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영박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문영박'''
'''文永樸'''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문박(文樸)
'''자 / 호'''
장지(章之) / 수봉(壽峰)·수백당(守白堂)
'''본관'''
남평 문씨[1]
'''출생'''
1880년 8월 3일
경상도 대구도호부 인흥면 본리동
(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인흥마을)[2]
'''사망'''
1930년 12월 18일
경상북도 달성군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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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문태갑 전 국회의원과 문희갑대구광역시장은 그의 손자이다.

2. 생애


문영박은 1880년 8월 3일 경상북도 달성군 화원면 본리동(현 화원읍 본리리) 인흥마을의 남평 문씨 본리 세거지에서 아버지 문봉성(文鳳成)과 어머니 현풍 곽씨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3] 일찍이 손정은(孫廷誾)과 이종기(李鍾杞)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그는 달성군의 유학자이자 부호로,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전국 각지를 왕래하면서 여러 방법으로 군자금을 송금했다. 재산을 처분해 마련한 자금을 임시정부 요원을 통해 보내기도 했고, 중국으로부터 책을 구입하는 방법으로 전달하기도 했다. 일제는 이러한 그의 임시정부에 대한 자금 후원을 탐지하고 1927년 2월 그의 가택을 수색한 뒤 그와 장남 문원만(文元萬)[4]을 체포해 28일 동안 대구 경찰서에 구금했다. 하지만 경찰은 그가 임시정부에게 군자금을 지원했다는 증거를 확보하지 못해 석방 조치했다. 이후에도 극비리에 임시정부에게 군자금을 보내던 그는 1930년 12월 18일에 사망했다.
임시정부는 문영박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하자 1931년에 이교재(李敎載)를 국내에 밀파하여 그를 애도하는 추조문(追弔文)과 특발문(特發文)을 보냈다. 그러나 이교재는 경찰의 삼엄한 감시 때문에 이를 전달하지 못하고 자택 천장에 감춰뒀는데, 1963년 이교재의 후손들이 집수리를 위해 천장을 뜯어내던 중 이 문서를 찾아내면서 비로소 세상에 드러났다. 추조문에는 <대한국춘추주옹(大韓國春秋主翁)이란 존칭이 사용되었고, 특발문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기재되었다.

임시정부가 세워진지 13년이 됐지만, 아직도 우리가 독립하지 못한 것은 일제의 탄압 때문이다. 우리 임시정부가 세워진 것은 동양평화와 유신(維新)을 크게 내세워 세계평화를 유지하는데 기여하기 위해서이다. 고인(故人)이 이러한 임시정부를 돕기 위해 의연금을 보내 주어 무궁한 국가발전에 밑거름이 된 것을 감사한다.

임시정부가 문영박에게 보낸 추조문과 특발문은 남평 문씨 본리 세거지의 수봉정사(壽峰精舍)에 보관되었으며, 문화재청은 2020년 2월 6일 두 문서를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했다.
한편 문영박은 영남 일대의 유학자로서 한서(漢書)만 1만여 권을 소장하고 있었으며, 인수문고목록(仁壽文庫目錄)을 편찬했다. 현재 수봉정사에는 만권당(萬卷堂)이라는 서고가 남아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문영박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 의안공파-이곡-참의공-의곡파 31세손.[2] 마을 일대가 남평 문씨 본리 세거지라는 이름으로 대구광역시 민속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어 있다.[3] 현재 그의 출생지 397번지에는 그의 생가인 수봉고택이 남아있다.[4] 족보명 문시채(文峕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