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소보 전투
1. 1차 코소보 전투(1389)
1389년 6월 15일에 오스만 베이국과 세르비아 - 보스니아 연합군 간에 치러진 대 전투. 양측의 사령관인 무라트 1세와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 (Лазар Хребељановић)가 모두 전사하였을 만큼 치열하고도 처절한 전투였다. 14세기 중반부터 남동 유럽의 패자였던 세르비아 공국이 몰락하고 오스만이 새로운 최강자로 떠오르게 해준 전투이다.
한편, 전투가 벌어진 코소보는 19세기 들어 세르비아인 민족주의의 상징이 되었는데, 주민 대다수는 그에 상관없는 알바니아인이었던 탓에 서로 간의 민족분규로 번지기도 하였다.
1.1. 배경
스테판 두샨 사후 제국은 분열되었다.
1.1.1. 세르비아 제국의 분열
1350년에 솔룬을 정복하며 세르비아 제국의 절정을 이르게 하였던 스테판 우로시 4세(스테판 두샨)는 소아시아에서 무섭게 세력을 확장해 나가던 오스만 베이국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오르한 1세의 아들과 자신의 딸을 결혼시켜 동로마 제국에 대한 공동전선을 제안하였으나 더 큰 야심이 있던 오르한은 그를 거절하였다. 1351년에 오스만 군대는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유럽에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이듬해, 디모티카 전투에서 오스만 군대는 세르비아군에 대승을 거두었다. 이에 1354년, 스테판 두샨은 아비뇽에 사절을 파견하여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는 대신 기독교 국가들의 대오스만 전선 지휘자로 인정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협상은 결렬되었다. 그리고 1355년 12월 20일, 제국의 미래를 걱정하던 스테판 두샨은 불확실한 이유로 사망하였다.
두샨의 뒤를 이은 외아들 스테판 우로시 5세는 19세의 젊은 왕이었지만 정치적으로 무력하였다. 그는 부왕 대에 급격히 늘어난 영토를 통제하는데에 실패하였고 제국은 급속히 분열되었다. 숙부이자 스테판 두샨의 이복동생인 시메온 우로시는 테살리아와 에피로스를 점거한 후 1360년에 칭제한 것을 시작으로 각지의 영주들이 독립하였다. 발시치 가문이 제타(몬테네그로) 및 라슈카(세르비아 중남부) 지역을 차지하였고 므르냐브체비치 가문은 마케도니아 지방을 중심으로 서쪽으론 오흐리드 호수, 남쪽으론 할키디키 반도에 이르는 영역을 장악하였다. 후자의 영토는 부카신, 우글레샤 형제가 다스렸는데 1365년에 스테판 우로시 5세로부터 각각 공동통치자와 데스포티스 (δεσπότης, 친왕) 호칭을 얻어내었다.
1.1.2. 마리차 강 전투
세르비아 제국의 분열은 1354년의 갈리폴리 점령 이후 트라키아 지방을 중심으로 동남부 유럽을 정복하던 오스만 베이국에게 기회가 되었다. 에디르네와 플로브디브를 점령한 무라트 1세는 그리스와 세르비아로의 진격로 상에 위치한 므르냐브체비치 가문과 마리차 강을 전선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1371년, 랄라 샤힌 파샤와 에브레노스 베그가 이끄는 오스만 군대는 세르비아로 진격하였고 9월 26일 새벽에 마리차 강을 건너 츠르노멘에 주둔해 있던 세르비아 진영을 습격하였다.
세르비아 군대는 무너졌고 부카신과 우글레샤가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3달 뒤인 1371년 12월 2일에 스테판 우로시 5세가 사망하며 세르비아 황가인 네마니치 가문의 대가 끊겼다. 이후 부카신의 아들인 마르코 므르냐브체비치 (Марко Мрњавчевић)가 형식적인 왕이 되었으나 그의 영토는 오흐리드 일대에 그쳤다. 그외에 발쉬치 가문이 프리즈렌, 부크 브란코비치가 스코페, 그리고 네마니치 가문의 친척인 데야노비치 가문이 마케도니아 동부를 차지하였다.
1.1.3. 1380년대 : 전초전
세르비아 남부와 그리스 북부 일대에서 산발적인 전투가 이어졌다.
1.2. 전개
1389년 봄, 오스만 베이국의 무라트1세는 자신의 두 아들 야쿠프, 바예지트와 함께 세르비아 원정에 나섰다. 그해 6월 15일, 성 비토 축일에 라자르 공이 이끄는 세르비아 군대는 현재 코소보의 수도인 프리슈티나 북쪽의 언덕에서 오스만 군대와 마주쳤다. 양측의 규모는 기록마다 다르다. 15세기 초반 피렌체의 한 문서에 의하면 오스만 군은 14만, 세르비아 군대는 7만에 달했다고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이탈리아 특유의 과장법이라고 여긴다. 확실한 것은 오스만 군대가 세르비아 군에 2배에 달하였고 양측 합계 2만여명이 전사했다는 것이다.
1.3. 결과
우리에게 수치스러운 삶보다는 영광된 죽음이 낫다!
ㅡ 라자르 공작이 후퇴를 거부하며 남긴 말
1.4. 영향
민간 설화에 따르면 라자르 공과 경쟁하던 부크 브란코비치 (Вук Бранковић)가 무라트 1세와 내통하여 라자르 공을 배신하였다고 전해진다. 진실은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아들인 주라지 브란코비치(Ђурађ Бранковић)는 1448년의 2차 코소보 전투에서 실제로 후녀디 야노시의 헝가리-왈라키아 연합군을 배신한다.
1.5. 여담
전투 중 살해된 무라트 1세의 영묘가 현재 코소보의 수도인 프리슈티나에 있다. 이곳에는 그의 몸통이 묻혔고 나머지 부분은 당시 수도였던 부르사에 묻혔다고 한다. 오스만 군주 중 유일하게 시신이 따로 매장된 사례.
2. 2차 코소보 전투(1448)
1448년 10월 17일, 헝가리의 군주 후녀디 야노시(42세)와 오스만 베이국의 무라트 2세 간의 전투였다. 1444년에 체결된 오스만측과의 휴전을 충실히 지키던 주라지 브란코비치는 중립을 지켰고 후녀디 야노시의 비난에 시달렸다. 하지만, 전투는 오스만이 이겼고, 후녀디 야노시는 도망자 신세가 된다.
2.1. 배경
2.1.1. 1392, 오스만의 봉신
1차 코소보 전투 이후 세르비아는 현저히 약화되었고 그 틈을 타 헝가리가 침공해 오기도 하였다. 결국 1392년, 오스만 군대가 수도인 스코페까지 함락하자 세르비아는 오스만 베이국의 봉신이 되었다. 1395년, 세르비아의 왕 마르코가 오스만 군대를 도와 왈라키아 공국을 침공했다가 미르체아 1세의 방어전이었던, 로바인 전투에서 전사하며 세르비아 왕위는 사라졌다.
2.1.2. 1402, 세르비아 친왕국 성립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 오스만 군대가 대패하며 혼란에 빠지자 그틈에 세르비아 공국은 자유를 되찾았다.
그리고 그해 8월, 세르비아의 군주 스테판 라자레비치(Стефан Лазаревић)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하여 섭정 황제 요안니스 7세를 알현하였고, 그로부터 '데스포티스' 호칭을 하사받았다.[1] 세르비아 친왕국의 성립이었다.
그해 11월, 스테판은 부크 브란코비치[2] 의 아들인 주라지 브란코비치와의 내전에서 승리하였으나 이후 붉어진 동생 부크와의 불화는 해결되지 못하였다. 결국 부크는 바예지트 1세의 장남 쉴레이만의 궁정으로 피신하였다.
2.1.3. 1403, 헝가리의 봉신
이렇듯 내분을 겪으며 세르비아가 약해진 것을 실감한 스테판은 1403년, 오스만에 대한 공동 전선을 위해 자발적으로 헝가리 왕국의 봉신이 되었다. 그 대가로 세르비아는 드라구틴 ~ 밀루틴 왕 시절인 1284 ~ 1319년간 소유했던 베오그라드 일대를 할양받았다. 이후 오스만 베이국에게 상실한 스코페 대신 베오그라드가 현재까지 세르비아의 수도가 되는 계기였다. 또한 주군인 지그문트 1세가 1411년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즉위하며 스테판은 그의 가신으로서 서유럽 왕후들과도 교류할 수 있었다.
한편, 오스만으로 망명한 부크 라제로비치는 주라지·라자르 브란코비치 형제와 연합하여 스테판과 맞섰고, 1409년 프리슈티나 전투 이후 세르비아는 남북으로 분열되었다. 이후 부크와 라자르는 오스만 내전에 개입, 처음엔 무사와 동맹했다가 쉴레이만 편으로 배신하는 모습을 보였다.
1410년, 쉴레이만은 스테판이 마누엘 2세를 알현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가 있던 틈을 타서 부크와 라자르를 세르비아로 보내어 북부까지 차지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도중에 필리포폴리스(플로브디프)에서 무사의 군대에게 잡혀 배신의 대가로 처형되었다.
2.1.4. 1411, 무사의 세르비아 공격
1411년, 무사는 쉴레이만을 제압하였고 스테판은 동생의 영토까지 차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 보스포루스를 건너온 메흐메트를 격파하며 자신감을 얻은 무사는 돌연 세르비아를 공격하였다.
2.1.5. 1413, 메흐메트와의 동맹
1413년 2월, 무사의 군대가 스탈리치를 포위하였는데 수비대장 프리예즈다는 항복을 거부하고 결사항전을 하다 불타 죽었다. 무사의 군대가 세르비아 남부를 유린하자 스테판은 메흐메트와 동맹하였고 그해 7월, 메흐메트와 세르비아의 연합군이 무사를 패배시켰다. 메흐메트 1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니시 일대에 대한 세르비아 지배권을 인정하였다. 한편 아들이 없던 스테판은 1412년 가을에 자신의 조카이기도 했던[3] 주라지와 화해한 뒤, 그를 후계자로 임명하는 인덕을 발휘하며 세르비아는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2.1.6. 1421, 발시치 가문의 투항과 세르비아의 통일
1421년, 베네치아 공화국에게 몬테네그로 해안을 상실한 제타의 발시치 가문이 스테판에게 투항하였다. 같은 해 발시치 가문의 발샤 3세가 병사하고 제타의 다른 가문인 주라제비치 가문도 데스포티스의 권위에 복속하며 세르비아는 네마냐 왕조 이후로 다시 통일되었다.
2.1.7. 1427, 스테판 라자레비치 사망
그리고 1427년 7월, 세르비아 공국의 중흥 군주 '스테판 라자레비치'가 사망하고, '주라지 브란코비치'가 '데스포티스'로 즉위하였다. 헝가리 왕국과의 주종관계는 유지되었으나 베오그라드 일대는 반환되었다.
한편, 스테판의 죽음 직후 무라트 2세는 세르비아 공국을 공격하여 수도 크루셰바츠를 파괴하였다. 이에 주라지는 오스만에 금화 5만닢의 연공과 기병 1만 1천의 병사를 제공할 의무를 지니는 조건으로 평화를 얻었다.
이후 주라지는 1428년부터 베오그라드에서 동남쪽으로 30여 km 떨어진 다뉴브 강변에 스메데레보 요새를 건립하기 시작, 1430년에 완성되자 그를 수도로 삼았다.
2.1.8. 세르비아의 마지막 복원
1438년, 무라트 2세는 재차 세르비아로 진군하였고 포위 끝에 1439년, 수도 스메데레보가 함락되었다. 세르비아 조정은 베오그라드로 철수, 헝가리 군대와 함께 오스만 베이국의 공격을 격퇴해 내었다. (1440년) 이듬해 주라지는 보스니아의 스테판 북치치와 화해하고 포드고리차 일대에서 전력을 정비하였다. 1443년 9월, 교황의 호소로 결성된 십자군이 주라지와 후녀디 야노시의 지휘 하에 베오그라드에 모였고 니슈 전투에서 오스만 대군을 격파, 니시를 점령하였다.
이 여파로 무라트 2세는 아들 메흐메드(당시 12세)에게 양위한 후 퇴위하였고 스칸데르베그가 오스만 진영을 나와 알바니아 항전군을 이끌게 되었다. 1444년 초에도 오스만 군대는 후퇴하는 십자군을 추격하다가 패하였고(쿠노비카 전투) 그해 8월 15일, 세즈게드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 결과, 비록 오스만 베이국의 속국이었지만 세르비아 친왕국이 복구되었으며 포로 신세였던 주라지 브란코비치의 두 아들들도 풀려났다.
2.1.9. 1444, 바르나 전투
하지만 이교도와의 약속은 지킬 필요가 없다는 교황의 주장에 따라 후녀디 야노시(38세)는 불가리아 왕관을 수여받은 1444년 11월, 흑해 연안의 바르나로 진격하였다. 이 바르나 전투에서 십자군은 대패했으며 헝가리-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3세가 전사하였다.
세르비아 친왕국의 주라지는 이 전투에 참가하지 않으며 오스만 측과의 평화 약속을 지켰기에 한동안 안전하였다. 이후 1446년 요청으로 복귀한 무라트 2세는 알바니아와 그리스 남부 전선에 관심을 기울였고 후녀디 야노시는 헝가리 국왕으로 선출된 후 루마니아 일대를 장악하느라 시간을 보냈다. 1447년 왈라키아 공국에서는 블라드 가시공(17세)이 보이보드로 올랐으나, 직후 후녀디 야노시(41세)에게 패해 도망가는 일이 발생한다.
그리고 1448년 가을, 후녀디 야노시(42세)는 2만 5천에 이르는 헝가리-왈라키아 군대와 다뉴브 강을 건넜다. 오스만과의 아슬아슬함 평화를 유지하던 주라지는 전쟁에 반대하였고, 이에 후녀디 야노시는 그를 적으로 간주하여 세르비아 친왕국 북부를 약탈하며 진군하였다. 그러자 주라지는 오스만 베이국에게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2.2. 전개
1448년 10월, 후녀디 야노시(42세)의 군대는 코소보에 이르렀고, 알바니아의 명장 스칸데르베그(44세)를 기다렸다.
하지만 무라트 2세(45세)는 강행군을 통해 두 군대가 합세하기 전에 4만 대군을 이끌고 전장에 다다랐다.
두 지휘관은 각각 중앙군을 맡아 대치했고 후녀디의 우익은 왈라키아 공국의 병사들이, 무라트 2세(45세)의 우익은 그의 젊은 아들 메흐메트(17세)가 맡았다.
다음날인 18일, 좌익의 헝가리 기병대가 오스만 측 우익을 향해 돌격하며 전투가 시작되었다.
처음엔 오스만 측이 밀렸지만 곧바로 오스만 경기병들이 반격하며 전세는 역전되었다. 이에 후녀디는 중무장, 경무장 기병대를 이끌고 오스만 중앙군을 향해 돌격하였고, 예니체리 전열을 뚫고 무라트 2세(45세)의 본영 앞까지 이르렀다. 전투의 향방이 결정되는 듯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노련한 무라트 2세(45세)의 속임수였다. 곧바로 오스만 군대는 지친 헝가리 기병대를 포위하였고 우선 중무장 기사들을 격퇴하였다.
이후 기사들의 보조 없이 남겨진 경무장 기병들은 오스만 병사들에게 그대로 학살되었다.
후녀디와 헝가리-왈라키아 병사들은 무질서하게 후퇴하였고, 예니체리는 그들을 추격하여 참전한 헝가리 귀족들 대부분을 죽였다.
미처 도주하지 못한 헝가리 보병대는 본 진영에서 대포를 쏘며 결사항전 하였으나 다음날 (19일) 오스만 군대의 총공격에 전멸하였다.
2.3. 결과
3일에 걸친 전투에서 헝가리 측은 1만 7천의 전사자를 내며 대패하였고 이후 오스만 베이국에 대해 수비로 일관하게 된다. 후녀디는 패주하던 중 세르비아 측의 포로가 되어 스메데레보에 투옥되었다.
주라지 브란코비치는 10만 플로린 금화와 후녀디 야노시의 아들을 자신의 딸과 결혼시킨다는 약속을 받아낸 후에야 그를 석방하였다. 야사에 따르면 주라지는 스칸데르베그가 후녀디 야노시 진영과 합류하는 것을 막았다고 전해진다. 현재까지도 후녀디 야노시가 코소보로 오면서 지난 협곡은 그의 이름인 야노시에서 따온 얀코 계곡이라 불린다.
3. 이후
3.1. 콘스탄티노플의 함락(1453)
주라지는 1451년, 헝가리와 오스만 베이국간의 강화를 중재하였다. 같은 해, 발칸에 대한 오스만 패권을 정립시킨 무라트 2세가 사망하고 메흐메트 2세가 즉위하였다.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며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메흐메트는 마침내 세르비아도 멸망시키고 중부 유럽으로 나아가기로 하였다.
3.2. 세르비아 제국 멸망(1459)
3.2.1. 스메레데보의 구원(1454)
1454년, 오스만 군대는 세르비아의 수도 스메데레보를 포위하였고 주라지(78세)는 헝가리로 피신하였다. 수비대의 결사항전과 후녀디 야노시(48세), 주라지가 적절한 시점에 2만의 구원병을 끌고 온 덕에 스메데레보는 구원되었다. 이후 세르비아-헝가리 연합군은 오스만군을 추격, 크루셰바츠 전투에서 격파하였다. 다만 그해 11월, 세르비아의 맹장 니콜라 스코발리치가 오스만 측에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비록 오스만 군대는 물러갔지만 세르비아인 5만여명이 노예로 끌려가는 피해를 입었다.
3.2.2. 노보 브로도 함락(1455)
1455년 봄, 오스만 군대는 코소보 지역에 대한 완전 정복에 들어갔다. 세르비아의 주요 광산이 있던 노보 브로도는 40일간의 포위 후 6월 1일에 함락되었다. 이후 귀족들은 처형되었고 소년들은 예니체리로, 여자들은 첩이 되었다. 콘스탄틴 미하일로비치의 회고록, "술탄 친위부대원의 추억"에 묘사되어 있다. 이후 오스만은 별 저항 없이 프리슈티나를 비롯한 코소보를 정복하였고 세르비아의 영토는 크루셰바츠 이북 지역으로 축소되었다.
3.2.3. 베오그라드 전투(1456)
그리고 1456년 봄, 독일과 중부 유럽 일대에서 고아들로 구성된 십자군이 후녀디 야노시와 함께 베오그라드의 외곽인 제문에 도착했을 때, 메흐메드 2세는 마침내 베오그라드를 포위하였다. 세르비아-헝가리 측은 함대를 조성해 7월 14일, 도나우 강 해전에서 승리하였고 오스만 군대는 철수하였다. 하지만 포위 직후 제문에 흑사병이 돌아 후녀디 야노시가 사망하였다. 세르비아에선 시비냐닌 얀코 설화가 생겨났다.
3.2.4. 왕들의 죽음
베오그라드 포위 이후 후녀디 야노시에 이어 주라지 브란코비치까지 성탄 전야에 사망하며 세르비아는 위기에 빠지게 된다. 뒤를 이은 주라지의 차남 라자르는 1457년 초, 메흐메트와 새로운 주종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라자르는 형제들을 시기하여 추방하였고 형 스테판 만이 남았다.
그리고 1458년 1월, 동생 라자르도 병사하여 형 스테판이 뒤를 이었는데, 이때 보스니아의 왕자 스테판 토마시가 세르비아를 침공하였다. 이에 형 스테판은 헝가리에 도움을 청하려 했으나 재상 미하일로 안젤로비치는 오스만 측에 기울며 조정이 분열되었고, 이 틈을 노린 메흐메트 2세는 세르비아를 침공하였다.
3.2.5. 스메레데보 전투(1459): 패함
결국 1459년 3월, 보스니아의 스테판 토머쉬가 라자르의 딸과 결혼하며 스메데레보를 장악하고 데스포티스로 즉위하였지만, 곧 성을 포위한 오스만 대군과 마주하였다. 그리고 6월 20일, 스테판은 메흐메트 2세에게 스메데레보를 넘겨주는 대가로 보스니아로 물러나며 세르비아 친왕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4. 세르비아 민족주의
세르비아 최후의 저항 (last stand)이 있었던 역사 때문에 코소보는 신성히 여겨졌다. 하지만 오스만 지배기에 세르비아 인들은 자유를 찾아 다뉴브 북쪽으로 대거 이주했고 코소보 일대에는 알바니아계 튀르크인이 유입되었다. 따라서 1990년대 들어 세르비아로부터 독립하려 한 것이 코소보 전쟁로 이어졌다. 정리하자면 세르비아 민족 정신이 기린 곳이긴 하나 현대적 관점으로는 세르비아와 별 상관이 없게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