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지

 

1. 개요
2. 생애
3. 모죽지랑가


1. 개요


竹旨
신라 중기의 화랑이자 장군. 향가 모죽지랑가의 주인공으로 유명하다.[1] 은 존칭접미사였기 때문에 '죽지랑'으로 불리기는 했지만, '죽지'가 이름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 시대는 '지'를 존칭접미사로 이름에 자주 붙였기 때문에(ex: 아비지) 어쩌면 본명은 그냥 '죽'이거나 이를 훈독한 무언가 일 수도 있다.
다만 고대인들의 인명체계는 개인의 이름이 분명한 현대인들과는 달리 그렇게 엄밀하진 않아서 '앞마을의 신씨 대장장이 어르신'이라거나 유씨네 막내 아들처럼 적당히 호칭된 면이 없잖아 있기 때문에 존칭접미사가 아예 이름의 일부에 결합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다.

2. 생애


삼국유사에는 죽지의 탄생 배경에 대해 서술되어 있는데 술종공(述宗公)의 아들이며, 술종공이 삭주(현재의 춘천시) 도독이 되어 임지로 가던 도중에 죽지령(竹旨嶺)이라는 고개를 지나는데 한 거사(居士)가 그 고갯길을 평평하게 정리하고 있어서 술종공이 눈여겨보았다. 근무지 삭주에 도착해 한 달이 지난 후 술종공의 꿈에서 거사가 방에 들어오는 걸 봤는데 공의 아내도 똑같은 꿈을 꾸었다고 해 신기하게 생각해 다음날 사람을 시켜 그 거사의 안부를 물어봤더니 이미 거사는 돌아가신 지 며칠 됐다는 답변을 듣는다. 술종공은 거사가 이 집에서 환생하려 한다고 생각해 새로 태어난 아이에게 죽지령의 이름을 따 죽지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죽지랑의 정확한 생몰년은 전해지지 않지만 삼국사기에서 진덕여왕 3년(649년)에 백제의 장군 은상이 쳐들어오자 대장군 김유신, 장군 천존 등과 함께 출진해 도살성에서 백제군을 크게 무찌르는 전투로 처음 등장했다. 651년에는 신라 최초로 중시(이후의 시중)에 임명되어 김유신과 국사를 논하는 등 유력 대신으로 올라섰고 이후 문무왕 시대까지 백제부흥군 토벌, 668년의 고구려 공격, 670년 나당전쟁 개전 때 당나라의 꼭두각시 기관인 웅진도독부를 공격해 백제 잔당을 토벌하는 등 7세기의 격변기를 관통해 여러 차례 활약했다. 삼국사기의 이 시기 출진기록을 보면 죽지가 안 참가하는 전투가 별로 없을 정도다. 다만 고대사 기록의 한계로 출진할 때 죽지가 참전했다 정도의 기록만 많아서 비록 삼국유사만큼 행적이 자세하게 전하지는 않지만 죽지랑이 통일전쟁에 큰 공헌을 했음은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삼국유사에 수록된 향가 모죽지랑가의 배경이 된 일화는 통일 후로도 시간이 꽤 지난 효소왕 시대라고 써 있는데 학자에 따라서는 죽지랑이 젊었던 시절인 진평왕 시대의 일화가 연대가 잘못 기록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3. 모죽지랑가


화랑으로 활동했는데, 자신의 휘하 낭도 득오(得烏)가 노역에 동원되어 어려움을 겪자 구해내기 위해 애를 쓴 미담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 효소왕 시절의 일이다.[2] 죽지랑이 이끌던 낭도 중에 득오라는 낭도가 있었는데, 어느날 매일 출근을 하던 그가 갑자기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이를 이상히 여긴 죽지랑은 득오의 어머니를 찾아가 득오가 익선이라는 아간에 의해 부산성 창직으로 끌려간 것을 알게되어 설병 한 홉과 술 한 항아리를 가지고, 노복을 거느리고 (그를 찾아) 갔다. 낭도 137명도 예의를 갖추고 따라갔다.
부산성에 이르러 득오는 죽지랑을 만나게 되었고, 죽지랑은 득오에게 술과 떡을 먹이고 아간 익선에게 득오의 휴가를 요청했으나 익선은 이를 거부했다. 이 때 마침 이 부산성을 지나던 간진이라는 사리가 추화군 능절의 조 30석을 걷어 성중으로 수송하다가, 죽지랑이 선비를 소중히 여기는 풍미를 아름답게 여기고, 익선의 답답하게[暗塞] 통하지 않는 것을 더럽게 여겼다. 그리하여 수송하던 30석을 익선에게 주어 (죽지랑의) 청이 받아들어지길 거들었으나, 외려 (익선은) 허락하지 않았다. 또한 진절 사지의 말안장을 그에게 주니, 그제야 허락했다.
한편 이 일은 조정의 화주가 알게 되어 익선을 잡아다 더러움을 씻겨 주고자 했으나, 이를 눈치챘는지 익선은 달아나 숨었고 대신 그 아들을 잡아갔다. 아비의 더러움을 씻겨준다며 성안의 연못에다 목욕을 시키니 하필 이때가 한겨울이라 아들은 동사했고(애초에 익선 대신 죽으라고 연못에 처넣은 것으로 보인다), 국왕 또한 이 일을 전해듣고는 익선과 같은 고향인 모량리 출신 사람들을 모두 내쫓아 다시는 벼슬을 못하게 했으며 승려가 되지도 못하게 했다. 혹, 승려가 되었다 하더라도 절에는 들어가지 못하도록 했다. 이 무렵 원측은 해동의 고승이었으나, 모량리 사람이라는 점 때문에 승직을 받지 못했고, 반면 국왕은 간진의 행동은 의롭게 여겨 칙사가 간진의 자손들을 평정호손으로 삼아 표창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먼 훗날 득오가 죽지랑을 떠올리며 노래를 지은 게 모죽지랑가다.
학계에서는 삼국통일전쟁의 영웅인 죽지랑의 부탁을 일개 지방 호족이 거듭 생까다가 뇌물을 두 차례나 얻어먹고서야 들어주는 사례라던지, 이를 보복한답시고 화랑도 측에서 그 호족 아들을 대신 잡아다가 죽이는 등의 내용으로 볼때 통일신라가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화랑도의 타락과 쇠퇴를 보여주는 자료로 평가하고 있다.

[1] 모(慕)의 해석방향에 따라 죽지랑을 추모하는 내용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죽지랑이 군인으로 활약한 시기는 김유신과 동시대인 삼국통일전쟁 때인데 모죽지랑가의 배경은 효소왕 시대고, 모죽지랑가가 쓰여진 시점은 죽지랑이 매우 늙었거나 사망했을 시점일 가능성이 높다.[2] 죽지랑의 탄생년은 정확히 전하진 않지만, 삼국사기 기록에서 죽지는 무열왕~문무왕 시대에 무인으로 활발히 활동했므로, 그 때 아무리 청년이었다 해도 최소 30~40년은 지난 효소왕대쯤이면 상당한 고령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