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림 2세
1. 개요
오스만 제국의 11대 술탄. 쉴레이만 1세와 휴렘 술탄의 3남으로 태어났다.[1][2]
2. 골육상쟁
본래 쉴레이만 대제는 셀림이 아니라 후궁인 마히데브란 술탄의 자식이었던 무스타파 왕자를 후계자로 정해놓았다. 하지만 마히데브란을 제치고 쉴레이만 대제의 정식 황후가 된 휴렘 술탄은 자신의 아들이 쉴레이만 대제의 후계자가 되기를 원했다. 본래 휴렘은 술탄의 총애를 받는 대신에 무스타파의 왕위 계승권을 인정한다는데 동의했지만 휴렘은 배다른 자식이 왕위를 잇는 것을 원치 않았고 휴렘과 그녀의 사위 뤼스템 파샤의 음모에 휘말려 무스타파 왕자는 반역 혐의로 사형당하였다.[3][4]
무스타파가 처형되고 무스타파를 좋아하던 막내 지한기르도 우울증으로 덩달아 죽어버린 후[5] 셀림은 유력한 왕위 계승자가 되었으나 또 다른 야심만만한 왕자였던 바예지트[6] 도 왕위 계승을 노리고 있었다. 휴렘 술탄이 살아 있을 당시에는 갈등이 겉으로 표면화 되지 않았지만 휴렘 술탄이 죽은 후에는 형제간의 갈등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바예지트는 셀림을 견제하기 위하여 셀림의 영지인 마니사로 통하는 무역로를 훼방놓기 시작했고 형제간의 갈등이 깊어지자 부황인 쉴레이만은 셀림과 바예지트의 영지를 바꾸는 방식으로 갈등을 무마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부황의 말에 순종한 셀림과 달리 바예지트는 쉴레이만의 명령에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다.[7] 결국 쉴레이만은 계속 자신에게 반항적인 태도를 취하는 바예지트 대신 셀림을 후계자로 인정하기로 하고, 당시의 부재상이었던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에게 셀림을 도와 바예지트를 토벌할 것을 명했다.
결국 두 황자들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고, 승리한 쪽은 셀림이었다.[8] 패배한 바예지트는 사파비 왕조로 도망쳐 타흐마습 1세에게 몸을 의탁했고 타흐마습은 바예지트를 기꺼이 받아들였지만[9] , 쉴레이만은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에게 명하여 바예지트를 돌려받는 몸값에 대한 협상을 할 것을 지시. 결국 타흐마습은 오스만 제국이 보낸 처형인이 바예지트 일가를 처형하는 것에 동의했고[10] 바예지트는 일가족과 함께 처형된다.
3. 주정뱅이 술탄의 치세
골육상쟁을 거친 끝에 쉴레이만 대제의 후계자가 되어 1566년, 오스만 제국의 11대 술탄으로 즉위한다. 매우 유명했던 아버지인 쉴레이만 1세와는 달리 군사적인 행동을 회피한채 술과 여자에 빠져 살았다.[11] 특히 술을 대단히 좋아했기 때문에 '주정뱅이 술탄'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12] 그러나 그가 즉위해 있는 동안 오스만 제국은 그럭저럭 잘 돌아갔는데 재상이었던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가 매우 유능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13]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종식시키고 동유럽에서 오스만 제국의 지배권을 확립시켰으며 아라비아 반도로 진출하여 예멘 정복도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리고 키프로스를 공략햇는데 야사에 따르면 '''키프로스가 품질 좋은 포도주 산지여서(...)'''라는 이야기가 있다. 문제는 이 키프로스 공략은 레판토 해전의 시발점이 되었고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은 유럽 연합군에게 패배한다.[14] 레판토 해전 자체는 오스만에게 큰 타격이 아니었지만 셀림 2세 사후 오스만에 궁중 암투가 벌어지고 유럽의 군사력이 강해지면서 오스만의 팽창도 멈추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치세에서 나중에 오스만 제국의 가장 큰 적이 되는 러시아와 처음 조우하게 된다. 아스트라한에서 러시아와 오스만의 충돌이 있었는데 아스트라한으로 가는 오스만의 함대가 폭풍으로 흑해에 침몰하게 된다.
문화적으로는 쉴레이만 치세의 발전이 계속되었는데, 오스만 제국의 유명한 건축가인 미마르 시난이 이 시기에 큰 활약을 하였다.[15] 그리고 셀림 2세 자신도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기 때문에 그가 만든 시들이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온다. 그 내용은 주로 자신의 황후였던 눌바누 술탄[16] 에게 보내는 연애시들.
오스만 제국의 역대 황제들 가운데 '최초' 라고 할 만한 기록도 두 개 세웠는데, 문제는 이 기록이라는 게 하나같이 시궁창. 구체적으로 무엇이냐 하면, '역대 황제들 가운데 처음으로 직접 군사를 지휘한 적 없는 황제'[17] , '역대 황제들 가운데 처음으로 제 손으로 재상에게 정권을 넘겨준 황제' 라는 것들이다. 그리고 셀림의 뒤를 이은 황제 무라트 3세는 셀림의 두 가지 기록 가운데 앞의 것을 충실히(...) 본받았고, 다시 그 뒤를 이은 메흐메트 3세는 두 번째 것을 본받았다. 그래도 위에서 언급됐듯 셀림 2세의 제위 기간까지는 부황의 치세를 이어받아 제국의 전성기가 지속되었다. 본격적으로 국정에 노란불이 켜진 건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가 암살당하고 태후가 된 눌바누 술탄이 국정에 개입하기 시작한 무라트 3세 시기.
개인적인 성격은 너그럽고 관대한 편이었다고 한다. 어머니의 평생 연적이자 황위 경쟁자였던 이복형 무스타파의 모친인 마히데브란 술탄이 무스타파 처형 후 지방에서 궁핍하게 살고 있는걸 보고 그녀의 지위를 회복시켜 준 후 그녀가 죽을 때까지[18] 극진히 대우 받으며 살 수 있게 해줬으며 초라하게 묻힌 이복형 무스타파의 묘를 중건했던 것도 셀림 2세였다.
4. 어이 없는 죽음
오스만 제국의 11대 술탄이었던 셀림 2세가 사망한 이유가 황당한데 술에 취한 채 목욕을 하기 위하여 하렘의 후궁들과 같이 목욕탕에 들어갔다가 미끄러져 머리를 크게 다치는 바람에.... 사실 목욕탕은 집 안에서 가장 위험한 장소라고들 하고 현대에도 자주 일어나는 사고지만 세계 최강의 대국을 다스리는 지도자의 죽음으로서는 역사 속에서도 순위권에 손꼽히는 어이없는 죽음이다.[19] 묘지는 하기아 소피아에 있다.
5. 매체에서의 모습
노빈손 시리즈 중 '노빈손의 예측불허 터키 대모험에서 '술에물탄'[20] 왕자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모후인 휴렘 술탄에게 휘둘리는 얼빵한 마마보이지만, 일단 주인공 포지션인지라 노빈손 일행의 도움을 받게 되고 대척점인 무스타파는 능력은 있지만 후궁의 아이라는 열등감 때문에 제위에 대한 집착이 많은 것으로 각색되었다.
소 뒷발로 쥐 잡는 격으로 적들에게 포위당할 뻔하다 오히려 적들을 함정에 몰아넣고, 막판에서도 기지를 한 번 발휘하는 등 어느 정도 성장하기는 한다. 그 덕에 제위에 안착. 하지만 실제 인물의 찌질함을 가릴 수 없었는지 전반적으로 노빈손 일행과 모후 없이는 찌질한 바보 그 자체.
노빈손은 여행에서 돌아온 뒤 술에물탄 왕자가 자신의 도움 덕분에 역사대로 셀림 2세가 된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되고 왕위 때문에 서로 죽이게 된 형제를 보며 씁쓸해한다.
[1] 큰형인 첫째 왕자와 작은형인 둘째 왕자는 일찍 죽었다.[2] 이건 여담이지만, 슬라브계인 어머니 휴렘의 영향으로 인해 머리카락색은 '''금발이었다'''. 이 때문에 금발의 셀림(Sarı Selim)이라는 별명까지 얻었을 정도. 하지만 현대 터키에서도 염색이 아닌 천연 금발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들은 적은 편이다.[3] 당연히 무스타파가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소문은 사실무근이었다. 게다가 무스타파 왕자는 자신의 영지에서 선정을 베풀고 있었기에 그가 처형당한 후 무스타파의 부하들과 영지의 주민들은 불만을 품었고, 당시 발칸 반도의 한 지방관은 자신의 이름도 '무스타파' 라는 점을 이용하여 사실 무스타파 황자는 죽지 않았고 자신이 바로 그라며 '''진짜 반란'''을 일으켰다.[4] 아버지의 발뒤꿈치도 따라가지 못한 셀림과는 달리 무스타파는 군주로서의 자질이 상당히 뛰어났던 모양이다.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주재 대사였던 오기에르 기셀린 드 뷰스벡(Ogier Ghiselin de Busbecq)은, 무스타파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을 정도이기 때문. '쉴레이만의 아들들 가운데 무스타파라는 자가 있는데, 놀라울 정도로 잘 교육받았고 사려 깊으며 이제 24세 또는 25세이기에 제위에 오를 만한 나이가 되었다. 부디 신께서 그런 힘을 가진 바르바리인이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도록 해주시길 바랄 뿐이다.' 다만 뷰스벡이라는 인물은 오스만빠 기질이 다분했던 인물이라는 점은 유의.[5] 지한기르는 총명하기는 했으나 몸이 약했으므로, 원래부터 황위 계승자로서는 부적격 판정을 받고 있었다. 쉴레이만이 평생 열 세 번의 친정(親征)을 단행한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오스만 제국의 황제는 유사시에 친히 군대를 이끌기도 해야 했는데, 지한기르에게는 이게 불가능했기 때문. 다만 그가 죽은 원인은 사료에도 ''슬픔'으로 죽었다' 라는 식이므로, 살해당한 거 아닌가 하는 의문도 살짝 제기할 수 있을 듯 하다.[6] 바예지트도 셀림보다는 능력이 있는 편으로 여겨졌다.[7] 그도 그럴 것이, 바예지트가 받은 영지는 무스타파의 영지였던 아마시아였다. 게다가 무스타파 황자를 자칭한 지방관이 반란을 일으켰을 당시 발칸 반도 전체를 통치하고 있던 인물이 바예지트였는데, 그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억울하게도 쉴레이만은 바예지트가 일을 제대로 했다면 어찌 반란이 일어났겠느냐는 식의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8] 다만 셀림이 스스로 바예지트를 격파한 게 아니라,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의 활약이 절대적이었다. 이때문에 셀림은 황위 계승 분쟁에서 승리했으면서도 황제로서는 막장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9] 이전에 쉴레이만이 타흐마습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던 황족을 앞세워 페르시아를 침공한 일이 있었기에, 바예지트도 비슷하게 활용하려는 것이었던 생각으로 보인다.[10] 사실 이때 사파비 페르시아는 쉴레이만의 오스만군에게 대패하여 큰 타격을 입었던터라 오스만의 요구를 들어줄수밖에 없었다.[11] 오스만 제국의 황제 중 정복전쟁에 친정을 하지 않은 황제는 셀림 2세가 처음이었다.[12] 당연하지만 군사에는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았는데, 이전까지 역대 술탄들 가운데 타국을 공격하든 타국의 공격으로부터 오스만 제국을 보호하든간에 군사에 흥미를 보이지 않은 술탄은 '''없었다.'''[13] 황위 계승 과정에서 셀림이 바예지트를 상대로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재상인 소콜루가 군대를 지휘하여 바예지트를 물리쳤기 때문이다.[14] 하지만 소콜루 파샤는 레판토 해전의 패배는 '''오스만의 수염이 살짝 그을린것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호기롭게 말했고 얼마 되지도 않아 레판토 해전에서 궤멸된 것보다 더 많은 해군 함대를 만들어 내 스페인이 점거하고 있던 튀니지를 점령하였다. [15] 미켈란젤로에 비견될 정도의 대건축가로, 발탁된 것은 쉴레이만 시대. 미마르(mimar, 이 단어 자체가 건축가라는 뜻) 시난의 대표작으로는 쉴레이마니예 모스크와 셀리미예 모스크를 들 수 있는데,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전자는 쉴레이만 시대. 후자는 셀림 시대의 작품이다.[16] 세실리야, 혹은 올리비아라는 이름의 베네치아 공화국의 귀족 여성 출신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지만, 스페인계 유대인이라고 기록한 오스만 제국측 사료도 전해진다.[17] 셀림 2세 이전까지 가장 문치적(文治的)이라고 할 만한 황제로는 치세 30년 내내 내정에만 골몰한 바예지트 2세를 들 수 있지만, 그마저도 치세 초에 친히 군대를 이끌고 몰다비아 원정을 단행한 바가 있다.[18] 셀림 2세의 아들인 무라트 3세 제위 때까지 살았다.[19] 비슷한 황당 사례라면 우에스기 겐신은 화장실에서 똥 싸느라 힘 주다가 (...) 뇌졸중으로 죽었다는 것이 정설이고 무굴 제국의 2대 황제인 후마윤은 도서관 계단에서 떨어져서 실족사했다. 미국 최단임 대통령인 윌리엄 해리슨은 대통령 취임식에서 비를 맞으며 연설하다 폐렴에 걸려 한 달만에 죽었다.[20] 술에 물 탄 듯 허허실실 실이 없는 인물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며, 어머니인 휴렘 술탄의 발음을 살짝 비튼 것 같기도 하다. 원래 노빈손 시리즈가 틈만 나면 등장인물 이름을 언어유희로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