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7세
1. 개요
동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두카스 왕조의 제2대 황제. 무능하다고만 볼 수는 없겠지만 만지케르트 전투의 여파를 직격으로 얻어맞고 수습도 못한, 시대에 맞지 않았던 군주. 별명은 파라피나키스(Parapinakes, Παραπινάκης)로 ''''-1/4''''(...)를 의미하며 치세동안의 급격한 화폐 가치 절하에서 유래되었다.
콘스탄티노스 10세의 장남으로서 어머니 에브도키아 마크렘볼리티사(생몰 : 1021년 ~ 1096년)와 함께 1067년 5월 22일부터 공동으로 제국을 통치했다. 1068년 1월 1일부로 로마노스 디오예니스를 선임 황제로 두었다가 1071년 8월 26일 발생한 만지케르트 전투의 소식이 전파되자 동년 10월 24일 원로원에서 일으킨 궁정 쿠데타를 통해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후 총리로 선임한 니키포리치스(Nikephoritzes)를 신임하며 군사력과 방위력의 재건을 시도했다. 그러나 2차례의 야심찬 원정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연이은 악재로 지지도는 떨어졌고 반란을 일으키는 군대와 맞서 싸워야 했다. 결국 1078년 3월에 수도 콘스탄티노플 시내에서 일어난 시민 봉기군에 체포되어 제위를 포기하고 수도자로 물러났다.
조지아의 왕인 바그라트 4세(재위 : 1027년 ~ 1072년)의 딸인 알라니아의 마리아(Maria of Alania)와 결혼하여 외아들로 알려진 콘스탄티노스 두카스(생몰 : 1074년 ~ 1095년)를 낳았다.
2. 생애
2.1. 임박한 파국
1065년 10월부터 1년 7개월 동안이나 병석에 누워있던 콘스탄티노스 10세는 마침내 향년 62세로 사망했다. 그는 치세 내내 군대 지휘관들을 정치적으로 통제하는 작업에 골몰하였으며 동시에 국방을 위해서 기존의 민병대(Themata)를 최대한 이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아니#s-2(Ani) 지역의 자체적 방위 시스템이 유목민들을 상대하기에 부적절하다는 것만 입증한 채 실패했다. 콘스탄티노스는 마침내 아내 에브도키아와 아들 미하일에게 자리를 넘겨주면서 군인 정치가가 득세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아내에게 재혼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아낸 채 사망했다.
당시 18세였던 미하일 7세보다는 에브도키아가 국정을 주도했다. 딱히 정치에 있어서 오점을 남기지는 않은 것으로 기록된다. 하지만 당시는 동방의 방어선 중 아르메니아 일대에 구멍이 뚫린 상태여서 이미 소아시아 곳곳이 아비규환에 휩싸이고 있는 상태였다. 에브도키아는 계속해서 회의를 열고 대책을 강구했지만 뾰족한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결국 에브도키아는 미하일 프셀로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원로원과의 협의 끝에 유능한 지휘관 중 한 명과 혼인하여 국난 타개책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논의 끝에 그 대상은 로마노스 디오예니스로 낙점되었다.
1066년 ~ 1067년 당시 북방 이스트로스 강 유역의 방위를 통괄하는 지휘관으로서 남침한 페체네그 군대를 크게 패배시켜 추앙을 받고 있던 로마노스는 1067년에 반란을 꾀하다가 체포되어 사형 언도까지 받은 뒤, 에브도키아와의 만남을 통해 놀랍게도 감형 뿐만 아니라 바라고 바라던 황제의 자리까지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에브도키아는 로마노스에게 제위를 주고, 로마노스는 두카스 왕조의 존속을 보장하며 국가의 위기를 타개하는 것을 거래하였다. 그렇게 1068년 1월 1일, 두 사람은 혼인과 동시에 대관식을 치렀다.
2.2. 계약의 파기
이후 미하일 7세는 상당 기간 동안 정치의 최일선에서 물러나 있었다. 두 사람의 사이는 그리 나쁜 것까지는 아닐 수 있었겠지만 에브도키아와 로마노스는 서로의 입장 차이로 인해 서서히 사이가 악화되었다. 로마노스는 스스로의 지위를 강화시켜나갔으며 이런 문제로 에브도키아와 계속 충돌을 일으켰다. 당시 제국 정계에서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 콘스탄티노스 10세의 동생이자 미하일 7세의 작은 삼촌인 요안니스 두카스#s-1 부황제였음을 생각해보면 상당한 악수(惡手)였다. 여기에 로마노스 4세의 통치도 불안정했다. 1068년과 1069년의 원정은 결과가 나쁘지만은 않았으나 역시 로마노스 본인의 단점도 상당수 드러나고 있었다. 그리고 1071년 8월 26일, 야심찬 원정은 어떤 이유로든 파멸을 맞았다.
패전의 긴급한 소식이 수도에 전해지자 곧바로 원로원이 사후 대책을 논의하러 집결했다. 오랫동안 군인 황제의 독단과 집권을 두려워했던 원로원은 이제 계약이 파기되었음에 동의하였다. 이에 따라 10월 24일, 로마노스 4세는 폐위되었고 즉각적으로 미하일 7세가 단독 황제로 추대되었다. 당시 원로원 의장이었던 프셀로스는 미하일 황제의 모친인 에브도키아가 선임 황제를 맡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고 에브도키아도 적극 이를 주장했다. 그러나 형수 에브도키아가 언제든지 로마노스와 같은 인물을 또 끌어들일 수 있다고 판단한 요안니스 부황제에 의해 이는 저지되었으며 오히려 에브도키아가 하야하는 결과를 맞았다.
한편 1071년 말에 로마노스 4세가 동부 국경을 통해 복귀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때 수도의 정계, 원로원, 황궁은 보복을 두려워하여 일시 마비되는 상황에 처했다. 그러나 위기 상황을 인지한 바랑인 친위대가 미하일 7세를 둘러싸고 보호한 뒤 치안을 되찾음으로써 위기를 넘겼다. 그리고 황제의 사촌인 안드로니코스 두카스(Andronikos Doukas)가 지휘권을 맡은 상당한 군대가 즉시 로마노스 4세를 저지하기 위해 출진했다. 도키아(Dokeia)에서 농성하던 로마노스 4세는 결국 자신의 편인 킬리키아 사령관 카타투리오스(Chatatourios)와 함께 킬리키아로 후퇴하였다. 1072년 초, 대규모 토벌군이 즉시 남하하여 킬리키아를 평정했고 로마노스 4세의 신변 보호를 약속하며 항복을 받았다.
미하일 7세는 로마노스 4세에게 형벌을 내리는 것을 반대했으나 원로원은 결국 그에게 실명의 형벌을 언도했고, 콘스탄티노플로 오던 중이던 로마노스 4세는 시력을 잃은 채 유배지로 떠나 곧 사망했다.
2.3. 실패한 수습
내분을 수습한 미하일 7세 정권은 1072년, 동부 방어선의 구멍이 되어버린 소아시아의 케사리아(Kaisareia) 인근 통행로가 튀르크 유목민들의 무리를 끌어들이는 미끼가 되고 있음을 고려하여 최대 정예병인 타그마를 동원하여 이곳을 차단할 것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남아있는 동부 금군 대부분이 모였다. 칼델리스(Kaldellis)는 그 수를 약 4천 명으로 추산한다. 그러나 이들은 도중에 대규모 튀르크군을 만나 수적 열세에 밀려 격파당했다. 1074년에는 다시 한 번 이를 시도하였다. 이번에는 수가 훨씬 줄어서 약 2천 명으로 추정되며 노르만 용병대가 일익을 담당했다. 그러나 이 노르만 용병대가 부대를 이탈하면서 군대는 흔들렸고 결국 상가리오스 강을 건너는 좀포스(Zompos) 다리에서 벌어진 노르만 군대와의 전투로 붕괴되었다. 이후로 동로마의 동부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원정군을 꾸려 작전할 수 있는 금군 부대는 완전히 와해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이탈한 노르만 용병대는 프랑스 바이을(Bailleul) 출신의 루셀 드 바이욀이라는 지휘관의 영도 아래 있었다. 루셀은 동족인 노르만족들이 남이탈리아에서 자립한 것을 기억하며 소아시아에서 독자적인 국가를 세우고자 했다. 좀포스 전투에서 동부 타그마를 와해시킨 루셀은 동로마에 고용되어 있던 프랑크 용병대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총 3천에 달하는 기사대가 모두 모여 콘스탄티노플의 바다 건너편에서 무력 시위를 하자 무력한 미하일 7세는 깊은 굴욕감을 느끼고서는 무슨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루셀을 파멸시키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것이 그의 몰락을 본격적으로 부채질하기 시작했다.
1072년 이후 셀주크 튀르크 제국 본토와 외교 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하고 또한 소아시아 각지의 튀르크 유목민 일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동로마 정부는 아예 루셀이 영토를 강탈해간 아르메니아콘(Armeniakon)에 튀르크 유목민들을 유입시켜 루셀을 견제하려고까지 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루셀을 사로잡기 위해 2년 전 총사령관에 취임시킨 알렉시오스 콤니노스를 변변한 병력도 없이 투입하기까지 했다. 갖은 고통 끝에 알렉시오스는 루셀을 체포하는데 성공했지만 그 뒤에 남겨진 아르메니아콘 지방은 사실상 튀르크 유목민들에게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물론 1079년 ~ 1080년 초까지도 동로마 정부는 소아시아 내륙 깊숙한 곳까지 행정관을 지명하며 여전한 통치력을 행사하기는 했다. 유튜브 지도 동영상류에 나오는, 동로마의 영토에서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 패배 이후 아나톨리아의 서부[1] 와 북부[2] 해안만 남고 나머지가 한순간에 날아가는 것은 편의상 그렇게 그렸을 뿐 실상과는 다소 다르다.)
한편 치세 초기 미하일 7세 정권을 지휘한 것은 시디(Side)의 주교였던 요안니스였다. 하지만 당시 제국이 필요로 했던 것은 인품과 덕망보다는 현실 감각이었다. 평가가 그리 좋지는 않았으나 엘라도스(Hellados, 오늘날의 그리스 지역) 행정 장관을 지내던 니키포로스(Nikephoros)가 서서히 실권을 잠식하며 요안니스 주교를 몰아냈으며 부황제 요안니스 역시 정계에서 물러나게 했다. 이후 그는 강경한 정책을 밀어붙이며 재건을 시도했다. 전반적인 물자 부족으로 화폐 경제가 악화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세금을 대폭 인상하였고 새롭게 불사 부대(Athanatoi)를 재건했다. 불과 18세였던 알렉시오스 콤니노스를 서부군 총사령관에 봉한 것도 그의 안목이었다. (물론 이는 파플라고니아 군부와의 연계를 꾀하여 위협적인 카파도키아 군부를 견제하고자 했던 목적이 더 크긴 하다.)
하지만 혹독한 세금 정책은 반발에 부딪혔다. 1074년, 이스트로스 강 연안에서 유목민들과 섞여 살며 상당 부분 세제 혜택을 보고 있던 저지대 도시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정부는 네스토르(Nestor)를 지휘관으로 진압군을 파견했으나 오히려 네스토르까지 반란군에 결탁하며 한때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기까지 했다. 이들은 미하일 7세를 압박하여 니키포로스를 실각시킬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황제가 이를 거부하자 군대를 물려 북방으로 후퇴했다. 비록 직접적인 타격은 거의 없었던 사건이었으나 이 반란으로 북방의 유목민 방어선은 다시 무너졌다. 1076년부터는 재차 남하한 페체네그와 여러 유목민들이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 등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사실상 서부 타그마 중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부대가 아드리아노플에 있었지만 최후의 정예 부대라는 점 때문에 제대로 응전하지 못하고 있었다.
2.4. 3월 혁명
1076년이 되자 유통 경제가 전란으로 마비되면서 곡물 공급에 많은 애로사항이 닥쳐왔고, 니키포로스는 식량 공급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점점 위축되는 재정을 보충하기 위한 또다른 세원을 궁리했다. 1077년에 그 결과로 공영 식량 창고(Phoundax)라는 시설이 도입되었다. 모든 식량 판매자들은 이 국영 시장에 식량을 판매하고 수수료를 지불했으며, 구입자들은 시장에서 수수료가 포함된 값으로 식량을 구입해야 했다. 여기에 대상인들이 끼어들어 가격 장난질을 시작하자 1077년도의 공식 식량 가격이 1075년~ 1076년 대비 거의 50배 수준으로 폭등했다.
1077년에는 소아시아 아나톨리콘 관구의 절도사인 니키포로스 보타니아티스가 3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켰고 동시에 디라히온의 절도사인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s-2가 반란을 일으켰다. 어찌어찌 중앙 정부는 수도와 그 인근을 건사하였으며 육군과 해군 병력도 있었으나 동서 양쪽의 반란으로 완전히 기진맥진한 상황에 처했다. 이제 수도의 시민 대중도 더 이상 묵과하지 않을 태세였다.
1078년 1월 6일. 성 소피아 성당의 성탄절 행사 도중 사제단이 니키포로스 보타니아티스를 황제로 선포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정부는 즉각 이를 진압하여 사제단을 체포하여 세계 총대주교 코스마스 1세(1075년 ~ 1082년)와의 깊은 갈등의 골까지 생겨났다. 3월 1일에 이르러 보타니아티스가 수도 건너편 해안가에 도착하여 봉화로 도착을 알리자 수도 시내는 흥분에 휩싸였다. 결국 3월 24일, 시민군이 조직되어 황궁을 점령하였으며 치안을 유지함은 물론 함대까지 접수한 뒤 보타니아티스에게 초청장을 보내고 수도를 정돈했다. 시민군에 체포되어 성 소피아 성당에 연금된 미하일 7세는 결국 스스로 정권을 포기하고 수도자가 되어 정치에서 물러났다.
3. 평가
분명히 두카스 왕실을 옹호하며 군인 집권을 반대하는 프셀로스의 평이 객관적이지는 못하겠지만 미하일 7세는 아버지 콘스탄티노스 10세와 비슷하게 성격이 상당히 온화하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친절하게 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학문이나 독서에 있어서도 진지하게 대하였으며 국정에 임하는 자세도 나쁘다고 할 수는 없었다. 문제는 아버지와 비슷하게, 아니 그 이상으로 혼란스러운 국가를 바로잡고 강단있게 재건을 밀어붙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 니키포리치스의 냉혹한 정책을 후원하고 지지했기 때문에 그가 마냥 무능했거나 비전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험난한 시대의 군인들 사이에서 정권을 유지할 만한 능력과 강단은 보여주지 못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와 그의 정권이 몰락하면서 1028년 로마노스 3세 집권으로 시작되었던 원로원 주도의 정치 시스템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그 이후 황제들 역시 원로원을 홀대하거나 무시한 것은 아니었고 여전히 중요한 지지층으로 인식했으나 국정을 주도할 만한 힘은 내어주지 않았다. 또한 콘스탄티노플 시민들 역시 다시 한 번 원로원에서 카파도키아 군부 출신인 니키포로스 3세에게로 지지층을 옮긴 결과가 되었다.
4.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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