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1. 개요
三國時代
고대에, 북부의 고구려, 중서부의 백제, 동남부의 신라 주요 3국과 기타 소국가들이 정립했던 한국사의 시대 구분.
2. 역사
2.1. 삼국
정사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가 기원전 57년 가장 먼저 건국되었고, 뒤이어 고구려가 기원전 37년에, 마지막으로 백제가 기원전 18년 건국된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백제와 신라의 경우에는 고고학적 실증 자료의 부재로 인해 삼국사기의 기록의 연대를 수정해 건국 연대를 내려야 한다는 설이 어느 정도 지지를 얻고 있다.[1]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나정의 발굴 등으로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설은 어느 정도 약화되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완벽히 극복할 정도는 아니다. 애초에 1세기 ~ 2세기부터 신라와 백제가 치고받고, 진흥왕 이전의 신라군이 오늘날의 함경도 지역까지 올라간다거나 하는 기록은 거의 대부분의 역사학자가 신뢰하지 않고 있다.[2]
일반적으로는 고구려 - 백제 - 신라 삼국이 등장하는 시점부터 대강 삼국 시대로 분류하는 편이지만 엄밀히 따지면 한반도에 다른 소국 없이 '''삼국만이 있던 시기는 가야 제국들이 신라에 병합된 562년부터 백제가 멸망하는 660년까지 고작 98년'''에 불과하다.[3] 이후로는 발해의 등장으로 남북국 시대로 따로 구분한다. 그리고 엄밀한 의미를 따지지 않더라도 3세기 중엽을 묘사하는 《정사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 한반도 중부 이남에는 78개국이 존재했다고 설명하고, [4] 이 외 옥저, 예, 부여 등 한국사를 설명할 때 함께 설명되는 국가들이 여전히 존재했다고 묘사된다.
따라서 실제로 '삼국시대'로 칭할 수 있는 시기는 아무리 일러도 4세기 이후이며, 국정 국사 교과서에서는 위서 동이전의 국가들을 삼국 시대 이전의 국가들로 배치하고 있기도 하다[5] 학계에서는 따라서 대략 3세기까지는 원삼국시대라는 용어를 통해 삼국시대에서 배제시키고 있는 편이다.
실질적으로 각국이 일대의 패권을 확립한 것은 고구려는 2세기 ~ 4세기, 백제는 4세기, 신라는 5세기 중엽 이후나 되어서의 일이므로, 빨라도 4세기 ~ 5세기 정도 이후에 한정지어야 할 용어이다. 가야도 6세기 초중엽까지는 존속해있기 때문에 엄연한 의미에서 삼국시대로 통칭할 수 있는 시기는 100여 년 정도이다. 그래서 사국시대 같은 용어를 미는 경우도 간혹 보이는데, 해당 문서에 설명되어있지만 사국시대라는 용어도 허점이 많아 삼국시대 용어보다 더욱 적합한 표현이라기엔 애매하다.[6][7]
2.2. 삼국 이외의 국가
이런저런 대체표현이 제기되고 있지만 '삼국 시대'라는 단어는 일반인들에게 고조선 이후의 한국사를 설명하는 일반 용어로 자리 잡고 있으며, 이로 인해 제법 이름이 알려진 네임드 국가들도 삼국의 성장 과정에서 우걱우걱 당한 잡몹 취급 당하는 안습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대략 다음과 같은 국가들이 피해자.
- 부여(북부여, 동부여): 북부여는 494년 동부여는 410년에 고구려에 멸망
3세기 초반까지는 고구려보다 압도적으로 강했다. 그러나 285년 선비의 습격으로 큰 타격을 입은 뒤 물길에 치이다가 고구려에 실질적으로 병합된 뒤 5세기까지 존속. 현재의 송화강을 중심으로 한 북만주 일대. 고조선과 존속기간이 수백여년 겹칠 정도로 먼저 성립했고 고구려나 백제도 부여를 계승했다고 자처했으며, 수백 년 후에도 부여의 후손임을 내세운 나라가 있을 정도로 나름 위상이 있는 나라인데... 지못미.
- 낙랑국: 서기 30년대에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멸망. 현재까지 평양설과 함경도 함흥설 등이 대립 중.
- 옥저 동옥저는 56년 고구려에 남옥저는 260년 백제에 북옥저는 285년 동부여가 되었다. 현재의 북간도,함경도,강원도 북쪽 일대.
- 목지국: 고이왕 혹은 책계왕 때 백제에 병합되었다는 설이 유력. 백제가 강성하기 전까지 마한의 본래 주도국이었고, 마한을 주도했던 나라라 그런지 목지국이 아니라 그냥 마한이라고 표기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크게 약해졌으되 나름의 세력은 보유하였고, 더 이상의 저항 여력이 완전히 없어졌다 싶은 시기는 고고학적으론, 비류왕 치세 말기에서 근초고왕 치세 초기 쯤인 4세기 초중반으로 해석된다.
- 침미다례: 전남 서남해안 일대의, 신미국을 필두로 한 영산강 유역 세력일 개연성이 가장 크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목지국 다음으로 마한에서 강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고고학적으로도 부합하는 사실이다. 다만 369년 백제 근초고왕에 의해 멸망한 것으로 나오는 일본서기 기사는 다소 오버. 도륙당했다는 표현이 부합하는 건 그 중 가장 세력이 커서 영산강 유역을 아우르던 한 소국이었던 걸로 보이며, 이후에도 영산강 유역 세력권은 동성~무령왕의 시기까지도 독자적인 운동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목지국 이후 마한의 주도국이 되었다는 오해가 있는데 이건 완전 틀리게 알려진 사실이다. 마한의 주도국은 목지국이 타멸된 후에는 어디까지나 가장 크고 강력한 백제국이었고, 다만 침미다례 세력이 마한의 잔여 소국들 중 그나마 가장 크고 부강했던 데다 백제국과 거리도 멀어 직접 지배 지역으로 편제되는 시기가 늦었을 뿐이다. 이 침미다례 세력이 전남 혹은 전라도 전체를 국가로서 실체를 갖고 아우르며 백제와 맞섰다는 이상한 이해도 퍼져 있는데 이것도 사실과 다르다. 침미다례는 실제론 전남 지역의 서남쪽 1/3만 커버했었고, 전남 남해안 및 전남 중동부를 중심으로 하는 또 다른 고고학적 세력은 침미다례와는 이해관계가 또 달랐다. 다만 그나마 부강해서 백제에게 약간 더 게기다가 이름이라도 남긴 침미다례와는 달리, 이쪽은 백제의 견제와 간섭을 더욱 심하게 받아 이름도 못 남겼다는 게 다를 뿐이다.
- 탐라국: 498년부터 백제의 부용국화, 662년 신라의 부용국화. 왕조로만 따지면 고려 시대에도 왕건 대 부용하여 생존(!)했으나(사실상 중앙정부 지배는 받으나 자치권을 보장받은 자치령 시기) 숙종 대 완전히 군현 체제에 진입했으며, 그나마 명목상 제주도의 군주인 탐라국 왕가는 성주라는 이름 으로 조선초까지 계속 세습됐다. 현재의 제주도.
- 우산국: 512년 신라의 장군 이사부가 정벌, 신라의 속국이 되었고 930년 고려에 의해 완전 합병. 현재의 울릉도(흔히 독도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나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모두 독도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 가야 제국(諸國): 삼한 중 변한이 거의 그대로 계승된 체제로 그나마 고백신 삼국 이외에는 가장 많이 알려져 교과서의 지도에서도 일일이 표시되는 국가 모임으로, 교과서에서는 금관가야가 532년, 대가야가 562년 멸망했다고 하지만 문헌에 따라 가야라는 범주에 묶이는 국가의 수는 5개 ~ 40개 정도로 차이가 많이 난다. 그리고 광개토대왕의 남정 이전까지는 가야연맹이 신라와 국력적으로 비등, 해상 장악력에 있어서는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가야가 융성할 당시에 삼국시대를 대입한다면 고구려, 백제, 가야가 삼국 메이저이고 신라가 잡몹이었다.
대체적인 판도는 현재의 경상남도 전체 및 경상북도 서부[8] 와 전라도 동부[9] .
가야를 감안해 삼국 시대가 아닌 사국시대로 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간혹 제기되지만 어차피 사국 시대라는 주장도 맞지 않는 것이 애초에 가야 자체가 다른 삼국과 다르게 1개의 나라가 아니라 여러 나라를 통틀어 부르는 말이기도 하고 아래 목록을 보면 알 수 있듯 가야 말고도 비슷한 시기 여기저기에 나라가 많았기 때문에 오직 4개 나라만 있었던 적은 없었다.
가야를 감안해 삼국 시대가 아닌 사국시대로 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간혹 제기되지만 어차피 사국 시대라는 주장도 맞지 않는 것이 애초에 가야 자체가 다른 삼국과 다르게 1개의 나라가 아니라 여러 나라를 통틀어 부르는 말이기도 하고 아래 목록을 보면 알 수 있듯 가야 말고도 비슷한 시기 여기저기에 나라가 많았기 때문에 오직 4개 나라만 있었던 적은 없었다.
- 육가야: 가장 유명한 가야의 모임이지만 전기가야를 주도한 금관가야,후기가야를 주도한 대가야 정도만 아는 사람이 태반이다. 성산가야,고령가야는 아는게 더 신기할 정도로 내용이 없는게 사실이지만 6세기 국제정세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아라가야,포상팔국의 난 등에서 행적을 남긴 소가야는 행적에 비해 매우 안습한 처지다.
- 기타 마한, 진한, 변한으로 분류되는 수십 개의 군장 국가들: 대부분 이름과 위치만 겨우 남아있거나 백제, 신라에 언제 어떻게 정복당했다. 반란을 일으켰다 같은 파편적인 기록만이 남아있으며 고고학과 결합해 겨우 더듬어가는 정도이다.
일부 역사가들은 대가야가 말기에는 나름대로 중앙 집권 체제를 구축했다고 주장하기는 하지만 확실한 실증 자료를 찾기 힘들고 규모도 작은 탓에 대부분의 인식은 중앙 집권화에 실패한 연맹체 또는 소국들이 모여 있는 지역이라는 입장이다.
최근에는 가야를 연맹 왕국으로 보는 견해 대신 그냥 특정 지역을 통째로 가리키는 명칭에 불과했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가야 문서 참고.) 구삼국사, 삼국사기의 기초가 되는 사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사서와 후대의 명칭 등을 보면 최소한 고려 시대부터는 '이 시절은 삼국 시대'라는 인식이 박혀 있었던 것 같으니 지금 와서 고친다는 것도 당위성이 떨어지는 말이기는 하다.
대개의 고대 국가들이 그러하듯 정확한 시작 연도는 불분명하지만 학계 공통으로 정확히 끝났다고 평가되는 연도는 신라가 나당전쟁에서 승리해 당나라 세력을 축출하고 통일을 완성한 676년. 아주 간략화해 설명하는 경우 고구려가 멸망하는 668년을 삼국시대의 끝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당과 얽혀있던 고구려와 백제의 잔여 세력과 영토를 신라가 흡수한 것이 나당전쟁 와중이므로 676년을 끝으로 보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그로부터 22년이 지나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건국되어 한반도 북부와 만주, 연해주에 터를 잡으면서 남북국시대로 넘어간다는 것이다.
삼국 시대는 삼국 중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일본 국가의 형성에 굉장히 영향을 많이 주었던 시기이며, 일본인들의 직간접적인 조상들이 이 시대에 한반도에서 건너가기도 했다.[10] 심지어 당시 일본으로 건너간 고구려와 백제인의 후예들이 '''1300년도 더 전에 멸망해버린 조국'''을 기리는 신사들도 여전히 있을 정도. (대표적으로 고구려를 기리는 히다카 시에 위치한 고마 신사). 그야말로 재일교포 0세대(…). 물론 더 나중에 망한 신라를 기리는 신사들 역시 많이 남아있다. 심지어 '''가야 신사'''도 있다고 한다.[11]
이 삼국 시대란 용어는 다소 사후처리적인 용어인데, 어떤 통일 정권이 삼국으로 분립된 게 아니라 삼국이 신라로 정리된 이후에 이전 역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삼국 시대라 한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삼국시대와 명칭이 같지만 중국의 삼국은 하나의 통일 왕조가 멸망하고 다음 통일 왕조가 들어서기 이전의 혼란기, 과도기라는 점, 기간의 차이에서 그나마 한국사의 후삼국시대와 비교될 수 있다. 한국사의 원삼국과 삼국 시대는 아직 통일 왕국이라는 개념이 생겨나기 이전의, 원시적인 소국들이 서로 경쟁하고 병합하면서 발전해 나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엄밀히 말해서 한국사 버전 춘추전국시대에 가깝다.[12]
2.3. 가야멸망전
2.4. 백제멸망전
2.5. 삼국통일전쟁
3. 시대 구분
3.1. 전체적 구분
교육과정에서는 삼국시대 초반부의 경우 ''''초기 여러 나라의 성장'''' 단락으로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등장하는 나라는 고구려, 부여, 옥저, 동예, 삼한(마한, 진한, 변한).
교과서에서는 사용되지 않지만 학계 일각에서는 이 삼국시대 초반 시기를 가리켜 원삼국시대라는 용어도 사용하고 있다. 그 외 다른 용어를 미는 경우도 많은데 상황이 복잡하기 때문에 원삼국시대 문서를 참조.
이후는 4세기 백제의 전성기(근초고왕 재위기), 5세기 고구려의 전성기(장수왕 재위기), 6세기 신라의 전성기(진흥왕 재위기) 3단으로 구분해 도식화하는 편이다. 각 세기에 팽창해 한강 유역 등 많은 영토를 군사적으로 차지하고 체제정비가 이루어지던 시기를 기준으로 한다.
3.2. 고구려의 시대 구분
삼국 중 고구려란 나라를 지칭해 시기별로 구분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졸본성, 국내성, 평양성 도읍기를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2차례의 천도가 있었고 이것이 시대구분의 기준으로 삼기에 간편하기 때문이다.
3.3. 백제의 시대 구분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2차례의 천도가 있었고 수도의 변천이 백제의 흥망성쇠와 밀접한 관련이 있어 시대구분의 기준으로 삼기에 적절하기 때문에 위례성, 웅진성, 사비성 도읍기를 기준으로 삼아 '한성백제시대', '웅진백제시대', '사비백제시대' 등으로 구분하는 편이다.
한성시대는 백제의 성장과 발전기, 웅진시대는 백제의 침체기, 사비시대는 중흥 및 멸망기로 파악하고 있으며 이런 백제 정치사는 노중국에 의해 전체적으로 정리가 되었다.
3.4. 신라의 시대 구분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신라는 천도한 적이 없으며[13] 비교적 사회변혁이 복잡해 다른 기준을 적용한다.
3.4.1. 삼국사기의 상중하대 구분
가장 전통적으로 사용되었고 지금도 통용되는 구분법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왕실의 변화에 따라 상대, 중대, 하대로 나누었다.
- 상대 - (건국 ~ 654년). 혁거세 거서간부터 진덕여왕까지며, 골품제상 성골 계통이 왕위를 잇던 시기다.[14]
- 중대 - (654년 ~ 780년). 태종 무열왕부터 혜공왕까지이며, 진골 중에서 무열왕계로 왕위가 이어지던 시기다. 왕권이 강력했던 통일신라의 전성기로 보는 편.
- 하대 - (780년 ~ 935년). 선덕왕부터 경순왕까지이며, 진골 중 내물왕계로 왕위가 이어지던 시기다. 엄밀히 말하면 중간에 박씨 계통도 있고 하지만 큰 틀에서 전부 하대에 포함한다. 호족들과 6두품의 반란, 후백제의 공격 등으로 영토가 계속해서 쪼그라 들다가 결국 935년에 고려에 흡수되면서 멸망하였다. 이후 고려의 후삼국 통일 이후 ~ 고려 멸망 까지는 고려시대 문서 참고.
3.4.2. 삼국유사의 상중하고 구분
삼국사기의 구분이 왕의 계통이라면 삼국유사의 구분은 불교와 연관돼있다.
- 상고 - (건국 ~ 514년). 혁거세 거서간부터 지증왕까지다. 불교 공인 이전. 왕호는 대부분 왕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
- 중고 - (514년 ~ 654년). 법흥왕부터 진덕여왕까지다. 신라는 불교국가화되었고 왕호는 불교적 왕호를 사용했다.
- 하고 - (654년 ~ 935년). 태종 무열왕부터 경순왕까지다. 유교가 본격적으로 도입되어 불교와 조화되었다. 왕호는 유교적 왕호를 사용했다.
3.4.3. 현대의 구분
건국 초기 신라에 대해서, 특히 고고학적으로 말할 때는 지증왕이 국호를 확정하기 전에 많이 사용됐던 사로국으로 지칭하는 편이다. 이는 대체로 '상고기 신라'와 의미가 겹친다.
삼국 중 하나였던 신라와 나당전쟁 종료(676년) 이후 영토가 넓어지고 삼한일통 의식을 정립한 신라를 구분하기 위해 이후의 신라를 통일신라로 구분한다. 해당 문서 참조.
3.5. 가야의 시대 구분
보통 금관가야가 주도권을 잡았던 초기 혹은 전기 가야(연맹), 대가야가 주도권을 잡은 후기 가야로 구분하는 편이다. 연맹설은 학계에서는 거의 부정되고 있지만 교과과정이나 각종 시험에서는 아직 연맹이란 단어를 써서 가르치는 편이고 연맹은 아니라도 전기, 후기라는 단어는 아직도 많이 쓴다.
굳이 상세히 구분하자면 건국기:(42~116년),변한시기:(116~209년),분열기:(209~215년),금관가야 주도기:(215~400년),쇠퇴기:(400~475년),대가야 주도기:(475~529년),아라가야 주도기:(529년~548년),백제간섭기:(548~554년),멸망기:(554~562년)이다.
4. 삼국의 국력
고대 삼국의 국력이 각각 어느정도였는지도 학계의 큰 관심사이다. 고대 농본 국가의 국력은 인구와 비례하므로 고대 삼국의 국력 역시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인구 수에서 나왔을 것이다.[15]
삼국시대는 세계사를 통틀어서도 짧지 않은 수백년 동안 세 나라의 대치구도가 유지되었다. 일단 공격측보다 수비측이 유리하다는 전제상 삼국 중 어떤 국가도 나머지 둘의 연합을 일방적으로 제압할 정도로 우위에 선 적은 없었다. 하나가 강성하면 다른 둘이 일시적으로 힘을 합치는 식으로 대결 구도가 이어졌다. 여기에 중국, 북방민족, 가야, 일본 등이 변수로 작용하였다.
삼국의 인구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도 조심스럽고 논란이 많다. 구당서에는 멸망 당시 고구려 인구가 69만호라는 기록이 있다. 이에 더해 주필산 전투 등에서 나타나는 병력 동원 능력이 백제와 신라의 병력에 비해 우월하다는 점, 그리고 고구려는 여수 전쟁과 여당 전쟁 당시 압도적인 대군을 상대하고도 오랫동안 선전한 반면, 백제가 18만의 나당연합군에 고작 10일만에 멸망했다는 점을 들어 백제와 신라보다 더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16] 한편으로 삼국유사에는 고구려의 인구가 21만 호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고구려 전체 인구로보기보다는 대개 순수 고구려인이나 혹은 수도권의 인구로 한정한 기록으로 본다.
백제의 경우 76만호라는 기록이 당서에 적여있어 이것을 토대로 백제 인구를 380만으로 견해도 있지만, 고구려에 비해 딸리는 병력동원능력 때문에 이를 믿지 않는 입장도 있고, 76만 명을 오기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혹은 당평백제비 기록에 따라 24만 호(120만 명)에 불과했다고 여기는 견해도 있다. 7세기 당시 신라의 인구에 대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데, 백제와 신라의 인구의 경우 당시 백제와 신라의 병력 동원 규모가 거의 비슷했다는 점에서 양국간의 체급도 비슷하지 않았겠는가 추정이 가능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백제(충남, 전북, 전남)보다 영역이 몇 배는 더 넓었던 신라(경북, 경남, 충북, 강원, 경기)가 조금은 더 인구가 많지 않았겠는가 하고 추정한다.
다만 고구려는 5세기 내내 신라, 백제 양국을 위협적으로 몰아붙여 이들을 수차례 멸망 위기까지 몰아넣었던 반면에 고구려는 한강유역 탈환전 당시를 제외하고는 양국으로부터 그와 같은 위협을 당한 적이 없었던 점, 그리고 고구려가 반세기 넘도록 중원제국의 가공할 침공을 막아냈던 반면에 백제는 짧은 시간 안에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던 점, 그리고 고구려와 신라가 똑같이 양면전선에 처해 있었던 7세기에 오히려 남방전선에서 고구려가 신라에 대해 공세적 위치를 점하고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인구 규모에 대한 섣부른 추측은 배제하고서라도, 고구려가 신라, 백제 양국에 비해 전쟁수행능력 등을 종합한 국력이 훨씬 더 앞서 있었다는 점만큼은 분명해보인다.
흔히 신라 최전성기로 알려진 진흥왕때에도 신라가 고구려보다 국력이 앞섰는지는 회의적인데 이 당시는 고구려가 돌궐과의 전면전을 치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백제는 근초고왕때부터 고구려와 전면전에 들어갔는데, 한 때는 고구려를 평양성까지 몰아붙이며 한반도 중부와 남부에 백제중심의 지배질서를 구축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광개토왕과 장수왕 시기에, 소수림왕 이후 비약적으로 체제를 정비한 고구려에게 속절없이 깨지며 멸망직전까지 무너졌고 그 후 조금씩 국력을 회복하면서 다시 백제중심의 질서로 복귀하려 노력했으나 그 사이 빠른 속도로 발전한 신라한테 뒤통수를 맞게 된다. 이후로는 삼국 중 어느 한 나라가 분명한 패권을 행사하지는 못한 채 소모적인 공방전이 벌어지다가, 7세기 중엽 이후 다소 열세에 처해 있던 신라의 적극적인 외교정책이 성공함으로써 신라 위주의 삼국통일이 완수된다.
5. 삼국의 순서
우선적으로 한국인들에게 가장 익숙한 순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이다. 이렇게 부르는 기준은 상당히 애매한 편이고 주로 많이들 하는 설명이 고대 국가로서 자리잡은 순서[17] 를 기준으로 한다고들 한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가나다순으로도 고백신 순서가 된다. 하지만 이러한 고백신의 순서가 자리잡힌 것은 길게 봐야 해방 후 대한민국 정권이 수립된 이후이다.
고려시대~조선시대 내내 통용된 삼국의 순서는 통상적으로 신라, 고구려, 백제이다. 이는 삼국사기의 본기 순서이기도 하고 그외 고려와 조선의 여타 사서에서도 주로 이 순서로 통용되는 경우가 많다. 기준은 크게 두 가지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첫째 기준은 우선 건국 연도 순[18] 이다. 삼국이 신라, 고구려, 백제 순으로 건국되었기 때문에 이 순서로 기재하는 것이 합당하는 의견.
다만 신라와 백제의 건국연대는 후대에 고구려와 비슷한 시기로 맞추기 위하여 소급되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실제로 삼국사기 내에서도 삼국 초기 고구려본기 기사보다 신라본기와 백제본기의 연대적 신뢰성이 상대적으로 낮은 편인건 사실이다. 일단 고구려는 한국보다 더 먼저 기록문화가 자리잡은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접해 있어서 초기 기록부터 교차검증이 되는데 백제와 신라는 그렇지 않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연대의 경우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멸한 후 삼한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의도적으로 고구려보다 늦은 자신들의 국가 생성 연대를 고구려보다 20년 앞서 소급시키고 초기 국왕들의 재위기간도 늘여서 본인들의 정통성을 확보하려 해석이 꽤나 지배적이다. 사실 이건 인간 심리상 당연한 일이긴 하다. 신라인 입장에서 100~200년 후에야 형성된 본인들 국가가 고구려를 제치고 통일했다고 하면 삼한일통의 정통성이 훼손될 수도 있기에 본인들 국가가 삼한 중 가장 정통성 있는 국가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듯 하다.
한편 백제의 경우에도 그 건국시조인 온조 혹은 비류를 고구려 건국왕 주몽의 연대와 맞추기 위해 백제 왕실 측에서 의도적으로 끌어올렸을 가능성이 매우 다분하다.[19] 혹은 삼한일통 이후 신라가 모양새를 맞추기 위해 전술했듯 본인들은 물론이고 백제 건국연도까지 끌어올렸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어느 경우이든 백제 초기 국왕들의 비정상적인 재위기간도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하다.
참고로 북한의 경우 고구려 역사 900년을 주장하면서 고구려 건국연대를 기원전 277년으로 올렸는데 이러한 주장 역시 무리수라 볼 수 있다. 기원전 277년이면 아직도 단군조선이 엄연히 한반도 북부를 통치하던 시기이고 중국에선 진시황이 중원을 통일하기도 이전이다. 상식적으로 고구려가 이 시기부터 나라를 형성하고 있었을 리는 없다.[20] 고구려 역사는 딱 700년 전후 정도인 것으로 보이고 그렇기에 기원전 37년 전후가 딱 적당하다.[21]
또 한 가지 기준은 한국사에서의 중요성과 비중 문제이다. 신라 자신을 비롯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사람들이 보기에 아무래도 신라가 삼국을 첫번째로 통일하였고[22] 현대 한반도 국가의 원형이 676년에 탄생했기에 신라가 한국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고려해 신라를 가장 앞에 놓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는 수당과 여러 차례 공방을 주고받아 한민족 세력의 대표주자로 대외적으로 공인받았고 훗날 고려의 국호와 정체성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고려, 조선시대 내내 외적의 침입에 시달릴 때마다 정신적 향수를 제공하였기에, 아무래도 존재감이 미미한 백제보다는 후대 영향력이 앞선다 할 수 있어 순서상 백제보다 앞에 놓인다. 또한 고구려의 영향력은 고구려 유민이 세운 고려가 후삼국 통일을 완수하였고 신라는 물리적 통일만 하였다 뿐이지 삼국 유민의 독자적 국가정체성을 소멸시키진 못하였기에 분명 막강했다고 볼 수 있다.[23] 그럼에도 신라가 삼국통일을 최초로 완수한 국가로 인정받고 있었고 발해,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을 선언했다고 하더라도 고구려의 국체는 668년에 끝난 반면 신라의 국체는 훨씬 후대인 935년까지 이어졌기에 적어도 직접적인 영향력은 신라가 강했던 건 사실이다. 따라서 후손들 입장에선 신라, 고구려, 백제 순으로 부를 근거는 타당했다.
아무튼 삼국을 부르는 순서에서 우리는 당대인들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이 반영되었다는 점을 볼 수 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신라의 삼한일통과 한반도 통일 왕조의 원형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신라를 배려해 신라, 고구려, 백제 순으로 부르곤 했다. 하지만 일종의 소국 컴플렉스에 시달리고 민족주의 사고 방식에도 어느정도 젖은 현대의 한국인들은 고구려를 중시하고 신라를 심리적으로 배척하는 경향이 있기에 현대 한국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 순으로 부르는 경향이 잦다고 할 수 있다.
6. 교과서에서
교과서 속에서 삼국은 중학교과 고등학교에 나오지만 고등학교의 내용은 매우 부실하다.
중학교: 1-4 고조선과 여러나라의 성장, 2-1 삼국의 성립, 2-2 삼국의 발전과 가야, 2-3 삼국의 문화 3-1 고구려의 대외항쟁과 신라의 심국통일 까지가 삼국시대의 내용이다.고등학교: 1-1 고대국가의 형성과 정치체제 부분이 1-2는 고대국가의 문화 가 끝이다.
6.1. 중학교 1-4단원 고조선과 여러나라의 성장
고조선 멸망 이후 철기의 내용을 다루고 '여러나라의 성장'파트로 넘어가는데 나오는 나라 수가 역사에 비해 매우 적다. 또한 여기에 나오는 나라들은 부여와 고구려를 제외하면 건국에 대한 이야기도 서술되지 않으며 오직 풍속과 문화에 대한 내용 뿐이다.
- 부여: 원삼국시대와 삼국시대의 나라 중 가장 대우가 박한 나라이다. 나오는 내용이라고는 쑹화강 유역의 나라,5부족의 연맹왕국,풍속으로는 순장,형사취수제,영고,엄격한 법의 제정 정도가 끝이다. 심지어 북부여와 동부여도 구분 해주지 않으며 해모수,해부루,금와,대소와 같은 왕의 이름도 나오지 않는다. 간혹 해모수의 북부여 건국신화가 있기도 하지만 아는 극소수이고 쇠퇴에 관한 내용은 '고구려가 강성해지자 세력이 약화되었다.' 뿐이다.... 당연히도 위나라와 연합해 고구려를 공격한 내용, 모용선비의 북부여 침입, 동부여의 성립, 전연의 침입으로 인한 몰락은 일체 나오지 않는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부분에 동부여를 정벌했다는 나오지만 북부여가 문자명왕대에 멸망한 내용은 없다.
- 고구려: 졸본 지역에 건국, 5부족의 연맹왕국, 서옥제, 제천행사 동맹이 언급된다.
- 옥저와 동예: 애시당초 내용이 적기에 대우가 박하지는 않지만 좋지도 못하다. 공통된 내용은 동해안에 위치, 고구려에 압박을 받음, 읍군 삼로의 군장이 통치 이고 옥저의 풍속으로는 민며느리제와 가족 공동무덤 동예의 풍속으로는 족외혼,책화,무천이 언급된다. 역사나 멸망에 관한 내용은 없다.
- 삼한: 대우도 박하지만 왜곡이 심하다. 신지 읍차의 군장이 통치,천군의 소도, 5월제와 10월제, 변한의 철 풍부 라는 내용이 있으나 마한은 목지국 이외의 국가는 나오지 않고 고이왕때 목지국이 멸망, 근초고왕때 마한의 남은 세럭이 멸망 이라고 되어있다. 마한의 남은 세력이 아니라 마한의 나라 중 하나인 '침미다례'가 근초고왕때 멸망했을 뿐이다. 진한의 경우 신라 17대 내물왕이 진한을 통합했다고 하지만 이미 5대 파사 이사금대에 시작해 14대 유례 이사금대에 진한은 통일 되며 고고학으로 보면 5세기 후반에 진한은 완전히 신라국으로 전환된다.
6.2. 중학교 2단원 삼국의 성립과 발전
고구려,백제,신라,가야만이 주체로 다뤄지며 나머지 나라는 거의 언급이 되지않는다. 솔직히 말해 탐라,우산,두막루,삼한의 일개 소국들은 교과서에 쓰기엔 내용이 너무 적고 중요하지 않은게 맞지만 '''부여와 가야는 역사에 비해 대우 확실히 너무 박하다.'''
- 고구려: 태조왕,고국천왕,미천왕,고국원왕,소수림왕,광개토대왕,장수왕이 나온다.
- 백제: 고이왕,근초고왕,침류왕,개로왕,동성왕,무령왕,성왕이 나온다.
- 신라: 내물왕,지증왕,법흥왕,진흥왕만이 나온다. 후에 3단원에 선덕여왕,무열왕,문무왕은 나온다.
- 가야: 금관가야의 발전과 전기가야의 형성,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정으로 인한 쇠퇴,대가야의 성장과 후기가야의 형성,가야연맹의 소멸 정도의 내용이 있다. 윗 단락에 표시한 부여,옥저,동예,삼한의 내용을 모두 합한것보다 많긴 하지만 고구려,백제,신라에 비하면 내용이 반도 되지 않는다,
7. 삼국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
- 가장 왼쪽에 표시된 것이 원작, 오른쪽이 파생 작품으로 원작보다 유명해진 경우는 굵은 표시를 한다.
7.1. 게임
- 계백전
- 광개토대왕(1995)
- 광개토태왕(2015)
- 봄이 오면 꽃이 피고
- 삼국기(게임)
- 삼국이야기 - (주)다고이에서 제작한 보드 게임이다.
- 삼국통일 대륙을 꿈꾸며
- 삼한영웅전(웹 게임) - 웹 게임인 계백전을 리메이크한 게임 서비스 한후 서버 종료했다가 2017년 모바일 버전으로 서비스 시작.
- 삼한일통 - 다물 소프트에서 제작했다가 미완성이 된 채로 제작 중단이 되었다.
- 삼한제국기
- 역사왕 - 비져너리 사에서 제작한 보드 게임이다.
- 왕도의 비밀 - 원작은 소설이고 과거와 미래가 교차하는 추리 작품이지만 게임은 백제를 다룬다.
- 전략 삼국시대
- 전략급 백촌강의 전투 - 보드 게임으로 일본의 잡지인 게임 저널의 15호 부록으로 등장했다.
- 천년의 신화
- 천년의 신화 2
- 통일 - 2010년에 가단에서 제작한 턴 전략 게임이다.
- - 일본 게임인 검성전을 한국에 수입하면서 현지화한 것 뿐으로 본래 배경은 옛 일본이다.
- GO! FISH 신라의 삼국통일
- 스타크래프트의 유즈맵 삼국시대
- 삼국사기: 제왕의 연의
7.2. 드라마
- 국토만리
- 계백
- 근초고왕
- 김수로
- 달이 뜨는 강
- 대왕의 꿈
- 삼국기
- 서동요
- 선덕여왕(1968년)
- 선덕여왕(2009년)
- 주몽 - 고구려의 혼 주몽(만화)
- 제왕의 딸 수백향
- 천년지애
- 칼과 꽃
- 태왕사신기(2007년) - 태왕사신기(소설)
- 화랑
- 광개토태왕
- 연개소문
- 대조영
7.3. 만화
- 고구려척사 - 고구려의 젊은 무사들(애니메이션)
- 고구려혼 온달
- 나르샤#s-4
- 나에게 온 달
- 나우
- 낮에 뜨는 달
- 바람의 나라 - 바람의 나라(게임), 바람의 나라(드라마)
- 비미호
- 비흔
- 삵의 발톱
- 용잡이
- 위나암림
- 천랑열전
- 천손의 시대-삼한세기
- 태왕광개토
- 푸른 유리
- 합체도술 삼신도
7.4. 뮤지컬
- 삼천 망국의 꽃
- 풍월주
7.5. 소설
- 고구려(소설)(김진명 저)
- 고구려(정수인 저)
- 고구려 국선랑 을지소
- 고구려의 섬
- 고백신조 - 삼국기(드라마)
- 광개토대제 - 태왕북벌기(만화), 광개토태왕(드라마)
- 남당유고
- 대륙의 한
- 대제국 고구려
- 대조영(유현종 저) - 대조영(드라마) - 발해의 건국을 다루기 때문에 초반 한정이다.
- 대조영(이수광 저)
- 모살기
- 미실
- 백마강
- 백제의 이름을 잇다
- 백제의 칼
- 살수
- 삼국의 혼
- 삼한지
- 아, 고구려
- 안시성(명건영 저)
- 역적전
- 연개소문(강무학 저)
- 연개소문(김영진 저)
- 연개소문(박혁문 저)
- 연개소문(유현종 저) - 연개소문(드라마)
- 연개소문(이언호 저)
- 연수영(황원갑 저)
- 영웅 온달
- 오국사기
- 오국지
- 왕도의 비밀
- 요하 (김성한 저)
- 우리나라 삼국지(임동주 저)
- 을지문덕전
- 잃어버린 왕국
- 적패
- 제국의 꿈(오수영 저)
- 좌평 성충
- 천년전쟁
- 현의 노래(김훈 저)
- 홍익대제 고건무
- 흑산
7.6. 애니메이션
- 고주몽
- 소년장수
- 고구려의 젊은 무사들
- 조의선인 (제작중)
7.7. 연극
- 가야(춤극)
- 고구려(춤극)
- 삼천
7.8. 영화
8. 관련 문서
[1] 이런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의 시작이 하필 일제강점기 일제 어용사학계였어서 삼국사기 초기기록 수정론 식민사관설 같은 것이 나오기도 했다.[2] 이러한 기록에 대해서는 백제와 신라가 자신들이 정복한 국가의 역사를 자국을 주체로 바꾸어 표기한 것이 않느냐는 주장도 제시된다. 예를 들면 전라도 일대의 성읍국가 A와 경상도 일대의 성읍국가 B 사이에 1~2세기경 전쟁이 발발했고 이후 A와 B가 각각 백제와 신라에 정복당했다면 백제와 신라 측에서는 이 성읍국가들 간의 역사를 승자인 자신들로 주체로 바꾸어서 표기했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백제와 신라가 후대 5~6세기에야 있었던 사건을 자신들의 역사가 오래됐음을 과시하려고 끌어올린 것이라는 주장 또한 존재한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이렇게 일본서기를 쓰기도 했고...[3] 그나마 가야가 완전히 소멸한 뒤에도 한반도 외부 지역이면서 한국사의 영역이라고 보는 탐라국등 곁가지격인 소 국가들 몇몇은 계속 반독립적으로 존재했다. (두막루는 한국사로 보아야 할지 애매하다.)[4] 마한 산하 54개국, 진한 산하 12개국, 변한 산하 12개국으로 중국 시각에서 '편의상' 분류했다. 각 국가의 목록은 각 문서 참조.[5] 다만 고구려, 백제, 신라 단락에서 태조왕, 고국천왕, 고이왕 등을 넣어두기도 했다.[6] 가야가 중앙집권 국가였다면 사국 시대로 명명되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가야는 연맹 왕국이였다.[7] 거기다 최근에는 가야 연맹설마저도 부정하는 것이 통설화되고 있다. 즉 가야라는 한 덩어리의 연맹체가 아닌, 여러 가야국들이 독립적인 개별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이렇게 되면 '가야'라는 한 덩어리가 아니게 되므로 '고구려+백제+신라+가야'의 4국이 아닌, '고구려+백제+신라+금관가야+대가야+아라가야+ •••'이 되버린다. 즉 기존 삼국에 가야 세력을 포함한다면 3+n국이 되어 버리는 것.[8] 3세기 초반(231년)까지를 한정으로 성주,경산,김천,구미,대구,상주,문경을 통치했다.[9] 5세기 중반 이후 한정. 지역은 구례,광양,순천,장수,진안,임실,남원,곡성,여수[10] 물론 삼국 간에도 일본에 준 영향력 정도의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백제>>>고구려>신라.[11] 사실 고고학적 조사에 의하면 삼국 시대 중 한반도에서 일본으로의 집단 이주가 가장 많이 일어났던 시기는 광개토대왕의 가야 공격 즈음으로 추정된다.[12] 사실 은, 주 시대, 즉 춘추 전국 시대 이전의 양쯔강 일대는 중원과 정체성 자체가 아예 달랐다. 애초에 초나라부터가 아예 주나라와 그 산하의 수많은 제후국에 속하지 않은 묘족의 국가에서 출발했다는 말도 있고 초나라 이남으로 가면 한장어족이 아니라 오스트로아시아어족이나 오스트로네시아어 등의 언어를 쓰던 종족들이 살고 있었으니 말 다한 셈. 그리고 한국사에서도 고조선과 아예 별개의 문화권으로 보이는 진국 등이 있었다는 점에서 그 나름대로 들어맞는 비유인 셈. 그런데 고조선이 주나라 왕실마냥 친척이나 신하한테 특정지역을 봉지로 주고 봉지를 받은 이들이 봉지로 가서 국가를 세운 건 아니었던지라 1:1로 들어맞는 비유는 아니다.[13] 689년 신문왕이 달구벌(대구)로 천도하려고 시도했으나 무산되었다.[14] 사실 삼국사기의 서술과 달리 현대의 연구로 성골 개념의 시작시점이 불분명해졌지만, 어쨌든 성골의 끝이 진덕여왕인 것은 이견이 거의 없기 때문에 상대는 성골이 끝날 때까지라고 정의해서 그대로 통용되고 있다.[15] 다만 유목 제국의 경우 인구 이상의 전투력을 보여주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꼭 국력이 인구가 아니다.[16] 단 백제는 수도 직공으로 지휘부가 와해된 이후에도 잔존세력이 3년 간 저항을 계속하였다는 점, 그리고 고구려보다도 인구가 더 많을 것이 분명한 조선이 병자호란 당시에 채 10만도 되지 않는 청나라군에게 불과 8일 만에 한양이 함락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삼국의 인구 차이를 논증하는 근거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외침에서 얼마나 국토를 잘 방어하느냐 하는 것은 비단 인구 뿐 아니라 전략적 대비가 충분히 되어 있는가, 인력 비상동원체제가 잘 갖춰져 있는가, 상비군의 규모는 어떠한가, 혹은 국토의 종심이 얼마나 긴가 등과 같은 여타 다양한 요인들이 종합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수대전 등에서 드러나듯이 고대에는 오히려 대군이 지휘통제 등의 측면에서 오히려 더 비효율적일 수 있다는 점 역시 고려해야 한다.[17] 고구려- 1세기 태조대왕, 백제-3세기 고이왕, 신라-6세기 지증왕[18]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기준으로 신라는 BC 57년, 고구려는 BC 37년, 백제는 BC 18년에 건국되었다.[19] 실제 이러한 점은 일본서기의 이주갑인상의 문제에서도 확인되는데 백제가 일본에 많은 영향을 주었기에 역사 소급의 원조가 백제였을 수도 있다.[20] 고구려현의 존재는 분명 BC 37년 이전부터 존재했다. 이는 중국사서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현과 고구려 왕조를 동일시하는 것은 매우 곤란하다. 사학계에서도 후대의 고씨 고구려 왕조가 국명을 선대에 존재하던 지명에서 가져왔다고 추정한다.[21] 고구려 역사가 700년 정도라는 사실은 한중일 역사서에서 모두 교차검증된다. 중국과 일본의 사서에도 고구려 역사가 700년이라는 언급은 많다.[22] 당시 발해에 대해서는 통일신라 때도 고려 때도 고구려의 한 방계 일파 정도로는 쳐줬지만 고구려를 이은 정통 왕조라고 보진 않았다.[23] 이 점은 삼국의 통치를 모두 받아본 경기 지역이 신라, 백제가 아닌 고구려 계승을 표방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사실 경기 지역은 BC 18년 백제의 건국 시점부터 475년 한성백제의 몰락 시점까지 500여년간 마한~백제로 이어지는 흐름의 지배를 받았고 553년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부터 901년 궁예가 봉기하기까지 300년 넘게 신라의 지배를 받았다. 하지만 경기 지역이 택한 나라는 백제나 신라가 아닌 1세기도 제대로 지배하지 못해본 고구려였다. 이는 고구려라는 나라가 한반도에서 얼마나 큰 위상을 가졌는지를 상징하는 바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