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모토노 타메토모

 

1. 개요
2. 상세
3. 여담


1. 개요


源爲朝,
1139년 ~ 1170년?
일본 헤이안 시대의 무장. 미나모토노 타메요시(源爲義)의 8남이다. 진서(鎭西), 즉 서쪽을 평정한다는 명목으로 큐슈 지방에서 활약했기에 '''친제이하치로'''(鎭西八郞)라 불렸다.

2. 상세


호겐의 난에서 아버지 미나모토노 타메요시를 따라 28명의 기병을 이끌고, 스토쿠 상황 편에 서서 분전했지만 결국 고시라카와 덴노 편에게 패배했다. 그러나 그 무용을 높이 산 고시라카와 덴노에 의해 목숨은 잃지 않고 이즈 오오시마에 유배되었는데,[1] 결국 귀양지에서 다시 세력을 일으켜 이즈 제도를 사실상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다시 토벌을 당했고, 일본사에서 최초로 할복 자결을 행해 할복의 전통을 만드는 계기를 만들었다.[2] 향년 32세.
비길 데 없는 의 명수로서,[3] 자기 키보다 더 큰 활을 사용해 '''호겐의 난 때는 일격에 두 사람을 꿰뚫거나 말과 사람을 한꺼번에 꿰뚫는 위력을 보였으며, 자결하기 직전에 쏜 한 대의 화살은 300명이 탄 군선을 침몰시켰다는 전설이 있다.'''
일본의 군기소설 《호겐모노가타리》에서 실질적인 주인공 취급을 받고 있는, 일본판 여포.
류큐 왕국의 정사인 《중산세감(中山世鑑》이나 몇몇 기록에서는 자살하지 않고 류큐로 도망가 류큐 왕가의 시조인 슌텐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있다[4][5] 에도 시대의 소설가 교쿠테이 바킨(曲亭馬琴)은 1807년에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친제이하치로 다메토모 외전-진세쓰유미하리즈키》라는 소설을 쓴다. 역사상의 이야기인 전편과 류큐로 넘어간 뒤의 이야기인 후편 중, 후편이 큰 인기를 얻어 여러 권이 나오게 되고 가부키로도 제작되어 작가를 출세시키고, 이후에 쓴 것이 그 유명한 《난소사토미핫켄덴(南總里見八犬傳)》.

3. 여담


여담으로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가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의 8남이라는 설을 지지하는 쪽에서는, 요시츠네가 8남인데도 이 타메토모 때문에 일부러 하치로를 피해 쿠로(九郞)라는 통칭을 썼다고 주장한다. 《헤이케모노가타리》에도 관련 에피소드가 있는데, 야시마 전투에서 전투 도중 활을 물에 빠뜨린 요시츠네가 그 활을 주우려고 물에 뛰어들어 화살을 피해가며 기어이 그 활을 주워오는 것을 보고 가신들이 기가 차서 "적한테 잡히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겨우 활 하나 때문에 바다에까지 뛰어드십니까?"라고 묻자 요시츠네가 "적이 내 활을 주워 당겨보고 '그 유명한 요시츠네가 쓰는 활이라는 게 겨우 이 정도 힘밖에 안 되냐? 요시츠네도 별거 없네ㅋㅋ'하면서 기가 살아서 날뛸까봐 그랬다. '''내가 숙부님(다메토모) 정도 되는 강궁이었으면 차라리 일부러라도 버려서 적이 줍도록 했겠지.'''"라고 대답했다고.
2012년 NHK 대하드라마 다이라노 기요모리에서는 하시모토 사토시가 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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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인의 신장의 야망
100만인의 신장의 야망에 등장.

[1] 이즈는 훗날 요시토모의 아들로 타메토모의 조카이기도 한 요리토모가 유배된 곳이기도 하다. 이즈에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유배지로써 기념비도 세워져 있다.[2] 그 이전에 할복을 시도한 사람이 있긴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공가면서 도적으로 유명했던 후지와라 야스스케. 다만 이 인간은 배는 갈랐는데 안 죽었다.[3] 왼팔이 오른팔보다 4촌(12cm) 정도 더 길었다고.[4] 그러나 이것은 류큐 왕국사츠마에게 복속된 뒤에 일류동조론(日琉同祖論)이 퍼지면서 오히려 류큐지배 국가와 동일시하려는 변방의 심리로 나온 것이라 한국의 족보상에 중국인을 조상으로 설정한 것과 다를 바 없다. 오키나와 역사에서의 떡밥 중의 하나이다.[5] 참고로 이 왕가가 류큐 왕가의 직계는 아니고, 류큐는 다른 혈통의 왕으로 통일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