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전체

 

1. 개요
2. 구조
3. 주의점
4. 한국사상의 기전체 사서
5. 여담


1. 개요


紀傳體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의 전통적 사서(史書, 역사책) 서술 방식 중 하나. 인물을 중심으로 서술한다. 사마천의 《사기》가 최초의 기전체 사서인데 이를 모범으로 삼아 이후 중국의 정사(正史)인 '24사'는 모두 기전체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이 형식을 받아들여 정사인 삼국사기고려사가 기전체의 형식으로 작성되었다. 즉, 편년체로 작성된 조선왕조 실록을 제외한 한국과 중국의 모든 정사는 기전체로 작성된 셈이다. 이 때문에 기전체는 '''정사체'''라고도 부른다.[1]
착각하기 쉽지만 조선왕조실록은 기전체가 아니다. 편년체로 쓰여진 당대의 기록이며 아직 조선의 역사를 기전체로 나타낸 사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후임 왕조가 전왕조의 실록과 기타 자료를 참고해 기전체 사서를 편찬해온 동아시아의 관습을 따져본다면 조선이 멸망한 이후 이를 펴내야 했겠지만 일제는 기전체 사서 편찬에 관심이 없었고,[2] 대한민국북한도 조선사는 쓸 엄두조차 못내고 있는데 아직 정사(正史) 작성에 필요한 사료조차 '''번역을 완료하지 못했다.''' 정사를 만들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해당 시대에 쓰인 모든 기록들을 망라하여 이를 역사책으로 묶어내는 것인데 조선의 기록은 아직 승정원일기같이 관찬된 기록임에도 번역이 완료되지 않은 것들이 존재한다. 가장 중요한 사료인 조선왕조실록도 1990년대 말에야 겨우 번역 및 전산화를 완료하였다.
또한 1. 남한이든 북한이든 왕조국가가 아닌 공화국이며[3] 따라서 정사(正史)라는 개념이 성립할 수 없다. 굳이 정사에 가장 가까운 것을 따져보자면 역사 교과서일 것이나 역사 교과서를 정부 주도로 하나의 서술로 통일한다는 것이 민주국가에서 용납되긴 어렵다. 또한 '교과서'를 (정작 학생들은 이해하지도 못할) 전통적 기전체로 쓸 이유가 없다. 2. 학계 입장에서 보면 역사학의 방법론은 이미 서구권 중심으로 통일되었다. 따라서 조선에 대한 기전체 역사서는 (만약 작성된다면) 학자의 개인적 연구물, 혹은 정부의 문화사업의 일부 정도에 그칠 것이다.

2. 구조


기전체 사서는 다음과 같은 구조를 지니고 있다.
  • 본기(本紀)[4]: 천자, 특히 황제의 전기(傳記). 각 왕조의 연대기 역할을 한다. 삼국사기마냥 여러 왕조를 서술한 특이케이스가 아니라 하나의 왕조만 다루는 사서라면 본기만 쭉 따라 읽으면 편년체 사서를 읽는 것과 별 다름이 없다. 명분보다는 실세를 중시한 사마천의 《사기》에는 항우, 여후의 전기가 본기로 분류되어 있는데 항우는 잠시 천하의 제후들의 위에 군림했으며 여후는 혜제를 대신한 사실상의 황제였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반고의《한서》에서는 항우는 열전에 수록되어 있으며, 혜제 시기의 경우 '혜제기'가 따로 있다.[5]삼국사기》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를 각각 본기(本紀)로 작성했는데, 보통 하나의 정통 왕조만 본기로 삼고 나머지는 열전 처리하는 것이 일반적인 데 비하면 특이 케이스이며 한편으로는 이를 편찬한 고려왕조의 외왕내제적 역사관을 나타내기도 한다.[6]
  • 세가(世家): 제후국, 특히 의 전기로, 고대 중국 이후로는 제후국이 몰락하여 중국 사서에서는 오직 《사기》와 《신오대사》에만 세가가 존재한다.[8] 사마천의 《사기》는 유교의 교조인 공자를 높이 평가하여, 실제로 공자가 제후는 아니었지만 열전이 아닌 세가에서 다뤘다. 《고려사》는 고려의 역대 왕들을 제후의 예에 따라 세가에 올렸다.[9]진서(晉書)》의 경우 서진, 동진을 제외한 역대 군주의 기록은 (본)기도, 세가도 아닌 재기(載記)라는 편명으로 다루고 있다. 참고로 당나라 시기에는 당태종 이세민의 휘를 피휘하여 계가라고 불렸다.
  • 열전(列傳): 본받거나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한 신하나 일반인의 이야기. 일종의 전기 문학이라 할 수 있으며 기전체의 핵심이 되는 부분이다. 딱딱한 본기에 비해 개인을 주인공으로 서술해 재미도 있기 때문에, 국내의 《사기》 번역서들을 보면 열전만 발췌, 번역한 경우가 많다. 한국의 기전체 사서는 열전 부분이 중국 사서에 비해 좀 부실한 편이다. 특히 《삼국사기》는 김유신열전 빼고는 거의 날림 수준. 이는 삼국사기 열전에 나오는 인물들 대부분이 삼국시대 당시에서 이미 수백년이 지난 삼국사기 집필 당시 남아있는 기록이 많지 않은 인물들인 것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10] 또한 인물의 전기 외에 주변국에 관한 기록도 열전에 기록한다. 가령 《명사》조선에 관한 기록을 다룬 조선전, 일본에 관한 기록을 다룬 일본전 등이 열전에 실려 있다. 유비손권,[11] 궁예견훤,[12] 우왕, 창왕[13] 등 실제로는 군주였더라도 사서 편찬자의 판단에 비정통 군주로 보는 경우도 열전에 쓴다. 항우와 여후를 본기에 썼던 사마천의 사기가 특이 케이스.
  • 표(表): 연표, 가계표, 인명표 등.
  • 지(志): 본기, 열전에 들어가지 않는 사회적인 사항. 주로 법률이나 경제, 자연 현상 등이 여기에 들어간다. 이 표현은 반고의 《한서》에서 처음 썼고, 기전체의 효시인 사기에서는 '서'(書)라고 했다.

3. 주의점


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록이 관련된 이들의 전기에 흩어져 있어서 각 사건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따르는 문제가 있지만, 인물을 중심으로 하여 역사를 바라보는 데에는 유용하다. 기전체 사서는 일반적으로 전의 주인공의 공은 제대로 기술해도, 허물은 가리는 편이 많은 편으로 어떤 사람의 짧게 기술되거나 아예 생략된 내용이, 다른 사람의 전에는 자세히 서술되었거나 같은 사건이라도 온도차가 다른 경우가 종종 있다.
따라서 기전체 사서를 읽을 때는 해당 인물의 전기에 안 나온다고 '''그런 기록이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매우 섣부른 행동이다. 다른 필법에 비해 교차검증을 신중히 할 필요가 있다. 대표적으로 적벽대전의 경우 조조 중심으로 서술한 무제기에는 역병이 돌아 조조가 그냥 물러난 것처럼 설명되어 있으나, 촉지 선주전, 오지 주유전, 위지 정욱전 등 다른 전들을 읽어보면 조조가 참담하게 패배하고 물러간 사실을 알 수 있다.

4. 한국사상의 기전체 사서


사실 한국의 전통 사서는 편년체기사본말체가 주를 이루는 데다 왕조 평균수명이 길어 왕조 변천이 중국에 비해 적어서 왕조가 망한 뒤 후대 왕조에서 편찬하는 기전체 정사를 편찬할 기회도 적다보니 기전체 사서는 많지 않으나, 대표적인 정사인 《삼국사기》, 《고려사》는 기전체로 쓰였다. 한치윤의 《해동역사》는 편명에 세기(世紀), 고(考) 등 독자적인 용어를 사용했으나 기전체 사서로 분류된다.

5. 여담


어떤 의미에서는 나무위키도 기전체 구조다. 어떤 역사상의 사건, 시대상이나 전쟁, 전투에 대한 내용을 그 사건이나 전쟁, 전투가 벌어진 시기에 재위하고 있었던 왕이나 대통령이었던 인물 문서에 서술하거나 장군으로서 지휘했던 인물의 문서에 서술한 경우도 많고 역사적으로 유명한 쟉품이나 저술에 대한 내용 역시 그러한 저술을 지은 작가인 인물 문서에 서술된 경우도 많다. 물론 그런 사건이나 전투를 왕이나 대통령이 주도했다면 그런 서술 방식도 문제가 없겠지만 심한 경우 왕이나 대통령이 그 사건이나 전투에 별달리 관여하지도 않았는데도 그냥 그 사건이 그 군주나 대통령의 재임 시기에 일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개별적인 사건이나 전쟁에 대한 내용을 전부 군주나 대통령 문서에 때려박는 경우도 있다는 것.
고려 후기에 나타난 가전체(假傳體)라는 문학 양식이 바로 이 기전체 구조 중 열전의 형식을 빌려온 것이다.

[1] 고려사절요동국통감 같이 편년체로 작성 된 관찬사서도 많다. 이게 정사 취급을 못 받았을 뿐이다.[2] 조선사편수회를 설립해 조선사를 펴냈지만 기전체가 아닌 편년체 형식이었다.[3] 물론 북한은 사실상 왕조국가지만 어쨌든 공식적으로는 여기도 '인민 공화국'이다.[4] 또는 기(紀)[5] 다만, 한서에서조차 여후는 본기에 들어있다. 여후 본인의 기록과 두명의 소제에 관한 기록은 고후기(高后紀)라 하여 본기에 기록되어 있다.[6] 애초에 고려는 스스로도 삼한일통을 다시 달성했다는 자부심이 있었으며 건국 이후 비교적 꾸준하게 고구려 계승 의식을 드러냈으며 동시에 또 내부적으로 아무래도 처음 삼한일통을 이룬 신라를 계승했다는 의식도 있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고구려나 신라 둘 중 하나를 버릴 수 없는 처지였다.[7] 물론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국가를 다 조공국이라 하면 사실 제후국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은 이들을 모두 자기네와는 근본이 다른 나라로 여겼다.[8] 오대십국시대에는 춘추전국시대 이후로 드물게 제후국이 존재했는데[7] 그 국가는 바로 오월 그리고 잠깐이지만 남당도 국호를 강남국으로 바꾼 채 송나라의 제후국을 자처했다.[9] 고려는 외왕내제 국가였지만, 사서 고려사는 후임 조선왕조에서 편찬한 책이니 이는 조선왕조 당시의 관점이라고 볼 수 있다.[10] 오죽하면 김유신 열전도 그 외의 기록이 부실했기 때문에 원래라면 사료로 쓰지 않는 김유신 행록을 설화적인 내용을 줄이고 줄여서 만든 것이라 기록해 두었겠는가. 게다가 그 설화적인 내용을 줄였는데도 김유신 열전과 신라본기를 보면 내용이 엄청나게 차이난다.[11] 정사 삼국지조위정통론에 입각했기 때문에 조위, 사마진 황제들만 본기에 있다.[12] 삼국사기에서는 후삼국시대의 경우 경순왕까지의 신라, 고려사에서는 왕건부터 시작되는 고려 왕통만을 정통으로 간주해 본기 및 세가에 실었다.[13] 당시 정권을 잡은 이성계 일파는 이들을 왕씨가 아닌 신돈의 자식으로 몰아붙여 주살하고 고려왕조의 정통성이 훼손되었음을 주장, 공양왕 과도기를 거쳐 본인이 왕위에 올랐다. 고려사 열전에도 신씨라고 바꿔서 신우, 신창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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