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죽지랑가
1. 개요
慕竹旨郞歌
삼국유사에 전하는 8구체 향가. 신라 효소왕 시절 득오라는 낭도가 화랑 죽지랑을 사모하여 지었다고 한다.[1]
2. 원문
去隱春皆理米,
毛冬居叱沙哭屋尸以憂音,
阿冬音乃叱好支賜烏隱,
皃史年數就音墮支行齊,
目煙廻於尸七史伊衣,
逢烏支惡知乎下是,
郞也慕理尸心未行乎尸道尸,
蓬次叱巷中宿尸夜音有叱下是
3. 해석
4. 죽지랑은 누구?
우리나라 인물사전을 보면 죽지랑이라는 인물은 없는데 대신 죽지라는 인물은 있다. 랑이 이름이 아니라 인칭대명사나 존칭 내지는 호칭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에 '죽지랑'이 아닌, '죽지'가 이름이다. 실제로 죽지는 김유신과 동시대에 화랑으로 활약하였는고로 이 향가가 지어진 시기에는 상당히 나이 든 노화랑이라 할 수 있다.[4] 여기 죽지랑의 탄생 설화 배경이 있다.
처음에 술종공이 삭주도독사가 되어 임지에 가려 하였다.
이때는 삼한의 병란이 있었으므로, 기병 3000명으로 호송하였다. 죽지령에 이르자 한 거사가 그 고갯길을 평평하게 닦고 있었다. 공이 그걸 보고서 칭찬하자, 거사는 또한 공의 위세가 매우 빛남을 좋게 여겨, 서로 마음으로 감동하였다. 술종공이 삭주[5]
에 부임한 지 한 달이 지나, 꿈에 거사가 방중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는데, 부인도 같은 꿈을 꾸었다. 놀라고 괴이한 것이 더욱 심하여 다음날 사람을 보내 거사의 안부를 물었다. 그곳 사람이 말하길 “거사는 죽은 지 여러 날이 되었습니다.”고 했다. 심부름 간 사람이 돌아와 그가 죽었음을 아뢰니, 꿈꾼 날과 같은 날이었다.공이 말했다.
“아마도 거사가 우리 집에 태어난 모양이오.”
이후 술종공에게서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 아기의 이름을 죽지라고 하였다.
5. 모죽지랑가의 배경
신라 효소왕 시절의 일이다. 죽지랑이 이끌던 낭도 중에 득오라는 낭도가 있었는데, 어느날 매일 출근을 하던 그가 갑자기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이를 이상히 여긴 죽지랑은 득오의 어머니를 찾아가 득오가 익선이라는 아간에 의해 부산성 창직으로 끌려간 것을 알게되어 설병 한 홉과 술 한 항아리를 가지고, 노복을 거느리고 (그를 찾아) 갔다. 낭도 137명도 예의를 갖추고 따라 갔다.
부산성에 이르러 득오는 죽지랑을 만나게 되었고, 죽지랑은 득오에게 술과 떡을 먹이고 아간 익선에게 득오의 휴가를 요청하였으나 익선은 이를 거부하였다. 이 때 마침 이 부산성을 지나던 간진이라는 사리가 추화군 능절의 조 30석을 걷어 성중으로 수송하다가, 죽지랑이 선비를 소중히 여기는 풍미를 아름답게 여기고, 익선의 답답하게[暗塞] 통하지 않는 것을 더럽게 여겼다. 그리하여 수송하던 30석을 익선에게 주어 (죽지랑의) 청이 받아들어지길 거들었으나, 외려 (익선은) 허락하지 않았다. 또한 진절 사지의 말안장을 그에게 주니, 그제야 허락했다.
한편 이 일은 조정의 화주가 알게 되어 익선을 잡아다 더러움을 씻겨 주고자 하였으나, 이를 눈치챘는지 익선은 달아나 숨어버리고 대신 그 아들을 잡아갔다. 하필 이때가 한겨울이라 성안의 연못에다 목욕을 시키니 익선의 아들은 얼어죽었고, 국왕 또한 이 일을 전해듣고는 익선과 같은 고향인 모량리 출신으로 관직에 있던 자들을 모조리 내쫓아 다시는 벼슬을 못하게 하였으며 승려가 되지도 못하게 했다. 혹, 승려가 되었다 하더라도 절에는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 무렵 원측은 해동의 고승이었으나, 모량리 사람이라는 점 때문에 승직을 받지 못하였고, 한편 국왕은 간진의 행동은 의롭게 여겨 칙사가 간진의 자손들을 평정호손으로 삼아 표창하였다고 한다.
그로부터 먼 훗날 득오가 죽지랑을 떠올리며 노래를 지었는데 이게 모죽지랑가다.
학계에서는 삼국통일전쟁의 영웅인 죽지랑의 부탁을 일개 지방 호족이 거듭 생까다가 뇌물을 두 차례나 얻어먹고서야 들어주는 사례라던지, 이를 보복한답시고 화랑도 측에서 그 호족 아들을 대신 잡아다가 죽이는 등의 내용으로 볼때 통일신라가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화랑도의 타락과 쇠퇴를 보여주는 자료로 평가하고 있다.
[1] 모(慕)의 해석방향에 따라 죽지랑을 추모하는 내용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2] 2017 수능특강 국어영역 문학 편에는 이 해석이 수록되어 있다.[3] 2022 수능특강 문학에는 위의 양주동 역과 함께 이 번역이 실렸다. [4] 한편 죽지랑이 젊었던 시절인 진평왕 시대의 일화를 가지고 효소왕 시대에 이 노래를 지었다는 설도 있다.[5] 지금의 춘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