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
1. 개요
화랑(花郞)은 고대 신라에 있었던 청년, 청소년으로 이루어진 심신 수련 및 교육 단체이다. 주 목적이 심신 수련이었다고는 하는데 사실 창설 초창기부터 전쟁이 사라진 통일신라 때까지 주 목적은 군인 양성이었다.
화랑은 전신 원화의 편성 목적에서 알 수 있듯 전국의 인재(낭도)를 화랑의 매력으로 모으기 위해 창설되었으며, 이렇게 모인 인재를 화랑과 휘하에 모인 낭도들 간의 공동 생활로 결속력과 단합력을 다지고 교육하여 그 중에서 능력이 우수한 자를 천거해 뽑아 신라의 군인 즉 문무관직에 올리는 역할이었다. 즉 교육과 선발이 하나로 합치된 관료 양성 시스템으로도 작용했다는 것. 이런 교육과 인재 등용 목적은 682년 국학이 설립되면서 일정 부분 역할을 내줬지만 그 이후에도 신라 말기까지 전통적 교육 제도로서는 계속 기능했다.[4]
화랑의 의미가 바로 '꽃 같은 사내'인 것답게 내면의 수련뿐 아니라 외모를 가꾸는 것 역시 중요하게 보았으므로 단순한 수련 단체를 넘어 현대로 치면 나라를 대표하는 아이돌, 홍보대사에 해당하는 역할이기도 했다. 한편 화랑이 창설된 6~7세기 신라는 주변국[5] 과 전쟁이 계속되고 안보가 매우 불안했기 때문에 화랑은 위급한 상황에서 예비군, 학도병 역할로 동원, 참여하기도 했다.
2. 유래
그 시작은 진흥왕 때로 기원은 신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6] 둘을 뽑아 그들을 매개로 인재를 모으는 원화 제도였는데, 두 원화 남모와 준정 간에 서로 간의 시기심으로 살인이 일어나 원화는 폐지했고, 이후 같은 역할이지만 여자 대신 곱상한 남자들을 모집해서 화랑이라고 부르게 했다.
다만 삼국사기에서 화랑 제도를 만들었다는 576년 이전에도 사다함 같은 화랑이 존재하였으므로 이전부터 신라에 비슷한 개념의 청소년 조직이 존재는 했고, 삼국사기 576년의 기사는 화랑제도를 정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에서는 진흥왕 말년인 576년 한 해에 원화를 만들었다 없애고 다시 화랑을 창설했다고 되어있지만, 삼국유사에서는 원화를 만들었다 폐지하고 '여러 해가 지난 뒤'에 화랑을 만들었다고 되어있어서 1차 사료간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역사적으로 진흥왕 시대는 과거 경상북도와 주변 일대에 머물던 신라의 영토가 고구려, 백제, 가야와의 전쟁 승리를 통해 함경남도와 경기도, 경상남도 등 3~4배 이상으로 늘어났고 통치하는 백성의 수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던 시대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 획득한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능력을 갖춘 관료가 '갑자기 많이' 필요했으며, 마침 진흥왕 재위 후반에 화랑제도를 창설한 것도 이와 연관이 있다.
화랑의 교리를 담은 경전 '선사(仙史)'라는 책이 있었다고 하며,[7] 책 자체는 현대에 전해지지는 않지만 삼국사기에서 간추린 내용상 유불도 삼교를 포함하고, 사회와 동떨어진 가르침이 아니라 백성들과 밀접하고 교화하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주보돈 교수는 진흥왕 재위 후반부에 창설한 화랑 제도는 바로 당시의 대신이던 거칠부가 주도해 추진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거칠부 본인이 어릴 적 승려로 출가해 지식을 쌓거나 유명한 승려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 적국 고구려 땅까지 포함해 천하를 유람하며 심신을 단련하고 경험을 쌓은 뒤 조국으로 돌아와 인재로서 활약하는 생애 전반부 자체가 훗날 화랑의 교육과정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이다. 마침 화랑제도를 창설한 진흥왕 말년 시기에 거칠부는 이사부의 뒤를 이어 최고위직에 있었으므로 충분히 임금에게 이런 정책을 건의하고 추진할 수 있는 위치였기도 하다.
3. 조직
화랑도 조직은 여러 곳에 퍼져 있었고 각각 우두머리격인 1명의 화랑이 있었는데 이 화랑은 주로 귀족의 자제로 이뤄졌으며[8] 화랑들을 통솔하는 총지도자격인 위치로 국선(國仙)이 있었으며 국선에는 태종 무열왕 김춘추, 김유신도 국선이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 국선이 되려면 무조건 진골 아니면 성골이어야만 하며 6두품 이하는 국선이 될 수 없다.[9] 그리고 이 위에 화랑들을 관리하는 '화주'(花主)가 있다.[10][11]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화랑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할 뿐 자세한 기록을 찾기 어려워서, 현대 창작물들은 대부분 자세한 설정은 필사본 화랑세기를 일종의 '설정집'처럼 참고하는 경향이 강하다.
필사본 화랑세기의 영향으로 화랑의 수장의 명칭을 풍월주라고 알고 있는 경우도 많으나 삼국사기에는 화랑의 직제나 우두머리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풍월주라는 단어는 아예 나오지도 않는다. 삼국유사에서는 국선(國仙)이라 나오는데 여기에도 풍월주는 등장하지 않는다. 풍월주라는 명칭은 필사본 화랑세기를 제외하면 15세기 이후에 등장한다.
각 화랑도 조직들은 화랑 아래에 평민부터 하급 귀족으로 구성된 '낭도(郎徒)'를 적게는 수십 이상, 가장 많게는 수천 명 단위까지 거느리고 지휘했으며, 화랑과 낭도로 이루어진 단체를 향도(香徒)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향도로 김유신을 중심으로 모였던 용화향도가 있다.[12] 이들은 분장(粉粧), 즉 눈에 띄도록 하얗게 화장했고 미시랑 설화에서 보듯 불교의 미륵 사상과 일체화된 존재로 종교적 신성성까지 갖추어 신라 사람들에게 경외시되었다.
화랑도 조직의 교육은 주로 승려가 담당했다. 승려는 기본적으로 한문 불경을 읽고 내용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데다, 불교가 이제 막 서역과 중국에서 도입되던 고대에는 중국이나 일부는 서역, 인도까지 유학을 가장 활발히 다녀오는 계층이었고 그들은 유교와 도교까지 같이 접하고 도입하며 삼교에 능통한 고대의 지식인 계층이었으므로 학생들을 가르치기에 가장 적합한 이들이었다. 다만 승려는 큰 범주에서 보면 화랑도 조직의 일원이긴 했지만 정식 구성원은 아니고 미성년인 화랑과 낭도를 대상으로 교육하는 교사 역할을 하였다.
4. 주요 활동
화랑은 낭도들을 데리고 신라 땅 이곳저곳 금강산, 지리산과 같은 깊은 명산과 계곡을 유랑하며 국토애를 기르고 심신을 단련하였다. 모험이라고 하면 RPG스러운 느낌이 들지만, 실제로 깊은 산 속 바위에 화랑들이 'A랑과 B랑 왔다감' 하는 식으로 새겨놓은 것이 지금도 상당히 많이 발견되고 있다.
이런 명산대천을 답사하는 것은 화랑의 활동 중에서도 매우 중요한 것이었는지, 기록 상으로도 거리가 멀어도 화랑이 안 간 곳이 없을 정도였다고 하고(遊娛山水, 無逺不至. ) 지금까지도 화랑이 왔다 갔다고 남겨놓은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다. 나무위키에 문서가 있는 건 임신서기석이나 울주 천전리 암각화 등. 울진군 쪽에도 있으며 대체로 경주에서 가까운 원 신라 영토에 많지만 금강산 삼일포 같은 곳에도 있을 정도다. 허구헌 날 고구려, 백제와 싸움을 벌이던 신라였고 산에 산적은 물론 호랑이나 표범 같은 맹수들도 떡하니 버티고 있던 시대이니 아직 어린 화랑들끼리 으슥한 곳을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위험을 감수한 일이었던 것.[13] 실제로 부례랑처럼 북쪽 국경지대로 유람을 갔다가 도적에게 납치당하는 일도 있었다.
울주 천전리 암각화나 제천시 점말동굴[14] 등 전국 각지에 화랑의 주요 성지순례 장소가 발견되기도 했는데 당시 여러 화랑들이 직접 새긴 이름이 남겨져 있다. 참고로 이 화랑들의 이름을 화랑세기에 있는 인명과 교차검증을 하였으나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음악을 즐겼고(或相恱以歌樂) 이런 공동생활을 통해 서로 도의를 닦았고(相磨以道義) 나라가 어려울 때는 학도병처럼 화랑이 실전 전장에 나서기도 했다. 기초적인 귀족교육을 수련하는 유년 사관생도 정도의 이미지와 유사하다. 다만 화랑의 본래 의도는 세계의 고대 사회에서 흔히 보이는 청·소년층 집단교육 풍습이 국가기관화된 것으로 삼국 말기의 전쟁에서의 활약은 대부분 부수적이었다. 워낙 신라의 국방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보니[15] 화랑이 나서는 일이 많아졌고, 어린 화랑이 공을 세우는 '특별한 상황'이 기록에 많이 남았다. 즉 본업이 군인이 아니고, 황산벌 전투의 관창은 화랑으로서도 상당히 특별한 케이스였기 때문에 기록에 남은 것이다.
미디어의 영향으로 화랑이라고 하면 무력 쪽 이미지가 강하지만 사실은 학문적인 수련도 했으며, 삼국사기에 따르면 '풍류(風流)의 도'라는 화랑 이념의 사상이 있고 '선사(仙史)'라는 책에 그 사상이 자세하게 전한다고[16] 하고 있지만 선사라는 책은 고려시대 이후로는 소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다만 유불선 3교를 포괄해 중생을 교화하는 내용이라고 되어 있으므로 유교, 불교, 도교의 사상이 적당히 섞여있는 사상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사서삼경 같은 유교 경전 공부도 했고(임신서기석) 많은 향가를 짓는 등 문학활동도 했다.
5. 정체성
단재 신채호는 화랑을 전쟁에 나타나는 사료를 바탕으로 무사 집단으로 보았지만, 현대적 연구가 보다 축적된 지금에는 귀족자제 출신인 화랑과 하층민 쪽 출신인 낭도가 모인 청년 집단으로 본다. 여기에 추가로 종교적 성격도 갖고 있었다고 보는 정도이다. 주로 난랑비서문, 화랑이 신궁제사에 참여하거나, 국선(國仙)이라는 호칭이나 용화향도라는 기록 등에 근거하는 것인데, 고대사회에서 종교의례의 집전은 지배층과 관련이 깊다는 점[17] 을 생각하면 그럴 수 있을지도.[18]
이러한 미성년 남성들의 집단생활이나 단체 활동은 오랜 역사적 전통을 가진 습속이며 남방계 원주민 아이들의 합숙이나 아메리칸 네이티브들의 또래집단, 독일의 부르센샤프트 즉, 소규모봉건집단에서의 우두머리(마스터)의 집에서 생활하는 것, 그리고 일본의 와카슈 전통에서 나타난다. 특히 어린아이도 아니고 성인 남성도 아닌 연령의 남자, 즉 와카슈(약중)를 자연의 거친 성질로 비유한 황신(荒神)의 대표자로서 인식하고 이들을 이끄는 와카슈 가시라(약중두)를 정점으로 하여 마을 생활의 한 축을 담당하게 하는 일본식 와카슈 전통은 화랑의 판박이라 할 수 있다.
화랑의 화장하고 산천을 떠도는 행위는 바로 이 숭신 사상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들이 전사역할을 하는 것은 무리의 물리력의 대표로서 사역하는 일이 된다.
5.1. 동성애 관련
현대에는 화랑이 10대 소년들 중심의 동성애적인 코드를 지닌 전형적인 고대 청년 집단의 성향이 있었다는 추측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문헌적으로 화랑의 동성애를 뒷받침할 직접적인 기록은 전무하다. 여러가지 근거를 들지만 대부분 정황상 그럴 것 같다는 정도다. 이익의 성호사설도 미남을 수장으로 뽑았다는 구절을 곧바로 남색으로 단정한 것에 불과하다. 게다가 이익이 중점을 두고 비판한 것은 화랑의 풍속 자체가 아니라 조선시대 당대에 사람들이 방탕하게 놀면서 자신들이 화랑의 후예라고 자처하던 모습이었다. 과거에 빗대어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파락호들에 대한 비판을 하다 보니 그 파락호들의 자칭에 대한 비판도 이루어진 셈. 그러니 성호사설을 화랑 동성애의 근거로 삼는 것은 문맥을 오독한 듯하다.
화랑간의 감정을 애(愛), 모(慕)라는 글자로 표현하는 기록은 있지만, 이 글자들이 현대에는 사랑을 의미하는 쪽으로 주로 쓰이지만 고대에는 꼭 성적 감정이 아니라 존경하고 숭상하는 경우에도 쓰였다고 보기 때문에 동성애를 직접적으로 말하는 기록은 아니다.
일제강점기 일본 일부 사학에서도 화랑도를 동성애 집단으로 간주하는 연구가 몇 차례 있었다. 초창기 한국 사학에서는 이를 일본의 저질 음해 및 왜곡으로 치부하기도 했는데 이익의 성호사설에서 화랑에 대해 비난한 부분을 들어 재반박한 경우도 존재한다. 실제로 한국 사학계는 과도하리만치 성(性)과 연관되는 것을 터부시한다는 점을 지적받아왔다. 화랑에 동성애적 사실은 없다는 입장만을 취하고 있기 때문. 오히려 화랑에 대한 동성애적 코드 해석은 문학사(文學史) 측에서 더 많이 하였다.
6. 세속오계
- 사군이충(事君以忠):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긴다.
- 사친이효(事親以孝): 효도로써 어버이를 섬긴다.
- 교우이신(交友以信): 믿음으로써 벗을 사귄다.
- 임전무퇴(臨戰無退): 싸움에 임해서는 물러남이 없다.
- 살생유택(殺生有擇): 죽이고 살리는 데에는 가림이 있다.
7. 의의
이래저래 말이 많긴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화랑이 삼국통일에 일조한 신라의 청소년 수련 시스템 중에 하나였다는 것.
많은 통일 공신과 장수들이 화랑 출신이었다는 것만 보더라도 화랑 제도의 인재 양성 효과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또한 비록 골품제에 기반한 철저한 신분 사회인 신라였지만 화랑과 낭도는 서로 다른 신분의 청년들이 같이 모여 공부하고 수련하러 돌아다니면서 유대감과 결속력을 쌓았기에 신분 계층 간 갈등을 적절히 조절하여 국가적 재난 앞에서 서로 단결하는데 꽤 도움이 되었다. 예를 들면 모죽지랑가의 주인공 죽지랑은 자기 낭도가 부(部)의 일로 징발되어 끌려가자 술과 떡을 들고 찾아가는 한편 책임자에게 그의 휴가를 요청하기도 했는데, 우두머리인 화랑과 아랫 사람인 낭도 간에 신분을 초월한 책임감과 유대감이 있었다는 예로 꼽히고 있다.
다만 모죽지랑가의 배경설화를 보면 삼국통일이 이루어진 후에는 화랑도 조직 자체에 상당히 부정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삼국 통일 전쟁에 참전하고 국선까지 지낸 유명한 화랑의 간곡한 부탁을 일개 지방 호족이 무시하다가 뇌물을 2차례나 받고서야 겨우 들어준다던지, 그 보복을 한답시고 화랑 측에서 왕을 움직여 그 호족의 아들을 대신 잡아다가 죽이고 연좌제를 걸어 그 호족과 동향인 인사들을 전부 공직에서 추방했다던지 등 당대 이미 만들어진지 백여 년이 지났던 화랑도의 폐단의 사례가 모죽지랑가의 배경설화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참고로 일부 인터넷 상에서 화랑이 후기에 남창이나 사병 집단으로 전락했다는 얘기도 떠돌고 있으나 본디 진골이나 6두품 '''귀족''' 출신들이 모인 화랑이 '사병'이 되었다고 하는 건 말도 안되는 소리에 가깝다. 성장해서 사병들을 '지휘하는' 입장이 됐다면 몰라도. 전쟁이 끝난 후 눈에 띄는 기록이 없다고 해서 화랑이 지위가 낮아졌다거나 하는 식으로 이해하면 답이 없다. 당장 헌안왕의 사위가 되었다가 후에 왕이 된 신라 경문왕이나, 경순왕의 아버지 김효종도 엄연한 화랑 출신인데, 화랑이 약화되었거나 또는 남창으로 전락했다면 왕좌까지 가는 루트를 타기는 어려웠을 터. 화랑에 대한 동성애적 코드를 현대적 시각 하에서 확대해석한 것에 기인한 심각한 오류이다. 당장 그런식으로 기술된 역사서도 없다. 일본에서 화랑들을 창부라고 표현했다고 하는데#, 반박도 있으니 참고하면 괜찮겠다.
애초에 화랑은 무사 집단조차 아니다. 당장 삼국사기에서 인용된 화랑세기의 구절인 "어진 보좌와 충성스러운 신하가 이로부터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이 이로부터 생겼다"를 봐도 화랑이 단순히 무사 양성소가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당장 임신서기석만 해도 무술 언급은 없이 유교 경전을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맹세만 쓰여져있다.[20] 기본적으로 화랑은 다양한 신분을 가진 수천 명의 아이들이 산을 뛰놀면서 학문과 무술을 서로 갈고닦아 결속을 다지고 문무 양면의 능력을 키우는, 신라 시대판 보이스카웃과 같은 것이다. 애초에 사병으로 쓴다고 해도 당연히 2~30대의 건장한 병사들을 쓰지 무슨 이유로 기껏해야 10대 중반에서 후반 정도밖에 안되는 젊다 못해 어린 아이들을, 그것도 귀족층도 포함된 화랑을 사병으로 쓰겠는가.
8. 후대의 계승
8.1. 고려시대
고려시대에는 본격적인 의미에서의 화랑제도가 부활하지는 못했다. 다만 신라의 화랑 문화가 계승되어, 국왕이 팔관회에서 신라부터 내려오는 전통이라고 하면서 귀족 자제 젊은이 몇을 뽑아 천지신명과 부처를 받드는 팔관회 자리에서 춤을 추게 시킨 일이 있었는데, 이를 선랑이라고 한다. 무당들이 굿판에서 춤을 추는 모습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지도. 이는 고려시대 불교의례 연구자들 사이에서 고려가 신라 전통을 받아들였다는 자의식을 보여주는 자료로 인용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또한 과거 신라 화랑들이 모여서 승려들의 지도를 받고 학문을 연마하던 것처럼 고려 사회에서도 승려 밑에서 글을 배우던 사람들 중 얼굴과 머리카락이 아름다운 남자를 선랑이라 부르기도(참조)했는데, 이들이 불교신앙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 조직인 향도에 구성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링크)태조가 삼한의 왕이 된 것보다 높은 것이 있는가? / 莫高太祖之三韓
막고사산에 있는 신인은, / 邈姑射山之有神人
분명히 월성의 네 사람이다. / 宛是月城之四子
(운운)[21]
복숭아 꽃이 흘러간 물은 없어지고, / 桃花流水杳然去
참된 발자취는 비록 찾기 어렵지만, / 雖眞跡之難尋
고가의 유속이 그대로 남아 있으니, / 古家遺俗猶有存
황천이 아직 죽지 않았음을 믿는다! / 信皇天之未喪
(운운)
之庭백수를 통솔하는 노래의 예를 얻으니, / 得詣百獸率舞之列
之士모두 소자유조의 노래를 부르고 있도다. / 皆歌小子有造之章
그 외에 귀족 자제의 호송임무를 맡은 잡류[25] 직을 선랑이라고 부르거나(링크), 고려시대 행사의 연행자(진행자)를 선랑이라 부르기도 하였다(참조).
고려사에 의하면 어릴 때는 반드시 승려를 따라가 글을 익혔는데, 면수(面首)인 경우 승려든 속세 사람이든 모두 그들을 받들어 선랑(仙郞)이라 불렀고, 따르는 무리들이 때로는 1백 명이나 1천 명에 이르기도 했으며, 풍속은 신라 때부터 비롯된 것이라 하였다. 충렬왕 때 민적이라는 인물은 용모가 아름답고 천성이 명민해 한번 본 사람은 모두 사랑할 정도였고 충렬왕이 이 소식을 듣고 궁중으로 불러 국선으로 지목하였다고 한다. 고려 후기인 원 간섭기까지도 화랑과 그를 따르는 낭도들과 같은 화랑의 기본 뼈대에 해당하는 풍습이 남아 있었다는 것.
8.2. 조선시대
조선시대에 들어서 재야의 주술사나 무당들을 화랑, 화랭이라고 불렀는데 지금도 그런 표현이 남아있다.[26] 이 밖에 고려시대의 토속 신앙 성격의 향도 조직과 난랑비서문과 조선조 단학파의 삼교합일적 철학 사상과 연결지어서 종교적 계승성을 보기도 한다. 물론 이것도 신라시대의 화랑 조직 그 자체와는 거리가 멀어 우리가 아는 화랑 이미지와 많이 다르다.
9. 화랑세기 필사본에서
신라 말 김대문이 화랑을 다룬 화랑세기를 필사하였으나 진본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1989년에 박창화의 유족들이 일본 궁내청 서릉부에서 필사했다고 주장하는 필사본이 남아있다.
박창화의 필사본 화랑세기를 보면 신라의 개방된 성문화를 묘사하고 있다. 그간 남자다움, 호국무사 정도로 묘사되어 왔던 화랑이었지만, 1989년 화랑세기 필사본이 발견됨에 따라 논란에 불이 붙었다.
화랑세기에는 화랑들의 동성애, 파벌 다툼, 문란한 성의식 등의 기존 사학계의 관점에서 '전혀 아닌 것'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에 따라 사학계나 재야사학자들간의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켜 10년 동안 논란이 지속되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고대 사회에서 동성애[27] 는 어느 국가에서든 있어왔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는 "진솔한 사랑은 소년과의 사랑이다."라고 할 정도로 동성애가 성행했으며 오히려 고결하고 정적인 것으로 여겨졌다.[28] '아직 피우지 못한 꽃'에 비유되는 소년들에 대한 사랑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도 확인된다. 이 동성애는 유명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도 소년과의 동성애를 즐겼으며,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등도 보다 예술적이고 정적인 관점에서 동성애를 즐겼다. 또한, 남자다움으로 상징되는 사무라이들도 동성애를 즐긴 흔적들이 곳곳에 등장하는데, 구태여 화랑이 동성애를 했다해서 폄훼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29]
다만 폄훼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얘기가 곧 화랑의 동성애가 사실이라거나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인 것 또한 아니다. 고대의 동성애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 고대의 동성애에 관한 기록이 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랑의 경우에는 동성애를 직접적으로 뒷받침할 만한 문헌 자체가 없다. 문화적인 연관관계가 희박한 타국의, 분명한 증거가 남아있는 사례를 들어 별 증거도 없이 화랑의 동성애를 추단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 않다. 또한, 예전에는 남성들끼리 매우 친하거나 매우 존경하는 관계일 경우 '친하다' 정도가 아니라 '사랑한다' 수준의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30] 예를 들어, 셰익스피어 작품 일부에서 남성을 대상으로 사랑한다는 표현을 쓰는 경우가 있는데, 당시 개념에서 사랑한다는 것은 '매우 친하다', 혹은 '매우 존경한다'는 것도 포함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화랑세기에 묘사된 동성애적인 이야기가 동성애가 아닌 '매우 친하다' 정도의 표현일 수 있다. 당장 조선시대의 시사를 보면 신하가 임금에 대한 충성을 연모의 감정으로 표현한 경우가 한둘이 아니지만, 이걸 두고 조선 양반사회에서는 동성애가 만연했다는 근거로 삼는 사람은 없다.
문란한 성의식 같은 경우도 화랑세기의 것은 마복자(磨腹子) 등과 같이 압권인 것도 있으나, 당시 삼국의 성의식이 오히려 현대의 대한민국보다 개방되어 있을 수 있다는 암시들이 곳곳에 퍼져 있으니, 굳이 신라에 국한시켜 화랑을 폄훼하는데 사용할 수 없다. 대표적으로 신라시대 토우들을 보면 온갖 체위로 성행위를 즐기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나온다.
애초에 화랑의 기준은 남자다움이나 무예가 아니라 '용모가 수려한 귀족 청소년'인데다가, 외모와 치장이 매우 중시되었기에, 우리가 상상하는 화랑과는 거리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아직 화랑세기는 사료로서 가치 여부가 논란 중임을 고려해야 하며, 이 내용을 실제 역사로 곧이 곧대로 믿는 것은 매우 곤란하다.''' 화랑세기 위서론 중 박창화가 쓴 일종의 역사 동인지(…)라는 설은 상당히 유력한 가설 중 하나이다. 이에 대해서는 화랑세기 문서 참조.
사실 국문학계의 반발 때문에 '''논란'''이라고 하는 것이지 실상은 화랑세기가 위작이라는 것이 거의 정설로 굳혀져 가는 중이다. 울주 천전리 암각화가 결정적인데 여기에 적혀져 있는 화랑들의 이름이 화랑세기에 적힌 화랑들의 명단과 하나도 일치하는 것이 없다.
10. 유사기구
10.1. 청소년 수련단체
10.2. 무력집단
10.2.1. 한국
10.2.2. 외국
10.3. 교육기관
10.3.1. 한국
10.3.1.1. 국립
10.3.1.2. 사립
10.3.2. 외국
11. 문서가 개설된 화랑 목록
신라중기~통일신라 초기까지 화랑 제도가 쇠퇴하기 이전의 대다수 귀족 남성들은 화랑에 소속되었다. 이러한 귀족 요소보다는, 화랑이라는 제도에서 파생된 전설 그 자체로서 유명한 인물들을 언급한다. 아래의 인물들은 현대에 유명한 화랑들의 이미지를 확립한 영웅들이다.
- 계원#s-3
- 기파랑 - 찬기파랑가의 주인공.
- 김원술 - 비극 원술랑의 주인공. 삼국 통일 전쟁 이후 최전선에서 마지막 전설을 남긴 화랑으로 유명하다.
- 김유신 - 전설적인 삶을 살았던 대표적인 화랑 출신의 영웅. 역사적으로는 삼국통일전쟁, 백강 전투가 유명하다.
- 김응렴 - 제48대 경문왕.
- 김춘추 - 무열왕. 화랑 활동이 아닌 외교관, 내정군주로서 유명하지만 김유신과의 우정을 다루는 설화에서 많이 등장한다.
- 김흠춘
- 문노
- 무관랑
- 미시랑
- 반굴, 관창 - 황산벌의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현대에는 가장 대표적인 화랑들처럼 알려져 있다.
- 백운 - 해당 항목 참조.
- 부례랑
- 사다함 - 김유신과 함께 영웅 이미지를 대표하는 화랑이다.
- 삼화랑(三花郞) - 신라의 전설속에 나오는 3명의 화랑
- 설원
- 숙종랑
- 신라사선 - 영랑, 술랑, 남랑, 안상. 전국 각지[33] 에서 이들이 수련하면서 거쳐갔던 명승지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고 고려, 조선시대까지 문인들에게 유명했다고 하며 예를 들어 관동별곡 등에서도 언급된다. 기록이 부족해도 일단 실존인물은 맞는 것 같은데,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신선 비슷한 존재로 윤색된 설화들이 많이 남아 있다.
- 요원랑
- 죽지 - 삼국통일전쟁에 참전한 화랑, 향가 모죽지랑가가 헌정된 인물로 유명하다.
- 김효종 - 효녀 지은 설화에 등장.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의 아버지. 전성기가 한참 지난 신라 말기 화랑 중에서는 그나마 존재감이 있다.
12. 현대 창작물
미소년 집단으로서 함께 수련하고 전쟁이 나면 실제로 달려나가 활약하는 이미지는 굉장히 매력적인 소재이기 때문에, 신라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나 영화 등의 창작물에서는 거의 어김없이 등장하는 편이다. 다만 이런 곳에서 등장하는 화랑의 모습은 매우 과장됐거나 실제로 확증된 모습이 아니거나 아예 순수 창작 요소(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화랑이 전쟁터에 나가거나 죽음을 각오하고 불의에 맞설 때 얼굴을 곱게 치장하여 죽어가는 자신의 모습이 아름답기를 기원한다는 풍습인 '낭장결의'와 화랑의 주인이 황녀라는 등 여러 창작 설정이 나온다.) 가 다수 있으므로 가려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삼국시대가 배경일 경우 밸런스를 맞추기 위함인지 백제의 싸울아비[34] , 고구려의 조의가 화랑에 대응하는 캐릭터로 자주 등장하는데 사실 싸울아비는 따로 기록이 없으며 조의는 이름은 전하기는 하지만 화랑과 유사한 무사집단이었는지는 확증되지 않은 한 가설일 뿐이다.
12.1. 소설
12.2. 영화
12.3. 드라마
- 드라마 태조 왕건 초반에 위홍의 화랑 시절이 묘사된다. 비록 너무 짧긴 하지만 그나마 신라말의 화랑을 묘사한 얼마 안된 사극.
-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남장여자 덕만이 낭도로 들어가 활약한다(...) '낭장결의'나 '할복' 같은 오리지널 설정을 많이 가져다 붙였다.
- 드라마 대왕의 꿈[36] 에서도 선덕여왕의 낭장결의처럼 부담스러울 정도로 진한 분칠 화장을 한 모습으로 등장. 눈가는 붉게 칠하고 얼굴 전체에 새하얀 분칠은 닌자가 검은 흑포를 입는 것처럼 화랑의 전형적인 이미지로 잡혀가는 듯 하기도 하다.
- 드라마 화랑에서는 등장인물 대부분이 화랑이다. 화랑제도를 현대의 사관학교와 비슷한 이미지로 묘사했다.
- 드라마 해신에서는 악역으로 등장하는 민애왕이 자신이 과거 화랑들의 대장임을 자랑하고 장보고와 1대1 대결을 했으나 패배한다.
- 화랑전사 마루는 화랑의 이미지를 차용한 특촬물이다.
12.4. 게임
- 도미네이션즈에서 철기 시대의 한국 고유 유닛이다.
- 던전앤파이터에서 풍월주 비화랑이라는 화랑이 등장하며, 시로코 레이드에서 적으로 나온다.
- 삼국시대를 다룬 실시간 전략 게임 천년의 신화에선 신라측 궁기병 유닛인 '낭도'가, 그리고 화랑 관창이 신라 영웅으로 등장하여 화랑도의 짝을 이룬다. 후속작 천년의 신화2에서는 신라 유닛으로 '화랑'과 '낭도'가 등장한다.
- 라이즈 오브 네이션즈에서 한국 문명의 고유 유닛으로 등장하며 궁수 계열 유닛을 대체한다. 그런데 화랑처럼 묘사되는 건 기본 단계의 화랑 뿐이고 이후엔 조선 군관 같이 생긴 디자인으로 변한다.
- 크루세이더 퀘스트의 기파랑은 궁수 계열의 화랑을 모티브로 했다. 애초에 기파랑이 화랑이다.
- 문명 6에서는 한국 문명의 지도자 특성으로 등장한다.
- 철권에서도 화랑이라는 이름의 한국인 캐릭터가 있다. 다만 실제 화랑하고는 딱히 관련없다.
12.5. 만화
- 웹툰 낮에 뜨는 달의 조연으로 사다함과 무관랑 외 한 명의 화랑이 등장한다.
- 웹툰 더 게이머에는 대한십문중에 화랑도가 있다고 한다.
- 웹툰 신을 죽이는 방법에는 신살팀 제 6석 신살자가 화랑이다.
12.6. 대한민국 육군가
13. 같이보기
[1] 웹상에서 흔히 '화랑 모습 복원도'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과거 삼국지10의 한 유저가 영화 황산벌의 김반굴, 김관창 등의 화랑 복장을 바탕으로 그린 일러스트이다.[2] 花(꽃 화) / 郞(사내 랑)[3] 현지 발음을 따서 이렇게 부르는 경우도 많다.[4] 전통적인 화랑제 교육 과정과 통일 이후 도입된 중국식 교육기관 국학 과정을 병행하는 경우를 대비해서 신라 국학은 입학 나이제한이 꽤 널널한 편이었다. 참고 대상이었던 당나라 국학의 입학연령이 14 ~ 19세로 제한됐던 반면 신라 국학의 입학연령은 30세까지였다. 입학으로부터 9년제 과정 교육기관이란 점과, 현대에 비해 빨랐던 당시의 활동연령과 평균수명까지 감안하면 굉장히 늦은 나이의 입학까지 받아들였던 것.[5] 6~7세기 신라는 고구려, 백제, 가야, 말갈, 중국, 일본과 각각 모두 한 번 이상 전쟁이 있었다.[6] 외모에 대한 언급을 잘 하지 않는 정사에서 미녀라고 대놓고 써 있다.[7] 김대문의 화랑세기와 같은 책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2번 단락의 필사본이 아닌 1번 단락[8] 단 고아 미시랑이 국선까지 오른 것 등, 신라의 관직 진급상한선과는 달리 반드시 골품이 있어야만 화랑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9] 국선 중 신분을 초월한 사례로 미시랑이 있는데, 미시랑 일화는 설화적 성격이 강하다.[10] 필사본 화랑세기에서는 화랑의 지도자를 '풍월주'라고 쓰고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설원이 최초의 국선이라고 쓰고 있는데, 화랑세기에서는 초대 풍월주는 위화랑이고 설원은 7대 풍월주라고 나온다.[11] 근래 '화랑세기'의 기록을 근거로 '화주'를 관리가 아닌 '풍월주'의 아내가 맡는 직책으로 해석하는 경향도 생겼으나, 화랑세기가 논란이 많은 문서이고 이 외에도 다른 반박도 많아 아직은 소수의견에 머물러 있다.[12] 향도 자체는 불교를 기반으로 한 신도 집단을 뜻한다.(참조:한국민족문화대백과) 말하자면 향도>화랑인 셈. 유사한 단체는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발견된다.[13] 조선시대에도 호랑이에 의한 피해를 막기 위해 부대가 조직되어 있을 정도였다.[14] 사실 제천 점말동굴은 석기시대 유적으로 더 유명하지만, 화랑들이 순례와서 새긴 글자가 지금도 남아있는 등 신라 때에도 영험한 성지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15] 비록 가야를 복속시켜 그나마 백제까지는 만만하게 보지 못 할 수준까지 국력을 끌어올렸지만 그 뿐, 진흥왕 이전까지는 여전히 삼국 최약체였다.[16]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37년[17] 특히 천제나 국가 수호신 제사.[18] 사실, 여자 대신 소년들을 가까이서 기르며 성적인 대상으로 삼는 문화가 그리스나 중국 등지에서 간간히 있어왔으나, 그렇다고 남자들이 화장하고 모여 있으면 다 게이라는 말은 아니다. 스파르타의 전사 훈련 과정 같이 어린 소년을 나이 든 전사 한 명이 맡아서 개인지도로 양성하는 과정을 동성애로 오인하고 다루던 역사학자들도 있다.[19] 단 귀산과 추항이 세속오계를 따라 아막성에서 백제군과 싸우다 자신들의 목숨을 버려 승리를 이끌었다는 점에서 그 영향력이 매우 컸던 듯하다. 좋은 프로파간다라 할 수 있다.[20] 물론 김유신이 검술을 익혀 국선이 됐다는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무술도 당연히 익혔다.[21] 편집됐다는 뜻이다. 파한집은 시를 발췌해서 실었다.[22] 고려 제3대 임금 정종 왕요(堯)의 휘를 피한 것이다.[23] 고려를 주나라에 비유한 것으로 외왕내제 성격이 드러난다.[24] 전문은 동문선 제31권에서 볼 수 있다.[25] 지금으로 치면 말단 공무원이다.[26] 김시습이 소격서의 한 도인에게 준 시에 '현도관 안에서 화랑을 보니'라는 구절이 있기도 하다. 다만 이 구절은 '현도관 안에서 꽃구경하는 이'라는 중의적 해석도 가능. 자세한 내용은 정재서 저, 한국 도교의 기원과 역사 참조[27] 정확히는 성인 남성과 소년, 소년간의 동성애가 크게 번졌다.[28] 사실 이것은 여성과의 사랑이 번식에서 나오는 욕구라는 식으로 여겨져서 그렇다. 게다가 당시 여성 간의 사랑은 가장 미천한 것으로 여겨졌다. 여러모로 성차별적인 의식이라고 볼 수 있다.[29] 동성애가 이성애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아주 진지하게 써놓은 철학자도 있다. 이것은 사람마다 관점이 다르겠지만.[30] 일단 영어의 'love'를 보자. 그리고 라틴어에서 친구를 의미하는 'AMICUS'는 '''사랑하다'''라는 뜻의 'AMARE'에서 온 단어. 그리고 한국어에서도 '사랑하다'라는 단어는 원래 '''깊게 생각하다'''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즉, '곁에 있지 않아도 언제나 그 사람을 계속 깊게 생각하게 된다 → 사랑한다'라는 식의 의미 변화라고 하는데, 곁에 있지 않아도 계속 생각하게 되는 것은 굳이 이성 간의 사랑이 아니어도 지극히 존경하는 사람에게는 흔한 일 아닌가?[31] 신채호의 가설이다.[32] 현대의 창작이다.[33] 주로 지금의 강원도 지역[34] 백제의 싸울아비라고 써 있지만 이 말은 1962년에 신문에 나온 말로, 배화여자고등학교 선생이었던 김영곤이라는 사람이 만든 단어다. 즉 현대에 창작된 단어로 대한민국 이전에는 없던 말이다.[35] 사실 직접적으로 화랑이 나오는 소설은 아니다.[36] 사람들에 화랑의 이미지를 확고하게 만들어준 드라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