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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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서위(西魏)의 초대 황제. 묘호는 중종, 시호는 문황제(文皇帝). 휘는 보거(寶炬).
2. 생애
효문제의 손자로 경조왕(京兆王) 원유(元愉)의 아들이다. 508년에 아버지가 기주에서 반란을 일으켜 패사했기 때문에 원보거는 형제들과 함께 종정시(宗正寺)[1] 에 유폐된다. 선무제가 승하하면서 유폐에서 풀렸났다. 정광 연간에 직합 장군의 호를 받았다. 원후와 함께 영혼 태후의 총남들을 살해하려 모의했지만 일이 새어 실패하면서 면직됐다.
528년에 소현후와 같이 530년에 남양왕에 임명된다.
532년(태창 원년) 5월, 태위에 이르렀지만 6월에 사건에 연좌되어 표기 대장군으로 강등되고 왕의 저택에 칩거했다. 7월 다시 태위로 임명되었다.
533년 3월, 상서령 태보로 돌아와 534년에는 중군 사면 큰도독으로 승진했다. 효무제가 우문태를 믿고 장안으로 도망가자 원보거는 효무제에 따라 들어가서 태제 녹상서사에 임명됐다.
534년 윤12월 계사일(양력 535년 2월 3일), 효무제가 우문태에 독살되었다.
535년 정월, 우문태에 의해서 황제로 옹립되어 즉위하고 연호도 대통으로 바꿨다. 낙양에서는 이미 고환이 문제의 동생에 해당하는 효정제를 옹립한다. 이후는 문제의 서위와 효정제의 동위가 병립하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어느 황제도 둘 다 괴뢰 황제였고 서위는 우문태가 동위에서는 고환이 각각 실권을 쥐고 있었다.
문제의 치세 초기에 위기가 있었다. 형주를 동위의 후경에 빼앗기고, 우문태의 옛 본거지인 무천주를 함락 당하는 등 국력의 약화에서 군사면에서의 불리가 이어졌다. 536년에는 관중에 기근이 일어나 많은 사망자를 내는 참상을 보였다.
537년(대통 3년), 우문태가 사원의 싸움에서 고환을 이긴 후에 주위에서도 극복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한 때는 옛 도읍인 낙양을 빼앗는 등의 선전을 보였고, 서위와 동위의 전선은 점차 경색되어 갔다.
547년, 후경의 항복을 받아들여서 하남 대행 대신으로 임명하지만, 같은 해에 후경은 중간에 다시 배반을 하였다.
551년 3월, 장안의 건안전에서 승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