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도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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淀殿
1569년 ~ 1615년 6월 4일 (음력 5월 8일)
일본 전국시대의 인물. 아자이 나가마사와 오이치(お市) 사이의 장녀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실. 도요토미 츠루마츠와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생모. 센히메(千姫)는 그녀의 며느리인 동시에 조카이기도 하다. 더불어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는 조카이기도 하다. 여동생으로 죠코인(오하츠), 스겐인(오고우)이 있다.
소위 '아자이 세 자매' 중 첫째. 이름은 차차(茶々)[2] 또는 키쿠코(菊子). '요도도노'라는 호칭은 그녀가 살던 곳이 요도 성(淀城)이었기 때문에 생긴 것으로, '요도 성의 마님'이라는 뜻.[3] 마찬가지로 '요도노 카타(淀の方)'라고도 불렸다. '요도기미(淀君)'라는 호칭으로도 자주 불린다.
'기미'가 유녀의 호칭에 자주 쓰였다는 점에서 그녀를 비하하기 위한 호칭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실제로는 기미(君)가 귀부인에게 붙여지는 칭호이기 때문에 유녀를 직접 부를때 띄워주는 의미에서 불려졌다는 게 정답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런데 요도도노를 기미라고 부른 에도 시대에 쓰여진 기록에 음란하고 질투가 많고, 히데요시의 정실 네네와 권력 다툼을 했다는 험담이어서 요도기미는 비하하는 명칭이 분명하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에도 시대에 작성된 도쿠가와 가문의 계보인 도쿠가와 바쿠후 가보(徳川幕府家譜)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후처 아사히히메가 아사히기미(朝日君),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정실 스겐인이 오에요기미(於江与君)라고 적혀 있는 걸 보면 기미(君)가 특별히 비하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용법상으로도 기미(君)는 귀부인에게 붙여지는 경칭이다.
1573년 외숙 오다 노부나가의 공격으로 아버지 아자이 나가마사의 거성 오다니 성(小谷城)이 함락될 때 어머니와 두 동생과 함께 구출되어 오다 가에서 살게 된다. 하지만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하고 어머니 오이치가 시바타 카츠이에와 재혼하면서 키타노쇼 성(北ノ庄城)에 살게 되지만 시즈가타케 전투로 키타노쇼 성이 함락되고,카츠이에와 오이치는 자결하면서 두 동생과 함께 히데요시의 보호를 받는다. 그 후 히데요시의 측실이 되는데, 다른 두 여동생은 차례차례 시집을 보냈는데 차차만은 스무살이 지나도록 혼례를 미루더니 1585년 관백에 취임한 히데요시가 1588년 첩으로 취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어머니가 자결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인 집안 웬수와 결혼한 것이다.
요도도노의 어머니 오이치를 사랑했던 히데요시가 어머니를 가장 닮은 그녀를 측실로 맞은 것이라고 한다. 어머니를 닮은 탓인지 히데요시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히데요시의 아들 도요토미 츠루마츠(鶴松)를 낳고 요도 성을 받았다. 그녀의 호칭 '요도도노'는 여기서 유래한 것.[4] 불행히도 츠루마츠는 3살 때 요절하지만 다시 히로이마루(拾丸,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낳는다.
히데요리의 생모라는 점을 이용해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도 도요토미 가의 실권을 잡았으나 1615년 오사카 전투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아들 히데요리와 함께 할복. 카이샤쿠는 모리 카츠나가가 맡았다. 그러나 유해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존설도 돌았다.
매우 자존심이 센 여성이었던 모양으로, 다이고의 꽃놀이에서 사촌이자 같은 히데요시의 측실인 마츠노마루와 서열을 다퉜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신앙 깊은 온화한 성품이라고 전해진다.
히데요시 사후와 관련된 일화가 있는데, 히데요시의 정실 코다이인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관에 넣자 이에 질세라 히데요리가 손을 씻은 물을 관에 넣었다고 한다. 그것을 본 코다이인이 아직 앞날이 창창한 히데요리와 관련된 것을 관에 넣다니 불길하다면서 혀를 찼다고.
신장이 165~170cm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일본 남성 평균 신장이 155cm였던 것을 감안하면 현대 기준으로 180~185cm쯤 되는 엄청난 장신이었던 셈.
이시다 미츠나리, 오오노 하루나가(大野治長)[5] 와의 불륜설이 유명. 히데요시가 수많은 측실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은 여성이 그녀 밖에 없어서 사실 히데요시는 무정자증이고 츠루마츠와 히데요리는 불륜의 결과물이라는 이야기가 거의 정설이 되었을 정도였다. 음모론이라고 치부하기도 뭐한 것이 히데요시가 천하가 알아주는 호색가였고 정실 네네 사이에 자식이 없기도 해서 첩을 15명이나 들였는데 자식을 보지 못했다. 첩이 되기 전 아이를 다섯명씩이나 낳은 여인도 있었으니 여자쪽은 문제가 없었다. 더군다나 애를 써서 본 히데요리는 체격이 왜소했던 아버지와 달리 키가 188이나 되는 지금기준에서 봐도 정말 대단한 체구를 자랑하는 등 아버지 히데요시와 닮은 구석이라곤 없었으니 현대시점에서 봐도 의심이 안 들래야 안들 수가 없다.
오타니성, 키타노쇼성, 오사카성 등 낙성(落城)이 세번이나 발생했기 때문에 농담 삼아 '전국 제일의 불운'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또한 전쟁으로 인한 것은 아니나 그녀가 받았던 요도 성은 히데츠구 사건과 연루되어 폐성이 되기도 하였다.
淀殿
1569년 ~ 1615년 6월 4일 (음력 5월 8일)
'''"노부나가의 혈통을 잇고, 히데요시의 총애를 받고, 이에야스가 두려워한 여인"'''
요도도노를 주인공으로 한 <차차 : 천애의 귀비>라는 일본 사극의 카피.[1]
1. 개요
일본 전국시대의 인물. 아자이 나가마사와 오이치(お市) 사이의 장녀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실. 도요토미 츠루마츠와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생모. 센히메(千姫)는 그녀의 며느리인 동시에 조카이기도 하다. 더불어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는 조카이기도 하다. 여동생으로 죠코인(오하츠), 스겐인(오고우)이 있다.
소위 '아자이 세 자매' 중 첫째. 이름은 차차(茶々)[2] 또는 키쿠코(菊子). '요도도노'라는 호칭은 그녀가 살던 곳이 요도 성(淀城)이었기 때문에 생긴 것으로, '요도 성의 마님'이라는 뜻.[3] 마찬가지로 '요도노 카타(淀の方)'라고도 불렸다. '요도기미(淀君)'라는 호칭으로도 자주 불린다.
'기미'가 유녀의 호칭에 자주 쓰였다는 점에서 그녀를 비하하기 위한 호칭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실제로는 기미(君)가 귀부인에게 붙여지는 칭호이기 때문에 유녀를 직접 부를때 띄워주는 의미에서 불려졌다는 게 정답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런데 요도도노를 기미라고 부른 에도 시대에 쓰여진 기록에 음란하고 질투가 많고, 히데요시의 정실 네네와 권력 다툼을 했다는 험담이어서 요도기미는 비하하는 명칭이 분명하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에도 시대에 작성된 도쿠가와 가문의 계보인 도쿠가와 바쿠후 가보(徳川幕府家譜)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후처 아사히히메가 아사히기미(朝日君),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정실 스겐인이 오에요기미(於江与君)라고 적혀 있는 걸 보면 기미(君)가 특별히 비하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용법상으로도 기미(君)는 귀부인에게 붙여지는 경칭이다.
2. 생애
1573년 외숙 오다 노부나가의 공격으로 아버지 아자이 나가마사의 거성 오다니 성(小谷城)이 함락될 때 어머니와 두 동생과 함께 구출되어 오다 가에서 살게 된다. 하지만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하고 어머니 오이치가 시바타 카츠이에와 재혼하면서 키타노쇼 성(北ノ庄城)에 살게 되지만 시즈가타케 전투로 키타노쇼 성이 함락되고,카츠이에와 오이치는 자결하면서 두 동생과 함께 히데요시의 보호를 받는다. 그 후 히데요시의 측실이 되는데, 다른 두 여동생은 차례차례 시집을 보냈는데 차차만은 스무살이 지나도록 혼례를 미루더니 1585년 관백에 취임한 히데요시가 1588년 첩으로 취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어머니가 자결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인 집안 웬수와 결혼한 것이다.
요도도노의 어머니 오이치를 사랑했던 히데요시가 어머니를 가장 닮은 그녀를 측실로 맞은 것이라고 한다. 어머니를 닮은 탓인지 히데요시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히데요시의 아들 도요토미 츠루마츠(鶴松)를 낳고 요도 성을 받았다. 그녀의 호칭 '요도도노'는 여기서 유래한 것.[4] 불행히도 츠루마츠는 3살 때 요절하지만 다시 히로이마루(拾丸,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낳는다.
히데요리의 생모라는 점을 이용해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도 도요토미 가의 실권을 잡았으나 1615년 오사카 전투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아들 히데요리와 함께 할복. 카이샤쿠는 모리 카츠나가가 맡았다. 그러나 유해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존설도 돌았다.
매우 자존심이 센 여성이었던 모양으로, 다이고의 꽃놀이에서 사촌이자 같은 히데요시의 측실인 마츠노마루와 서열을 다퉜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신앙 깊은 온화한 성품이라고 전해진다.
히데요시 사후와 관련된 일화가 있는데, 히데요시의 정실 코다이인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관에 넣자 이에 질세라 히데요리가 손을 씻은 물을 관에 넣었다고 한다. 그것을 본 코다이인이 아직 앞날이 창창한 히데요리와 관련된 것을 관에 넣다니 불길하다면서 혀를 찼다고.
신장이 165~170cm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일본 남성 평균 신장이 155cm였던 것을 감안하면 현대 기준으로 180~185cm쯤 되는 엄청난 장신이었던 셈.
3. 기타
이시다 미츠나리, 오오노 하루나가(大野治長)[5] 와의 불륜설이 유명. 히데요시가 수많은 측실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은 여성이 그녀 밖에 없어서 사실 히데요시는 무정자증이고 츠루마츠와 히데요리는 불륜의 결과물이라는 이야기가 거의 정설이 되었을 정도였다. 음모론이라고 치부하기도 뭐한 것이 히데요시가 천하가 알아주는 호색가였고 정실 네네 사이에 자식이 없기도 해서 첩을 15명이나 들였는데 자식을 보지 못했다. 첩이 되기 전 아이를 다섯명씩이나 낳은 여인도 있었으니 여자쪽은 문제가 없었다. 더군다나 애를 써서 본 히데요리는 체격이 왜소했던 아버지와 달리 키가 188이나 되는 지금기준에서 봐도 정말 대단한 체구를 자랑하는 등 아버지 히데요시와 닮은 구석이라곤 없었으니 현대시점에서 봐도 의심이 안 들래야 안들 수가 없다.
오타니성, 키타노쇼성, 오사카성 등 낙성(落城)이 세번이나 발생했기 때문에 농담 삼아 '전국 제일의 불운'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또한 전쟁으로 인한 것은 아니나 그녀가 받았던 요도 성은 히데츠구 사건과 연루되어 폐성이 되기도 하였다.
4. 대중매체
[1] 유의할 점은 히데요시의 건을 제외하면 모두 '''과장'''이란 것이다. 먼저 노부나가의 경우 노부나가의 자식도 아닌 조카일 뿐이며, 노부나가의 친자식들이 멀쩡히 대를 이었으니 그 점에서 딱히 돋보일 존재는 아니었다. 노부나가와 오이치가 근친했다는 소리도 아니고. 거기다 히데요시 사후 요도도노는 유일한 패권자인 이에야스에게 농락당하기 일쑤였고, 이에야스가 패권을 기정사실화 한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는 그녀를 두려워할 이유가 더욱 없어진다. 그냥 센코쿠 시대의 3대 영웅들과 크고 작게 연관이 있었던 여인이라는 의미 정도로 이해하면 무난하다.[2] 뒤의 々표기는 동어반복을 나타내는 기호이기 때문에 차차(茶茶)라는게 원래 표기일듯하다. [3] ~도노(どの/殿)는 일본어에서 명칭/호칭 뒤에 붙이는 존칭이다.[4] 일본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다면 잘 알겠지만 도노는 일본어로 남을 높여 부르는 존칭이다. 한국어로 하면 '요도 공' 정도.[5] 요도도노의 유모 아들, 즉 젖형제인데 실제로도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