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성

 


1. 개요
2. 장점
3. 단점
4. 국내의 산성
5. 해외의 산성
6. 참고 문헌
7. 관련 문서

山城 / Hill Fortress

1. 개요


[image]
'''부산광역시의 금정산성.'''
산세를 따라서 에 쌓은 성(城)이다. 드물게 평지에 가까운 낮은 구릉에 지은 성도 산성이라고 부른다. 산성은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하여 그 주변에 벽을 빙 둘러 지어서 마치 머리띠를 두른 것처럼 보이는 테뫼식(머리띠식)과 성 안에 넓은 계곡을 포용하고, 계곡을 둘러싼 산능성이를 따라 성벽을 지은 포곡식이 있다.
산이나 구릉에 짓는다는 특성상 성의 규모는 대부분 그렇게 크지 않으며, 복잡한 방호시설은 대개 갖추어지지 않았다. 삼국시대 국경선 지역에 설치된 산성들은 산성이라기보다는 거의 돈대에 가까운 수준의 작은 산성도 보인다.

2. 장점


우선 산성은 높은 지형에 위치하기에 방어하기가 유리하며, 산을 끼고 지은 성이기 때문에 공성병기의 사용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높은 방어력을 방어군에게 제공해준다. 산의 경사와 높이가 공격군에게 상당한 부담요소이기 때문에 여기에 적당히 낮은 성벽만 단순하게 빙 둘러쌓아 줘도 적에게 막막함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보면 알겠지만 평야에 짓는 평지성에 비해 요구하는 기술적 수준도 높지 않고 건설자재를 적게 들이고도 평지성 이상의 방어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성을 쌓았던 나라라면 반드시라 해도 좋을 정도로 산성도 보유하고 있었다. 산의 지형을 이용해 성벽을 쌓을 필요가 없는 절벽이나 숲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같이 양질의 사수들을 다수 보유한 나라라면 산성에 틀어박혀서 화살이나 총을 쏘아대는 것만으로도 적의 공격으로부터 상당기간 버틸 수 있었다.

3. 단점


터가 되는 산의 크기가 곧 산성의 크기여서 마음대로 크게 지을 수가 없으며 주로 험준한 산세에 지어졌기 때문에 평시의 교통행정의 중심지로 삼기에는 여러모로 적합하지 않았다.[1] 이 때문에 많은 국가에서 평지성을 수도로 삼고 적침을 받으면 가까운 산성으로 가서 농성하는 전법을 즐겨 사용했다. 예를 들면 고구려는 평소엔 국내성, 전시엔 환도성을 사용했고 신라는 평소엔 경주 월성, 전시엔 명활산성, 조선은 평소엔 한양도성, 전시엔 남한산성을 이용하는 식이다.
병력들이 산성에서 수비를 하기 때문에 평지의 일상생활 공간이 피폐해지는 것 또한 단점.
그리고 무엇보다 지형상 식량과 물이 떨어지면 치명적이라 제대로 된 산성을 지으려면 위치선정을 잘해야 했는데, 이러다보니 난공불락의 방어력을 지닌 진정한 산성은 드문 편이었다.[2] 이처럼 산성 방어력의 장점이자 단점을 판가름 짓는 것은 다름아닌 치장물자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이 있다.

어떤 늙은 왜인이 귀에다 대고 말하기를 「왜장들은 매양 『조선이 청야(淸野) 작전을 써서 산성으로 들어가고 곡식들을 다른 곳에 옮겨 저장하는 것이 걱정이다. 물길에서 가까운 지역의 산성이라면 10년의 오랜 세월이 걸리더라도 식량 운반이 편리하고 군량을 계속할 수 있으니 기어이 함락시킬 수 있겠지만 만일 아주 궁벽한 지역에서 성곽을 튼튼하게 마련하고 식량을 쌓아 두고 청야 작전으로 막아낸다면 들에는 노략질할 것이 없고 뒤로는 계속되는 군량이 없게 되어 격파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들로서는 큰 걱정거리이다. 』 하며 이를 늘 논의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88권, 선조 30년 5월 18일 무신 5번째기사

도원수 권율이 적정을 자세히 보고하다

문제는 이 치장물자를 갖추고 산성을 유지하는 것도 일이라는 것이다. 산성은 이름답게 산에 있으므로 당연히 평지성보다 교통이 불편하다. 첩첩산중에 군량미를 쌓아두고 주기적으로 교체해주는 것만 해도 어마어마한 노동력이 소요되었으며, 산성의 정비가 어려워 전담하는 사찰을 두고 승려들에게 맡겼을 정도였다.[3] 임진왜란 전의 기록을 보면 성을 정비하는데 백성들이 그 고됨에 아우성친다고 하는 기록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산악지형이라 방어가 쉽다는 이점만 믿고 역으로 대충짓고 관리를 허술하게 하다 정작 산성의 수비능력을 뛰어넘는 적군의 공격을 받아 의외로 쉽게 함락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4]
인용문구 안의 청야전술 문서에 서술된 단점이 사실상 산성의 단점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4. 국내의 산성


※ 본 문단에 설명된 국내의 산성의 사례에는 한국사의 범주에 들어있는 국가들이 현재 국외에 해당하는 지역에 축조했거나 장기간 점령하였던 산성 및 성곽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성곽은 거대 건축물로써 한번 축성되었다고하면 완전히 철거되기가 쉽지 않다.[5] 애초에 처음 만들어질 때 고려된 지정학적 요소는 근대 이전까지는 큰 변화가 없었기 때문에 특정시기에 만들어지더라도 그 후대에 다시 사용되는 경우가 꽤나 많다. 예를 들어 공주공산성백제의 산성으로 생각되지만 여전히 조선시대에도 활용되었던 산성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ㅇㅇ시대의 산성, ㅇㅇ의 산성이라고 하더라도 그 후대에 다시 사용되었던 것일 수도 있고 그 이전에 만들어진 산성을 재활용해서 만든 것일 수도 있다.[6]
※ 첨자 * : 후대에 재사용되어 중복기재.

5. 해외의 산성



6. 참고 문헌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2012년에 발간한 《한국고고학전문사전: 성곽 봉수편》을 참고하면 전문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산성에 대한 정보는 뜬금없는 소리가 많으므로 이 책을 참고할 것. 단 용어가 전문적이니 다소 어려울 수는 있다.

7. 관련 문서



[1] 물론 군사적, 행정적 역량이 되는 경우에는 포곡식(包谷式) 산성을 쌓아서 크게 짓기도 했다. 포곡식 산성을 주로 운영한 대표적인 국가는 바로 고구려로 둘레가 수 km에 달하는 대형 포곡식 산성을 주요 거점으로 삼기도 했다. 행정적 기능을 한 것 또한 덤.[2]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강항 선생이 쓴 간양록에 보면, 센고쿠 시대를 거치는 동안 발전되고 숙련된 일본의 축성 기술과 방법, 원리에 대해서 상세히 소개하고 "'''그들의 성벽은 원숭이도 기어오를 수 없다'''"고 평가했는데,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공한 일본군이 조선의 성채를 보고 "저것도 성이냐?"라고 비웃으면서도 유독 나주의 금성산성(錦城山城)과 담양의 금성산성(金城山城)에 대해서는 "'''조선인들이 여기를 작정하고 지켰으면 우리도 함락시키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감탄했다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3] 조선은 기본적으로 숭유억불의 입장을 취했음을 기억하자. 산성을 정비하는 대가로 기존에 탄압하던 사찰들까지 공식적으로 허용한 것이다.[4] 고구려의 관구검 침공 때 환도산성이 털린 것도 관구검이 방어력이 강한 환도산성의 정문(南門)이 아닌 서쪽으로 왔다는 분석도 있다.[5] 서울의 난개발 속에서도 몽촌토성풍납토성의 흔적은 정비가 되기 이전에도 남아 있었다.[6] 참고로 조선시대에는 삼국, 고려시대의 성곽의 축조 현황을 파악해두고 예비적인 거점으로 염두에 두었던 기록이 많다. 나아가 반란군의 거점으로도 활용될 수 있으니 허물어야한다는 기록도 있다.[7] 위의 백암성과는 다른 조선시대의 산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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