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르체아 1세
루마니아어: Mircea cel Bătrân (大 미르체아)
생몰: 1355년 ~ 1418년(64년)
재위: 왈라키아 공(1386년(32살) ~ 1395년(40살), 1397년(42살) ~ 1418년(64살))
왈라키아 공 라두 1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386년에 이복형 단 1세가 죽자 그 뒤를 이었다. 단의 죽음에 대해서는 불가리아와 싸우던 중 죽었다는 설과 미르체아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설이 있다.
군주로서 재능이 뛰어났던 미르체아는 즉위 이후 왈라키아 공국을 크게 발전시켰다. 교회를 다수 건설하는 등 정교회를 적극적으로 후원하며 민심을 안정시켰고, 폴란드나 리투아니아 등지에서 온 상인들에게 특권을 주어 외국 상인들을 끌어들이면서 왈라키아를 동유럽 무역의 중심지 중 하나로 만들었다. 또한 그로써 얻은 부를 국방에 투자하여, 도나우 강가 등의 군사적 요충지에 요새를 새로 짓거나 보수했고 농민들로 구성된 군대를 육성했다.
1389년에 오스만의 군주 무라트 1세가 코소보 전투에서 세르비아 공국의 공작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Lazar Hrebeljanović,1329~1389)를 쓰러뜨리고 그 뒤를 이은 바예지드 1세가 왈라키아 공국을 압박하자, 헝가리 왕국, 폴란드, 몰다비아 공국 등 주변국들과 손을 잡고 오스만에 대항했다.
5년 후인 1394년에 바예지드 1세는 왈라키아를 정복하기 위해 5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국경을 넘었다. 당시 1만 명의 군사만을 모을 수 있었던 미르체아는 게릴라 전술로 그에 맞섰으며, 로비네 전투에서 궁수를 적절히 활용하는 전술로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오스만의 신하국으로서 참전한 세르비아군이 용맹하게 싸운데다 군대의 수적 차이가 컸던 탓에 왈라키아군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고, 결국 미르체아는 이듬해인 1395년에 일가를 이끌고 동맹국인 헝가리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계기로 셋째 아들인 블라드 용공은 그대로 헝가리 왕국에 남겨진다.
1394년, 헝가리 왕 지기스문트는 자국을 위협하는 오스만 제국에 맞서기 위해 십자군을 결성하자고 호소했다. 교황 보니카피우스 9세는 이에 응하여 십자군을 선포했고, 신성로마제국, 헝가리와 프랑스를 주축으로 한 원정군이 결성되었다. 하지만 적을 유리한 지형으로 끌어내어 공격해야 하고 무모한 돌격은 삼가야 하며 특히 오스만군을 상대해 본 경험이 있는 왈라키아 보병대를 전방에 내세워야 한다는 미르체아나 지기스문트의 의견과 달리 프랑스의 기사들은 자신들이 가장 먼저 적에게 정면으로 돌격할 것이라고 고집을 부렸고, 결국 기사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졌지만 이는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십자군이 대패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진열의 후방에 위치하고 있던 미르체아는 전력을 온존한 채 전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프랑스 기사들은 사실상 전멸이라고 해도 좋을 타격을 입었고 헝가리군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1397년, 미르체아는 자신의 전력에 헝가리의 지원을 받아 왈라키아로 진격해 공작 블라드 1세를 몰아내고 왈라키아 공작 자리를 되찾았다. 그리고 이듬해에 바예지드 1세가 앙카라 전투에서 티무르에게 패하자 오스만 제국은 바예지드의 아들 4형제가 하나뿐인 옥좌를 차지하기 위해 일으킨 내전에 휩싸이게 되었고, 미르체아는 이를 기회로 오스만의 국경지대를 공격해 영토를 일부 확장했다.
1413년, 바예지드의 셋째아들인 메메드 1세가 오스만 제국을 다시 통합했다. 그는 10년 간의 내전으로 주저앉은 국력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외교 면에서는 현상 유지 정책을 펴기로 결정했는데, 왈라키아를 무작정 정복하려 했던 바예지드와 달리 메메드는 신하국으로 삼는 선에서 만족한다는 것을 안 미르체아는 오스만에 공물을 바치기로 결정했다.
1418년, 도합 29년 동안 공국을 통치한 미르체아는 향년 64세로 세상을 떠났다.
루마니아의 감독 세르지우 니콜라에스쿠가 1989년에 제작한 전기 영화 'https://www.youtube.com/watch?time_continue=1&v=aKRWTJ_TB24|미르체아 셀 바트란]]' 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전기 영화라지만 실제 사실에 집중하기보다 감독 나름대로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에 치중한 작품으로, 1417년 당시에는 태어나지도 않았던 블라드 3세(1431 ~ 1476)가 7살쯤 되는 어린아이로 등장하여 시청자를 대변한다거나, 미르체아가 즉위하기 전에 죽었던 단 1세(1354~1386)가 미르체아가 잠시 왈라키아에서 쫓겨났을 무렵에 공작 자리에 앉는 것은 물론 1417년 무렵에 멀쩡하게 살아있기까지 하다.
다만 화면의 구성이나 색감, 구도는 매우 훌륭하여, 보기에는 즐거운 영화다.
생몰: 1355년 ~ 1418년(64년)
재위: 왈라키아 공(1386년(32살) ~ 1395년(40살), 1397년(42살) ~ 1418년(64살))
1. 개요
왈라키아 공국의 군주. 14세기 후반부터 15세기 초 오스만 제국이 북상하던 시기에 왈라키아 공국을 30여년간 다스려 공국을 안전히 지켜낸 인물로, 그 업적으로 인해 '''미르체아 대공(Mircea cel Mare)'''이라 불린다. 하지만 즉위 과정에서 형을 살해했다는 의혹도 있어, 이후 가문끼리의 복수가 시작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2] ."가장 용맹하고 유능한 기독교 군주"
'''레운클라비우스'''[1]
2. 생애
2.1. 즉위와 초기 통치
왈라키아 공 라두 1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386년에 이복형 단 1세가 죽자 그 뒤를 이었다. 단의 죽음에 대해서는 불가리아와 싸우던 중 죽었다는 설과 미르체아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설이 있다.
군주로서 재능이 뛰어났던 미르체아는 즉위 이후 왈라키아 공국을 크게 발전시켰다. 교회를 다수 건설하는 등 정교회를 적극적으로 후원하며 민심을 안정시켰고, 폴란드나 리투아니아 등지에서 온 상인들에게 특권을 주어 외국 상인들을 끌어들이면서 왈라키아를 동유럽 무역의 중심지 중 하나로 만들었다. 또한 그로써 얻은 부를 국방에 투자하여, 도나우 강가 등의 군사적 요충지에 요새를 새로 짓거나 보수했고 농민들로 구성된 군대를 육성했다.
2.2.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1389년에 오스만의 군주 무라트 1세가 코소보 전투에서 세르비아 공국의 공작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Lazar Hrebeljanović,1329~1389)를 쓰러뜨리고 그 뒤를 이은 바예지드 1세가 왈라키아 공국을 압박하자, 헝가리 왕국, 폴란드, 몰다비아 공국 등 주변국들과 손을 잡고 오스만에 대항했다.
5년 후인 1394년에 바예지드 1세는 왈라키아를 정복하기 위해 5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국경을 넘었다. 당시 1만 명의 군사만을 모을 수 있었던 미르체아는 게릴라 전술로 그에 맞섰으며, 로비네 전투에서 궁수를 적절히 활용하는 전술로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오스만의 신하국으로서 참전한 세르비아군이 용맹하게 싸운데다 군대의 수적 차이가 컸던 탓에 왈라키아군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고, 결국 미르체아는 이듬해인 1395년에 일가를 이끌고 동맹국인 헝가리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계기로 셋째 아들인 블라드 용공은 그대로 헝가리 왕국에 남겨진다.
2.3. 니코폴리스 십자군
1394년, 헝가리 왕 지기스문트는 자국을 위협하는 오스만 제국에 맞서기 위해 십자군을 결성하자고 호소했다. 교황 보니카피우스 9세는 이에 응하여 십자군을 선포했고, 신성로마제국, 헝가리와 프랑스를 주축으로 한 원정군이 결성되었다. 하지만 적을 유리한 지형으로 끌어내어 공격해야 하고 무모한 돌격은 삼가야 하며 특히 오스만군을 상대해 본 경험이 있는 왈라키아 보병대를 전방에 내세워야 한다는 미르체아나 지기스문트의 의견과 달리 프랑스의 기사들은 자신들이 가장 먼저 적에게 정면으로 돌격할 것이라고 고집을 부렸고, 결국 기사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졌지만 이는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십자군이 대패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진열의 후방에 위치하고 있던 미르체아는 전력을 온존한 채 전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프랑스 기사들은 사실상 전멸이라고 해도 좋을 타격을 입었고 헝가리군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2.4. 복위기
1397년, 미르체아는 자신의 전력에 헝가리의 지원을 받아 왈라키아로 진격해 공작 블라드 1세를 몰아내고 왈라키아 공작 자리를 되찾았다. 그리고 이듬해에 바예지드 1세가 앙카라 전투에서 티무르에게 패하자 오스만 제국은 바예지드의 아들 4형제가 하나뿐인 옥좌를 차지하기 위해 일으킨 내전에 휩싸이게 되었고, 미르체아는 이를 기회로 오스만의 국경지대를 공격해 영토를 일부 확장했다.
1413년, 바예지드의 셋째아들인 메메드 1세가 오스만 제국을 다시 통합했다. 그는 10년 간의 내전으로 주저앉은 국력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외교 면에서는 현상 유지 정책을 펴기로 결정했는데, 왈라키아를 무작정 정복하려 했던 바예지드와 달리 메메드는 신하국으로 삼는 선에서 만족한다는 것을 안 미르체아는 오스만에 공물을 바치기로 결정했다.
1418년, 도합 29년 동안 공국을 통치한 미르체아는 향년 64세로 세상을 떠났다.
3. 아들
- 미카엘 1세(생몰년: 1408전? ~ 1420, 재위: 1415 ~ 1420): 적장자로 바로 다음 공작이었으나, 오스만 제국과 싸우다 전사했다.
- 라두 2세(생몰년: ? ~ 1427): 서자로서 형인 미카엘 1세의 사후에 공작의 자리에 오른 단 2세와 1420 ~ 1427년까지 8년 동안 공작 자리를 둘러싸고 다툼을 벌이며 4번 재위했다.
- 블라드 드라쿨: 서자로서 블라드 가시공의 아버지(1395년 이전 ~ 1447).
- 알렉산더 1세 알데어.(1397 ~ 1436, 40세)
4. 대중문화에서
루마니아의 감독 세르지우 니콜라에스쿠가 1989년에 제작한 전기 영화 'https://www.youtube.com/watch?time_continue=1&v=aKRWTJ_TB24|미르체아 셀 바트란]]' 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전기 영화라지만 실제 사실에 집중하기보다 감독 나름대로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에 치중한 작품으로, 1417년 당시에는 태어나지도 않았던 블라드 3세(1431 ~ 1476)가 7살쯤 되는 어린아이로 등장하여 시청자를 대변한다거나, 미르체아가 즉위하기 전에 죽었던 단 1세(1354~1386)가 미르체아가 잠시 왈라키아에서 쫓겨났을 무렵에 공작 자리에 앉는 것은 물론 1417년 무렵에 멀쩡하게 살아있기까지 하다.
다만 화면의 구성이나 색감, 구도는 매우 훌륭하여, 보기에는 즐거운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