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키포로스 1세

 



[image]
코이네 그리스어: 니케포로스 1세(Νικηφόρος Α')
현대 그리스어: 니키포로스 1세
라틴어: 니케포루스 1세(Nicephorus I)
? ~ 811, 재위기간 802 ~ 811.
1. 개요
2. 제위 등극
3. 치세
3.1. 내정
3.2. 외정
4. 죽음
5. 기타


1. 개요


동로마 제국황제. 선조는 아랍인으로 가산 왕국의 왕족이었다고 한다. 필리푸스 아라부스 이래로 5백 년 만에 등장한 아랍인 로마 황제기도 하며, 죽어서 술잔이 된 황제로도 알려진다.
니키포로스 1세의 금발이 동로마로 이주해 온 게르만, 슬라브의 영향 때문이라는 카더라가 있지만, 니키포로스 1세를 그린 콘스탄티노스 마나세스의 연대기에 수록된 삽화는 '''2백여 년 뒤'''에 그려진 것이다. 오히려 재위 말엽 머리색이 회색이었다는 언급이 있는 만큼 실제로 금발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다.

2. 제위 등극


서기 800년, 교황 레오 3세가 프랑크 왕국의 카를에게 왕관을 씌어주며 로마 제국의 황제라는 칭호를 부여하면서 당시 로마 그 자체였던 동로마 제국을 엿먹였다. 게다가 자신이 보호자로서 군림하던 교황의 손에 황제라는 지위의 정통성이 휘둘리는 꼴을 볼 수 없었던 카를은 교황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독보적인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진짜''' 로마 제국의 여제였던 이리니에게 접근하였는데, 인망과 지위를 잃어가던 이리니는 이 혼인 제의를 받아들이려 하였다.[1]
안 그래도 동로마의 사람들은 교황의 행동으로 제국의 긍지와 자존심이 상처 입고 세계관까지 타격을 입은 상황이었는데, 자신들의 여황제인 이리니까지 이러한 움직임을 보이면서 '''갑툭튀듣보잡 괴뢰 황제'''에게 정통성을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결국 폭발하였으며, 802년 궁정 쿠데타를 일으켜 이리니를 폐위시키고 추방하였다.[2] 그리고 당시 이리니에 의해 재무 대신으로 임명되었던 니키포로스를 새 황제로 추대하였다. 이에 따라 동로마 제국에서 이사브리아 왕조가 막을 내리고 니키포로스 왕조가 시작되었다.

3. 치세



3.1. 내정


즉위하자마자 이루어진 정책은 수도원에 대한 세금 감면 정책의 폐지였는데, 전임 황제였던 이리니가 지지기반이었던 교회에 너무 많은 특혜를 주면서 심각하게 재정이 악화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자주 교회와 수도원을 압박하여 국가 재정 확충을 꾀하였으며, 상당한 재정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교회와 수도원에서는 "야이 막장 황제야!"라면서 수시로 디스질을 해댔다. 이 디스질은 죽은 이후에도 한동안 계속됐다(…).
다만 이렇게 확보한 재정은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슬라브족 등 이민족을 대거 받아들이면서 토지를 테마병으로 편성하는 등 테마 제도를 완전히 정비하였으며, 711년부터 개편되기 시작한 세제가 완성되는 등 체제 개편이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즉위 직후에 일어난 바르다네스의 반란 역시 (후에 차례로 황제가 되는) 레오와 미하일[3]이 배신하며 무너졌다. 이후 두 장군은 니키포로스에 의해 중용된다.

3.2. 외정


일단 첫타는 7세기~8세기 초까지 이어진 대혼란 와중에 제국 영내로 떼로 몰려온 슬라브인이었다. 이들은 토착민들을 쫓아내거나 동화시키는 등의 과정을 통해 발칸 반도 전역에 걸쳐서 눌러앉았으며 대혼란 와중에도 제국이 가까스로 행정력을 유지한 동트라키아 지방과 펠레폰네소스 반도 동부, 아티카 지방, 테살로니키 주변을 제외한 그 외 나머지 지역은 제국의 행정력이 완전히 박살난 무법천지였다. 여러 차례의 원정을 통해 니키포로스는 지금의 그리스 일대인 테살리아와 이피로스,마케도니아, 펠레폰네소스 반도 서부 등을 회복해 테마를 설치하였으며 이 지역에 살고있던 슬라브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켜 제국의 신민으로 동화시킴과 동시에 이슬람 세력과의 전쟁으로 황폐화된 아나톨리아 동부에서 그리스계 유민들을 대거 정착시키는 과정을 통해 그리스를 완전히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그리스는 4차 십자군으로 제국이 일시적으로 멸망할 때까지 제국의 영토로 남게 된다. 그러므로 헤라클리우스 이후 7세기 중반~8세기 동안에 동로마가 발칸반도를 제대로 영유하고 있다고 나오는 지도나 영상이 종종 있는데, 이는 실제 역사적 사실과 완전히 틀린 것이다.
그 다음은 아바스 왕조와의 대립이었다, 당시 칼리프였던 하룬 알 라시드는 동로마 제국에 사절을 파견하여 조공을 요구하였는데[4] 니키포로스 1세는 거절하였다. 이로 인해 805년부터 806년까지 양측 사이에 대규모 전쟁이 벌어졌는데, 동로마군이 크게 패하는 바람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강화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이슬람 사가들의 기록에 의하면 이 시기 아바스 왕조에 대한 니키포로스 1세의 외교적 실책이었다고도 할 수 있는데 분명 사방에 불가르족이나 샤를마뉴의 프랑크 제국 같은 막강한 적수들을 두고 있으면서 니키포로스는 이슬람 제국의 최고 권력자인 하룬 알 라시드와의 평화 조약을 무려 세 번이나 본인 쪽에서 어기면서 강력한 적을 본인 손으로 더 늘렸다. 물론 이는 전대 황제인 이리니 여제 시절 맺어버린 불평등한 평화 조약을 제국의 위신을 생각해서, 막대한 조공 금액이 아까워서, 제국 귀족들의 요구 때문에서라도 깨뜨려야 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평가도 있다.[5]
하룬 알 라시드 입장에서도 중앙 아시아 유목민들이 국경을 넘어 호라산 일대를 약탈하려고 들고 하마단 총독의 반란 획책 소문 등으로 제대로 된 침공을 하지 못했기에 망정이지 아바스 왕조 최대 전성기였던 이 시기에 사방에 적을 둔 니키포로스는 이 때 잘못했으면 제국을 멸망으로 몰고갈 수도 있었다. 실제로 2번째로 평화 조약을 파기했을 때에는 당시 하마단 총독을 추궁하려 병력을 동쪽으로 움직이고 있던 라시드가 매우 분노하여 약 14만여 명의 대군을 소집하여 아나톨리아 전역을 휩쓸어버렸다. 라시드가 만약 좀 무리를 해서 콘스탄티노플을 공성하려고 들었다면 어떤 사태로 이어졌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니키포로스는 결국 다시금 조공을 바치겠다고 허리를 굽혔으며 하룬 알 라시드는 이에 동의하여 병력을 철수시켰다.
한편 806년에는 여전히 동방 제국의 제위를 탐내던 카를베네치아와 달마티아 지역을 공격하여 맞서 싸워야만 했다. 다행히 카를의 군대가 패배하면서 이 지역을 지켜낼 수 있었으며, 이 지역을 놓고 벌어진 분쟁은 훗날 니키포로스 1세가 죽고 난 후 맺어진 조약에서 동로마 제국의 공식적인 영토로 인정받으면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최대의 골치거리는 불가르족이었다. 크룸으로 등장하면서 하나로 통일된 불가르족은 주변의 다른 민족들을 위협하였으며, 제국의 영토에도 자주 침입하였다. 특히 초창기에는 불가르족에게 밀려난 슬라브족들이 제국 영토로 대거 침입하면서 혼란을 가중시켰다. 이에 황제는 제국민들을 펠레폰네소스 반도로 이주시키고, 제국에 침입한 슬라브족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정착을 도우면서 안정을 꾀하였다. 사실 이전부터 추진하던 정책이긴 했지만 이를 지속적으로 더욱 체계적으로 밀어붙여 콘스탄티노스 5세가 거둔 귀중한 발칸에서의 군사적 성과 토대를 정치적, 경제적 성과로 굳힌 것이 니키포로스 1세다.
다음으로 불가르족의 위협에 군사적으로 맞대응하려 하였다. 불가르족의 약탈이 계속되자 809년에 불가르족의 수도였던 플리스카를 털어버렸으며 아나톨리아의 테마 부대들과 타그마 부대들을 총동원하여 811년에는 대규모 원정을 단행하였다. 1년간 철저하게 준비한 전쟁이었던 덕분에 초반에는 크룸의 불가르족들을 개발살냈는데 이 때 크룸이 당황하여 사절을 보내 화평을 애걸할 정도로 위세를 날렸다. 하지만 이 참에 불가르족의 위협을 뿌리채 뽑아버릴 심산이었기에 화평을 거절하고 전쟁을 계속 수행하였다.

4. 죽음


[image]
하지만 811년 7월 24일, 도망가는 불가르족을 추격하여 수도 플리스카 근처의 좁은 협곡으로 들어갔다가[6] 그만 함정에 빠져서 갇혀버리고 말았다. 유리한 고지를 장악한 불가르족은 황제가 이끄는 군대를 포위하여 맹공격을 가했고 결국 동로마군은 완전히 괴멸당했다. 황제도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으며 시신은 불가르족들이 수습하여 참수하였고 몸 부분은 승전의 상징으로 전시되었다가 버려졌다. 그의 두개골은 으로 도금하여 크룸이 한평생 술잔으로 사용하였다(중국 춘추전국시대 조양자가 라이벌 지백을 죽이고 한 일과 비슷하다).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전사한 발렌스 이후 두 번째로 전투에서 전사한 동방제국의 황제로 기록되었으며 최후도 비참했다.
아들 스타우라키오스가 그 뒤를 이어 제위를 계승하였으나, 그 역시 이 전투에서 척수가 끊어지는 중상을 입은 상태로 도망쳐 간신히 목숨만 건진 상태였고 당연히 제대로 황제직을 수행할 수 없었다. 그는 3개월 만에 죽었는데 차기 황제로 황후 테오파노를 임명하려 했으나, 궁정에서는 스타우라키오스의 매형[7]미하일 1세를 황제로 추대했다.

5. 기타


크루세이더 킹즈 2의 769년 시나리오에서는 아직 황제가 아니라서 동로마 소속 장수이며, 코드는 70497이다. 크룸도 이 시기에 불가리아 가신으로 있으므로 니키포로스를 플레이할 수 있게 영지를 분봉한 뒤 크룸의 목을 날릴 수도 있다.
[1] 딴에는 카를을 적당히 공동 황제로 격상시켜 외세로 하여금 자신의 권위와 세력을 보조하게 할 속셈이었겠지만, 카를은 공동 황제 그딴 건 잘 모르겠고, 살리카 법에 따르면 여성은 왕위에 오를 수 없었기 때문에 동로마 제위가 공석이나 다름없다고 보았을 것이다. 둘 다 이 어마어마한 혼사의 결과를 자기 나라 관습대로만 안일하게 내다봤던 것.[2] 백년 뒤 콘스탄티노스 7세는 의전서에 동로마 황실이 외국인에게 결코 넘겨 주어선 안 될 세 가지를 명시하는데, 첫째가 그리스의 불 제조법이었고, 둘째가 황실에서 나고 자란 공주였으며, 셋째가 '''황제의 머리 위에 씌어지는 자줏빛 제관'''이었다.[3] 사위이자 사실상 다음 황제인 미하일 1세 랑가베스 말고 그 다음 다음인 미하일 2세[4] 이 부분은 정확히 말하자면 전 황제인 이리니 시절에는 싸움을 피하고자 바쳤던 조공을 신황제가 즉위하고 바치지 않자 하룬 알 라시드가 "너희들 조공 바치기로 해놓고 왜 안 바치냐."고 추궁해온 것에 가깝다.[5] 이슬람 아바스 조 시기 사가의 기록에 의하면 이리니 여제 시절에는 비잔티움 제국 측이 상대적으로 낮은 위치를 자처하며 아바스 조 쪽을 우대하는 문맥의 글로 외교 문서를 써서 외교관을 보냈는데 신황제가 즉위하면서 아바스 조 쪽을 로마 황제에게 통보를 받는 지방 군주 쯤으로 격하시키는 표현의 글로 외교 문서를 써서 외교관을 보냈다고 한다. 이러한 외교문을 통보받고 하룬 알 라시드가 너무나 격분하여 당시 궁정에 있던 대소신료들이 얼굴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을 정도였다고.[6] 그래서 이 황제가 죽은 전투명이 플리스카 전투이다.(Battle of Plisca)[7] 니키포로스 1세의 사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