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군

 

1. 소개
2. 역사
2.1. 왕정 시기
2.2. 공화정 시기
2.2.1. 마리우스의 개혁, 그리고 내전기
2.3. 제정 시기
2.3.1. 아우구스투스의 재편
2.3.2. 고대 말기
2.3.3. 중세 시기
3. 조직
3.1. 공화정 중기
3.1.2. 동맹시 보조군 (Alae Sociorum)
3.2. 공화정 말기에서 원수정 시기
3.3. 전제정 시기
3.3.1. 리미타네이
3.3.2. 코미타텐세스
3.3.3. 스콜라이 팔라티나이
3.3.4. 포에데라티
4. 군단 일람
4.1. 공화정 후기
4.2. 제정시기
5. 병과
5.1. 공화정 중기
5.2. 공화정 후기, 제정 초기
5.3. 전제정 시기
5.3.1. 기병
5.3.2. 보병
6. 계급 및 보직
6.1. 지휘관 및 장교
6.2. 부사관
6.3. 사병
7. 훈련
8. 로마 군인의 생활
8.1. 로마군의 봉급과 소비
8.2. 로마군의 식사
8.3. 혼인 등 가족 생활
8.4. 의료 복지
8.5. 군법과 형벌
8.6. 군기#s-2 (軍旗)
9. 기타
10. 관련 문서


1. 소개


고대 로마에서부터 동로마 제국까지의 로마의 군대.

2. 역사



2.1. 왕정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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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의 로마군은 부족 단위로 구성된 집단을 이 이끄는 식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다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왕이 징병제로 제도를 개혁하여 이것이 정착된다.
기원전 500년 이전까진 대략 9,000명 정도를 징병했는데 6,000명 정도는 중보병이었고 2,400명은 경보병, 그리고 600명은 기병으로 구성되었다. 왕이 두 명의 집정관으로 바뀌면서 이 9,000명은 두 집정관이 나눠서 지휘하게 되었는데 따라서 각각 4,500명씩 지휘하게 되었다.
소규모 국가답게 당시 잘 나가던 북쪽의 에트루리아와 바다 건너 그리스를 적극적으로 모방했으며 에트루리아에게 패배한 이후에는 밀집대형 전법을 익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의 팔랑크스와는 달리 로마는 백인대를 구성했는데 이는 소규모 부대로 주변 도시들을 약탈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대다수의 군인들이 농경기엔 농사를 지었다. 덕택에 원정에선 약한 모습을 종종 보였는데, 큰 문제가 안 되었던 것이 당시 '로마'는 현재의 로마시보다 작았기에 방어적 전투 혹은 로마 주변에서 전쟁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사용하던 장비는 에트루리아군이나 그리스군과 큰 차이가 없었으리라 추정된다.
자세히 알기 힘든 것이 로마군의 아무리 예전 모습을 추정하더라도 공화정 시기 정도이기 때문에 왕정 시기의 로마군에 대해선 제대로 알기 힘들다. 일단 남아있는 자료가 거의 없고, 그나마 남아있는 사료 등도 믿기 힘든 게 많아서 제대로 조사하기 힘들다. 병력 구성이 어떤 식이고, 어떤 장비를 착용했고, 어떤 무기를 사용했는지 자세히 안 남아있고, 단편적으로 있어서 거의 상상의 영역으로 메꾸는 식이다. 사료가 적으면 유물이 이를 보완해주면 되는데, 유물도 적어서 연구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2.2. 공화정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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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비우스 군제개혁[1] 이후 로마군의 모습. 좌로부터 하스타티, 벨리테스, 트리아리, 프린키페스이다.
공화정 시기의 로마군은 징병된 시민을 중심으로 조직된 '''시민병'''이었다. 자영농으로 구성된 시민들은 무장을 개인적으로 조달했으며, 따라서 재산에 따라 무장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고 군에 있어서 차지하는 역할도 달라졌다. '''사회적 계급이 곧 군의 계급이 된 셈이다.''' 시민들은 재산 액수에 의해 분류되어 최상위 계층은 기병과 중장보병을, 중위 계층은 중장보병을, 하위 계층은 경장보병을 맡는 시스템이 구축되었다. 로마군의 군율이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빡세면서도 동시에 유연성이 있거나 지휘관의 자질이 매우 중요시된 것도 바로 이 시민병 위주의 시스템 때문이었다.
물론 아무나 입대시킨 건 아니었고, 만 17세 때 징병검사를 실시했는데 지적장애, 신체 결손, 중증 질환 등을 앓고 있는 사람은 제외되었으며 나머지에게 현역 판정을 때렸다. 그리고 집정관이 군을 소집할 때 이렇게 현역 판정을 받은 17세부터 시작해 45세까지의 남성이 광장에 소집되어 지명된 사람이 차출되는데, 이들이 1년간 병역을 수행하게 된다.[2]
이렇게 재산별로 나뉜 병사들은 백인대장이 이끄는 백인대에 소속되었다. 이들은 각각 작은 정사각형들을 구성하면서 하나의 커다란 직사각형을 이루었다. 또한 무장의 질과 나이에 따라 벨리테스, 하스타티, 프린키페스, 트리아리, 에퀴테스로 나뉘었는데, 벨리테스는 투창병, 하스타티는 경보병, 프린키페스는 중보병, 트리아리는 중창병 그리고 에퀴테스는 기병이었다.
  • 벨리테스: 매우 가볍게 무장하였다. 많은 수의 투창을 들고 다니며 전투 개시 시 최전방에서 투창을 던지는 임무를 맡았다.
  • 하스타티: 젊은 병사들로 이루어진 경보병으로 전선의 맨 앞줄에 위치하여 적의 체력을 소모하는 역할을 맡았다.
  • 프린키페스: 로마군의 핵심이자 주력을 이루는 병력으로 이들은 젊고 전투 경험이 풍부한 30대에서 40대 초반의 시민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 트리아리: 나이가 많은 고참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최후방에 위치하며 여러 가지 전술적 움직임에 동원되거나 불리한 전선에 투입되는 등의 보조적인 역할을 맡았다.
이러한 시스템을 '''마니풀라르(manipular) 시스템'''이라고 하는데, 삼니움 전쟁 때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로마 고유의 독특한 구성은 로마군으로 하여금 다른 세력에게는 볼 수 없는 상당히 유기적인 움직임을 가능케 하였으며 따라서 로마군은 다양한 전술적인 움직임을 실행할 수 있었다. 개별 시민들의 전투력 자체에는 그다지 큰 기대를 하지 않았고 유기적인 집단전 수행을 중시했다.
또한 로마군은 그들과 같은 라틴족 도시들로 이루어진 라틴 동맹의 동맹시 또는 속국들에게서 보조병을 징집하여 동원했다. 보통 로마 군단병의 좌우 측면에 배치되어 '''날개(Alae)'''라고 불린 이 동맹시 보조병의 개념 역시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로마만의 독창적인 것으로, 이는 로마 군단과 비슷한, 종종 더 많은 규모의 병력을 동맹시로부터 제공받아 로마군과 함께 싸우는 것이었다. 특히 동맹시 기병대의 규모는 로마 시민 기병대의 3배에 달했고, 전투력도 로마 시민 기병에 비해 우수하여 한니발은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 기병대를 집중 공략하고 동맹시 기병대는 누미디아 기병으로 견제하기도 했다. 동맹시 보병의 1/5, 기병의 1/3은 '''정예부대(Extraordinarii)'''로 따로 편성되어 선봉이나 집정관의 호위 등 중책을 맡기도 했다. 로마는 보조병을 제공받는 대가로 동맹시에게는 외교권을 제외한 완전한 정치적 자치를 부여하였으며, 세금 역시 강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로마는 그들에게 군사적인 보호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보조병의 존재는 로마의 군비를 크게 절감시켰고, 군사력 또한 크게 상승하게 했다. 그 결과 아테네나 테베와 같은 그리스의 대도시에 비해 로마가 해마다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의 양은 상당하였다. 따라서 로마는 대규모의 총력전이 가능하였으며 포에니 전쟁때는 해마다 10만이 넘는 병력을 편성할 수 있었다.[3] 이 때문에 에피루스의 피로스 1세는 로마를 머리를 잘라도 잘라도 다시 자라나는 히드라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한니발이 이탈리아에 침입함으로써 발발한 2차 포에니 전쟁때 로마인들은 한니발로부터 기병 운용의 중요성을 터득했다. 한니발은 우세한 기병 전력을 바탕으로 이들의 빠른 기동력으로 보병 배후로 기동한 뒤 돌진하여 충격을 주는 전술을 즐겨 사용했고 이는 로마군이 초기에 연전연패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러한 전술에 연패하고 또 칸나이 전투에서 사상 최악의 패배를 경험한 로마인들은 기병 전력의 확보에 열을 올리게 되었으나 기존의 귀족으로부터 기병 전력을 조달하는 방식으로는 충분히 확보할 수 없었다. 또한 이탈리아의 지형은 대부분이 산지라서 말을 키울 목초지가 부족해 말을 많이 키울 여건이 안 되었다. 때문에 로마인들은 기병부대를 대거 운용하는 이민족 부대 전체를 고용하는 방식으로 기병 전력을 조달하고, 더이상 귀족으로부터 기병을 조달하지 않는다. 그 결과 에퀴테스는 더이상 기병 자체가 아닌 기사계급을 뜻하는 명칭으로 굳어지게 되었으며, 라틴 동맹시 기병대의 중요성 또한 서서히 감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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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방식의 기병 조달은 훗날 제국 후기에 보이는 로마군 이민족화의 불씨가 되었다는 게 일반적인 통설이다. 단, 이 말은 더 깊이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제국 후기에 접어들어 기병의 중요성은 점점 높아지지만 적어도 3세기까진 말만 기병이지 상당수는 하마 보병이었으며, 4세기 때는 이런 서술이 확실히 들어맞는 시기이긴 하나 여전히 제국은 보병을 기병보다 훨씬 더 많이 운용했고, 야만족 부족 단위 계약 용병들인 '''포이데라티'''들은 여전히 제국 정규병들의 존재 탓에 행동을 제약당했다.
또한 아드리아노플 전투 이전까지 포이데라티들은 개인별 혹은 소규모 그룹 단위로 로마군에 입대했으며, 대규모 이민족 집단이 로마로 귀순해오면 제국 전역으로 분산시켜 이들이 힘을 결집하는 것을 막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고향인 다뉴브 강 연안에서 멀고도 먼 하드리아누스 성벽 인근에 배치된 사르마티아족 기병들이다. 흔히들 생각하는 로마군 최악의 암흑기는 5세기의 이미지인데 대부분의 책들은 2~5세기에서 이어지는 경과들을 단 몇 줄로 축약하는 탓에 이런 오해가 생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여전히 주의는 필요하다.
또 로마인들은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군이 밀집상태에 빠져 전멸한 것을 교훈으로 삼아 기존의 마니풀라르 방식의 전투를 개혁하였다. 로마인들은 백인대들을 따로 모아 정사각형을 이루게 한 뒤 이를 한 명의 지휘관이 지휘하도록 하였으며 이는 훗날 마리우스가 '''코호르스'''[4]라 명명함으로써 공식화 되었다.
이 코호르스의 편성으로 인해 칸나이 전투와 같이 밀집되는 상황이 되면 대대장이 독자적인 판단으로 배후로 방향을 틀거나 전열에서 이탈하여 협공에 대비하는 식의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게 하여 밀집 포위에 대한 저항력을 높이게 되었다.
이처럼 시대에 맞는 개혁과 기병의 운용으로 인해 로마군은 더 강해졌으나 전장이 확대되면서 자영농인 시민들에게 군복무는 커다란 부담이 되었다. 장기간의 해외원정으로 농장이 황폐화되고, 전쟁의 결과 경제적으로 몰락하는 시민이 많아졌던 것이다. 그로 인해 군대에 투입되는 인적 자원도 고갈되어 갔다. 때문에 점차 징병을 위한 최소 자산 수준을 낮추는 조치가 취해졌다. 그러나 로마 역사상 최대의 위기였다고 할 수 있을 한니발 바르카와의 제2차 포에니 전쟁 중에도 무산자는 소집되지 않았던 이유를 무시한 결과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 당장 자산이 낮은 로마 시민들의 군대는 무장 수준이 떨어졌고, 무산자들은 체력적인 면에서도 빈약한 데다가 무장도 제대로 못갖추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로마군의 전체적인 질적 저하를 초래하였다.
보조병을 담당했던 로마의 동맹시들도 점점 상황이 안 좋아졌다. 원래 초창기에는 로마가 동맹시들에게 위에 언급한 것처럼 외교권을 로마가 가지고 있는 것을 빼고는 완전한 정치적 자치를 보장하고, 군사적인 보호를 제공했지만 가면 갈수록 동맹시의 자치를 인정하지 않으며 세금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또한 동맹시의 자치권이 보장된다해도 동맹시 시민들은 준로마 시민이지 정식 로마 시민이 아니라서 여전히 차별했다. 그래서 이에 분노한 동맹시들이 나중에 반란을 일으키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따라서 공화정 말기 때 로마군은 총체적인 위기를 맞게 되었다. 스페인에서 벌어진 누만시아 전투에서 로마군은 대패하였고, 킴브리족과 테우토네스족의 남하를 저지하려고 보낸 두 명의 집정관은 목숨을 잃었으며, 아라우시오 전투에서는 80,000명의 로마군이 전멸당했다(킴브리 전쟁). 또한 유구르타 전쟁에서는 계속 고전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 등장한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또 다시 시대에 맞는 개혁을 함으로써 로마 공화국을 위기에서 구했다.

2.2.1. 마리우스의 개혁, 그리고 내전기


마리우스의 집권 이전, 시민군의 의무를 지는 자영농을 바탕으로 하던 로마군은 라티푼디움의 확산과 자영농의 몰락으로 인해 인적 자원이 고갈되며 전투력이 저하되는 심각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심지어 마리우스가 군제 개편을 하기 전 로마군은 게르만족의 대대적인 침공에 처참하게 무너지기까지 했다(킴브리 전쟁). 지중해 패권국의 군대가 붕괴되는 것은 패권의 연쇄적인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로마에게는 희대의 위기였다고 할 수 있다. 집정관에 선출된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군제 개혁을 실시하였는데 그는 재산에 따라 징집하던 관례를 없애고, '''무산계급까지 모병하는 대신에 그에 대한 임금을 지불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방식대로 재편된 로마군은 거짓말처럼 게르만족을 완벽하게 격파했다. 물론 마리우스 본인의 군사적 역량이 뛰어났던 것도 영향이 있었겠지만.
이 개혁으로 인적자원 고갈 문제가 해결되었지만, 상설 군단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계약직으로 운영된 것이 이 시기 로마군의 한계였다고 할 수 있다.''' 병역 기간이 정해진 것이 아니며, 때에 따라 봉급을 지불하는 군대를 모집하고, 필요가 없으면 군대를 해산하는 식이었던 당시 로마군은 이전과는 달리 국가가 아닌, '''전리품을 배분해 주거나 돈을 더 많이 주는 군사령관에게 충성하는 사병이나 용병처럼 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게다가 무산자들로 이루어진 로마 군단병들은 당시 정치에서 소외된 계급이었다. 고대 로마의 정치제도를 보면 잘 알 수 있는데, 로마의 관료를 뽑는 백인대 집회에서 무산자 계급은 사실상 투표권이 아예 없었다. 재산이 없는 계급에 해당되는 무산자 계급은 1,000명이건 10,000명이건 그 그룹 전체가 192표 중 '''1표'''만 행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한 표가 영향을 준 적은 로마 역사상 한 번도 없었는데 그 이유는 로마의 선거제도는 투표를 진행하면서 192표 중 과반수가 된 시점에서 투표를 중단하였기 때문이었다. 무산자는 투표권을 가장 마지막에 행사하였고 따라서 이들이 발언권을 행사하기 전에 이미 선거가 끝나게 되었다. 그 결과 무산자는 백인대 선거 자체에 구경하는 목적 이외엔 참여의 의미가 없었고, 따라서 이들은 공화정 정치가들의 선거 운동 대상이 아니었다. 덕분에 누구도 이들을 제대로 생각해주지 않았으므로 전리품이나 봉급으로 아무리 돈을 모은다고 해도 한도가 있었다. 전쟁은 자주 일어나는 편이었지만 충분하지 않았고, 병사로 일할 수 있는 것은 짧은 기간에 불과했다. 군대를 이용한 실업자 흡수는 결국 일시적인 미봉책에 불과했으며 자칫 현대 제3세계 군대 대다수처럼 사회의 쓰레기장으로 전락할 우려도 있었다.
이때 군사령관들은 휘하 퇴역병들의 복지를 보장해 줌으로써 지원병의 자질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게 된다. 일단 상당한 경제적 격차에도 불구하고, 피비린내나는 격전에서 함께 싸우면서 지휘관과 병사들 사이에서는 '전우'라는 인간적인 유대감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러한 사례는 《내전기》의 여러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차후 원로원 의원으로서 정계 영향력 확대를 노리는 군사령관들은 잠재적으로 자신의 열렬한 지지자가 될 수 있는 퇴역병들의 생계를 보장해서 지속적인 지지 세력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물론 루쿨루스처럼 그냥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여 적은 봉급만 주었을 뿐 병사들에게 전리품을 나눠주지 않은 경우도 있었지만 루쿨루스는 그 때문에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기 직전까지 간 상태에서 병사들의 반항과 파업으로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에게 전공을 빼앗기고, 차후의 정치적 입지도 불안해지는 등의 대가를 치렀으므로 야심있는 군사령관치고 자신의 부하들을 어느 정도 챙겨주지 않은 사람은 없다시피했다.
따라서 군사 지휘관들은 퇴역한 병사들의 생계 대책을 위해 정착지와 식민지를 달라고 요구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원로원은 이러한 요구에는 대체로 무감각하거나, 뭉그적거리며 제대로 처리해주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원로원의 지배적인 파트리아키 파벌 입장에서는 하층민으로 구성된 군대 역시 이전과 마찬가지로 불평쟁이 무산자 집단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그들은 이제 어느 사회에나 있는 무능력한 불평꾼 무산자 집단따위가 아닌, '칼 든 군인'이었다.
과거의 개혁자 그라쿠스 형제는 단지 한 줌의 지지자와 무력하고 조직되지 못한 무산 대중 군중밖에 없었기 때문에 원로원에게 허무하게 참살당했다. 그런데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 때문에 이 모든 조건이 뒤집어져 버렸다. 과거 '재산순'으로 유산 계급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처럼 담당하던 로마의 군사력이 이제는 무산자들이 담당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들은 이제 노련한 전사였으며 칼을 가지고 있었다. 더이상 무질서한 대중의 무리가 아니라, 당대 최고의 조직체인 로마 군대라는 체계를 통해 수천 수만이 조직화되어 있었다. 또한 로마의 대외전쟁을 수행함으로써 자신들은 엄연한 로마 제국의 일원이고, 제국의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는 자부심까지 생겨나 있었다. 물론 군사적 능력만 존재했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군단 사령관은 정치-군사 모든 면에서 유능한 인물들이었고, 이해관계를 같이하며 인간적으로도 유대감이 깊은 정계 유력자가 자동으로 그들의 지휘관이자 대표자가 될 수 있었다.
빈털터리 무산자 계급으로 시작하여 타국을 약탈하거나 전쟁 배상금을 받아내 인생을 바꾸는 재미를 알게 된 병사들의 눈앞에는 훨씬 먹음직스러운 먹이가 들어왔다. 바로 지중해의 모든 재물이 모여든 조국 로마였다. 야심많은 군사령관들은 이런 보상 심리를 이용하여 로마군이 조국을 향해 칼을 휘두르도록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외세의 힘을 빌리는 매국행위도 아니고 어차피 내부 정치 다툼이었으니 더욱 그랬다. 군단 병사들은 야심 많고 능력도 좋은 군단 사령관들의 의중에 쉽게 동조하였다.
이리하여 '''군사력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하는 쿠데타가 연속으로 벌어졌으며,''' 이 최초의 쿠데타인 술라의 로마 진군은 고작 마리우스가 군제 개혁을 단행한 뒤 10여 년 뒤에 일어나게 되었다. 술라 이후에도 많은 장군들이 쿠데타를 시도하였고 그들 중 권력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 장군들은 율리우스 카이사르폼페이우스, 옥타비아누스안토니우스 등이었고 이들은 서로 내전을 벌이는 형태로 권력 다툼을 벌였다. 결국 이러한 내전이 지속되다 옥타비아누스가 정국 불안정을 없애기 위한 목적으로 공화정 체제를 무너뜨리는 대신 자신이 직접 통치에 나섬으로써 공화정은 종언을 고하게 되었고 제정, 즉 원수정이 시작되었다.

2.3. 제정 시기



2.3.1. 아우구스투스의 재편


혼란을 종식시킨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는 항복한 병력까지 합쳐 60개 군단, 50만명에 가까운 대병력을 보유한 명실상부한 최고사령관이었으나 그 병력을 그대로 유지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는 군대가 본질적으로 경제력을 소모하는 비생산적 집단이며, 당시 로마의 경제력을 생각하면 적절한 수준을 크게 초과하는 병력 규모였기 때문이다.[5] 그래서 늘어난 병력을 28개 군단 17만 명까지 감축했다가 너무 부족하다 싶자 보조병을 포함해 30만 명 정도로 늘렸다. '''아욱실리아(Auxilia)'''[6]라는 '''보조병을 군단병과 마찬가지로 정규병으로 편입'''한 것이 아우구스투스였다. 공화정 후기부터 기용되었던 누미디아 기병, 갈리아 부족병, 시리아 궁병 등이 그대로 보조병으로 편입되었고, 일리리아 등지에서 새로운 보조병 충원도 계속되어 보조병이 군단병과 비슷한 규모로 정착되었다. 또한 이때부터 '''복무기간을 비롯해 여러 가지가 규정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군단에 복무하는 병사는 20년. 보조병은 25년을 의무복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3개 군단이 전멸하면서 25개 군단으로 줄어들었는데 방어선이 그럭저럭 갖춰지면서 굳이 보충할 필요가 없다 싶었는지 그대로 내버려두었고, 이후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절부터 브리타니아 원정을 개시하면서 군단이 다시 증원되어 오현제 시대 직전 28개 군단, 오현제 시대에 30개 군단,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때 33개 군단으로 증원되었다.
한편 '''사령관의 개인적인 군단 모집과 사령관이 병사들에게 사적으로 포상하는 것을 금지하여 군벌화를 막았다.''' 심지어 사령관이 휘하 병사들을 부르는 호칭마저 변화시켰다. 본래 사령관은 휘하 병사를 전우라는 의미를 가진 '콤밀리테스'라고 불렀는데, 이를 단순한 휘하의 병사라는 의미인 '밀리테스'로 부르도록 했다. 물론 아우구스투스 본인이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족은 계속 '콤밀리테스'를 자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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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병사들의 갑옷도 이 시기에 사슬 갑옷의 일종인 로리카 하마타(Lorica Hamata)에서 하프 플레이트 갑옷 종류인 로리카 세그멘타타(Lorica Segmentata)로 서서히 대체되기 시작한다. '''흔히 로마의 병사 하면 떠올리는 대중적 이미지는 이 시기에 정립되었다.'''

물론 아우구스투스가 철저하게 방어에만 전념한 것은 아니었으며, 재위 중반기에는 양자인 티베리우스드루수스 형제를 등용하여 라인 강 너머 엘베 강까지의 제패를 통해 게르마니아를 제국의 영역 내에 확보하겠다는 야망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르미니우스에게 바루스가 이끄는 3개 군단이 토이토부르크 숲에서 전멸당하면서 이러한 움직임은 멈추게 되었고, 제위를 물려받은 티베리우스는 제국의 방어선을 라인 강으로 한정하며 게르마니아 제패를 포기했다.
결국 로마군은 아우구스투스가 게르마니아 제패를 포기한 이래 사실상 국경 방어군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으며, 전성기 로마의 국경선은 1만 킬로미터에 달했기 때문에 국경을 방어하는 것 자체가 절대로 만만한 임무가 아니었다. 실제로 아우구스투스 이후의 황제들이 새로 속주로 삼은 곳은 기껏해야 브리타니아와 다키아에 불과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로마군이 철저하게 요새화된 국경선에 틀어박혀 수비만 한 것은 아니었다. 로마군은 맞기 전에 먼저 때린다는 교리에 충실했으며,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야만족을 먼저 타격해 쓸어버리는 작업을 통해 국경을 방어했다.
물론 아르사케스 왕조 파르티아 제국이 버티고 있었던 동방 국경에서는 이런 방식을 시행하지 않았다. 파르티아가 강력한 적인 동시에 중요한 무역 상대였기에 그대로 국경 방어에만 전념했다. 기본적으로 열린 국경 시스템에, 전쟁이 나면 국경을 닫는 스타일이었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민족주의적이고, 중앙집권화된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국의 출현 이후 모든 것이 바뀌었다. 문제는 이 씨앗을 로마가 뿌렸다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니시비스 전투 항목을 참고.[7]
제정 시대 로마에 있어 가장 중요한 국경은 라인 강도나우 강, 그리고 유프라테스 강이었다(물론 유프라테스 '강 자체'가 국경이라고 보기는 좀 어렵지만). 로마 제국은 이 세 국경선에 군사력의 핵심인 다수의 군단을 배치했다. 그리고 군단병과 비슷하거나 많은 수의 보조병이 1차 방어선을 맡은 전력이었다. 보조병들은 주로 현지인으로 구성되었으며, 일반적인 전투 상황일 때는 보조병 선에서 대부분의 처리를 했고, 대신 전면전은 군단이 수행했다. 그리고 제대할 경우 로마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다수의 병력을 빠르게 이동시킬 수 있는 로마식 가도망과 곳곳에 들어선 초소와 요새가 결합된 유기적인 시스템은 제정 건설 이후 20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제국에 팍스 로마나를 제공했다.

2.3.2. 고대 말기


할리우드 영화에서 대중들이 흔히 본 군단병 이미지가 아닌 이 시대의 로마군의 모습은 군인 황제 시대가 끝나고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 1세가 군제를 개편하편서 새롭게 나타난다. 로마군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국내외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는 편제, 무기, 동원 체제, 주둔지에 걸쳐 광범위하게 이뤄졌고, 어느 한순간 모조리 바뀐 게 아니라서 특정할 수는 없다. '국가'라는 게 특정 시대의 문물과 제도를 수백 년이 흘러도 융통성 없이 고수하는 정적인 존재가 아님을 감안하면, 당연히 군대와 관련해서도 당대의 현실에 맞게 변화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로마군이 원수정 말기와 전제정을 거쳐 변화했던 상황에 대해서는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 1세 그리고 로마인 이야기/비판 문서의 선방어 부분 오류(리메스) 참고.
4~5 세기 게르만족들은 로마군의 진법과 훈련을 모방해서 강해졌고, 부족에서 왕국으로 발전하는 단계를 거치고 있었으며, 사산조 페르시아는 아르사케스조 파르티아를 타도하면서 어설픈 봉건 제도를 타파하고, 옛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의 영광을 되찾을 것을 국시로 분명히하였다. 즉 게르만족들은 카이사르가 각잡고 두들겨 대던 그 게르만족들이 아니었으며 사산조 페르시아의 경우는 간혹 로마가 방심하면 어처구니 없이 지기도 하던 그때의 파르티아보다 더욱 강해진 상태였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내우외환. 즉 로마군의 적들은 인력이 늘어나고 병력과 제도까지 일신해서 동원력과 단위 전투력이 상승했다. 더군다나 훈족의 압박으로 민족 대이동이 시작된 후에는 죽기 살기로 싸웠기에 고트족 난민의 경우에는 무기를 들 수 있는 남성 전부가 전투병력이었다. 이걸 막아내야 하는 로마군은 재정 악화와 병력 자원의 감소로 경제적 부양 상태가 갈수록 나빠져 단위 전투력과 동원력이 떨어져버리는 시기가 겹쳐버렸다.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일단 재정 악화야 로마의 경제제도 자체의 문제점에서 시작된 것이고, 병력 자원의 감소는 로마 시민들의 입대 기피로 인해 모집이 힘들어진 데다, 귀족들도 소작제를 하면서 자신들의 소작농들이 입대하면 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 손해라는 걸 잘 알기에 소작농들의 입대를 적극적으로 막았다. 또한 군인들도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군대에 더는 있기 싫어하여 탈영이 증가했다. 탈영자를 엄하게 처벌하고 입대 시 낙인을 찍었지만 그래도 탈영이 계속될 수준으로 심각했다. 그래서 '''모병제에서 다시 징집제로 회귀'''한 이후로는 병역을 회피하기 위한 자해도 만연하였다. 주로 손가락을 절단하는 자해(이러면 활줄을 당길 수 없으니 병역에서 제외된다)가 주를 이루었고, 여러 황제들이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병역 회피를 위해 자해를 한 자들을 일종의 공익으로 배치하였고,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자해를 하면 화형시키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리고 테오도시우스 1세는 자해를 한 사람도 그냥 징병하였다. 또한 계속된 전쟁과 내전, 그리고 전염병(165년의 '''안토니우스 역병'''과 250년의 '''키프리아누스 역병''')으로 인한 인구 감소도 병력 자원의 악화에 영향을 미쳤다. 이런 상황에서 바깥의 적이 강해지니 내우외환의 상태가 된 것이다.
'''로마 당국과 시민들이 사치와 나태에 빠져 향락에 쩔은 나머지 문제를 몰랐고 수정도 하지 않았다는 이상한 오해도 있는데, 아직도 한국 혹은 미국의 일부 일반인 대상의 매체에선 이런 내용으로 서술하지만 이는 완전히 틀린 소리다.''' 종전의 방어 전략이 더 이상 통하지 않고, 기존의 전술 또한 정작 국토를 방어하는 분야에서는 효율이 떨어졌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로마 정부 또한 계속해서 군제 개혁을 단행하였다.
즉, 본격적인 군제 개편과 전술 혁신을 추구했던 황제들은 제국에서 수없이 많았고, 또한 뛰어난 게릴라전과 공성전, 그리고 대규모 전투를 모두 잘하는 명장인 장군 황제도 많이 배출되었다.
다시 언급하자면, 과거의 로마군이었다면 라인/도나우 방어선에서 야만족의 선제공격 이전에 병력을 집결시켜 야만족의 본거지를 공격, 로마군이 강점을 보이는 평원에서의 회전을 벌이는 식으로 전투를 전개시켰겠지만 어느 시기부터는 더이상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이는 인력이 부족한 이유도 있었고, 야만족들도 평원에서의 회전에서 이전과는 달리 일방적으로 로마군에게 휘둘리지 않은 것이 원인이었다.
기존 로마군 방어 체계의 패러다임이던 선방어가 더이상 유용하지 못한 상황이 온 것이다. 보병 중심의 선방어는 유효한 방어수단이라고 할 수 없었고, 로마군은 결국 군사 교리의 전환을 선택한다. '''수많은 게르만 부족들이 여러 전선에서 습격할 때 방어선에 배치된 방위군(Limitanei, 리미타네이)들이 버티는 동안 중앙의 기동 부대(Comitatenses, 코미타텐세스)가 지원하러 가는 식이었다.''' 다만 이런 변화 역시 단기간이 아니라 2~4세기 동안에 점진적으로 일어났다는 데 주의할 필요가 있다.[8] 병력을 늘렸다지만 오랜 훈련과 많은 비용이 드는 기병을 그렇게 단시일 내에 늘릴 수는 없었으며 결국 보병의 기병으로의 전환은 보병을 하마 기병으로 만드는 것부터 우선되어야만 했다.
말을 타고 하는 진정한 의미의 기병 확충은 콘스탄티누스 1세의 시절까지도 제대로 완비되지가 못했고, 이는 콘스탄티우스 2세율리아누스 그리고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시기에 와서야 겨우 이뤄진다.[9] 스틸리코아에티우스의 그 로마 이미지만 기억한다면 이런 조치를 어떻게 할 수 있었겠나 이해가 어렵겠지만, 이런 이미지의 로마 제국은 4세기 후반 부터의 서로마 제국에 한정되는 데다 흔히들 기억하는 막장 로마 제국은 동서 로마 제국 중 서로마 지역에 한정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때 이뤄지는 기병 확충 및 제대로 된 기병 수급 체제는 이후 제국 역사가 지속되는 한 계속되었다.
유명한 원수정 로마군을 상징하는 무구들, 즉 '''필룸, 글라디우스, 스쿠툼'''은 한순간에 사라진 건 아니었다. 가장 먼저, 그리고 제일 눈에 띄게 변화가 시작된 것은 진형의 변경이었다. 스쿠툼글라디우스는 밀집 진형 위주의 과거 군단병 체제에는 적합했지만, 게르만족에 의한 게릴라전과 기습, 추격이 난무했던 후기 로마군에게는 적합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점차 병사들의 질이 떨어지는 관계로 훈련도 좀처럼 체계적으로 받지 못했기에 종전의 글라디우스보다 긴 검인 '''스파타'''를 쓰게 되었고, 방패도 테스투도진형을 짤 수 없는 '''원형 방패로 바뀌게 되었다.''' 다만 이런 변화도 일부 특정 황제들이 이제부터 로마군은 스파타와 원형 방패만 쓰라고 해서 한순간에 바뀐 건 아니며, 역시 점진적으로 이뤄졌다. 글라디우스는 한꺼번에 스파타로 대체된 게 아니라 천천히 검신이 길어지는 과정을 거쳤으며, 스파타로 불리는 검도 꽤 오랫동안 계속 글라디우스로 불렸다. 또한 직사각형 방패 스쿠툼은 적어도 3세기 후반까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갑옷은 판금갑옷 계열인 로리타 세그멘타타에서 '''찰갑과 사슬 갑옷'''으로 돈이 되는 한에서 교체되어 나갔고, 투구도 고대 로마군의 투구에서 점점 단순한 '''원뿔형 투구'''로 바뀌어 나간다. 그래도 초기에는 고대 로마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으나, 로마군 특유의 양식에 맞춘 장식들이 제작단가를 꽤 올려먹는 탓에 점점 단순한 모양으로 바뀌어나가게 된다. 이것은 돈의 문제때문이었다.
어쩌면 방패와 칼, 갑옷보다 훨씬 중요한 변화일지도 모르는 변화는 바로 투창에 있었다. 투창은 로마 극초기부터 로마 말기에 이르기까지 위력적인 무기 취급을 받았지만, '''비싸다'''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었다. 고대 로마군의 막강한 견제력의 주축을 자치했던 그 유명한 '''필룸'''은 분명 손에 꼽을 만큼 막강한 투창이었지만 비용도 비용이지만, 필룸의 특성상 한 번 쓰고 버려야 했기 때문에 그 부담은 어마어마했다. 게다가 더럽게 무겁기까지 했기 때문에 예산 문제와 기동성 문제가 동시에 결합된 끝에, 결국 버틸 수가 없게 되어 도태되어 버리게 된다. 그래도 투창은 뛰어난 무기였고, 더 싼 것으로 바꾸는 한이 있어도 유지되었으나, 결국 이조차도 정신나간 유지비와 무겁다는 병사들의 불만이 겹처져 아예 '''베르툼'''이라 불리는 다트로 교체되었다. 이 베르툼의 경우 표준 규격이 없었고 각자 취향대로 만들었는지 무게와 크기가 천차만별이라 무거운 축의 경우 180~200g 정도이고 말이 다트지 정확하게 말하면 대형화살을 손으로 날리는 것과 크게 차이가 안났다. 다트라고 분류할 때는 중다트라고 말해야 할 정도였다. 어지간한 현대의 DMR소총이나 경기관총급의 무게인 필룸 2~3개를 들고 다니는 것보다는 가벼웠으므로 5~6개 씩 가지고 돌아다니면서 투척이 가능했다. 단, 필룸이 가지는 장점인 비상시 1회용 대기병용 창의 역할을 더이상 바랄 수 없게 된 것은 큰 단점이 되었다. 이 부분은 제정 시절 파르티아 등과 붙으면서 보강한 원거리 전력과 제정 말기의 기병 전력이 커버했다.
이렇게 로마군이 점점 철벽같이 틀어막은 후 상대를 나가 떨어지게 만드는 레기온 방식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은 당장 중대한 적성국인 사산조 페르시아의 기병대 발전과도 연관되어 있었다. 로마 후기에 이르면 이미 중세 기사에 가까운 형태로 발전한 '''랜스'''가 등장해 있던 시점인데, 이 랜스는 특히 사르마티아 유목민 출신의 기병들이 잘 다루었다. 이들은 서로마군에 고용되어 기병의 중핵을 이루었다.
한편 이 시기 사산조 페르시아는 아예 '''랜스 차지'''까지 동원하기 시작했다. 사산조에 이르러서는 한 술 더떠 한참 뒤에 나오는 카우치드 랜스에 가까운 랜스 파지법이 등장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거의 카우치드 랜스 차지에 가까운 돌격을 행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물론, 로마군은 투창을 애용하였으므로 중세 서유럽처럼 랜스 차징에 일방적으로 손실을 입지 않고 투창을 집어던져 돌격을 방해할 수 있었으나, 위에 이미 서술했듯, 그 로마조차도 감당 못할 끔찍한 가격 때문에 투창을 어쩔 수 없이 점점 포기해가면서 랜스 차지와 같은 기병 개돌에 더욱 취약해져갔고, 기존 로마군의 레기온이 기병을 견제하는 데 쓰던 수단인 투창이 부실해진 결과로 레기온의 기병 견제력이 없어지면서 창병 방진의 돌격 의욕 저하도 없는 막장 군대가 탄생해버렸다. 원래대로라면 투창 없이도 궁수와 노포 같은 원거리 병과가 알아서 커버해 줘야 했지만(실제 로마 제국이 파르티아와 쌈박질을 할 때 동방 속주는 타 지역보다 원거리 투사 병력을 더 강화해서 싸웠다).
이런 로마군의 변화는 당장 최정예인 프라이토리아니의 무장 변화에서 극적으로 드러났다. 방패가 로마 초기의 타원형 방패로 회귀하였고, 갑옷은 찰갑으로, 투구는 원뿔형으로 바뀌었으며, 글라디우스는 1.5배쯤 길어지고, 투창은 필룸대신 랜스에 가까운 모양을 가진 작고 가벼운 투창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이 창 또한 꽤 오랫동안 필룸으로 불렸다.
이건 로마군의 편제가 카라칼라 이후로 보조군 아욱실리움과 정규군 레기온의 지원 자격 구분이 없어져 버린 이후, 인력 부족에 따른 전술 및 교리 개편에 이전 보조군인 아욱실리움의 무장이 더 적합했던 이유도 있었다. 다만 여기서 오해가 있는데, 이 3세기에 일어난 변화는 거의 준징병제로 바꾸다시피한 디오클레티누스 이전에 이뤄졌기에 탈영과 인력 부족으로 허덕이던 4세기와 5세기의 양상과는 별로 관련이 없고, 보조군과 정규군의 통합 및 속주민에 대한 로마 시민권 부여로 보조군 전체가 그냥 정규군이 되었다. 이것을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 1세가 또 다시 쪼개서 리미타네이가 이전 보조군이 하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지만 이는 4세기 동안 진행되는 개편이지 3세기에까지 소급해서 볼 순 없다.
때문에 로마군은 갈수록 창을 많이 쓰게 되었으며,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의 로마군 병사들도 이미 창을 많이 들고 있는 게 확인된다. 다만 게르만족이 대거 군대로 들어와서 게르만족들의 장비로 바뀌었고, 이 때문에 '야만화되었다'는 주장도 간혹 보이는데, 많은 오해와는 달리 2~4세기에 로마군에 입대한 게르만족은 용병이 아니라, 로마 시민권이 있고 로마인 장교 밑에서 훈련받고 싸우는 정규 상비군이었다.
이에 대해 다른 잘못된 생각은 게르만족이 자기네 장비를 그대로 갖고 로마군에 들어와서 로마군의 전술이 '게르만화'되었다는 오해도 있는데, 그렇지 않다. 이 시기에 입대하는 게르만족은 부족 단위가 아니라 기존 로마군 부대에 개별적으로 입대해서 해당 부대에서 장비를 지급받고 로마식으로 훈련했으며, 애초에 게르만족 또한 로마군의 전술과 장비를 꾸준히 자기네 식으로 모방하려고 했다.
필룸은 상당 부분 이후 시기에서도 쓰였으며, 율리아누스 시대에도 썼던 것 같으나, 중량도 더 적고 휴대는 간편하며 개수는 많은 '''플룸바타리'''(다트)와 베르툼(벨리테스 등이 사용했던 투창), 그리고 필룸과 유사한 중투창인 '''스피쿨룸'''이 필룸을 점차 대체하게 되었다. 이렇게 된 원인은 필룸이 무겁고 비싸서 자비로 무장을 해야 하는 로마 병사들에게 부담을 많이 줬기 때문에 서서히 도태되어 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역시도 스파타와 마찬가지로 플룸바타리도 정작 그 시대엔 그냥 필룸이라고들 많이 불렸다.
궁병들의 상당수를 시리아 등지에서 온 보조병으로 충당했던 원수정 시기와는 달리, 궁병 훈련에도 상당히 신경을 쓴 것으로 보인다.
한편 개편된 로마군의 기병은 사르마티아계 록솔라니족, 알란족, 고트족 등 유목민들과 게르만족 기병들에게서 아이디어를 많이 차용하고, 그들 자체를 용병으로 고용했다. 마찬가지의 논리로 사산조 페르시아의 중장 기병에게서도 많은 영감을 받았다. 훈족 쇼크를 겪은 5세기 이래로는 훈족 기병들과 궁병들의 전술도 상당 부분 차용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개편된 로마군은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주변국의 군대에서 장점을 따와서 기존의 로마군 체제를 서서히 변화시켰으며, 이는 중세 동로마 제국 군대의 뼈대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2.3.3. 중세 시기




3. 조직



3.1. 공화정 중기



3.1.1. 레기온


'''Legion.'''
한국과 일본에서는 '군단'으로 자주 불린다. 로마 시민들로 구성된 로마군 전력의 핵심 조직이었다. 그러나 공화정 시기의 군단과 제정 시기의 군단은 편제가 꽤 다르다.
공화정 시기 로마 군단은 고대 로마의 명장 카밀루스에 의해 체계가 갖추어졌고, 이후 주무기가 창에서 글라디우스로 바뀌는 변화를 겪었다. 제정 시기보다 규모면에서 비교적 작아 1개 군단이 4,200명의 보병으로 구성되었다. 군단의 주력은 3개로 나뉘어진 중장보병 부대였다. 중장보병들은 군사 경력이 짧지만 젊은 축에 속하는 '''하스타티'''와 경험을 갖춘 실질적인 주력 부대 '''프린키페스''', 나이가 비교적 많은 고참으로 구성된 예비대 '''트리아리'''로 나뉘어 편성되었다. 여기에 소수의 기병('''에퀴테스''')과 경장보병('''벨리테스''')가 주요 병과였다. 로마는 2개 군단을 '''집정관 군단'''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전략 단위의 병력으로 취급했다.[10] 전략 단위로서의 군단은 거의 항상 로마 시민병과 더불어 비슷한 수의 동맹시 병력을 대동했다.

3.1.2. 동맹시 보조군 (Alae Sociorum)


공화정 중기, 로마 시민이 아닌 이탈리아 반도 각지의 동맹국 병력으로 구성된 보조군이었다. '''날개(Alae)'''라는 이름처럼 주로 군단병의 양 측면에 나누어 배치되었다. 병력 규모는 보통 로마 시민병보다 다소 많았고, 특히 기병은 로마 시민 기병대의 3배로 당시 로마군 기병의 주력이었다. 전통적인 로마군 대형에서 동맹시 기병대는 좌익을, 로마 기병대는 우익을 맡았는데 이 불균형을 한니발이 찌르기도 했다. 보병의 경우 로마 시민병과 무장이나 전투 방식에서 큰 차이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동맹시 병력 중 보병의 1/5, 기병의 1/3은 '''동맹시 정예병'''(Extraordinarii)으로 따로 편성되어 로마 집정관 직속으로 배정되었고, 숙영지에서도 집정관의 막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잡았지만 전투시에는 부대 구분 없이 동료 동맹시 병사들과 함께 싸운 것으로 추정된다.
제정 시기의 로마 보조군(Auxilia)과 비슷한 역할이었고, 실제로 영향을 주었다고 하나 완전히 같은 개념은 아니었다.

3.2. 공화정 말기에서 원수정 시기



3.2.1. 레기온


공화정 후기에서 제정 중기까지의 군단은 기본적으로 마리우스에 의해 짜여진 편제를 기본으로 했다. 공화정 중기의 하스타티, 프린키페스, 트리아리가 '''프린키페스와 유사한 하나의 중보병 병과로 통일되었다.''' 각 6개의 켄투리아(가장 비슷한 현대 군 편제는 중대 정도)로 구성된 총 10개의 '''코호르스'''(현대의 강화된 대대 정도?)가 1개 군단, 즉 '''레기오'''를 형성했다. 주력은 여전히 시민으로 구성된 중장보병이었지만, 규모의 확대 및 보조병의 충원을 통해 유기적인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한편 경보병 벨리테스와 로마 시민 기병대 에퀴테스, 이탈리아 동맹시 기병대 등은 기원전 1세기부터는 군단 편제에서 사라졌으며, '''소규모 별도 군단 기병대가 편성되었다.'''

3.2.2. 보조군 (Auxilia)


로마 시민권이 없는 속주민, 제국 외부의 '야만인' 등으로 구성된 보조군으로, 포에니 전쟁 시기를 기점으로 로마군의 중요 전력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기병이 부족하다는 점은 항상 로마군의 아킬레스 건이었다. 기병을 제공하던 최상위 계층의 수는 적었고, 당시에는 등자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병을 육성하는 것은 로마에게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또한 군마 부족도 정말 심각했다. 로마군에서 군마를 탈 수 있는 게 고위장교, 연락병뿐이었다. 이러다보니 로마군은 항상 보병 중심일 수밖에 없었다. 공화정 중기에는 주로 이탈리아 동맹국에서 기병을 동원했고, 이후에는 로마가 점령한 여러 속주나 동맹국, 동맹 부족들로부터 기병을 충원받았는데, 사실상 충원이 아니라 비싼 돈주고 용병처럼 고용하는 것에 가까웠다. 대표적인 예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유명한 갈리아/게르만 기병,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동맹자였던 누미디아 기병을 들 수 있다.
물론 기병은 돈이 워낙 많이 드는 관계로 이들조차 기병이 강한 사산조 페르시아나 아르사케스조 파르티아에 비하면 높은 비율은 아니었고, 3세기 동안에는 진정한 기병이 아닌, 야만족들을 빠르게 따라잡기 위한 하마 보병들이 주를 이뤘다. 즉 보병 → 하마 보병으로 전환이 이뤄졌고, 이 하마 보병에 대해 다시 기병화가 3~4세기 동안 꾸준히 이뤄졌다.
기병 외에도 누미디아 투창병, 발레아레스 제도의 투석병, 크레타 섬의 궁병 등 경보병 보조군이 군단병의 약점 보완을 위해 활용되기 시작했다. 공화정 후기의 보조군은 상대적으로 용병에 가까운 개념으로 필요할 때 충원하고, 전쟁이 끝나면 해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기존에 활용되던 여러 보조병을 로마 정규군 편제로 편입시키고, 군단병과 비슷한 수로 확대하였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기부터 보조병의 복무기간이 25년으로 규정되었다. 봉급도 지급되었는데 만기 전역시 받는 로마 시민권이라는 메리트를 감안해 군단병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적정 수준의 대우를 해줬을 것으로 보인다. 정당한 급료는 물론, 보조군으로 일정한 기한을 복무하면 로마 시민권을 주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기 때문에, 로마군의 보조병들은 일반적인 용병들과 달리 높은 충성도를 보이며 정규군과 함께 끝까지 싸운 경우가 많았다는 점도 특이하다. 이후 제정 내내 그 수가 증가하여 군단병보다 그 수가 많아졌다.
아버지가 보조군으로 장기복무해서 시민권을 따고, 아들이 그 시민권으로 군단병으로 입대해 복무한 사례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아버지가 복무한 보조군으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군단병을 시민병, 보조군을 비시민병으로 생각하는 통념과 달리 로마 시민 또한 보조군으로 입대가 가능했다.
아우구스투스가 방랑자, 범죄자 등 가장 자질이 낮은 로마 시민들로 구성된 보조군 코호트(Civium Romanorum, 키비움 로마노룸)를 편성하는 등 보조병이 완전히 비시민만으로 구성되지는 않았다. 이들 부대들도 창설 이후에는 비시민병의 지원을 받고 주로 비시민병으로 구성되었지만 부대의 c.R. 타이틀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로마 시민권을 가진 보조군 전역자들의 아들들이 아버지와 같은 부대에 입대하거나 군단병이 보조군의 더 높은 직책으로 이동하는 등 로마 시민이 보조군에 입대하는 비율이 점점 높아지게 되었고, 군단병과 보조병의 무기 전술이 비슷하게 변하게 된다. 카라칼라의 '''안토니누스 칙령'''으로 시민과 속주민의 구별이 철폐된 후 보조병은 다수의 로마 시민과 일부 국경 바깥의 비제국민으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이 보조병 제도가 다 좋은 것은 아니었다. 일단 로마군에게 고용된 보조병 대부분은 속주민이었지만 아직 속주민이 아닌, 즉 게르만족처럼 로마군의 적인 경우도 있었는데, 이런 경우에는 부작용이 발생했다. 왜냐면 게르만인들이 로마의 용병으로 고용되어 보조병으로 복무하면서 로마의 전술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래서 로마군이 게르만인들을 상대하기가 더 힘들어지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서 로마군의 차별과 멸시가 심했기에 보조군들의 반란도 자주 일어났다. 특히 급료가 군단병들보다 적은 데다 그 급료마저 제때 못 받는 일이 생겨서 이에 가장 큰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것도 많았다.[11] 보조군 반란에 무려 9개 군단, 6만 명이 투입된 적도 있었다. 네 황제의 해의 혼란을 틈타 발생한 바타비족 보조군 반란 이후 보조군 체계가 대대적으로 개편되어 보조군 부대들이 부족 단위를 유지하지 않도록 개편되었고, 많은 부대들이 주둔지를 원래 근거지에서 먼 곳으로 이동하기도 했다.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대에는 로마 시민으로 지원자격이 제한되는 레기온의 신병 모집 문제 및 질적 저하, 입대자들의 보조병 선호 현상이 일어났으며, 세베루스 왕조 이후 레기온, 보조병 구분 없이 기지로부터 차출된 기동부대(vexillatio, 벡실라티오) 편성이 상설화되는 등의 변화가 일어났다. 이러한 변화가 디오클레티아누스 이후로 체계화되면서 레기온과 보조군의 구분은 의미를 잃었다. 각각의 보조군 부대 편제들은 없어지지 않고 작은 단위로 나뉘거나 이름이 바뀌기도 했으며, 기존 레기온 부대들과 섞여 팔라티니, 코미타텐세스, 리미타네이 등 후기 로마군 편제를 구성하였다.

3.2.3. 프라이토리아니


'''Praetoriani.'''
일명 근위대. 매체에서 흔히 '프레토리언 가드'라고 부르는 아우구스투스가 이탈리아에 주둔하게 한 황제 직속 친위대였다. 정규 군단의 편제와는 달랐기에 '군단'이라는 표현과는 거리가 좀 있다.
정규 로마군이 10개의 코호르스(대략 80명으로 구성된 켄투리오 6개로 구성) 총 6,000여 명으로 구성된 반면, 근위대는 총 9개 코호르스 9,000여 명으로 구성되었다. 비텔리우스는 한때 9,000명 규모의 근위대를 2배 가까이 증설했지만 베스파시아누스가 바로 원상복귀시켰다. 이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근위대의 규모를 크게 보강하고(《로마 제국 쇠망사》에는 거의 3배~4배 규모라고 쓰여 있다) 권한을 강화하면서 권력투쟁의 온상이 되었다.
처음에는 원로원 등 공화정 세력들의 반발을 우려해서였는지 이탈리아 반도 전역에 분산시켜 특별한 주둔지가 없었으나, 티베리우스 시절에 수도 로마 외곽에 근위대 병영을 짓고 전체를 로마에 주둔시키게 되었다. 그리고 제국 후기에는 근위대 병영이 아우렐리아누스가 건설한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의 일부에 포함되어 수도 로마의 방어 시스템 일부를 이루게 되었다. 이탈리아에 주둔하는 사실상 유일한 군사력이었으나, 이러한 역사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재위 당시 도나우 강 방어선이 돌파당하면서 맞은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편성한 이탈리아 주둔군에 의해 끝나게 되었다.
의외로, 프라이토리아니는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거의 누더기에 가까운 조촐한 토가를 입고 대거 한 자루만 차고 다녔고, 전투에 투입되거나 행진을 하는 경우에만 무장을 하였다. 이유는 당연하지만, '''원로원을 안심 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나중에는 아예 원로원 복장으로 바뀐다.
황제 직속의 부대이니만큼 정예부대로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황제가 직접 전선에 나가는 일이 드물어진 제정 중•후반기에는 말 그대로 전투에 나갈 일이 거의 없고, 봉급은 배로 받는 좋은 일자리 정도로 취급받았다. 근위병의 급료는 675데나리우스로 군단병의 3배였고, 의무 복무기간은 16년으로 군단병의 20년보다 적었으며, 퇴직금도 5,000데나리우스로 60% 더 받았기 때문에 군단병의 메리트가 떨어지던 시절에도 본국 이탈리아의 시민권자들의 지원서가 몰려들어 속주 출신 시민들은 지원조차 못했을 정도였다. 다만 진짜 중요한 전쟁이 벌어지면 직접 최전선에 나가서 싸우기도 했던 모양이다. 실제로 도미티아누스 시절에는 근위대 절반이 다키아와 싸우다가 궤멸당했던 기록이 남아 있기도 하다.
이들의 임무는 직접적인 전투보다는 수도인 로마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경찰에 가까웠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수도 경찰이 존재하는 로마의 시스템을 생각할 때, 치안 유지보다는 원로원에 대한 일종의 위협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 같다. 제정 중기까지도 황제와 원로원은 서로 으르렁거릴 수 있는 관계였다. 이런 원로원을 제압하는 황제의 두 가지 무기가 바로 근위대와 국가반역죄였다. 근위대에는 두 명의 근위대장이 있었고, 이들은 보통 원로원 계급이 아닌 기사계급 출신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근위대의 역할에 원로원 견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실제로 칼리굴라가 암살된 직후에 근위대는 원로원이 '공화정 복귀'를 선언할까 봐 재빨리 클라우디우스를 황제로 앉혀 대응했다.
'''여러모로 '로마 제국 시스템의 대표적인 폐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였다.''' 수도 로마에 주둔하는 유일한 군사력이었던 탓에, 황제의 견제가 없을 경우, 근위대장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제국 후반으로 가면 근위대가 차츰차츰 정부의 다른 부서들을 흡수해, 근위대장이 재상 비슷한 위치까지 격상되게 되었다. 황제조차도 근위대를 무시할 수가 없어서, 근위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자주 상여금을 내려주었다. 특히 정통성이 부족하다는 등의 이유로 인해 기반이 약한 황제는 더더욱 근위대에 매달렸다.
로마 역사에서 황실 내부의 권력투쟁은 흔했으며, 근위대는 보통 그 중심에 있었다. 근위대가 부각되면 로마가 혼란스러워졌고, 근위대가 조용하면 로마는 안정되었다. 실제로 오현제 시대에는 근위대에게 인기가 높았던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당하고 네르바가 제위에 앉자, 불만을 품은 근위대원들이 네르바를 유폐시키고 후계자를 빨리 선정하도록 윽박지르는 사건이 일어난 초기를 제외하면 근위대가 문제를 일으킨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다. 오현제 시대가 끝나자마자 근위대는 다시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제정 초기 티베리우스의 오른팔이었던 근위대장 세야누스는 황제가 로마에 없었을 때 대리인 역할을 맡아 티베리우스를 대신해 온갖 더러운 일을 도맡아 했지만 황제에게 숙청당했다. 숙청당할 당시에는 반역을 꾀했던 흔적도 있었다.
칼리굴라는 근위대 대대장이었던 카시우스 카이레아의 손에 암살당했고, 이후 근위대는 주도적으로 움직여 클라우디우스를 황제로 옹립했다. 클라우디우스는 제정을 보전하기 위해 근위대에게 상여금을 내려주었다. 다만 이때까지는 근위대가 집단적으로 '권력'을 차지하려 움직였다는 증거는 없으며, 카이레아는 클라우디우스가 자리를 잡자마자 황제 살해죄로 처형당했다.
네로 시절부터, 근위대가 정치에 개입하는 나쁜 선례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클라우디우스 시절 아그리피나는 자기 아들 네로를 황제로 앉히기 위해, 심복인 브루스를 근위대장에 앉혔다. 클라우디우스가 급서하자(아그리피나가 독살했으리라는 설이 유력하다) 브루스는 근위대를 움직여 재빨리 클라우디우스의 아들도 아니었던 네로를 황제에 앉혔다. 근위대에 상여금이 내려졌음은 물론이다. 네로가 죽고 갈바가 황제 자리에 오르게 되는데, 갈바는 오토에 의해 매수당한 근위대원들에게 살해당했다. 비텔리우스의 반란이 성공해 오토가 자살하자, 비텔리우스는 자기 휘하의 '라인 군단' 병사들을 근위대로 이동시켰다. 물론 오토에 붙었던 전(前) 근위대원들은 모조리 축출당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비텔리우스에 반대해 들고 일어나자, 오토파 전(前) 근위대원들이 재빨리 베스파시아누스 편을 들었고 비텔리우스파 현(現) 근위대원들과 맞서 싸우는 촌극이 일어나기도 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집권하고 나서 아들이자 차기 황제인 티투스를 근위대장에 앉혀 새 왕조를 안정시키려고 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이자 티투스의 동생인 도미티아누스는 전제적인 정치를 펼치다 황궁 내 음모(근위대장 포함)에 의해 암살당했고, 원로원에 의해 네르바가 황제 자리에 올랐다. 군대 내에서 인기가 높았던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당한 데 불만을 품고 근위대가 네르바에 반대해서 들고 일어나 네르바가 유폐되기까지 했고, 결국 반강제로 고지 게르마니아 사령관인 트라야누스를 차기 황제로 선임해 근위대의 반발을 무마할 수밖에 없었다는 시각이 많다.
오현제 시대에는 앞서 말했듯이 초기의 사건을 제외하면 근위대가 말썽을 일으키지 않았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뒤를 이은 콤모두스는 궁정 내 음모에 의해 암살당했는데, 근위대장인 레토가 당시 인망있었던 페르티낙스를 황제 자리에 앉혔다.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올 것처럼 보였으나, 레토는 페르티낙스가 자신을 이집트 장관에 앉히지 않은 것에 불만을 품고 페르티낙스를 살해해버렸다. 당시 레토는 사실상 페르티낙스를 제위에 앉힌 최고의 공로자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르티낙스가 자신에게 아무런 보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만을 가질 이유는 충분했다.[12]이집트는 고대에는 제국 내에서 가장 부유한 곳이었고, 다른 속주들과는 달리 황제의 사유지였기 때문에 황제만 눈감아 준다면 한 재산 모을 수 있는 곳이었다.[13] 때문에 이집트 장관은 제국의 관료들이 선망하는 자리였다. 로마 제국에는 공식적인 관료 계급이 존재하지 않았지만, 관료 계통은 분명히 존재했다. 원로원 계층에 속하지 않는 '기사계급'이 보통 임명되었으며, 황제 재무관, 황제 비서[14] 근위대장, 이집트 장관 등이 황제와 보다 가까운 위치에서 활약했다.
하지만 근위대는 이후 말 그대로 어처구니없는 일을 벌이는데, '''로마 황제 자리를 경매에 부친''' 것이었다. 술피키아누스와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황제 자리를 놓고 경매를 하게 되었고, 더 높은 값을 써낸 율리아누스가 제위를 '낙찰' 받아 황제 자리에 올랐다. 물론 돈으로 산 황제 자리가 당연히 안전할 리가 없어서, 도나우 군단을 이끌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진군해오자 율리아누스는 황제 자리를 빼앗기고 살해당했다. 세베루스는 이후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벌인 이탈리아 본토 출신 근위대를 해산시키고, 근위대를 전부 자기 병사들, 즉 판노니아, 일리리아, 트라키아 속주 출신 군단병으로 채워넣었다. 그러면서 근위대의 규모를 확충했다.[15]
이후로 로마 제국이 북쪽으로는 게르만족, 동쪽으로는 사산 왕조에 압박당했던 시기인 이른바 군인 황제 시대가 닥쳐오자, 이 와중에 황제를 살해하고 '근위대장'들이 그 뒤를 잇는 일들이 생겼다. 카라칼라의 근위대장이었던 마크리누스라든가, 고르디아누스 3세의 뒤를 이은 필리푸스 아라부스 같은 찬탈자들이었다. 아우구스투스 이후 근위대가 해체되는 콘스탄티누스 1세 시절까지 52 명의 황제 중 12 명이 근위대에게 시해되었다.
'''3세기의 위기'''때의 근위대는 황제를 따라 로마 제국 변방의 전장에서 전투를 했다.[16]
285년 이후 황제가 로마를 떠나게 되면서, 근위대는 버림받고 하는 일 없는 신세가 되었다.[17] 결국 근위대는 각종 음모와 내전에 개입하면서 한 몫을 챙겼던 기억을 잊지 못하고, 찬탈자 막센티우스를 황제로 옹립했지만 막센티우스가 콘스탄티누스 1세와 벌인 역사적인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패배하고 익사하자 전멸했고,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그래도 정예부대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고, 밀비우스 다리 전투 와중에도 콘스탄티누스 1세의 정예병들에 의해 막센티우스군이 쓸려나가는 사이에도 유일하게 제대로 싸운 병력이 바로 근위대였다.

3.3. 전제정 시기



3.3.1. 리미타네이


'''Limitanei.'''
'''국경 방어군'''으로 변경 지역 및 요새의 방비를 맡았다. 디오클레티아누스에서 대제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이르는 기간 동안 '''국경 방어군과 황제 직속의 야전군의 구분이 정식화되어''' 기존의 군단병-보조군 구분을 대체한 것으로 본다. 보병과 기병, 이전에 군단병이었던 부대들과 보조병이었던 부대들을 모두 포함했다. 후기 로마군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했지만 훈련 수준은 낮은 편이었다. 로마 말기로 갈수록 점점 파트타임 군인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고, 이후에는 민병대화되었다.
일부 리미타네이는 가까운 지역의 코미타텐세스 부대로 편입되어 '''준 코미타텐세스'''(Pseudocomitatenses, 프세우도코미타텐세스)로 불리게 되었다.
둑스(Dux)가 지휘를 맡았고 소속된 관구(Dioecesis, 디오이케시스)의 코미타텐세스 사령관 휘하에 있었다.

3.3.2. 코미타텐세스


'''Comitatenses.'''
세베루스 왕조 시기부터 황제 직속의 대규모 유격부대인 '''코미타투스'''(Comitatus)가 편성되기 시작했고 점차 상설화되었다. 사두정치 시기에는 각 정제와 부제가 자신의 코미타투스 부대를 거느렸다. 대제 콘스탄티누스 1세는 장기간의 내전에서 10만 명에 이르는 코미타투스를 지휘했고, '''코미타텐세스'''라는 이름으로 이들을 정식으로 리미타네이와 구분하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코미타투스는 많은 부분이 기존의 리미타네이 중 정예를 빼낸 것이었기에 기존 국경 방어를 약화시켰다고 당대부터 비판받았다. 대제의 죽음 이후 코미타투스 또한 그의 세 아들들에게 분할 상속되었고, 콘스탄티우스 2세가 유일한 황제가 된 이후에는 황제로부터 떨어져 갈리아 등 중요 요충지에 배치되기도 했다. 한편 코미타텐세스 중 지역 방어 임무로 전환되지 않고 끝까지 황제 직속군으로 남은 부대는 '''프라이센탈레스'''(comitatus praesentales)로 따로 구분되었다.
리미타네이와 마찬가지로 구 군단병, 구 보조병이 혼합된 보•기병 혼성 편제였다. 무장 수준이나 전투 숙련도가 리미타네이보다 높아 '''후기 로마군의 주전력'''이었다. 황제 자신이 직접 지휘하기도 했지만 각 관구별로 코메스(Comes), 마기스테르 밀리툼(Magister militum) 급의 사령관이 임명되기도 했다. 한 관구의 휘하에는 여러 둑스 관할 리미타네이 부대가 있었다(군정 체계는 황제 ← 마기스테르 ← 코메스 ← 둑스).
궁전(Palatium, 팔라티움)의 호위병에서 유래한 '''팔라티니'''(Palatini)라는 명칭과 혼용되기도 했다. 팔라티니는 주로 황제 직속군에 속했고, 일반 코미타텐세스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었다.

3.3.3. 스콜라이 팔라티나이


'''Scholae Palatinae.'''
대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프라이토리아니를 해체시킨 후, 구 프라이토리아니의 기병 편제를 대체하여 만들어진 새로운 '''근위 기병대'''였다. 근위대장 같은 보직 없이 황제에 의해 직접 지휘되었고, 황제의 개인 경호원을 맡았다. 게르만족 출신들이 주로 채용되었다. 동로마 제국까지 존속되었으나 오랜 수도 배치로 전투력이 감소하여 의장병, 명예직으로 전락하였다. 콘스탄티누스 5세 시기에 타그마타 기병 부대의 하나로 부활하여 11세기까지 존속하였다.

3.3.4. 포에데라티


'''Foederati.'''
로마 제국 말기 '''부족 단위'''를 유지한 채로 로마 편에서 싸우는 대신 금전적 보상과 함께 제국내에 정착할 권리를 얻은 야만족들이다. 원래는 조약을 맺은 동맹자를 의미했지만 그 뜻이 변화하였다. 프랑크족알라리크서고트족 등이 유명한 사례이다. 때로는 제국에 충성했지만 대체로 각 부족의 이익을 따라 움직였고, 서로마 제국은 이들에게 군사력을 점점 의존하게 되다가 결국 멸망했다.

4. 군단 일람



4.1. 공화정 후기


단대호
상징물
군단 주둔지
비고
제1게르마니카 군단



제2사비나 군단


제2아우구스타 군단으로 명칭 변경
제3키레나이카 군단



제3갈리카 군단
황소


제4마케도니카 군단

제4스키티카 군단



제5알라우다에 군단
코끼리

종달새 군단, 카이사르가 속주에서 징집한 사병
제6페라타 군단
늑대[18]


제7클라우디아 피아 피델리스 군단



제8아우구스타 군단
황소

서로마 제국 멸망까지 존속
제9군단
황소


제10에퀘스트리스 군단


일명 카이사르 군단
제11군단
넵튠

제12빅트릭스 군단


제13게미나 군단
사자

카이사르가 로마 진군때 지휘
제18리비카 군단


제30클라시카 군단



4.2. 제정시기


단대호
상징물
군단 주둔지
비고
제1아디우트릭스 군단
염소
판노니아

제1게르마니카 군단
황소
저지 게르마니아

제1이탈리카 군단
멧돼지
저지 모이시아

제1마크리아나 리베라트릭스 군단

아프리카

제1미네르바 군단
미네르바
저지 게르마니아

제1파르티카 군단
켄타우로스
시리아

제2아디우트릭스 군단
염소
판노니아

제2아우구스타 군단
염소
브리타니아
前제2사비나 군단
제2이탈리카 군단
암늑대
노리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창설. 코미타텐세스 보병 연대로서 아프리카 야전군 및 일리리쿰 야전군에 들어감.
제2파르티카 군단
켄타우로스
시리아
4세기의 편제 개편 때 리미타네이 보병 연대가 되어 메소포타미아 둑스 관할구에 들어감.
제2트라이아나 포르티스 군단
헤라클레스
아이귑토스

제3아우구스타 군단
페가수스
모리타니아

제3키레나이카 군단

아라비아 페트라이아

제3갈리카 군단
두마리 황소
시리아

제3이탈리카 군단
황새
라이티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창설. 4세기의 편제 개편 때 11개 연대로 분할되어 다섯 연대는 라이티아 변경군에, 여섯 연대는 코미타텐세스로서 일리리쿰 야전군에 배속됨.
제3파르티카 군단
황소
시리아

제4플라비아 펠릭스 군단
사자
고지 모이시아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막시무스가 지휘하는 펠릭 군단의 모티브가 된 군단
제4마케도니카 군단
황소
고지 게르마니아

제4스키티카 군단
염소
시리아

제5알라우다에 군단
코끼리
저지 게르마니아

제5마케도니카 군단
독수리
다키아
4세기의 편제 개편 때 코미타텐세스 보병연대로서 오리엔툼 야전군에 들어감.
제6페라타 군단
암늑대
유다이아

제6히스파나 군단



제6빅트릭스 군단
황소
브리타니아

제7클라우디아 군단
황소
고지 모이시아

제7게미나 군단

히스파니아
4세기의 편제 개편 때 코미타텐세스 보병연대로서 오리엔툼 야전군에 들어감.
제8아우구스타 군단
황소
고지 게르마니아
서로마 제국 멸망까지 존속
제9히스파나 군단
황소
브리타니아
120년 이후 기록 실종[19]
제10프레텐시스 군단
멧돼지
유다이아
4세기의 편제 개편 때 리미타네이 보병 연대로서 팔레스타인 둑스 관할구에 들어감.
제10게미나 군단
황소
판노니아
레피두스가 창설. 4세기의 편제 개편 때 일부는 코미타텐세스 보병 연대로서 오리엔툼 야전군에 들어갔고, 다른 일부는 리미타네이 연대가 되어 판노니아 둑스 관할구에 들어감.
제11클라우디아 군단
넵튠
저지 모이시아
서기 135년 유대인 지도자 바르 코크바의 반란을 진압하는 베탈(Betar) 요새의 포위전에 참가하여 바르 코크바를 죽게 하고[20] 반란을 진압함.#
제12풀미나타 군단
번개
카파도키아
유대전쟁 중 군단기 상실
제13게미나 군단
사자
저지 모이시아
카이사르가 로마 진군때 지휘.
4세기의 편제 개편 때 일부는 리미타네이로서 시리아 변경군에 들어갔고, 다른 일부는 코미타텐세스 보병 연대가 되어 트라키아 야전군에 들어감.
제14게미나 마르티아 빅트릭스 군단
염소
판노니아
아우구스투스가 창설. 4세기의 편제 개편 때 코미타텐세스 보병연대로서 트라키아 야전군에 들어감.
제15아폴리나리스 군단
아폴로
카파도키아
카이사르가 창설. 4세기의 편제 개편 때 리미타네이 보병 연대로서 오스로에네 둑스 관할구에 들어감.
제15프리미게니아 군단
포르투나
저지 게르마니아

제16플라비아 피르마 군단
사자
시리아

제16갈리카 군단
사자
저지 게르마니아

제17군단

저지 게르마니아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전멸
제18군단

저지 게르마니아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전멸
제19군단

저지 게르마니아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전멸
제20발레리아 빅트릭스 군단
멧돼지
브리타니아
하드리아누스 방벽 건설
제21라팍스 군단
염소
판노니아

제22데이오타리아나 군단

아이귑토스
서기 132년 유대인 반란군 지도자인 바르 코크바의 반란 때,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던 도중에 유대 반란군의 매복에 걸려 부대가 해체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제22프리미게니아 군단
헤라클레스
고지 게르마니아

제30울피아 빅트릭스 군단
유피테르
저지 게르마니아


5. 병과



5.1. 공화정 중기


여기 언급된 모든 병과들이 다 동일한 시기에 있던 것은 아니다.
  • 레베스(Leves)
경보병. 가난한 사람들의 병과로, 투창 몇자루, 방패나 투구 정도의 간단한 방어구로 무장한 투창병이다. 선두에 배치되었으며, 역할은 벨리테스와 똑같다. 기원전 3세기 이후 벨리테스로 통합되었다.
  • 로라리(Rorarii), 아켄시(Accensi)
가장 가난한 4~5 계급 사람들로, 레베스보다도 무장이 딸렸다. 고참병인 트리아리 뒤쪽, 즉 대열의 맨 뒤에 배치되어 최후의 예비대 역할을 했다. 로마 토탈워에서 아켄시는 투석병으로 나온다. 기원전 2세기에 레베스와 통합되어 벨리테스로 재편되었고, 위치도 대열 선두로 옮겨졌다.
  • 벨리테스(Velites)
경보병. 기원전 2세기 경보병들인 레베스, 로라리, 아켄시를 합쳐 만들었다. 돈없는 가난한 시민들이 주로 지원하는 병과였다. 투창병으로 투창 서너 자루, 투구, 방패 정도의 빈약한 무장만 갖췄다. 기동성을 살려 일단 전열에 나서 투창을 다 던진 후 중보병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퇴각하는게 주로 하는 일이었고, 정찰 임무에 투입되기도 했다.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으로 바뀐 뒤에는 보직 자체가 된다.
  • 중보병
로마군 주축을 이루는 보병대로 어느 정도 돈이 있는 사람들이 지원했던 병과다. 모병제로 바뀐 뒤에는 그냥 보직 자체가 되었다. 붉은 장식술 달린 투구, 중장갑옷(로리카 하마타 또는 로리카 세그멘타타), 붉은색 대형 스쿠툼 방패, 필룸(대형 투창), 글라디우스, 칼리가에(쓰러진 적 공격용 못박힌 샌달)를 갖춘 흔히 생각하는 그 '로마 보병'의 이미지이다. 투창병이 후퇴한 후 전선에 투입되며 일단 투창을 한 자루씩 던진 후 방패벽을 쌓아 전진하는 팔랑크스 전술의 응용버전을 구사했다. 복무기간에 따라서 하스타티(신병), 프린키페스(12~13년 복무), 트리아리(장기복무 베테랑)로 분류되었다.
  • 하스타티(Hastati)
로마 근접보병의 1열을 이룬 중무장 보병으로 원래는 소득이 상대적으로 낮은 사람들의 병과였으나 기원전 3세기 이후 나이가 어리고 전투 경험이 부족한 17~29세의 젊은 병사들의 병과로 서서히 전환되었다. 어원은 '창(Hasta)을 든 병사'로 원래는 이름처럼 창을 들었으나 역시 기원전 3세기 이후 글라디우스를 든 검병으로 전환되었다. 기본적인 방어구는 투구와 흉갑, 정강이받이 등이었으며 일부 병사들은 사슬 갑옷까지 장착했다. 소득에 따라 구분되었을 당시에는 무장이 프린키페스에 비하면 가벼운 편이었으나 나이로 구분되기 시작한 후로는 프린키페스와 비슷해졌다.
  • 프린키페스(Principes)
로마 근접보병의 2열로 보병대의 실질적인 주전력이었다. 이름부터가 '프린켑스의 복수형'으로 정예부대임을 짐작케 한다. 원래는 소득이 어느 정도 되는 시민들의 병과였으나 기원전 3세기 이후로는 전투 경험이 풍부하면서도 나이가 많지 않은 30~39세 정도 병사들의 병과가 되었다. 하스타티와 마찬가지로 에트루리아 스타일의 호플리테스 창병에서 기원하여 창이 주무기였으나 서서히 글라디우스로 전환되었다.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개혁 이후로는 세 근접보병 병과가 프린키페스와 유사한 단일 병과로 통합되어 나이는 그냥 섞어버리고 부대 편제로만 나뉘게 되었다.
  • 트리아리(Triarii)
로마 근접보병의 3열로 다른 두 병과가 검병으로 전환되는 와중에도 유일하게 호플리테스의 흔적을 간직한 창병부대로 남았다. 병과 이름부터가 '3열'이라는 뜻이었다. 원래는 소득 수준이 기병대 에퀴테스 바로 아래인 부유층 병과였으나 포에니 전쟁 시기 즈음부터 베테랑 병과로 바뀌었는데, 40세부터 현역 끝인 45세까지였다. 예비군이 소집되면 60세까지 가능했다. 로마군의 주전력은 하스타티와 프린키페스였고, 트리아리들은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후방에 서 있다가 전투가 끝나면 조용히 숙영지로 돌아가는 게 보통이었으나, 패주가 시작되면 이들이 엄호를 맡았다. 체력 문제로 어차피 전투에 오래 투입하기는 어려웠고, 또 하스타티와 프린키페스가 패주할 상황이면 어차피 체력적인 문제로 도주도 어려운 만큼 트리아리가 퇴로를 엄호하고, 대신 죽으라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즉 패배로 망하기 직전이 아닌 한 전투에 투입될 일은 없었기 때문에 여기서 '트리아리까지 왔다' 라는 속담이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당대 로마에서 패배나 망하기 직전 등의 위험한 상황을 비유할 때 썼다고 한다. 역시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개혁 이후, 모병제로 바뀐 뒤에는 그냥 섞어버렸다.
기병대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좁은 의미로는 로마 시민 기병대만을 가리킨다. 포에니 전쟁 시기 중보병 병과들이 나이에 의한 구분으로 전환되는 도중에도 에퀴테스는 최고의 부유층 병과로 남았는데, 이는 경제적으로 기병을 소화할 수 있는 사회 계층이 최상위층으로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흉갑기병으로 주로 전령이나 정찰, 패주하는 적 추격 등의 제한적 임무를 맡았다. 로마군이 이탈리아 동맹시 기병대나 속주, 동맹국 보조 기병대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전력으로서의 의미는 점점 감소하였고, 유구르타 전쟁을 마지막으로 실전에서의 활약은 없어지다시피 했다. 이후 '에퀴테스'라는 용어는 원로원 계급 바로 아래의 차상위 계급인 '기사계급'이라는 의미로 더 자주 사용되었다.
  • 엑스트라오디나리이(Extraordinarii)
특출한 정예병을 의미하며 로마의 이탈리아 동맹시에서 보내온 지원병 중 보병 1/5, 기병 1/3을 선별하여 엑스트라오디나리이로 분류하였다. 동맹시 기병 부대는 로마 시민 기병대의 3배에 달했다고 하니 엑스트라오디나리이 기병대(Equites Extraordinarii)의 규모만 하더라도 일반 에퀴테스와 비슷한 수준에 달했다. 역사가 폴리비우스에 따르면 로마 집정관의 직속부대로 취급받아 숙영지 등에서 집정관 막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주둔하며 호위를 맡기도 했다. 하지만 실전에서 다른 동맹시 병사들과 다른 역할을 맡은 기록은 없다.

5.2. 공화정 후기, 제정 초기


  • 군단병(Legionarii, 레기오나리이)
이전의 3대 중보병 병과가 하나로 통합되었고, 레기온은 중보병 단일 병과로 구성되었다.
  • 군단 기병대
군단 하나당 약 120명 정도의 소규모 기병대가 배속되었다. 이들은 단일 부대를 이루기보다는 각 백인대에 분산배치되어 주로 비전투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 포병, 의무병: 일반병의 특기 비슷한 개념으로 운용된 것으로 보인다.
  • 보조병(Auxiliary, 아욱실라리), (기타 용병)
로마군은 가급적 용병을 고용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지만, 특수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전문가'들을 고용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특히 로마군이 상대적으로 취약했던 분야였던 기병 수요가 많아서, 기마에 능한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인, 기마술 + 굉장한 완력을 지닌 갈리아인, 게르만인들을 필요에 따라 보조병으로 유연하게 고용하였다. 또한 스페인 남쪽 발레아레스 제도에서 고용한 투석병도 보조전력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해내기도 하였다. 카이사르도 《갈리아 원정기》에서 발레아레스 투석병들의 솜씨를 칭찬했다. 본래 카르타고에서도 활약했었다. 기둥에 빵조각을 매달아놓고 이를 맞히지 못하면 식사를 주지 않는 방식으로 어렸을 때부터 훈련받았다고 한다. 이외에도 공성전 등 모든 전투에 반드시 필요한 궁병도 용병으로 자주 모집했다.[21] 군단병과 유사한 편제의 근접보병 보조병 부대도 제정 시대 이후 많이 창설되었다. 전반적인 무장 수준은 군단병보다는 가벼웠던 것으로 보인다.
포에니 전쟁 시기부터 제정 시기에 이르기까지 보조병의 한 축을 담당했다. 아예 '발레아레스'라는 말 자체가 투석병을 의미하게 될 정도였다.
공화정 시기부터 제정 초기까지 보조군 궁병의 주력이었으나 이후 그 비중이 크게 줄어들었다.
제정 이후 로마군 궁병의 주력으로, 크레타 궁병의 자리를 대체했다.
  • 바타비아 보조병
바타비아 지역은 라인 강 하류, 현 네덜란드의 일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22] 바타비족들은 이 일대에 거주하는 게르만계 부족이었다. 인구에 비해 보조병 입대 비율이 엄청났고, 용맹함으로 이름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기 황제의 경호부대를 맡기도 했다. 네로 황제 사후 대규모 보조병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되었다.
  • 궁기병(Equites Sagittarii, 에퀴테스 사깃타리이): 전제정 이후 그 중요성이 증가했다.
  • 근위대(Praetoriani, 프라이토리아니)
프라이토리아니 편제 참조. 보병대와 함께 별도 기병 분과 존재.
  • 기타
세계에서 최초로 의무을 만들어냈으며, 숙련된 군의관과 의무병을 배출하여 실질적인 부상자와 병자 처리에 활용했다. 자세한 내용은 군의관 항목의 타국의 의무군 참조. 의무 장교가 레기온, 코호트 단위로 배속되었으며(Medicus legionis 메디쿠스 레기오니스, Medicus cohortis, 메디쿠스 코호르티스), 의무병(Milites medici, 밀리테스 메디키)은 일반 사역에서 면제되었다. 군의관 또한 군단 소속으로 복무하며 최소한 일부는 백인대장에 준하는 대우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기수군악병 같은 보직은 있었지만 특별히 병과로 취급된 것이 아니었고 레기온 일반병이면서 그 보직을 겸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보직은 곁보기에는 의장대 같아 보이지만 실제론 회계 업무나 보급 업무 등 백인대장을 보좌하는 일종의 행정병이었기 때문에 해당 능력이 있는 고참병들이 담당했다.

5.3. 전제정 시기


  • 리미타네이(Limitanei)
    • 준 코미타텐세스(Pseudocomitatenses)
  • 코미타텐세스(Comitatenses)
  • 팔라티니(Palatini)
  • 스콜라레스(Scholares)
정확히 병과에 해당하지는 않지만 각 단위 부대들의 분류 또는 등급으로 사용되었다. 리미타네이가 가장 낮은, 스콜라레스가 가장 높은 등급 및 대우에 해당한다.

5.3.1. 기병


  • 카타프락타리이(Cataphractarii): 마갑 중무장 충격기병. 클리바나리(Clibanarii)라는 용어와 혼용되었다.
  • 에퀴테스 프로모티(Equites Promoti): 각 레기온에서 차출, 승격된 기병대.
  • 에퀴테스 달마타이(Equites Dalmatae): 달마티아 지방에서 유래된 경무장 기병대로 후기 로마 기병대의 상당수를 차지했으며 제국 전역에 배치되었다.
  • 에퀴테스 마우리(Equites Mauri): 마우레타니아, 무어와 어원이 같다. 누미디아 기병과 같은 경무장 기병대였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상세는 불명.
  • 에퀴테스 스쿠타리(Equites Scutarii): 이름은 대형 사각 방패 스쿠툼에서 유래하지만 실제로는 방패 장비와는 무관하게 호위 임무를 수행하는 상위 정예 기병대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 에퀴테스 스타블레시아니(Equites Stablesiani): 어원은 '마굿간(stable)'으로 추정. 각 속주 총독의 마부 등 측근들로 이루어진 기병대로 추측되나 자세한 역할은 불명이다.
  • 에퀴테스 사깃타리이(Equites Sagittarii): 궁기병
  • 드로모다리이(Dromodarii): 낙타병

5.3.2. 보병


  • 레기온(Legion)/아욱실리아(Auxilia): 원수정 시대의 군단병, 보조병 구분에서 기원하며 부대 이름으로 붙을 뿐 실질적인 병과 구분으로서의 의미는 거의 없었다. 각 단위 부대가 리미타네이~팔라티니 체계에 나뉘어 편입되었다.
    • 아욱실리아 팔라티나: 팔라티니 등급의 정예병. 황제 직속군의 주력이었고 몇몇 부대는 지방 코미타텐세스 휘하였다. 주로 황제나 민족 이름이 부대명으로 붙었다.
  • 발리스타리이(Ballistarii): 포병 또는 석궁병. 레기온과 같은 상위 편제에 속하지 않고 독립되기 시작했다.
  • 란키아리(Lanciarii): 이름으로 보면 창을 들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투창병이나 구 레기온에 가까웠다는 추측도 있다. 심지어 창기병도 란키아리로 불렸다는 말까지 있다.

6. 계급 및 보직



6.1. 지휘관 및 장교


  • 군단장(Legatus, 레가투스/legate)
말 그대로 군단의 최고 책임자. 1개 이상의 군단을 맡아 지휘 및 통솔하며, 또한 휘하 군단병을 사형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국가 성립 이후부터 끊임없이 전쟁을 해 온 로마에 있어서 군단장 보직은 요직 중의 요직이었기 때문에, 군단장은 원로원 내에서 최소 법무관(프라이토르) 경험자 중에서 선발되었으며, 그마저도 독자적인 작전 지휘권은 현직 집정관(콘술) 내지는 (비상시)집정관 경험자에게만 부여되었다. 다만 마리우스 군제개혁 이후 사병화된 군단 편성이 난립했던 공화정 말기에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경우처럼 별다른 공직 경험 없이도 내부 인선으로 군단장을 맡아 복수의 군단을 지휘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던 듯하다.
아우구스투스 이후 제정 시대에도 군단장은 원로원 의원 중에서 황제가 지명하여 선발되었다. 공화정 시기 군단장 임기는 집정관의 임기와 연동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마리우스 개혁 이후 로마군 사병화의 폐해를 염려한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2년으로 규정되었지만, 후임 인선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한다던지 현직 인사가 해당 방면의 적임자라는 등의 이유로 후임 황제에 의해 여러 번 연임하는 사례도 있었다.
아우구스투스에 의한 로마군 재편 이후 군단장은 기존처럼 1개 군단을 통솔하는 군단장(Legatus Legionis, 레가투스 레기오니스)2개 이상의 군단을 통솔하는 군단장(Legatus Augustus Pro Praetore, 레가투스 아우구스투스 프로 프라이토레) 두 가지로 나뉘었다. 레가투스 아우구스투스 프로 프라이토레는 보통 황제가 주요 전선 속주(저/고지 게르마니아, 시리아 등)에 임명해 해당 지역을 담당하는 속주 총독이 겸직했고, 레가투스 레기오니스는 레가투스 아우구스투스 프로 프라이토레의 명령을 따라야 했기 때문에 둘 사이는 명백한 상•하관계가 성립하였다. 레가투스 레기오니스가 현대의 여단장/사단장급인 소장에 비견된다면, 레가투스 아우구스투스 프로 프라이토레는 한 전선을 담당하는 군단장 내지는 야전군 사령관에 해당하는 중장~대장에 비견된다고 볼 수 있다. 군인 황제 시대에는 이 군단장들이 내란의 주범이 되기도 했으며, 때문에 이런 사태를 막고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군단장 휘하 부대들을 극적으로 줄여 군단장들의 위상은 현대의 연대장/여단장급으로 격하되었다. 다만 얼마 안 가 이 군단장들을 지휘하는 부황제들이 내란의 주범 역할을 승계하는 일이 벌어지고 만 건 웃지 못할 일.
  • 대대장(Tribunus Militum, 트리부누스 밀리툼/military tribune)
군단장 직속 부관으로서 군단장을 보좌하고 군단의 행정 업무를 담당했다. 군단장과 달리 군제개혁 훨씬 전부터 존재했던 유서깊은 보직으로, 원래는 로마가 꼬꼬마 부족국가였던 시절에 전쟁에 대비해 각 씨족에서 전사들을 차출할 때 그 대표로 군사(militum) 씨족대표(tribunus)을 뽑아서 보냈던 것이 시작이었다. 공화정 초기에 집정관에 의해 지명되었던 것이 이후 민회에서 선출되는 것으로 바뀌었고, 휘하 대대에 대한 지휘권 또한 사라진 뒤 젊은 귀족들의 공직 등용문으로 취급받게 되는 등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위상이나 역할이 크게 변동되어 왔던 보직이기도 하다. 각 군단마다 총 6명의 대대장이 배속되었으며, 신분에 따라 보직과 역할이 구분되었다.
공화정 시기 로마군의 집정관 군단 대대장은 전원이 병역 해당자이기도 한 로마 시민의 선거로 선출되었다. 대대장 후보자들은 대개 기껏해야 20대 초반의 명문가 출신 젊은이로 정치 경력을 막 시작하려하는 일종의 정계 유망주들이었다. 공화정 시기에는 아직 로마 시민들에게 전쟁이 매우 일상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무능한 지휘관 밑에서 개죽음을 당하고 싶지 않아 당연히 능력있는 지휘관을 원할 수 밖에 없었고, 군사적 능력을 인정받아야 정치적 출세에도 유리했다. 그래서 대대장 선거 후보자들은 대대장으로 뽑히기 위해 나이는 애송이라도 체력과 지도력을 단련함은 물론 군사학도 피나게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제정 시기 로마군 군단의 대대장은 두 부류로 나뉘는데 하나는 상사/원사급 백인대장에서 정말로 실적을 인정받아 진급한 평민 병사 출신 대대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공직에 뜻이 있는 원로원 계급의 자제라는 이유로 부과된 병역의무를 수행하는 주홍색 띠를 두른 대대장이었다. 제1대대 제1백인대장이 '원사'이면 평민 출신 대대장은 '준위', 주홍색 띠를 두른 대대장은 '소위', 속된 말로 쏘가리였다. 특히나 이 '쏘가리'들은 상•원사급 베테랑 백인대장들이 득실대는 대대에서 군사적 능력을 검증받아야했는데, 당시 로마 제국에선 공직 생활을 할 사회지도층이라면 그 정도는 해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 넓은 띠 대대장(Tribunus Laticlavius, 트리부누스 라티클라비우스/broad stripe tribune)
원로원 계급 출신으로, 명칭은 원로원 계급의 특권인 넓은 띠로 자수된 옷을 입었다는 것에서 유래하였다. 교육을 마치고 갓 사회에 발을 들인 원로원 계급의 자제들로 구성되었으며, 자연히 군 경력은 전무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원로원 계급이라는 신분으로 인해 군단 내에서는 군단장에 이은 서열 2위였으며 군단장 유고 시 지휘권을 넘겨받아 군단장 대리로써 군단을 지휘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군 경력이 전무하다는 문제로 인해 평시에는 지휘보다는 기본적인 행정 업무 이외에도 같은 원로원 계급인 군단장의 업무와 행동을 보고 배우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일반적으로 이 보직은 원로원 계급의 청년이 명예로운 경력(Cursus Honorum, 쿠르수스 호노룸)을 밟아 나가는 과정에서 첫 번째 디딤돌로 간주되었으며, 만기 복무 이후 안찰관(아이딜리스)이나 재무관(콰이스토르)과 같은 공직을 맡아 명예로운 경력을 이어나가곤 했다.
  • 좁은 띠 대대장(Tribunus Angusticlavius, 트리부누스 앙구스티클라비우스/narrow stripe tribune)
명칭은 마찬가지로 기사계급, 즉 에퀴테스가 입는 좁은 띠로 자수된 옷을 입었다는 데에서 유래하였다. 넓은 띠 대대장과 달리, 보조병 감독관 등으로 수년간 군 경력을 쌓아 온 기사계급 출신 청년으로 구성되었으며, 종종 평민 출신 백부장 출신 군인이 진급하여 맡는 경우도 있었다. 주로 군단장 보좌 및 군단 내 행정 업무를 맡았으며, 군에 뜻을 둔 기사계급 청년에게는 넓은 띠 대대장과 마찬가지로 공직 경력을 이어나가는 데 필요한 세 가지 군사 보직(Tres Militiae, 트레스 밀리티아이)보조병 감독관(Praefectus Cohortis, 프라이펙투스 코호르티스), 좁은 띠 대대장, 기병 편대 감독관(Praefectus Alae, 프라이펙투스 알라이, 약 500여 명 규모의 기병대) 중 하나로 인식했다.
  • 감독관(Praefectus, 프라이펙투스/prefect)
라틴어 'praeficere'(프라이피케레)는 '무언가를 관리하고 감독한다'는 뜻으로, 일반적으로 자체적인 권위가 없이 다른 선출직 관리자에 의해 권위가 부여되는 비선출직 관리자를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대표적으로 근위대장(Praefectus Praetorio,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이 있다. 마찬가지로 로마 군단의 프라이펙투스(praefectus)는 선출직 장교가 임명하는 비선출직 지휘관을 가리켰다. 다만 감독관이라는 계급이 명시적으로 존재했던 것은 아니어서, 보조병 감독관(Praefectus Cohortis, 프라이펙투스 코호르티스)[23]처럼 초짜 장교가 처음으로 맡는 보직과 기지 감독관이나 군단장 대리 감독관(Praefectus legionis vice legati, 프라이펙투스 레기오니스 비케 레가티)과 같은 고급 장교를 같은 프라이펙투스(Praefectus)라 부르는 등, 담당 분야에 따라 위상은 천차만별이었다.
  • 기지 감독관(Praefectus Castrorum, 프라이펙투스 카스트로룸/camp prefect)
로마 군단 내 보급, 훈련, 경계 등 기지 내 실무를 총괄하는 보직이었다. 당연히 중요성이 어마어마하며 일반적으로 수석 백인대장(primus pillus, 프리무스 필루스) 출신이 주로 임명되었다. 즉, 이 보직에 임명되는 인사는 말 그대로 최소 25년 이상 군단에 뼈를 묻은 베테랑 중의 베태랑이었다. 덕분에 군단 내 실무를 지휘했으며, 군단장에게 실무 측면에서 조언을 제공하는 일종의 참모장 역할을 맡기도 했다. 군단 내에서는 군단장과 넓은 띠 대대장에 이은 서열 3위였으며, 평민 출신의 경우 수석 백인대장 제대 보상으로써 기사계급으로 계급 상승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임명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현대 군 조직에서 백부장은 위관급 장교(중위~대위)에 비견되지만 동시에 부사관과 같은 전투 기술과 돌격 능력이 요구되며, 또한 선임 백부장의 경우 대대급 지휘 능력과 같은 영관급 장교의 역량을 기대받기도 하는, 명실상부한 로마군의 꽃이자 등뼈였다.
백인대장은 현대의 부대 지휘 체계 개념으로 보면 중대장쯤 되지만 현대의 계급 체제로 보면 어디까지나 부사관이었다. 즉 중견 중사나 상사가 중대장을 맡았다고 보면 된다.
백인대장은 병사들과 말 그대로 동고동락하며 지내는 가장 가까운 간부였다. 백인대 이하의 편제가 없는 로마군에서는 최하위 간부이자, 최전선에서 싸우게 되는 부사관 역할 및 현대 군의 행정보급관 역할까지 수행했다고 보면 정확할 것으로 보인다. 백인대장은 병사들과 가장 가까이에 있으면서 병사들을 최전선에서 지휘하는 존재였기 때문에, 병사들은 백인대장의 역량에 대해 의심이 갈 경우 백인대장의 교체를 요구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로마군에서는 어떤 군단이든 제1대대 제1백인대장은 군단 전체의 백인대장들 중에서도 지휘력, 무력, 지식, 실적, 경력, 인품 면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가 보임되는 군단 내 백인대장들 중 최선임인 자리였다. 백인대장 자체가 각 백인대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가장 뛰어난 인재가 보임되는 데다 제1대대 제1백인대장 보임에는 나머지 백인대장들의 동의까지 필요했음을 감안한다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제1대대 제1백인대장은 짬과 능력에서 웬만한 상류층 출신 대대장보다 윗급이라 굉장히 예우받았고, 군단 사령부의 지휘관 작전회의에 참여할 권한도 있었다. 오늘날로 치면 사단 주임원사 급의 끗발은 되었다고 보면 된다. 어느 퇴역 로마 군인의 묘비에 1대대 1백인대장까지 진급했으니 내가 원하는 바를 전부 이뤘다고 적혀 있을 정도로, 군대 내에서나 사회에서나 상당히 존경 받는 명예로운 직위였음을 알 수 있다.
백인대장 전사 시 지휘권 공백으로 인한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백인대에는 백인대장을 보좌하는 부백인대장(Optio, 옵티오)도 항상 편제되어 있었다. 구분을 위해 특유한 투구의 장식을 백인대장은 가로, 부백인대장은 세로로 달았다. 차기 백인대장이라 당연히 대접을 받았지만 직속상관인 백인대장이 유능해서 병사들의 지지를 계속받아 10년 넘게 부백인대장으로 있었던 경우도 있었다.
다만 백인대장이 오늘날 한국군으로 말하자면 중대장과 행정보급관의 역할을 모두 수행하는 건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때문에 행정보급 방면에서 백인대장을 보좌하는 보직이 있는 병(兵)이 따로 있었다. 제1대대 제1백인대장은 때문에 오늘날 한국군 부대의 주임원사에 가까운 보직이기도 했으며, 행정적 임무과 과업이 갈수록 많아지다보니 그야말로 행정보급관 혹은 주임원사화되다가 결국 3~4세기 중엔 군 지휘권은 내려놓고, 부대 내 행정보급 업무만 중점적으로 수행하게 되었다. 문자 그대로 주임원사 같은 역할이 되었다고 보면 된다.

6.2. 부사관


  • 군단기수(Aquilifer, 아퀼리페르) 및 황제 초상 기수(Imagnifer, 이마그니페르)
전자는 흔히 독수리 깃발로 잘 알려진 군단기를 드는 군단병을, 후자는 황제의 얼굴이 그려진 깃발을 드는 군단병을 가리킨다. 특히 황제 초상 깃발은 군단 전체가 황제에게 충성을 바친다는 상징이었다. 수석 백부장 휘하에 배속되었으며, 군단에 각 1명씩 배치되었다.
  • 부백부장(Optio, 옵티오)
백부장을 보좌하며, 백부장이 사망하는 등의 유고 시 백부장을 대신하여 백인대를 지휘하였다.
  • 대대 기수(Signifer, 시그니페르)
개별 대대의 상징물인 대대 깃발을 드는 군단병.
  • 기수(Vexilifer, 벡실리페르)
군단 상징과 군단명을 수놓은 군단기를 드는 군단병.
상기한 인원들은 일반 군단병이 받는 봉급의 2배를 지급받았다고 하여 '두필리카리우스(Duplicarius)'라고 불렸으며, 이것이 사실상 계급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정착했다.
  • 당직병(Tesserarius, 테세라리우스)
백인대의 야간 경계근무를 조직, 감독하는 군단병. 현대 국군의 당직병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일반 군단병 급여의 1.5배를 지급받았다.
  • 나팔수(Cornicen, 코르니켄)
나팔을 이용하여 명령을 신호로 전달하며, 부백부장과 함께 백부장을 보좌하는 역할을 맡은 군단병. 행군시에 군단 최선두에 서서 일종의 군악대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일반 군단병 급여의 1.5배를 지급받았다.

6.3. 사병


  • 재입대 고참병(Evocatii, 에보카티)
정규 복무기간을 마쳤지만 재입대한 고참병. 일반 사역에서 면제되었고 일반병의 2배 급여를 받았다. 백인대장을 맡는 경우도 많았다.
  • 특기병(Immunes, 이무니스)
사병 중에서 군단에 필요한 특기를 가진 자들로 구성된 계급. 대장장이, 목수, 기계공, 의무병, 사냥꾼 등이 포함된다. 이들은 일반 군단병 급여에 추가 보너스를 받았으며 사역을 면제받았으나, 특기 보유와 관계없이 전투 시에는 일반 군단병과 같이 진형을 갖추고 싸워야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미국의 4등병/5등병(Technician Fourth/Fifth Class)과 유사한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 노포(Ballistarii, 발리스타리): 발리스타
  • 의무병(Milites medici, 밀리테스 메디키)
  • 일반 사병(Miles, 밀레스)
일반 사병. 전형적인 알보병으로, 훈련과 경계, 전투 외에도 건설 등의 사역에 동원되었다.
  • 훈련병(Tiro, 티로)
훈련병.

7. 훈련



8. 로마 군인의 생활



8.1. 로마군의 봉급과 소비


제정 시기 로마군은 1년에 3회 봉급을 받았으며, 이 돈으로 무기와 장비를 장만하고 의식주와 취미생활을 했다. 병사의 봉급은 임금 노동자보다 조금 많은 정도였다. 초기 지급되는 갑옷이나 칼 등은 국가가 제공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이후 소모되는 장비는 개인 돈으로 해결해야 했다. 보통 70%를 식비와 의복비 등의 생활비로 소모했으며, 특히 갑주랑 무기의 유지비가 가장 많이 들었다. 따라서 실제로 가용한 자금이 크게 부족했으므로 성실한 병사는 이 돈을 낭비하지 않고 저축할 수도 있었지만 대체로 돈이 모자라는 병사가 많았다. 또한 경제가 잘 돌아가던 제정 중기와 오현제 시기에는 그래도 나았지만 그 이전과 이후에는 봉급 체불이 꽤 자주 있었다.[24]
물론 공화정 말기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 이후 명목상 무기, 장비, 의복 등은 지급되는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대부분은 지급되지 않았다. 그나마 징병제 말기에는 워낙 사람이 부족해서 재산이 거의 없는 병사도 전쟁터에 보내야 했으니까 국가가 지급하기도 했지만 모병제 이후에는 병사들이 자기 장비값을 내는 '''공동구매'''가 정착되었다. 또 이 병사들이 구매해야 하는 '장비'에는 무기와 갑옷뿐만 아니라 의복, 신발, 텐트, 이불, 식기, 건초 같은 군생활에 필요한 것들 대부분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봉급 부족은 티베리우스 즉위 직후의 병사 반란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이기도 했고, 군 당국도 이걸 잘 알고 있어서 처우 개선 요구로 인한 평시 집단행동에 대해서는 의외로 처벌이 가벼운 경우가 많았다.[25]
병사가 무기를 구매해야 한다는 것은 문제를 일으켰다. 로마군이 사용한 투창인 필룸은 적의 기병이나 전차가 몰려오는 상황에서 방진을 짜고 기병대를 견제하기 위해 꼭 필요한 무기였다. 그러나 필룸은 상당히 비싼 데다 소모품이었기 때문에 병사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로마 후기에는 결국 다트형 투척 무기로 교체되었고, 궁수와 기병대로 방진을 지키는 쪽으로 바뀌었다.
로마군도 이게 문제라는 인식이 있어서 일부 금액을 따로 떼어 저축하게 했고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부터.) 중도 전역하는 병사들이라도 중대한 군율 위반으로 추방되는 등의 사유가 아니라면 위로금을 지급하도록 했다. 또한 만기 전역시에는 '''퇴직금'''을 땅으로 받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과거 공화정 시기에는 해산된 군단의 병사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었지만, 제정 시기가 되면서 만기 전역하는 병사들에게는 퇴직금이 주어졌다. 물론 놀고 먹을 비용이라기보다는 재사회화 과정에서의 정착 비용으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로마군은 17세부터 입대가 가능했으며, 만기 20년을 채운다 해도 고작 37세에 불과했다. 그리고 고대라고 해도 군단에 입대할 정도로 건강했다면[26] 적어도 15~20년은 더 살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만기 전역할 정도면 대개 자녀도 여럿 두었기에 재사회화는 불가피했다.
제정 시기와 비교하면 과도기였던 내전기는 병사들이 금전적으로 풍족한 시기였다. 특히 상여금이 많았는데, 군사령관들이 병사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더 많은 상여금을 지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돈이 없었던 카이사르는 부하 장교들에게 돈을 꾸어 상여금을 지급했다고 한다. 카이사르가 빚을 하도 많이 져서 채권자들이 절절 매며 바쳤다는 말도 안 되는 얘기가 시오노 나나미 때문에 퍼져 있는데 예나 지금이나 빚쟁이들이 멀쩡히 돈을 떼이고 가만히 있는 족속은 아니며, 카이사르는 총독으로 부임하기 바로 전에도 크라수스가 아니었다면 분노한 빚쟁이들에게 붙들려 맞아죽기 일보 직전의 상황에 있었다. 크라수스가 카이사르의 빚에 대해 한 보증은 어디까지나 미래를 위한 일종의 투자였고, 카이사르는 그 값을 충분히 했다. 봉급으로 소금과 향신료를 주기도 했다. 봉급을 뜻하는 영단어 'Salary'가 소금을 뜻하는 라틴어 'sal, salis' (명사 제3변화)에서 나왔을 정도다.

내전기에는 장군들이 병사의 지지를 얻으려고 상여금을 마구 뿌려댔지만, 제정 시대에는 이런 관행이 없어졌다. 이렇게 된 이유는 장군들이 군벌로 변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왜냐하면 장군들은 상여금을 마구 뿌려 병사들의 지지를 얻은 다음 그들을 자신의 사병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대신 아우구스투스는 봉급 수준을 모병제 도입 초기에 비해 3배 가까운 225 데나리우스까지 올렸지만 그리 큰 돈은 아니었다고 한다.[27] 또 로마가 확장을 거듭할 때는 적의 도시를 점령하고 약탈 한 번 크게 저지르면 한 몫 단단히 챙길 수 있었지만 역시 제정 시대에는 확장이 멈추다시피했기 때문에 이런 일은 드물어졌다. 그나마 새로운 황제가 등극할 때나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관행적으로 소정의 상여금을 하사하는 정도에 그치게 되었다. 게다가 상여금의 부여 횟수나 금액도 내전기보다 줄어들었는데, 사실 국토가 넓어지자 지켜야 할 국경이 길어지다보니 영토 관리가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내부 사정도 좋지 못하고 로마의 적들도 갈수록 강력해져 확장 정책이 갈수록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대신 로마 정부는 군인들의 처우를 적당히 개선하여 봉급을 저축할 여유를 주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위에 언급한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봉급 인상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28]
여가 시간에 농사를 짓거나, 닭을 기르거나, 그 밖의 잡일로 부업을 하는 병사도 적지 않았다. 서로 돈을 꿔주고 '''갚으라고 독촉하는''' 편지도 남아 있다. 고향의 가족들에게 돈이 필요해서 부쳐달라는 편지도 발견되었다.
전리품은 병사들에게 분배되는 경우가 많았다. 약탈도 때때로 허용되었다. 게르만족 등 가난한 야만족과 싸우는 경우에는 전리품을 기대할 수 없었지만[29], 트라야누스 황제가 펼친 다키아 원정처럼 풍요로운 지역[30]으로 출동하는 경우에는 풍성한 전리품을 획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산조 페르시아나 아르사케스조 파르티아는 부유하지만 막강한 적이다 보니 약탈하거나 전리품을 얻는다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들었다. 국력도 막강하고[31] 기병 전력이 로마보다 압도적이다보니[32] 당연히 상대하는 게 힘들어 약탈이 쉬울 리가 없었다.
이 때문에 로마군은 약탈보다는 상여금에 관심이 많아져 후기에 가면 상여금을 올려달라는 병사들의 요구가 빗발친다. 하지만 이게 부작용을 가져왔는데, 왜냐면 황제랑 군사령관들이 병사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화폐를 마구 찍어내서 상여금을 지급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내전기같은 경우에는 화폐의 귀금속 함유량이 높아서 실제 가치와 명목 가치가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황제의 정통성과 권위가 추락하는 3세기의 위기부터는 사실상 은화가 은도금한 동전으로 바뀌는 등 악화가 주조되는 바람에 심각한 물가 상승을 초래했다. 그래서 상여금이 많이 지급되어봤자 물가 상승으로 인해 병사들의 살림살이는 나아진 게 별로 없었다.

8.2. 로마군의 식사



식사는 육체노동의 극한이라고 할 수 있는 전투 수행원이었다는 점에 비해서 매우 단촐했다. 물론 그당시 군대라면 식사가 대체로 고만고만했다. 현대에조차도 북한군같이 가난한 군대의 경우 당시 로마군보다도 못한 식사를 하는 경우는 흔하다. 때문에 과거 히스토리 채널에서 소개할 때는 일반 서민들보다 영양가 면에서는 훨씬 더 잘먹었다고 설명했다.
기본적으로 /죽[33]에다 병사 개인이 상비하고 다니는 건포도/무화과 등의 견과류, 양/염소의 젖[34]과 젖으로 만드는 치즈[35], 몇 가지 야채와 올리브 기름[36]을 이용한 샐러드, 쉬어빠진 포도주를 탄 맹물이 전부였다. 수에토니우스하드리아누스 황제가 트라야누스 아래에서 군생활을 할 때 베이컨 지방(라드), 치즈와 쉰 포도주(larido, caseo et posca)를 먹었다고 적었으며[37], 황제가 된 후에도 비슷하게 조촐한 식사를 했다고 전해진다.
식사는 분대원들이 모여서 공동으로 조리하였고, 식재료는 주둔지 주변에서 채집하거나 1년에 3번 받는 급여를 쪼개 사비로 구매해야 했다. 물론 급속 행군중일 때는 육포, 건포도/말린 무화과, 말린 치즈, 밀가루 반죽을 바짝 구워서 말린 하드택 같은 보존식에 의지해야 했다. 이런 보존식을 만드는 것은 물론 군단병 본인의 몫이었다.
쉰 포도주의 경우 '''포스카(Posca)'''라고 불렀는데 이는 유통기한이 지난 포도주가 과발효해서 생긴 포도식초로서 식수 소독제에 가까운 용도로 사용됐다. 보급선이 길어지면 포도주는 쉬어서 식초가 되고, 맹물도 박테리아가 증식하여 악취와 복통을 일으켰는데, 그냥 마시기 곤란한 두 액체를 섞으면 아세트산이 악취를 덮고 에탄올이 박테리아를 살균하여 그럭저럭 삼킬만한 수분공급원이 되었다. 여기에 주머니 사정에 따라 꿀과 각종 향료, 약초 등을 섞어 맛을 내었고, 소금을 약간 섞어 전해질도 보충했다.
즉 포스카와 포도주는 엄연히 다른 음료였다. 고대 로마에서도 포도주는 술로 취급했었고, 포스카는 에탄올이 분해된 식초가 기반이기 때문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포스카는 술 같은 기호식품이 아닌 에너지 음료에 가까운 생필품이었다.
고대 로마군의 형벌 중에는 포스카를 지급하지 않고 맹물(석회수)을 마시게하는 형벌도 존재했다. 그 외에 군인에 대한 처벌로서 다른 식사 대신 보리로 만든 죽을 주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는 로마인들은 보리를 가축과 노예가 먹는 작물로 천하게 여겼기 때문. 일종의 명예형에 가까웠다.
기본적인 식사는 그러했지만 여건이 허락한다면 최대한 고기를 챙겨먹었다. 끊임없는 훈련을 통해 몸을 혹사해야 하고 또 신체조건이 생명과 직결되는 직업군인으로서 단백질 섭취는 사치라기보다는 필수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주둔지 근처에 야생동물이 풍족한 곳이 있으면 사냥을 하기도 했다고. 특히 로마군을 포함한 로마인들부터가 주머니 사정만 되면 푸짐한 양의 고기를 양껏 먹는 것을 즐겼으며[38] 고기를 먹을 만한 여건이 안 될 때는 주로 생선과 치즈에서 단백질을 얻었다.

병사들의 식재료를 책임지는 보급망은 동시기의 다른 국가보다 매우 체계적이고 효율적이었다. 무엇보다 로마군은 후방의 보급망을 구축하지 않고 먼저 진격하는 일이 없었다. 새로운 주둔지로 옮겨갈 때마다 주둔지 사이를 잇는 도로를 건설하고, 일정 거리마다 보급소를 두어 경비 병력을 세웠다. 보급로 주변의 외부인은 무력으로 먼저 정복하거나, 평화 협정을 맺거나, 아니면 돈으로 매수하여 보급로에 대한 위협을 최소화했다. 추가로 물자가 필요할 때는 자신들을 따라다니는 상인(Sutlers) 혹은 주변의 외국인들로부터 구매하거나[39], 주변의 신민들로부터 징발하기도 했다.
종합하자면 로마군은 동시대 다른 나라의 징집병들과 비교했을 때는 훨씬 잘 먹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8.3. 혼인 등 가족 생활


'''국경 지역의 병사들이 게르만족 출신이거나, 게르만족 여인과 몰래 결혼한 로마 병사가 많아서 게르만족이 침공해올 때 국경이 열려버렸다는 얘기는 후기 로마 제국의 실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온 미신이다.''' 게르만족들의 침투는 훈족들이 오기 300년 전부터 꾸준히 시도되었고, 3세기 아우렐리아누스가 상대해야 했던 게르만족이 오히려 실력에 있어서도 수에 있어서도, 훈족 침략 시기의 훈족이나 게르만족보다 무시무시했다. 그런데도 로마군이 적어도 4세기 때까지 족족 야만족을 격퇴한 것은, 로마군에 입대한 게르만족이 종족 정체성보다 국가 정체성을 중시했기 때문이었다. 옆에 있는 게르만 전우가 칼을 들고 노려보고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언제까지나 로마군의 일원으로서였다. 심지어 6세기 중엽 쳐들어온 롬바르드족 이전까지 게르만족들도 겉으로는 동로마 황제의 신하를 자처하며 사실상 로마인 행세를 하였다. 로마가 무너진 건 그냥 혼란기에 사회 인프라 유지하는 것보다 칼질 배우는 게 더 유리한 풍조가 서서히 자리잡고, 고트 전쟁과 뒤이은 롬바르드족의 침략, 이슬람 세력의 침략, 동로마와 노르만 세력의 충돌, 유럽 통일 강국들의 충돌 등으로 사회가 극도로 혼란해지면서 서서히, 하지만 확실하게 사회 붕괴까지 이어진 탓이지, 게르만족이 5세기에 로마 제국 사회를 부수면서 그냥 망한 게 절대 아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 시기의 군제 개혁 때 병사들의 결혼을 금지시켰는데, 군인들을 민간 사회와 격리해 군대에만 집중하게 하며, 사적인 가족이 없이 군대를 가족으로 여기게 만들기 위한 정책 + 가족이 있다면 다른 지역으로 부대를 이동시킬 때 가족들을 데려가는 문제로 골치가 아파질 게 뻔하니 이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미 결혼한 기혼자도 입대는 가능했지만 가족관계는 법적으로 무효가 되었다.
하지만 병사들은 결혼 금지를 결혼식 금지로 실행, 공공연하게 주둔지 근처에 사는 현지 주민이나 여자 노예와 살림을 차리고 애낳고 가족을 꾸려, 정식 결혼은 못 하지만 사실혼 관계로 살았다. 물론 군단장들은 당연히 이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애초에 막을 수 없다고 판단했고, 또 군복무를 성실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 사실상 묵인했다. 여기에다 제국이 안정된 이후에는 대규모 부대 이동이 거의 사라졌기에 두번째 문제의 발생 가능성도 낮아졌다. 현실적으로 지켜지지 않고 있음에 더해 필요한 이유 중 하나의 감소로 인해,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절에는 이 사실혼 관계로 살고 있는 병사들에게도 기혼 남성들과 같은 법적 권리를 보장하게 되었으며, 또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절에는 군인들이 사실혼 관계 중 낳은, 법적으로는 사생아인 아이들도 합법적인 적자들과 마찬가지로 상속권 등의 법적 권리를 보장받게 되었다[40]. 그리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때에는 아예 결혼 금지령이 폐지되었다.

8.4. 의료 복지


군의관들도 존재했는데, 본래는 군단장이 자기 돈으로 자율적으로 행할 문제였다. 즉 군단장이 이런 문제에 무심하거나 재정이 부족하면 병사들은 싸우다 다쳐도 전문적인 의료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이렇다 보니 전투 중에 중상을 입은 병사가 사망하거나 원래라면 현역 복무를 지속할 수 있는 부상을 입었는데 치료를 못 받아서 결국 팔다리를 잘라야 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30년경 전문적인 의료부대를 창설했고, 여러 혜택을 걸어 전문의들을 군의관으로 입대시켰다. 군의관은 자동적으로 로마 시민권이 수여될 정도로 대접받았으며, 그에 걸맞은 성과를 내기도 하였다.# 내장이 튀어나온 부상병도 수술해서 살려낸 사례가 있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고, 병사들의 위생과 영양도 체계적으로 관리했다. 그 덕에 군의관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는 시절에는 군인들의 평균 수명이 민간인들보다 10년가량 길었다고 한다.

8.5. 군법과 형벌


로마군의 강점으로 꼽히던 가장 큰 요소는 '''조직력과 군율'''이다. 이는 전시 사상자 최소화 및 목표 달성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고, 이를 위해 로마군은 상당히 엄격한 훈련 및 처벌을 시행했다. 다만 처벌 수위는 부대가 처한 상황, 행위의 중대성이나 지휘관의 판단에 따라 달랐다. 심지어 적전 도주라 해도 지휘관과 병사들의 관계가 양호하거나 지휘관이 인간적인 경우는 명예형으로 끝나기도 했고, 크라수스처럼 이런 데 신경 안 쓰는 지휘관이 걸리면 그 악명 높은 10분의 1형이 내려지기도 했다.
이외에 로마군은 명예형이 굉장히 많았는데, 사형이나 중노동형을 평시에 무작정 남발하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병사들을 처벌하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보인다.
  • 노예형
로마 시민인데도 불구하고, 징집을 거부하고 도망가거나 징병검사[41]에서 꼼수를 부리다가 발각되면 시민으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하여 노예로 팔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물론 꼼수를 부려도 소용 없이 그냥 현역 판정을 받았다면 해당사항이 없었고, 또 징병제가 폐지된 뒤에는 없어졌다.
  • 사료배식
밀이 아니라 가축 사료로 쓰는 귀리 같은 날곡식을 배식했다. 이걸로 요리해먹으면 정말 맛이 없었고 조리하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인간 이하의 짐승 취급이라는 심리적 모욕을 주는 게 목적이었다. 현대 군인들한테 처벌 목적으로 개밥[42]을 배식한다고 생각해보자. 일종의 명예형.
상대적으로 약한 처벌이지만 안 그래도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돈 들어갈 곳이 많은 로마군에게는 치명타였다. 역시 징병제가 폐지된 뒤 본격화된 형벌이었다.
  • 노역
현대의 직업훈련 목적의 소일거리식 노역과는 달리 영화에서 흔히 나왔던 채찍 맞아가면서 중노동하는 노예의 노역보다 약간 나은 수준으로 심각한 형벌이었다. 애당초 로마군은 전투가 없거나 적과 직접 대치한 상황이 아니면 국가에 필요한 토목공사에 수시로 동원됐기 때문에 벌로써의 노역을 주려면 그것보다는 강해야 했지만, 명색이 정규군이고 엄연히 제국의 시민 혹은 속주민 출신이라도 제국의 시민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하여 병역에 종사하는 것이므로 절대 노예처럼 채찍을 때릴 수는 없었기 때문에 미묘한 기준이 성립되었다. 비텔리우스 황제 때는 오토를 지지한 병사들에게 노역의 처벌을 내렸는데, 이 때는 크레모나의 원형경기장 공사에 동원하는 것이었다. 물론 원형경기장도 나름 기반시설이긴 한데 방어 요새나 도로처럼 국가운영에 필요한 시설이 아니라 제국민들의 쾌락과 즐거움을 위한 시설이었므로 모욕이 맞다.[43]
현대의 영창과는 달리 노역이 추가된 형태가 많았고, 영창 자체가 불결했다. 물론 특정 지역에 가둬놓는 감옥은 그 자체로 불결한 경우가 대부분이긴 했다. 현대 선진국 감옥이 위생적인 건 사회 전반적인 위생상태가 개선되면서 감옥도 그 혜택을 받았기 때문일 뿐이고 개도국 감옥은 지금도 별 차이가 없다.
  • 열외 (행렬에서의 제외)
징계 처분에 따라 행렬에서 제외된 사람은 무능력자 취급을 받았기에 사료배식만큼 심한 심리적인 모욕이었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열외였다. 이것도 명예형의 일종이었다. 잠시 행렬 제외시키고 끝이라 별거 아닐 것 같지만 실은 직접 패거나 강등하는 걸 제외하면 꽤 엄한 처벌로, 로마인은 평판을 매우 중시했고, 특히 군인은 20년간 같은 군단에서 부대만 가끔 옮겨다니며 지냈기 때문에 동료들 사이에서 평판이 돌고 돌았는데, 그냥 군생활을 좀 못하는 걸로도 여기저기서 무시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런 판에 사고쳐서 행군중 열외당한 징계기록이 남으면 당연히 대놓고 무시당했다.
미드 ROME의 주인공이 자신이 소속되어 있던 13군단이 로마에서 사열행진 할 일이 있어서 예전 장비들 가져와 본인도 행열에 끼워달라고 했지만, 주인공은 이미 전역한 상태였고 현역시절때도 그렇게 평판이 좋지 않아서 생사를 같이했던 전우들이 행진은 현역들의 몫이라면서 주인공의 심정을 알면서도 제외시켰다. 그래서 주인공은 자신의 집 같았던 13군단에서 버림받아 허탈해하기도했다.
때리는 도구는 주로 채찍이었다. 태형을 받는 죄목은 폭행이나, 싸움, 술주정이었는데 중대하지 않은 명령 불복종의 경우도 역시 태형을 받았다. 드라마 ROME에서 주인공이 받는 형벌이 이것이다. 지휘관의 명령을 어기고 멋대로 대열을 이탈해 돌진. 대열을 무너뜨렸을 뿐만 아니라 그를 구출하기 위해 다수의 동료들이 위험에 처하게 하기까지 한 죄로 태형에 처해졌는데, 전 병력이 보는 앞에서 집행함으로써 망신을 준 것은 기본이다. 남들이 약탈을 허가받아 한몫 챙기러 다닐 때 아무것도 못 챙기고 감옥 안에 갇혀 불평만 한 것은 덤.
말 그대로 계급이 강등된다. 봉급과 퇴직금에 큰 악영향이 올뿐더러[44], 원래 같은 계급에 있던 사람에게 명령을 받게 되니 지옥이 따로 없다.
주로 장교급에 적용되었지만, 일반 병사에게 적용되는 경우도 드물게 있었다. 역시 어지간히 큰 죄를 지어야 가능한 처벌이었다. 보통은 시쳇말로 진급하기 힘들거나 쓸데없이 빡센 부서로 배치했지만, 사안이 중하면 다른 지역에 있는 군단으로 배속해버렸다. 장교는 로마 전역의 군단에서 순환근무에 가까운 형태로 근무하기도 했으므로 그렇게까지 큰 타격은 아니었지만, 일반 병사 같은 경우에는 현지의 군단에 지원해서 해당 군단에서 퇴역할 때까지 자리를 고수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타 지역으로 좌천되면 개무시가 문제가 아니라 생활기반까지 문제가 생겼다. 대부분 견디지 못하고 중간 전역을 했다.
퇴직금 없이 중간에 강제로 추방하는 것이었다. 명예에 금이 가는 것은 물론, 일반 병사의 경우에는 그간 개인장비 구매에 투자한 비용도 못 건지게 되니 금전적으로 엄청난 손해가 났다. 다만 퇴직금은 중간 전역의 경우 모두 지급이 안 되었다[45].
  • 코 베기
민간인 강간은 코를 잘랐다. 물론 이 민간인은 로마 시민이나 속주민, 동맹국 혹은 일반적인 비적성국 주민 및 기타 부족민을 말하는 것이었다. 다만 적지의 여인이라고 해도 적용대상이 되는 경우가 있었는데 주로 유력부족이나 파르티아 같은 강대국의 백성들이 해당되었다.
  • 손 베기
확실하게 사람 1명을 일을 할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 형벌이었다. 상습 절도범은 손을 자른 다음 추방해 버렸다. 역시 흔한 처벌은 아니었다.[46]
탈영, 전장에서의 명령 불복종[47] , 항명, 살인 등 중대한 군율 위반에 한하여 내려지는 처벌이었다. 집행 방식은 교수형 등 당시 쓰는 일반적인 것들과 함께 '푸스투아리움', '10분의 1형' 등 군대에서만 쓰는 것이 있었다. 한때는 로마군이 상당히 잔혹하여 주로 공격할 때 옆에 있는 병사가 낙오하는 것을 목격하면 옆에 있는 병사나 지휘관들이 즉시 그 낙오자를 죽이도록 했다. 낙오자를 죽이지 않는 사람도 죽였다고 한다. 만약 낙오자가 낙오자를 죽이려는 사람을 죽이는 데 성공하면 낙오자의 죄는 용서되었다. 로마인들은 이를 통해 우수한 군인들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물론 사형 자체가 중한 형벌이었므로 반항의 경우에는 직접적으로 항명 행위를 한다던지 하는 확실하고 중대한 사유가 있어야 했으며, 대부분은 탈영으로 처형되는 경우였다. 단 탈영의 경우에도 복무기간, 계급, 탈영 이전의 행동이나 탈영 때의 상황 등을 참작해서 사형보다 가벼운 처벌을 하기도 했다. 복무기간이 짧은 병사들은 참작을 많이 받았으나 많은 훈련을 받고 복무기간도 긴 고참병들은 참작받기 어려웠다고 한다.[48] 이는 후기의 병사 반란에서 고참병들이 반란을 많이 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를 만든다. 가뜩이나 원하지도 않은 힘든 군생활을 하는데다 짬밥을 많이 먹어도 여전히 혹독한 처벌을 받으니 누가 좋으랴. 당연히 병사들의 불만이 폭발할 수밖에.
  • 푸스투아리움
사형보다 중한 범죄에 적용되는 형벌. 원래는 채찍, 가지 같은 의미. 단어 자체를 의역하면 태형 정도가 되겠지만, 사형보다 중한 범죄라는 말에서 보듯이 그냥 죽이는 형벌이 아니라 때려죽이는 형벌이다. 그것도 군단 내 사형집행인이 전담하는 게 아니라 같이 싸우던 동료들을 시켰기 때문에 그 잔혹성이 배가되었다.
첫 번째는 병사들이 2열로 늘어서고, 처벌 대상자가 그 사이를 지나가면 병사들이 자기 앞에 올 때 몽둥이로 때리는 것이었다. 이건 로마 시대 이후에도 상당히 오래 남아서 러시아에서는 19세기까지, 스웨덴에서는 18세기까지 군대뿐만 아니라 민간인의 형벌로도 쓰였다. 영어로는 '건틀릿'이라고 한다.
두 번째는 군인 신분을 박탈한다는 의미로 군복을 벗긴 후, 다른 병사들이 둘러싸고 몽둥이나 채찍, 돌로 때려 죽이는 것이었다. 1번과의 차이는 1번은 대열을 통과할 때까지 하지만 이건 죽을 때까지 한다는 것이다.
1번은 거의 사형이었고, 2번은 그냥 사형이었다. 1번에서 몽둥이질을 버티고 대열을 통과해 살아남았을 경우 처벌을 끝내고 살려주는지는 특별한 기록을 찾지 못했으나, 당장은 살아남더라도 이후 생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게 맞으므로 사실상 사형으로 봐도 된다.
이게 적용되는 대표적인 경우는 1번의 경우에는 경계근무 중 무단이탈 등의 행위를 한 자, 2번의 경우에는 탈영 후 잡혀온 병사 혹은 적전도주자에게 집행되었다. 노예에게는 십자가형이 선고됐지만 로마 시민이나 기타 자유민에게는 십자가형을 집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49] 그 대안으로 십자가형 못지 않게 고통스럽고 잔혹하게 처형하지만, 십자가형에 비해 불명예는 덜하다고 평가되던 푸스투아리움을 집행한 것이다. 그리고 동성간 성교도 이 형벌의 대상이었는데, 합의했다면 둘 다였다. 강간이라면 가해자만 푸스투아리움을 받았다. 로마법에서 남자들 간의 동성애는 삽입하는 건 금지되어 있지 않아도 삽입당하는 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저지른 놈은 로마 남자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죄, 당한 놈은 로마 남자로써 할지언정 당해서는 안 된다는 규율을 어긴 죄였다. 참고로 로마는 그리스와 달리 동성애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다. 동성애 자체를 윤리적으로 죄악시하지는 않았지만 '박을지언정 박혀서는' 안 되는 남자답지 못한 행동으로 보았다.
  • 10분의 1형
극형 of 극형으로 꼽을 만한 형벌이었다. 부대 전체가 처벌 대상일 때 쓴다. 라틴어로는 '데키마티오'(decimatio), 영어로는 '데시메이션'(decimation)이라고 한다. 부대 전체가 처벌 대상일 때 적용기준은 총사령관에 대한 집단 항명. 즉 적전에 처한 부대가 총사령관의 작전 명령에 집단으로 반기를 들었을 때라고 분명히 정해져 있었으며, 역사에 처벌 사유, 집행의 정당성 등이 기록으로 확실하게 남았다. 또한 사령관은 임무 종료 후 원로원에 출석해서 자신의 행동에 대해 해명해야 했는데, 10분의 1형 정도 되면 중대한 군율 위반으로 처형했다 등의 해명으로 적당히 넘길 수 있는 게 아니라 정당성을 확실하게 인정받을 수 있는 명백한 증거자료를 제시해서 원로원 의원들을 설득해야 했다.[50]
어찌됐건 처벌이 합당하다고 판단되면 일단 처벌 대상자중 10분의 1 정도를 제비뽑기로 뽑았다. 보통 백인대 혹은 대대가 그 대상이었다. 그리고 운 좋게 뽑히지 않은 90명의 병사가 불운한 10명에게 '푸스투아리움' 2번을 가해 처형하고, 일정 기간 동안 진영 밖으로 쫒겨나 위험한 곳, 혹은 노예나 창녀들을 주둔시키는 곳에서 주둔하며 정규 짬밥 대신 동물용 사료를 배식받았는데, 그 기한은 제한이 없어서 군역에서 해제되는 날까지 갈 수도 있었다. 게다가 이 정도 건에 연루되면 살아남은 자들도 이후 사회적 매장은 확정이었다. 운 하나만으로 생과 사가 갈린다는 것으로 병사들에게 상당한 공포를 줬고, 운이 좋아도 같은 백인대 내에서 한솥밥을 먹고 얼굴 맞대며 함께 생사의 문턱을 넘나들던 동료 병사를 직접 때려 죽여야 하니 당대 사람들도 매우 흉악하고 야만적인 처벌이라 여겼다. 맞아죽는 사람보다 때려 죽이는 사람들이 더 참담했을 거다라고 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형편이다.
당대 기준으로도, 해도 해도 너무한 극형이었던 만큼, 진짜로 집행한 기록은 극히 드물고 어지간해선 선고만 하고는 주동자와 적극 가담자만 사형시키거나 그냥 선고를 하고는 슬그머니 거둬들였다. 예를 들자면, 지친 병사들이 행군을 거부한다든가 하는 경우에 카이사르는 선고만 하고 집행은 하지 않았다. 애시당초 경고가 목적이었다는 게 중론. 티베리우스 황제 즉위 초기 군단병들이 일으킨 반란 당시 티베리우스는 10분의 1형을 집행하지 않았으며 대신 주동자와 적극 가담자만 따로 불러내 처형하고 나머지 병사들은 그냥 넘어갔다.
마리우스가 모병제로 군제 개혁을 할 때 아예 폐지시켜 버리기도 했다. 도의적인 판단도 있었지만, 이런 흉악하고 야만적인 게 있으면 지원자가 줄어들 것 같은 데다 어차피 당사자만 처형해도 처벌은 충분하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게다가 결정적인 사유는 충성서약을 한 병사들이 불명예스러운 행동을 분명히 인지한 상태에서 사령관의 명령에 집단항명을 할 정도면 이미 부대가 붕괴된 데다 병사들 사이에서 사령관에 대한 신임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라 차라리 사령관을 교체해버리는 게 낫지, 10분의 1형을 집행해 봐야 소용 없다는 것이었다. 당장 단순 도주자들에게조차 데키마티오를 남발하던 크라수스조차 카르헤 전투에서는 혹형에도 불구하고 이미 붕괴된 부대의 기강을 전혀 잡지 못해 본인과 병사들 모두 참혹한 죽음을 맞아야 했는데, 이미 부대가 붕괴되고 병사들이 전의를 완전히 잃었을 때는 군법의 혹형이 기강을 잡는데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분명한 예시다.
제정 시대에는 오히려 더 줄어들어서 선고 및 집행한 사례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20년을 복무하는 지원병들이기 때문에 군복무에 대한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 병사는 어차피 입대를 안 할 것이었고, 개중에서도 동기부여나 군복무 적응도가 애매한 병사는 수습기간에 걸러내고 나머지만 정식입대하며, 제국이 안정되고 지휘관들이 커리어를 안정적으로 쌓고 위험한 전선에는 충분한 경험과 실력을 갖춘 자들만 투입되게 되면서 적어도 말도 안되는 명령 때문에 집단항명 같은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은 공화정 시기보다 오히려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다만 3세기의 위기 및 그 이후의 혼란기에는 늘어난 것으로 보이며 마지막 시행 기록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이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제도 페르시아 원정 직전 병사들이 집단 탈영을 강행하자 군기를 잡으려고 10분의 1형을 선고했다가 병사들의 반발이 심각하자 철회하고, 대신 주동자 몇명만 추려내 참수형에 처한 뒤 넘어갔다. 6세기 마우리키우스 황제가 쓴 병법서인 《스트레기콘》에서는 병사들의 사기에 악영향을 끼칠 뿐만 아니라 인적 자원의 낭비라는 이유로 10분의 1형을 포함한 극형들을 금지하였다.

8.6. 군기#s-2 (軍旗)


로마군은 고대의 군대 중에서도 특히 군기를 중요시했고 다양한 군기가 있었다.
가장 중요한 군기는 금이나 은으로 도금한 독수리를 장식이 된 장대 꼭대기에 붙인 '''독수리 군기(아퀼라)'''였으며, 이 군기는 로마군 자체를 상징했기 때문에 절대 적에게 뺏겨서는 안되는 군기였다. 독수리 군기를 드는 기수를 '''아퀼리페르(Aquilifer)'''라 불렀으며, 아퀼라와 함께 원수정 시대부터는 '''황제의 초상조각으로 만든 군기인 이마고(Imago)'''를 드는 기수 '''이마기페르(Imaginifer)''', 각 군단의 '''군단기인 벡실라리움(Vexillum)'''을 드는 기수 '''벡실라리오(Vexillarius)'''가 아퀼라 양 옆에 나란히 서서 행군했고, 군단 예하 각 코호르스(대대/천인대)에는 아퀼라 군기에서 독수리를 '''로마식 경례를 하는 오른손 모양 조각상으로 교체한 대대기인 시그눔(Signum)'''을 드는 기수 '''시그니페르(Signifer)'''가 편제되어 있었다. 기병대에서는 2세기 이후 다키아에서의 영향으로 '''길쭉한 용 모양의 군기인 드라코(Draco)'''를 사용하였고, 드라코를 드는 기수를 '''드라코나리우스(Draconarius)'''라고 불렀다. 군기를 드는 기수들은 자부심의 상징으로 사자, 표범, 곰, 늑대 등 맹수 머리가 달린 가죽을 투구 위에 덮어쓰는 장식을 했다(기병대 기수는 맹수 가죽 대신 얼굴에 은도금한 가면을 썼다).
[image]
로마군의 군기들, 좌측부터 아퀼라, 이마고, 벡실라리움, 시그눔, 드라코.

9. 기타


이전 버전에 그리스 등 주변 국가와 비교해 경제력과 무장, 인구 등이 월등한 시절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노레이아 전투, 아라우시오 전투, 론 강 전투, 마살리아 전투,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 에데사 전투, 아브리투스 전투, 카르헤 전투, 칸나에 전투 등등을 언급하면서 생각보다 못싸웠다며 비판하는 서술이 있었다.
실제로 로마 애찬론자(예를 들자면, 리비우스)들이 로마가 패배한 전투들을 기록에서 대량으로 삭제한 것으로 보이는 의혹들이 꽤 있는데, 패전한 전투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꽤나 밝혀지면서 역풍이 부는 중이기도 하다. 심지어 당시 로마인들이 아닌 에드워드 기번 같은 권위자들도 두들겨 맞는 중이다.

대표적으로 인구 유출로 막장이 된 마케도니아와 전성기 공화정 시절에 맞붙은 피드나 전투 같은 회전들에서 사실상 너무 괴이한 교환비인 1 : 250을 찍거나 적들은 몇 만 명이 거의 다 죽었는데 불사(?)의 로마인들은 몇백 명만 죽고 거의 죽지 않는 기적을 보여주는 기록들이 많고, 상성이 있다 쳐도 로마군이, 약한 군인들을 죽여서 강한 군인들만 남긴 스파르타조차 가볍게 능가하는 인간병기 수준으로 강했는지는 의문스러운 점들이 많다.

신뢰할 만한 기록들만 검토해 보더라도 의외로 졸전을 했던 모습들이 나오기도 한다. 추정 인구 평균 50만 ~ 많아야 100만에 무장도 로마군에 비하면 형편없었던 다키아 같은 소국이나 일부 부족들에게 기량이 좋은 지휘관 + 정예병 + 대군을 동원하고도 고전한 적도 있다.

로마인들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남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일은 상당히 잘했지만 학문을 그렇게까지 중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 문명을 정복했을 때도 운빨로 정복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고대 로마인의 그리스 서적들에 대한 테러나 무관심은 놀라울 정도였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로마군은 '''수많은 문화권의 수많은 군대를 굴복시켜''' 지중해 권역 최후의 승리자가 된 군대이다. 로마는 1,000년, 동로마 제국까지 치면 2,000년을 존속한 국가이며 그동안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곳에서[51] 어마어마하게 많은 전투를 치뤘으니, 당연히 패전도 많을 수 밖에 없다. 이건 역사상 그 어떤 강대국, 군사강국도 다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강대국이 인구 적고 무장 수준이 낮은 군대에게 지거나 고전한 사례가 있는건 딱히 이상한 일이 아니며, 그만큼 전쟁에서의 '''승패는 병가지상사'''라는 뜻이다. 중국의 통일제국만 봐도 국력으로 따지면 수나라에게 고구려가 아무 저항도 못하고 멸망했어야 하나 왕조까지 교체해가면서 70년을 피똥 쌌으며, 중국사 내내 한족 왕조의 100분의 1도 안 되는 극소수 유목민족에게 몇 번이고 나라가 넘어가 노예 신세로 살아야 했다. 소련의 겨울전쟁이나 아프간 침공, 미국의 베트남전 등과 같은 현대의 사례들만 봐도 인구,경제,장비 등등 모든 면에서 압도적이어도 고전하거나 패배한 케이스는 많다. 인간병기 스파르타도 패전한 기록만 모아놓고 보면 졸전만 거듭하는 '당나라 군대'였다. 중세를 휩쓴 몽골군도 실제 패전 비율을 조사해 보면 생각보다 높다.[52] 또한 현 세계최강 미군도 패전한 전투만 모아놓고 보면 양이 상당하다. 대영제국의 레드코트도 병력의 양과 무장수준을 생각하면 당연히 그냥 밟아 버렸어야 할 줄루 전쟁, 보어 전쟁에서 졸전을 면치 못했다. 사실 어지간한 승승장구하는 강대국도 이긴 전투와 진 전투의 비율을 세어 보면 대체적으로 거의 1:1 수준으로 비슷하고, 패전 비율이 승전에 비해 눈에 띄게 낮은 강대국은 긴 인류의 역사상 고작해야 '''미국'''밖에 없다. 오히려 미국만큼 패전률이 적은게 역사 전체적으로 보면 황당할 정도로 특이한 사례다.
하다못해 축구만 봐도 강호팀이 약체를 상대로 고전하거나 충격패를 당하는 일이 많은데, 훨씬 변수가 많은 전쟁에선 말 할 것도 없다. 게다가 군대의 뛰어남은 단순히 회전에서의 전투력에 국한되지 않는다.
로마는 생각했던 것처럼 무적의 전투력을 가진 군대는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53] 그 외의 요소들-전략, 병참(보급) 등-에서는 그 어떤 국가들보다 뛰어난 면모를 뽐냈고, 그러한 군대의 힘으로 지중해 세계를 재패했다.
징크스가 하나 있는데, '''뱀이나 전갈 같은 동물들을 아주 재수없게 여겼다.''' 때문에 뱀이나 전갈이 군영에 나타나면 전투에서 패한다고 굳게 믿었는데 그래서 그것 때문에 멀쩡한 병력을 철수하는 천인대장도 있을 정도였다. 이는 현재에도 깊이 남아있는 유서깊은 징크스이다. 히딩크호/이탈리아전 문서 참고.

10. 관련 문서


[1] 마리우스 개혁과 달리 폴리비우스가 수행한 것이 아니고 역사가 폴리비우스의 저작에서 서술된 로마군 및 해당 군제개혁을 말한다.[2] 어떻게 차출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때 재산도 신고했는데 어디서 임무 수행을 해야 하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3] 한참 후인 제정 로마 시기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트라야누스 황제 시절 황제가 친정했던 다키아 원정 때 20만이 동원된 것과 비교하자. 단 이 20만은 원정군 병력만 계산한 것이고 제국 각지의 주둔 군단은 제외한 것이긴 하다.[4] 한국과 일본의 대중서에서는 흔히 '대대(大隊)'라 번역됨. 라틴어로는 '코호르스'(cohors), 복수형으로는 '코호르테스'(cohortes), 영어로는 '코호트'(Cohort)라고 쓰고 읽는다. 이 문서에서는 코호르스로 통일하자.[5] 이 비생산적 집단을 지나치게 많이 유지할 경우 벌어지는 일을 알고 싶으면 북한에서 선군정치라는 미명하에 사회 전체의 기반을 군대에 집중했다가 그 군대까지도 망가진 걸 생각해 보면 된다.[6] 영어 단어에 여전히 남아 있다. 예) Auxiliary Verb[7] 이건 상당히 결과론적인 시각이다. 파르티아는 이미 내부적으로 문제가 많았고 카라칼라의 원정이 아니었어도 시기의 차이지 지방 세력의 도전을 막기 힘들었다.[8] 한 예로, 3~4세기의 로마군 기병화의 비율이나 성과가 과대평가되었으며, 반대로 2세기 이전의 로마군이 이전에 알려진 것보다 더 높은 기병 비율을 가졌다는 연구가 나오기도 했다. 오현제 시대와 군인 황제 시대 사이의 패러다임 전환 자체가 과대포장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9] 율리아누스의 부제 시절 승전으로 알려진 스트라스부르 전투에서도 로마군 기병은 여전히 야만족 기병에 비해 추태를 보였고, 이를 만회하여 전투를 승리를 이끈 것은 결국 보병이었다.[10] 보통 집정관 1명이 2개 군단을 지휘했다.[11] 미드 스파르타쿠스 시즌 1에 보면 용병으로 고용되어 보조군에 들어간 스파르타쿠스랑 트라키아인들이 로마군에게 심한 차별을 받는 것을 알 수 있다.[12] 콤모두스는 근위대에서 평판이 좋았고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황제가 바뀌자 불안해 했던걸로 보인다. 페르티낙스는 무관용에 엄격한 사람으로 유명했기에 불안감은 더 커졌다.[13] 비단 이집트뿐만은 아니다. 다른 속주도 마음만 먹으면 다 가능했다. 현대에도 그런 경우가 종종 보이는데 행정력이 현대 수준에서 형편 없는 고대 로마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14] 클라우디우스는 한때 해방노예 출신들로 비서실을 채웠으나, 도미티아누스는 황궁을 신축하면서 비서실을 부활시키고 기사계급들을 그 자리에 임명했다.[15] 자신을 지지해준 병사들에 대한 보답과 속주 총독의 반란시 당장 가용할 수 있는 중앙군의 필요성에 의한 결정이었다.[16] 정치군인의 이미지가 있지만 본질은 군인이었고, 하급 병사들은 전쟁터에서 이전 시기보다 더 많이 싸우고 활약했다. 3세기의 위기 때 군단병들의 급료도 수시로 체불되기 일쑤였던 반면, 근위병들은 어쨌건 안정적인 봉급과 처우를 보장받았기 때문에 지원자의 질적 수준이 유지됐다.[17] 근위대란 껍데기가 로마에 남은 것이었고, 주병력은 황제들이 차출해서 따로 편성을 했다.[18]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젖먹이는 건국설화의 늑대이다.[19] 트라야누스 황제 말기 이 부대는 브리타니아 원주민들의 연이은 침략에 대응하여 원정에 투입되었으나 매복에 걸려 부대원들 전원이 몰살당하고. 군단기까지 빼앗겼으며 다시 편성되지 않았다는 가설이 있다. 영화 이글의 배경이 바로 이 가설이다. 하지만 트라야누스 시대 이후로 네덜란드로 재배치되었다는 증거도 있어 확실한 결론을 낼 수는 없다.[20] 바르 코크바 본인은 결사적으로 저항했으나 결국 베탈 요새가 로마군에게 함락당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거나 뱀에게 물려 죽었다고 한다. 바르 코크바의 머리는 잘려져 하드리아누스 황제한테 바쳐졌다고 알려졌다.[21]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로마군 궁수들은 사실 로마인이 아니라 시리아인 궁수들이다. 특히 로마군의 궁수들은 중동 출신이 절반을 차지했을 정도로 많았다.[22] 바타비족은 현대까지도 네덜란드인들의 시조로 인정받으며, 바타비아 공화국도 여기서 그 이름을 따왔다.[23] 이름과 달리 보조병 보병만을 담당했다. 이는 보조병 편제가 대대 규모까지는 로마 군단병과 동일한 편제를 따랐던 것이 그 이유로, 로마 군단병 대대는 별도의 지휘관이 없이 해당 대대의 선임 백인대장이 대대 지휘를 겸했던 것으로 추측된다.[24] 실제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황제가 이미 사용 기한이 지난 무기를 병사들이 사용하는 형편이라고 원로원에 서한을 보낸 바 있었는데, 병사의 봉급으로 무기를 교체하도록 되어 있었으므로 3세기 중엽부터 봉급 체불이 자주 이루어져 무기 교체도 어려워지는 형편이 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25] 물론 전장에서의 명령 불복종은 얄짤 없이 사형 내지는 그에 상응하는 최고 수위 처벌이었다.[26] 당시 로마 인구의 90% 정도가 문맹이었으므로 로마군은 교육 수준은 크게 문제삼지 않았지만(다만 당시 공용어인 라틴어를 읽고 쓸 줄 알아야 했고 기본적인 사칙연산도 요구하였다), 체력 테스트는 철저했다. 체력이 모자라면 전투 중에 쉽게 지쳤다가 적군의 공격에 죽을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입대 이후에도 수시로 체크를 했다. 모자라면 그냥 조기 퇴출. [27] 어차피 제대하고 나서 일거리를 찾기 어려운 마당인지라 복무하면서 알고 지낸 소속부대 장군의 사병으로 활동하는게 생계에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28] 다만 병사가 진짜 돈을 아낀다면 30% 정도의 저축은 불가능하지 않기는 했다. 근위병은 도시 근처에 주둔하긴 했으나 평소에도 외출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혹독한 통제가 이루어졌으며, 군단병은 분위기는 좀 더 자유로웠으나 기지가 대부분 도시와 떨어진 전방에 있었다.[29] 게르만족이 로마를 약탈하는 중요한 원인이 로마인들이 자기들보다 잘 살기 때문이었던 이상, 자기들도 잘 못사는 땅에서 더 잘사는 나라 군대가 약탈을 할 수 있을 가능성은 없다.[30] 다키아는 풍성한 금광과 은광을 자랑했다.[31] 그러나 로마에 비하면 인구에서 압도적으로 열세였기에 로마와 맞먹는 수준은 아니었다.[32] 하지만 그렇다고 로마가 기병 전력에서 밀린 것은 절대 아니다. 로마의 기병부대도 막강한 데다 로마군도 대기병 전술을 개발하여 맞섰기에 파르티아와 페르시아도 기병전으로 나가다가 참패한 적이 많았다.[33] 풀스(Puls). 밀을 빻아 반죽해 구워서 빵으로 만들 시간이 없을 때 그냥 물에 밀을 넣고 끓였다. 대략 오트밀과 비슷한 형태이다.[34] 신선한 우유는 그 당시 귀족이나 부자들만이 먹을 수 있는 고급 음식이었다.[35] 군단병은 대부분 농부 출신이었으므로 치즈를 만들 줄 알았다. 치즈를 굳히는 데 필요한 레닛(Rennet) 효소는 무화과 줄기에서 짜낸 즙으로부터 얻었다.[36] 당시의 올리브유는 상당히 귀한 음식이었다. 중세 이후 남유럽에서 올리브를 대량재배하면서부터 가격이 싸졌지만 그나마도 남유럽 바깥 지역에서는 여전히 귀했다.[37] SHA, Hadrian X, 2[38] 축제 때 고기를 먹기 위해 로마 군인들이 각자 돈을 각출하여 가축을 샀다는 기록도 있다.[39] 유능한 군사 지휘관이었던 베르킨게토릭스는 이 사실을 이용해서 카이사르에게 물자를 공급하던 갈리아 부족들을 포섭하고 주둔지 주변의 도시를 초토화하여 카이사르에게 후퇴를 강요한 일이 있었다.[40] 하지만 적법한 자식, 부계 친척이 먼저 권리가 있었다[41] 당연히 이 시기에도 있었다. 한번 징집하고 끝이 아니라 많게는 17~45세 기간 1년 징집을 4~5회씩 경험하기도 했기에 굳이 상태 안 좋은 병사를 억지 선발할 필요는 없어 제정 시기의 지원병 선발 기준과 큰 차이는 없었을 것으로 보이며, 《로마인 이야기》 등에서 언급하는 징병 선발은 성인이 된 뒤 징병검사를 거쳐 현역 판정을 받은 청년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다.[42] 물론 성분은 사람 먹을 영양소지만.[43] 물론 당대에도 이건 지나친 처사라는 평가가 중론이라 다시 실시된 예는 없는 듯하다. 대신 전투력 유지에 필요한 위생관리 등을 제외한 개인정비를 일부 박탈하거나 노역기간을 남들은 10일 하는데 벌받는 병사들은 15일 이런 식으로 줬을 가능성이 더 높다.[44] 병사는 봉급 차가 그리 많이 나진 않았지만 백인대장급만 되면 퇴직금이 반토막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피해가 컸다.[45] 단 이 경우는 안전장치가 있어서 별도의 위로금과 적립금을 주도록 되어 있었다. 아무리 로마군이라지만 과사실 추방자와 그냥 복무 부적격자는 구분했다,[46] 고대에 노동력의 상실은 사실상 사형인지라 어지간한 죄를 저질러서는 절대 하지 않았다.[47] 로마군도 사람 사는 곳이니 평소에 혹은 전시상황에서 백인대장 지시를 불이행한다고 사형시키는 짓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장에서 전투중에 그렇게 했다가는 부대가 붕괴되기 때문에 이때만큼은 사형이 원칙이었다.[48] 단 자진복귀할 경우, 다른 중범죄가 없으면 사형만은 시키지 않는 게 관행으로 되어 있었다.[49] 법적으로 제한이 없는 속주민이라 해도 십자가형의 집행은 반역의 주동자 혹은 연쇄살인마 정도나 되어야 생각해볼 만한 처형으로 인식되었다. 노예라고 해도 주인을 살해하거나 살해하려 한 당사자에게나 적용되었다. 기독교인들을 상대로 십자가형을 마구 집행한 네로가 괜히 폭군 소리 듣는 게 아니다.[50] 크라수스의 경우 술라파 인사라는 점. 그리고 로마 제일의 부자였고 권력자였다는 점 때문에 사안을 묻어버린 케이스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게다가 스파르타쿠스 반란을 진압하던 부대가 대놓고 노예군에게 등돌려 도망치는 바람에 초전에서 패배한 것이었고 그 부대를 상대로 '데키마티오'를 집행한 거라 당대 로마인들이 해당 부대의 구성원들의 행태를 매우 수치스러운 행위로 생각한데다가 징병제가 아닌 일반 시민이 엮일 가능성이 낮은 지원병제였기 때문에 넘어갈 수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즉 크라수스 정도의 인사가 노예군 앞에서 등돌려 도망갈 정도로 엄청난 짓을 한 부대를 향해 내린 수준이 아니면 합당한 처벌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51] 숙적으로 여겨지는 게르만족은 물론, 동방의 대제국 사산조 페르시아부터 나일강 상류의 고대 흑인왕국에 심지어 '''우크라이나 초원지대'''까지 진격해서 유목민들을 박살낸 적이 있는게 로마다. 거의 모든 유형의 군대와 다 싸워봤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52] '''베트남의 이순신'''이라 불리는 쩐흥다오에게 패배하고 이집트에게도 파르완 전투,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패배했으며 그 외에도 카프카스 산맥 정복도 실패하고, 인도도 히말라야를 극복하지 못해 정복 실패했다. 일본 정복도 실패했는데 이건 태풍의 도움이 있긴 했지만 일본 스스로 잘 막아낸 측면도 분명히 있다.(해안가에 방벽을 쌓고 궁수들을 배치하자 몽골군이 상륙피해를 줄이기 위해 다른 상륙지를 찾아 헤메다가 태풍 만나 꼬르륵 했다. 즉, 애초에 해안방비를 철저히 했기 때문에 몽골군이 다른 상륙지를 찾아 헤메다 괴멸하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53] 인류 역사상 무적의 군대는 존재한 적 자체가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