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우치 카즈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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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우치 집안의 가몬(일본) 三つ柏紋(세 잎 떡갈나무)
山内一豊(やまうち かずとよ 또는 やまのうち かずとよ[1] )
1545년 혹은 1546년 ~ 1605년 11월 1일. 일본 전국시대의 다이묘(大名). 아내의 내조 덕분에 출세한 남편으로 잘 알려져있다. 토사번 야마우치 가문의 초대 당주. 이와쿠라 오다 가문의 중신이었던 야마우치 모리토요의 삼남이다.
오와리 국(尾張国)의 하구리 군 쿠로다에 있는 야마우치 가문의 성이었던 구로다 성에서 출상했다. 야마우치 가문은 대대로 이와쿠라 오다 가문을 섬기는 중신이었다. 카즈토요의 아버지인 모리토요는 그 가문의 중신격 되는 인물이었으나, 이와쿠라 오다 일족이 동족인 오와리의 오다 노부나가에게 대적했기 때문에 카즈토요의 가문 역시 이 전란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카즈토요의 형인 주로는 1557년에 구로다성에 있다가 습격당해 전사당하였고, 1559년에는 모시던 이와쿠라 오다 가문의 거성이었던 이와쿠라 성이 함락당했기 때문에, 모리토요도 죽음을 맞게 된다. 이렇게 카즈토요는 아버지도, 형도 잃은 채 기댈 곳 없는 신세가 되고 만다. 카즈토요 본인은 처음에 가리야스카 성의 성주인 아자이 신파치로 등을 섬겼으나, 1568년 경에는 오다 노부나가를 섬겨 키노시타 히데요시의 요리키[2] 가 되었다.
1570년 9월에 있었던 아네가와 전투에서 첫 출진을 시작하여 1573년 8월 아사쿠라 가문과의 도네사카의 전투에서는 얼굴에 중상을 당했음에도 적장 미타자키 칸에몬을 죽이는 등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3]
부인인 치요와의 결혼은 1573년경에 이루어졌다고 전해진다. 그녀의 내조에 대한 대표적인 에피소드가 있는데, 아즈치성 완공 후에 노부나가가 열병식을 열었는데, 명마가 있음에도 너무 비싸서 다들 아쉬워하는 가운데 양부모가 남겨준 금을 쓰지 않고 두었다가 이 때 말을 사서 카즈토요가 돋보이게 해 줬다고 한다. 이런 내조로 오히려 남편보다 유명해서 카즈토요의 별명은 치요의 남편[4][5]
한편, 몸을 돌보지 않은 채 무공을 세웠기 때문에 카즈토요는 오우미 국에서 400석[6] 을 받게 된다. 이때, 히데요시가 자신 직속의 가신을 거의 갖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려한 것인지[7] 카즈토요는 히데요시의 직신이 되게 된다. 이후 1577년에는 하리마 국을 중심으로 약 2000석을 영유하게 된다. 그 후에도 히데요시의 주고쿠 공략에도 참여해, 하리마의 미키 성을 둘러싼 합전이나 이나바의 돗토리 성을 함락시키는 전투에도 참여하였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으로 목숨을 잃은 뒤에도 카즈토요는 계속 히데요시의 가신으로서 맹활약을 하였다. 1583년의 시즈카타케 전투에서 공적을 세웠으며, 다음 해 12월의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포위하기 위한 지성 건축을 담당했다. 그 뒤 히데요시의 조카인 도요토미 히데츠구의 숙로가 되어 1585년에는 다카하마 성, 나가하마 성 등의 성주가 되어 2만석을 받아 처음으로 다이묘가 된다.[8] 그와 비슷한 시기에 종 5위인 쓰시마노카미에 임명받는다. 1590년의 오다와라 정벌에 참전하여 야마나카성을 함락시키는 데에 일조하였고 그 공적을 인정받아 도토미 국의 카게가와성과 5만 1000석의 영지를 받게 되었다.[9]
수백 석의 무사에서 5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으니 충분히 대단한 출세라고 할 수 있지만, 카즈토요가 400석 받을 때 100석 받던 아사노 나가마사, 호리오 요시하루, 나카무라 카즈우지 등이 카즈토요가 5만 석 받았을 때 8만 석[10] , 12만 석, 14만 석을 받은 것을 생각하면 전국 제일의 대출세 히데요시의 직신 중에서는 출세 속도가 순위권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것은 아마도 카즈토요가 개인의 용맹이 뛰어나서 수백 석 단위에서는 빠르게 출세했지만 점차 수천 수만 석 단위의 무사에게 필요한 전술적인 면이나 정치적인 면이 부족하여 출세속도가 둔화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임진왜란 때에는 도요토미 히데츠구의 숙로격이었기 때문에 출병을 면할 수 있었으나, 군선을 제조하는 데나 후시미 성의 보수 등을 담당하였다. 1595년, 히데츠구가 모반 혐의로 숙청되었을 때 함께 숙청당할 뻔 하였으나 카즈토요가 모반 사건과 관련되지 않았다고 강력하게 부인했기 때문에 가까스로 할복을 면하고 오히려 8000석을 가증받게 된다.
1600년 고다이로 중 한 사람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따라 아이즈의 우에스기 카게카츠의 정벌에 나섰다. 그 후, 이시다 미츠나리가 반 도쿠가와의 기치를 들게 되자 곧바로 동군에 가담하게 된다. 이때 자신의 거성인 카게가와 성을 바치겠노라고 이에야스에게 말해서 오히려 환심을 샀다.[11] 세키가하라 전투 때에는 직접적으로 큰 공훈을 세우지는 않았으나 전투 전의 공적[12] 을 인정받아 시코쿠의 토사 국 9만 8천 석[13] 받고 옮겨 살게 된다.
이때 전 영주였던 쵸소카베 모리치카 가문을 섬겼던 가신들에게 강한 반발을 받아 카즈토요는 암살당할 것이 두려워 5명 정도의 카게무샤와 행동을 같이하여야만 했다고 전해진다. 카즈토요는 쵸소카베의 잔당을 숙청했고, 이후 토사 번의 무사들은 죠시(上士)와 카시(下士)계급으로 나누어진다.[14] 죠시는 상급무사, 카시는 하급무사로 카즈토요를 따라 토사에 들어온 후다이 가신들은 죠시, 구 쵸소카베 가문 출신의 가신들은 카시로 나누어진 것이다. 이 두 계급 모두 무사였이지만 계급 차이가 심해 카시들은 심한 차별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막말 시기 활동했던 토사번사 들인 고토 쇼지로,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은 죠시(上士), 토사근왕당(土佐勤王党)을 이끌었던 타케치 한페이타, 삿쵸동맹(薩長同盟)을 성사시킨 사카모토 료마, 한페이타의 명으로 많은 사람을 죽인 오카다 이조 등은 카시(下士)였다.
식중독에도 관심이 많았는지, 가다랑어를 회로 먹지 말라고 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백성들은 이에 반발했고, 결국 일종의 꼼수로 가다랑어를 겉껍질만 살짝 굽고는 "날 것이 아니라 구운 거니 괜찮음!"이라고 우기며 생생한 속살을 회로 먹었다. 이것이 오늘날의 가쓰오 다타키(가다랑어 겉구이)가 되었다.
부인 치요와의 사이에는 친자식으로는 아들없이 고명딸 요네가 있었으나, 텐쇼 대지진 때 죽었고 나중에 부모가 누군지 모르는 남자아이를 양자로 들여 키우다가 카즈토요의 명으로 집을 나와 출가를 했다(부모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다 보니 야마우치 가문 가신들의 반발이 있었다고 한다). 가신에게 시집간 양녀도 한 명 있었다. 그러나 역시 야마우치 가문의 가독을 이을 아들이 없었기에, 친동생인 야마우치 야스토요의 장남 야마우치 타다요시를 데려와 양자로 삼고 가독을 잇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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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NHK 대하드라마 공명의 갈림길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였다.
일본 사극[15] 답게 주인공인 카즈토요에 대한 미화가 심하게 나온다. 수백 석을 받는 하시바의 가신이면서 하시바보다 더 오다 가 내 순위가 높은 대 다이묘인 아케치 미츠히데를 개인적으로 만난다던가, 야마자키 전투 이후 도주한 아케치를 찾아서 최후를 보았지만 그 수급을 잘라가지 않았다든가[16] ,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편으로 붙는 부분이라든가. 오다가에 임관한 것도 오케하자마 전투(1560년) 때로 나오고 다른 사람에게 사관한 적이 없는 것으로 나온다.[17]
역설적으로 미화가 주인공에 집중된 덕분에 주변인물에 대한 미화는 거의 없으며[18] 덕분에 전국시대 후반의 줄거리를 배우는 데에는 굉장히 도움이 된다. 오다 노부나가, 하시바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관한 개괄적이고 일반적인 이미지가 잘 표현되어 있다.
사실 드라마 주인공이라서 많이 보정받고 착한 인물로 나오지만 야마우치 카즈토요의 한계성이 여러 번 반복해서 나온다. 수천석을 받는 고위 무사라면 능력의 우선순위를 볼 때 개인의 무용은 순위가 내려가고 대규모 병력을 지휘하는 전술적인 면이나 대치중인 적과 교섭하는 정치적인 면이 중요해지는데 카즈토요는 둘다 꽝인 부분이 자꾸 나오는 것이다. 마츠나가 히사히데하고 교섭하러가서 성공시켰다고 자신만만해하다가 히데요시한테 까인다거나, 적 앞에서 병사들한테 따뜻한 밥먹인다고 연기피우다가 기습당해서 병력과 따뜻한 밥을 동시에 날리고 히데요시한테 까인다거나, 시대의 변화를 제대로 짚어내지 못해서 동료인 호리오 요시하루와 나카무라 카즈우지한테 어리숙하다는 말을 듣는다거나. 카즈토요의 이런 부족한 부분을 치요가 메워주는 장면도 자주 나온다.
대대로 어떤 시리즈에서든지 대접이 그리 좋지 않은 편, 아내 빨로 출세했다는 이미지가 워낙 강해서인지 능력치도, 전법도 모두 눈물나는 수준인 경우가 많다. 심지어 통무지정 어떤 능력치도 아내보다 높은 게 없다.
'''암살단원'''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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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우치 집안의 가몬(일본) 三つ柏紋(세 잎 떡갈나무)
山内一豊(やまうち かずとよ 또는 やまのうち かずとよ[1] )
1. 소개
1545년 혹은 1546년 ~ 1605년 11월 1일. 일본 전국시대의 다이묘(大名). 아내의 내조 덕분에 출세한 남편으로 잘 알려져있다. 토사번 야마우치 가문의 초대 당주. 이와쿠라 오다 가문의 중신이었던 야마우치 모리토요의 삼남이다.
2. 히데요시 이전
오와리 국(尾張国)의 하구리 군 쿠로다에 있는 야마우치 가문의 성이었던 구로다 성에서 출상했다. 야마우치 가문은 대대로 이와쿠라 오다 가문을 섬기는 중신이었다. 카즈토요의 아버지인 모리토요는 그 가문의 중신격 되는 인물이었으나, 이와쿠라 오다 일족이 동족인 오와리의 오다 노부나가에게 대적했기 때문에 카즈토요의 가문 역시 이 전란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카즈토요의 형인 주로는 1557년에 구로다성에 있다가 습격당해 전사당하였고, 1559년에는 모시던 이와쿠라 오다 가문의 거성이었던 이와쿠라 성이 함락당했기 때문에, 모리토요도 죽음을 맞게 된다. 이렇게 카즈토요는 아버지도, 형도 잃은 채 기댈 곳 없는 신세가 되고 만다. 카즈토요 본인은 처음에 가리야스카 성의 성주인 아자이 신파치로 등을 섬겼으나, 1568년 경에는 오다 노부나가를 섬겨 키노시타 히데요시의 요리키[2] 가 되었다.
3. 히데요시 휘하
1570년 9월에 있었던 아네가와 전투에서 첫 출진을 시작하여 1573년 8월 아사쿠라 가문과의 도네사카의 전투에서는 얼굴에 중상을 당했음에도 적장 미타자키 칸에몬을 죽이는 등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3]
부인인 치요와의 결혼은 1573년경에 이루어졌다고 전해진다. 그녀의 내조에 대한 대표적인 에피소드가 있는데, 아즈치성 완공 후에 노부나가가 열병식을 열었는데, 명마가 있음에도 너무 비싸서 다들 아쉬워하는 가운데 양부모가 남겨준 금을 쓰지 않고 두었다가 이 때 말을 사서 카즈토요가 돋보이게 해 줬다고 한다. 이런 내조로 오히려 남편보다 유명해서 카즈토요의 별명은 치요의 남편[4][5]
한편, 몸을 돌보지 않은 채 무공을 세웠기 때문에 카즈토요는 오우미 국에서 400석[6] 을 받게 된다. 이때, 히데요시가 자신 직속의 가신을 거의 갖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려한 것인지[7] 카즈토요는 히데요시의 직신이 되게 된다. 이후 1577년에는 하리마 국을 중심으로 약 2000석을 영유하게 된다. 그 후에도 히데요시의 주고쿠 공략에도 참여해, 하리마의 미키 성을 둘러싼 합전이나 이나바의 돗토리 성을 함락시키는 전투에도 참여하였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으로 목숨을 잃은 뒤에도 카즈토요는 계속 히데요시의 가신으로서 맹활약을 하였다. 1583년의 시즈카타케 전투에서 공적을 세웠으며, 다음 해 12월의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포위하기 위한 지성 건축을 담당했다. 그 뒤 히데요시의 조카인 도요토미 히데츠구의 숙로가 되어 1585년에는 다카하마 성, 나가하마 성 등의 성주가 되어 2만석을 받아 처음으로 다이묘가 된다.[8] 그와 비슷한 시기에 종 5위인 쓰시마노카미에 임명받는다. 1590년의 오다와라 정벌에 참전하여 야마나카성을 함락시키는 데에 일조하였고 그 공적을 인정받아 도토미 국의 카게가와성과 5만 1000석의 영지를 받게 되었다.[9]
수백 석의 무사에서 5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으니 충분히 대단한 출세라고 할 수 있지만, 카즈토요가 400석 받을 때 100석 받던 아사노 나가마사, 호리오 요시하루, 나카무라 카즈우지 등이 카즈토요가 5만 석 받았을 때 8만 석[10] , 12만 석, 14만 석을 받은 것을 생각하면 전국 제일의 대출세 히데요시의 직신 중에서는 출세 속도가 순위권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것은 아마도 카즈토요가 개인의 용맹이 뛰어나서 수백 석 단위에서는 빠르게 출세했지만 점차 수천 수만 석 단위의 무사에게 필요한 전술적인 면이나 정치적인 면이 부족하여 출세속도가 둔화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임진왜란 때에는 도요토미 히데츠구의 숙로격이었기 때문에 출병을 면할 수 있었으나, 군선을 제조하는 데나 후시미 성의 보수 등을 담당하였다. 1595년, 히데츠구가 모반 혐의로 숙청되었을 때 함께 숙청당할 뻔 하였으나 카즈토요가 모반 사건과 관련되지 않았다고 강력하게 부인했기 때문에 가까스로 할복을 면하고 오히려 8000석을 가증받게 된다.
4. 히데요시 사후
1600년 고다이로 중 한 사람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따라 아이즈의 우에스기 카게카츠의 정벌에 나섰다. 그 후, 이시다 미츠나리가 반 도쿠가와의 기치를 들게 되자 곧바로 동군에 가담하게 된다. 이때 자신의 거성인 카게가와 성을 바치겠노라고 이에야스에게 말해서 오히려 환심을 샀다.[11] 세키가하라 전투 때에는 직접적으로 큰 공훈을 세우지는 않았으나 전투 전의 공적[12] 을 인정받아 시코쿠의 토사 국 9만 8천 석[13] 받고 옮겨 살게 된다.
이때 전 영주였던 쵸소카베 모리치카 가문을 섬겼던 가신들에게 강한 반발을 받아 카즈토요는 암살당할 것이 두려워 5명 정도의 카게무샤와 행동을 같이하여야만 했다고 전해진다. 카즈토요는 쵸소카베의 잔당을 숙청했고, 이후 토사 번의 무사들은 죠시(上士)와 카시(下士)계급으로 나누어진다.[14] 죠시는 상급무사, 카시는 하급무사로 카즈토요를 따라 토사에 들어온 후다이 가신들은 죠시, 구 쵸소카베 가문 출신의 가신들은 카시로 나누어진 것이다. 이 두 계급 모두 무사였이지만 계급 차이가 심해 카시들은 심한 차별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막말 시기 활동했던 토사번사 들인 고토 쇼지로,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은 죠시(上士), 토사근왕당(土佐勤王党)을 이끌었던 타케치 한페이타, 삿쵸동맹(薩長同盟)을 성사시킨 사카모토 료마, 한페이타의 명으로 많은 사람을 죽인 오카다 이조 등은 카시(下士)였다.
식중독에도 관심이 많았는지, 가다랑어를 회로 먹지 말라고 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백성들은 이에 반발했고, 결국 일종의 꼼수로 가다랑어를 겉껍질만 살짝 굽고는 "날 것이 아니라 구운 거니 괜찮음!"이라고 우기며 생생한 속살을 회로 먹었다. 이것이 오늘날의 가쓰오 다타키(가다랑어 겉구이)가 되었다.
부인 치요와의 사이에는 친자식으로는 아들없이 고명딸 요네가 있었으나, 텐쇼 대지진 때 죽었고 나중에 부모가 누군지 모르는 남자아이를 양자로 들여 키우다가 카즈토요의 명으로 집을 나와 출가를 했다(부모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다 보니 야마우치 가문 가신들의 반발이 있었다고 한다). 가신에게 시집간 양녀도 한 명 있었다. 그러나 역시 야마우치 가문의 가독을 이을 아들이 없었기에, 친동생인 야마우치 야스토요의 장남 야마우치 타다요시를 데려와 양자로 삼고 가독을 잇게 했다.
5. 대중문화에서
5.1. NHK 대하드라마 공명의 갈림길에서의 야마우치 카즈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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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NHK 대하드라마 공명의 갈림길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였다.
일본 사극[15] 답게 주인공인 카즈토요에 대한 미화가 심하게 나온다. 수백 석을 받는 하시바의 가신이면서 하시바보다 더 오다 가 내 순위가 높은 대 다이묘인 아케치 미츠히데를 개인적으로 만난다던가, 야마자키 전투 이후 도주한 아케치를 찾아서 최후를 보았지만 그 수급을 잘라가지 않았다든가[16] ,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편으로 붙는 부분이라든가. 오다가에 임관한 것도 오케하자마 전투(1560년) 때로 나오고 다른 사람에게 사관한 적이 없는 것으로 나온다.[17]
역설적으로 미화가 주인공에 집중된 덕분에 주변인물에 대한 미화는 거의 없으며[18] 덕분에 전국시대 후반의 줄거리를 배우는 데에는 굉장히 도움이 된다. 오다 노부나가, 하시바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관한 개괄적이고 일반적인 이미지가 잘 표현되어 있다.
사실 드라마 주인공이라서 많이 보정받고 착한 인물로 나오지만 야마우치 카즈토요의 한계성이 여러 번 반복해서 나온다. 수천석을 받는 고위 무사라면 능력의 우선순위를 볼 때 개인의 무용은 순위가 내려가고 대규모 병력을 지휘하는 전술적인 면이나 대치중인 적과 교섭하는 정치적인 면이 중요해지는데 카즈토요는 둘다 꽝인 부분이 자꾸 나오는 것이다. 마츠나가 히사히데하고 교섭하러가서 성공시켰다고 자신만만해하다가 히데요시한테 까인다거나, 적 앞에서 병사들한테 따뜻한 밥먹인다고 연기피우다가 기습당해서 병력과 따뜻한 밥을 동시에 날리고 히데요시한테 까인다거나, 시대의 변화를 제대로 짚어내지 못해서 동료인 호리오 요시하루와 나카무라 카즈우지한테 어리숙하다는 말을 듣는다거나. 카즈토요의 이런 부족한 부분을 치요가 메워주는 장면도 자주 나온다.
5.2. 신장의 야망시리즈
대대로 어떤 시리즈에서든지 대접이 그리 좋지 않은 편, 아내 빨로 출세했다는 이미지가 워낙 강해서인지 능력치도, 전법도 모두 눈물나는 수준인 경우가 많다. 심지어 통무지정 어떤 능력치도 아내보다 높은 게 없다.
5.3.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
'''암살단원'''으로 등장한다.
[1] 전자는 야마우치 카즈토요, 후자는 야마노우치 카즈토요라 읽는데 후자는 현재 잘 쓰이지 않는 표기법이다. 야마우치 카즈토요와 그의 부인 치요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 공명의 갈림길에선 드라마 제작진이 카즈토요 후손들에게 성인 山内를 어떻게 읽어야 될지 문의했는데, 후손 측은 제작진 편할대로 하라고 해서 드라마에선 야마우치라 나온다.[2] 직속 부하가 아닌 일종의 파견 사원으로, 주군의 신하를 도와 군사 업무를 수행하는 계급이다.[3] 뺨에 화살을 맞았는데 드라마 공명의 갈림길에서는 말을 못하고 몸을 못 가눌 정도의 중상으로 나온다. 가신인 고토 타메키요가 화살을 뽑았고 그 화살촉을 자손대대로 가문의 자랑거리로 보관하였는데 현재는 고치현 아키 시의 역사 민속 자료관에 소장하고 있다.[4] 보통 아내를 xx의 처라는 식으로 표현하는데 여기선 정반대인 셈이다[5] 그런데, 바로 아래 문단을 보면 알겠지만 카즈토요는 1577년에 2000석의 봉록을 받게되는데, 각종 기록에 나오는 그 기마열병식이 열린 연도는 1581으로 되어있다. 즉 아즈치의 기마열병식 때라면 딱히 치요가 자신의 돈을 쓰지 않아도 황금 10냥의 말이라면 충분히 구할 수 있는 봉록을 받고 있었다는 게 되는 상황. 이 때문에 사실은 그 이전에 다른 기마열병식이 있었고, 당시에는 아직 봉록이 낮았던 시기였던지라 치요의 행동이 칭송받았던 게 아닌가 하는 설이 있다. 다만 카즈토요는 받는 봉록에 걸맞지 않게 가신을 많이 고용해서 항상 돈에 쪼달렸다는 설이 있으므로 단순히 고쿠다카 얼마니까 황금 열 냥의 명마를 살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당시의 황금 10량은 쌀 100석의 가치에 해당하고, 현재 기준으로도 천만 엔 상당이었다.[6] 이 당시 동료였던 아사노 나가마사 등은 100석 정도를 받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많이 받고 있는 셈이다.[7] 일례로 히데요시의 가신처럼 여겨지는 타케나카 한베에도 히데요시의 직속 가신이 아니고 요리키 였다.[8] 같은 해에 일어난 텐쇼 대지진으로 인해 외동딸이었던 요네히메를 잃는 비극을 겪는다.[9] 도토미 국은 원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지배하던 지방이었고, 오다와라 정벌로 뺏은 간토 8국을 이에야스에게 주면서 히데요시가 몰수해서 자신의 직신에게 나누어준 것이다. 이전 이에야스의 영지였다가 히데요시의 직신들에게 배분된 5국은 새로 이에야스의 영지가 된 간토 8국과 히데요시의 본거지인 오사카 사이에 있었는데, 여기에 직신을 배치한 것은 이에야스를 감시하라는 뜻에서였다. 그러나 뒤에서 보듯이 여기에 배치된 직신들은 히데요시 사후 다 이에야스에게 배신하는데 이는 여기에 배치된 직신들이 히데츠구의 숙로로도 일했기 때문에 숙청의 위기를 겪는 등의 사건으로 히데요시에게서 정나미가 떨어져서라고 추정된다.[10] 오다와라 전투 3년 전인 1587년 기준이며 오다와라 전투 3년 후인 1593년에는 21.5만 석. 호리오와 나카무라는 야마우치와 동일 시기인 오다와라 전투 기준.[11] 공명의 갈림길에서는 이것을 원래 친구 호리오 요사하루의 아들이 하려고하면서 상담했던 것을 그가 못하자 카즈토요가 대신 말하는 것으로 나온다.[12] 카즈토요가 자신의 거성을 바치자 다른 다이묘도 줄줄이 자신의 거성을 바치며 각자의 운명을 동군과 함께할 것을 확정했다.[13] 원래는 쵸소카베 가문의 영토였으며 이후 검지에서 20만 석으로 확인되고 막말에는 40만 석까지 석고가 늘어난다.[14] 이때 비열하고 잔인한 학살을 벌였는데 드라마 공명의 갈림길에서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드라마에서는 이걸 치요를 도와주던 닌자가 저지른 것으로 나온다. 이후 약간의 배우 개그가 있었는데, 닌자역의 카가와 테루유키가 료마전에서 차별당하는 카시(정확히는 무사 계급도 팔아서 지하 낭인이 된 카시 출신)로 나온다[15] 한극 사극도 미화가 심하지만 일본 사극은 주인공에 대한 미화가 심하다.[16] 이걸 챙겼으면 수천 석 가봉 감인데 정으로 포기했다는 것이다.[17] 낭인으로 있던 카즈토요가 오케하자마 전투에 뛰어들어서 노부나가를 죽이려다 어쩌다보니 이마무라 가의 주요 무사를 죽이는 공을 세우고, 논공행상 자리 때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그러자 노부나가는 벌떡 일어나서 창을 겨누더니, 곧 '그대의 창이 너무 짧으니 이걸 주마'라며 창을 수여하고 그를 받아들이는 장면으로 나온다.[18] 혼노지의 변 이전의 히데요시가 조금 사람 좋게 나온다. 학살당할 위기에 처한 민간인을 구해준다든가. 하지만 이후의 뻘짓과 잔인함이 생략없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