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희갑

 

'''문희갑의 역임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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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회의원 (대구 서구 갑)'''
제13대
정호용[15]

'''제13대
문희갑'''

제14대
정호용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
'''노태우 정부'''
초대
박승

'''2대
문희갑'''

3대
김종인
''' 대한민국 ''' ''' 경제기획원 ''' ''' 차관 '''
<color=#373a3c> ''' 전두환 정부 '''
'''노태우 정부'''
15대
김흥기

16대
''' 문희갑 '''

17대
이형구

'''11-12대 대구광역시장
문희갑
文熹甲 | Moon Hi-gab
'''
'''출생'''
1937년 6월 9일 (86세)
경상북도 달성군 화원면 본리동
(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1]
'''본관'''
남평 문씨[2]
'''학력'''
경북고등학교 (졸업)
국민대학교 (법학 / 학사)
서울대학교 (행정학 / 석사)
'''가족'''
부인 정송자[3], 슬하 3녀
'''의원 선수'''
'''2'''
'''의원 대수'''
12, 13
'''현직'''
푸른대구가꾸기시민모임 이사장
'''경력'''
제5회 행정고시 합격
경제기획원 방위예산담당관
국방부 예산편성국장
국보위 입법회의 전문위원
경제기획원 경제개발예산심의관
경제기획원 예산실장
민주정의당 국책연구원 정책연구실장
제12대 국회의원(전국구)
경제기획원 차관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
제13대 국회의원(대구 서구 갑)
제11-12대 대구광역시장
국민대학교 총동문회장
1. 개요
2. 생애
2.1. 정치 활동
2.2. 정계 은퇴 이후
3. 선거 이력
4. 둘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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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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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전 관료, 정치인. 독립유공자 문영박의 손자이며, 문태갑 전 국회의원은 그의 사촌 형이다.
대구시의 '''폭염을 낮추는 전환점'''을 마련한 인물.

2. 생애


1937년 경상북도 달성군 화원면(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인흥마을의 남평 문씨 본리세거지에서 대구우체국장을 지낸 아버지 문긍만(文亘萬)[4]과 어머니 재령 이씨 이재호(李在浩)의 딸 사이의 4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경북고등학교, 국민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다. 이후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경제관료로 근무하였다. 1980년 신군부가 창설한 국가보위입법회의에 참여하였다. 이후 경제기획원 예산실장을 역임하였다.
경제기획원 예산실장 시절인 1984년에는 방위비를 그동안 유지되어온 '''"GNP 대비 6%"'''보다[5] 낮게 책정했는데, 이에 합참의 육군장성 2명이 권총을 들고 난입해 항의하는 곤욕을 겪기도 했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같은 해 7월 경제기획원 차관에 임명되어 전국구 국회의원직을 사임하였다. 1986년 남북 경제회담 수석대표에 임명되었다.
1988년 노태우 정권이 출범하자 같은 해 12월부터 1990년 초까지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을 역임하였다. 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토지공개념도 도입하려다 땅투기에 열 올리던 재벌 총수들에게 빨갱이 소리도 들었다. 1989년 조순 경제부총리와 함께 토지 공개념 3개법안 입법을 주도하여 통과시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택지소유상한제, 개발이익환수제, 토지초과이득세 강력한 투기억제책이었는데, 야권의 지지를 받았지만 오히려 여당인 민정당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이 법안은 10년 뒤에 모두 '''"법 설계 측면에서"'''[6] 위헌판결을 받았다. 「택지소유상한제」와 「토지초과이득세」는 지나친 규제라는 이유로 헌법불합치 판정을 받고 1998년 폐지됐다. 「개발이익환수제」는 2002년 1월부터 부과를 중지했다. 수도권에 대한 부담금 부과는 2004년부터 중지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지공개념 정책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으며, 이를 지지하는 학자들이 여전히 세를 얻고 있다. 토지공개념 관련 경향신문 칼럼(2020-08-03)
또한 분당, 일산 등 1기 신도시 건설을 주도하여 부동산 폭등 억제정책을 주도하였으며 무주택 서민들의 주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국 도시에 영구임대주택 20만 호 건설도 추진하였다.
영종도에 동북아 허브공항을 건설하는 계획을 수립하였으며 이것이 오늘의 인천국제공항의 기원이다. 경부고속철도 건설을 주도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 KTX의 기원이다.

2.1. 정치 활동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그 해 7월 경제기획원 차관에 임명되어 전국구 국회의원직을 사임하였다.
1990년 초, 5.18 민주화운동 관련 여론과 청와대의 압력으로 민주정의당 정호용 국회의원이 사퇴하자 치러진 대구직할시 서구 갑 선거구의 재보궐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출마하여 꼬마민주당 백승홍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7]. 하지만 백승홍 후보가 무려 42.5%를 득표하면서[8] 겨우 9% 차이로 당선되었기 때문에 여당 텃밭 대구에서 3당 합당의 시너지 효과조차 거두지 못한 찜찜한 의정복귀라는 평을 들어야 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무소속으로 출마한 정호용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복당한 정호용에게 지구당위원장 자리도 내 주게 되자 이에 대한 반발로 1995년 민주자유당을 탈당하였다.

2.1.1. 대구광역시장 재임


민주자유당을 탈당했던 1995년에 치러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대구광역시장 선거에 출마하였다. 그럼에도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로 TK지역에서 문민정부에 대한 반감이 거세진 상황에 힘입어 민주자유당 조해녕 후보[9] 등을 꺾고 당선되었다.
경제관료 경력을 내세워 '대구의 분노 선거로 보여주고 대구의 자존심 경제로 살립시다' 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재임 기간 동안 경제시장을 표방했으며, '''역대 민선 대구광역시장 중 유일하게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난 시장'''[10]이기도 하다.
다만 지난날의 정책 입안 행보와 별개로,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회창을 지지하여 새로 개편된 "친정" 한나라당에 입당한다.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한나라당 후보로 대구광역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대구광역시장 재임 당시 많은 반발을 무릅쓰고 '''"도심지의 노른자위 땅에"''' 2.28기념중앙공원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을 조성하고 옛 중앙공원을 경상감영공원으로 재정비하고, 나무를 심는 등 대대적인 녹화사업을 실시하였다. 문희갑 시장의 재임기간 동안 600만 그루가 넘는 나무가 대구 시내 곳곳에 심어졌으며, 후임 대구 시장들도 나무심기 사업을 전개하였다. 이 사업은 단순 경관 개선 효과를 넘어, 2000년대 중반부터 대구가 전국 최서지역에서 벗어나는 기념비적인 현상이 나타나 주목받게 된다.[11]
나무 심기 외에도 대구 도시철도 2호선 착공과 대구공항의 국제화를 이루어냈으며, 신천대로의 보조격 도로 신천동로를 건설했으나 복잡한 구조로 인해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무난하게 시장 직무를 수행했으나, 밀라노 프로젝트로 적지않은 예산이 대구시로 유입되었음에도 막상 제대로 써먹지 못했다고 비판받기도 했다.
2002년 비자금 파동 등이 불거지며 2002년 3월 곧 있을 지방선거에 출마하지 않을 것을 선언했다. 결국 시장 임기 말엽인 2002년 5월, 지역 건설사인 태왕그룹으로부터 9천여만원의 뇌물을 수수한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5월 말 보석으로 풀려났으나 10월 23일 대구지방법원으로부터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2심에서 집행유예로 감형되며 출소는 했으나, 형 확정일로부터 피선거권이 10년간 제한됨에 따라 정계를 떠나게 되었다.

2.2. 정계 은퇴 이후


정계 은퇴 후에도 대구에서 거주 중이다.
2015년 40대 이상 대구시민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가운데 역대 대구 민선시장 중 일을 잘한 시장 1위에 꼽혔다. 37.6%의 지지도를 받아서 2위인 김범일 시장(19.6%)보다 2배가량 지지도가 나왔다. 링크
그래서인지, 정계 은퇴 후, 정당과 지역구를 가리지 않고 러브콜을 받고 있다.문희갑 전 시장 모시기 러브콜 쇄도-2015년12월29일 대구일보 기사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2016년 1월 15일, 김부겸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선거사무실을 찾아 덕담을 건네기도 하였다. 김부겸 선거사무실 찾은 문희갑 前 대구시장
대구시 녹지 조성사업으로 도시 경관 개선과 폭염을 낮추는 전환점을 마련한 인물로, 정계에서 은퇴한 현재는 푸른대구[12] 가꾸기시민모임 이사장을 맡고 있다.

3. 선거 이력


  •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85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53번)
'''민주정의당'''
-
'''당선'''
'''초선'''
1990
4·3 재보궐선거 (대구 서 갑 국회의원)[13]
'''민주자유당'''
'''41,970 (51.55%)'''
'''당선 (1위)'''
'''재선'''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대구 서 갑)
민주자유당
26,763 (27.30%)
낙선 (2위)

1995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대구광역시장)
'''무소속'''
'''383,272 (36.79%)'''
'''당선 (1위)'''
'''초선'''[14]
1998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대구광역시장)
'''한나라당'''
'''570,167 (71.98%)'''
'''당선 (1위)'''
'''재선'''

4. 둘러 보기





[1] 남평 문씨 집성촌이다.[2] 의안공파-이곡-참의공-의곡파 33세손. 족보명은 문희좌(文熙佐).[3] 2018년 작고.[4] 족보명 문형채(文馨采).[5] 일본 <세카이(世界)>誌 야스에 료스케 편집국장이 자신의 칼럼에 "GNP 6% 이상을 책정하면 국가 살림이 거덜나는 건 시간문제"라는 표현을 넣기도 했을 만큼, GNP 기준 시절 국방예산 책정의 상한선으로 간주되었다.[6] 즉 법안 제정 취지 자체는 헌재에서도 인정했다는 얘기이다.[7] 백승홍은 후일 15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서구 갑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나 16대 총선부터 서구가 단일선거구로 통합되어 중구에서 출마, 재선 의원을 지냈다.[8] 2005년 대구 동구 을 재선거에 출마한 열린우리당 이강철 후보가 득표율 44.05%를 기록하기 전까지 대구 지역 역대 범민주계 후보 중 가장 높은 득표율이었다.[9] 당시 4위(...)로 낙선했다. 조해녕 후보는 이후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당선되어 2006년까지 대구광역시장을 역임한다.[10] 조해녕경산시, 김범일예천군, 권영진안동시 출신이다.[11] 광주가 대구보다 여름에 더운 것으로 집계되기도 한다. 때문에 박광태 광주광역시장이 대구처럼 나무심기 사업에 나서기도 하였다.[12] ''''푸른 대구 밝은 미래, 세계 속의 패션 대구''''가 문 시장 시정의 서브슬로건이기도 했다. 위 슬로건은 2021년 현재에도 북대구IC 부근 산 중턱에 있다.[13] 전임자 정호용 의원직 사퇴[14] 1997.12.3 한나라당 입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