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흐마스프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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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파비 제국의 제 2대 왕(샤)
2. 키질바시의 섭정
사파비 왕조의 건국에 키질바시는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이들의 영향력은 제국 전반에 미쳐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황권에 위협적인 요소로 간주되곤 했다.[2] 그런데다가 타흐마스프 1세가 제위에 오를 때는 나이가 10살(...)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이들의 제국에 대한 영향력은 엄청날 수 밖에 없었다.
처음에 이들은 타흐마스프 1세의 섭정으로서 제국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들은 여러 파벌로 나뉘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들 간의 갈등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고, 이들끼리 섭정 자리를 놓고 수 차례 내전을 벌였다. 하지만 점차적으로 타흐마스프 1세가 장성해짐에 따라 왕과도 갈등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던 중 키질바시의 한 유력 분파가 왕을 납치하려는 충공깽을 시도하였고, 이에 분개한 타흐마스프 1세는 1532년에 결국 이를 제압하고 친정을 하게 된다.
3. 쉴레이만 1세와의 갈등
하지만 이것으로 제국의 위기는 끝났다고 볼 수는 없었다. 당시 사파비 왕조는 시아파 계열이었기 때문에 수니파 계통인 오스만 제국과의 갈등이 선황 이스마일 1세부터 현재진행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반적으로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은 수세로 몰릴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찰디란 전투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페르시아는 당시의 오스만 제국과는 달리 화약 무기를 제대로 갖추지 못해 전투력에서 오스만 제국에 비해 한참 미흡했기 때문이다.[3]
그렇기 때문에 1534년에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으로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러한 오스만 제국과 맞서서 타흐마스프 1세는 정면 전투를 벌이기보다는 청야전술로 오스만 제국을 상대하였다. 그 결과로 메소포타미아 전역은 상실했지만 수도인 타브리즈의 상실은 겨우 막게 되었다.[4]
1548년, 쉴레이만 1세는 재차 이란 북서부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쉴레이만 1세가 이란 북서부[5] 에서 싸우는 동안, 타흐마스프 1세와 갈등 관계에 있었던 그의 동생과 그의 세력을 이용하여 이란 고원 중부까지 진격하였다. 하지만 타흐마스프 1세는 첫번째 전투때와 마찬가지로 청야 전술을 통해서 타브리즈 인근에서 격렬하게 저항하였고, 이란 지역으로 진입한 그의 동생의 군대는 현지 주민들의 격렬한 저항을 통해 격퇴하였다.
3번째 격돌은 1553년에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 때에는 오히려 페르시아가 1,2차 때와의 전투와는 달리 타브리즈 부근이 아닌 현재 터키 동북부 지역에서 싸워 한때는 이 지역을 차지하는 등 한층 공세적으로 싸우게 되었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이 다시 이 지역을 탈환하게 되었고, 무엇보다 아직은 오스만 제국군이 더 강했기 때문에 전쟁의 양상은 알 수 없게 되었다.
결국 1555년 아마시아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종주권을 인정받았지만, 그 대신 사파비 왕조는 수도였던 타브리즈와 그 주변의 지역의 지배권을 인정받게 되었고 20년 간의 평화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또한 이 해에 그는 수도를 타브리즈에서 조금 더 국경과 떨어져 있는 카즈빈으로 천도하게 되었다.
4. 무굴 제국과의 관계
이렇듯 서쪽에서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상실하게 되었지만, 동쪽에서 무굴 제국의 2대 황제인 후마윤이 아프간 군벌과의 전쟁에서 패하게 되어 사파비 왕조로 망명을 하게 되었다. 타흐마스프 1세는 후마윤에게 군사적 지원을 해 주는 대신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지역을 양도받게 되었다.
5. 말년
이렇게 수 차례의 내우외환을 겨우 넘기게 되었지만 이번에는 또 후계자 계승 문제를 놓고 황자들 간의 갈등이 생기게 되었다. [6] 당시 유력한 차기 왕 후보로는 3명이 있었는데 후에 3대 샤로 즉위하게 되는 이스마일 2세, 4대 샤로 즉위하게 되는 무함마드 호다반다, 그리고 하이다르 황자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후계자 문제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다가 죽기 직전에야 하이다르를 후계자로 한다는 말을 남기고 1576년에 사망하게 되었다. 이 결과 그가 사망한 이후 황자들 간의 내분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 문제에 키질바시가 또 다시 개입함으로써 한동안 또다시 제국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으며, 그 틈을 노린 오스만 제국이 다시 전쟁을 걸어와 캅카스 지방은 물론 이전 수도인 타브리즈를 비롯해 이란 서부까지 모조리 빼앗기게 된다. 이 영토는 5대 왕인 아바스 1세 때까지 수복하지 못했다.
[1] 역대 사파비 왕조의 왕 중 재위기간이 51년으로 가장 길다.[2] 국가로 치자면 개국공신과 비슷한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오스만 제국의 역사에 대해 어느 정도 안다면, 튀르크계 개국공신이랑 거의 흡사하다고 보면 된다. 실제로 오스만 제국이 튀르크계 개국공신의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데브시르메 제도를 도입했듯이, 타흐마스프는 캅카스인들을 정계에 참여시키기 시작한다.[3] 사실 쉴레이만과의 전쟁이 시작된 1532년 당시에는 이런 부분도 문제였지만, 키질바시족의 세력을 막 제압한 직후라는 게 더 큰 문제였다. 가까스로 내전을 끝냈나 했더니, 오스만 제국이 쳐들어온 격이었던 것.[4] '겨우 막게 된' 것이 아니라, 일단 함락되었지만 오스만 제국군이 후퇴하면서 자연스럽게 수복한 것이 실상에 더 가깝다. 실제로 타흐마스프는 1555년에 수도를 타브리즈에서 보다 동쪽에 위치한 카즈빈으로 옮겼고, 사파비 제국의 5대 왕인 아바스 1세는 1598년에 더 동쪽에 위치한 이스파한으로 다시 옮겼다.[5] 당시 이 곳은 사파비 왕조의 수도인 타브리즈가 있었던 곳이었다.[6] 위에서 소개했듯이 타흐마스프는 캅카스인들을 정계에 참여시켜 키질바시족을 견제하려 했는데, 타마습의 정책이 너무 급진적이었기에 키질바시족과 캅카스인 사이의 싸움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또 타흐마스프는 캅카스인도 후궁으로 맞이하여, 키질바시족 여자가 낳은 황자를 다음 왕으로 할 것인가, 캅카스인의 피를 받은 황자가 다음 왕이 될 것인가에 대해 분쟁이 안 나면 그게 이상한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