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카법

 

1. 설명
2. 사례
3. 유사 사례 - 동아시아의 종법제
4. 살리카법의 폐지


1. 설명


Lex Salica, Salic Law
프랑크 왕국 메로비우스 왕조의 법전. 살리(Salic)라는 표현은 당시 프랑크족 중에서 주종족이었던 '살리족'에서 나왔다. 클로비스 말년에 만들어진 법전으로 게르만족관습법을 성문화한 것이어서 게르만적 관념이 많이 들어가 있다. 라틴어프랑스어의 중간 단계 언어로 쓰였으며, 프랑크족의 원래 언어인 고대 네덜란드어로도 적혀있어서 네덜란드어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이다.
이 법전 자체를 가리키는 고유명사이면서 ''''여성의 왕위 계승'이나 '여계 왕손'을 인정하지 않는 제도'''를 통틀어 가리키는 일반명사이기도 하다. 즉, '''여성의 왕위 즉위 금지법'''을 뜻하기도 한다.

2. 사례


살리카법의 민법 규정 가운데 '딸은 토지를 상속받을 수 없다'는 것이 있다. 그리고 게르만 족 전통에 따르면 작위는 토지에 붙어 다니는 것이었다. 이 얘기대로라면 '딸은 작위를 상속받을 수 없다'. 이는 토지의 주인이 그 토지에서 얻은 수입을 바탕으로 자신의 무장을 갖추고 병력을 부양하며 전시에 그 병력을 지휘해 전투에 참여해야 했기에, 그러니까 '''군 복무를 해야 했기에''' (군 복무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진) 여성의 토지·작위 계승을 막은 것인데, 프랑크 왕국 메로비우스 왕조 시대에 이미 모계를 통한 계승이 나타나기 때문에 이 조항은 만들어진 지 100년도 안 지나서 사문화된 것으로 보인다. 그냥 딸이 토지를 상속받고, 병역은 사위나 손자에게 맡기면 땡이라 금방 사문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어쨌건 토지·작위 주인 입장에서는 조카나 형제, 또는 더 먼 친척보다는 딸에게 땅을 주고 싶었을 테니까 말이다.[1]
그러다 1316년 프랑스 카페 왕조의 왕 루이 10세가 사망하고 그의 유복자 장 1세마저 5일 만에 죽자 문제가 시작되었다. 루이 10세의 동생이자 장 1세의 삼촌이었던 섭정 필리프는 즉시 국왕 필리프 5세로 즉위했다. 하지만 루이 10세의 딸 잔이 살아있었기에 그의 정통성은 떨어졌다. 이에 1317년 랭스에서 그는 서둘러 자신의 위치를 강화하기 위해 도유식(塗油式)[2]을 행한 후 귀족, 고위 성직자, 파리 대학의 박사, 법학자들과 회의를 진행했다. 그들은 파리 대학을 뒤져 먼지투성이 법전 속에서 이 조항을 '''발굴'''했고 이 조항을 '''확대 해석'''하여 모계를 통한 왕위 계승권을 폐지했다. 즉, 그의 조카이자 왕위 계승자였던 잔의 계승권을 박탈하고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시킨 것이다. 이것 때문에 잔은 즉위하지 못하고 그 뒤로도 넓은 의미의 카페 왕가가(발루아 왕조, 부르봉 왕조) 내내 이어졌기 때문에, 이 선례에 따라 여왕이 즉위하지 못했다. 대신 잔은 샤를 4세 사망 후 살리카법이 미치지 않는 나바라 왕국의 여왕이 되었다.
이 조항으로 훗날 필리프 6세루이 10세의 장녀인 잔을 대신해서 즉위하여 발루아 왕조를 열게 되었으며, 부르봉 왕조에서는 루이 16세가 프랑스 대혁명 와중 사망한 이후 루이 18세, 샤를 10세가 유일하게 남은 루이 16세의 혈육이었던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대신 즉위하게 되었다.
필리프 5세의 이 해석은 사실 '''확대 해석'''이다. 살리카법에서 딸은 토지를 상속받을 수 없지만 외손은 토지를 상속받을 수 있었다. 딸은 전쟁에 나갈 수 없지만 외손자는 나갈 수 있으므로 문제가 전혀 없기 때문. 만약 외손도 토지를 상속받을 수 없었다면 외손자의 자격으로 토지와 작위를 상속받은 전력이 있는 카페 왕조나 부르봉 왕조의 성립 자체가 정통성이 상당히 취약해진다. 부르봉 왕조는 부르봉 영지와 작위부터 원래 외조부의 소유였다. 무엇보다 카페(그리고 그 후계) 왕조는 왕자들을 유력 영주들의 상속녀와 결혼시켜 영토를 넓혀왔던 것이다.[3] 필리프 5세는 결국 자기 조상님들을 디스한 셈이다.
어쨌건 필리프 5세의 이 해석은 시간이 흐르며 다른 나라에도 퍼졌고, 그 결과 '''온갖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당장 필리프 5세 본인부터가 아들이 일찍 죽는 바람에 딸들이 왕위를 물려받지 못하고 동생 샤를 4세가 왕위에 오르고, 샤를도 후계자를 남기지 못해 카페 왕조 직계가 끝나고 방계 발루아 왕조가 시작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백년전쟁이 터졌다. 샤를 4세의 가장 가까운 혈족으로 루이 10세의 딸 잔이 있었지만 이 조항으로 왕위 계승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결국 필리프 4세의 조카(필리프 4세의 동생 샤를 드 발루아의 아들) 필리프 6세, 필리프 4세의 외손자(필리프 4세의 딸 이사벨라의 아들) 잉글랜드의 왕 에드워드 3세, 필리프 4세의 또 다른 조카(필리프 4세의 동생 루이 데브뢰의 아들) 나바라의 왕 펠리페 3세[4]가 왕위 계승을 주장했다. 결국 필리프 6세가 발루아 왕조를 개창하고 일단 에드워드 3세는 인정했지만 나중에 이걸 취소하고 백년전쟁을 일으켰다. 에드워드 3세의 어머니 이사벨라가 필리프 4세의 딸이었으니 모계 계승을 주장한 것이다.
약 300년 후에는 이 조항 때문에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라는 '''세계 대전급 전쟁'''이 시작된다. 요제프 1세 사후 즉위한 그의 동생 카를 6세는 젊은 시절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을 겪었다. 이에 여성의 왕위 계승을 완전히 배제함은 후에 나라를 혼란스럽게 만들 수도 있다는 걸 깨달은 그는 일찍부터 살리카법을 없애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1713년 국사조칙(Pragmatic Sanction, 프라그마티셰 장크티온)을 발표했다. 그러나 카를 6세가 사망한 뒤 그것을 지키지 않으려는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프리드리히 2세였다. 프리드리히는 슐레지엔의 계승권을 내세워 국사조칙을 파기하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일으키며, 이는 7년 전쟁으로 이어진다. 다만 마리아 테레지아 이후로는 도로 살리카 법으로 회귀했다. 애시당초 카를 6세가 살리카법을 폐지하려고 했던 가장 큰 이유는 합스부르크 가문에 남자 후계자가 더이상 없을 가능성을 고려했었기 때문이다.
살리카법은 프랑크 왕국의 법률이므로 유럽 국가라도 그 기원이 다른 나라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백년전쟁잉글랜드 왕국은 살리카법의 영향을 받지 않았기에 일어난 것이다. 그렇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살리카법이 적용되기 시작한 나라들도 몇 있다.
스페인의 경우 프랑크 왕국에서 기원한 국가가 아니기에 본래는 살리카 법이 없었다가 부르봉 왕가가 왕위를 차지하면서 살리카법이 도입되었다.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먼 친척인 앙주 공작 필리프에게 후사를 맡겼는데, 그가 하필이면 프랑스 왕 루이 14세의 손자였다. 당시 프랑스와 신나게 전쟁을 벌이고 있던 영국과 네덜란드(명예혁명으로 네덜란드 공화국 원수 빌렘 3세가 영국 왕 윌리엄 3세로 즉위)는 당연히 이게 무슨 소리야 하며 반대했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도 이에 가담해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졌다. 그 결과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루이 14세의 손자인 필리프가 스페인 왕으로 즉위하되, 이후 무슨 일이 있더라도 프랑스의 왕위는 주장할 수 없다는 조건이 붙는다. 앞 버전에서는 이 조약으로 루이 14세의 야망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하는데 틀린 말이다. 애당초 루이 14세의 목적은 자신의 부르봉 왕조 혈통으로 스페인 왕위를 차지하는 것이었으니 오히려 목적 달성. 다만 이후 루이 14세의 자손들이 줄줄이 죽어나가면서 정작 본진인 프랑스의 왕위계승자가 희귀해지고 말았고 펠리페 5세를 계기로 스페인을 프랑스에 병합하려 했으나 실패한 것이 아쉬울 뿐, 스페인을 프랑스의 아군으로 만든 것만 봤을 때는 성공적이었다. 나중에 이 조항을 두고서 왕위 계승 분쟁이 벌어지는데, 이를 카를리스타 내전이라 한다. 조카딸 이사벨 2세가 즉위하자 삼촌 카를로스가 왕을 자칭한 것인데, 카를리스타 내전은 여러 번 있었고 전부 다 카를리스타들이 졌지만 여전히 세력이 막강해 자기들만의 소왕국을 스페인 내부에 건설했다. 그리고 이 카를리스타들은 스페인 내전에서 우파들의 주요 세력으로 참전한다.
러시아도 처음에는 살리카 법이 적용되지 않았지만 로마노프 왕조의 여제 시대가 끝나고 표트르 3세의 아들 파벨 1세가 즉위한 이후부터 적용되기 시작했다.[5] 한편, 대영제국하노버 왕조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하면서 하노버와의 동군연합이 끝났다. 영국은 반 살리카법[6]이 있었으나 하노버는 살리카 법이 있었기 때문. 빅토리아의 숙부가 하노버 왕가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로 즉위했다.
살리카법은 국가의 안정성 측면에서 도움이 되는 부분도 있다. 일단 국토의 보존에 유리하다. 일반적으로 국내에 봉토가 주어지는 왕자들은 상속이 진행됨에 따라 영지가 해외로 유출되는 경우가 적은 데 비해 외국 왕가로 시집가는 공주들의 경우, 상속된 영토가 해외로 유출되는 문제가 생긴다. 역사적으로 프랑스 왕 루이 7세의 봉신이자 부인인 아키텐 공작령의 상속녀 엘레오노르(아키텐 공작 기욤 10세의 딸)가 남편과 이혼하고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와 결혼하는 바람에 프랑스 왕보다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땅을 더 많이 가지는 기현상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주가 왕위를 상속받되 남편이 처가살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해외에서 통치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하며,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남편이 처가의 언어와 문화에 적응해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예를 들어 영국이 독일의 하노버 가문에 시집간 공주의 외손자가 왕위를 계승했을 때 국왕이 영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 바 있다.
물론, 이것은 외국인 왕비도 마찬가지고 국내의 귀족 중에서 배우자를 고르면 된다는 반론이 있긴 하다. 그러나 이게 애시당초 성립되기 어려운 것이, 왕족의 경우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같은 통치계급(즉, 왕족)과 결혼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고 그렇지 않은 배우자는 귀족이라도 귀천상혼이 되어 왕위 계승권을 인정받지 못한다. 국내에서 배우자를 고르려면 귀천상혼이 되어 자손들의 왕위계승을 포기하든가 가까운 왕족 친족과 근친혼을 해야 하지만 그런 배우자감이 항상 준비되어 있는 것도 아니므로 대부분 외국 왕족과 결혼하게 된다. 물론 이것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유럽의 한정된 왕족 풀 때문에 결국에는 다들 친척이 된다는 문제가 생기긴 했다. 때문에 근친혼에 따른 유전병의 폐해가...
다만 국가의 안정성에 해가 되는 사례도 있기는 했다. 왕들이 아들을 낳지 못 하거나 아들이 일찍 죽었을 때 직계의 딸이 있음에도 살리카법 때문에 계승하지 못 하는 바람에 친척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계승권을 주장하고 나섰던 것이다. 프랑스 카페 왕조 말기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 백년전쟁의 명분이 되었고, 오스트리아에서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스페인에서는 카를리스타 내전이 일어났다.
물론 위에 전쟁들은 그저 살리카법의 폐단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국가 가문들간의 '''족보와 계승권'''을 둘러싸고 복잡하게 얽히면서 토대가 마련되고 강대국들간의 서로 다른 '''이해 관계와 침략 야욕이 한대 엉킨''' 전쟁이였던지라 단순히 이 법의 안좋은 예시로 볼 수는 없다.
유럽 역사에서는 가끔 엄청나게 먼 촌수에서 계승권자가 나와 왕조가 교체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게 거의 대부분 살리카법 때문이다. 프랑스에서도 나바르앙리 4세가 부계로는 22촌이 됨에도 왕국을 이어받아 부르봉 왕조의 기원이 되었고, 이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영국에선 전혀 생뚱맞은 독일인들이 왕위를 계승해 하노버 왕조가 창건되어 왕국의 명맥을 이었다.[7]
셰익스피어의 작품 '헨리 5세'에서 이 프랑스의 살리카법의 적용을 조목조목 반박한다.

'In terram Salicam mulieres ne succedant:'

살리카 영지 상속 법전에 따르면

'No woman shall succeed in Salique land:'

여인는 살리카 영지를 상속 받을수없다

Which Salique land the French unjustly gloze to be the realm of France, and Pharamond, the founder of this law and female bar.

프랑스인들은 이 살리카 영지를 프랑스 왕국으로 자칭하고, 파라몬드, 이 법을 만든자도 그렇다고 주장한다

Yet their own authors faithfully affirm that the land Salique is in Germany, between the floods of Sala and of Elbe;

허나, 법전의 저자들도 살리카 영지는 독일에 있고, 그 땅은 살라와 엘베강 사이에 있다라고 서술한다

Where Charles the Great, having subdued the Saxons, there left behind and settled certain French;

샤를마뉴가 작센족을 정벌하고, 프랑스인들을 정착시킬떼

Who, holding in disdain the German women for some dishonest manners of their life, establish'd then this law;

독일 여인들의 불결한 생활을 혐오하였음으로, 이 법을 적용했다

To wit, no female Should be inheritrix in Salique land:

서문으로, 여인는 살리카 토지를 상속받을수없다

Which Salique, as I said, 'twixt Elbe and Sala, is at this day in Germany call'd Meisen.

그 영지라 하면, 전에 말했듯이, 엘베와 살라사이에 있다. 현재는 독일의 메이슨 지방이라 불린다

Then doth it well appear that Salique law was not devised for the realm of France:

그러하면, 이 살리카 법은 프랑스 왕국안의 적용을 염두에 둔것이 아니다.

Nor did the French possess the Salique land until four hundred one and twenty years after defunction of King Pharamond, idly supposed the founder of this law;

그리고 프랑스인들은 이 법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파라몬드 왕의 죽음으로부터 421년후에나 이 살리카 영지를 점령했다.

Who died within the year of our redemption four hundred twenty-six;

그 왕은 426년 죽음을 맞았다.

And Charles the Great subdued the Saxons, and did seat the French beyond the river Sala, in the year eight hundred five.

그리고 샤를마뉴는 작센족을 지배하고 프랑스인들을 살라강 너머로 이주시켯을때는 805년이였다.

Besides, their writers say, King Pepin, which deposed Childeric, did, as heir general, being descended of Blithild, which was daughter to King Clothair, make claim and title to the crown of France.

게다가 그쪽 서술자들에 의하면 피핀 왕이 힐드리히를 폐위시키고 프랑스 왕위를 주장할떼, 그는 클로타르 왕의 딸, 비틸드의 후손임을 주장했다.

Hugh Capet also, who usurped the crown of Charles the duke of Lorraine, sole heir male of the true line and stock of Charles the Great, to find his title with some shows of truth, 'through, in pure truth, it was corrupt and naught, convey'd himself as heir to the Lady Lingare, daughter to Charlemain, who was the son to Lewis the emperor, and Lewis the son of Charles the Great.

위그 카페가 샤를마뉴의 진정한 남계 후손, 로렌의 공작 샤를의 왕위를 찬탈할때, 그는 무의미하고 부정하지만, 진실을 말했다, 그는 자신이 바로 샤를메인의 딸 린가레의 후손, 즉 황제 루트비히의 외손, 샤를마뉴의 증손자란 것이다.

Also King Lewis the Tenth, who was sole heir to the usurper Capet, could not keep quiet in his conscience, wearing the crown of France, till satisfied that fair Queen Isabel, his grandmother, was lineal of the Lady Ermengare, daughter to Charles the foresaid duke of Lorraine:

또한 그 찬탈자 카페의 후손, 루이 10세는, 그의 할머니 이사벨[8]

이 로렌의 샤를의 딸 에르만가의 후손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전까지 편하게 있지 못했다.

By the which marriage the line of Charles the Great was re-united to the crown of France.

바로 이 결혼으로 샤를마뉴의 핏줄이 프랑스 왕위와 다시 합쳐졌다.

So that, as clear as is the summer's sun.

그러모로, 아침 태양처럼 분명한

King Pepin's title and Hugh Capet's claim, King Lewis his satisfaction, all appear to hold in right and title of the female:

피핀 왕의 작위와 위그 카페의 명분, 루이 왕의 후손임을, 모두 정당하게 여인의 작위를 인정한다.


3. 유사 사례 - 동아시아의 종법제


동아시아에서는 일명 '종법제'(宗法制)라는 원칙이 있다. 역대 중국 왕조에서 지킨 원칙으로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 일본, 베트남 등 동아시아 문화권 국가들에도 전파되었다. 부자 상속의 원칙이 같고, 고대의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여성의 왕위 계승 자체를 인정한 적이 거의 없었기에 유럽의 살리카 법과 매우 유사하다. 중국당나라측천무후, 한국신라선덕여왕, 진덕여왕, 진성여왕 3명, 일본에서는 8명의 여성 덴노가 있었다. 그러나 법적으로 여군주의 존재가 허용되었던[9] 신라일본에는 예외없이 왕족의 근친혼 풍습이 있었으므로 아버지가 왕족이 아닌데 어머니가 군주라는 이유로 왕위를 이을 수 없었다.
유럽의 살리카법과의 중요한 차이는 '가문'이 아니라 '혈통'을 더 중시한다는 것. 살리카법으로는 사위나 외손자가 계승을 할 수도 있었지만, 이 종법제에서는 '''Y 염색체가 일치'''해야만 계승권이 주어졌다. 그래서 동생에게 계승권을 주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국시격인 훈요 10조에서부터 형제 상속의 가능성을 대놓고 열어둔 고려는 이 사례가 아주 많았다. 살리카법에서는 딸이 자신의 남편이나 아들이라는 대리인을 내세워 상속을 받을 수 있었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아예 가문 상속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성립 근거가 다르다. 그리고 계승'권'인 살리카법과는 달리 이 종법제는 그 자체가 '권리'가 아니라 천륜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로 간주되었다. 즉 물려주는 입장에서 계승 방식을 무시하고 싶어도 불가능했고, 물려받는 입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살리카법에서는 물려받는 당사자가 '상속 권리'를 포기할 수 있었지만 이 종법제는 상속을 포기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의 자식인 서자, 얼자의 계승권의 유무도 다르다. 살리카법에서는 적자가 아닌 아들의 계승권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지만[10] 이 종법제에서는 적자를 더 우선시하되 적자가 없을 경우 서자와 얼자 심지어 사생아에게도 계승할 자격이 있었다.

4. 살리카법의 폐지


유럽에서는 20세기 들어 양성 평등 사상의 확산과 함께 살리카법은 점점 폐지된다. 현재 재위 중인 유럽 왕가들 가운데는 리히텐슈타인 공가만이 살리카법을 꿋꿋이 유지 중이다.[11]
20세기 후반 들어 왕실의 살리카 법을 폐지한 나라는 다음과 같다. 준살리카 법이었던 왕실은 # 표시한다.
  • 그리스 왕국: 1952년 아들 우선 장자상속제로 이행
  • 덴마크 왕국: 1953년 아들 우선 장자상속제로 이행하였다가 2008년에 절대적 맏이 상속제로 이행한다.
  • 노르웨이 왕국: 1971년 아들 우선 장자상속제로 이행하였다가 1990년에 절대적 맏이 상속제로 이행한다.
  • 스웨덴 왕국: 1980년 절대적 맏이 상속제로 이행
  • 벨기에 왕국: 1991년 절대적 맏이 상속제로 이행
  • 룩셈부르크 대공국#: 2011년 절대적 맏이 상속제로 이행

재위 중인 현대의 군주가문들은 양성평등이라는 대의를 거스르기도 어렵고 의회와 국민들의 눈치도 봐줘야 하거니와, 왕좌라는 확실한 인증장치가 있기 때문에 절대적 맏이 상속제를 통한 모계 승계가 이루어져도 정체성 유지에 지장이 없다. 예전처럼 왕족끼리 결혼하느라 왕권이 현대 국가의 국경을 넘어다닐 일도 없는데다 살리카법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처럼 군주가 직접 병력을 데리고 참전할 것도 아니니... 오히려 영지나 작위를 잃은 옛 왕가나 일반(?) 귀족 집안이 악착같이 살리카 법을 지키는 경우가 많은데, 살리카 법 같은 전통 수호를 통하지 않으면 집안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곤란하기 때문이다. 이런 집안들이 가법을 뜯어고쳐서 절대적 맏이 상속제나 아들 우선 장자상속제로 바꾸고 있다면, 아마 손이 귀해져서(…) 그럴 가능성이 크다.

[1] 즉, 살리카법을 굳이 빡빡하게 엄격히 적용한다면, 왕에게 아들(왕자)는 없고 딸(왕녀)만 있어서 왕이 자기 휘하의 귀족이나 영주 중 맘에 드는 놈과 왕녀를 결혼시킬 경우, 딸이 여왕으로 즉위하고 사위가 여왕부군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위가 아내의 계승권을 통해 왕으로 즉위하고 딸은 왕비로 만드는 것... 이긴 한데, 이게 구별하기 편하자고 여왕과 왕비, 왕과 여왕부군을 구별해 쓴 거지 어차피 유럽의 언어로는 똑같다.(예컨데 영어로는 왕이든 여왕부군이든 king이고 여왕이든 왕비든 queen이다.) 왕 이외의 하위 작위들 역시 마찬가지로, 공작부인이나 백작부인과 여공작, 또는 여백작 모두 표기는 똑같다. 물론 굳이 구분을 한다면 배우자를 의미하는 Consort를 붙혀주면 된다.[2] 성경에서 예언자나 왕을 책봉할 때 하느님에게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 해서 신성한 권위를 받은 것으로 여긴 것에서 유래한다. 프랑크 왕국 클로비스 왕이 처음 받은 연고로 프랑스 왕은 랭스에서 이 의식을 치러야 정당한 왕으로 인정받았다....고 본 문서에 적혀 있었지만 사실이 아니다. 도유식은 나중에 카롤링거 왕조에서 왕위를 찬탈할 때 만든 제도다. 클로비스 때는 도유식이라는 것이 없었다. 클로비스는 단지 '''세례'''를 받았고 이는 이미 왕위에 오른지 15년 후의 일이다.[3] 물론 카페 왕가와 부르봉 왕가는 토지 상속만 모계를 통했지 왕위는 부계로부터 기인한 것이기 때문에 왕위 정통성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는다.[4] 나바라의 여왕 잔(후아나 2세)과 결혼했다.[5] 표트르 3세는 독일계 귀족이었다. 게다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사실상 아버지를 살해하여 황제가 된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 극에 달했던 파벨 1세는 아버지의 고향에 있던 살리카 법을 끌고와 1797년에 문서화시키면서 공식화했다.[6] 딸의 왕위 계승을 가능하게 하되 아들의 계승을 우선시하는 조항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헨리 1세에서 윌리엄 1세의 남계 혈통이 아예 단절되어서 살리카법을 적용하자니 윌리엄 1세의 직계가 아니니 여계 계승을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플랜태저넷 왕조 때에 순수 살리카법으로 전환하지 않은 이유는 혹시 모를 후계자 대비를 위해서도 있지만, 에드워드 3세가 자신의 프랑스 왕위 계승을 정당화하려는 것도 있었을 것이다. 이게 없었다면 장미 전쟁 때 요크 왕조가 왕위 싸움을 하게 될 명분이 없었고,(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이후 튜더 왕조(곤트의 존의 증손녀의 아들이 헨리 7세이다.), 더 나아가 이후의 왕조도 성립이 되지 않으니 현재의 영국 왕조가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가 없다. 물론 현재는 폐지된 상태다.[7] 이 경우는 윌리엄 3세자코바이트 세력이 즉위하지 못하게 가톨릭 신자가 즉위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했는데, 가톨릭 신자들을 다 걸러서 찾아낸 게 독일인이었다.[8] 필리프 2세의 아내 이사벨 드 에노[9] 측천무후는 자신의 능력으로 제위를 찬탈했을 뿐 당나라에서는 여성이 황위를 이을 수 없었다. 애초에 측천무후는 황족 출신도 아니고...[10] 살리카법이 문제라기보다는, 서양에서는 군주부터 일반 백성들까지 모두 무조건 일부일처를 해야만 했으므로 서얼의 개념이 없어서 적자가 아닌 아들은 전부 사생아로 취급했기 때문이다.[11] 이 곳은 부계로만 따져도 왕위 계승 순위를 가진 사람이 50여명이 넘기에 그닥 절실하지도 않고 국가의 거의 모든 시스템이 공작의 개인 재산으로 돌아가고 있기에 입헌군주제라 하더라도 공작의 의견이 너무 강해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