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궁과 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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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야간
[image] '''대한민국의 사적''' '''제18호'''
'''경주 동궁과 월지'''
慶州 東宮\, 月池
Banwols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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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원화로 102 (인왕동)
'''분류'''
유적건조물/정치국방/궁궐·관아/궁궐터
'''면적'''
350\,042㎡
'''지정연도'''
1963년 1월 21일
'''제작시기'''
신라
'''위치'''


1. 개요
2. 명칭
3. 역사
3.1. 신라시대
3.1.1. 연혁
3.1.2. 신라시대 당시의 구조와 건축물
3.2. 신라 이후
4. 복원 계획
5. 복원 비판
6. 월지 동쪽과 북동쪽의 발굴조사
6.1. 훨씬 넓은 궁궐이었을 가능성
7. 발굴과 출토된 유물
7.1. 경주 월지 금동용머리 장식
7.2. 경주 월지 금동초심지가위
7.3. 목제 주령구(酒令具)
7.4. 안압지 출토 금동판 불상 일괄
7.5. 경주 월지 유리잔
7.6. 경주 월지 목간
7.7. 경주 월지 금동화불
7.8. 경주 동궁 출토 신라 수세식 화장실
7.9. 경주 월지 금동 발걸이
7.10. 경주 월지 꽃·새무늬 뼈장식
7.11. 경주 월지 보상화무늬 전
7.12. 경주 월지 순금 장식
7.13. 경주 월지 금동 봉황 장식
7.14. 경주 월지 사자모양 곱돌향로뚜껑
7.15. 경주 월지 치미
7.16. 경주 월지 금동 불상
7.17. 경주 월지 입수쌍조문 사자공작무늬 돌
7.18. 꽃 장식 평탈칠기
7.19. 명활산성비
8. 입장료
9. 기타
1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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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주시에 위치한 통일신라 시대 궁궐 유적.
신라의 별궁으로, 신라의 태자가 사는 곳이었다. 왕이 사는 법궁경주 월성과는 원화로를 사이에 두고 북동쪽으로 매우 가까이 있으며 황룡사의 남서쪽에 있다. 지금의 국립경주박물관과도 아주 가깝다.[1]
궁궐은 신라 때는 수십 개 전각이 늘어서 있었지만 지금은 1, 3, 5호 건물지 3개만 복원한 상태다. 또한 이곳의 심벌은 월지라는 이름의 인공 호수인데, 사실 궁궐로서의 이미지보다는 과거 통칭이었던 안압지라는, 월지 호수누각으로서 훨씬 잘 알려져 있다. 이 인공호수는 신라 왕궁 안쪽의 친수구역으로 경복궁의 경회루처럼 풍류와 연회 장소로 만든 곳이다.
대표적인 고대 한국 건축물 중 하나이며, 통일신라 정원의 원형이 잘 보존되었고 건축양식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들이 많이 나왔다. 보통 한국의 다른 고대 유물들은 무덤에서 출토된 것이 많은데 문제는 죽은 자를 위해 부장하는 물건들은 실제로 일상에서 사용한 물건과는 다른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 나 이 곳에서 나온 유물의 특징은 문고리, 옷걸이, 가위, , 출퇴근 카드로 쓴 목간, 젓갈 제조일자 꼬리표, 각종 실제로 쓴 그릇 등 온갖 실생활용품이 많이 나왔다는 점이다.

2. 명칭


원래 안압지라는 이름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사실 안압지라는 명칭은 신라 때 썼던 이름은 아니고, 조선 초기의 기록인 동국여지승람동경잡기등에 기록된 것이다. 조선시대에 이미 폐허가 되어 갈대가 무성한 이곳 호수에 기러기오리들이 날아들자 안압지(雁鴨池)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1980년에 안압지에서 발굴된 토기 파편 등으로 신라시대에 이 호수를 월지(月池)라고 불렸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명칭은 반월성(半月城)(경주 월성)과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며, 임해전의 이름도 원래는 월지궁이다.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여 최근 이곳의 정식 명칭도 오랫동안 써 왔던 '안압지' 대신 '동궁과 월지'로 변경되었고 각종 안내문에서도 변경된 명칭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워낙 안압지로 알려진 기간이 길어서 아직도 안압지라고 부르고 표기하기도 한다.
다만 신라시기에도 '임해전'이란 명칭을 일부 쓰기도 한 듯하다. 삼국사기에는 동궁을 임해전(臨海殿)이라고 부른 기록이 있다. 바다에 가까운 건물이라는 뜻으로 안압지를 상징화했다고 추정한다. 해당 건물군들 주변 연못가에서 금동판불 등이 발견되어 여기에서 일종의 의식도 했을 가능성[2]도 있다.
그 외에 춘궁(春宮)이라고도 불렀다. 동쪽은 봄을 관장하는 청룡방위이기 때문이다.

3. 역사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아주 멋지고 다양한 건축물들이 많다.

3.1. 신라시대



3.1.1. 연혁


문무왕(文武王)이 674년궁전 경주 월성의 동쪽에 호수를 만들고, 679년에 같은 위치에 동궁을 별궁으로 짓고 여러 건물의 이름을 새로 지었다. 이 시기는 나당전쟁이 당나라의 도독부 공식 철수와 공격 포기로 사실상 마무리되면서[3] 기나긴 삼국통일전쟁이 마무리되고 평화시대가 시작되면서 정궁인 경주 월성이 규모가 협소했던 것을 확장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였고, 동궁은 태자가 거처하는 곳이 되었다. 죽어 동해용왕이 되었다고 믿어진 문무왕이 만든 곳이라 그런지 용왕에게 제사를 올리는 용왕전(龍王殿)이라는 건물이 있었고 용왕에 대한 제사는 출토된 신심용왕(辛審龍王) 유물로도 증명되었다.
697년과 769년, 881년 등 대신들을 모아 잔치를 벌인 기록이 있으며 804년과 867년에 대대적으로 중수했다. 후삼국시대인 931년에는 고려 태조를 초대해 잔치를 베풀기도 했다.

3.1.2. 신라시대 당시의 구조와 건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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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치업 전문가 '센트룸'이 복원한 '동궁과 월지'의 중전(中殿)과 정전(正殿) 출처
동궁에서 호수와 가장 인접한 곳에 임해전(臨海殿)을 세웠고, 여기서는 호수를 바라보며 연회를 즐기는 장소로 쓰였다. 신라가 멸망하기 직전인 931년 왕건서라벌을 방문했을 때 경순왕이 왕건을 임해전에서 접대하기도 했다. 특이점으로 임해전의 건물 구조는 이 없는 것을 제외하면 전형적인 사찰 가람 양식이다. 실제로 호수 안에서 불상과 불교 관련 유물이 좀 나오기도 했는데, 신라는 왕실과 석가모니 가문을 동일시할 정도로 불교와 왕실이 밀착해 있었으므로 왕실 건축도 영향을 받은 듯하다. 동궁에는 임해전을 비롯해 건물 27동의 건물이 확인되고 있는데, 임해전, 사정부, 소년감전, 예궁전, 동궁아관, 동궁아, 어룡성, 세택, 급장전, 월지전, 승방전, 포전, 월지악전, 용왕전 등이 있었다. 현재는 건물 3채만 복원했고, 나머지는 울타리를 쳐놓고 주춧돌만 보존한다. 동궁과 월지에 가 보면 입장 후 호수까지 가는 길에 건물터들을 볼 수 있다. 궁궐의 바닥은 경주 월지 보상화무늬 전과 같은 전돌보도블럭처럼 깔아서 포장했다.
동궁의 동쪽에 있는 호수 월지(안압지)는 별궁인 동궁에 붙어있는 일종의 유원지로, 거대한 인공 연못에 조경을 해놓고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임해전(臨海殿) 전각의 이름에서 보듯 호수는 바다를 형상화해서 만들었다. 좁은 호수를 넓어보이게 하기 위해 많은 과학적 장치를 뒀는데, 서쪽과 동쪽의 높이를 다르게 하고, 동쪽의 해안선을 구불구불하게 만들어 어디에 서서 봐도 호수 전체가 보이지 않도록 했다. 연꽃을 신라 때부터 식재했지만 신라 때는 연꽃의 무차별적인 번식으로 호수를 뒤덮어가 좁아보이게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물 안쪽에 우물 정자형 귀틀을 만들고 그 안에만 연꽃을 심었다. 하지만 현대 복원 과정에서 이걸 고려하지 않아 호수 여기저기에 연꽃이 만발해졌다.
월지에는 가장자리가 곡선과 직선이 섞인 연못이 있고, 연못 안에 크기가 서로 다른 섬 3개를 만들어[4] 섬 안에는 각종 진귀한 식물과 동물들을 풀어 놓았다고 한다. 모두가 여기에서 키우던 동물인지 그냥 고기를 먹고 뼈다귀를 호수에 내던져 버렸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호수 속을 조사했을 때 , , 돼지, , 노루, 산양, 사슴, 멧돼지, , 오리, , 거위, 기러기 등의 뼈가 출토되었다.
섬의 곡선이 교묘하게 처리되어 있어서 절대 한 곳에서는 그 전체 모습이 다 보이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보니 별 달리 지루한 것이 없다. 월지 등장 이후 이런 자연스러운 굴곡이 있는 연못 형상이 한국뿐만 아니라 비슷한 시기 일본 나라 쪽 연못에서도 유사점이 보이는데, 아마 이걸 본 일본 관료들이 일본에 있는 백제계 조경가들을 이용해서 만들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통일전쟁 직후에 만든 곳이다보니 고구려백제계 장인이 참여했을 것이라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는데, 1970년대 발굴을 위해 호수의 물을 빼자 거대한 석축이 드러났는데 큰 돌을 벽돌 모양으로 가공해 가지런히 쌓고 석축 주위에 보호석을 깐 것은 고구려의 산성 양식과 유사하다는 것이고, 출수구에서는 궁남지와 같은 연못 조경을 발달시켜온 백제 양식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이전 황룡사 목탑 건축에도 백제 장인 아비지가 참여했던 것을 보면 구삼국 출신 장인들이 모두 참여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호수의 물은 북동쪽에 있는 북천의 물을 인공 수로로 끌어오는데 신라시대에 만든 입수구 장치가 지금도 남아있다. 여기에도 여러 과학적 장치가 있는데, 물이 호수로 떨어지기 전에 거북이 등껍질을 음각한 듯한 두 개의 수조를 지나게 되어있어 북천 물에 섞여온 자갈과 흙들은 이 수조에서 거르고, 입수구의 물이 떨어지는 곳에는 판판한 돌을 깔아서 침식과 흙탕물이 되는 것을 방지했다. 그리고 물이 떨어져 흐르는 곳 바로 앞에 작은 인공섬을 만들어 물살을 느리게 하고 자연스럽게 물이 흐르도록 했다. 서남쪽에는 호수 물이 빠져나가는 배수구가 있는데 나무 마개 3개로 호수의 높이를 조절했다.
월지의 형태가 동아시아지도표현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실제로 가서 보면 잘 알기 어려운데 위성지도를 통해 공중에서 바라보는 식으로 보면 관람자가 서는 곳(서쪽) 기준에서 봤을 때 호수의 윤곽선이 상당히 중국 동해안부터 한반도로 이어지는 해안선과 유사한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은 대충 큰 땅덩어리 정도로 묘사돼 있지만 한반도 부분 해안선은 상당히 유사하다. 이에 따르면 위에서 말한 3개의 섬은 제주도, 일본 등을 표현한 것이라고. 지도 모양으로 만든 게 맞다면 세계 최초의 입체 지도라고 하며, 동아시아 전체를 표현한 지도 중 실물이 남은 가장 오래된 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보다도 600년 이상 오래된 셈이다. 국립경주박물관의 월지관에도 월지 해안선 지도설 이야기를 실어놓았다. 물론 한반도 지형처럼 우연히 닮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이건 인공호수라.. 다만 뚜렷한 기록이나 물증이 없어 가설로만 남았다.

3.2. 신라 이후


신라가 멸망하고 점점 관리가 되지 않게되었다. 또한 고려사를 비롯한 여러 기록들에서 조차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고려시대부터는 멸망한 신라왕조의 유산과 흔적을 없에기 위하여 동궁의 전각들을 호수로 무너트리거나 강제로 훼철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때문에 오히려 후대에 이르러 동궁의 건물과 목재의 흔적을 발견할수 있게 되었다. 고려시대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난 구한말에는 건물들은 터만 남고 호수 정도만 덩그러니 남았다가 일제강점기에 임해정이라는 전각을 새로 지은 적이 있으며, 결국 이는 복원을 위해 1977년에 북쪽에 있는 황성공원으로 옮겨졌다. 임해정의 현재 이름은 호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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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의 월지와 임해정
일제강점기에 설치된 동해남부선(현 동해선) 철도가 동궁 부지 유구 위를 일부분 밟고 지나간다. 다만 동해선이 최중요부분인 금당지를 밟고 지나가는 경주 사천왕사지에 비하면 여기는 끄트머리 쪽이라 그런지 인지도는 좀 낮다. 어쨌든 이 부분만 발굴조사를 못 하고 있고, 네이버 지도다음 지도의 위성사진을 봐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동해선이 신경주역 쪽으로 이설되면 선로를 걷어내고 조사가 시작될 계획이다.
월지는 경주 시내의 유일한 호수로, 원래는 발굴할 계획이 없었다. 그냥 동네 낚시터였다. 다만 1974년에 이미 폐허가 되어 탁한 물만 고여있는 월지를 좀 더 깔끔하게 <임해전지>로 정리하려고 준설작업을 하다가 갑자기 수많은 유물이 나오는 바람에 1975년부터 2년 동안 호수의 물을 빼고 발굴을 하게 되었다. 이 때 다섯 군데의 누각터를 비롯해 건물지 31곳, 선착장이 드러났고 함께 3만여점의 유물이 나왔는데 그 전까지 고대 유물이 주로 출토되던 무덤 등의 부장품과 달리 실생활에서 사용하던 것이 많이 나왔다. 유물에 대해서는 하단의 출토된 유물 단락 참조. 이 때 발굴한 유물들은 국립경주박물관 내부의 월지관(구 안압지관) 건물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는 신라시대의 연못과 석축, 그리고 세 동의 전각을 지어놓은 상태. 입장료는 2020년 성인 기준 3천원.

4. 복원 계획


경주시는 장기적으로 안압지와 임해전을 신라 때처럼 수십 채의 전각이 있는 별궁의 모습으로 완전히 복원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근처의 유적지(경주 월성, 황룡사, 경주 최씨 고택, 월정교 등)를 하나로 묶어서 관광상품으로 개발하려고 하는 분위기를 봐서는 언젠가는 복원할 기세다. 사실 경주에서 가장 원형대로 복원하기 쉬운 곳이 안압지이기도 하다. 다른 데선 원형이 남아나기 힘든 목재를 비롯해 여러가지 사소한 건축자재 유물들까지 많이 나와서 상대적으로 그 모습을 짐작하기 쉽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주변이 허허벌판이였으며 여기까지 경주시 도심이 확장되지 않은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거기에다가 근처 인공호수의 진흙 속에 묻혀있던 다양한 유물들이 발굴 직전까지 거의 천년을 버텨준 덕분에 그동안 발견된 적이 없는 그야말로 희귀한 유물들이 많이 보존되었다. 건물이 그대로 주저앉아 일부 목재와 기둥이 보존된 운 좋은 경우도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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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압지와 임해전의 복원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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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해전 모형 세부

5. 복원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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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월지 5호 전각의 단청.
안압지의 세 전각이 우선 복원된 상태인데, 일부에서는 복원을 잘못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전각의 구조는 그럭저럭 원형의 모습을 최대한 반영하여 복원한 것 같지만, 예를 들면 안압지에서 출토된 화려한 금속 장식물들을 전혀 활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라시대의 궁궐 건축물은 금속 장식물로 사치를 부리는 것을 경계했던 조선시대와는 달리 서까래나 난간 끝에 일일이 금동으로 된 장식 마개 등을 달았고, 덕분에 햇빛이 비치는 날은 건물이 금빛으로 번쩍거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물들이 출토되어 버젓이 경주박물관 월지관에 전시중임에도 불구하고 복원된 건물에는 하나도 쓰이지 않았다. 기와의 경우 섬세하게 조각된 장식기와를 활용한 것은 좋지만 마무리가 좀 어설픈 편이다. 단청의 경우에도 논란이 되는데, 일반적으로 고려 말~조선시대부터 유행한 상록하단 단청을 입혀놨기 때문. 다만 발굴된 단청 항아리에 녹색 안료가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상록하단의 경향이 삼국시대에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고 신라시대에 어떤 단청을 칠했는지에 대한 확실한 자료가 없어서 이 부분은 결론이 안 나는 상황. 확실한것은 신라는 적색(붉은)기둥과 금색 단청을 칠하였을 것이라는게 대부분 학계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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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 조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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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최근의 조감도
경주시는 신라왕경조성계획의 일환으로 2010년부터 2018년까지 사업비 630억원(국비 441, 도비 57, 시비 132)을 들여 동궁(東宮)내 정전(正殿) 및 회랑 복원, 선착장 발굴 및 구조물 정비, 미조사 지역 확대 발굴 및 경역 정비 등의 복원 사업을 진행할 예정이며, 실시설계에 들어가 2015년 7월에 복원 공사를 발주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계속 연기되다 결국 2018년 10월 유네스코 측에서 이번 복원이 정확한 기록이나 역사적 사료가 부족한 복원이라고 판단, 반대하여 현재는 복원사업이 취소된 상태이다.
2019년 출간된 동궁과월지 실시설계보고서를 보면, 국립경주박물관 소장의 월지 출토 목재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고, 이 연구결과가 설계에 반영된 모습을 보여준다. 동궁과 월지 서편 건물의 복원안을 보면 중층 전각의 경우 고대 중국이나 일본에서 많이 사용한 적층식 구조[5]를 적용했으며, 고구려 고분벽화의 인자화반과 월지 출토 파만자형 난간 등도 적용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실시설계 도면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서까래와 부연에 월지 출토 금동마구리를 반영하고, 난간에도 금속 철물을 반영한다는 점이다. 일본 평성궁 대극전과 매우 유사한 느낌을 주며, 실제 재현공사가 완료되었다면 평성궁과 흡사한 분위기였을 것으로 보인다. 단청은 최신 연구결과가 거의 그대로 반영되어 주칠 위주에 문양을 올리는 방안으로 추진될 방향이었고, 건물의 당호는 특이하게 당나라의 사례를 따라 서편 건물지 일대를 묶어서 '임해전'이라 부르고, 중문만 '임해문'으로 부를 방향으로 추진될 모양이었던 듯하다. 다만 아쉬운 점은 2014년에 이루어졌던 생활사나 내부 가구에 대한 연구가 이번 보고서엔 수록되어 있지 않다는 점. 이는 굉장히 중요한데 생활사나 내부 의장에 대한 고증연구가 충분하지 않으면 심혈을 기울인 드라마 세트장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백제 문화단지가 그 사례로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위에 서술된 것처럼 유네스코의 반대로 복원 사업은 무산되었고, 예산도 국가에 반납한 상황이었으나...
2020년 12월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에 관한 특별법이 시행되고, 주낙영 경주시장의 신년사에도 동궁과 월지의 '''복원'''을 직접적으로 언급 한 것을 보아 다시 복원에 박차가 가해질 듯 하다.

6. 월지 동쪽과 북동쪽의 발굴조사


월지 동쪽과 북동쪽은 일제강점기 때 깔린 동해선 철도가 깔려있어서, 매일 열차가 달리는 선로 아래는 2020년 현재도 제대로 발굴조사가 진행되지 못했다.[6] 동해선 철도의 복선전철화 및 신경주역 방면 이설은 끝없이 미뤄져왔지만 2021년 이설되는게 확정되어 구 동해선 선로는 철거될 예정.
일단 월지 동북쪽을 2017년부터 선로노반을 피해 나머지 부분에서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6.1. 훨씬 넓은 궁궐이었을 가능성


월지 동북쪽에서는 현재 수세식 화장실과 여러 대형건물,유물들이 대규모로 출토되고 있어서 동궁의 중심지가 월지호수 서쪽이 아닌 북쪽일 가능성도 생겨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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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월지호수 북동쪽은 바로 황룡사 부지와 쭉 이어진다. 동궁이 월지 북동쪽까지 뻗어있었다면 자연스레 황룡사동궁이 연결되어{'''남궁경주 월성동궁과 월지황룡사''' }와 같이 신라왕실과 관련된 궁궐과 건물들이 서로 연결되었다는 여러 설들이 생겨나고 있으며 특히나 신라왕실과 관련된 설이 주목을 받고 있다. 81m의 거대한 9층 목탑으로 세간에 유명한 황룡사는 본래 신라의 왕실 사찰이라는 점이나 신라에서 국교와 같았던 불교의 위상을 감안하면 왕궁의 일부와 같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고[7] 동궁이 예상외로 현재 알려진 범위보다 대규모로 위치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앞에 쓴 4개 왕궁시설이 쭉 연담화[8]되어져 있었다고 가정하고 이를 하나의 궁역으로 계산하면 흥선대원군이 무리해서 크게 중건한 그 경복궁보다도 더 넓었고, 동아시아 주변 국가들의 현재 남아있는 고궁인 일본의 교토고쇼류큐 왕국슈리성, 베트남후에 황궁보다도 더욱 컸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재까지 동궁의 발굴을 통해서 밝혀진 규모가 신라의 전성기에 비해 지나치게 작다는 것은 이번 월지 북동쪽 발굴조사를 통해서 확인되었다.
1970년대에 발굴이 월지 서쪽과 월지를 중심으로 발굴한 것이지만 2017년부터의 발굴이 월지 북쪽을 중심으로 발굴한것이기에 동궁의 각종 궐내각사침전, 화장실, 창고가 더 나올 가능성도 있다. 현재 네이버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동궁 서쪽과 남쪽은 현재 '원화로'로 인하여 끊겨있고,동쪽과 북쪽은 동해선 철도로 끊겨있다. 사방이 막혀있어 아직까지 발굴조차 하지 못한 상황이다. 일부 학자들은 북쪽과 동쪽에서의 발굴을 통해서 역사와 기록속의 전각들과 유물들이 추가로 출토될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하고 있다.

7. 발굴과 출토된 유물



발굴 당시를 촬영한 1976년 제작 영상
안압지에서 출토된 유물의 양이 삼만점에 달한다고 한다. 호수 안쪽의 진흙이 유물이 썩지 않고 원형을 보존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고대 건축물에 대한 정보가 절대 부족한 상황에서 수많은 건물 자재와 장식들이 나왔으며, 이런저런 고대의 생활상에 대한 기록이 이두로 써 있는 목간도 다수 출토되었다. 가령 '문호목간(門號)'이 있는데, 신라시대의 출퇴근 카드. 왕궁의 궁문별로 배치한 경비 인원을 목간에 기록한 다음, 그날그날 근무자의 실재 여부를 감독자가 직접 검사해서 경비의 이름 아래에 '있었다'는 뜻의 '재(在)' 자를 기록했다. 그리고 이 목간은 나중에 경비원이 봉급으로 받을 곡식을 청구하는 데 썼다. 이런 기록으로 동궁의 구조나 인력 운영 방식까지 알 수 있었다. 이외에 식해 같은 발효음식의 제조일자를 꼬리표로 달아놓은 목간이 여럿 나왔는데 가오리, 돼지고기, 개고기, 노루고기, 내장(순대?) 등을 연월일 - 음식물명 - 가공방식 - 용량, 용기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외에도 의약처방 기록 목간, 젓갈이 급히 필요하니 강원도 고성에서 택배로 보내오라고 요청한 목간 등 여러가지 일상생활에 쓰였을법한 목간들이 다수 나왔다. 기사 심지어는 한사(韓舍)[9]라는 똑같은 글씨를 잔뜩 써놓아 마치 필체를 연습한 듯한 목간, 사람의 얼굴을 낙서한 목간[10] 같은 것도 있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물건이 많이 나왔는데 그 중에는 문고리, 옷걸이, , 가위, 담았던 것의 흔적까지 남은 각종 그릇 같은 일상용품, 정교한 조각이 된 향로 뚜껑[11], 호숫가에 설치했을 난간과 기와 같은 동궁 건축의 잔해, 그 외에 신라의 주사위 같은 이색적인 물건도 있으며, 나무로 된 남근 조각상 같은 것도 있어서 후손들의 불순한 마음(...)을 자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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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남근상은 종교적 목적으로 많이 사용된 물건이라는 걸 감안해야 할 것이다. 60년대 이전까지 한국 무속에서도 많이 사용했고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부터 시작해서 고대 그리스나 로마, 북유럽 등등 거의 세계 전부라고 말해도 과장이 아닐만큼 광범위한 문화권에서 종교적 목적으로 사용된 게 발견된다... 는 견해도 있는데, 여기에서 발굴된 남근상을 보면 실제로 많이 사용한 듯 손때가 타 있고, 결정적으로 종교적 목적의 남근상이라면 굳이 추가할 필요가 없지만 자위섹스토이라면 자극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추가할 수 있는 돌기가 귀두 끝에 붙어 있다. 따라서 여기서 발굴된 남근상은 실제 섹스토이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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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압지에서 출토된 서양 할버드와 비슷한 쇠창.[12][13]
그 외에 고고학적인 조사결과를 통해 동궁과 월지에 흥미로운 부분이 많았다는 점이 드러나고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2017년에 발견된 '''수세식 변기'''의 존재이다. 그동안 '화장실'의 존재는 고고학적으로 꽤 발견이 있었지만 이렇게 수세식 변기의 형태를 띤 유적은 처음이다. 시대적인 배경으로 보아 대략적으로 8세기 신라 동궁에서 사용된것으로 추정되며 넓은 석조 발판이 양쪽에 있고 아래쪽에 변기가 위치하고 있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수세식 화장실로 추정된다고, 따로 물을 흘려보내는 시스템은 없는것으로 보아 볼일을 본 이후 항아리에 있는 물을 사용해서 밑으로 흘려보내는 배수로를 통해 분뇨를 아래로 내려보낸것으로 보여진다. 이런 수세식 화장실의 존재는 당대 신라 최상위 계층이 세련된(?) 문화를 영위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해당 유적에 대한 관련기사
그리고 땅 밑과 위에는 수십미터에 다라는 거대하고 기다란 화강암 배수로가 있다. 현재는 땅위에 있는 일부 배수로만 확인되며 실제로는 그 밑에 엄청난 길이의 배수로가 존재한다. 일부 배수로는 이를따라서 월지 내부로 이어진다.
당시 건축기술과 배수기술이 엄청나다는것을 보여주는 사례.

7.1. 경주 월지 금동용머리 장식




7.2. 경주 월지 금동초심지가위




7.3. 목제 주령구(酒令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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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령구
주령구를 본뜬 빵
나무로 만들어진 14면의 목제 주령구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있다.
  • 삼잔일거(三盞一去): 세 잔을 한 번에 마시기
  • 음진대소(飮盡大笑): 다 마시고 크게 웃기
  • 임의청가(任意請歌): 마음대로 노래 청하기
  • 자창자음(自唱自飮): 혼자 노래 부르고 혼자 마시기
  • 금성작무(禁聲作舞): 노래 없이 춤추기
  • 유범공과(有犯空過): 덤벼도(장난쳐도) 그대로 있기
  • 중인타비(衆人打鼻): 여러사람 코 때리기
  • 곡비즉진(曲臂則盡): 팔뚝 구부린 채 다 마시기[14]
  • 농면공과(弄面孔過): 얼굴 간질러도 가만 있기
  • 월경일곡(月鏡一曲): 월경(月鏡: 노래이름) 한 곡 부르기
  • 자창괴래만(自唱怪來晩): 스스로 괴래만[15]으로 부르기
  • 공영시과(空詠詩過): 시 한 수 읊기
  • 추물막방(醜物莫放): 더러워도 버리지 않기
  • 양잔즉방(兩盞則放): 두 잔 쏟아버리기(마시기라는 해석도 있다)
그야말로 고전적인 술 게임(...). 이 때문에 이 주사위에는 〈주령구(酒令具)〉라는 이름이 붙었다. 아마 포석정에서도 비슷한 놀이를 했을 것이다. 다만 이 주사위 유물 원본은 보존을 위해 건조를 하던 중 기기의 작동 이상으로 건조 온도가 너무 높아져 그만 재가 되어 버렸다. 다행히 건조기에 넣기 전에 기록이 되어 있었던 것이 불행 중 다행. 현재 국립경주박물관#s-4.2에 전시되어 있는 것은 복제품이다. 기념품으로 판매하기 위해 다양한 크기로 만들어진 상품들도 구할 수 있으며 아예 몇 배 이상 뻥튀기한 대형 사이즈의 주령구도 설치되어 있다.

7.4. 안압지 출토 금동판 불상 일괄




7.5. 경주 월지 유리잔




7.6. 경주 월지 목간




7.7. 경주 월지 금동화불




7.8. 경주 동궁 출토 신라 수세식 화장실




7.9. 경주 월지 금동 발걸이




7.10. 경주 월지 꽃·새무늬 뼈장식




7.11. 경주 월지 보상화무늬 전




7.12. 경주 월지 순금 장식




7.13. 경주 월지 금동 봉황 장식




7.14. 경주 월지 사자모양 곱돌향로뚜껑




7.15. 경주 월지 치미




7.16. 경주 월지 금동 불상




7.17. 경주 월지 입수쌍조문 사자공작무늬 돌




7.18. 꽃 장식 평탈칠기




7.19. 명활산성비




8. 입장료


성인
3,000원
청소년/군인
2,000원
어린이
1,000원
경주시민(주민등록증/운전면허증 제시), 장애인 복지카드, 국가유공자증 소지자는 입장료가 면제된다.

9. 기타


  • '제2안압지'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던 또다른 신라 인공호수정원 유적이 경주에 존재한다. 경주 용강동 원지 유적(대한민국의 사적 제419호)인데, 이 곳 역시 동궁과 월지에 비하면 규모가 작지만 유사한 궁궐건축으로 추정되며 진성여왕대의 북궁이거나 적어도 별궁 유적지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다만 동궁과 월지에 비해 정비를 하지 않았고 물을 채워놓지도 않았기 때문에 학자가 아닌 일반인이 보기엔 그냥 잔디 공원처럼 보일 뿐이고 다른 주요 관광지와도 경주 시내 반대편이라 거리가 먼 편이다.
  • 동궁과 월지 주변을 빙 둘러 음성안내시스템 QR코드 안내피켓이 있다. 그러나 2018년 10월 현재 사이트 접속이 되지 않으니 이 점 유의할 것.

10. 둘러보기




[1] 1974년 박물관 건설 당시 왕궁터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굴되어 지금의 박물관이 있는 쪽까지 왕궁 구역의 일부였다고도 보는 경우가 있다.[2] 월지를 만든 시기가 나당전쟁 당시에다가 김유신이 사망한 뒤 지진이나 호랑이가 궁궐에서 나오거나 반란도 있는 등 흉흉한 시절이다보니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 국난 극복용으로 해당 시설을 이용해서 의식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3] 당시 당나라는 서쪽 토번(티베트)과 동쪽 신라와 동시에 양면전쟁을 하고 있었는데 이미 고구려 때부터 계속 전쟁을 해왔기 때문에 국력 부담이 컸고 실제로 나중에 토번에게 수도 장안 근처까지 털린다. 사실 나당전쟁도 이런 당나라의 상황을 파악한 문무왕이 고구려 부흥세력과 입을 맞춰놓는 등 판을 짜놓은 뒤 선제공격해서 시작한 것이다.[4] 섬 3개 때문에 조선시대에 나온 안정복이 지은 동사강목에서는 '상무산십이봉' 즉,무산 십이봉을 본따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1999년 이전까지 이러한 구절을 인용해서 신선사상 등을 표현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정작 동사강목보다 훨씬 신라시대와 가까운 자료, 즉 삼국사기일본서기 등에서는 월지를 두고 '귀한 식물, 동물을 풀어놓았고 관상용으로 즐겼다는 것' 이외의 별다른 묘사를 하지 않았다. '무산 십이봉'이라는 개념이 나오기 전에 월지를 만들었음을 감안하면, 안정복이 조선시대 사람이니 당연히 당시 사고방식으로 잘못 판단한 것이다.[5] 별개의 분리된 층을 올려서 중층을 만드는 방식.입면이 자유로운 장점이 있다.[6] 비슷하게 경주에서 동해선 철도가 깔고 지나가서 조사 못 한 곳으로 경주 사천왕사지가 있다.[7] 실제로 삼국사기에서도 원래 궁전으로 만들 것을 공사 도중 사찰로 용도변경했다고 한다.[8] 담이 연결되어 하나의 건물군을 이루는것을 뜻한다.[9] 신라의 관등 이름이다.[10] 찾아보면 썩소를 짓고 있는 얼굴을 그려놓았다(...)[11] 사자 모양인데 몸통이 비어있어 향을 피우면 사자의 코와 입을 통해 연기가 나오게 만든 것이다.[12] 출처[13] 해당 유물은 드라마 해신에서 신라군 창으로도 나온 바 있고, 비슷한 유물이 개성에서 출토된 적도 있다. 북한에선 철검이라고 한다.[14] 후세 사람들중에선 이것을 러브 샷(...)으로 추정하는 사람들도 있다.[15] 밤 늦게 곤드레 되어 들어오는 모양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