닐 때 배웠던 것들이겠지만 저한테는 그게 없었어요. MJ와 얘기하는 것은 마치 최고 수준의 대학 교육을 개인적으로 받는 것과 같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와 같은 대화는 이후 '''수십년간(decades)''' 이어졌으며 이는 자신에 대한 다른사람들의 기대감에 대처하는 방법부터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는 요령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뤘다. 조던은 코비에 대해 "그 친구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무시하고 승리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터널 시야'가 있어요. 당신은 코비를 싫어할 수도 있겠지만 그거 아나요? 그 친구는 그건 전혀 신경쓰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코비 브라이언트에 대한 추도식에서 연설을 한 조던은 시종일관 울컥하는 감정을 추스리며 코비에 대해 얘기했고, 결국은 눈물을 보였다. 두 사람의 친분에 대해 얘기하며 "코비는 제 소중한 친구였고, 제 막내동생 같았습니다"라고 하며 "코비 브라이언트가 사망했을 때 제 일부가 같이 죽었습니다."라며 슬퍼했다. 연설 전문 번역: https://cafe.daum.net/ilovenba/7n/276126

[1] 착화 기준 198cm (6' 6") / 맨발 신장 196 cm (6' 5") / 윙스팬 211cm (6' 11")[2] NBA 활동 당시의 체중이다. 현재 체중은 당연히 이때보다 훨씬 더 나간다. 조던의 몸무게는 사실 변화가 꽤 있었는데 데뷔 당시부터 88년도까진 200파운드(91kg) 정도였으나 이후 배드보이즈의 거친 육탄방어에 대항하기 위해 91kg에서 2kg씩 꾸준히 벌크업을 시작, 1차 쓰리핏 시기에는 218파운드(98.8kg)의 체중이였으며 (이때가 가장 유명했던 때라 조던 관련 잡지 기사나 카드 등에 이렇게 많이 표기된다, 또한 조던도 인터뷰에서 본인의 전성기 체중은 218파운드라고 언급했었다.) 1차 은퇴 후 야구에 적합한 몸을 만들기 위해서 체중을 늘렸다가 복귀 후 2차 쓰리핏때는 다시 감량을 해 104kg정도의 몸을 유지했다. 워싱턴 시절엔 몇년동안 쉬고 나이도 들어서 몸도 좀 불었기에 이보다 더 나갔었다,약 240파운드(109kg)정도로 활동 [3] 2차 은퇴까지 커리어의 대부분을 SG로 뛰었지만 수비 시에는 상대방의 PG를 맡는 경우도 많았다. (사실 트라이앵글 오펜스에서 맡은 역할은 가드보다는 포워드에 가깝긴 했지만 수비는 주로 상대 가드를 막았으니까.) 3차 은퇴 이전인 워싱턴 시절에는 주로 SF로 뛰었다. 1988-89 시즌에는 포인트 가드로도 뛴 적이 있었는데, 89년 3월 25일 경기를 시작으로 '''11경기 동안 트리플 더블 10번'''을 달성하기도 했다. 시즌 평균은 '''32.5득점 8리바 8어시'''.[4] 나이키가 전 종목 통틀어서 종신 계약한 3명의 선수 중 한 명이다. 다른 2명은 '''르브론 제임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현재 조던과 나이키의 관계는 단순히 후원사와 선수 간의 관계 수준이 아니다. 에어 조던은 마이클 조던의 영향력을 통해 인지도 높은 나이키의 프리미엄 독자 브랜드로 올라섰다.[5] 잠깐 은퇴를 했을 때 갔던 시카고 화이트삭스 산하 더블A 야구팀이다.[6] 23번을 단 이유는 매우 유명한데, 조던과 그의 형 래리는 마당에 있는 골대에서 주구장창 1대1을 했는데, 어린 시절 마이클은 그를 한번도 못 이겼다고 한다. 그러자 "형의 반이라도 됐으면..."하는 마음에 형 번호인 45번의 절반 정도인 23번을 택했다고...[7] 첫번째 복귀 당시 달았던 번호, 잠시 야구로 외도했을 때 달았던 번호이기도하다.[8] 미국 국가대표 등번호.[9] 1990년 올랜도 원정에서 누군가가 락커룸에서 23번 유니폼을 훔쳐가는 바람에 급한대로 남아 있던 12번 유니폼을 입었다. 원정 팬의 유니폼을 빌려입으려고 했지만 사이즈가 작았다고 한다. 이 경기의 사진을 찾아보면 등 번호는 있는데 이름 마킹이 없다.[10] 2021년 2월 포브스 기준[11] 유'''일'''한 운동선수 출신 억만장자로 조던 다음으로 재산이 많은 스포츠 스타는 약 1조원의 재산을 보유한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르브론 제임스 정도가 있다.[12] 전 부인 주아니타 바노이 슬하 장남 제프리 조던, 차남 마커스 조던, 장녀 쟈스민 조던[13] 현 부인 이베트 프리에토 슬하 일란성 여아쌍둥이 빅토리아 조던, 이사벨 조던[14] ESPN,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슬램 등 수 많은 스포츠/농구 매체에서 매년 역대 선수 랭킹을 내놓는데, 시대가 다른 선수들의 커리어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기준이 애매하고, 뭐가 더 위대한지에 대한 기준도 애매한지라 전문가 의견이 갈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 랭킹은 통일되는 경우가 없다. 예를 들어 어떤 매체에서는 우승 횟수가 독보적인 빌 러셀을, 어떤 매체에서는 개인 기량이 압도적인 윌트 체임벌린, 어떤 매체에서는 종합적인 커리어가 뛰어난 카림 압둘 자바를 더 높게 평가한다. 매직 존슨도 이들보다 높게 평가될 때도 있으며, 최근 르브론 제임스가 이 라인에 합류했다. 그러나 어떤 매체라도 조던의 1위 자리는 고정이다. 조던이 98년 은퇴한 이후 공신력 있는 스포츠 매체에서 조던이 아닌 다른 선수를 역대 1위에 놓는 경우는 없었다. 물론 은퇴 이후 스타들이 그의 아성에 가까워질 때마다 조던 VS 논란이 일지만(이전 시대에 코비가 그랬고 최근까지 르브론이 그랬다) 객관적인 실적에서 너무 뚜렷히 차이가 나는지라 그 선수들의 커리어 말년이 되면 이런 비교는 슬그머니 사라진다.[15] 2위는 베이브 루스 3위는 무하마드 알리.[16] 조던과 잭슨 이전에는 재키 로빈슨무하마드 알리가 인종차별완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4명 모두 각 분야에서 위대한 존재로 꼽히며, 4명 모두 '스미소니언이 선정한 위대한 미국인 100인'에 선정됐다.[17] His Highness + Air. 참고로 소유대명사 + Highness는 왕족들에게 붙이는 경칭이다. 우리 말로 하면 전하 혹은 폐하.[18]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의 별명이기도 하다. [19] 젊은 시절에 한시적으로 불리웠던 별명.[20] 조던의 현역 시절 선수들 사이에서 주로 불리던 별명이다. 오픈 코트 같은 방송 프로그램이나 인터뷰에서 선수들이 종종 언급하곤 한다.[21] 만화 달숙이에서 실명 그대로 등장하는데 첫 등장부터 신발을 팔고 있었다. 이외에도 지드래곤의 어느 한 팬이 리뷰하는 글에서 조던신은 외국인선수라고 조던을 부르는 짤방이 널리 퍼지는 바람에 그대로 신발장수 별명이 굳어져버렸다.[22] 조던은 그의 형 래리 조던과의 1:1 농구 시합에서 항상 이겨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래리 조던의 학교 선수 시절 등 번호는 45번이었는데, 마이클은 형의 반만큼만이라도 농구를 잘 했으면 좋겠다는 의미로 45번의 2분의 1인 23번을 선택한 것. 아래에 서술되지만, 1차 복귀 이후에는 잠시 45번을 달기도 했었으나, 그 시즌 도중에 23번으로 돌아갔다. 근데 막상 형 래리 조던은 엄청난 농구 실력에도 키가 173cm(5피트 8인치)에 그친 바람에 농구를 접어야 했다. 사실 조던 집안에선 178cm(5피트10인치)인 아버지 제임스가 그나마 큰 편일 정도로 어머니 들로리스와 5남매를 통틀어 180을 하나도 못 넘길 정도로 키가 작은 집안이다. 혼자 198cm(신발 신은 키)나 되는 마이클이 별종인 셈. 마이클의 장남 제프리는 185, 차남 마커스는 193 (둘 다 농구화 신은 신장)으로 그나마 큰 편이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조던 집안의 최장신은 마이클 조던이다. 물론 둘째 아내 이베트 프리토와 2014년에 낳은 쌍둥이 딸들이 엄청난 장신이 되거나 자녀를 더 가진다면 모르지만...[23] 한 예로 축구선수 데이비드 베컴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을 때, 그는 전 소속팀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시절부터 줄곧 사용한 등번호 7번을 선택할 수 없었다. 당시 7번은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이던 라울 곤살레스가 달고 있었기 때문인데 이 때문에 베컴은 7번 대신 조던을 존경하는 의미에서 23번을 선택했다. 두 레전드의 선택을 받은 농구 외 스포츠에서도 상징적인 번호.[24] 10번은 펠레 이전에도 이미 중요한 번호였다. 원래 축구의 번호는 포지션을 의미했기 때문에 공격형 미드필더나 처진 스트라이커의 10번은 애초에 가장 화려한 포지션이다. 펠레가 17살 어린나이에 브라질 대표팀의 10번을 받은 것은 어쩌다보니 우연히 받은 것이긴 하다. 우연히 10번을 단 어린 소년이 브라질 대표팀을 월드컵을 우승으로 이끌고 무려 3번이나 월드컵을 들어올린 후, 10번이 포지션 불문 에이스의 상징이 되버린 것이다. 그에 반면 농구의 23번은 정말 아무 의미없는 번호였다.[25] 현재까지 23번을 주로 달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선수는 조던 외에는 프랭크 램지와 캘빈 머피 뿐이며, 훗날 헌액이 사실상 확실시되는 르브론 제임스까지 해봐야 네 명이다. 게다가 램지는 50년대 선수였고 램지와 머피 둘 다 NBA를 주름잡던 선수들은 아니었기 때문에 번호 자체의 상징성은 사실상 거의 없었다. 오히려 NBA에서 전통적으로 레전드들이 많이 달았던 번호는 33번으로 카림 압둘 자바, 래리 버드, 패트릭 유잉, 알론조 모닝, 스카티 피펜, 그랜트 힐 등 수많은 슈퍼스타들이 달았고, 샤킬 오닐조차도 원래 아마추어 시절 33번을 달다가(유잉을 존경해서 선택한 번호이다.) 프로 입단 이후엔 33번을 누가 이미 달고 있어서 32번으로 바꿨다. 레이커스로 이적해서는 레전드 카림 압둘 자바 때문에 33번이 결번되어 있어 34번을 선택했는데 34번 역시 결번되었다.[26] 이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로 2K게임즈에서 제작한 NBA 2K12에서는 전설의 농구선수 18명의 팀을 플레이 하여 플레이한 선수들의 팀을 해금해서 그 팀과 선수들로 통상 경기에서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그레이티스트 모드가 있다. 여기서 버젓이 1번, 즉 맨 앞에 위치하고 계신다. 참고로 2번은 매직 존슨, 3번은 래리 버드. 은퇴한지 20년이 다되어가고 그의 영향력을 직관이 아닌 매스컴으로만 접해온 한국 사람들도 이 정도인데 그의 영향력과 실력을 직접 본 미국인들의 조던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떻겠는가![27]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운동선수 부문에서 1위라는 것이 그의 입지를 잘 말해준다. 참고로 2위는 베이브 루스, 3위는 무하마드 알리.[28] 멀리 갈 필요도 없이 그냥 길가다가 아무다 붙잡고 아는 농구선수 이름 하나만 말해보라고 한다고 생각해보자. 열에 아홉은, 아니 100명중에 95명 이상은 바로 조던의 이름을 말할 것이다.[29] 워싱턴 복귀 이후 상당히 떨어진 수치이다. 그 전까지는 31.5득점.[30] 사실 짰나싶을 정도로 극적인 일을 겪은 것이 그의 커리어를 전설로 만드는데 한 몫은 했지만, 순수하게 스포츠 커리어 측면에서만 보면 손해도 많이 봤다. 조던은 명성에 비해 비교적 짧은 선수생활을 보낸 선수이다. 특히 그는 신체와 기량이 정점에 달한 30세에 아버지가 살해당해 갑자기 은퇴를 해 한 시즌 반, 다른 스포츠에 적응하느라 낭비한 시간을 합하면 거의 2년을 허비했다. 또한 98시즌에는 비록 하락세이긴 했지만 리그 최고의 기량을 유지하던 '''MVP'''가 돈 문제로 팀을 해체하고자 한 구단주로 인해 35세 나이에 은퇴를 했다. 35세 당시 조던은 전성기만큼은 아니더라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리그 최고의 선수였고, 조던과 동시대에 그만큼 몸관리가 철저한 선수는 칼 말론, 존 스탁턴 정도 밖에 없을 정도로 그는 튼튼한 선수였다. 그가 몸관리가 현재와 비교도 안되는 시기에 선수생활을 했다는 걸 감안하지 않더라도, 단순히 두번의 은퇴 없이 정상적인 커리어를 보냈다고 치면 아무리 최소한으로 봐도 MVP급 시즌이 3번 정도는 추가됐을 것이며, 통산득점기록에서도 불멸의 수치를 쌓았을 것이다. 그는 90-91시즌부터 97-98시즌까지 공백기를 포함해서 8년동안 6번의 우승, 6번의 파이널 MVP, 4번의 정규시즌 MVP, 6번의 득점왕과 올NBA 퍼스트/올디펜시브 퍼스트팀 선정을 기록했는데, NBA 역사상 이 정도 기간동안 이런 실적을 낸 선수는 '''아무도 없다'''. 빌 러셀은 개인성적이 저만큼은 안되고, 윌트 체임벌린과 르브론 제임스 등은 우승이 저만큼 안 된다.[31] 80년대 덩크 컨테스트는 현재처럼 독특한 아이디어보다는 덩크의 완성도를 보는 성향이 더 강했다. 따라서 똑같은 덩크를 매년 보여줘도 감점 요소가 되지 않았으며, 도미니크 윌킨스의 파워풀한 투핸드 윈드밀, 마이클 조던의 자유투 라인 덩크는 그들이 컨테스트에 나올 때마다 매번 선보이는 "필살기"급 덩크였다. 실제로 조던은 1985, 87, 88년 세번 출전하면서 매번 자유투 라인 덩크를 선보였는데, 85년엔 준우승, 87년과 88년엔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똑같은 자유투 라인 덩크라도 신인이던 85년엔 다소 뻣뻣하게 팔만 쭉 뻗어서 덩크를 한 반면, 87년에는 좀 더 공중 동작이 가미되었고, 아예 팔다리를 접었다가 펴면서 역동적으로 덩크를 한 88년도의 덩크는 역대 최고의 덩크 중 하나로 꼽힌다.[32] 사실 이러한 견해는 다소 비약이라고도 볼 수 있다. 실제로 80년대 NBA의 흥행을 주도했던 매직 존슨래리 버드는 각각 가드, 포워드 포지션에서 리그를 지배했다. 다만 매직은 카림 압둘자바, 버드는 로버트 패리시와 같은 리그 정상급 센터들과 함께 뛰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정상급 센터없이 리그를 지배했던 마이클 조던의 시카고 불스가 기존의 NBA 패러다임에서는 벗어나 있다는 것도 맞는 말이다. 조던이 딱히 남들이 하지 않는 독특한 플레이를 한 건 아니기 때문에 농구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는 말은 다소 어폐가 있다. 다만 NBA의 인기를 끌어올려 NFL이나 MLB와도 경쟁을 할만한 단체가 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고 수많은 스윙맨들이 난립하는데 우상으로서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이기 떄문에 'NBA'의 패러다임을 바꿨다고 할수는 있을지도 모른다.[33] 다만 현재 "수비수가 공격수에게 손도 못 대는(공격 진행 방향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댈 수 있다. 밀면 안 되는 것) 심한 핸드체킹룰은 2004-05년에 도입되었다. 이로 인해 그 다음 시즌, 무려 득점 상위 5걸 중 4명이 커리어 하이를 기록하는 득점 인플레가 일어나기도. 이 중 앨런 아이버슨은 전성기가 지났고 평균 20점을 넣는 크리스 웨버가 합류했음에도 3점 가까이 올랐다. 또한 이들은 모두 그 다음 시즌, 팀 내 상황이나 기량에 큰 변화가 없었음에도 득점이 크게 하락했다. 르브론과 코비는 각각 4,5점씩이나... 이는 핸드체킹룰 변화에 익숙치 못한 수비수들이 초기에 대응을 못했다가 이에 익숙해진 것이라고 추측이 가능하다.[34] 2012년에 드림팀 결성 20주년 기념으로 nba tv에서 제작한 "The Dream Team"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 드러난 내용이다. 당시 FIBA에서 "다른 나라의 프로들은 아마추어로 분류되어 올림픽 참가가 가능했다"며 모든 나라의 프로팀이 올림픽에 나갈 수 있다는 룰 개정안을 통과시킨다. 이에 미국은 팀을 결성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u.s. basketball committee 소속이자 NBA VP를 지낸 로드 쏜이 처음 연락한 멤버가 조던이었다. 그러나 조던은 이미 금메달도 있는데다가 "올림픽에 나가 혼자 고생하긴 싫다"며 다른 정상급 선수들의 참여 여부에 따라 결정하겠다고 했고 이에 따라 매직 존슨, 래리 버드, 찰스 바클리등 당대 최고 스타들로 구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던이 선수촌 입소 못한 걸 아쉬워했는지 여부는 다큐멘터리에 나오지 않으나 조던이 거의 매일 척 데일리 드림팀 감독과 골프를 치며 친해졌다는 내용은 나온다. 또한 골프 치고, 연습하고, 밤새 카드 치고, 잠깐 눈 붙이고, 경기하고를 반복하자 동료들이 그의 괴물 같은 체력에 놀라며 질려하는 모습이 나온다.[35] 출처[36] 참고로 조던은 커리어 통산 NBA 파이널에 6번 진출했고 6번 모두 우승했으며, 6번 모두 MVP에 선정되었다. 이 때문에 국내 한정으로 조던에게 털린 선수들의 팬들 사이에서 666 대악마(...) 드립이 돌기도 했다.[37] 단일시즌 PER가 30+이상이면 역대급 선수라고 평가 받는데, 단일시즌 30+ PER를 4회이상 기록한 선수는 마이클 조던과 르브론 제임스뿐이다..[38] Value Over Replacement Player. 대체선수대비 생산력 지표.[39] 사실 질문 자체는 병크에 가까운 내용인데 위트 있게 받아쳐서 명언으로 남은 부분. 이 외에도 "신이 된 기분이 어떠냐?"란 이뭐병스러운 질문도 받은 적이 있다.[40] 수많은 농구 마니아들에게 물어봐도 단점을 말하라고 하면 쪼잔함, 몸쪽 높은공, 외야수비, 빗질, 머머리, 이상한 수염, 무회전 프리킥, 평영 발차기 같은 대답들이 나온다. 어느 정도는 유머지만 그만큼 정말 농구 실력으로선 완전무결한 인물.[41] 슈팅가드 한정으로 얘기를 했을 때도 그렇다는 말이다.[42] 1위는 그레고리 스미스이다.# 이 선수는 맨발키 198cm로 측정되었던 카와이와 비교해 203cm로 5cm가 더 크며, 후술할 사이트 기준 '''NBA 역대 4위의 손 크기를 가진 선수이다.''' 역대 NBA 손크기 순위[43] #[44] ESPN Sport Science[45] # [46] 특히 체력은 올타임 NO.1 수준[47] Flu Game[48] 90년대 조던에게 익숙한 한국 농구팬들이 80년대 조던의 경기를 보면 또 하나의 신세계를 느낄 수 있다. 웨이트가 완벽하지는 않고 플레이도 90년대에 비하면 영 엉성해 보이긴 하지만 그야말로 사람이 아닌 듯한 스피드와 탄력을 지녔다.[49]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면 이 꼴이 된다. (1분34초부터) . 보면 알겠지만 디트로이트 수비진이 단체로 뭘 잘못 먹었는지 단체로 멍을 때려서 이런 촌극이 발생한거지, 제 정신 차리고 있는 수비수가 단 한명이라도 있었다면 이런 건 불가능했다.[50] 아무리 돌파의 비중을 높여도 빅맨이 아닌 이상에야 농구에서 대부분의 득점은 점퍼다. 물론 르브론 제임스처럼 스윙맨이면서 돌파로만 20점씩 넣는 이상한 놈들도 있다. 다만 이것은 현재 NBA가 조던이 젊었던 시대에 비해 1, 2차 핸드체킹룰 개정을 통해 돌파하는 선수들에게 손을 대서 방향 전환을 방해할 수 없게 한 데다가 파울콜을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이 엄격하게 불기 때문에 돌파하는 것에 대한 신체적 부담이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이 적기 때문이다. 해당 영상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현재 같으면 플래그런트 파울이 불릴만한 파울이 그냥 파울, 혹은 아예 불리지도 않고 징계감인 파울을 해도 퇴장조차 당하지 않고 경기를 속개하는 걸 볼 수 있다. 조던 vs 르브론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폴 피어스나 빈스카터같은 2000년 이후 주로 뛴 선수들조차 90년대가 지금보다 훨씬 피지컬해서 지금이 득점하기 더 쉽다고 하고 있다.[51] 득표 수가 적어서 큰 의미는 없지만, 98년 올해의 수비수 투표에서 조던은 4위였다.[52] 쉬다가 복귀했다고 몸 소모가 적다고 보는 이들이 있는데, 조던은 은퇴하고 관리받으면서 재활을 한 게 아니고 그냥 골프 치고 놀다가 복귀한 것이다. 당연히 현역 시절에 비해 체중도 늘고 운동 능력도 많이 떨어진 상태. 일반인들도 오랜만에 운동하면 감이 떨어지고 몸 상태가 안 좋은데, 3년이나 놀다가 '''NBA로''' 복귀한 것이다. 그것도 만 38세에 나이에. 복귀가 가능한 것 자체가 놀라운 것이다. 일례로 더 젊은 나이에 은퇴하고 만 36세에 복귀한 매직 존슨은 32경기밖에 못 뛰었다.[53] 이 시기 위저즈에 신인으로 입단해 백업센터 역할을 수행한 이탄 토마스라는 선수가 라스트댄스 방영에 맞춰 위저즈에서의 조던과 관련된 일화를 몇가지 밝혔는데, 개중에 조던의 무릎 통증이 너무 심해서 의료진이 큰 주사로 무릎 속에 찬 걸 빼는 걸 보면서 '왜 이렇게 까지 하나요?'라고 묻자 조던이 '나도 모르겠다'라고 하더라는 일화도 있다.#[54] 르브론 제임스 팬들이 대표적이다.[55] 리그 초창기 선수였던 빌 러셀과 윌트 체임벌린은 자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아 논란이 제기된 적이 많다.[56] 3점슛은 뛰어나지 않으나 라인 앞 3점슛에선 무시못할 슈팅력을 지녔다. 이 때문에 NBA가 95년에 공격을 권장하기 위해 3점라인을 단축했을때는 그가 소화한 두 번의 풀시즌 (95-96, 96-97) 동안 '''42.7%''', 37.4%를 기록했다. (95시즌엔 경기당 1.8개를 던져 딱 절반을 성공시켰지만 경기수가 17개에 불과할 정도로 표본이 적으니 논외).[57] 하지만 현대농구 트렌드가 미드레인지보다는 3점슛을 더 많이 던지는 추세이기 때문에 그것을 감안하고 봐야된다.[58] 조던과 다른 슈퍼스타들과 차이점이 있는게 이 강한 발목, 그리고 순간 움직임이다. 르브론 제임스의 경우 조던을 능가하는 파워와 조던 못지 않은 스피드, 강력한 발목을 지녔지만 조던처럼 눈깜짝할 사이에 돌파를 하거나 돌파에서 바로 후속동작으로 전환하는 스피드는 현저히 모자랐다. 퍼스트스텝은 조던 못지 않다고 평가받던 트레이시 맥그레이디과 그랜트 힐은 내구도가 부족했고, 코비는 운동능력이 떨어졌다.[59] 다만 습관인지 왼손 덩크의 비중은 극히 적었다. 그의 돌파력은 왼쪽/오른쪽 따질 것 없이 모두 위력적이었는데 유독 왼쪽으로 돌파하면 레이업으로 마무리하는 경우가 많았다.[60] 가장 유명한 플레이 중 하나가 97년 뉴욕 닉스전에서 나온 것으로, 별 다른 동작 없이 스탭 한번 밟음으로서 마크맨인 알렌 휴스턴을 멀찌감찌 떨어뜨리고 여유롭게 슛을 쐈다. 이때 나온 해설자의 멘트가 "Allan Houston is somewhere in Houston!"[61] 신기하게 이렇게 발목을 혹사시켰는데도 발목으로 고생한 적은 없다. 2년차 때 발이 부러진 적이 있고, 위저즈 시절에 무릎이 나가서 계속 고생한 것과 대비된다. 물론 발목이 잠깐 돌아가 절뚝거린다던지 그런 적은 많았지만, 93년 닉스 시리즈에 손목통증 때문에 고생을 하거나, 96년 파이널처럼 등 통증 때문에 경기력에 지장을 받은 것처럼 발목이 큰 문제가 된 적은 없다.[62] 반대로 이렇게 하기 때문에 농구화의 내구도 소모가 심해서 매 경기 갈아신는 것일 수도 있다.[63] 게다가 92파이널처럼 아예 새깅 디펜스를 하면 자기 장점이 아닌 3점으로 털어버리는 상식을 뛰어넘는 선수다.[64] 빅맨을 활용한 골밑득점이 성공률은 더 높지만 3초룰 때문에 골밑에서 좋은 자리를 잡는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고, 게다가 클러치상황엔 확률높은 공격 방지 + 실패한 슛 리바운드 단속 때문에 골밑이 훨씬 빡빡해진다. 역대급 골밑 공격수인 샤킬 오닐을 보유하고 있던 밀레니엄 레이커스도 경기 막판 클러치 슛은 코비 브라이언트라는 스윙맨이나 데릭 피셔, 로버트 오리같은 외곽슈터의 몫이었다.[65] 모션 오펜스가 아무리 정교한 공격 방식이고 오픈찬스를 만들 수 있어도, 수비가 타이트해지고 집중력이 말도 안되게 높아지는 경기 막판 클러치 상황에서는 패스 돌리다가 패스길 끊겨서 허무하게 볼 소유권을 넘겨주거나, 슛 성공률 낮은 엉뚱한 선수에게 오픈이 날 수도 있다. 그리고 오픈찬스가 난다고 해서 다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66] 참고로 조던이 35점을 찍을 때는 그를 제외하면 10점대 초중반이 팀 내 2위일 정도로 공격력이 빈약했는데 저렇게 득점을 많이하면서 '''팀 내 야투율 1위'''였다.[67] 이 때 기록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출처 이때 조던은 야투 27개 중 21개를 넣고 자유투 19개 중 17개를 적중시켰다. 이때 훗날 스타가 되는 스카티 피펜과 호레이스 그랜트는 경기당 20분 정도 출전하는 후보에 불과했던 터라 (이날 둘이 합쳐 슛 7개 던져 1점 넣었다) 이때는 그야말로 완벽한 조던의 원맨팀이었다. 오죽하면 팀내 2옵션이 득점이 아닌 리바운드와 수비에 특화된 파워 포워드 찰스 오클리(12.4점)일 정도. 심지어 팀에서 두자리수 득점을 한 선수는 이 둘뿐이었다.[68] 이 때문에 후에 LA 레이커스는 2000년대 초반의 샤킬 오닐, 그리고 그의 이적 후 영입된 파우 가솔같은 빅맨을 통해 트라이앵글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69] 사실 조던의 몸을 결정적으로 키워준 계기가 된 건 그 당시 "배드 보이즈" 라고 불렸던 아이재아 토마스를 중심으로 한 피스톤즈 덕분이었다. 당시 디트는 조던을 막기 위해 더블팀, 트리플팀을 기본으로 온갖 거친 방법을 동원하여 조던을 막았으며(조던 룰) 제 아무리 최고의 기량을 가진 조던이었다고 하더라도 체력적으로 가드는 물론이거니와 더티한 포워드나 센터들이 피지컬 플레이를 하는 걸 감당할 수 없었던 것. 결국 그 조던 룰을 이겨내기 위해 악착 같이 웨이트를 하며 피스톤즈를 넘어서게 된다. 후에 조던도 인터뷰에서 그 점을 인정했다.[70] 물론 90년대에도 오픈코트에서 무서운 위력을 보였다. 당시 시카고는 조던-피펜-로드맨-하퍼까지 압박수비를 하고, 스틸이 나는 동시에 조던과 피펜이 야생마처럼 달려가서 마무리하는데 능했는데 둘 다 스피드, 점프력, 파워를 겸비했기 때문에 이들의 속공은 막기가 정말 힘들었다. 반대로 80년대에 하프코트에서도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돌파력을 무기로 페이스업에서 그냥 다 뚫어버리거나, 당시 이미 장착하고 있던 포스트업 페이더웨이나 (물론 완성도는 90년대가 월등하다. 대표적으로 스텝 한번 밟아서 수비를 떨어뜨리는 능력) 포스트업 스핀무브 후 돌파, 더블클러치 점프슛 등 하프코트에서도 최강이었다. 다만 운동능력이 80년대엔 워낙 뛰어났기에 오픈코트에서 위력이 그만큼 더 뛰어났고, 반면 90년대에는 운동능력도 떨어지고 당시 추세 자체가 페이스가 낮은 저득점 농구였기에 하프코트 농구를 더 많이 한 것 뿐이다.[71] 여담이지만 이 트리플 클러치 장면을 다른 각도에서 찍은 영상을 보면 상대팀인 뉴저지 네츠 선수들도 이 플레이에 경악해서 팀 동료가 슈퍼플레이 한 것 마냥 환호하려다가 감독 눈치보고 급하게 주저앉는다.(...)[72] 이에 괜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바로 드림팀때다. 그때 조던의 동료들은 조던이 경기하고 온 다음에도 밤새 카드게임하고 놀고, 쉬는날에도 척 데일리랑 골프치러나가고 조금 계속 노는 모습을 보며 "대체 이 녀석은 언제 자는거야?" 하고 경악했다고 한다. 그리고 한 3일정도 지나서야 조던이 제대로 잠드는걸 봤다고... 이때 조던의 동료들은 역대 최강급이라 불리던 선수들이었으니 그런 선수들 사이에서도 조던의 체력이 넘사벽이었다는 걸 제대로 보여준다.[73] 상대해 본 선수들이나 전문가들에 따르면 눈, 어깨, 발, 무릎 등 온갖 부위로 일반인들은 아예 느끼지도 못하는 아주 작은 모션페이크들을 조합해 순간적으로 균형을 무너뜨리기 때문에 반응조차 못한다고. 심지어 포스트업 상태에서 등짝으로도 페이크를 넣는다고 한다. 결국 억지로라도 막으려 하면 앤드원 유도.[74] 80년대 선수들이 2차 스탯이 이상할 정도로 적게 나오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당시 슈퍼스타들은 40분이 넘는 선수가 여러명 나올 정도로 오래 뛰었지만, 위에서 언급한 체력적 소모 때문에 현대농구와 같은 페이스로 스탯을 쌓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현대농구 규칙 하에서 스탯 쌓는 페이스로 만들어진 2차스탯으로 당시 선수들을 평가하려고 하니 오류가 나기 십상인 것. 단적인 예로 1980-81시즌 당시 우승팀 보스턴 셀틱스에서 48분 환산 winshare 팀내 1위를 차지한 선수는 래리 버드가 아닌 세드릭 멕스웰이란 선수였다. 그렇다고 맥스웰이 좋은 선수였느냐? 평생 올스타 선정 한번이 없는 그냥 좋은 롤플레이어였다.[75] 여담으로 91파이널 당시 역대 최고의 PG인 매직 존슨과 맞붙으며 "패스에서도 뒤지지 않는다"고 하고 싶었는지 시리즈 내내 고감도 패스를 선보이며 평균 31점 11어시스트를 기록하는 괴물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이때 호레이스 그랜트, 존 팩슨, 스카티 피펜 등 가리지 않고 A패스를 꽂아주면서도 평상시처럼 고득점을, 그것도 5할 이상의 높은 확률로 넣는 걸 보면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76] 물론 농구선수라면 기본적으로 두 가지 점프슛을 다 할 수 있다. 조던의 특별한 점은 저렇게 점프 후 밸런스가 무너진 상태에서 쏘는 슛이 그 누구보다도 정확했다는 점. 이 슛을 조던과 대등한 수준까지 기술적으로 완벽히 따라한 건 코비 브라이언트 뿐이었으나, 피지컬의 차이(힘과 점프력, 스피드) 때문에 코비도 조던 수준으로 효과적으로 활용하진 못했다.[77] 페이스가 빠른 현재 25점을 생각하면 안된다. 00년대 초반은 전체적으로 리그 페이스가 늦은 시절이었고, 시즌 평균 25점을 넘긴 선수는 리그 통틀어 6명 뿐이었다. 물론 조던은 부상을 안고 뛰면서 평균을 계속 깎아먹어 최종 22.9점에 그치게 되는데, 사실 이조차도 리그 9위에 해당했을 수치였다(출전경기수가 적어 인정되지 않음).[78] 수비왕이라는 상 상당수가 골밑을 지키는 파워 포워드나 센터에게 가는 것을 생각하면 역대 공격력 1위 슈팅 가드가 수비왕을 수상한다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기적이다. 그야말로 공수 완벽. 조던 이후로 2015년 현재까지 가드가 DPOY를 수상한 경우는 96년의 게리 페이튼뿐이다. 게다가 공수겸비의 선수들은 수비왕 투표에서 은근히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은근히 보수적인 미국의 기자단(=투표단)이 한 선수에게 상이 몰리는 걸 어느 정도 경계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88시즌의 조던은 MVP, 득점왕, 올해의 수비수를 독식했다.[79] 팀 수비를 전두지휘하는 '''앵커''' 역할을 맡기도 했다.[80] 위에도 언급되지만 조던치고 엄청나게 저조한 수치였다. 그리고 저 경기에서 조던은 18점에 그치며 공격에서 매우 부진했다.[81] 사실 이 때문에 초창기에는 전문가들에게 수비력이 저평가받기도 했다. 유튜브에 남아있는 초창기 경기를 보면 해설자들이 "조던은 종종 수비에서 도박하는 경우가 있다"고 해설하는 걸 들을 수 있다. 실제로 87시즌 당시 역사상 최초로 200스틸 100블럭 이상을 기록한 선수가 되었음에도 디펜시브 세컨드 팀조차 뽑히지 못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조던이 그렇게 스틸을 노리는 수비를 해도 빈틈이 없다는 걸 곧 깨달았고, 자신들의 평가를 수정해 결국 88시즌 조던은 수비왕을 차지한다.[82] 물론 그렇다고 조던이 소위 "병장농구"를 한 건 절대 아니었다. 예를 들어 필라델피아 76ers를 상대할 때 작고 재빨라 수비부담이 큰 앨런 아이버슨을 막은 건 론 하퍼였지만, 조던이 막은 제리 스택하우스 역시 득점력이 아이버슨 못지 않았다(이때 스택하우스는 아이버슨보다 1년 선배고 당시 팀은 아이버슨을 포인트 가드로 생각해 득점보다는 리딩을 중점적으로 시켰다).또한 대인방어 외에 불스의 가장 큰 장점인 팀수비에서 피펜과 더불어 가장 적극적으로 도움수비를 가는 선수였는데, 이 둘이 없었다면 아무리 데니스 로드맨이 대단해도 2미터에 불과한 로드맨, 허접하기 그지 없는 불스 센터진으로 오닐, 유잉같은 동부의 최강 센터들을 상대할 순 없었을 것이다. 일례로 코비는 "올 디펜스 팀에 이름값 때문에 들어간게 아니냐."는 논란에 몇 번 시달렸는데 만 35세까지 계속 올 디펜스 퍼스트팀에 든 조던은 이런 논란이 없었다.[83] Whose game is it? It's Michael Jordan's game! 이라는 해설자의 극찬은 매우 유명하다.[84] 이때 아이버슨은 포지션이 포인트 가드라 주로 론 하퍼가 막았다.[85] 기껏 수비 잘하고 수비리바운드 못하면 꽝이다.[86] 실제로 아이버슨은 오른쪽 돌파가 왼쪽 돌파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물론 조던이 당시 루키에 불과한데다 주 매치업 상대도 아니었던 아이버슨의 이런 성향까지 파악했을 가능성은 낮고, 아이버슨이 오른손잡이이고 보통 오른손잡이들은 오른쪽 돌파가 더 편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이 자세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또한 기본스탠스와는 달리 양손을 모두 아래쪽으로 내리고 돌파만을 견제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아이버슨은 노골적으로 1대1을 하고 있기 때문에 패스를 견제할 필요가 없고, 슛을 노린다면 키가 훨씬 큰 조던이 블럭을 뜨는데 유리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손을 올리고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87] 자세히 보면 이 때 작게 스틸시도를 한번 한다.[88] 중간에 보면 조던이 카터를 잘 막아 무리한 슛을 쏘게 만들고 수비 리바운드를 잡기 위해 카터를 잘 박스아웃했는데, 카터가 엄청난 점프력으로 조던의 등 뒤에서 날아올라 공격 리바운드를 낚아챈다. 기술적으로 보면 조던의 완승이지만 운동능력 때문에 농락당한 경우.[89] 사실 이는 현재도 크게 달라진게 없다. 21세기 들어 2018년까지 18번의 드래프트에서 1순위로 선택받은 선수들 중 빅맨이 11명, 포인트가드가 5명이고 스몰포워드는 르브론 제임스앤드류 위긴스 2명, 슈팅가드로 분류할 수 있는 선수는 단 한명도 없다.[90] 전성기가 매우 짧았지만 정말 화려하게 불타오른 선수로, 70득점을 넘긴 6명의 선수 중 하나이다. 이 리스트엔 체임벌린, 코비 브라이언트, 엘진 베일러, 데이비드 로빈슨, 데빈 부커, 그리고 톰슨이 있는데 당연히 이들 중 최단신이 톰슨. 톰슨의 73점은 후술되는 거빈과의 치열한 득점왕 경쟁에서 나온 것인데, 그날 거빈이 63점을 기록하는 바람에 간발의 차이로 득점왕을 뺏겼다.[91] 다만 이 애매함과 별개로 여러 스포츠 매체에서 슈팅가드 역대 랭킹을 내면 이 두 선수는 거의 슈팅가드로 분류된다.[92] 그와 대비를 이루는 것이 "장신선수들의 다재다능화"를 촉발한 케빈 가넷이다. 가넷은 빅맨의 사이즈를 지닌 선수가 가드처럼 드리블, 패스하고 뛴다는 혁신적인 선수였지만, 이후 그 못지 않은, 심지어 그를 능가하는 재능을 가진 선수들의 출몰로 이런 유행이 이어지고 있다.[93] 해당 경기에는 앨런 아이버슨도 있었으며 그는 경기 종료 후 영원히 조던을 그리워할 것이라고 인터뷰했다.[94] NBA 드래프트 컴바인에서 쓰는 185파운드 벤치프레스를 27회 들어올린게(2003년 제이슨 킵) 역대 기록이란 걸 생각하면, 아무리 힘이 세도 100KG이 안되는 조던이 저렇게 무지막지하게 벤치를 들었단 건 신빙성이 낮다. 물론 컴바인은 00-01 시즌부터 시작된 것이라 그 이전 선수들 기록은 업고, 참여하지 않는 신인들도 있어 역대 신인들 중 킵이 가장 힘이 셌다고 단언할 순 없지만, 아무리 그래도 근육질 파워포워드, 센터들보다 조던이 벤치를 훨씬 더 잘했다고 보긴 힘들다.[95] 그리고 코비 브라이언트의 은퇴경기 때 안 좋은 의미로 비교되었다.[96] 마이클 잭슨은 실제로 운동을 잘 못했다고 알려져 있다.[97] 여담이지만 당시 게임이라는 한계상 선수들의 기량을 100% 정확히 반영하진 못하기 때문에 비슷하게 외곽슛이 없고 운동능력이 좋으며 스틸/블럭 능력도 비슷한게 덩치가 약간 좋은 피펜이 전체적인 능력치가 더 높은 로스터 플레이어보다 활용도가 더 좋았다. 사실 90년대에 나온 농구게임엔 조던이 안 나오는데 불스 왕조가 워낙 인기가 좋은지라 2인자인 피펜이 거의 깡패급으로 능력이 좋게 나온 것도 많았다. 대표적으로 피펜이 (말그대로) 끝판왕이었던 NBA Hangtime. 파울이 없고 만화적인 덩크가 넘치는 이 게임에서 끝판왕은 불스의 피펜과 로드맨이었는데, 빅맨과 스윙맨의 파워차이가 그다지 크지 않은데다 거의 전 능력치가 만빵에 가까운 (심지어 외곽슛조차 5점만점의 4점으로 스티브 커와 똑같다. 실제 능력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수치) 피펜은 거의 악마급의 위용이었다.[98] 본인이 출연한 그 영화의 게임 버전.[99] 스페이스 잼 게임에는 각 캐릭터마다 필살기가 존재했는데 조던은 외곽지역에서 팔이 쑥 길어지면서 덩크하는 모션이 필살기였다...[100] 실사 디지타이징을 사용한 그래픽은 뛰어났지만, 너무 과하게 시뮬레이션을 추구했다는 평을 받아 흥행은 별로 좋지 않았다[101] 단, 르브론은 19-20시즌에 다시한번 우승 반지를 거머쥐며 우승하는 능력 역시 꿇리지 않음을 확실하게 증명하는데 성공하였다..[102] 이기지 않고는 못배기고, 이길때까지 성장하지 않고는 못배길 정도로 승부욕에 미쳐있다는 점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103] 콰미랑은 좀 다른 것이, 콰미는 정말 포텐봤다 망한 거지만, 애덤 모리슨은 지병이 있다는 리스크를 감수하고 뽑은 것이다. 물론 이런 애를 3픽으로 뽑은 것 자체가 뻘짓이란 건 다를 바 없지만, 최소한 애덤 모리슨은 대학 무대를 주름잡았던 선수였다. 그리고 사실 콰미는 하필 워싱턴이 1픽으로 뽑아서 그렇지, 당시 스카우팅 리포트와 워크아웃 결과에 따르면 리틀 가넷이나 크리스 웨버에 비견되었다. 당시 1~4픽 안에 고졸 루키인 타이슨 챈들러, 에디 커리가 싹 다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볼 때 콰미는 어차피 최소 3픽안에는 뽑힐 것이었다. 뭐 레전설이 된거야 어쩔 수 없지만.[104] 플레이보이 1992년 5월호 인터뷰 중.[105] 물론 그뿐만이 아니라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지가 조던으로 인해 엄청난 판매부수를 기록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비단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뿐만 아니라 조던 시대에 스포츠 미디어는 웬만하면 흥했다.[106] 대표적으로 스카티 피펜의 공헌도가 과소평가된다.[107] 사실 피펜은 첫 우승 당시 1991년에는 올스타에 선정되지도 못했고, 첫 3연패까지만 해도 "슈퍼스타"라기보다는 "떠오르는 스타"의 위치였고(피펜이 본격적으로 리그에서 손꼽히는 스타로 인정받기 시작한 건 조던이 은퇴하고 올NBA퍼스트팀에 처음 뽑힌 1994년부터다) 수비력도 조던이 확실히 더 뛰어났기 때문에 스탯에 드러나지 않는 수비력까지 반영하는 방법이 어찌 생긴다고 해도 조던의 비중이 커지면 커졌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108] 최정상급의 수비와 공격을 동시에 보여주는 선수는 드물다. 재능의 문제도 있고, 체력적 문제도 있기 때문. 코비같이 근접한 선수들은 있지만, 코비도 조던처럼 수비왕급 수비력을 보여준 적은 없다.[109] 사실 유튜브에 래리 조던 덩크를 쳐서 나오는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꽤"가 아니라 괴물 수준으로 뛰어나다. 덩크도 그냥 덩크가 아니라 리버스 덩크나 백보드를 한 손으로 치고 덩크를 하는 등 1980년대 당시 기준으로 덩크콘테스트급 덩크를 선보인다. 조던이 키가 래리보다 훨씬 커지기 전까지 그를 한번도 못 이겼다는 걸 생각해보자. 위의 영상을 보면 조던이 장난스럽게 "형이 에어조던 1호에요. 전 2호고요"하고 한다.[110] 출처[111] 출처[112] 레지 밀러같은 샤프 슈터들은 중요한 공격권 직전에 타임아웃에서 잔뜩 바르고 나오기도 한다.[113] 제프리는 2018년 7월 기준으로 만 29세, 마커스는 만 27세다. 둘 다 농구를 은퇴하고 마커스는 사업을, 제프리는 2013년에 나이키의 경영자 훈련 프로그램에 참가한 것이 마지막 소식인데, 현재 회사생활을 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114] 블로거들을 불러 구경시켜줬는데, 이 영상에서 나오는 차고만 여섯개 있는 저택은 게스트하우스다. 조던 본인과 가족이 쓰던 시설들은 나오지도 않은 것. 해당 영상[115] 출처[116] 사실 요즘 팬들의 경우 탈모하면 르브론 제임스가 가장 유명하겠지만, 조던은 20대 중반부터 정수리 부분까지 훤히 벗겨지는 등 르브론보다도 더 심했다. 이 때문에 88,89년 정도 조던을 보면 머리 때문에 유독 더 나이들어 보인다. 다만 얼굴 자체는 젊고 상당한 미남이기 때문에 머리를 아예 밀어버리자 오히려 젊어보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실제로 머리를 민 90년대 초반과 2000년대 초반의 워싱턴 시절까지 사진을 비교해보면 차이가 크게 없다. 다만 은퇴한 이후 급격하게 살이 찌기 시작해 급노화하기 시작했다.[117] 시카고 불스는 조던 이전 9시즌 동안 2시즌 밖에 플레이오프를 못 간 약체팀이었는데 조던은 드래프트에서 불스에 뽑히면서 "내가 이 팀에 가는 이상 반드시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겠다라고 선언했고 정말로 그 약속을 지켰다.[118] 조던과 불스는 이 3번의 패배동안 하나씩 패배 횟수를 줄여가더니 끝내는 디트로이트를 꺾어버렸다.[119] 이 중 보스턴은 한번은 역사상 최강의 팀 중 하나이자 우승팀, 한번은 동부 우승팀, 디트로이트는 동부우승/우승/우승팀이었으며, 올랜도는 동부 우승팀이었다. 즉, 조던을 이긴 팀 중 가장 약팀이 그 해 동부 2위이자 59승한 벅스였다.[120] 그 외엔 "King"이라고도 불렸는데 98년 올스타전 전에 해설자 밥 코스타스가 코비 브라이언트를 소개하면서 "아직 왕이 건물 안에 있다는 걸 알아야 해요"라고 언급했고, 96년 결승 도중에 조던이 페이더웨이를 넣자 "왕이 두 점 더 넣습니다!(Two more down for the king!)"이라고도 했다.[121] NBA팀들은 보통 선수나 관계자들에게 지인들이나 가족, 친구들에게 줄 티켓을 몇 장씩 배부한다. 당연히 원한다고 다 주는 건 아니고 팀 내 비중에 따라 다른데 연공서열은 무시되고 철저하게 인기/비중 순이라서 04-05시즌 샬럿 밥캐츠처럼 약체 신생팀인 경우 에메카 오카포는 루키면서도 에이스이기 때문에 티켓을 넉넉하게 받아 친지들에게 보냈다. 어쨌건 시카고 불스같이 초초초인기팀의 경우 (97-98시즌 당시 티켓 판매를 시작하기 전부터 줄이 길게 늘어져서 당일 정오에 전 시즌 티켓이 다 팔렸다고 한다) 후보들은 사비로 사거나 아예 못 사는 경우도 많았는데 조던은 매 경기 12~20장씩 원하는대로 다 받을 수 있었다(이런 티켓들은 비매용으로 빼놓는 경우가 대부분). 브라운은 팀에서 11~12번째 정도 비중을 가진 실력이 떨어지는 선수였기에 (3연패 기간동안 플레이오프에서 평균 6분을 뛰었다), 티켓을 못 받은 것.[122] 다만 저녁 같이 먹고 계산서를 먼저 집는 건 잘 못한다고. 사실 조던은 과거 절친이었던 찰스 바클리가 인증했듯이 천하의 짠돌이라고 한다. 재밌는건 위에서 승부욕의 화신으로 언급된 우즈 역시 짠돌이라고... 바클리 왈, "이 녀석(조던)과 타이거는 제가 아는 사람들 중 제일 짜요!"[123] 이 부분은 퍼듀가 헷갈린 것으로 보인다. 팩슨은 94년에 은퇴했고, 하퍼는 94년 오프시즌에야 불스에 합류했으므로 둘은 불스에서 같이 뛴 적이 없다. 그리고 팩슨은 퍼듀가 불스를 떠난 95~96시즌부터 코치로 합류했다. 즉, 팩슨, 하퍼, 퍼듀 셋이 동시에 불스에 몸을 담았던 적은 없다. 퍼듀는 93~94시즌에 팩슨과, 94~95시즌에 하퍼와 동료였으므로 헷갈린듯. 피펜은 NBA 생활에 익숙해지자 조던의 화려한 라이프스타일을 따라하기 시작했는데, 1차 3연패 당시 조던, 피펜 등 슈퍼스타들과 잘 어울린 건 롤플레이어 클리프 레빙스턴이었다. 여담으로 레빙스턴은 애틀란타 시절 도미니크 윌킨스와 어울리다가 돈이 쪼달려 고생을 했는데, 90시즌 불스와 협상 도중 급전이 필요했던 그가 제리 크라우스에게 낚여 피본 적이 있다.[124] 같이 훈련을 했던 동료 BJ암스트롱에 따르면 "최고의 선수들을 초청하면 시즌 시작 전부터 마이클이 그 선수들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란 계산 하에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게 유행 비슷하게 되어서 너도나도 스튜디오에 와서 조던을 상대하게 된 것.[125] 물론 샬롯이 이 지경이 된 것은 조던의 탓이 크다.[126] 그는 젊었을 때 아이재아 토마스(185cm)같이 작고 재빠른 선수들을 무리 없이 따라갈 수 있었으며, 30대 중반에도 알렌 아이버슨(183cm)을 따라갈 정도로 재빨랐다.[127] 드웨인 웨이드러셀 웨스트브룩은 조던보다 작음에도 사이즈 15를 신는다. 175cm 단신인 아이재아 토마스는 사이즈 12. 반면 203cm 장신인 폴 조지도 키에 비해 작은 사이즈 12이고, 라쉬드 월러스는 211cm나 됨에도 불구하고 조던과 발 크기가 같다.[128] 실제로 조던과 절친했던 전 동료 BJ암스트롱은 조던이 "연습에서 상상도 못 한, 경기에서 볼 수 없었던 플레이를 하곤 했다"고 회고했다. 효율을 중시하는 조던 특성상 도박에 가까운 온갖 초고난이도 플레이를 부담없이 연습때 했을지도...또한 Jordan Rules에 보면 (피펜이 성장하기 전인 80년대 후반까지) 조던을 막을 선수나 전술이 없어서 연습이 지장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다만 이는 당시 조던의 이기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걸로 부정적으로 서술되었다. 팀 전술 훈련이고 뭐고 그냥 자기가 다 박살내 버렸다고).[129] 실제로 로드맨은 아이제아 토마스, 마이클 조던 등 강력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한 리더를 좋아했다. 불스로 온 계기가 코트 위에서 신사적이고 상대적으로 유순한 데이비드 로빈슨의 성격이 우승으로 이끌기에는 부족했다고 느껴서 이다. 로드맨은 찰스 바클리, 찰스 오클리, 알론조 모닝, 드마커스 커즌스 등에 비하면 오히려 얌전한 선수이다. 요란한 염색과 코트 밖에서의 기행이 이미지를 만든 것이지 농구에 관해서는 그 누구보다 팀에 헌신했고 감독, 리더의 말에 잘 따른 선수이다.[130] 다만 그랜트는 ESPN의 빌 시몬스가 진행하는 b.s. report에 출연해 조던과 친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다고 해명한 바 있다. 또 그랜트는 여기서 조던을 높게 평가했는데, 본인이 뛰었던 2000년대 초 레이커스와 1990년대 초 불스와의 비교에서 불스의 손을 들어주며 "마이클은 어떻게든 승리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선수다."라고 평한 바 있다.[131] 다만 조던이 빌 카트라이트를 유독 못살게 굴었던 것은 당시 시카고의 보디가드이자 팀 내에서 얼마 안 되는 조던의 절친이기도 했던 찰스 오클리를 뉴욕 닉스로 트레이드를 시키고 데려온 선수가 빌 카트라이트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때 조던의 분노가 얼마나 극심했던지 단장의 사무실까지 찾아가 몇 시간이나 시위를 할 정도였다고. 그리고 상술되어있듯 둘은 화해하며 갈등을 봉합한다.[132] 피펜은 자신을 가혹할 정도로 대하는 조던에게 오히려 악으로 깡으로 덤벼들었고, 그 덕에 엄청난 속도로 성장한 케이스이다. 피펜은 무명 대학의 무명 선수, 드래프트 당시 고작 1년 선배였고 2라운드 출신 벤치 멤버에 불과한 데니스 로드맨에 비교되던, 총재조차 본명을 헷갈려 드래프트장에서 이름을 잘못 부른 무명이었다. 그런 피펜이 역대 위대한 50인에 들 정도로 성장한 것.[133] 피펜의 유명한 Sit-down 사건 직후 라커룸에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실망을 표했고, 피펜이 이에 크게 뉘우치게 한 것도 카트라이트이다. 많이들 간과되는 게 이 사건은 4차전이었고, 당시 불스는 전력상 우위인 닉스를 상대로 7차전까지 갔다. 즉, 이런 참사에도 팀 케미스트리를 유지한 것. 여기엔 1차 3연패 시절부터 조던과 함께 공동주장이었던 인격자 카트라이트의 역할이 컸다. 그러나 이 시즌 이후 자유계약으로 시애틀로 이적, 여기에 피펜의 절친이자 동기인 그랜트까지 팀을 떠나 케미가 완전히 붕괴하게 된다.[134] 감독직 전까지 Open Court 등에 자주 출연한 커의 모습을 보면, 그는 조던을 모든 방면에서 가장 높이 평가하며, 심지어 패널 중 유일하게 역대 최고의 덩커가 "덩크 콘테스트에서였건, 실전에서였건 둘 다 조던"이라고 평했다.[135] 그래서 국내에서의 별명중 '''쪼잔왕'''이라는 웃기지만 웃지 못할 별명도 있다.[136] 아직까지도 그 관객의 정체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아서 소문에 따르면 유타 재즈 구단주였다고 하는데, 칼 말론증언에서도 누구인지 정확히 모르겠다고 한다. 사실 이 시점에서 유타 재즈 구단주일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한다. 구단주 래리 밀러는 말론이 입단하던 85년에 구단주가 되었고, 말론과도 당연히 잘 알던 사이였는데 저렇게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표현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래리 밀러설은 샘 스미스가 그 유명한 Jordan Rules란 책에서 제기한 설인데, 스미스가 시카고 트리뷴에서 불스를 오랫동안 담당한 저명한 조던 전문가이긴 하지만 해당 경기는 정규시즌, 게다가 재즈 원정인데다 1987년 당시 유타는 그냥 중위권 팀인지가 이 경기에 동행했는지도 의문이다. 이 시즌에 전 경기 출장했기 때문에 이 자리에 있었을게 확실한 말론의 말이 더 신방성이 있다.[137] 사실 윌킨스는 레전드 도미니크 윌킨스의 친동생으로, 형과 마찬가지로 운동 능력이 매우 뛰어나 조던을 상대적으로 잘 막는 선수이긴 했다. 그는 1급 수비수까진 아니었지만 당시 조던은 너무나 빠르고 강한 선수라 일단 그의 운동 능력을 어느 정도 따라갈 수 있는 선수여야 매치업을 할 수 있었다. 실제로 80년대 후반 캐브스에서 가장 좋은 외곽 수비수는 크레익 일로였지만 조던을 막는 게 상성이 좋았던 선수는 89시즌까지 클리블랜드에서 뛴, 운동능력과 사이즈가 되고 팔이 긴 론 하퍼였다. 캐브스는 전 시즌에 57승을 거두고도 조던을 못 막아 불스에 석패했기 때문에 전 시즌까지 뉴욕에서 뛰던 윌킨스를 조던을 막으란 특명을 주고 영입한 것이다. 당시 언론에서는 "Jordan stopper"란 수식어까지 붙었을 정도. 물론 윌킨스고 하퍼고 조던에게 "덜 털렸다" 수준이지 잘 막진 못했다. 하퍼는 말 한번 잘못 했다가 플레이오프에서 한 경기 55점을 얻어맞을 정도.[138] http://cafe.daum.net/ilovenba/7n/245200 영어 원문기사: http://articles.chicagotribune.com/1988-05-01/sports/8803130519_1_bulls-domination-craig-ehlo-solitary-confinement 사실 하퍼로선 좀 억울할 만한 것이, 해당 멘트는 기자들과 얘기하다가 자연스레 나온 말일 뿐이었고 정작 하퍼와 조던은 바로 전 주에 같이 식사를 할 정도였기에 신경전을 벌일 이유가 전혀 없었다. 조던의 거의 편집광적인 승부욕의 피해자. 여담이지만 하퍼는 성격이 좋기로 유명한 인물이라 시카고 시절에도 조던을 포함해 다른 팀원, 관계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이런 하퍼의 리더십, 원만한 성격과 트라이앵글 오펜스에 대한 높은 이해도 때문에 필 잭슨이 레이커스 감독으로 부임할 당시 은퇴하려던 하퍼를 만류하고 자기 팀으로 데려온 적이 있다.[139] 서태웅이 풍전전에서 한 쪽을 다치자 두 눈 감고 던진 장면은 이 부분을 참조했다. 무톰보 신인 시절은 91-92시즌이고, 전국대회 연재는 1996년도 이다.[140] 이 대사는 이후에 전세계적인 밈이 되었는데, 회사, 지역, 사회, 학교등 전세계 어디던지 그 집단의 초보자들이 그 집단안에서는 흔한 내용을 물어볼때 대답으로 많이 쓰인다. 예를들어, 한국에 와서 생삼겹살을 처음 먹어본 외국인이 '한국인은 맨날 이렇게 먹나요?'라고 물었을때 대답으로 "Welcome to Korea"라고 답하는 식이다.[141] 무톰보의 시카고와의 첫 대결에서 조던이 무톰보에게 그가 슛을 한번이라도 성공시키면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도발하였고, 무톰보가 골밑슛 하나를 성공시킨 뒤 조던에게 눈 감고 자유투를 한번 던져보라고 받아쳤던 것이라고 한다.5분50초부터[142] 링크 영상의 2분 36초부터.[143] 애초에 아무리 뛰어나도 NBA무대에서 저런 식으로 한 선수가 스스로 제약을 두고 맘대로 하는 건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유명해진 래리 버드의 "왼손만 써서 득점하겠다" 경기에서도, 중장거리 점프슛은 오른손으로 쐈으며, 전체적으론 오른손으로 득점한게 좀 더 많았다. 조던이 아무리 뛰어나도 수비수들이 호구도 아니고, 특히 시애틀처럼 뛰어난 팀을 상대로 주옵션을 아예 봉인하고 경기하는 건 불가능하다. 저런 식으로 일단 점퍼만 노골적으로 노리는 식으로 경기하는 것만 해도 상식 밖으로 대단한 것.[144] 둘은 그렇게까지 형편없는 선수들은 아니었다. 둘 다 NBA에서 10년 가까이, 혹 10년 이상 뛰었으며 특히 랜디 브라운은 불스 가드 중 (조던 정도를 제외하면) 가장 운동능력이 뛰어난 선수라서 수비에서 은근 보탬이 됐다. 물론 나머지 능력이 떨어져서 출전시간은 별로 못 받았지만. 둘 다 지극히 평범한 벤치멤버지만 D리그급은 너무 나간 것.[145] 93년 3월 19일 경기[146] 당시 스미스는 경기당 평균 9득점 하는 별 볼일 없는 슛가였지만 이날 조던의 매치업으로 나와서 15/20개의 2점 야투를 성공시켜버리며 37점으로 자신의 커리어하이 기록을 쓴다. 조던은 이날 9/27로 25득점을 기록했다.[147] 경기 시작전 기자들에게 전반전에 전날 스미스가 넣었던 37득점을 넣겠다고 호언장담했다고.[148] 더불어 스미스는 이날 15득점 밖에 못했다고 한다.[번역] "내가 해낼거라고 말했지?"[149] 닉 앤더슨은 1989년 1라운드 11픽으로 올랜도 매직에 지명된 준수한 슈팅 가드였으며 해당 시즌 플레이오프에서 괜찮은 활약으로 팀을 파이널로 이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는데 문제의 파이널 1차전 110-107로 앞서던 종료 5초전 1개만 넣으면 승리가 확정적인 상황에서 연달아 얻어낸 프리드로우 4개를 몽땅 실패하는 대삽질. 이후 케니 스미스에게 3점슛을 얻어 맞고 경기는 연장전으로. 그리고 연장 종료 직전의 하킴 올라주원의 팁인으로 1차전을 내준 이후 올랜도 매직은 무기력하게 스윕 당하며 우승을 헌납한다. 그리고 닉 앤더슨은 파이널의 역적으로 이름을 남기게 된다.[150] 조던이 은퇴하고 야구에 도전한 이유가 사실 조던이 자신이 출전한 경기를 포함해서 NBA 경기에 돈을 걸다가 걸린 걸 조던의 상품성 때문에 징계를 주지 않고 참던 NBA 수뇌부가 폭발한 것이라거나, 심지어 아버지가 살해당해서 늪에서 발견된 것도 도박 빚이 원인이었다는 루머가 있을 정도.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 정도 건이라면 그건 상품성과 무관하게 언젠가 터져버릴 시한폭탄과 같은 문제가 되기 때문에 그대로 안고 가려야 갈 수가 없다. 게다가 버리지 않고 상품성을 보존한답시고 징계 대신 다른 스포츠, 그것도 프로에 도전하게 내버려 둔다는 게 말이 되는가? 몸이 완전히 망가질지도 모르는데? 일부 농구팬들의 생각과 달리 야구는 어깨와 무릎에 엄청난 무리를 주는 스포츠다. 그나마 조던이라 2년 동안 이런 뻘짓을 하고도 농구하는게 가능했던 것 뿐이다. 실제로는 이건 거의 미친 짓이고, 은퇴 후 몇 년을 딴 짓하다 복귀해서도 여전한 지배력을 보여주며 성공한 사례는 그만이 유일하다.[151] 오히려 89시즌엔 결승 상대인 LA 레이커스조차 스윕해버린 압도적 전력의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게 '''유일하게 플레이오프 패배'''(2패)를 안길 정도로 강팀들을 물고 늘어졌다. 참고로 배드 보이스는 백투백 우승 시즌에 플레이오프에서 7경기 패배했는데 이중 5경기가 조던 불스에 의한 패배였다. 비록 연장 접전 끝에 패하긴 했지만 역대 최강의 팀 중 하나이자 당대 최강의 수비팀인 86 보스턴 셀틱스를 상대로 플레이오프 기록인 63점을 세운 것도 그의 강심장을 드러내는 사례라 할 수 있겠다.[152] 게다가 당시 박스 스코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98파이널은 시카고가 평균 88점, 유타는 80점에 시리즈 통틀어 90점을 넘긴 적이 시카고가 2,3차전에서 두번뿐일 정도로 저득점 시리즈였으며, 시카고 불스는 피펜이 15.7점, 쿠코치가 15.2점, 롱리와 하퍼가 5.3점, 5점을 넣은걸 제외하고는 한명도 4점을 못 넘길 정도로 단체로 공격에서 삽을 펐다. 즉, 당시 불스는 수비를 분산시켜 그의 어깨를 가볍게 할 선수가 없었으며 그나마 활약한 경기가 있었던 피펜과 쿠코치가 한 경기 활약하고 다음 경기 부진하는 식이었다. 즉, 집중수비를 받으면서 팀득점의 38%나 넣은 것으로 단순환산해서 팀평균이 100점 경기에서 38점을 넣은 셈이다. 심지어 2004년 2차 핸드체킹룰 개정 전이라 외곽선수들에 대한 수비가 훨씬 빡센 시점. 참고로 2020년 NBA파이널에서 우승팀 LA 레이커스가 평균 110점을 넣었는데, 조던의 득점비율을 여기에 적용한다면 41.8점이 된다. 물론 농구는 산수가 아니니 단순히 그렇게 이해할 일은 아니지만, 그만큼 조던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다고 이해할 수 있다.[153] 출처[154] 베일러가 전성 시절 활약할 때는 공격해서 득점하기가 현대 농구보다 훨씬 쉬운 편이었다.[155] 50점을 2회 이상 기록한 선수는 이들 뿐이며, 찰스 바클리(56점),레이 알렌(51점), 코비 브라이언트(50점), 빈스 카터(50점), 칼 말론 (50점), 도미니크 윌킨스(50점) 등도 한번씩 넘겨본 적이 있다. 르브론도 최근에 51점을 기록하며 여기에 합류했는데 문제는 르브론만 져서 파이널 게임에서 50점을 넣고도 진 유일한 선수가 됐다.[156] 목표 득점을 정하고 뛰는 선수이니 정말 차원이 다른 선수이다. 조던에게 1차, 2차 개인 스탯 따위는 정말 숫자에 불과한 선수이다. 참고로 2차 스탯은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 단순 참고용으로 해석해야 한다. 공을 많이 소유하는 선수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기에 레지 밀러, 클레이 탐슨 유형의 슛터에게는 낮게 측정된다.[157] 페이튼이 상대를 인격적으로 도발하는 입발이었다면, 조던은 상대방을 실력으로 무시해서 살짝 비꼬는 입발. 혹자는 우아하다고도 표현했지만 달리 보면, 생각하면 할수록 열받고 짜증나는데, 근데 틀린 말은 아니라 반박은 못하는, 사람 환장하게 하는 트래쉬 토킹의 소유자였다. 물론 조던도 페이튼의 트래쉬 토크에는 넌더리를 치면서 '그의 아가리에 농구공을 쳐넣고 싶었다.'라고 말했다.[158] 상술되어 있지만 조던의 1차 은퇴 이전 득점왕 7연패 기간동안 칼 말론과 각각 3, 4번씩 2위를 나눠가졌다.[159] 여담으로, 그들은 조던이 은퇴한 94년에 플레이오프에서 불스에게 밀려 또 탈락한다(...) 불스를 상대로는 5전 5패.[160] 물론 1999 NBA 파이널 당시 유잉은 부상중이었다.[161] 한 예로 토니 파커와 에바 롱고리아가 사귈때, 파커는 올스타급 선수고 롱고리아는 나름 인기가 많지만 연예계에서 정상급 스타는 아니었음에도 주목도는 롱고리아가 훨씬 높았다.[162] MJ는 그녀의 오빠인 마이클 잭슨의 이니셜과도 같다. 당연하지만 자넷이 조던을 잭슨으로 착각하고(...) 전화한 건 아니다. 무엇보다 조던은 실제로 마이클 잭슨 같은 사람들과 교류하던 탑 슈퍼스타였으니...[163] 이 두 선수는 조던 이후 가장 높은 인기를 누린 선수인데 커리어를 통틀어 이 리스트에서 조던보다 높은 순위를 차지한게 각각 한번씩 뿐이다. 르브론은 아직 커리어가 남았으니 그렇다고 쳐도 코비는 2010년 1위 이후 계속 순위가 하락세인데다, 2015년 12월 현재 은퇴를 선언함으로써 더 올라가긴 힘들어졌다.[164] 미국에서 공식문서를 쓸때 제외하면 미들네임을 쓰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친한 친구 사이에서도 미들네임을 서로 모르는 경우도 많을 정도.[165] 90년대 후반~2010년대 중반 선수들 중에서 가장 우승기록이 많은 코비 브라이언트와 팀 던컨조차 이 기록을 못 넘었다.[166] 농구는 슈퍼스타 한 명이 경기를 뒤집어 놓을 수 있는 종목이기 때문에 야구, 미식축구, 아이스하키와 비교하면 감독이 선수들에게 꼼짝 못하는 정도가 강하다. 르브론 제임스의 감독 어깨빵 사건 등등 지금도 마찬가지.[167] 피펜은 본명인 scotty가 별명일 거라는 당시 총재 데이비드 스턴의 생각으로 scott pippen으로 호명하고 자막에는 scottie pippen으로 나오는 등 무명 선수가 어이 없을 정도로 높은 순번으로 뽑힌 케이스였다. 먼 훗날 스카티 피펜이 영구 결번 되었을 때 농구계 인사들이 영상 편지를 보냈고 그 당시에도 총재였던 스턴 또한 영상 편지를 보냈지만, 이 일화를 아는 관중들이 야유 세례를 퍼붓는다.[168] NBA경기장이 훨씬 작고 선수들도 풋볼보다 적기 때문에 풋볼 경기장에서 농구경기를 하면 제대로 볼 수가 없다. 2010년 올스타전 같은 경우 카우보이 스타디움의 대형 화면이 크고 화질이 좋은 것으로 유명했고 시설도 특급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인데, 시설이 훨씬 안 좋고 기술이 떨어지던 98년에는 6만명 수용한 것도 무리해서 한 것이다. 실제 당시 장면을 보면 꼭대기 자리에선 코트가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169] 아이러니하게 위에도 적혀있지만 이런 점이 그의 인기에는 별 지장이 없었다. 조던은 05년까지 해당 항목에서 전 종목을 통틀어 최고의 인기선수였고, 그는 그의 수입에도 반영되었다. 실제로 르브론 제임스는 데뷔 초에 조던처럼 철저하게 이미지 메이킹을 하다가 히트 이적부터 부정적인 이미지가 추가되었는데도 최고의 인기선수로 군림했다. 또한 악동 찰스 바클리만 하더라도 조던 다음으로 최고의 인기스타였다. 다만 조던이 농구 자체의 항목을 넘어 시대의 아이콘이 된 것에는 특유의 그 완벽한 이미지가 크긴 했다.[170] 제리 크라우스는 라커룸 관련 이야기의 소스가 필 잭슨이었다고 의심했으며 굳건했던 둘의 관계가 틀어지는 시발점이 되었다.[171] 항목의 기사마이클 조던 - 더 라스트 댄스에 나오는 내용으로 필 잭슨은 과거 MAVERICK이라는 자서전에서 본인의 LSD 복용 및 업계의 뒷 이야기를 서술하여 업계에서 찍힌 인물이었다. 라스트 댄스에도 나오는 내용이지만 그럼에도 제리 크라우스는 코치 면접에서 입을 복장을 정해주거나(일전에도 면접을 보았지만, 면접에 적합하지 않은 복장을 입고 와서 탈락했다), 면접에서 나올 질문 내용을 알려주었으며 당시 감독인 덕 콜린스에게 큰 문제가 없는 이상 영입하자며 영입을 주장했을 정도로 파격적인 대우를 했는데, 라스트 댄스에서 필 잭슨의 선수 시절을 70년대의 데니스 로드맨이라고 평했던 것처럼 불스 감독 부임 이전 필 잭슨의 평판은 자서전 팔아먹으려고 업계 치부(마약, 문란한 사생활 등)나 밝히는 약쟁이 수준이었다.[172] 사실 코비의 비극적인 사망 전후로 많이 부각되었다. 오히려 그 전까지는 팬덤끼리 관계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이 그렇게 친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으며, 코비의 추모 분위기였던 2020 시카고 올스타 전 때 조던이 모습을 나타내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오해가 있었다. 되돌아보면 코비 추모 분위기가 되어야 할 올스타전에 불스의 상징이나 다름없던 자신이 등장하면 스폿라이트가 자신에게 몰릴까봐 불참한 것으로 보인다.[173] 공격수가 포스트업하고 힘으로 밀어내고 있을 때 수비수가 갑자기 확 뒤로 물러서면 공격수가 밀어내던 힘이 갈 곳을 잃고 비틀거리다가 넘어지거나 공을 놓치게 된다. 한국에선 소위 "의자빼기"라고 불리는 기술로, 잘 쓰면 상대의 실책을 유도할 수 있지만 공격수가 낚이지 않으면 그냥 비켜주는 꼴이 되는 수비 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