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전북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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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전북지역본부'''
Korean Confederation of Trade Unions Jeonbuk Regional Council
'''약칭'''
민주노총전북본부(한), KCTUJBRC(영)
'''창립일'''
1996년 2월 10일
'''위치'''
전라북도 전주시 벚꽃로 57, 3층
'''임원진'''
13대
'''본부장'''
박두영
'''수석부본부장'''
김기자
'''사무처장'''
조혜진
'''조합원 수'''
44,293명 (2020년 1월)
'''공식 사이트'''
홈페이지
페이스북
'''부설기관'''
법률지원센터 , 전북노동정책연구원
1. 개요
2. 역사
2.1. 전북지역 민주노조 운동의 태동과 87년 노동자대투쟁
2.2. 전민노련에서 전북노련으로
2.3. 전노협 건설
2.4. 민주노총전북본부 출범
3. 주요사건 및 논란
3.1. 더불어민주당 홍영표 원내대표와의 간담회 논란
3.2. 전라북도지사 면담 요청 중 강제 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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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산업별 노동조합연맹인 민주노총의 전북지역 산하조직. 규모에 있어 전북지역 '''제1노총'''이다.

2. 역사



2.1. 전북지역 민주노조 운동의 태동과 87년 노동자대투쟁


전북지역은 산업화의 지체로 영남지역에서 이미 중화학산업의 대기업들이 주된 업종으로 자리 잡은 1980년대 초까지도 섬유, 음식료, 고무 등의 경공업 사업장이 주를 이루었다. 전북지역에서 목적의식적인 노동운동이 시작된 것은 1978년 가톨릭노동청년회(JOC)가 출범하면서부터이다. 이들은 1981년 이리 창인동 성당에 ‘노동자의집’을 설립하고 노동야학을 운영하면서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법을 공부하고 공장의 노동조건과 비인간적인 대우에 대한 토론을 하면서 노동자의식을 고취시켰다.
법적으로 한국노총을 상급단체로 하지 않고는 노조를 설립할 수 없었기 때문에, 1980년대 초의 자생적 민주노조운동은 한국노총을 통하지 않고는 태동 자체가 불가능했다. 1986년에 시작된 민주노조운동은 JOC와 야학활동 등을 통해 의식화된 노동자들이 주도해서 이루어지거나(백양섬유), 학생운동 출신 활동가들이 노동운동으로 이전하여 계획적으로 추진한 것(세풍합판)으로 목적의식적 민주노조운동이었다.
1987년 6월 민주화투쟁을 전후하여 정치적 공간이 개방되자 전북지역에서도 노동운동이 대중적으로 분출했다. 전북의 87대투쟁은 4월부터 시작된 이리 후레아훼숀 노동자들의 노조민주화투쟁으로 시동이 걸렸고 8월 초 전주 원일기업에서 촉발된 택시노동자들의 노조결성과 파업, 가두시위로 불이 붙었다. 8월 초 군산의 우민주철, 이리 동양물산, 전주 백양에서도 농성과 파업이 시작되어 9월 초까지 거의 모든 공장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을 경험할 정도로 연일 이어졌다. 임금인상 요구에 회사 측이 1~2일 만에 타협하여 끝나버린 경우도 많지만 군산의 세풍합판, 세풍제지, 우민주철, 군산여객, 우성여객, 서안주정과 이리의 동양석재, 이리모방, 김제의 풍원제지 등에서는 파업 투쟁이 노동조합 결성으로 연결되었다.

2.2. 전민노련에서 전북노련으로


87대투쟁 과정에서는 그전에 이미 태창메리야스 투쟁과 세풍합판 투쟁 등을 통해 민주노조운동의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던 노동자의집으로 상담과 지원요청이 쇄도했다. 노동자의집에서는 이들의 노조결성을 지원하면서 1987년에 설립된 신규노조들을 하나로 묶어 1987년 12월 6일 ‘전북민주노조연합회’(이하 전민노련)를 결성하도록 주선한다. 1987년 8월 이후 세풍합판, 세풍제지, 후레아훼숀 등의 노조가 중심이 되어 간담회를 진행했고, 1987년 10월 11일 군산지역 노조를 중심으로 대표자회의를 개최했다. 같은 해 12월 6일 군산지역 제조업체 7개 노조와 이리지역 2개 노조 등 총 9개 노조가 참여하여 전민노련을 결성했다. 전민노련은 마창노련(1987년 12월 14일)보다 앞서 결성된 것으로 사실상 전국 최초의 지역노동조합협의회였다.
그러나 전민노련은 민주노조 지역연대체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다지지 못하고 와해되고 만다. 한국노총 전북협의회는 전민노련의 결성에 대응해 1988년 4월 화학연맹 전북사무소를 개설하면서 전북사무소장 선거를 실시했다. 이 선거에서 전북사무소장으로 전민노련 의장이었던 고진곤 세풍제지 위원장이 선출되었고, 군산지역 화학노조들이 대거 한국노총으로 이탈했다. 전민노련의 중심지였던 군산지역은 그 후로도 상당기간 민주노조 활동이 정체되는 어려움을 경험한다.
전민노련의 방황에도 불구하고 1988년 들어 전북지역의 대중적 노동조합운동은 이리, 전주지역으로 확산되면서 활발하게 진행된다. 1987년 대투쟁이 주로 임금인상과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로 내건 자연발생적 파업의 형태를 띠었던 데 비해 1988년에는 대부분의 투쟁이 노동조합의 결성과 사수투쟁으로 연결된다. 특히 창신공업사 노동부 점거투쟁, 백양나염 위장폐업철회투쟁, 후레아훼숀 임금인상투쟁을 계기로 지역 내 연대투쟁은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이리 쪽의 노동자의 집과 신생노조들에서 문제제기를 하면서 고진곤은 1988년 5월 31일 전민노련 의장을 사임했다. 전민노련은 사실상 와해되지만 그 가운데서도 5월 1일 노동절쟁취투쟁을 함께하고 노조들의 간부수련회를 공동으로 개최하면서 지역연대의 기초를 돈독하게 다져나가고 이를 기반으로 전북노동조합연합회(전북노련)를 출범시킨다.
전민노련은 전북노동조합연합회(전북노련)로 이름을 변경 1988년 8월 21일에 출범했다. 출범 당시 전북노련은 22개 노조(조합원 5,416명, 대의원 46명)가 참여했으며, 군산, 이리, 전주에 시협의회를 두고 신규노조 간부들의 공동수련회, 공동교육 등을 실시하여 연대의식을 강화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전북노련 또한 3개월 만에 초대의장이었던 이학주가 노동운동 상의 견해 차이로 사퇴했고, 이후 세풍합판, 백화양조, 성림협력, 선우목재 등 군산지역 화학사업장이 대부분 전북노련을 탈퇴하고 한국노총으로 결합했다. 이를 계기로 전북노련과 한국노총 사이의 경계 나누기가 명확해지기도 했다.

전민노련
전북노련
공간
군산 중심
익산 중심
조직
대기업 화학사업장
중소기업 사업장
위상
8개 신규노조 위원장 정례모임
27개 노조, 7천여 명 조합원이 회원
87년 대투쟁의 성과를 조직적으로 수렴하는 과정에서 전국적으로 노총민주화론과 제2노총건설론이 대립되었는데, 전북지역 노동운동계에서는 군산 노동자의 집 활동가들이 장명국 석탑노동연구소장과 연계하여 노총민주화론을 주장했고, 이리 노동자의 집 및 전북노련 집행부는 제2노총건설론을 견지했다. 고진곤 당시 전민노련 의장이 한국노총 선거에 참여하도록 한데에는 군산 노동자의 집의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전북지역에서 한국노총 화학연맹의 세력이 약하기 때문에 전민노련이 대거 참여하여 주도권을 장악하면 한국노총을 민주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한 축에 있었다. 하지만 고진곤의 한국노총 행은 결과적으로 민주노조 운동을 침체시키면서 후퇴시켰고, 고진곤은 30년 가까이 지난 현재까지도 한국노총 군산지부 의장, 화학노련 전북위원장 직을 맡고 있는 등 한국노총 민주화와는 거리가 먼 행보를 보였다. 이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이리 노동자의 집 및 전북노련 집행부와 석탑계 활동가 사이에도 상당기간 갈등이 발생하게 된다.

2.3. 전노협 건설


1988년 12월 22일~23일 전주에서 각 지역 지노협과 업종협의회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지역·업종별 노동조합 전국회의’ 제1차 회의가 개최되어 전국적 노동조합 조직 건설을 추진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위해 ‘전국회의’ 산하에 ‘노동법 개정 및 임금인상 투쟁본부(전국투본)’를 설치했으며 전국투본 본부장으로 단병호 서노협 의장을 선출했다. 전국회의는 전국을 순회하며 회의를 개최하면서 1990년 1월 22일 전노협을 결성하기에 이르렀고, 그 과정에서 전국투본은 민주노조의 구심체로 작용한다.
전북노련은 심각한 갈등을 겪으면서 어려움을 경험했지만 1989년 7월 현주억 사무처장이 전북노련 2대 의장을 맡으면서 전북노련은 전노협 건설 움직임에 본격적으로 합류하고 점차 한국노총과는 선을 긋고 민주노동조합의 정체성을 확립해나가게 된다. 하지만 군산지역의 화학노조, 전주, 이리의 택시노조 등을 민주노조 진영으로 견인해내지 못했고, 병원노조나 언론노조 등의 사무전문직 업종노조들도 전노협으로 동참시키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
1990년 이후 국가와 자본은 전노협을 불법좌익단체로 규정하여 대대적인 탄압을 벌인다. 전북지역에도 1990년 3월에는 소위 노동부 업무조사지침이 내려와 전주의 서호주정노조, 군산의 서해물역노조가 와해되고 말았으며, 삼립테코(성일통상)만이 전북노련과 결합하여 간부 전원이 업무조사지침을 거부함으로써 민주노조를 사수해냈다. 또한 국가와 자본은 관계기관 대책회의를 통해 중소기업이 많은 전북노련 산하 단위노조들에 대해 교섭회피, 위장폐업, 직장폐쇄 등으로 대응하면서 탄압을 심화시켰다. 국가의 지원에 힘입은 자본 측의 적극적인 공세로 썬전자, 백양나염, 에이스제과 등 장기투쟁사업장 문제 해결이 어려워져 전북노련에 타격을 입기도 했다.
‘전북노련가입=집중탄압’으로 인식되어 1990년대 이후 신규결성된 노조들은 전북노련에 가입하기를 꺼리기도 했다. 전북노련이나 운동단체(노동자의 집 등)들의 지원에 힘입어 새로 결성되거나 민주화된 노동조합들은 전북노련에는 가입하지 않고 별도로 ‘전북노동조합연대모임’(이하 전북연대모임)을 결성한다. 전북연대모임의 노조들은 한국노총과는 선을 긋고 전북노련과 5월 1일 노동절 행사를 함께하는 등 느슨한 연대관계를 유지했다. 이들 중 대다수는 1993년 전북노대 결성 시 합류하거나 민주노총 결성 시에 합류한다.

2.4. 민주노총전북본부 출범


이런 탄압 속에서 전북지역의 민주노조운동은 위기를 맞게 된다. 출범 당시 22개 노조로 시작한 전북노련은 1990년대 초에 가입 노조수가 10개 내외로 줄어들었다. 1992년 이후 단위노조 활동은 거의 중단되고 노조 위원장 선거에 출마자가 없는 경우도 속출했으며, 전북노련 운영위원회가 무산되기도 했다. 9명이었던 상근자가 1993~1994년부터는 1명으로 축소됐고, 조합비만으로는 운영이 어려워 별도의 재정사업으로 겨우 꾸려나갔다.
전북노련은 이러한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지역 내 민주노조와의 연대와 통합에 역점을 둔다. 전북 지역에는 비제조업 분야의 민주노조로서 1987년 이후 예수병원노조 설립을 시작으로 병원노련과 언론노조, 전교조 등이 설립되어 있었다. 1989년 3월 20일에 전북지역 의료보험 노조 결성되었고, 6월 15일에는 전북교직원노동조합 전북지부, 8월 12일 전국병원노련 전북지부가 결성되었다.
1991년 11월 7일 전북노련의 제안으로 병원노련, 전교조 전북지부, 의료보험노조, 언론노조, 전북연대모임 등이 참여하여 ‘ILO 기본조약 비준 및 노동법 개정을 위한 전국노동자공동대책위 전북공대위’ 구성을 준비했다. 발족식 당일 병원노련의 불참선언으로 전북지역공대위는 구성되지 못했지만, 이후에도 전북노련은 미가입노조 및 업종노조와의 연대에 지속적으로 노력했다. 1992년 노동절 행사에는 전북노련, 병원노련, 전교조, 지역의료보험노조, 전북연대모임 등에서 1,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했고, 1993년 3월 노동자의 집 10주년 기념행사에서는 연대가 더욱 구체적으로 논의되었다. 이후 전북노련의 제안으로 1993년 8월 ‘전북노조대표자모임(전북노대)’이 결성된다. 전북노대는 의보노조의 염경석 위원장과 전북노련의 이송준 의장을 공동대표로 선출했으며, 1994년 12월 현재 가입노조 15개, 조합원 2,600명, 참관노조 5개 170명으로 구성되었다.(가입노조 : 국제정비, 한성공업, 한국거울, 삼미정공, 큰길, 대우전자부품정주지부, 두산유리, 훼숀, 전북대, 의보노조, 참관노조:세풍제지, 신아, 큰길식품, 이리모방, 한국베트로텍스)
이어 1994년 10월 19일 전주가톨릭센터에서 15개 단위노조 대표와 간부들이 모여서 ‘민주노총 건설을 위한 전북지역 추진위’를 결성하고 민주노총건설활동을 대중적으로 전개해나간다. 그 결과 1996년 2월 2일 마지막 대의원 대회를 끝으로 전북노련은 공식적으로 해산된다. 그리고 1996년 2월 10일 민주노총전북본부 창립 대의원 대회(13개 산별대상, 34개 노조, 대의원 130명, 조합원 8,461명)가 개최됨으로서 민주노총이 출범하게 되었다.
민주노총전북본부는 98년 51개 노조 13,231명에서 2000년 70개 노조 22,142명, 2020년 44,293명으로 성장했다.(2000년대 이후 많은 노동조합이 산별노조로 전환되면서 노동조합의 개수를 다루는 게 무의미해졌다.)

3. 주요사건 및 논란



3.1. 더불어민주당 홍영표 원내대표와의 간담회 논란


2018년 6월 국회에서 최저임금 인상 개정안을 통과한 뒤, 민주노총은 더불어민주당을 향해 조직적 반발에 돌입했다.
민주노총전북본부는 총선 유세차 군산을 방문한 더불어민주당 홍영표 원내대표를 찾아가 최저임금 개정 등에 대한 간담회를 했다.*
간담회에서 홍영표 원내대표는 민주노총전북본부 조합원들에게 문재인 찍었냐고 묻거나 민주노총이 10년간 못 한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을 우리가 1년 만에 했다고 자평하는 등의 발언을 했다. 민주노총전북본부는 성명을 발표해 홍영표 대표의 발언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투표하지 않은 국민은 여당 더불어민주당을 비판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을 내포하는 발언이고 현 정규직 전환 정책은 전환률이 30%에 불과해 여전히 공공기관에 비정규직이 넘쳐나고 있는데 더불어민주당이 노동 현장은 돌아보지 않은 채 탁상공론만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3.2. 전라북도지사 면담 요청 중 강제 퇴거


전북도청에서 간접고용으로 일하던 민주노총전북본부 조합원들이 문재인 정부의 정규직 전환 정책에 따라 정규직으로 전환되었는데 전환 이후 오히려 임금이 삭감되고 정년이 단축되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와 관련해 전라북도지사 면담을 요청하며 민주노총전북본부 노병섭 본부장이 비서실을 찾았는데 전라북도는 청원경찰을 동원하여 이들을 강제퇴거시킨다. 단신으로 관공서를 방문한 제1노총 대표자를 강제퇴거시킨 것은 유래가 없는 일. 이 때문에 민주노총전북본부와 전라북도 사이에 극한 대립이 초래되었고 퇴거 후 20여 일이 지난 5월 15일에 면담이 이루어졌다.*
이 날 면담에서 양측은 임금하락 보전 방안을 마련하는 것 등을 합의했다고 알려졌으나 그 이후 전라북도가 합의를 이행하지 않아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