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트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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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오스만어
''' مراد ثالث‎'''
터키어
'''III.Murad'''
'''출생'''
1546년 7월 4일]br]오스만 제국 마니사
'''사망'''
1595년 1월 16일 (48세)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재위'''
오스만 제국파디샤
1574년 12월 15일 ~ 1595년 1월 16일
'''배우자'''
사피예 술탄 (출신: 알바니아 / 베네치아 공화국[1])
'''자녀'''
메흐메트 3세
'''아버지'''
셀림 2세
'''어머니'''
누르바누 술탄 (출신: 베네치아 공화국 / 스페인계 유대인)
1. 개요
2. 치세
2.1. 외화내빈의 제국


1. 개요


오스만 제국의 12대 황제. 셀림 2세와 누르바누 술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황과 마찬가지로 하렘에 틀어박혀 정사를 살피지 않았고, 대재상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와 태후 누르바누 술탄, 애첩 사피예 술탄 등이 정치를 맡았다. 그의 시대에 사파비 제국으로부터 이란 서부를 정복하는 등 대외적으로는 큰 문제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부정부패와 인플레이션이 시작되며 쇠퇴의 조짐을 보였다. 치세 말기에 시작된 오스트리아와의 13년 전쟁에서는 신하국인 왈라키아와 몰다비아가 배신하며 어려운 상황이 되었으며, 세율을 올리는 바람에 민심이 동요하고[2] 사파비 제국아바스 1세가 복수를 준비하는 등 무라트의 사후 오스만 제국은 약 20년간 내우외환에 시달리게 된다.

2. 치세


1574년 동생 5명을 살해하고 제위를 계승한 그는 부황 대부터 황제를 대신해 제국을 운영해 온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에게 국정을 계속 맡기고는 부황처럼 하렘에 틀어박혀 정사를 등한시하였다. 소콜루 파샤는 타흐마스프 1세 사후 흔들리던 사파비 제국에 라라 무스타파 파샤 휘하의 군대를 보내 캅카스를 석권하고 카스피해에 다다르는 성과를 이룩하였다. 비록 전쟁이 한창이던 1579년에 암살당했으나 1585년 사파비 조의 옛 수도 타브리즈를 점령하는 등 승승장구하였다. 1588년 사파비 조를 단합시킨 아바스 1세가 강화를 청해온 결과 1590년 코스탄티니예 조약이 체결되며 오스만 제국은 조지아, 대 아제르바이잔, 자그로스 산맥 일대에 대한 영유권을 확보했다.

2.1. 외화내빈의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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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0년의 오스만 제국
외적으로 오스만 제국은 전성기를 이어갔지만, 내부에서는 붕괴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다. 소콜루 파샤가 암살당한 뒤에는 유능한 국정 운영가가 없었고, 아메리카 대륙에서 들어온 금은이 물가 폭등을 일으킨 것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이 결과 제국의 기축 통화였던 악체 은화는 은도금한 구리돈으로 바뀌었고, 봉급을 이 악체 화로 받던 관료들은 매관매직을 행하고 당파를 만들어 대립했다[3]. 본래 선별적 징집제였던 데브시르메 제도 역시 무슬림의 징집이 허용되는 등으로 변질되기 시작했고, 티마르 (봉토)를 소유한 귀족들은 납세와 군대 양성 대신 사유재산을 불리기에 치중하였다.

1568년 오스트리아와 체결한 평화 협정인 에디르네 조약이 1592년 만료되자 오랜만에 헝가리에 전운이 감돌았다. 1593년 보스니아 총독 텔리 하산 파샤가 선전포고 없이 크로아티아를 침공했다가 시사크 전투에서 전사한 것이다[4]. 이에 대재상 시난 파샤가 대군을 이끌고 진격, 1594년 부다페스트에서 빈으로 향하는 거점인 죄르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같은해 티미쇼아라 주의 5천 세르비아인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비록 4달 만에 진압되었지만 이를 계기로 오스만 제국의 속국인 왈라키아 공국과 몰다비아 공국이 동맹을 맺고 창끝을 돌려 에디르네까지 진격하였다. 이러한 긴박한 상황 속에서 무라트 3세는 톱카프 궁전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유해는 하기아 소피아에 매장되었고 장남 메흐메트 3세가 새 술탄으로 즉위하였다.


[1] 그동안 베네치아 공화국 출신 이탈리아인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연구 결과 이탈리아인이 아니라 알바니아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2] 지속된 평화로 인구는 폭증했는데 아메리카의 은 때문에 물가가 폭등했으며, 이에 제국 정부는 세금. 특히 非무슬림에게 거두던 인두세를 올렸다. 이는 자연스럽게 비무슬림들의 잇따른 반란으로 이어졌다.[3] 매관매직 자체는 무라드 본인도 트리폴리와 튀니지 총독직을 매매하는 등으로 관여했다.[4] 하산 파샤 본인은 보스니아 출신이었으니 어떻게 보면 금의환향인데, 군공에 욕심이 난 나머지 제멋대로 국경을 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