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

 

1. 駙馬, 사위
1.1. 개요
1.2. 역할과 지위
1.3. 한국사에서
1.4. 여담
1.5. 항목이 작성된 부마 목록
1.5.1. 실존인물
1.5.2. 가상인물
2. 釜馬, 부산+마산


1. 駙馬, 사위




1.1. 개요


'''천자의 딸과 결혼한 남자'''를 말한다. 즉, 공주/옹주의 남편이자 임금의 사위를 말한다.

1.2. 역할과 지위


풀네임인 부마도위(駙馬都尉)는 천자의 행차 때 갑작스런 암살의 위협을 막기 위해서 어느 마차에 천자가 탔는지 모르도록 하는 예비 마차인 '부거(副車)'를 끄는 말인 '부마(駙馬)'를 관리하던 직책이다. 현대 사회의 직책과 비교하자면, ''''대통령 3호차의 운전기사 겸 자동차 책임자''''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평소에는 참으로 할 일 없이 반쯤 땡보 같은 직책이나 다름없지만,[1] 그런 주제에 천자와 아주 가까워서 위세는 대단했던 자리다. 천자의 비서 역할을 맡는 환관이었던 십상시도 절대권력을 휘두르지 않았던가?
그래서, 부거라는 것이 천자에게 칼을 들이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위치인지라 아무나 자리를 앉힐 수는 없는 노릇이라, 사마염이 안전 보장을 위해서 이 직책에다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위를 임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자의 사위만이 부마도위 직책을 하도록 굳어지면서 결국에는 '부마도위=천자의 사위'가 된 것이다. 그 뒤에는 그나마 맡던 역할도 희미해져서 사실상 명예직에 가깝도록 변하였다. 물론 위세는 어디 가지 않았다. 비슷한 것으로는 천자의 외삼촌에게 주어지던 거기장군(車騎將軍)이 있었다.
상위 버전으로 여왕의 남편인 국서가 있다. 다만 우리나라의 경우 여왕이 신라시대에 세 명 있었을 뿐이고 그나마도 독신이거나 정식으로 혼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사에 한해서는 의미없는 용어이다. 여왕이 종종 나왔던 서양사에 관련해서 주로 쓰이는데 그나마도 여왕의 남편을 무조건 국서라고 하지 않기 때문에 대개는 그냥 여왕의 남편이라는 식으로 풀어쓰는 편.[2]
한편 천자국과 제후국 사이의 혼인 같은 경우가 아니라 일반적인 국가 관계에서 타국의 공주와 결혼했을 때는 부마라고 하지 않는다. 사실 부마라는 용어 자체가 위에서 설명된 어원을 봐도 알 수 있듯이 공주가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3] 신하와 결혼한 경우에 사용되는 동양적인 용어이기 때문에 비슷한 급의 왕족끼리 겹겹이 중첩된 혼인 관계를 맺는 것이 다반사인 서양 왕족의 결혼과 관련해서 쓰는 것은 부적절하다.

1.3. 한국사에서


신라에서는 적남이 없거나 순서를 양보하는 경우 부마가 왕위를 잇기도 했다. 신라 왕의 성씨가 박, 석, 김이 번갈아가며 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성이 바뀌는 부분은 대부분 전왕의 사위로서 왕위를 이은 형태다.[4][5] 국성이 바뀐다는 개념이라 신라 이외 중세 이후의 흔한 동아시아 왕조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형태이기도 하다.
한편 나말여초 후백제의 장수 박영규는 견훤의 사위이자 태조 왕건의 사돈, 정종의 장인이 되었다.
고려의 왕들은 원 간섭기 내내 원의 부마였다. 충렬왕제국대장공주와 결혼한 것을 시작으로, 고려 제1왕비는 원나라 공주가 차지했다. 왕위도 원나라 공주가 낳은 아들이 물려받았고, 그 아들 또한 원나라 공주와 결혼했다. 그러니 원나라 출신인 왕비와 그 수족들의 힘이 강해서, 고려인들은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했다. 원나라 공주 출신인 왕비들은 막강한 친정을 등에 업고 횡포를 부렸으며, 남편인 고려 국왕까지도 업신여겼다.[6] 다만 노국대장공주는 제외하고.[7]
조선의 경우에는 세조 때부터 '의빈(儀賓)'이라고 했는데,[8] 공주의 남편은 종1품 ○○위(尉), 옹주의 남편은 종2품 ○○위(尉), 군주의 남편은 정3품 ○○부위, 현주의 남편은 종3품의 ○○첨위 하는 식의 이름뿐인 관직을 내렸다. ○○에는 부마의 본관이 들어간다.
참고로 공주는 왕의 적녀(嫡女)로 무품, 옹주는 왕의 서녀(庶女)로 무품, 군주는 세자의 적녀로 정2품, 현주#s-1는 세자의 서녀로 정3품 작위다. 어찌됐든 아내보단 한 끗발 뒤지는 셈(…). 하지만 옹주의 남편인 도위나 부위, 첨위도 업적에 따라서 의빈부 최고 품계인 유록대부(정1품)에 오를 수 있었다. 고종 6년에 공주옹주의 남편인 위는 정1품으로, 세자의 적녀인 군주의 남편인 부위는 종1품으로, 역시 세자의 서녀인 현주의 남편인 첨위도 종1품으로 승격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왕의 사위니 그 대우가 각별하고 편하게 살 수 있지만, 처신을 잘못해서 정치 문제에 휘말리거나 배짱이 두둑해져서 끔살당하는 경우도 있다. 게다가, 조선 왕조의 경우 부마는 정책적으로 명예직 외엔 벼슬을 할 수 없었다. 가끔 왕명을 받아 공문서를 작성하거나 예전을 맡거나, 중국에 사신으로 간다든가,[9] 한 마디로 실권은 거의 없으면서 얼굴마담이 필요한 자리에 종종 불려나갔다.
그리고 아내가 왕녀이다 보니 을 둘 수 없었으며, 아내가 먼저 죽어도 재혼을 할 수 없었다.[10] 간혹 왕의 허락을 받아 재혼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숙종효종의 4녀 숙정공주가 요절한 후 숙정공주의 남편 정재륜[11]이 재혼할 것을 청한 것을 물리치면서 이를 계기로 부마의 재혼 금지가 법제화되었다. 만약 공주가 일찍 죽었는데 후사가 없다 해도, 재혼은 못 하고 무조건 양자를 들여야 했다.[12]
부마 작위는 혼인식 전에 받기 때문에, 식을 올리기 전에 왕녀가 죽으면 결혼도 못하고 홀아비가 되었다. 조선 후기에 왕녀들이 단명하면서 어린 나이부터 수절하는 부마가 늘어났다. 혼인하고 3개월만에 아내 영혜옹주가 죽어 홀아비가 된 박영효가 대표적인 케이스다. 부마는 재혼을 못한다는 관념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심지어 조선이 망한 뒤로도 소실이 있었을 뿐 정실부인을 들이지 못했고,[13] 죽어서도 정실부인 영혜옹주의 곁에 묻혔다.
신분도 공주옹주건 품계 위에 사는 존재라 아내님께서 더 높으시니 남편 놈은 설설 기어야 하고, 시부모조차 깍듯이 존대하며 며느리 살이를 해야 하는 데다[14] 부마는 벼슬을 못하고 지체 높은 양반이 다른 부업을 할 수도 없으니 그야말로 무위도식. 게다가 정종처럼 정치적 문제에 휘말려 끔살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부마가 되는 것을 반기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다만 왕녀를 며느리로 맞아들였다는 것은 왕실과 사돈을 맺는 것이니 원래 가문이 어쨌든 간에 순식간에 1등급 명문가로 부상하게 된다. 그래서 부마 본인은 거의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해도 부마의 형제나 가까운 친척은 과거시험이나 조정 내 승진 등에 있어서 알게 모르게 혜택[15]을 받게 되고, 왕녀와 부마 사이의 자손은 왕실의 외손이라는 이유로 높은 벼슬에 올랐다. 자손까지 내내 벼슬할 수 없이 무위도식해야 하는 왕자들[16]보다 오히려 낫다고 할수 있다.
게다가 왕의 성향이나 딸에 대한 총애 정도에 따라 많은 차이가 나긴 했어도, 왕녀의 지참금이란 일반 양반가 딸들과는 자릿수부터가 달랐기 때문에, 왕녀들이 시집오며 가져온 재산으로 집안을 더 일으키는 경우도 허다했다. 일례로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 김한신이 영조가 매우 총애하던 딸 화순옹주와 혼인하여 부마가 되었는데, 원래도 명문가였으나 화순옹주가 시집 오면서 새삼 갑부가 되어 김정희가 그토록 부유한 집안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고.
그리고 왕실에서 부마로 찜하면 본인이나 그 부모가 부마 하기 싫다고 거절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태종후궁 소생인 정신옹주를 시집보내려고 지화라는 점쟁이를 시켜 "사주 좋은 미혼남을 알아보라"고 한 적이 있다. 지화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사주를 알아봤는데, 춘천 군수를 지냈던 이속[17]은 지화를 쫒아내면서 "내 아들을 몸종의 딸에게 장가 보낼 순 없다. '''내 아들은 죽었다. 그러나 상대가 정혜옹주(貞惠翁主)라면 살아있을 수도 있다.'''"라고[18] 말한다. 정신옹주신녕궁주(愼寧宮主) 신빈 신씨의 소생인데, 신녕궁주는 태종의 승은을 입기 전에 원경왕후 민씨를 모시던 몸종이었다. 그러나 정혜옹주는 정의궁주(貞懿宮主) 의빈 권씨의 소생인데, 간택받아 후궁이 된 명문가의 규수 출신이었다. 즉 환언하면 모친의 혈통이 마음에 들지 않다는 것.[19] 결국 수 차례의 상소 러시 끝에 노비 신분으로 전락해 간신히 목숨만 건진 채로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 기록조차 남지 않는 여생을 보내게 된다.[20]
사실 이 시기에는 왕족이건 부마건 관직에 오르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박종우는 세종대왕 대에는 형조판서를 지냈고 문종 대에는 부친과 같이 찬성 직위까지 오른다. 단종대에는 계유정난에 적극 참여해서 1등공신에 오르는 등 꽤 호사를 누렸다.[21] 그런데 성종 대에 "서얼들은 관직에 오를 수 없다"고 하자 박종우의 처가 이를 항의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때 신료들 중에서는 "부마의 재혼은 없다. 허락하지 말아달라."고 하는 일도 있었으나, 성종이 "선대에서 허락한 일"이라고 해서 정처로 인정해줬다.
예외적인 경우로 배짱 두둑한 부마의 경우에는 아내를 구타 폭행하거나, 공공연히 바람을 피우거나, 홀대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여종과 바람이 나서 도망치는 경우도 있었다. 이 때는 당연히 난리가 나서 대대적인 국문 크리. 예를 들어, 중종은 딸인 효정옹주가 남편의 홀대를 받다가 요절하자 분노해 그 부마를 처벌하기도 했다.
중종의 딸로 숙원 이씨(淑媛李氏) 소생의 효정옹주가 남편 조의정의 바람과 무시, 학대를 당하다 난산 끝에 제대로 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죽었다. 심지어는 난산을 겪던 딸을 위해 왕이 보낸 의녀를 조의정이 못 들어가게 대문을 안 열어줬다. 이쯤 되면 아내가 빨리 죽기를 원했던 것이라고 볼 수밖에.[22] 결국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한 옹주가 죽자, 격노한 중종이 조의정을 국문에 부쳤다가 직위를 박탈하고 귀양보냈다.
이때, 풍가이라는 조의정의 도 같이 처벌되었다. 그녀는 원래 옹주의 몸종이었으나, 조의정이 그 미모에 반해서 강제로 첩으로 삼았다. 박색이었던 옹주를 몹시 싫어한 조의정은 정실인 옹주를 죽이고, 풍가이를 부마에게는 원칙적으로 금지된 첩으로 들이려 했다. 그래서 중종이 풍가이를 귀양보내라 명했는데, 조의정이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내고(!)[23] 풍가이를 숨겨둔 채 계속 정을 통해왔던 것이 발각났다. 그러나 풍가의가 그의 첩이 된 것은 스스로 원해서가 아니라 강요에 의한 것이었고, 풍가이가 평소 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효녀라는 점 때문에, 대신들이 극력 옹호한 덕분에 장을 100대 맞고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상궁 은대[24]가 사람을 시켜, 가뜩이나 곤장 100대를 맞아 반죽음이 된 풍가이를 구타하고 수십일 동안 방치하여 죽게 했다. 신하들은 은대를 처벌할 것을 주청하였으나 중종이 끝까지 비호하여 1년 남짓 귀양을 살고 풀려났다.[25]
정작 조의정 본인은 재산과 지위를 박탈당하고 귀양가는 선에서 그쳤는데, 그 이유는 그의 아버지가 높은 관직을 지냈던데다 효정옹주가 낳은 조의정의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종이 아무리 사위 조의정을 미워해도, 외손주의 앞날을 생각하면 차마 사위를 죽일 수 없어서 그랬다고 한다.
한국사 최후의 부마는 영혜옹주와 결혼했던 철종의 부마 박영효다. 덕혜옹주소 다케유키가 혼인한 것은 1931년으로, 이미 대한제국이 멸망한 뒤였기 때문이다.

1.4. 여담


영어로는 단순하게 king's son-in-law(말 그대로 왕의 사위)라고도 적고, 왕자와 동일하게 prince라고 호칭하기도 하는데, 영어를 번역할 때 부마임이 분명한 캐릭터에 사용된 prince를 왕자로 직역해버리는 경우가 있어 의미가 틀어지곤 한다. 전문 번역가들이 이를 모를 확률은 낮고, 부마라는 단어를 잘 모르는 사람이 많은데다 왕자라는 단어가 아무래도 더 간지가 나니 오역인줄 알면서도 일부러 왕자라고 번역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제일 유명한 케이스인 페르시아의 왕자의 경우, 이 프랜차이즈가 국내에 알려진 것은 1990년경 복제판 PC 게임을 통해서였고 아직 정발조차 되지 않았을 때였기 때문에 공식 번역 명칭 따윈 없었다. 따라서 이는 번역가의 의도가 아니라 그저 "prince=왕자"라는 상식이 작용한 결과라고 봐야 할 것이다. 게임 배경이 자세하게 알려진 것도 아니고 타이틀 화면만 볼 수 있었으니 어쩌겠는가.[26] 뭐 결과적으로는 시리즈를 거듭하며 게임의 주인공이 부마가 아니라 진짜 왕자 출신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아무래도 좋지만.
판타지 소설에서는 보통 공작의 상위 개념인 대공으로 칭하는 경우가 많다.

1.5. 항목이 작성된 부마 목록



1.5.1. 실존인물



1.5.2. 가상인물



2. 釜馬, 부산+마산


부울경의 양대 도시(였던) 부산광역시마산시를 묶어서 일컫는 말.[31] 마산창원시의 2개 구[32]로 통합 재편된 2010년대 현재에는 별로 사용되지 않는 줄임말이지만 종종 이 명칭이 사용되기도 한다. 남해고속도로제2지선의 초창기 명칭도 부마고속도로였고, 부마가 들어간 유명한 사건으로는 제4공화국 말기에 일어난 부산·마산 민주 항쟁이 있다.
부산을 연고지로 한 롯데 자이언츠와 마산을 연고지로 한 NC 다이노스는 일명 부마 대첩으로 불린다.[33] NC의 창단 때부터 워낙 롯데 구단측에서 노골적으로 창단 반대를 드러낸 것부터 이어진 대립 관계로 빠르게 라이벌이 됐다.
주로 호프집 간판으로 사용된다. 대학가 등지에서 보이기도 한다.

[1] 그나마 귀찮은 일이 부거를 관리하는 것 정도인데, 자신의 심복을 세워놓고 제대로 관리하는지만 확인하면 할 일도 별로 없다.[2] 영어에서 국서에 해당하는 king consort는 여왕과 결혼했다고 해서 무조건 주어지는 호칭이 아니다.[3] 낮다 해봤자 대다수가 양반, 귀족이지만...[4] 최초의 석씨 왕 탈해 이사금은 박씨인 남해 차차웅의 사위였고, 최초의 김씨 왕 미추 이사금은 석씨인 조분 이사금의 사위였으며 신라 후기 박씨 왕조의 신덕왕은 김씨인 헌강왕의 사위였다.[5] 애당초 성골이란 개념 자체가 진평왕대에 왕위계승 정당화를 위해 성립된 개념이란 설이 통설이고, 신라의 국혼은 철저하게 족내혼이 주류였다. 즉 성씨가 다르느니 해도 기본적으로 다들 겹겹이 친척관계로 맺어진 근친들이라는 것[6] 다만 이때 몽골인 왕비들에 대해 좀 쉴드쳐 주자면, 이들은 말 그대로 정략결혼의 희생양이 되어 친정과 떨어져 생판 모르던 나라에 살아야 했다. 그런데 당시 상당수 고려 왕들은 이런 원나라 공주 출신 왕비에게 진짜 애정을 주는 경우는 드문 편이었고, 후궁들과 꽁냥거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인격이 미성숙했다고 깔 순 있겠지만, 보면 백성들 입장에선 미담도 아주 없는 건 아니고, 왕비 입장에선 고려 왕 하나 보고 왔는데 왕은 자길 사랑하지 않으니 밉기도 했을 것이다. 실제로 충렬왕, 충선왕의 행보를 보면 왕비 제국대장공주, 계국대장공주 입장에선 열 받을 짓도 많이 저질렀다. 그러나 개막장 폭군 충혜왕은 아예 '''역으로 원나라 공주를 강간했다'''.....[7] 물론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금슬이 좋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애당초 노국대장공주는 이전 원나라 공주들보다 신분이 낮았다. 황제의 딸이 아닌 제후국 왕(쿠빌라이의 현손)의 딸이었던 것. 당연히 원나라 황제의 딸이었던 이전 왕비들보다야 권세를 부릴 여지가 적었다.[8] 대군, 군 등의 종친들을 관할한 종친부처럼, 부마들을 관할한 의빈부(儀賓府)가 있었다. 하지만 의례 부마라고 계속해서 불렀다.[9] 보통 사신단의 수장인 정사를 부마나 왕족이 맡았는데, 사신단의 격을 높이기 위한 얼굴마담 느낌이 강했다. 외교 실무는 정사의 아랫사람인 부사나 서장관 등이 거의 처리했다. 박지원의 유명한 열하일기영조3녀화평옹주에게 장가간 팔촌 형 금성위(錦城尉) 박명원이 청나라에 진하사로 갔을 때, 박지원이 꼽사리 껴서 따라가 쓴 기행문이다.[10] 홀아비가 되고 나서 첩을 두는 것은 왕실에서도 눈감아 주었다고 한다.[11] 영의정 정태화의 5남으로 작은아버지인 정치화에게 양자로 들어갔다.[12] 위의 정재륜은 그 자신이 작은아버지 정치화가 아들이 없어 후사를 잇지 못하자 양자로 들어갔던 건데, 외아들이 후사없이 일찍 죽는 바람에 난처하게 되었다. 결국 큰형(법적으로는 사촌) 정재대의 손자인 정석오를 죽은 아들의 양자로 들여 후사를 이었다.[13] 다만 소실을 통해 후손을 본 결과, 일제가 내린 후작 작위를 계승할 자손은 있었다. 일제의 입장에서 이미 망한 조선 왕조의 규칙은 의미가 없었기 때문.[14] 오죽하면 효도를 철칙으로 알던 시대인데도 공주옹주는 시부모에게 절을 안 해도 괜찮았다.[15] 정명공주와 그녀의 남편인 부마 홍주원의 후손이 사도세자의 빈인 혜경궁 홍씨다. 수빈 박씨화평옹주의 남편인 부마 박명원의 추천으로 후궁 간택이 되었다.[16] 왜 그런지는 구성군 문서를 보면 된다.[17] 간택 제도가 생기게 한 장본인[18] 다른 왕이라면 "뭐 이런 놈이 다 있나?"라면서 대충 귀양보내고 말았겠지만, 상대는 고려의 마지막 버팀목을 죽이고, 조선의 설계자와 이복동생 2도 죽이면서 창업군주인 아버지도 사실상 쫓아내고, 동복 형대판 싸우고 왕이 된 태종 이방원이었다(...) 게다가 태종은 자식 3명을 어렸을 때 병으로 잃은지라 자식에게는 물렀다.[19] 그러나 이속 본인 입장에서는 자기 집안인 연안 이씨가 할아버지 이원발부터 고려의 전공판서를 지내다 고려가 망하자 조선 태조가 몇 번이나 상신으로 초빙을 했어도 끝내 응하지 않고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명신이었고, 아버지는 호조판서와 제조를 지낸 이귀산, 큰아버지인 이귀령은 좌의정을 지낸 명문가이니 왕실과 혼인을 할 때 하더라도 아무 왕녀나 허겁지겁 맞아들여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굳이 말을 그렇게 비꼬듯이 했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었지만...[20] 다행히 자식의 금혼령은 후대에 가면서 풀린 것으로 추측이 되는데 첫째 아들 이근건과 당시 태종이 정신옹주의 남편으로 원한 이근수가 자식을 남겼다. 그러나 이근강의 자식 중 일부는 연안 이씨에서 안산 이씨 경기계로 분적하고 나머지는 수재공파로 연안 이씨에 남았다. 외에도 이속의 손자 이인문과 이인충 형제는 모두 과거에 급제했고 이들의 후대 중 예조•이조판서를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어 기로소에 들어간 인현왕후의 진외증조부 연평부원군 이광정과 숙종의 신임을 받은 남인으로 이조판서, 판중추부사를 지낸 이관징도 나오는 등 다행히 이속의 수난이 후대까지 내려오지 않았다.[21] 이 때문에 성삼문의 아내와 딸을 노비로 받기도 했다.[22] 덤으로 보자면 '감히' 왕이 보낸 의녀를 못 들어가게 했으니 이것 역시도 죄가 된다고 할 수 있다.[23] 왕조시대 임금을 속이는 건 기군망상이라고 해서 역모급으로 간주되었다.[24] 효정옹주이모란 설과 궁중 내 해결사라는 설이 있다.[25] 이를 볼 때 은대의 배후에 중종이 있었거나, 꼭 그러진 않았어도 딸의 불행한 결혼 생활의 원인 중 하나인 풍가이를 죽이고 싶어서 벼르고 있었는데 은대가 대신 죽게 만들었으니 잘 죽여줬다고(...) 생각해서 비호해주었을 가능성도 있다. 정작 풍가이도 조의정의 강요로 그의 첩이 된 희생양이였으나, 만악의 근원인 조의정에겐 정치적인 이유+효정옹주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중종의 외손자)의 안위 때문에 중종이 아무리 이를 갈아도 귀양 그 이상의 벌을 내릴 수 없었던 걸 고려해 보면 만만한 풍가이 쪽에게 화풀이를 한 걸지도.[26] 당시에도 스토리 이해를 통해 왕자가 아니라 부마임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었지만, 그런 익숙하지 못한 단어까지 사용해야 하냐며 고지식한 사람 취급당하곤 했다.[27] 김용춘이라고도 한다.[28] 오국공주(吳國公主) → 위국공주[29] 월국공주(越國公主) → 조국공주[30] 실사 영화판에서는 자스민이 왕위를 물려받은 뒤에 결혼하여 국서가 되었다.[31] 이 당시에는 옛 마산시가 옛 창원시울산시보다 인구가 많았다.[32] 마산합포구, 마산회원구.[33] 두 도시 사이에 낙동강이 흐르므로 낙동강 시리즈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