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1세 랑가베스
1. 개요
최초의 성을 가진 동로마 황제이자 니키포로스 왕조의 마지막 군주. 자진 퇴위한 몇 안되는 로마 황제다.
러시아 제국의 차르인 미하일 1세과는 별개의 인물이다. 장인이 500년 만에 등장한 아랍인 황제였다면, 이 사람은 최초이자 최후의 유대인 혈통의 황제였다.
2. 생애
2.1. 황제 즉위 이전
그는 에게 해의 함대 사령관이었던 테오필라크토스 랑가베스의 아들로서, 당시엔 장군이었던 차기 횡제 니키포로스의 신임을 받아 그의 딸 프로코피아와 결혼하였다. (790년대) 802년, 장인 어른이 니키포로스 1세로 황제에 즉위하자 미하일은 황제의 부마로서 Kouropalates 라는 직함을 받아 궁정의 대신이 되었다.
811년, 니키포로스 1세는 대군을 이끌고 당시 제국을 괴롭히던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차르 크룸과 전면전을 선포하였다. 하지만 로마군은 대패하였고 니키포로스마저 전사하는 등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후 크룸이 그의 해골로 술잔을 만든 이야기는 유명하다.
2.2. 즉위 과정
니키포로스 사후 그의 아들 스타우라키오스가 황제로 즉위하였지만 그 역시 전투에서 척추가 골절되고 다리가 마비되는 중상을 입어 황제 직무 수행에 어려움이 있었다.[1] 이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은 국가 비상 사태를 극복할 적임자로 전 황제의 사위인 미하일 랑가베스를 추대하려는 기류가 형성되었다.
미하일의 아내이자 차기 황후 프로코피아가 남동생인 황제를 설득하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이에 원로 대신들이 강하게 권유하여 결국 스타우라키오스는 퇴위한 후 수도원으로 은퇴하였고, 미하일 1세는 소피아 대성당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황제로 즉위하였다. (811년 10월 2일) 한편, 퇴위한 스타우라키오스는 부상이 악화되어 이듬해 1월 11일에 사망하며 미하일 1세의 근심을 덜어주었다.
2.3. 세금 정책과 프랑크 문제
미하일 1세는 전임 화제 니키포로스 1세에 의해 제정된 과중한 세금 제도를 폐지하고 감세 정책을 실시했다. 또한 그는 군대, 관료, 그리고 교회에 돈을 관대하게 나눠줬고, 정교회의 입장을 적극 지지해 성상 파괴론자들을 열심히 탄압했다. 한편, 미하일은 로마 교황의 중재를 받아들여 샤를마뉴를 바실레이오스, 즉 군주로 임명하여 이탈리아에서 벌어지던 로마 - 프랑크 전쟁을 종식시켰다. 다만 로마인의 황제는 여전히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었고 샤를마뉴는 서방 황제, 즉 프랑크 인의 황제로 임명하였다.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샤를마뉴는 베네치아의 동로마 제국에 대한 귀속을 인정하고 군대를 후퇴시켰다.
2.4. 대 불가르 전쟁 패배와 퇴위
미하일 1세는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차르 크룸이 제의한 평화 조약을 거절하고[2] 고토 회복을 위해 거병하였다.
양측 군대는 아드리아노플 인근에서 마주쳤다. (813년 6월) 오랜 대치 끝에 동로마군이 먼저 돌격하였고 좌익의 요한네스가 불가르 전열을 흐트러뜨렸다. 하지만 아르메니아 출신의 레오가 이끌던 우익이 독단적으로 도주하여 동로마 진영이 무너졌고, 불가르 군대가 반격하자 패배하였다.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여론 악화를 직감한 미카일은 레오에게 양위한 후수도원으로 은퇴하였다.
2.5. 퇴위 이후
이는 자의로 퇴위한 몇 안되는 사례로, 그는 퇴위한 황제치고는 유례가 드물게도 무사히 장수하였다. 풍운아 미하일은 향년 만 73살의 나이로 프로테우스 섬의 수도원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여담으로, 아버지를 이어 수도자가 된 그의 차남 니키타스 이냐시오스는 9세기 후반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자리까지 올랐다. (1차 재임 847년 ~ 858년, 2차 재임 867년 ~ 87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