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비아 공국

 


1. 개요
2. 중세 세르비아 공국(1371 ~ 1459, 89년간)
2.1. 역사
2.1.1.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재위기간: 1373 ~ 1389)
2.1.1.1. 제1차 코소보 전투(1389): 세르비아 공국 vs. 오스만 제국 → 무승부
2.1.2. 1389 ~ 1402, 오스만의 봉신 시기
2.1.2.1. 1395, 로바인 전투
2.1.3. 스테판 라자레비치(1402 ~ 1427)
2.1.3.2. 1403, 헝가리의 봉신
2.1.3.3. 1411, 무사의 세르비아 공격
2.1.3.4. 1413, 메흐메트와의 동맹
2.1.3.5. 1421, 발시치 가문의 투항과 세르비아의 통일
2.1.3.6. 1427, 스테판 라자레비치 사망
2.1.4. 주라지 브란코비치 즉위(1427 ~ 1456)
2.1.4.1. 세르비아의 마지막 복원
2.1.4.3. 1448, 제2차 코소보 전투
2.1.4.3.1. 결과
2.1.4.3.2. 코소보의 의미
2.1.4.4. 콘스탄티노플의 함락(1453)
2.1.4.5. 스메레데보의 구원(1454)
2.1.4.6. 노보 브로도 함락(1455)
2.1.4.8. 1456, 왕들의 죽음
2.1.5. 오스만 제국에게 합병(1456 ~ 1459)
2.1.5.1. 1457, 라자르(동생)
2.1.5.2. 1458, 스테판(형)
2.1.5.3. 1459, 스메레데보 전투: 패함
3. 근세 세르비아 공국(1817 ~ 1882)
3.1. 역사
3.1.1. 세르비아 공국의 역사
3.1.2. 세르비아의 정치 역사


1. 개요


역사상 세르비아 공국은 두 번 있었다. 첫번째는 세르비아 제국이 멸망한 직후인 중세 말기인 1371 ~ 1459년에,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에 의해 세워져서 그의 아들과 주라지 브란코비치가 다스린 후, 멸망하는 중세의 세르비아 공국을 의미하고, 두번째는 1817년부터 1882년에 존재했던 근세의 세르비아 공국을 의미한다.

2. 중세 세르비아 공국(1371 ~ 1459, 89년간)



2.1. 역사



2.1.1.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재위기간: 1373 ~ 1389)


세르비아 제국이 무너진 후, 세르비아는 그대로 전국시대로 돌입. 그후 가장 강력한 지방 귀족이던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Lazar Hrebeljanović,1329~1389)가 등장하여 세르비아 공국(Serbian Despotate)을 창건했다.[1]
한편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는 세르비아 제국을 재창건한다는 과제를 내걸고 세르비아의 통일을 위한 전쟁을 일으켰고, 세르비아의 모든 귀족들을 대표하는 맹주 비슷한 자리에까지 오르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당시 발칸 반도에서는, 신흥 세력인 오스만 제국이 나날이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2.1.1.1. 제1차 코소보 전투(1389): 세르비아 공국 vs. 오스만 제국 → 무승부

라자르는 2번에 걸쳐 오스만 제국을 물리쳐, 당시의 술탄 무라트 1세가 발칸 정복을 단념할까 생각하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발칸 반도에서의 세력 확장은 신하들에게 맡긴 채 자기 자신은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다른 투르크계 공국들을 정복하는 데 여념이 없던 무라드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맞붙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라고 결심했고, 3번째 전투인 1389년 제1차 코소보 전투에서 라자르를 쓰러뜨리는 데에 성공하지만 자기 자신도 전사하고 만다.
다만 애매한 것이 누가 무라드를 쓰러뜨렸는지도 기록에 따라 다르고, 아예 전사가 아니라 전투가 끝난 뒤 전장을 둘러보다 죽은 척 하고 있던 세르비아 기사에게 암살당했다거나 포로로 잡힌 기사가 무라드를 알현하기를 청했고 그 자리에서 암살당했다는 등 다양한 기록이 전해진다.
1차 코소보 전투는 전투 자체는 무승부였으나, 아나톨리아 반도 주둔군 일부를 차출하여 발칸에 보내면 되는 오스만과는 달리 코소보 한 번에 모든 걸 쏟아부은 세르비아에는 더 이상 싸울 병사가 없었다. 즉 전투에서는 지지 않았으되, 전쟁에서는 진 셈.

2.1.2. 1389 ~ 1402, 오스만의 봉신 시기


1차 코소보 전투 이후 세르비아는 현저히 약화되었고 그 틈을 타 헝가리가 침공해 오기도 하였다. 결국 1392년, 오스만 군대가 수도인 스코페까지 함락하자 세르비아는 오스만 제국의 봉신이 되었다.

2.1.2.1. 1395, 로바인 전투

1395년, 세르비아의 왕 마르코가 오스만 군대를 도와 왈라키아 공국을 침공했다가 미르체아 1세의 방어전이었던, 로바인 전투에서 전사하며 세르비아 왕위는 사라졌다.

2.1.2.2. 1396, 니코폴리스 전투

이후, 스테판 라자레비치는 바예지트 1세와 함께 오스만 제국 측에 가담해서 니코폴리스 십자군과 싸운다.

2.1.3. 스테판 라자레비치(1402 ~ 1427)


결국 라자르가 이룩한 세력은 아들인 스테판 라자레비치가 이어받게 된다. 하지만 그는 오스만 제국의 신하가 되어야만 했고, 이후 헝가리와 오스만 사이를 오가며 나름 이익을 챙겼다.
일단 오스만 제국은 바예지드 1세앙카라 전투에서 참패한 이후 내전이 벌어졌고, 내전으로 인한 피해를 완전히 극복하는 것은 1430년대에 들어서였다. 그리고 헝가리는 세르비아를 문서상으로는 봉신으로 삼았지만 봉신이 되는 대가로 영토를 할양해주는 등 후원하여, 사실상으로는 동맹국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가 세르비아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쌓아올릴 수 있었던 원동력은 당시 발칸 반도 최대의 광산지대 가운데 하나인 노보 브르도(Novo Brdo)가 고향이었기 때문이었으며, 그를 바탕으로 '데스포티스' 호칭을 받은 '스테판 라자레비치'는 중세 세르비아 최후의 경제적, 문화적 중흥기를 이룩, 오늘날에는 세르비아 정교의 성인으로 추증되어 있다.

2.1.3.1. 1402, 세르비아 친왕국 성립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 오스만 군대가 대패하며 혼란에 빠지자 그틈에 세르비아 공국은 자유를 되찾았다.
그리고 그해 8월, 세르비아의 군주 스테판 라자레비치(Стефан Лазаревић)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하여 섭정 황제 요안니스 7세를 알현하였고, 그로부터 '데스포티스' 호칭을 하사받았다.[2] 세르비아 친왕국의 성립이었다.
그해 11월, 스테판은 부크 브란코비치[3]의 아들인 주라지 브란코비치와의 내전에서 승리하였으나 이후 붉어진 동생 부크와의 불화는 해결되지 못하였다. 결국 부크는 바예지트 1세의 장남 쉴레이만의 궁정으로 피신하였다.

2.1.3.2. 1403, 헝가리의 봉신

이렇듯 내분을 겪으며 세르비아가 약해진 것을 실감한 스테판은 1403년, 오스만에 대한 공동 전선을 위해 자발적으로 헝가리 왕국의 봉신이 되었다. 그 대가로 세르비아는 드라구틴 ~ 밀루틴 왕 시절인 1284 ~ 1319년간 소유했던 베오그라드 일대를 할양받았다. 이후 오스만 제국에게 상실한 스코페 대신 베오그라드가 현재까지 세르비아의 수도가 되는 계기였다. 또한 주군인 지그문트 1세가 1411년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즉위하며 스테판은 그의 가신으로서 서유럽 왕후들과도 교류할 수 있었다.
한편, 오스만으로 망명한 부크 라제로비치는 주라지·라자르 브란코비치 형제와 연합하여 스테판과 맞섰고, 1409년 프리슈티나 전투 이후 세르비아는 남북으로 분열되었다. 이후 부크와 라자르는 오스만 내전에 개입, 처음엔 무사와 동맹했다가 쉴레이만 편으로 배신하는 모습을 보였다.
1410년, 쉴레이만은 스테판이 마누엘 2세를 알현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가 있던 틈을 타서 부크와 라자르를 세르비아로 보내어 북부까지 차지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도중에 필리포폴리스(플로브디프)에서 무사의 군대에게 잡혀 배신의 대가로 처형되었다.

2.1.3.3. 1411, 무사의 세르비아 공격

1411년, 무사는 쉴레이만을 제압하였고 스테판은 동생의 영토까지 차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 보스포루스를 건너온 메흐메트를 격파하며 자신감을 얻은 무사는 돌연 세르비아를 공격하였다.

2.1.3.4. 1413, 메흐메트와의 동맹

1413년 2월, 무사의 군대가 스탈리치를 포위하였는데 수비대장 프리예즈다는 항복을 거부하고 결사항전을 하다 불타 죽었다. 무사의 군대가 세르비아 남부를 유린하자 스테판은 메흐메트와 동맹하였고 그해 7월, 메흐메트와 세르비아의 연합군이 무사를 패배시켰다. 메흐메트 1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니시 일대에 대한 세르비아 지배권을 인정하였다. 한편 아들이 없던 스테판은 1412년 가을에 자신의 조카이기도 했던[4] 주라지와 화해한 뒤, 그를 후계자로 임명하는 인덕을 발휘하며 세르비아는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2.1.3.5. 1421, 발시치 가문의 투항과 세르비아의 통일

1421년, 베네치아 공화국에게 몬테네그로 해안을 상실한 제타의 발시치 가문이 스테판에게 투항하였다. 같은 해 발시치 가문의 발샤 3세가 병사하고 제타의 다른 가문인 주라제비치 가문도 데스포티스의 권위에 복속하며 세르비아는 네마냐 왕조 이후로 다시 통일되었다.

2.1.3.6. 1427, 스테판 라자레비치 사망

그리고 1427년 7월, 세르비아 공국의 중흥 군주 '스테판 라자레비치'가 사망하고, '주라지 브란코비치'가 '데스포티스'로 즉위하였다. 헝가리 왕국과의 주종관계는 유지되었으나 베오그라드 일대는 반환되었다.

2.1.4. 주라지 브란코비치 즉위(1427 ~ 1456)


한편, 스테판의 죽음 직후 무라트 2세는 세르비아 공국을 공격하여 수도 크루셰바츠를 파괴하였다. 이에 주라지는 오스만에 금화 5만닢의 연공과 기병 1만 1천의 병사를 제공할 의무를 지니는 조건으로 평화를 얻었다.
이후 주라지는 1428년부터 베오그라드에서 동남쪽으로 30여 km 떨어진 다뉴브 강변에 스메데레보 요새를 건립하기 시작, 1430년에 완성되자 그를 수도로 삼았다.

2.1.4.1. 세르비아의 마지막 복원

1438년, 무라트 2세는 재차 세르비아로 진군하였고 포위 끝에 1439년, 수도 스메데레보가 함락되었다. 세르비아 조정은 베오그라드로 철수, 헝가리 군대와 함께 오스만 제국의 공격을 격퇴해 내었다. (1440년) 이듬해 주라지는 보스니아의 스테판 북치치와 화해하고 포드고리차 일대에서 전력을 정비하였다. 1443년 9월, 교황의 호소로 결성된 십자군이 주라지와 후녀디 야노시의 지휘 하에 베오그라드에 모였고 니슈 전투에서 오스만 대군을 격파, 니시를 점령하였다.
이 여파로 무라트 2세는 아들 메흐메드(당시 12세)에게 양위한 후 퇴위하였고 스칸데르베그가 오스만 진영을 나와 알바니아 항전군을 이끌게 되었다. 1444년 초에도 오스만 군대는 후퇴하는 십자군을 추격하다가 패하였고(쿠노비카 전투) 그해 8월 15일, 세즈게드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 결과, 비록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었지만 세르비아 친왕국이 복구되었으며 포로 신세였던 주라지 브란코비치의 두 아들들도 풀려났다.

2.1.4.2. 1444, 바르나 전투

하지만 이교도와의 약속은 지킬 필요가 없다는 교황의 주장에 따라 후녀디 야노시(38세)는 불가리아 왕관을 수여받은 1444년 11월, 흑해 연안의 바르나로 진격하였다. 이 바르나 전투에서 십자군은 대패했으며 헝가리-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3세가 전사하였다.
세르비아 친왕국의 주라지는 이 전투에 참가하지 않으며 오스만 측과의 평화 약속을 지켰기에 한동안 안전하였다. 이후 1446년 요청으로 복귀한 무라트 2세는 알바니아와 그리스 남부 전선에 관심을 기울였고 후녀디 야노시헝가리 국왕으로 선출된 후 루마니아 일대를 장악하느라 시간을 보냈다. 1447년 왈라키아 공국에서는 블라드 가시공(17세)이 보이보드로 올랐으나, 직후 후녀디 야노시(41세)에게 패해 도망가는 일이 발생한다.
그리고 1448년 가을, 후녀디 야노시(42세)는 2만 5천에 이르는 헝가리-왈라키아 군대와 다뉴브 강을 건넜다. 오스만과의 아슬아슬함 평화를 유지하던 주라지는 전쟁에 반대하였고, 이에 후녀디 야노시는 그를 적으로 간주하여 세르비아 친왕국 북부를 약탈하며 진군하였다. 그러자 주라지는 오스만 제국에게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2.1.4.3. 1448, 제2차 코소보 전투

1448년 10월, 후녀디 야노시(42세)의 군대는 코소보에 이르렀고, 알바니아의 명장 스칸데르베그(44세)를 기다렸다.
하지만 무라트 2세(45세)는 강행군을 통해 두 군대가 합세하기 전에 4만 대군을 이끌고 전장에 다다랐다.
두 지휘관은 각각 중앙군을 맡아 대치했고 후녀디의 우익은 왈라키아 공국의 병사들이, 무라트 2세(45세)의 우익은 그의 젊은 아들 메흐메트(17세)가 맡았다.
다음날인 18일, 좌익의 헝가리 기병대가 오스만 측 우익을 향해 돌격하며 전투가 시작되었다.
처음엔 오스만 측이 밀렸지만 곧바로 오스만 경기병들이 반격하며 전세는 역전되었다. 이에 후녀디는 중무장, 경무장 기병대를 이끌고 오스만 중앙군을 향해 돌격하였고, 예니체리 전열을 뚫고 무라트 2세(45세)의 본영 앞까지 이르렀다. 전투의 향방이 결정되는 듯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노련한 무라트 2세(45세)의 속임수였다. 곧바로 오스만 군대는 지친 헝가리 기병대를 포위하였고 우선 중무장 기사들을 격퇴하였다.
이후 기사들의 보조 없이 남겨진 경무장 기병들은 오스만 병사들에게 그대로 학살되었다.
후녀디와 헝가리-왈라키아 병사들은 무질서하게 후퇴하였고, 예니체리는 그들을 추격하여 참전한 헝가리 귀족들 대부분을 죽였다.
미처 도주하지 못한 헝가리 보병대는 본 진영에서 대포를 쏘며 결사항전 하였으나 다음날 (19일) 오스만 군대의 총공격에 전멸하였다.

2.1.4.3.1. 결과

3일에 걸친 전투에서 헝가리 측은 1만 7천의 전사자를 내며 대패하였고 이후 오스만 제국에 대해 수비로 일관하게 된다. 후녀디는 패주하던 중 세르비아 측의 포로가 되어 스메데레보에 투옥되었다.
주라지 브란코비치는 10만 플로린 금화와 후녀디 야노시의 아들을 자신의 딸과 결혼시킨다는 약속을 받아낸 후에야 그를 석방하였다. 야사에 따르면 주라지는 스칸데르베그후녀디 야노시 진영과 합류하는 것을 막았다고 전해진다. 현재까지도 후녀디 야노시가 코소보로 오면서 지난 협곡은 그의 이름인 야노시에서 따온 얀코 계곡이라 불린다.

2.1.4.3.2. 코소보의 의미

세르비아 최후의 저항 (last stand)이 있었던 역사 때문에 코소보는 신성히 여겨졌다. 하지만 오스만 지배기에 세르비아 인들은 자유를 찾아 다뉴브 북쪽으로 대거 이주했고 코소보 일대에는 알바니아계 튀르크인이 유입되었다. 이들이 500년이 지난 1990년대 들어 세르비아로부터 독립하려 한 것이 바로 코소보 사태로 볼 수 있다. 정리하자면 세르비아 민족 정신이 기린 곳이긴 하나 현대적 관점으로는 세르비아와 별 상관이 없게된 것이다.

2.1.4.4. 콘스탄티노플의 함락(1453)

주라지는 1451년, 헝가리와 오스만 제국간의 강화를 중재하였다. 같은 해, 발칸 반도에 대한 오스만 패권을 정립시킨 무라트 2세(48세)가 사망하고 메흐메트 2세(22세)가 즉위하였다.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며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메흐메트(24세)는 마침내 세르비아도 멸망시키고 중부 유럽으로 나아가기로 하였다.

2.1.4.5. 스메레데보의 구원(1454)

1454년, 오스만 군대는 세르비아의 수도 스메데레보를 포위하였고 주라지(78세)는 헝가리로 피신하였다. 수비대의 결사항전과 후녀디 야노시(48세), 주라지가 적절한 시점에 2만의 구원병을 끌고 온 덕에 스메데레보는 구원되었다. 이후 세르비아-헝가리 연합군은 오스만 군을 추격, 크루셰바츠 전투에서 격파하였다. 다만 그해 11월, 세르비아의 맹장 니콜라 스코발리치가 오스만 측에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비록 오스만 군대는 물러갔지만 세르비아인 5만여명이 노예로 끌려가는 피해를 입었다.

2.1.4.6. 노보 브로도 함락(1455)

1455년 봄, 오스만 군대는 코소보 지역에 대한 완전 정복에 들어갔다. 세르비아의 주요 광산이 있던 노보 브로도는 40일간의 포위 후 6월 1일에 함락되었다. 이후 귀족들은 처형되었고 소년들은 예니체리로, 여자들은 첩이 되었다. 콘스탄틴 미하일로비치의 회고록, "술탄 친위부대원의 추억"에 묘사되어 있다. 이후 오스만 제국은 별 저항 없이 프리슈티나를 비롯한 코소보를 정복하였고 세르비아의 영토는 크루셰바츠 이북 지역으로 축소되었다.

2.1.4.7. 베오그라드 공방전(1456)

그리고 1456년 봄, 독일과 중부 유럽 일대에서 고아들로 구성된 십자군이 후녀디 야노시(50세)와 함께 베오그라드의 외곽인 제문에 도착했을 때, 메흐메드 2세(25세)는 마침내 베오그라드를 포위하였다.
세르비아-헝가리 측은 함대를 조성해 7월 14일, 도나우 강 해전에서 승리하였고 오스만 군대는 철수하였다. 하지만 포위 직후 제문에 흑사병이 돌아 후녀디 야노시가 사망하였다. 세르비아에선 시비냐닌 얀코 설화가 생겨났다.

2.1.4.8. 1456, 왕들의 죽음

베오그라드 포위 이후 후녀디 야노시에 이어 주라지 브란코비치(80세)까지 성탄 전야에 사망하며 세르비아는 위기에 빠지게 된다.

2.1.5. 오스만 제국에게 합병(1456 ~ 1459)


세르비아는, 스테판 라자레비치가 1427년에 세상을 떠난 후 친족으로 뒤를 이었던 주라지 브란코비치(Đurađ Branković)마저 80세로 1456년에 죽은 뒤, 공작위 계승 분쟁이 벌어지면서 오스만 제국에게 완전히 합병되고 만다.
계승분쟁 과정이 참 안습한데, 세르비아 제국 때까지만 해도 세르비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보스니아왕국이 분쟁에 끼어들었기 때문.
보스니아 왕은 주군으로 모시고 있던 헝가리 왕에게 '제 아들을 세르비아 공작에 앉힐게요. 그럼 세르비아랑 보스니아가 합쳐져서, 이교도에 맞서 훨씬 튼튼한 완충국이 될 거임' 이라고 제안했고, 당시의 헝가리 왕 마차시 1세는 흔쾌히 승낙했다.
결국 1456년에 오스만 제국이 세르비아에 침공했을 때에는, 이웃나라의 왕자를 공작으로 모시고 있던 세르비아인들은 이미 나라는 망했어요라고 인식하고 있었던데다 보스니아와 헝가리가 '세르비아 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에 가톨릭을 강요하고 있었기에, 오스만 제국에 대한 저항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2.1.5.1. 1457, 라자르(동생)

뒤를 이은 주라지의 차남 라자르는 1457년 초, 메흐메트와 새로운 주종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라자르는 형제들을 시기하여 추방하였고 형 스테판 만이 남았다.

2.1.5.2. 1458, 스테판(형)

그리고 1458년 1월, 동생 라자르도 병사하여 형 스테판이 뒤를 이었는데, 이때 보스니아의 왕자 스테판 토마시가 세르비아를 침공하였다.
이에 형 스테판은 헝가리에 도움을 청하려 했으나 재상 미하일로 안젤로비치는 오스만 측에 기울며 조정이 분열되었고, 이 틈을 노린 메흐메트 2세(27세)는 세르비아를 침공하였다.

2.1.5.3. 1459, 스메레데보 전투: 패함

결국 1459년 3월, 보스니아의 스테판 토머쉬가 라자르의 딸과 결혼하며 스메데레보를 장악하고 데스포티스로 즉위하였지만, 곧 성을 포위한 오스만 대군과 마주하였다.
그리고 6월 20일, 스테판은 메흐메트 2세에게 스메데레보를 넘겨주는 대가로 보스니아로 물러나며 세르비아 친왕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3. 근세 세르비아 공국(1817 ~ 1882)


이름
세르비아 공국
위치
유럽
시기
1817~1882
수도
크라구에바츠 (1818~1838)
베오그라드 (1838~1882)
언어
세르비아어
정부형태
공국
세르비아 공국은 1817년 부터 1882년까지 세르비아에 존재 했던 공국이다. 밀로시 오브로노비치는 세르비아 봉기를 일으키고 세르비아 공국을 설립했다. 이 봉기는 1804년부터 1817년까지 일어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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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역사



3.1.1. 세르비아 공국의 역사


세르비아 혁명 지도자들은 초대 대통령 카라도르데와 밀로시 오브레노비치를 중심으로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를 중심으로 한 세르비아 통치에 성공했다. 1830년 오스만 제국은 세르비아 공국을 인정했고, 밀로시 오비노비치는 세르비아 공국의 세습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처음에, 공국은 전 패실라크의 전 패실크의 영토에만 포함되었으나, 1831년에는 동쪽, 남쪽, 서쪽으로 확장되었다. 세르비아는 1868년부터 1870년까지 에 다른 발칸 식민지들과의 일련의 협정에 서명함으로써 제1차 발칸 동맹을 시작하였다. 1867년 4월 18일, 오스만 정부는 오스만 수비대에 오스만 종주권을 보내라고 명령을 했다. 그 종주권에 있는 유일한 조항은 오스만 제국이 세르비아 공국과 함께 불가침 조약을 맺는 것이었다. 세르비아의 실질적인 독립은 1869년에 세르비아의 새로운 헌법을 제정했다. 세르비아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이 베를린 조약에서 완전한 국제적인 인정을 받았을 때, 1878년에 남동쪽으로 더 확장되었다. 공국은 1882년까지 세르비아 왕국의 수준으로 승격될 때까지 존속됐다.

3.1.2. 세르비아의 정치 역사


  • 1835년에 스테이에네 헌법을 만들었다.
  • 1838년부터 1869년까지 세르니아 헌법 제정

[1] 엄밀히 말하면 세르비아 공국의 역사는 1403년부터이고, 라자르의 세르비아는 'Moravian Serbia' 라 부른다. 이는 라자르 본인은 슬라브어로 공작을 뜻하는 '크네즈(knez)' 를 칭한 반면, 그 아들인 스테판 라자레비치(Stefan Lazarević)가 1403년에 우호국이었던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공작에 해당하는 'despot' 의 칭호를 받았기 때문.[2] 이후 1410년에 마누엘 2세가 재확인한다[3] 1392년에 오스만 제국에 굴복했으나 스테판과 달리 오스만 군대에 참전하지 않고 헝가리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다가 들켜 1396년에 체포된 후 이듬해 옥사하였다. 이런 행적을 볼 때 그가 코소보 전투에서 라자르 공을 배신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4] 스테판의 누이가 부크 브란코비치와 결혼하여 주라지와 라자르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