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유(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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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남북조시대 북위의 황족으로 자는 선덕(宣德)이다. 시호인 문경황제는 원유의 아들인 원보거가 서위의 황제로 즉위한 뒤에 올린 시호이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원유는 효문제 원굉과 원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원유는 태화(太和) 21년(497년)에 경조왕으로 책봉되었으며, 도독, 서주 자사로 임명되었다. 팽성왕(彭城王) 원협의 중군부 장사 노양오(盧陽烏)[1] 가 원유의 장사를 겸했으며, 원유가 맡는 주의 업무는 크고 작은 것에 관계없이 노양오에게 위임하였다.
2.2. 선무제 시기
499년에 효무제가 세상을 떠나고 원유의 이복형인 원각이 황제로 즉위하니, 이가 선무제이다. 원유는 선무제가 즉위한 뒤에 호군장군이 되었고 중서감으로 승진하였다.
원유는 문장을 좋아하여, 두루 시부를 지었는데, 많은 재인들을 끌어들여 잔치를 열고, 사방의 유학자들을 빈객으로 삼아 그들을 예우하였다. 그리고 원유는 이때 얻은 비단으로 사치를 부렸는데, 아우인 광평왕 원회와 함께 사치 경쟁을 하다가 곤장을 맞고 기주 자사로 좌천된다.
2.3. 모반과 죽음
원유는 자신과 첩이 순황후로부터 모욕을 받은 것을 참을 수 없었기에, 내심 반역할 뜻을 품었다. 게다가 당시 북위의 권신이었던 고조가 원유 형제들을 모함하였기 때문에, 원유는 더욱 분노하였다. 결국 원유는 508년 고조에 대항하여 기주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하지만 원유의 반란은 전투를 벌이는 족족 패배하였고, 결국 반란이 진압되고 만다.
반란이 진압된 뒤 원유는 첩인 이씨와 자식들과 함께 북위의 수도인 낙양으로 압송되었으며, 압송 도중에 사망한다. 원유는 사후 임조왕(臨洮王)으로 추봉되었으며, 원유의 아들인 원보월이 임조왕의 작위를 이었다.
3. 추존
원유가 죽고 27년 뒤, 북위는 육진의 난 이후 동서로 분열된다. 원유의 아들인 남양왕 원보거가 우문태의 추대를 받아 서위의 황제로 즉위했는데, 이가 서위의 초대 황제인 문제이다. 원유는 북위에서는 비정통 황제로 간주되었으나, 원보거에 의해 문경황제로 추존되었다.
4. 가족관계
선무제 시기, 선무제는 이복동생인 원유를 위해 순황후 우씨의 여동생을 원유의 비로 삼았지만, 원유는 우씨와 상견례도 치르지 않았다. 오히려 원유는 서주(徐州)에 있을 때, 첩 이씨(李氏)를 들였다. 첩 이씨는 본디 성이 양씨(楊氏)로 동군(東郡) 사람이었는데, 원유가 밤마다 그녀의 노래를 들으며 기뻐하고 총애를 주었다.
원유가 서주 자사에서 물러나 환궁한 뒤에 순황후는 이씨를 궁으로 불러들여, 그녀를 비난하고 궁내에서 비구니가 되라고 강제로 명령하였다. 얼마 뒤에 순황후의 아버지인 우경(于勁)은 순황후가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않아서, 이에 표문을 올려 선무제에게 시빈을 늘리도록 권하였다. 더불어 우경은 황후에게 이씨를 원유에게 돌려보내도록 하였고, 이씨와 원유의 옛 정이 다시 돈독해졌다. 원유가 반란을 일으킬 때 첩 이씨는 황후로 책봉되었으나, 반란이 진압되면서, 낙양으로 압송되어 509년에 죽었다.
원유는 첩 이씨와의 사이에서 4명의 아들인 원보월, 원보휘, 원보거, 원보명과 딸 원월명을 낳았다. 원보거는 원유의 셋째 아들이 된다.
[1] 본명은 노연(盧淵)으로 자는 백원(伯源)이다. 양오(陽烏)는 노연의 아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