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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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명제세 전후면
독립운동가 명제세의 일제 주요감시대상 카드. 독립투쟁 중 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때의 모습으로 보인다.
'''명제세'''(明濟世, 1885년 2월 4일 - 1964년 1월 4일) -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및 초대 감사원장. 본관은 서촉(西蜀).#
2. 상세
구한말 평안북도 영변군 봉산면 망일동#의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유년기를 조선에서 보내다가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에 건너가 외국어학교 중국어과를 3년 만에 졸업하고 귀국한 뒤 1909년 이후부터 민족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남북만주와 시베리아를 내왕하면서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1910년 이후 광복단에 가입, 활동하였다.
1919년 3월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박은식(朴殷植) 등 30명과 선언서도 작성하였다. 항일단체 조직의 필요성을 느끼고 조선홍(趙宣弘) 등 30여 명과 같이 같은 해 4월 18일 중국 톈진(天津) 시내 프랑스 조계 내에서 톈진불변단(天津不變團)을 조직, 항일투쟁의 구심점을 삼았다.
톈진불변단에서 단장 조선홍을 도와 부단장으로 활동하다 그 해 8월 15일에 단장이 되었다. 톈진불변단의 실질적인 핵심 책임자로서 상해임시정부의 광복정책에 협조하였으며, 중국의 독립운동에도 적극 협조하였다.
1920년대에는 국내로 들어와 민흥회(民興會)를 조직, 신간회(新幹會)와의 합작 통합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독립투쟁중 5년여 옥중에서 고생한 적도 있었다. 1945년 이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과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간부로 건국과 통일운동에도 심혈을 기울였으며, 초대 심계원장(審計院長, 1948년 9월 4일 ~ 1949년 11월 23일)을 역임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1] . 납북된 이후 삶은 별로 알려진 게 없으며, 북한에서 사망했다는 게 전부이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2] .
사후 재북인사릉에 안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