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노스 3세

 


[image]
로마노스 3세가 세겨진 은화
두 번째 사진 : 이탈리아 모데나 에스턴스 장서고의 로마노스 3세 초상화
'''제호'''
로마노스 3세(Ρωμανός Γ΄)
'''휘'''
로마노스 아르이로스(Ρωμανός Αργυρός)
'''생몰년도'''
968년 ~ 1034년 4월 11일
'''재위 기간'''
1028년 11월 15일 ~ 1034년 4월 11일
1. 개요
1.1. 생애
1.1.1. 황제 즉위 이전
1.1.2. 강요에 의한 제위
1.1.3. 황제 로마노스 3세
1.1.3.1. 내치
1.1.3.2. 외치
1.2. 의문의 죽음


1. 개요


동로마 제국의 황제. 1028년 11월 15일 아들이 없었던 콘스탄티노스 8세의 딸인 조이와 결혼하여 제관을 쓴 후 재위 6년간 나름대로 노력했으나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1.1. 생애



1.1.1. 황제 즉위 이전


로마노스는 968년에 태어났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전통적인 귀족 가문인 아르기로스 가문 출신으로, 그의 할아버지는 로마노스 1세 황제의 딸 아가타와 결혼한 로마노스의 아들이었다. 로마노스는 파트리키우스였고 고등 법정의 최고 판사를 맡아 이단으로 지정된 종파들을 박해했다. 이후 그는 하기아 소피아 성당의 관리자를 역임했다. 콘스탄티노스 8세 시기, 로마노스는 수도의 행정 장관을 맡았다.

1.1.2. 강요에 의한 제위


1028년, 콘스탄티노스 8세의 병세가 악화되면서 후계자 문제가 화두에 올랐다. 콘스탄티노스는 자신의 딸 조이와 결혼하는 이를 황제의 자리에 올리기로 했다. 당초 그는 콘스탄티노스 달라세노스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 콘스탄티노스는 사자를 보내 그를 급히 콘스탄티노플로 소환하려 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수도의 관료들은 아나톨리아 귀족이 다시 득세하기를 바라지 않아서 거세게 항의했다. 콘스탄티노스는 이 반발에 버티지 못하고 즉각 또 한 명의 사자를 파견해 수도로 오고 있던 달라세노스에게 더 이상 올 필요가 없다는 전갈을 전했다. 한편 관료들은 고등 법원의 최고 판사, 하기아 소피아의 관리자, 수도의 행정 장관을 맡고 있는 원로원 의원인 로마노스가 여러 모로 황제의 적임자로 평가하고 후보로 추천했다.
당시 로마노스는 아내와 결혼한 지 오래였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누리고 있는 육순의 노인이었으나 후보로 추천된 이상 그런 것은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콘스탄티노스 8세는 로마노스와 그의 부인을 체포해 자신 앞에 끌고 오게 했다. 여기서 로마노스는 두 가지 선택 사항을 듣게 된다. 당장 지금의 부인과 이혼하고 딸인 계승권자 조이와 결혼하여 부제를 거쳐서 단독 황제의 자리에 오르거나, 아니면 두 눈을 뽑히는 동로마 제국의 유서 깊은 형벌을 받던가.[1] 우리 나라로 따지면 6촌 형님[2] 되는 콘스탄티노스가 죽기 직전이라 이렇게 이지선다를 건 것이다.
로마노스는 아내를 사랑했기에 이 사안에 깊은 고민에 빠졌으나 마찬가지로 남편을 사랑했던 아내는 망설임 없이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울면서 자신의 머리를 자르고는 수도원으로 들어가버린다. 결국 11월 10일에 조이와 결혼한 로마노스는 그 다음날에 자신의 장인인 콘스탄티노스의 임종을 지켜보았고, 15일에는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1.1.3. 황제 로마노스 3세



1.1.3.1. 내치

로마노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자신의 롤모델로 여기고 그처럼 '철학자 황제'가 되고 싶어했다. 당대의 역사가이며 로마노스와 대면한 적이 있었던 미카일 프셀루스는 로마노스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는 그리스 문학에 익숙했고 이탈리아인들의 문학 작품에도 소양이 있었다.그의 말쏨씨에는 기품과 더불이 위엄이 흘러넘쳤다. 어느 모로 보나 그는 황제로서 당당한 위풍을 지닌 사람이었다. 자신의 폭넓은 지식을 자랑하는 것은 크게 과장되었지만, 그래도 그는 과거의 위대한 안토니네스[3]

를 본받아 (중략) 학문의 연구와 전쟁 기술의 두 가지에 특히 관심을 기울였다. 하지만 전쟁 기술에 관해 그는 완전히 무지했고, 학문에 관해서도 깊은 지식을 지니지 못했다.

로마노스는 건축 사업에 많은 자금을 투자했고 교회와 수도원에도 거액의 자금을 기부했다. 소피아 대성당에 지급하는 연간 정부 보조금을 금 80파운드만큼 증액했고, 지역 공동체가 납부하는 세금에서 적자가 발생할 경우 수도원과 대지주가 메우도록 한 '알렐렝욘(allelengyon)'을 폐지했다. 또한 시민들에게 보너스를 지불했고 정부 채무자들을 대거 사면해 수백 명을 감옥에서 풀어주는 등 여러모로 민심을 사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아나톨리아 귀족들의 토지 겸병을 억제하려 했던 이전 황제들의 정책을 포기하고 귀족들이 자영농을 착취하는 걸 허용했다. 심지어 그는 악명 높은 징수 도급제까지 부활시켰다. 이것은 투기꾼이 일정한 금액을 주고 정부로부터 세금 징수를 대신할 권리를 사들인 다음 납세자들에게서 두 배 또는 세 배의 세금을 마음대로 징수하는 제도였다. 자영농들은 그 부담을 고스란히 짊어져야 했고 그 결과 제국군의 전통적인 기반인 자영농이 몰락했고 세금 기반도 허약해져 제국을 약화시켰다.
로마노스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처럼 역사에 오래 남을 건물을 짓고 싶었다. 그는 마르마라 연안으로 이어지는 일곱 번째 언덕 위에 페리블렙토스(Peribleptos), 즉 "만물을 굽어보는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거대한 성당을 건립했다. 그러나 프셀로스는 이 건물이 로마노스의 명성에 보탬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악영향을 끼쳤다고 기술했다.

그 행위는 신앙심에서 비롯되었으나 실은 수많은 악과 부정의 원인이 되었다. 성당에 들어가는 비용은 나날이 늘어갔다. 황제는 매일 공사에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기부금을 징수했고 건축을 제한하려는 사람에게는 화를 냈다. 그 반면에 새로운 장식이나 양식적 변화를 생각해내는 사람은 대번에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중략) 이 성당에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써야 했다. 그리하여 황실의 금은보화를 모조리 그 성당에 쏟아부었다. 기금이 고갈된 뒤에도 건축은 완성되지 않았다. 일부분을 부수고 일부분을 위에 덧쌓는 짓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로마노스는 이 성당의 부속 수도원을 추가로 건설하게 했는데, 이 수도원은 성당보다 규모가 커서 그 안을 채울 수도자의 수도 모자랄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은 반란을 일으키기 직전까지 이를 정도로 분노했다. 그러나 정작 수많은 자금과 인력을 동원해 건설한 페리블렙토스 성당과 부속 수도원은 흔적도 남지 않았고 현재는 성 게오르기우스에게 봉헌된 술루모나스티르 성당이 서 있다.

1.1.3.2. 외치

1030년, 로마노스는 알레포의 아미르를 공격하기 위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정했다. 그가 안티오크에 도착했을 때, 아미르가 대사를 보내 기존의 평화 조약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며 피해가 있다면 배상하겠다고 제의했다. 그러나 이미 개선식에 사용할 제관을 주문해 놓은 로마노스는 그 제의를 거부하고 알레포로 진군했다. 군대가 시리아에 이르러 좁은 고개로 막 들어서려 할 때 사라센군의 함성이 들리더니 갑자기 아미르의 병사들이 언덕의 양쪽 사면으로 내려왔다. 로마노스는 부관 한 명이 말을 오르게 해주고 자신을 경호해준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군대는 큰 타격을 입었다. 프셀로스에 따르면, 아미르의 군대는 적이 제대로 대항하지도 않고 도망치는 걸 오히려 깜짝 놀라 지켜봤다고 하다. 이리하여 바실리오스 2세 시기 최강의 군대로 손꼽히던 제국군은 불과 5년 만에 웃음거리로 전락했다.
며칠 후, 사라센 기병대 800명은 제국군에게서 노획한 전리품을 가득 실은 채 텔루크로 다가왔다. 그들은 황제가 전사했고 제국군 전체가 괴멸되었다는 과장된 소식을 전하면서 텔루크 군사 총독 게오르기우스 마니아케스에게 이튿날 아침까지 항복하지 않으면 보복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마니아케스는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이면서 사라센 진영에 많은 음식과 술을 보내주고 자신과 병사들은 동이 트자마자 항복하고 시가 소유한 금과 보물을 내놓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사라센군은 크게 기뻐하며 술을 마음껏 마셨다.
그러나 이것은 함정이었다. 마니아케스는 이튿날 새벽 기습을 가해 곯아 떨어진 사라센 기병 800명을 순식간에 도륙하고 모든 시신에서 코와 귀를 잘라냈다. 이후 그는 패주한 로마노스 황제를 카파도키아에서 만나 800개의 코와 1600개의 귀를 내놓았다. 그러자 황제는 크게 기뻐하며 마니아케스를 하(下) 메디아의 군사 총독으로 임명해 유르라테스 상류 유역의 모든 도시들을 다스리게 했다. 이후 마니아케스는 사라센군을 상대로 연전연승했고 1032년엔 에데사를 공략했다.

1.2. 의문의 죽음


1029년, 조이 황후의 여동생 테오도라는 불가리아의 페르시안과 결혼하여 황위를 찬탈할 음모를 꾸몄다. 이 음모는 조기에 발각되었고 페르시안은 실명 형을 받은 뒤 수도자가 되었지만, 테오도라는 처벌받지 않았다. 하지만 1031년에 그녀는 또 다른 음모에 연루되었고, 이번에는 음모의 주동자 콘스탄티노스 디오게네스와 함께 페트리온의 수도원에 강제로 수용되었다. 이렇듯 외부에서 그를 몰아내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 상황에서, 로마노스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 아내를 홀대하고 정부를 들인 것이다.
조이는 로마노스가 황제로 집권할 수 있게 해준 기반이었다. 로마노스도 처음에는 조이에게서 후계자를 생산하기 위해 최음제를 복용하고 특별한 비법을 행하고 부적을 지니고 주문을 외우는 등 온갖 애를 썼다. 하지만 당시 로마노스는 60세가 넘었고 조이도 50대였기 때문에 끝내 아이를 갖지 못했다. 그러자 로마노스는 아내를 무척 싫어해 한 방에 있는 것 조차 꺼렸고 정부를 뒀다. 또한 그는 아내가 국고에 접근하는 것도 금지했고 그녀에게 공식적으로 한도가 정해져 있는 보잘 것 없는 연금을 내줬다.
남편의 홀대를 받던 조이 황후는 1033년 어느 날 환관 요한네스 오르파노트르푸스의 남동생 미하일을 만났다. 조이는 잘생긴 미하일에게 한 눈에 반했다. 이후 그녀는 미하일을 자주 자신의 침소로 부르다가 환관 요한네스에 따라 남편을 제껴놓고 미하일을 황제로 세울 음모에 가담했다. 한편 로마노스는 미하일을 의심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개인 시종으로 삼아 자주 불러 다리와 발을 주무르게 했다.[4] 이런 그를 답답하게 여긴 누이 풀케리아가 황제에게 세간의 소문을 전하고 그의 목숨을 노리는 음모가 있을지 모른다는 경고를 전했다. 이에 황제는 미하일을 불러 자신이 들은 이야기가 뜬소문이라는 걸 성스러운 유물에 서약하라고 명령했다. 미하일이 선뜻 그렇게 하자 황제는 완전히 마음을 놓았다.
그러던 1034년 성금요일[5] 전날의 목요일, 로마노스는 목욕탕에서 갑자기 죽었다. 프셀로스는 로마노스 황제가 사망한 정황에 대한 세간의 소문을 듣고 자신의 역사서에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황제는 이튿날에 치러질 공공 행사를 몸소 준비하고 있었다. 동이 트기 전, 그는 침소 근처에 있는 아름답게 장식된 대형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기 시작했다. 시중을 드는 사람은 없었지만 당시에는 분명 죽음의 기미가 전혀 없었다. (중략) 그는 머리와 몸을 씻은 다음 숨을 크게 쉬면서 수영을 할 수 있는 중간 깊이의 목욕탕으로 갔다. 그는처음에 헤엄을 치고 즐겁게 놀면서 휴식을 취했다. 잠시 후 그의 명령을 받고 종자들 몇이 와서 황제를 쉬게 하고 옷을 입혀 주었다. 이들이 황제를 죽인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전하는 모든 사람들은 황제가 평소의 습관대로 물에 뛰어들었을 때 종자들이 물 밑에서 오랫동안 그의 머리를 붙잡고 있었으며, 그를 목졸라 죽이려 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그런 뒤에 그들은 갔다.

나중에 그 불행한 황제는 물 위에 둥둥 떠있는 채로 발견되었다. 그는 아직 약하게 숨을 쉬고 있었고 도와 달라는 듯한 몸짓으로 팔을 뻗은 자세였다. 누군가가 안쓰러운 마음에 그의 팔을 잡고 목욕탕에서 꺼내 소파에 뉘었다. 그를 처음 발견한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현장으로 달려왔다. 황후는 시중도 받지 않고 달려와서 짐짓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한동안 남편을 바라보다가 살아날 가능성이 없다는 것에 만족하고는 자기 처소로 돌아갔다. 로마노스는 신음하면서 이곳저곳을 돌아보았다. 그는 말을 할 수 없어 표정과 몸짓으로 의사를 표현하려 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눈을 감아 버렸다. 그의 호흡은 점점 빨라졌다. 갑자기 그의 입이 열리더니 검은 색의 걸쭉한 물질이 흘러나왔다. 그는 두세 차례 숨을 헐떡이고는 숨을 거두었다.

또다른 역사가 스킬리체스는 로마노스가 황궁의 목욕탕에서 미하일이 보낸 사람들에 의해 교살되었다고 기술했고 에데사의 마테오는 그가 황후에게 독살되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당시 로마노스가 쇠약해졌기 때문에 목욕하던 도중 심장마비 또는 발작으로 사망했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프셀로스가 나중에 황제의 시신을 직접 보고 기록한 내용을 보면 로마노스가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노인의 얼굴은 야위지 않고 기묘하게 부풀어 올랐고 아무런 색깔이 없어 독살당한 자와 똑같았으며 머리털과 수염이 드문드문 난 모습은 마치 수확이 끝난 뒤의 빈 들판 같았다."

이후 조이는 자신의 정부 미하일을 황제 미하일 4세로 옹립했고 자신이 미하일의 황후라고 선포했다. 이에 모든 고위층 인사들은 황제 부부 앞에서 이마를 바닥에 대고 경배의 뜻으로 미하일의 손에 입을 맞췄다. 그 뒤 로마노스의 시신은 뚜껑이 없는 관에 담긴 채 콘스타니노플의 거리를 행진한 후 자신이 세운 페리블렙토스 성당으로 운구되었다. 이때 그에게 불만이 많았던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고 한다.

[1] 사실 이전에도 테오도라#s-2.3와 결혼 얘기가 나왔었지만, 먼 친척이라는 이유로 고사했었다.[2] 로마노스 1세 레카피노스의 딸의 아들의 아들이 바실리오스 2세콘스탄티노스 8세 형제이며, 또 다른 딸은 아르이로스 가로 시집갔고, 그렇게 낳은 아들의 아들이 로마노스 3세다.[3]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4] 당시 로마노스는 다리 상태가 안 좋아서 걷기도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5] 부활전 전의 금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