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로반 약시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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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밀로반'''
밀로반 약시치는 지금은 몬테네그로에 위치한 콜라신에서 태어났다. 1929년에 데뷔하였지만 그는 뛰어난 기량으로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A매치에도 데뷔하였다. 그의 A매치 데뷔전은 1930년 4월 13일. 불가리아를 상대로 치렀으며 유고슬라비아는 불가리아를 6대1로 짓밟았다. 여기에서도 그는 유감없이 기량을 발휘하며 초대 월드컵에 참가하는 대표팀에도 선발이 되었고, 주전 골키퍼로 낙점되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우루과이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였다. 브라질과의 첫 경기에서 약시치는 뛰어난 기량으로 브라질의 공격을 1골로 막아내는데 성공,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당시2조의 시드 배정국이 브라질이었고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의 오랜 유럽 여행으로 인한 피로가 심했음까지 감안하면 놀라운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4] 브라질은 결국 이 패배를 극복하지 못하고 유고슬라비아에 밀려 4개의 시드 배정국 중 유일하게 짐을 싸고 말았다. 덕분에 유고슬라비아는 유럽팀 중 유일하게 준결승전에 진출하였으며 약시치는 당시 월드컵을 취재하던 기자들에게 위대한 밀로반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비록 호스트 우루과이를 만나 6대1로 대패하기는 했지만 전체적인 약시치의 활약은 대단했다. 그는 총 9경기의 국가대표팀 경기를 치렀으며 마지막 경기는 1934년 9월 2일,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경기였다.
프로팀에서는 거의 모든 커리어를 SK 바스크에서 보냈으며 우승 트로피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그는 은퇴 이후에 직접 감독을 맡지는 않았지만 축구계와의 끈을 놓지는 않았다. 1945년, 약시치는 베오그라드에서 한 축구 클럽의 창단에 공헌하는데 그 클럽이 바로 FK 츠르베나 즈베즈다였다. 그는 팀에서 기술 감독으로 일하면서 유고슬라비아 축구계에서 축구 코치 협회의 회장을 맡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는 1953년, 카이로에서 즈베즈다의 원정길에 동행하던 중 심장마비로 인해 44살의 나이에 예기치 않은 죽음을 맞이했다.
골키퍼로서 키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강한 피지컬을 가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최고의 장점은 용기와 빠른 반사 신경이었다.
'''위대한 밀로반'''
1. 생애
1.1. 선수 생활
밀로반 약시치는 지금은 몬테네그로에 위치한 콜라신에서 태어났다. 1929년에 데뷔하였지만 그는 뛰어난 기량으로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A매치에도 데뷔하였다. 그의 A매치 데뷔전은 1930년 4월 13일. 불가리아를 상대로 치렀으며 유고슬라비아는 불가리아를 6대1로 짓밟았다. 여기에서도 그는 유감없이 기량을 발휘하며 초대 월드컵에 참가하는 대표팀에도 선발이 되었고, 주전 골키퍼로 낙점되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우루과이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였다. 브라질과의 첫 경기에서 약시치는 뛰어난 기량으로 브라질의 공격을 1골로 막아내는데 성공,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당시2조의 시드 배정국이 브라질이었고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의 오랜 유럽 여행으로 인한 피로가 심했음까지 감안하면 놀라운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4] 브라질은 결국 이 패배를 극복하지 못하고 유고슬라비아에 밀려 4개의 시드 배정국 중 유일하게 짐을 싸고 말았다. 덕분에 유고슬라비아는 유럽팀 중 유일하게 준결승전에 진출하였으며 약시치는 당시 월드컵을 취재하던 기자들에게 위대한 밀로반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비록 호스트 우루과이를 만나 6대1로 대패하기는 했지만 전체적인 약시치의 활약은 대단했다. 그는 총 9경기의 국가대표팀 경기를 치렀으며 마지막 경기는 1934년 9월 2일,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경기였다.
프로팀에서는 거의 모든 커리어를 SK 바스크에서 보냈으며 우승 트로피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1.2. 이후
그는 은퇴 이후에 직접 감독을 맡지는 않았지만 축구계와의 끈을 놓지는 않았다. 1945년, 약시치는 베오그라드에서 한 축구 클럽의 창단에 공헌하는데 그 클럽이 바로 FK 츠르베나 즈베즈다였다. 그는 팀에서 기술 감독으로 일하면서 유고슬라비아 축구계에서 축구 코치 협회의 회장을 맡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는 1953년, 카이로에서 즈베즈다의 원정길에 동행하던 중 심장마비로 인해 44살의 나이에 예기치 않은 죽음을 맞이했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골키퍼로서 키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강한 피지컬을 가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최고의 장점은 용기와 빠른 반사 신경이었다.
[1] 현재 국적으로 따지면 몬테네그로이다.[2]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3] 1933년 팀명을 바스크로 변경.[4] 브라질선수들이 한 팀으로 뭉치지 못한 것도 한 원인이다.