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부뉴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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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is Buñuel (1900. 2. 22 - 1983. 7. 29)'''

'''''초현실주의는 유머의 힘으로 태어났고 유머의 힘으로 해방을 꿈꾼다. '''''

'''''지금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감독은 루이스 부뉴엘입니다.”'''' - 앨프리드 히치콕

1. 소개
2. 생애
3. 특징
4. 작품 목록


1. 소개


스페인/멕시코영화감독. 초현실주의 사조를 이끌었으며, 사회 풍자적인 내용과 정렬된 서사를 파괴하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동원해 영화적 가능성을 확장시킨 작품으로 유명하다. 때문에 라틴 영화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카를로스 사우라, 훌리오 메뎀 심지어 기예르모 델 토로까지 그의 영향력은 아직도 지대하다.
특히 부르주아와 가톨릭에 대한 반발감이 엄청나 커리어 대부분이 신성모독적이며 소송방지급 유머로 가득한 편이다. 황금시대와 제 2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비리디아나는 신성 모독적인 내용으로 스캔들로 번졌을 정도. 이러한 부뉴엘의 대담함은 표현의 자유를 확장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2. 생애


1900년 2월 22일 아라곤(Aragon) 지방의 칼란다(Calanda)라는 시골 부잣집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귀족 집안이고, 아버지는 쿠바 아바나에서 사업으로 크게 성공한 좋은 집안의 아들이었다. 지방의 수도 사라고사에 위치한 예수회 학교에서 중등교육을 받았다. 자서전 '내 마지막 한숨'에 따르면 매우 엄격한 종교교육을 행하고 중세 라틴어를 사용했을 정도로 보수적이어서 14살 때 신앙에 회의감을 느꼈고 오히려 거부감만 많아졌다고 한다. 성과 신성모독에 눈을 뜬 것도 이 시기이며(...) 특히 인간의 욕망을 종교가 어떻게 억압하고 남은 여생동안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강렬하게 체험한 이 유년기의 경험은 훗날 창작력의 원천으로 평생 자리잡는다.
1917년부터 1925년까지 마드리드의 대학 기숙사에서 거주하는 동안 살바도르 달리,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를 비롯한 친구들을 만나면서 예술/인문학적 감수성을 기르게 된다. 졸업 후 파리로 건너가 프리츠 랑의 운명(Der Mude Tod, 1921)을 보고 영화감독이 되기로 결심했으며, 장 엡스탱 감독이 에드거 앨런 포의 동명소설을 각색한 어셔 가의 몰락(28년작)의 조감독으로 참여했으나 의견 차이로 중간에 그만두었다고 한다. 이후 고향에 계신 어머니로부터 제작비를 받아 달리와 함께 꾸었던 꿈을 토대로 안달루시아의 개를 완성해 대중에 선보였고, 초현실주의자들의 찬사를 받았다. 이듬해 드 누아유 자작(Viscount of Noailles)으로부터 지원받은 5백만 프랑으로 황금시대를 연출, 11월 28일 '스튜디오28' 극장에서 상영됐으나 우파 지식인들과 가톨릭 신자들이 스크린에 잉크통과 연막탄을 던지는 등 수모를 겪었다.[1]
1933년에는 '아신'이라는 가명의 친구가 복권에 당첨되어 받은 상금으로 우르데스 마을(Las Hurdes)의 빈민들의 시궁창스러운 일상을 담아낸 빵 없는 대지를 개봉해 국가와 종교가 관심을 가져줘야 한다는 문구로 크레딧을 장식해서 프랑코파를 비롯한 보수층들의 심기를 건드려 상영금지를 당한다.
스페인 내전에서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승리를 거두자 미국으로 망명해 뉴욕시MoMA에서 스페인어 더빙 편집 등 유성영화 기술을 익히지만 미국 생활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막스 에른스트의 증언에 따르면 1946년 하루는 박물관 감독관들이 그에게 와서 정통 가톨릭을 부정하는 영화인 황금시대살바도르 달리와 공동으로 각본을 집필한 것이 사실이며 무신론적이고 불경한 작품이 맞냐고 물었고, 부뉴엘은 무신론적인 작품이 맞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감독관들은 사직을 요구했고, 며칠 후 해고된 부뉴엘은 막스와 함께 달리가 살고있는 5번가로 찾아가 뺨을 때리고 그대로 나온 뒤 인연을 끊게 되었다고 한다.[2] 달리가 자서전에 부뉴엘을 공산주의자라고 고발해 그렇게 됐다는 이야기는 사실 와전된 것이다. 최종적으로 멕시코에 정착해 시민권을 얻게 되고 1947년부터 1965년까지 21편의 영화를 감독하였으며[3] 프랑스로 넘어가 세브린느를 포함한 후기 명작들에서도 스페인 혹은 라틴 아메리카와 관련된 문화 요소를 곳곳에 삽입했다. 1983년 7월 29일 멕시코시티에서 눈을 감는다.
도발적인 작풍과는 달리 아내하고는 50년동안 해로했다. 아들 역시 감독이 되었으나, 별 반향을 얻지 못했다. 손자인 디에고 부뉴엘은 한국계 미국인과 결혼했다.

3. 특징


초현실주의로 이름을 알린 만큼 흔히 전형적인 논리적 관습을 전복하고 권력 및 상류층들이 사회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가치를 조롱하고 관음증을 특유의 도발로 빗나가게 만든다. 당장 데뷔작부터 개는 한 마리도 씬에 담겨있지 않고 "옛날 옛적에" "8년 후" "봄이 되어" 같은 자막 카드가 뒤죽박죽 섞여 관객들이 서사 자체를 이해하는 것을 비웃으며, 황금시대의 마지막 시퀀스는 사드 후작소돔의 120일의 결말을 그대로 가져왔는데 블랑지 공작을 예수 그리스도처럼 형상화해 당시 프랑스의 우익, 반유태인 단체가 난동을 피우기까지 했다. 또한 트리스타나에서 극 중 주연인 카트린 드뇌브가 하인에게 알몸을 보여주는 장면에서도 카메라는 그녀가 냉소를 머금고 있는 표정만을 비추어 관객들의 욕망을 걷어차 버린다.
또한 미겔 데 세르반테스라든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에서 찾아볼 수 있는 라틴 문화 특유의 세속적이고 뻔뻔한 상상력을 펼치기로 유명했다. 태연하게 비현실적인 상황을 들이대면서 대상을 조롱하는 부뉴엘의 유머는 판타지 장르와 현대 부조리 코미디블랙 코미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부뉴엘 본인이 밝히길 에른스트 루비치, 앨프리드 히치콕, 지그문트 프로이트, 카를 마르크스, 프리츠 랑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루비치에게서는 코미디를, 히치콕에서는 시선의 영향을, 프로이트와 마르크스, 랑에게서는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고.

4. 작품 목록



[1] 시사회 당시 부르주아 관객층들은 "유대인 타도"를 외치면서 달리와 막스 에른스트의 그림들을 훼손하기까지 했다.[2] 같은 해 다섯 손가락을 가진 괴수(The Beast with Five Fingers)를 연출할 예정이었으나 무산되었다.[3] 새벽+애련의 장미로빈슨 크루소+젊은 연인의 경우 각각 프랑스, 미국 자본으로 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