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트뤼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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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çois Truffaut'''
(1932. 2. 6 - 1984. 10. 21)
'''" 프랑수아 트뤼포가 영화사상 최고의 감독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가 영화사상 가장 영화를 사랑한 감독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1]
ㅡ 정성일
1. 개요
프랑스의 영화 감독, 영화 평론가, 배우, 작가.
누벨바그의 핵심 인물로, 역사상 가장 대표적인 '''시네필''' 중 하나이며, 또한 영화사에서 '작가주의'라는 사조를 널리 퍼뜨린 장본인이기도 하다.
《카예 뒤 시네마》를 중심으로 영화계 다방면에서 활약했다.
2. 소개
일명 "'''시네필의 영원한 초상'''". 혼신을 바쳐 영화를 사랑한, 불꽃 같은 삶을 살았다.
1932년, 방탕한 파리 여인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트뤼포는 스스로 불행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고 회상했다. (계부를 아버지로 생각했다고 한다) 친부는 한번도 만난적이 없지만, 알고 있었다. 사립탐정을 고용해서 알아냈는데, 바욘 출신 유대인 치과의사었다고 한다. 몰래 뒤를 밟아 그의 집까지 가보기는 했지만, 결국 마음을 돌리고 극장에서 찰리 채플린의 〈황금광 시대〉를 구석에서 봤다고 한다. 그의 아내 말에 따르면, 계부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만나지 않았다고.
10대의 트뤼포는 '''계부의 타자기를 훔쳐서''' 번 돈으로 영화클럽을 조직하고 운영했다고 한다. 10대에 그는 양아치와 같은 삶을 지냈는데, 소년원까지 들락거렸다고 한다.[2] 이때 그를 딱하게 여긴 상담원이 앙드레 바쟁을 소개시켜줬고, 이후 트뤼포는 방황을 접게 된다. 그는 앙드레 바쟁의 후원을 받으며 자랐고, 트뤼포는 바쟁을 아버지처럼 여기며 많은 것을 배웠다. 이 후원의 영향인지, 트뤼포도 나중에 커서 장 피에르 레오(400번의 구타 주인공)를 후원했다.
나중에 군대에 가서 사이공(현 호치민)에 갔지만, 탈영해서 영창까지 갔다(...) 이 경험 때문인지, 프랑스 군대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살았다. 프랑스군이 악랄하게 나온 가짜 다큐멘터리 〈알제리 전투 (La batalla de Argel, 1965)〉가 이탈리아 베니스 영화제 대상인 금사자상을 받자, 장 뤽 고다르를 비롯한 많은 프랑스 영화인은 말없이 퇴장하던 반면, 트뤼포만 혼자 남아 박수까지 치며 축하해준 적이 있다.
1984년, 뇌종양 진단을 받은 후 별세했다. 향년 52세.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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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뤽 고다르와는 서로 끔찍이 아끼던 절친이었는데, 1970년대부터 갑자기 견원지간이 되어버렸다.(...)[3] 고다르가 마르크스주의로 변한 탓이라고 혹자들은 보고 있다.[4] 서로 원수가 된 후엔, 언제 친구였냐는 듯 서로를 헐뜯었다. 트뤼포가 고다르의 자서전 제목으로 "'''한번 쓰레기는 영원한 쓰레기'''"를 추천해줬다고. 고다르는 나중에 트뤼포가 뇌종양으로 죽어가자, '''"그렇게 나쁜 책을 많이 읽어서 그래."'''라고 깠다.
트뤼포가 죽자, 그의 페르소나인 장 피에르 레오는 절망에 빠져 방황했는데, 고다르가 이렇게 타일렀다고 한다. '''"너는 로버트 미첨[5] 이 아직 도달하지 못한 지점에 도달할수 있는 배우야. 너는 유령이 아닌 새로운 아버지,새로운 영화를 만나는 날까지 앞으로 나가야 해."'''
스티븐 스필버그의 요청으로 〈미지와의 조우〉에 주연 중 한 명으로 출연했다. 스필버그랑 나름 친분이 있었는지, 포켓 머니라는 영화의 영제도 스필버그가 제안한거라고 한다.
여성편력이 굉장했다. 때문에 공식적인 결혼생활은 6년에 불과했다.
프랑스 영화계의 이단아인 모리스 피알라를 발굴한 감독이기도 했다. 정작 피알라는 트뤼포랑 소원해지고 고다르와 친해졌다는게 아이러니.
4. 말말말
"나는 영화가 영화를 만든다는 기쁨이 아니면, 영화를 만드는 데 따르는 고통을 표현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나는 이도 저도 아닌 영화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나는 예술을 사랑하고 무엇보다 영화를 사랑한다'''. 나는 일한다는 것은 배설물을 폐기하는 것과 같이 필요악이라 간주하며,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루에 세 편의 영화, 일주일에 세 권의 책, 위대한 음악을 담은 레코드만 있다면 나를 행복하게 만들기에 충분할 것이다. 머지않아 내게 찾아올, 그리고 이기적 인간으로서 내가 두려워하게 될 나의 죽음의 그 순간까지."[6]
''' '''[7]
첫 번째 단계는 많은 영화를 보는 것이었다. 두 번째로 나는 극장을 나설 때 감독의 이름을 적어두기 시작했다. 세 번째 단계에서 나는 같은 영화를 보고 또 보면서 내가 감독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박강수 팩트체커의 기사에서, #뉴스톱)
The first step involved seeing lots of movies; secondly, I began to note the name of the director. In the third stage I saw the same films over and over and began making choices as to what I would have done, if I had been the director. 트뤼포의 책, 구글도서
5.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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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피에르 레오가 나온 영화. 나중에 레오는 트뤼포 영화의 페르소나가 된다. 앙트완 5부작의 시작이며, 자전적인 면이 강한 영화. 우리나라에 들어올 땐 일본에서 직역한 것(400回の殴打)을 그대로 가져와서 이러한 제목으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프랑스어의 관용구 'faire les quatre cents coups'는 말에서 유래해 '무분별하고 제멋대로 사는' '말썽꾸러기'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리고 애초에 트뤼포의 첫 영화인 단편영화 이름이 말썽꾸러기로도 해석이 가능한 '개구쟁이들(Les Mistons)'이다. 일본에서도 최근에는 '大人は判ってくれない(어른들은 모른다)'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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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델 H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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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프랑스 합작. 책에다 불을 싸지르는 발화수를 다룬 디스토피아영화. 레이 브래드버리의 소설을 각색, 나치에게 점령당한 프랑스 상황을 대입했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감독직을 포기하고 선택한 영화이다.[8] 이 영화를 준비하는데 5년 정도가 걸렸다. 주연이었던 오스카 베르너와는 사이가 엄청 안 좋았다고 한다.
원작자 레이 브레드버리는 줄리 크리스티가 1인 2역을 맡은 것을 빼고는 영화 각색을 좋아했고, 직접 편지를 적어 프랑수아 트뤼포에게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프랑스 내의 평은 별로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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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복 입은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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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웃 집 여인(La Femme d’à côté)
6. 외부 링크
프랑수아 트뤼포의 유년 시절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