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image]
'''이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Friedrich Wilhelm I)
'''생애'''
1688년 8월 15일 ~ 1740년 5월 31일
[나이]
'''재위'''
1713년 2월 25일 ~ 1740년 5월 31일[재위기간]
'''신장'''
160cm[1]
'''출생지'''
프로이센 왕국
베를린
'''사망지'''
프로이센 왕국
포츠담
1. 개요
2. 생애
2.1. 절약가혹행위 사이에서
2.2. 프로이센군 기반 양성
3. 가족사항


1. 개요


프로이센 왕국의 두번째 왕
골때리는 막장 부모로, 이 문서와 프리드리히 2세 문서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장난이 아니다. 군주로서는 부국강병의 기초를 탄탄하게 다진 보기 드문 명군이지만, 인간적인 됨됨이나 가정의 아버지로서는 한참 기준 미달이었다.

2. 생애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선제후의 손자이자 초대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이다. 학문과 예술을 사랑하며 그만큼 낭비벽도 있었던 선왕과는 달리, 일생동안 근검절약을 통해 풍부한 재정을 쌓았으며 부국강병책을 적극 추진하였다. 성격은 솔직하면서도 무척 검소하였으며 개신교에 대한 신앙심이 깊었다. 하지만 가부장적이면서도 성격은 매우 권위적이고 거칠었다. 상비군을 숭상하여 "군인왕(Soldatenkönig, 영어로는 Soldier king)"이라는 별명을 들었다.[2] 정작 그 치세 동안에는 전쟁은 거의 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치세 기간 일어난 몇몇 전쟁에서는 이겼기에 확실하게 이득을 보았다. 그는 자신의 군대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흔한 일이던 다른 나라에 돈 받고 군대를 빌려주는 일도 거부했다고 한다. 아버지 프리드리히 1세가 군대를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에게 빌려준 대가로 왕위에 오른 것과 대비된다.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 북쪽 발트해 인근에서는 스웨덴과 러시아가 한참 대북방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구스타프 아돌프스가 남긴 강군을 가지고 있었던 스웨덴은 초반에 러시아군을 압도적으로 털어줬지만, 국왕 칼 12세는 잦은 판단 착오로 유리하게 전쟁을 끝낼 기회들을 걷어찼다. 반면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 전역 성당의 종중 1/3을 녹여 대포를 만들고, 상인과 성당에 세금을 물려 서유럽제 신형 머스킷 수만 정을 사들이는 등 철저히 복수를 준비해 결국 스웨덴을 역관광한다. 스웨덴이 러시아에게 계속 털리며 핀란드 전역을 빼앗기고 반격 능력 자체를 상실해버리자,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영국-하노버와[3] 함께 스웨덴의 독일 영토, 특히 오데르강 하구의 항구도시이자 베를린의 외항인 슈테틴을 노리고 참전했다. 뒤늦게 참전했지만 프로이센은 목표인 슈테틴을 비롯한 오데르강 하구를, 하노버는 브레멘-베르덴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2.1. 절약가혹행위 사이에서


그는 무려 국가 예산의 80%를 군대 양성에 쏟아부었다. 이는 프로이센이 강한 군대를 만들었지만 군사 예산의 상당수를 영국의 재정지원에 의존했기 때문에 영국으로부터의 재정적 자립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4] 그러나 재정지원을 무기로 영국은 프로이센에게 내정간섭을 많이 했고, 이 과정에서 양국간에 갈등이 생겨 자식들과 영국 왕실과의 결혼약속이 파기되고, 아들 대에 영국과의 사이가 서먹해지는 원인이 되었다.[5][6]
아무튼 이를 위해서 평소에도 솔선수범해 근검절약하며 살았는데, 특히 아버지인 프리드리히 1세의 사치스러운 소비생활을 매우 혐오하여 부왕이 루이 14세를 흉내내어 지어놓은 호화스런 왕궁에 살면서 700개의 방 중에 5개만을 사용했고, 시종은 단 2명만 부렸으며, 아버지 대에 모아놓은 궁중의 고급 마차나 그림 같은 사치품은 시원하게 다 팔아치워 나라 예산으로 썼다. 한술 더 떠서 담배도 서민들이나 피우는 싸구려 담배만 피워대서 입냄새가 매우 고약했다고 한다. 밥도 궁정에서 먹는 호화 식사가 아니라 왕이라는 사람이 귀족들 파티에 난입해서 무전취식으로 배를 채우거나(...) 병사들이 먹는 전투식량을 즐겨먹었다. 문제는 식사량이 많았던가 전투식량이 꽤 고열량이었는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체형은 상당히 비만하였다.[7]
돈이 아까워서 싸구려 담배를 피우면서도 또 나름대로 애연가라서 타박콜레기움(Tabakskollegium)이라는 흡연 클럽 겸 끝장 토론회를 상설화 했는데 담배 재떨이를 올려놓고 하루종일 담배를 피우면서 신하나 학자들과 노가리만 까는 것은 아니고 통치에 대한 진지한 문제도 토론하는 편이었다고 한다. 이 행사는 훗날 흡연을 싫어하고 신하들을 불신했던 아들 프리드리히 2세가 없애버렸다.
병사들을 "내 새끼들"이라고 칭할 정도로 군대에 대한 사랑이 유별나서 종종 '''국왕이 스스로 빠따를 들고 점호에 나섰고 병사들을 직접 두들겨 팼다고 한다.''' 이런 프리드리히 빌헬름에 대한 일화 때문에 당시 유럽 왕실이나 귀족들은 이를 보고 비웃었고 한참 모자란 사람쯤으로 여겼다고 한다. 당시 유럽에서 군대나 병사는 왕실 소유로 하인, 종이나 다름없었고, 전열보병 시절에 당시 군대에서 구타는 예사였고 군기를 유지하는 수단이긴 했지만 '''부사관이나 고참병이 줄빠따 치는 거지 장교들은 이를 감독 할 뿐 직접 빠따를 들고 치는 일은 드물었다.''' 그나마 고위급 장교들은 병사들이랑 만날 일도 잘 없었는데 일개 장교도 장군도 아닌 왕이 직접 밀덕질에 심취했다는 게 전 유럽적인 비웃음거리였다.
다만 그가 자신의 밀리터리 덕질만을 위해 수전노 짓만을 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미래의 병사들이 될 신민들을 위해 초등교육을 무상으로 실시했는데 이는 프로이센의 군사력이 오스트리아를 앞서게 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특히나 자녀들을 농사일 시킨다고 초등학교에 안 보낼까봐 초등교육을 의무화하기도 했는데, 적국인 오스트리아가 훗날 7년 전쟁의 실패를 맛 보고 나서야 프로이센의 정책을 모방하여 초등교육을 의무화했다.
그가 평생 남에게 돈을 준 건 딱 세 번이었는데 모두 베를린 도서관에 기부를 한 것이었다. 교육에 돈을 쓰긴 했지만 뒤에 후술할 거인 연대에 뽑으려고 찍어둔 장정 한 명 스카웃 비용보다 적은 푼돈을 내서 왕국 신민들은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크게 비웃었다고 한다.
군인왕이라는 별명답게 통치방식도 군대식이라 늘 신하들이나 휘하 사람들을 거칠게 단련하여 군기를 꽉 잡는 것을 즐겼다고도 하며 교양이나 자비와는 굉장히 거리가 멀어서 성격이 무척 난폭하여 왕비랑 시종과 시녀들까지도 맞았고, 특히 자식인 왕자들을 잘 때렸다고 한다. 왕자들 중에서도 왕세자인 프리드리히 2세는 잘 때린 수준이 아니라 맨날 두들겨 팼다. 한번은 신하와 산책중에 갑자기 몽둥이로 왕세자를 두들겨 패서 신하는 왕을 감히 말릴 수도 없고, 왕세자의 편을 들어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미친 척을 했다고'''...
또 심심할 때에는 수도를 산책하며 돌아다녔는데[8] 사람들이 놀거나 게으른 모습을 보면 절대 용납하지 않아 그런 사람들을 붙잡아서 개패듯이 패버렸다. 그래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오면 사람들이 공포에 질려 도망가버렸다. 취미가 베를린 산책인 만큼 이런 일은 자주 있었으며, 희생자가 젊은 남자일 경우 패고 나서 '너 군대 갈래 일 할래?'를 꼭 물어봤다고 한다.
왕비는 영국 조지 1세의 딸인 조피 도로테아이며[9] 그녀와의 사이에서 7남7녀를 두었지만 왕세자를 제외한 그외의 자식들은 관심밖이라서 신경도 안 썼다. 문제는 왕세자를 패는 이유가 기가 막힌 게 '''맞으면 맞을수록 강해진다는 것.''' 혈통이나 증상으로 봐서 정신질환이 의심된다는 설도 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외할머니 팔츠의 조피를 통해 제임스 1세의 스튜어트 가문과 이어지는데(하노버의 조피 샤를로테 - 팔츠의 조피 - 엘리자베트 스튜어트 - 제임스 1세 - 메리 스튜어트), 이러한 혈통으로 볼 때 포르피린증일 확률도 있다고.
영국 공주인 어머니의 기질도 물려받은 아들 프리드리히 2세와 갈등이 심했지만, 사실 프리드리히 2세는 어린 시절 큰 누나 빌헬미네에게 꽃은 싫고 큰 북을 치며 노는게 좋다고 해서 아버지를 흐뭇하게 한 적도 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문학과 음악에도 관심이 있었지만 프로이센 전통의 군국주의자도 맞다. 아버지처럼 몰빵한 게 아니라 "군사도 나름대로 열중하고 있으니 다른 것도 좀 하면 안 되냐"로 다툰 것. 이 부분을 오해해서 (특히 세계사를 다룬 어린이용 학습만화들) 마치 프리드리히 2세가 즉위 전에는 아버지와는 달리 군사보다 예술을 사랑하는 나약한 왕자였다가 국왕에 즉위한 직후에 갑자기 전쟁을 선호하는 군국주의자로 돌변한 것처럼 생각하기도 하는데, 사실이 아니다.
한편 워낙 막장부모이자 가장인터라 아내랑 자식들에게 증오를 받아 그의 죽음을 아내랑 자식들이 가장 기뻐했다. 큰딸 빌헬미네는 아버지가 죽은지 얼마 안가서 이를 기념하는 연회를 벌였다. 특히 신하들과 백성들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를 싫어했던터라 그의 장례식에는 공식 후계자인 프리드리히 대왕 빼면 그 누구도 장례식에 참여하지 않으려고 했을 정도였다. 심지어 이 프리드리히 대왕도 자신이 후계자라는 체면이 있어서 참여한거지 본인도 장례식에 참여하고 싶지 않았고, 아버지이자 선왕만 아니라면 장례도 치르지 말라고 하고 싶은걸 겨우 참았다고 한다. 당시 정확한 판단력과 자신의 실패도 인정할 줄 아는 이성인이라고 평가받은 프리드리히 대왕이 이런 말을 할 정도였으니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얼마나 막장부모인지 알 수 있다. 오죽하면 큰딸인 빌헬미네는 한술 더 떠서 자신의 일기에 동생인 프리드리히 2세가 아버지한테 맨날 얻어터지는 게 가장 가슴 아프며 포악한 아버지가 항상 죽기를 기도했다고 아버지를 까는 수기를 남기기도 했다.[10] 이것만 들어도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가족들에게 어떤 인간이였는지 짐작이 간다.
사실 그의 자식 교육은 굉장히 괴팍하다 못해 광폭하기까지 했으며, 그 때문에 프리드리히 2세 이전에 가졌던 두 아들은 '''모두 본의 아니게 죽여버렸다.''' 첫째 아들 프리드리히 루트비히는 태어난지 며칠 후에 세례식에서 미래의 군주인 맏아들에게 굳이 왕관을 씌워줘야 된다면서 모두가 말리는데도 바득바득 우겨서 강제로 머리에 왕관을 씌우려고 꼭 눌러 끼우다가 머리에 생채기가 나서 감염으로 병들어 죽었다. 또한 둘째 아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갓난아기 시절에 강하게 키워야 된다는 지론에 따라 군대 사열식을 데려 갔다가 어릴적부터 대포 소리에 익숙(?)해져야 된다고 또 우겨대서 갓난애 옆에서 대포를 쏜 결과 경기를 일으키는 바람에 죽었다고(...). 두 아들이 모두 어릴적에 죽어서 프리드리히 2세는 셋째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왕이 될 수 있었다. 이때문에 왕비 조피 도로테아는 개깡패 남편을 정말 증오했다. 또한 두 사람의 성격도 극과 극이라서 사이가 좋을 수가 없다. 특히 자식인 프리드리히 2세를 걸핏하면 두들겨 패는 남편 때문에 항상 피눈물을 흘렸으니 도로테아 입장에선 남편이 아니라 원수였다. 다만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유아 사망률이 높았기 때문에 이런 사례는 드물지 않았다. 근대 이전에는 귀족 가문 아이라도 4~5살을 넘지 않으면 사람 취급도 안 할 정도. 근대 이전의 유아 사망률은 60% 정도였다.[11] 물론 드물지 않다는 건 첫째가 아닌 아들들이 형의 죽음으로 후계자가 되는 부분이지, 아버지의 뻘짓에 죽어나가는 부분이 아니다(...).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해서도 예외는 없어서 어릴 적부터 군인 행렬을 관람하게 하고 6세때부터는 아침 알람을 대포소리에 깨어 기상해서 스케쥴을 빈틈 없이 짜서 완전히 군대식으로 키웠다. 덕분에 세자는 이미 10살이 되기 전에 군사 교본을 달달 외울 정도였다고. 사실 달달 외우지 못하면 아버지한테 실컷 얻어맞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덜 맞으려고 열심히 외운 것이다. 문제는 왕세자가 잘 해도 똥군기를 잡고 트집잡으며 계속 후드려 패니 프리드리히 2세는 죽을 맛이었다.
어머니를 닮아 감수성이 예민하고, 아버지로부터 심하게 학대받는 프리드리히 2세가 외국으로 탈출을 기도하자 죽이려고 했지만 장성한 왕위 계승권자였기 때문에 죽인다고만 으름장만 늘어놓았을뿐 결국 죽이지는 못했다. 꽉꽉 짜맞추어 놓은 스케쥴은 둘째 치더라도 아들을 강하게 키운다는 명목으로 이해하기 힘든 온갖 가혹행위를 가하였다. 아들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꼬투리를 잡아서 그 자리에서 두들겨패기도 했는데, 거칠게 반항하면 만족하고 그만두었으나 벙찌거나 겁을 먹어서 꼼짝도 하지 않으면 오히려 더 성을 냈다고 한다. 나중엔 식사 자리에서 같은 식탁을 쓰지 못하게 하고 식탁의 가장 아랫자리에서 식사하게 했다. 이외에도 왕세자가 똑바로 하더라도 자기 눈에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들거나 작은 실수라도 하면 사람들 보는 앞에서도 욕설하고 구타하는 게 다반사였다.[12] 함께 탈출을 기도한 세자의 친구인 장교도 프리드리히 2세를 동정하고 있었다고 한다.
나중에 한스 폰 카테 탈출 스캔들이 벌어졌을 때는 폰 카테를 참수형에 처한 것은 물론이고 관련자인 프리드리히 2세도 정말로 죽이려다가 다른 신하와 왕족들이 만류해서 그만두기도 했다. 대신 프리드리히를 퀴스트린 요새에 감금했는데 프리드리히는 카테가 처형당하는 모습을 그대로 지켜봐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목이 자신이 갇힌 방을 바라보도록 내걸리는 것 또한 그대로 지켜봐야 했다. 이 때문에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프리드리히 2세가 기절하자 부왕은 약해빠진 놈이라며 당장 죽여야 한다고 노발대발했다.[13] 이 역시 왕비랑 신하들과 왕족들이 뜯어 말렸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6세까지 개입해서 '왕족에 대한 재판은 제국 의회만이 할 수 있다.'라는 근거를 제시하며 만류해서[14] 프리드리히 2세는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대신 수년동안 퀴스트린 요새에서 감금 생활을 해야 했다.
이렇게만 보면 별로 좋지 않은 사람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이 사람이 프로이센 왕국에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하였다. 애초에 독일의 수많은 봉국 중 하나에 불과했던 프로이센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끌어 올린 것이 이 사람이다. 그가 즉위한 동안에 근검절약[15]하여 모아 놓은 막대한 자금과 심혈을 기울여 키워 놓은 군사력은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가 훗날 유럽의 대군주로 군림하게 하는 초석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17] 프리드리히 2세를 알렉산더 대왕에 비견한다면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필리포스 2세에 비견할 수 있을 듯하다. 재미있게도 필리포스 2세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모두 아들인 알렉산드로스 3세와 프리드리히 2세와는 심한 갈등을 빚었다. 프리드리히 2세도 아버지의 포악한 성격에 시달리다가 외국으로 탈출을 기도했고, 알렉산드로스 또한 아버지와 싸웠다가 한동안 마케도니아를 떠나서 외국을 돌아다녀야 했다.
죽기 전 자신의 아들(프리드리히 2세)에게 유언으로

나는 평생동안 근검절약하여 너에게 넉넉한 재산과 8만 명의 정예병을 남긴다. 절대 군대를 함부로 줄이지 마라. 또한 유럽의 군주 그 누구도 믿지 말아라. 나는 왕세자가 함부로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을 믿는다. 왜냐하면 신께서 그러한 전쟁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신민들에게 전쟁에 대해 반드시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아들인 프리드리히 2세는 유언의 앞 부분은 충실히 지켰는데, 자신도 아버지처럼 근검절약한 삶을 습관화한데다가 군대를 중시하여 오히려 수를 2배가 넘는 19만 명까지 늘렸고 유럽의 군주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유언의 뒷 부분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 대가로 7년 전쟁에서 나라뿐만 아니라 자신까지도 파멸할 뻔한다.

2.2. 프로이센군 기반 양성


그는 키가 워낙 작아서 약 150cm 정도였다고 한다. 그에 반해서 체형이 비만한 편이라 몸무게는 100kg가 넘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그는 키가 큰 병사들을 모아 척탄근위연대를 하나 창설했는데, 통칭 거인 연대로 당대의 별명도 포츠담의 거인들이였다. 기준은 키 6피트(대략 182cm) 이상이었다고. 그런데 당시 프로이센 남성들의 평균 키는 160cm 중반 정도였고, 180을 넘는 장신들은 유럽 전역에서도 흔하지 않았다.[18] 당연히 키 큰 프로이센 청년은 절대로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손에서 빠져나갈 수 없었다고. 그런데 당시 프로이센 인구는 대충 2백만 정도이니 프로이센인만으로는 도저히 부대 하나를 채울 수 없었기에 외국인 용병들도 고용해 왔고, 주변 국가의 왕들이 '선물'해 주기도 했다. 스웨덴 출신이 꽤 많았다고. 또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가 주기적으로 러시아의 키 큰 청년들을 보내주거나, 오스만에서도 선물해 주기도 했다고 한다. 프리드리히 대왕도 왕세자 시절 아버지에게 선물해 주기 위해 영국에서 198cm짜리 청년을 스카웃해 왔는데, 이때 쓴 돈이 군마 20 마리를 살만한 돈이였다고 전해진다. 투박하게 비교하자면 요즘의 탱크 20대를 살 수 있는 돈으로 병사 하나를 데려온 격이니 과하다는 평이 나올 수밖에.
외국인들을 고용해 오거나 선물 받아 와도 부족하자, 심지어 납치까지 벌였다. 아일랜드 출신의 제임스 커클랜드(James Kirkland)이라는 청년은 키가 213cm였는데, 어느 날 런던에서 프로이센 대사인 보크에게 하인 스카웃 제의를 받았다. 하지만 이것이 함정으로, 그는 포츠머스에서 프로이센 배에 탔다가 그대로 프로이센까지 끌려갔다. 이 납치극에 쓴 돈이 대략 1천 파운드라고(...). 그래도 커클랜드는 거인 연대에서도 키가 손꼽히게 컸다고 하니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만족했을 것이다. 또 오스트리아 외교관 한 명도 하노버에서 공공 마차를 타던 중 프로이센까지 끌려왔다가 외교관임을 밝히고 풀려나기도 했다. 이 외교관은 이 피랍 경험담을 평생동안 이야기거리로 잘 써먹었다고 전해진다. 물론 이런 납치극은 피해자가 속한 국가들의 어그로를 끌었다. 참고로 아예 전담 스카우터들까지 둬서 일부는 프로이센을 돌아다니며 키 큰 청년들을 찾아 징집하고, 일부는 외국을 돌아다니며 키 큰 청년들을 납치해 왔다고. 거기다 프로이센 내에서 신생아때부터 찍어뒀던 건지, 신생아가 평균치보다 조금이라도 더 크면 붉은 스카프로 표시해 뒀다고 한다. 물론 부모들은 아이가 평균보다 조금이라도 큰 것 같으면 숨기느라 난리였다고.
이걸로도 부족해 스스로 만들어낼 생각까지 품었는지 거인병들을 키가 큰 여자들과 결혼시켜 아이를 낳게 했는데, 이 방법은 너무 느렸고 종종 평범한 키의 아이들도 태어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를 실망시켰다고 한다. 이 사례는 찰스 다윈이 자신의 저서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에서 '가축 말고 사람을 특정한 특징을 뽑아내기 위해서 강제로 교배시키고 그런 사례는 그 유명한 포츠담의 거인들 말고는 없다'라는 식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모은 숫자는 대략 2천 5백~3천여 명. 그런데 또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너무 아껴서 그런 건지, 정작 창설 이래로 실전에는 단 한번도 투입되지 않았다.[19] 이들이 동원되는 것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보고 싶을 때, 혹은 외국 사절 같은 손님들이 왔을 때 열리는 사열식이나 퍼레이드 같은 것들뿐. 즉 의장대였다. 또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기분이 꿀꿀하면 2백~3백 명 정도를 모아서 북치고 장구치고 나팔을 불게 하면서 함성을 내지르는 등의 간략한 퍼레이드를 벌이게 했다고 한다. 프랑스 대사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은 나한테 아무 의미도 없지만, 키 큰 병사들이야 말로 나의 약점이오."라는 말도 했다고 하며, 1740년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신하들이 거인 연대 병사 수백 명을 데려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병실 앞에서 퍼레이드를 벌이게 하자 다 죽어가는 몸으로도 크게 즐거워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전 부분에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아들, 아내를 비롯한 가족이나 주변의 신하, 시종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읽은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이 거인 연대도 엄청난 폭력과 학대에 시달려야 했다. 입대도 동의 없는 납치나 강제 징집이 대다수인데 대우까지 이러니 자살율과 탈영율이 다른 부대를 압도했다.[20] 거인 연대는 이런 막장스러운 대우뿐만 아니라 무차별적 납치 등의 막장 행각으로 프로이센뿐만 아니라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까지 악명이 높았다. 백여 년 후의 찰스 다윈도 '그 유명한 포츠담의 거인들'이라고 한 걸 보면 안 좋은 방향으로지만 참 유명했던 듯.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이후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 부대의 병사 대다수를 다른 부대로 옮겼고, 지속적으로 축소되다 나폴레옹 시대인 1806년에 완전 해체되었다고 한다.
거인연대와 별개로 실제 유럽 역사나 각종 게임에서 프로이센군은 거의 무적의 교환비를 자랑하는 인간 믹서기들로 묘사가 되는데, 이런 이미지를 만드는 대에도 일조한 편이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군제 개혁을 시작했는데 그 내용 중에는 징집같은 효율적인 시스템 말고도 병사들의 전투력을 향상하는 항목이 많았다. 예를 들면 동 시대 다른 국가들은 병사들이 분당 세 발을 쏠 수 있게 훈련한 반면 프로이센군은 두 배인 여섯 발을 쏠 수 있게 훈련했다. 물론 혼란스러운 전투 가운데에는 정말 분당 6발을 쏘긴 힘들지만 그건 타국 병사들도 마찬가지라 압도적 화력으로 찍어누를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또 유럽 군대 중 처음으로 쇠로 된 꼬질대를 도입하여 장전중 꼬질대가 부러지는 사태를 방지했으며 거위걸음(Goose-Steps)으로 대표되는 구보를 도입하여 기동성을 향상했다.

3. 가족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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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 조피아 도로테아(1687년 3월 26일 ~ 1757년 6월 28일) - 영국 조지 1세의 딸. 서로 사촌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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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피아 도로테아: 1719년 1월 25일 ~ 1765년 11월 13일 - 브란덴부르크슈베르트 공비. 참고로 딸은 외삼촌인 아래의 아우구스트 페르디난트 왕자와 결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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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51세[재위기간] 27년[1] 증거 키에 대한 분쟁이 심한 아들과 달리 본인은 키가 160cm로 밝혀졌다.[2] 군인왕이라니 칭찬같지만 사실상 당시 각국 귀족들의 조롱에 가까운 별명이다. 애초에 평민 병사들은 부사관이나 하급 장교가 관리하지 어지간하면 귀족 출신인 고급 장교들을 볼 일도 잘 없는데 왕이라는 작자가 직접 군복을 입고 현장을 누비며 점호를 하고 다니니 온 유럽의 비웃음을 받게 된 것이다. 게다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이렇다 할 큰 전쟁을 훌륭히 지휘한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즉 적절히 번역하면 ‘밀덕왕’ 정도라고 보면 되겠다. 공교롭게도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문약하다며 아주 가혹하게 교육했던 아들 프리드리히는 인류 역사에 손꼽히는 천재형 지휘관 중 하나로 꼽히니, 자기 아들의 그릇을 못 알아본 셈이다.[3] 당시 하노버 왕실이 영국 국왕 자리에 오른 동군연합 상태였다. 하노버는 내륙국이라 영국과의 통행로가 차단된 상태였는데, 이를 해결하고자 하노버 바로 북쪽에 위치하고 바다에 인접한 스웨덴 영토를 노리고 참전했다.[4] 영국은 프랑스를 견제하고, 하노버 왕국을 외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프로이센에 재정지원을 했다.[5] 프리드리히 2세 때 발생한 동맹의 역전을 계기로 영국과 프로이센이 동맹을 맺었기는 했지만, 그 동맹이 순조롭게 돌아가지는 않았다. 7년 전쟁 시기에 영국의 오락가락한 대프로이센 정책에 대해 원한을 가진 프리드리히 2세는 미국 독립전쟁 때 미국 독립군측과 무장중립동맹을 맺어 미국 독립군을 지원하게 된다.[6] 다만 영국이 7년전쟁 도중 프로이센을 지원했다가 안했다가 한 것은 의도적인 기만행위였다기보다는 입헌군주국인 특성상 의회 내에서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외교 기조가 바뀌어서 생긴 불상사에 가까웠다. 실제로 영국 왕실은 본가인 하노버 공국을 지키기 위해 지속적으로 육군 투입을 시도했지만 의회가 국익과 관련 없는 왕의 사적인 일에 예산을 낭비할 수 없다며 훼방을 놓는 경우가 많았다.[7] 후에 이 일로 인해 건강이 나빠지면서 일찍 죽는 계기가 된다.[8] 그 이유도 무려 돈이 안 들어서(...)이다.[9] 서로 사촌이다. 프리드리히는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하노버 선제후의 딸의 아들이고 아내는 이 선제후의 아들인 조지 1세의 딸이다.[10]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아들과 더불어 딸 빌헬미네도 때린 적이 있다. 프리드리히가 한스 헤르만 폰 카테와 도주했을 때 격분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다짜고짜 빌헬미네를 찾아와서는 화풀이로 고함을 치면서 딸을 때리기 시작했고,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다 못한 빌헬미네는 비명을 지르며 정신을 잃기까지 했다. 참고로 이때 프로이센의 궁정을 방문한 영국과 프랑스 대사가 보는 앞에서도 딸을 때렸다.[11] 아이들이 크지 않으면 이름도 안 붙이고 정도 안 주려는 이유는, 당연하지만 자식이 일찍 사망하면 부모들도 정신적인 고통이 굉장히 크기 때문이다. 특히 근세 유럽까지의 영아사망률은 굉장히 높았기 때문에 앤 여왕은 무려 18번의 임신을 했지만 전부 유산, 사산되거나 그나마 태어난 자식들도 전부 유아기에 일찍 사망하면서 말년에는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했다. 당장 한국도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홍역 등 질병으로 갓난아이들을 여러 차례 가슴에 묻는 부모들이 많았다.[12] 일례로 왕세자가 머릿털이 뜯길 정도로 두들겨 맞았을 때 왕세자한테 그 모습 그대로 열병식장까지 걸어가라고 시켰고 주변 사람들이 보게하는 망신을 주었다.[13] 한스 폰 카테는 프리드리히 2세의 절친한 친구였을 뿐만 아니라 동성 연인이었다는 설이 존재할 정도로 상당히 각별한 사이였다.[14] 이는 왕비가 당시 오스트리아 대사인 제켄도르프한테 오스트리아 대공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카를 6세한테 처형을 말려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프로이센 왕국도 프로이센 지방을 제외한 브란덴부르크나 포메라니아는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였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의 의지를 완전히 무시하기는 어려웠다.[15] 식사를 검소하게 했으며 돈을 아끼려고 부자나 귀족들의 파티에 직접 가서 포식을 했다. 옷도 화려한 옷이 아니라 항상 깔끔한 군복을 입고 다녔다. 실제로 남아있는 초상화들을 보면 당시 왕귀족들 하면 떠오르는 로코코 양식의 화려한 장식과 술이 잔뜩 달린 예식용 옷이 아니라 전부 흉갑에 깔끔한 군복 외투만 입고 있는 모습이다.[16] 문화철학은 다 할 일이 없고 배부른 자들이나 하는 헛소리라고 깐다(...)[17] 지경사 어린이용 역사만화 등에서는 자신의 기준에서 유약한 세자를 보며 "에구, 저렇게 유약하니 나중에 왕이 되면 나라나 제대로 다스리겠나..."라며 걱정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다음 컷에는 그 유약한 프리드리히 2세가 왕이 되자 프로이센의 군대를 두 배로 증강하고 전쟁을 통해 유럽의 강국으로 발돋움시켰다는 것을 전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묘사도 나온다. 하지만 어린이용 역사만화는 굉장히 미화를 시켰기에 이것을 믿으면 절대 안된다. 실제로는 18세기 유럽 기준으로도 정말 막장인 성격이다. 그나마 계몽사의 만화세계사의 경우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신하들에게 자신만이 옳다고 문화 같은 거 필요없다고[16] 강군만이 살 길이라고 하며 윽박지르는 막장을 보여준 후에 뒷장에서 아들을 보고는 "저렇게 약해빠진 놈이 왕위에 오르면 나라를 망치고 말지 원..."하고 한탄하는 모습이 등장한다.[18] 19세기에 기록된 병사들의 신장 측정에서는 독일 지방은 대략 164cm로 나온다.[19] 당시 거인 부대는 실전에 투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효율성에 의문을 제시하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혹자는 지나치게 큰 키 때문에 거인 부대 자체가 그다지 쓸모가 없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는 전열보병 시대인지라 은엄폐나 산개의 개념이 없던 시대였다. 물론 유격병이나 저격병이 당시에도 운용되었고 이들은 은엄폐외 산개를 적극 활용했으나 엄연히 보병의 주축은 전열보병이었다. 때문에 키 큰 장정이 실전에서 쓸모없다는 건 다분히 현대적인 시각일 따름이다. 괜히 그 인간흉기프랑스 제국 근위대를 178cm 이상부터만 뽑았을까? 물론 키가 크고 작고는 전쟁에서 그다지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는 점은 사실이다.[20] 사실 대우는 다른 부대들보다 좋은 군복과 장비, 음식을 주어서 좋았으나 정작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가혹한 훈련과 체벌을 하는 게 큰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